위치 : 동남아시아
면적 : 197만 7179㎢
인구 : 2억 934만 2000명(2000)
인구밀도 : 108.9명/㎢(2000)
수도 : 자카르타
정체 : 공화제
공용어 : 인도네시아어
통화 : 루피아(Rupiah)
환율 : 8,800 루피아 = 1 달러(2000.10)
1인당 국민총생산 : 640달러(1998)
나라꽃 : 벗꽃(Jasuminum sambac)
면적 190만 7179㎢. 인구 2억 934만 2000명(2000). 인구밀도 108.9명/㎢(2000). 인도네시아의 정식 명칭은 인도네시아 공화국(Republic of Indonesia)이다. 제2차 세계대전 전에는 네덜란드령(領) 동(東)인도였으나, 1945년 8월 독립하였다. 국명은 19세기 중엽에 영국의 언어학자인 J.R.로건이 명명한 것으로 '인도 도서(Indo Nesos)'라는 뜻이다. 현지인들은 '누산타라(Nusantara)'라는 명칭을 주로 사용하는데 이는 중세 때 자바의 주민들이 사용한 명칭으로 역시 '많은 섬들의 나라'라는 뜻이다.
동남아시아에 널리 퍼져 있는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세계 최대의 도서국가이다. 서쪽의 인도양과 동쪽의 태평양 사이에 위치하면서 북쪽의 아시아 대륙과 남쪽의 오세아니아 대륙을 연결하는 중간지대의 이른바 호아지중해(濠亞地中海)에 떠 있다. 이처럼 동서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각 방면에 있어 문화적·민족적인 교류와 이동이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지역이다. 이 지역 도서군(島嶼群)은 일반적으로 말레이제도(諸島) 또는 말레이시아 등으로 불리는데 인도네시아는 그 중 필리핀을 제외한 대부분을 차지한다.
1. 자연
1) 지형
인도네시아는 서쪽 끝의 수마트라섬·자바섬에서 북동쪽의 할마헤라섬까지 약 5,100km에 걸치는 호상(弧狀)의 순다열도와 그 내부에 위치한 보르네오섬(칼리만탄), 셀레베스섬(술라웨시) 등의 큰 섬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해역은 테티스해(海) 구조대와 환태평양 구조대가 이어지는 곳으로 지반의 변동이 격심했던 지역이다. 현재 이들 제도(諸島)에 의해 둘러싸인 바다는 수심 50m 이하의 얕은 바다로, 이른바 순다 해붕(海棚)을 형성하고 있다. 이 해붕과 오스트레일리아 북서부의 사풀 해붕은 마카사르·롬보크 양 해협을 연결하는 월리스선(線)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순다열도 및 몰루카제도에는 현재 화산활동이 현저하게 나타나고 있는데 화산의 수가 전국을 통틀어 400개에 달하며, 이 중 활동 중인 화산은 78개이다. 화산은 특히 수마트라섬과 자바섬에 집중되어 있으며 보르네오섬과 셀레베스섬에는 극히 적다. 이 화산들은 자주 발생하는 폭발과 지진으로 인간생활에 직접적으로 큰 영향을 준다.
인도네시아는 비가 많은 지대이므로 토양은 라테라이트 토양이나, 산지에서 범람한 물질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 이 경우 화산암질토양은 수성암(水成岩)토양에 비하여 비옥도가 높아 농사에 유리하다. 화산암을 거의 포함하지 않는 보르네오섬 대부분과 셀레베스섬 중부에 인구가 희박한 것으로 미루어볼 때, 화산암질 토양의 분포는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에 인구가 밀집하는 현상의 자연적 원인이 된다. 인도네시아의 농업이 거름을 거의 주지 않고도 이루어질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화산은 3,000m를 넘는 것이 대부분이며, 자바섬 최고의 세메루산(3,676m)을 비롯하여 롬보크섬의 린자니산(3,726m) 등이 대표적이다. 높은 산들 사이에는 많은 고원 및 분지(盆地)가 이어지며 수마트라섬 서안의 파단 고원, 자바섬의 반둥, 말랑 고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 고원에서는 기온이 체감률에 따라 낮아지므로 거주에 유리하다. 수마트라와 보르네오 지역의 산지와 해안부근에 있는 정글에는 넓은 저습지대(低濕地帶)가 분포하며 그 중간을 많은 하천이 곡류한다. 수마트라섬의 무시강(江)·잠비강, 보르네오섬의 카푸아스강·바리토강 등은 길이에서 인도네시아의 유수한 하천에 해당한다.
2) 기후
인도네시아의 섬들이 적도를 중심으로 북위 5°에서 남위 10° 사이에 위치하므로 완전한 열대성 기후를 나타내며 동남아시아 계절풍대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인다. 일반적으로 연중 높은 기온을 나타내 거의 전지역이 평균기온 25∼27℃를 기록하며 적도변의 중앙지대에서는 월별 변화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강수량은 몬순의 영향을 크게 받아 중심부에 해당되는 적도 부근의 연중 강우지역을 제외하면 대체로 건기(乾期)와 우기(雨期)의 구별이 뚜렷하다. 주요지역의 연평균강수량은 폰티아나크(보르네오섬) 3,175mm, 파당(수마트라섬) 4,172mm, 자카르타(자바섬) 1,755mm이며, 소순다열도의 동쪽은 훨씬 더 건조하다.
3) 생물
인도네시아는 ‘적도에 걸려 있는 에메랄드 목걸이’라는 표현처럼 군도 전체가 고온다습하여 많은 식물로 뒤덮여 있다. 식물 분포는 고도(高度)에 따라 수직적 변화가 크게 나타나, 해안의 무성한 습열성(濕熱性) 맹그로브 수림(樹林)으로부터 3,000m 높이의 산에 피는 에델바이스에 이르기까지 복잡한 분포를 보인다. 열대재식농원(熱帶栽植農園:Estate)의 대부분은 이러한 식물분포의 수직적 변화를 이용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동물군은 위치에 따라 아시아와 오세아니아의 2계통으로 분류되는데, 코끼리 및 오랑우탄을 수마트라섬·보르네오섬에서는 볼 수 있지만 동부에서는 볼 수 없으며, 서(西)이리안의 동물들은 오세아니아에서만 볼 수 있다. 이 밖에 자바섬의 들소는 독특한 존재이다.
2. 주민
인도네시아의 주요한 특색 중 하나는 민족 구성이 복잡하다는 것이다. 주민의 대부분은 직상모(直上毛)와 황갈색의 피부를 가진 말레이 인종이지만 이들도 섬에 따라 여러 종족으로 나뉘며, 동부에는 빳빳한 머리털에 암갈색의 피부를 가지고 있는 파푸아인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말레이인이 훨씬 많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에도 수마트라섬의 쿠부족(族)과 셀레베스섬의 트아라족처럼 선주민(先住民)으로 추정되는 짙은 검정색 피부를 가진 네그리토족(族)과의 혼혈이 분포한다. 셀레베스섬의 미나하사족(族), 보르네오섬의 다야크족 등은 비교적 혼혈 정도가 낮은데도 종종 폴리네시아계(系)와 비슷한 밝은색 피부의 종족이다. 그 밖에 역사시대에 이주해온 중국인·인도인·아라비아인·유럽인 및 그들의 혼혈인종이 도처에 분포하여 인도네시아가 복잡한 민족 이동의 무대였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인종은 자바족·순다족·마두라족 등이며, 전체적으로 300여 종족이 혼합되어 있다. 인도네시아어를 공통의 공용어(共用語)로 사용한다. 주민의 약 90%는 13세기 이후 진출한 이슬람교도이나 일상생활에서는 그 이전에 이미 군도(群島)를 지배하였던 힌두교의 의식도 뿌리깊게 남아 있으며 애니미즘적 요소도 남아 있다. 그리스도교도는 전 인구의 약 4%, 힌두교도 약 4%, 불교도와 기타 종교가 3%에 이른다. 세계에서 5번째로 인구가 많은 나라로 인구분포는 지극한 불균형 상태로 자바섬(수마트라섬 포함)의 인구가 인도네시아 전체 인구의 64%를 차지하는 등 개발 여부에 따라 인구 차이가 뚜렷하다. 증가하고 있는 인구와 광대한 미개발 섬의 개발을 조화시키는 것이 앞으로의 중요한 과제이다.
3. 역사
솔로강(江) 유역에서 발견된 플라이스토세(世) 말기의 화석인류와 이와 함께 발굴된 유물은 인도네시아에 구석기문화가 발전하였음을 증명한다. 또한 자바섬의 와자크에서도 고기충적층(古期沖積層)의 표면 부근에서 오스트레일리아 인종과 비슷한 두개골이 발견되고 있다. 오늘날 각지의 인종들 사이에 남아 있는 멜라네시아 ·네그리토·베도이데계(系) 인종과 함께 오스트레일리아 인종도 태고시대에는 이 지역의 주민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석기시대의 유물로는 서쪽 지방에 네모꼴 돌도끼[石斧], 동쪽지방에 원통형 돌도끼가 분포되어 있는데, 전자는 대륙에서 남하해온 인도네시아형(型) 종족이 남긴 것이고 후자는 멜라네시아 지방과의 교류를 증명하는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시대의 뒤를 이어 거석유물(巨石遺物)을 수반하는 철기문화가 펼쳐져 돌멘 모양의 분묘, 돌항아리, 돌로 만든 조상의 인물상 등이 남아 있다.
인도네시아계 인종이 이와 같은 발전을 이룩하는 동안 서쪽에서는 인도인 이주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수마트라섬 동부와 자바섬 서부지방을 개척한 데 이어 보르네오섬과 셀레베스섬까지 진출하였다. 수마트라섬의 팔렘방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렸던 인도계 문화국가 스리비자야(중국의 문헌에는 室利佛逝, 나중에는 三佛齊라고 하였다)는 특히 강대한 해상세력을 형성하여 수마트라섬과 자바섬 서부, 말레이반도의 대부분을 수중에 넣었으며 남중국해 무역의 중심지로서 막강한 부(富)를 자랑하는 국가로 발전하였다.
8세기에는 자바섬의 중앙에 샤일렌다르라고 불렸던 왕조가 일어나 보로부두르와 같은 불교유적을 남겨놓았다. 이 왕조는 수마트라섬의 스리비자야 왕조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9세기 중엽에 이 두 왕통(王統)이 합병됨으로써 한때 남중국해의 강대한 해상제국이 성립되었다. 11세기 초 스리비자야는 인도의 코로만델 해안을 지배하였던 주련국(注輦國:Colas)과 싸움을 벌였으나 크게 패하였다.
이 당시 동부 자바에 에를랑가라는 왕이 출현하여 이 지방을 통일하였으나 그가 죽은 뒤 장갈라와 카디리의 2왕조로 분할되었으며 12세기에는 카디리의 세력이 커지면서 동부 인도네시아의 여러 섬들을 정복하였다. 그때부터 1세기 반 뒤 카디리 왕조가 멸망하자 싱가사리 왕조가 새로 일어났으며 이 왕조 최후의 왕인 쿠리타나가라 시대에는 수마트라를 비롯하여 발리·순다·마두라섬을 정복하였다. 그가 죽고난 뒤 몽골군이 침입해왔으나 쿠리타나가라 왕의 사위 라덴비자야가 교묘한 술책으로 몽골군의 세력을 이용하여 자신의 정적(政敵)을 제거하는 한편, 몽골군의 허점을 엿보고 있다가 기습하여 큰 손해를 입힘으로써 민족독립을 되찾고 마자파히트 왕조를 창시하였다. 이 왕조는 나중에 포르투갈 영토가 된 동인도의 대부분을 지배하여 인도계 국가로서는 최후의 번영을 누렸다. 한편 아랍인들이 남중국해로 진출해온 것은 꽤 오래된 일로 추정되는데, 10∼11세기 무렵 베트남의 참파 근방으로 유입해온 이슬람교는 13세기에 수마트라섬 북부의 사무두라와 페들라크에 이슬람 왕국을 성립시켰다.
14세기에는 말레이반도에 교두보를 확보하였으며 말라카가 그 중심지 구실을 하였다. 15세기에 자바로 진출한 이슬람 세력은 특히 중부지방에서 기반을 굳혔으며, 마자파히트 왕조는 북부해안 부근의 테마크를 지배하였던 이슬람교 군주에게 멸망하였다. 그 뒤 이슬람교는 서부 자바를 비롯하여 보르네오섬·셀레베스섬 등 여러 섬으로 전파되어 발리섬을 제외한 동인도제도를 휩쓸었다. 근세에 와서는 이슬람교도의 해상세력을 격파한 서유럽인들이 진출해왔다.
포르투갈은 암본을 차지하고 몰루카제도의 향료 무역권을 독점하였으며, 에스파냐인들은 필리핀을 세력권으로 하여 몰루카제도의 향료무역에도 손을 대었다. 그러나 이 두 나라는 식민지정책에 서툴렀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이들에게서 동인도의 해상권(海上權)을 빼앗았으며, 이때를 전후하여 이 곳으로 진출해온 영국인과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17세기 초 네덜란드의 쿤은 자카르타에서 영국세력을 몰아내고 바타비아를 건설하여 자바섬에 네덜란드 세력을 심었다. 따라서 네덜란드의 동인도회사는 마자파하트 왕조의 뒤를 이은 마타람왕국을 잠식해 들어갔다.
나폴레옹 전쟁 당시 한때 영국군에게 점령되기도 하였으나 1814년과 1824년에 체결된 런던조약에 따라 네덜란드는 아시아 대륙의 옛 영토를 포기하는 대신 영국으로부터 인도네시아 지배권을 승인받게 되었다. 이로써 자바섬의 토착 왕국은 점차 네덜란드의 무력에 굴복하게 되었고, 마침내 티모르(포르루갈령), 보르네오섬의 일부(영국령), 필리핀(에스파냐령, 나중에는 미국령)을 제외한 인도네시아의 대부분이 잇달아 네덜란드의 통치를 받게 되었다. 350년이 넘는 네덜란드의 지배는 인도네시아 민족해방을 지도할 만한 민족자본가의 성장가능성을 배제해 버렸다.
그러나 19세기 후반경부터 미약하나마 문화적 활동을 지향하면서도 종족적 색채가 강한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났다. 1908년 와히딘 수디로후소도가 주도한 부디우토모당(黨)이 대표적이다. 그 후 이슬람교도들을 중심으로 한 사리카트이슬람(이슬람연합) 운동이 인도네시아 전역에 걸쳐 일어나 종교를 통하여 종족의 벽을 뛰어넘음으로써 대규모의 통일된 힘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사리카트이슬람은 마침내 급진적인 정치색을 띠기 시작하여 20년에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탄생시켰다. 공산당은 1926년 노동조합의 통일전선(統一戰線)으로 동인도 노동조합협의회를 결성한 데 이어 공산당을 비롯한 12개 정당과 노동조합을 결속하여 반제국주의 통일전선(反帝國主義統一戰線)을 결성하였으나 1926∼27년 전국에 걸친 무장폭동 이후 비합법화되었다. 그 대신 1927년에는 인도네시아 국민당이 결성되어 지도권을 장악하고 민족주의적 비협조를 제창함으로써 세력이 크게 확산되었다.
그러나 1931년에는 이것 역시 해산명령을 받게 되어 민족해방운동은 점차 후퇴하였으며, 단지 자치를 요구하는 선에 머물렀던 대(大)인도네시아당이 그 뒤를 이었다. 1936년에는 각종 정당 및 노동단체를 통합한 인도네시아 인민회의가 탄생하여 보통선거에 의한 완전한 의회의 획득이라는 슬로건을 정면으로 내세웠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2년에 바타비아를 점령한 일본군이 동인도 전역에 군정(軍政)을 실시하였기 때문에 민족운동은 지하로 숨어들었다. 일본의 항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민족운동 지도자 수카르노와 하타를 중심으로 인도네시아 공화국의 독립이 선언되었다. 하지만 실질적인 식민지회복을 노렸던 네덜란드는 1947년 경찰행동(警察行動)이라는 명목으로 인도네시아에 대한 전면공격을 가해왔다. 이 사건은 국제연합(UN)의 조정에 따라 1948년 1월 15일 렌빌협정에 의해 수습되었으나 이 협정은 인도네시아 민족주의자들의 불만을 샀으며 급진세력이 공산당을 중심으로 결속하여 인민민주당을 조직하였다. 공화국 정부는 마디운사건을 계기로 이들을 모두 제거하였다.
그러나 1948년 12월 네덜란드가 제2차 경찰행동을 일으켜 공화국을 위협하자 다시 반(反)네덜란드 감정이 높아졌고 식민지 재편성의 주도권을 쥐고 있던 미국이 네덜란드에 압력을 가하기도 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1949년 12월 27일 헤이그 원탁회의 결과 인도네시아 연방공화국이 탄생하였고 네덜란드와의 사이에는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이 성립되었다. 그 뒤 공화국 정부는 단일국가 수립에 노력하였으며 연방내 친(親)네덜란드파(派)의 반란을 비롯한 여러 가지 장애를 배제한 뒤 1950년 8월에는 1949년의 연방헌법을 폐지하고 연방을 해체하였다.
그 결과 서유럽형 의회제도를 골자로 하는 1950년 헌법에 의하여 단일독립국가로 통일되었고, 이어서 1956년 2월 네덜란드·인도네시아 연합을 폐기함으로써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다. 그러나 네덜란드의 경제적 권익은 그대로 남아 커다란 제약요인이 되었다. 국제적으로는 이른바 콜롬보 그룹에 속하여 시토(동남아시아 조약기구)에 반대하며 국제적 긴장완화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벌였다.
1963년에는 수카르노가 군부의 지지하에 종신 대통령에 취임함으로써 독재체제를 수립하였으며, 대외적으로 UN을 탈퇴하고 소련과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으며 대내적으로 용공노선을 지지함으로써 군부와 공산당이 대립, 경제난과 정치적 혼란을 초래하였다. 이에 1965년 반공적인 군부세력의 쿠데타가 발발하였으며, 1968년 수하르토 정부가 출범하였다. 수하르토 정부는 1969년 이리안바라트를, 1975년 동티모르를 합병하였으며 1992년 총선에서 집권당이 승리함으로써 연속집권의 기반을 다졌다.
4. 정치
인도네시아의 국체(國體)는 공화국, 정체(政體)는 대통령 중심제이다. 1945년 8월 17일 공화국 독립을 선포한 이후, 2001년 7월 23일 와히드(Abdurrahman Wahid)가 무능력과 부패 의혹 등으로 인해 집권한 지 21개월 만에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메가와티(Megawati Sukarnoputri)가 신임 대통령으로 정권을 잡기까지 대통령 중심제를 고수하고 있다.
신앙의 존엄성, 인간의 존엄성, 통일 인도네시아, 대의정치, 사회정의 구현 등 1945년 제정된 헌법에 따라 '판차실러(Pancasilla)', 즉 '건국 5원칙'을 국가 이념으로 삼고 있으며, 헌법을 개정해 강력한 대통령의 권한이 축소되고, 국민 대표기관인 국민협의회(MRP)와 국회(DPR)의 권한이 강화되었다. 정치 성향은, 대내적으로는 군도(群島) 국가로서 지역간 불균형, 심각한 빈부격차, 전통과 근대의 혼재, 다종족 등으로 인한 통치상의 난점뿐 아니라, 부정부패·정경유착 등 정치권의 부정부패도 심각하다. 대외적으로는 비동맹 중립노선을 추구하면서
친서방 외교정책을 통한 실리외교에 중점을 두고 있다.
대통령은 행정부의 수반이자 국가 원수로서, 임기는 5년이며, 국민협의회에서 선출되고, 국회에 대해 책임을 진다. 1968년 6월, 경제안정과 경제개발계획 추진을 목적으로 제1차 개발 내각이 발족한 이후 수하르토(Suharto) 정권 하에서 7차에 걸쳐 개발내각이 구성되었고, 1998년 5월 하비비가 새 과도정부를 구성한 뒤, 1999년 10월 국민협의회 대통령 선거에서 와히드가 당선되었다. 당선 이후 와히드는 국가통합 유지와 경제위기 극복을 최우선 과제로 설정하고, 모든 정파를 포함하는 국민연합 내각을 발족, 취임 직후에는 비교적 정세가 안정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부 지방의 분리주의 요구와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처리 문제 지연, 정파간 갈등의 표면화 등으로 인해 갈수록 정국이 혼미해지고, 2001년에 들어서면서는 와히드 자신이 조달청 자금 횡령 및 브루나이 국왕의 기부금 유용 혐의 등을 받으면서 국내 정세는 급격히 불안해졌다.
그러다 2001년 7월 23일, 국민협의회의 탄핵에 의해 임기를 절반도 채우지 못한 채 대통령직에서 쫓겨나고, 메가와티가 새로운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지만, 일선 군부대 지휘관들인 영관급 장교 중에는 아직도 와히드의 지지세력이 적지 않고, 인도네시아 최대 이슬람 단체인 나둘라툴울라마(NU) 회원들이 자살특공대를 결성해 와히드를 사수하겠다고 선언하는 등 당분간은 불안한 정국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또 몇 년째 계속되는 경제난에도 불구하고, 국제통화기금(IMF)이 2000년 12월, 개혁이행 실패를 문제 삼아 구제금융 집행을 중단하는 등 국내 정세의 불안 외에 경제난까지 겹침으로써 이것이 앞으로 메가와티 정부가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지적되고 있다.
국민대표기관은 국민협의회와 국회의 2원적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협의회는 헌법제정, 주요 국가정책 방향 결정, 대통령·부통령 선출 및 해임 등과 관련된 일을 하며, 임기는 5년이다. 국회의원 500명, 지역대표 130명, 직능대표 65명 등 총 695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회는 입법권, 예산 결정 및 집행·감독, 행정부 견제 기능을 하며, 임기는 5년으로, 총 500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주요 정당에는 메가와티 현 대통령이 소속된 민주투쟁당(PDIP), 와히드 전 대통령이 소속된 국민계몽당(PKP)를 비롯해 골카르당(GOLKAR), 통일개발당(PPP), 국민수권당(PAN) 등이 있다. 사법제도는 3심제를 채택하고 있으며, 법원은 대법원·고등법원(26개)과 지방법원 및 분원(287개)으로 구성되며, 그밖에 국방부가 관할하는 군사재판소, 종교부가 관할하는 종교재판소가 있다.
국방은 국방부(Department of Defense) 관할하의 육군·해군·공군으로 구성되며, 기존의 경찰군은 2000년 7월부터 대통령 직할군으로 편성되었다. 국토방위와 치안유지의 의무가 있으며, 헌법상 정치참여의 권리가 인정된다. 총 병력은 48만 2천 명으로, 육군이 23만 5천 명, 해군이 4만 3천 명, 공군이 2만 1천 명, 경찰군이 18만 3천 명이다. 전차 330대, 장갑차 500대, 화포 450문, 잠수함 2척, 구축함을 포함한 함정 100여 척, F-16 10대를 포함한 전투기 및 수송기 358대를 보유하고 있다.
5. 경제
네덜란드 국민경제의 확대와 재편을 위해 식민지화된 인도네시아는 서유럽 기업에 의한 단일재배경제형(單一栽培經濟型:monoculture)의 식민지가 되어왔으며, 민족사회 내부에 민족 부르주아를 형성하지 못한 관계로 독립 후에도 기간산업부문(基幹産業部門)은 물론 생산수단의 생산부문이나 소비물자의 생산까지 어려움을 겪었다. 더욱이 1942년 네덜란드 식민지권력의 붕괴, 일본군정(1942~45), 독립전쟁(1945~49), 그리고 수카르노 정부에 의한 네덜란드 기업의 접수활동이 진행되는 동안 식민지적 대지주제와 전통적 토지소유제도의 2중구조를 타파하려는 국민경제의 형성이 촉진되었으나, 수카르노 정부 시책을 받쳐주는 경제적 기초가 약했을 뿐만 아니라 치솟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뒤를 이은 수하르토 정부는 식량자급을 목표로 하는 비마스 계획을 실시하고 식량·의료 등 국민생활의 구체적인 개선을 목표로 하는 대규모 시책을 실시하였다. 이자를 포함해 24억 달러가 넘는 수카르노정부의 대외채무상환의 연기가 일본·미국 등 자유주의 제국에 의하여 실현된 후 1967∼69년 수하르토 정부는 계속해서 여러 나라로부터 10억 달러가 넘는 새로운 원조를 받았으며 이 사이에 또 10억 달러의 외자가 도입되었다. 이 결과 소비자물가의 상승률이 떨어지고 환율도 안정을 찾게 되었다.
인도네시아는 농업과 광업에 기초를 둔 개발도상국형의 혼합경제체제인데, 1998년 현재 6,020억 달러의 국민총생산 중 농업이 18.8%를 차지하고 종사자수도 총취업 인구의 40%를 차지하는 농업국이며, 동남아시아 유일의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이다. 특히, 1989년 시작된 제5차 5개년계획에서는 농업부문의 식량자급량 확보와 수출진흥·고용기회확대를 위한 공업부문의 개발을 중점적으로 추진하였다. 그러나 1997년 6월부터 시작된 루피아화의 가치폭락으로 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다. 1997년 6월 1 달러당 2,450 루피아가 1 달러당 1만 7,000 루피아로 떨어지기도 했다. 루피아와의 가치폭락은 국내의 수요를 감소시키고, 물가급등, 기업도산, 실업자 양상, 경상수지적자 등을 초래 하여 1998년 현재 GDP가 전년대비 13.6% 감소 하였고, 1인당 GDP는 1996년도 1,184달러에서 1998년도 480달러로 떨어졌다.
1) 산업
인도네시아는 19세기 이래 네덜란드에 의해 풍부한 열대자원을 바탕으로 한 농업개발이 중점적으로 이루어져 어떤 의미에서는 ‘열대의 보고(寶庫)’로서의 가치를 가장 강하게 나타내고 있는 나라이다. 농업은 이른바 에스테이트에 의해서 수출을 위한 것과 원주민의 식량자급을 위한 것의 2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에스테이트 농업은 예전에는 자바섬과 수마트라섬을 중심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으나 제2차 세계대전과 잇달은 독립전쟁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다. 전전의 248만ha 중 오늘날 경작되고 있는 면적은 170만ha에 지나지 않는다. 주요 농산물은 쌀·옥수수·카사바·고무 등 식량작물 외에 고무·커피·잎담배·야자유 등이다.
자연조건으로 보아 벼농사는 2년5작(二年五作)이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농업기술이 뒤떨어져 국내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고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산림자원은 수량이 풍부하여 목재산업이 활발할 뿐 아니라 주요 수출품 중의 하나이다. 재배림의 대부분은 티크나무로 자바섬이 주생산지이며, 동부 몰루카 지방의 특산으로 다마르 수지(樹脂)가 있다. 어업도 활발하나 어획방법이 원시적이고 어로지역도 근해가 중심이다. 제염은 마두라섬에서 활발한데, 자연조건으로 보아 아시아에서 가장 유명한 염업지(鹽業地)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이 밖에 동부의 아루제도 부근에서는 진주조개가 잡힌다.
인도네시아는 풍부한 지하자원의 혜택을 입고 있는데, 특히 국민총생산액의 1/3을 차지하고 노동력의 1/10을 점유하는 공업과 광업은 석유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석유는 민간자본에 의한 석유회사를 통합하여 1968년 설립한 국영석유회사인 플루타미나와 미국을 필두로 하는 외국석유회사에 의해 급속한 개발이 진행되고 있다. 주요 유전은 수마트라(메단, 팔렘방)·보르네오(타라칸, 발릭파판)·자바 동부·서이리안 등지이며, 석유자원은 국유화되어 있고 정유는 국영 정유회사인 페르타미나사(社)에서 전담하고 있다.
천연가스도 주요 수출품으로 점차 비중이 높아져 생산시설의 확충이 계속되고 있다. 석탄은 수마트라섬 서안 및 팔렘방 부근에서, 금은 수마트라섬과 보르네오섬에서, 철은 보르네오섬 남동부와 셀레베스섬 남서부에서 생산된다. 공업의 발달은 지극히 낙후된 상태로 이제까지는 에스테이트 농업 등과 결합된 소규모에 지나지 않았으나 자원과 노동력이 풍부하여 장래 공업발달의 가능성은 높다.
무역은 70년대 이후 수출이 계속 늘어 무역흑자폭이 확대되고 있다. 주요 수출품목은 원유·천연가스·고무·원목(原木)·커피 등이며 주요 수출국은 일본·미국·싱가포르 등이다. 주요 수입품목은 기계류·화학제품·석유·비금속(非金屬)·식품류 등이며 주요 수입국은 일본·미국·싱가포르 등이다. 무역상대국은 수출입 모두 일본이 제1위, 미국이 제2위를 차지하며, 그 밖의 수출에서는 트리니다드토바고·싱가포르·네덜란드, 수입에서는 싱가포르·독일·사우디아라비아의 순이다.
2) 교통
인도네시아는 자바섬 내에 철도 및 자동차도로가 사방으로 뚫려 있어 동남아시아에서는 드물게 보는 교통망이 갖추어져 있지만, 그 밖의 섬은 낙후되어 있다. 특히 동부지역의 교통이 불편하다. 최근에는 국내공로(國內空路)가 점차 정비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는 자바섬·수마트라섬의 여러 항구도시로 이어지는 항로와 항공로가 발달해 있다.
6. 사회
인도네시아의 인구증가율은 평균 2.2%를 넘고 있다. 이는 식량생산 증가율을 상회하여 식량수입과 외화유출의 커다란 원인이 된다. 인구의64 % 이상이 총면적의 6.9%에 지나지 않는 자바와 마두라에 집중해 있고 인구밀도도 매우 높은 편이다. 이와 같은 인구과밀현상은 토지의 부족과 토지분배의 불균형, 토지를 갖지 못한 많은 농민, 노동지대의 잔존, 농업기술 낙후와 생산성의 저하, 낮은 생활수준의 고착화 등 난제의 요인이 되고 있다.
직업을 구하는 반실업(半失業)상태의 농민은 칸폰이라 불리는 도시의 빈민구에 널리 분포하고 있으며 실업·반실업이 많은 도시사회를 형성한다. 인도네시아는 많은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종족들은 독자적인 언어와 문화·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약 300만의 인구를 가진 화교(華僑) 문제와 이슬람교, 그리스도교, 힌두교, 불교 등의 종교문제가 얽혀 있다. 더욱이 섬 사이의 교통도 미개발상태이기 때문에 사회적 통합력이 미약하다.
보건위생 상태는 극히 취약하여 각종 전염병과 풍토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특히 어린이의 영양결핍 해결이 당면과제가 되고 있다. 교육제도는 6년제 초등교육과정과 각기 3년의 중학교·고등학교 과정으로 이루어지며, 국민교육을 보급함으로써 인도네시아어(語)를 통일된 생활어로서 광범위하게 뿌리내리는 데 노력하였다. 인도네시아대학(자카르타), 가자마다대학(요그야카르타), 바자자랑대학(반둥) 등 24개주에 설립된 국립대학에서 인도네시아어로 강의를 하게 됨에 따라 국민들 간에 문화적 일체성이 커지고 있다. 주요 일간지가 90개 이상이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 등 언론은 정부의 통제하에 있으며, 지방은 독립된 채널을 가지고 있다.
1) 신화 ·전설
인도네시아의 신화·옛이야기·전설·신앙에서는 폴리네시아·미크로네시아·멜라네시아의 여러 지역과 공통되는 면이 발견된다. 신화에는 아시아와 유럽에서 들어온 요소가 많으며, 기원이 원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지방적 신앙에도 고대 인도의 서사시 <마하바라타> <라마야나> 등의 사상이 나타난다.
7. 문화
다양한 인종집단으로 이루어진 인도네시아는 오랜 세월에 걸쳐 문화적인 동화작용을 거쳤으며, 그 결과 풍부한 문화양식을 형성하였다. 대승불교의 유적, 힌두교 사원, 금속세공, 장식예술 등은 인도네시아의 문화유산으로 보호, 계승되고 있다.
1) 미술
인도네시아의 미술은 인도미술의 한 갈래가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동남아시아 제국의 경우와 동일하며 역사시대 초기부터 오랫동안 인도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점과 관련된다. 이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유품은 수마트라섬·자바섬 동부·보르네오섬·셀레베스섬에서 각각 하나씩 발견된 불상(수마트라섬의 것은 석불이고, 그 밖의 것은 모두 청동불상)이다. 모두 4∼5세기 남인도 양식의 작품으로 수마트라섬의 불상을 제외하면 인도에서 건너온 사람이 가져온 것과 동일한 것이다. 4∼5세기 전후에 인도계 미술은 이들 섬들에 뿌리내리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인도네시아 민족 자신의 미술활동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7∼8세기에 접어들면서 갑자기 내구재료인 돌을 이용하는 건축 및 조각을 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많은 유물을 남겼다. 이것은 자바섬·수마트라섬에 관한 것으로(특히 자바가 중요하다) 다른 섬들에는 이와 같은 유품이 없다. 이 밖에 인도네시아계 미술이 행하여졌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자바섬은 인도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는 동남아시아 제국 중 가장 우수한 종교예술을 전개시킨 지역으로, 인도의 불교 및 힌두교 미술의 수용을 필두로 8∼9세기에는 중부 자바에서 가장 먼저 전성기가 출현하였다.
인도 굽타계의 전아(典雅)하고 가지런한 양식을 기조로 하여 보로부두르(불교) 및 칸디 롤로전그란(힌두교)과 같은 동양미술사상상의 우수한 걸작을 창조하였다. 그 후 정치의 중심이 동부 자바로 이동한 후부터는 인도와의 교섭이 줄어듦에 따라 미술도 점차로 쇠퇴하고 대신 자바의 민족적 요소가 짙어지기 시작하였다. 즉 자바의 미술사(美術史)는 전형적인 쇠퇴의 과정을 특색으로 하고 있다.
오랜 유품으로는 팔렘방 부근에서 출토된 가장 오래된 석불 외에 스리비자야 초기에 속하는 돌 및 청동의 불교존상(佛敎尊像)이 여러 개 있는데, 중부 자바의 미술과 양식(樣式)상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 주목된다. 동부 자바에서 발견된 찬디 유적, 힌두교 및 불교의 존상 및 숭배물 등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1286년의 연기(年紀)인 불공견색관음(不空a 索觀音), 14세기경의 거대한 바이라바(Bhairava)의 입상(立像) 등이 대표적인 것으로 인도계의 표현이지만 수법은 현저하게 인도네시아화하고 있다.
9. 대한관계
인도네시아는 남북한 동시수교국이다. 남북한의 상주공관이 설치되어 있다. 한국과는 1973년 9월에, 북한과는 1964년 4월에 국교관계가 성립되었다. 1981년 7월 대통령 전두환이 인도네시아를 방문한 데 이어 이듬해 10월 대통령 수하르토가 한국을 방문함으로써 자원개발을 비롯한 양국의 협력관계가 확대되었다. 양국간에 체결된 협정은 경제 및 기술협력과 통상증진에 관한 협정(1971), 임업 협정(1987), 항공 협정(1989), 이중과세방지 협정(1989), 투자보장 협정(1991), 법무자료교환 협정(1996), 대외경제 협력기금(EDCF) 협정(1997) 이다. 1970년대 이후 한국 건설업체의 진출로 마두라 유전개발 등을 비롯하여 민간차원의 협력이 강화되고 있다. 1998년 현재 대(對) 한국 수입은 17억 8,400만 달러이고, 수출은 30억 5,800만 달러이다. 주요 수입품은 섬유류, 유화제품, 일반기계, 철강판 등이고, 수출품은 원유, 가스, 고무, 목재 등이다. 1999년 현재 교민수(체류자 포함) 1만명이다.
인도는 다인종의 나라일 뿐 아니라 중동 및 서양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음식도 지역과
종교에 따라서 매우 다양하고, 특히 음식은 색깔과 질감이 조화를 이룬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남부 인도의 쇠고기를 먹지 않는 요리에 향신료를 강하게 하여 고춧가루 등 매운
소스를 많이 사용하고, 또한 코코넛 밀크와 크림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반면 북부 인도에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무슬림들이 많고, 외부 식문화의 영향을
받아 약하게 조미한 음식과 요구르트 및 다른 혼합물을 많이 사용하고 있다.
또한 인도인 중에서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주식으로 쌀이나 쌀로 만든 것을 먹는다.
나머지 인구는 밀이나 보리, 또는 옥수수, 수수 등을 먹는다.
쌀(또는 수수와 같은 대용물)은 끓이거나, 갈아서 찐 후에 팬케이크를 만들어 먹으며,
극서 지방과 북서 지방에서만이 약간의 발효를 시켜 서서히 부풀린 것을 먹을 뿐이다.
일반적인 힌두의 음식 체계는 세 가지의 ‘구나’라는 고전적인
원리를 이해해야 이해가 가능한데, 음식을 다음과 같이 철학적으로 세 가지로
분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선 가장 우수한 등급인 ‘싸뜨와’, 중간등급으로 ‘격한, 예민한 감정’을
나타내는 ‘라자스’ 그리고 열등한 등급인 ‘둔한 감정’을 나타내는 ‘따마스’로 구분한 것이다.
첫째 등급은 달고 부드러우며 촉촉하고 신선한 반면, 중간 등급은 시고 건하며
쓰고 소화가 힘들며, 열등한 등급은 깨끗하지 못하고 신선하지도 않고 심지어 병을
유발할 수도 있는 등급이다.
그래서 정화된 기름인 ‘기’는 우수한 등급에 속하며 향료는 중간,
금지된 육류는 열등한 등급에 속한다.
그러나 이러한 세세한 구분은 카스트, 종교 그리고 지역에 따라 다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인도인들은 자신이 먹는 음식을 상, 중, 하로 구분을 하고 먹는다.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정하고 배타적이며, 종교적으로도 깨끗한 음식을 먹는다.
자신과 같거나 높은 지위의 사람에게서만 음식을 받아서 먹지만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는 것은 가능하다.
음식을 베푼다는 것이 받는 것보다 상위의 가치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도덕적, 사회적 우열함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도덕성, 종교적 깨끗함, 길함의 정도는 힌두인의 음식 문화를 구분하는 잣대인
동시에 모든 음식에 관계된 사항(재료 선택에서부터 보관까지)을 규율하는 잣대이기도 하다.
비슷한 경우로서 종교계에서도 서로간의 음식 교환에 대해서 이러한 규율이 있다.
음식은 모든 힌두 종교 의식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구성 요소이다.
길하고 즐거운 의식, 예를 들어 생일 잔치나 결혼식에는 정성스런 음식이 사용되는
반면에 장례식과 같은 의식에서는 금지된 음식을 내놓거나 심지어 음식이 없는 경우도 있다.
특히 결혼식은 그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권위 그리고 혈통을 과시하며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하기도 한다.
가족 내의 잔치는 건강과 안녕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인도에서 무슬림의 음식 체계는 문화적으로 아주 독특하며 이데올로기적으로도
힌두의 그것과는 상반된다.
무슬림들은 흔히 고기를 먹지만 썩은 고기, 돼지고기, 피, 신의 이름으로
도살되지 않은 고기는 먹지 않는다.
‘라마잔’이란 한 달간의 단식을 하는 이슬람력의 아홉 번째 달을 가리키는 말이다.
무슬림들의 결혼식은 그들의 형제애와 더불어 축제와도 같은 분위기에 중점을
두고 영예로움과 극진한 대접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다.
힌두, 자이나교도, 시크교도, 불교도와 무슬림들을 막론하고 집안일 중에서 음식에
관하여 여성들은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그들은 아내, 요리사, 가정 교사로서의 어머니와 장모로서 가정의 화목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함으로서 인도 요리 문화의 수호자로서 자리잡아 왔다.
또한 여성들은 가족 구성원 모두의 건강과 복지를 위해서 일 년간의 복잡한 제사와
의식 등의 행사를 주관한다.
러크나우와 델리가 북부 인도 음식 문화의 대표 지역으로서, ‘무글라이’와
같은 음식에서 보여지듯이 이란과 중앙 아시아가 이들 북부 지방에 많은 영향을 끼쳤음을
보여 준다.
남부 지방은 쌀과 콩으로 만든 음식(이들리, 삼바르, 도사)을 좋아하며, 동부 지방은
쌀과 생선 카레를 좋아한다.
향료와 허브, 조미료는 인도 음식의 정수를 이룬다.
사실 인도 요리의 특징은 향신료에서 비롯된다.
향신료의 나라 인도의 독특한 많은 향신료는 중세 유럽인들에게 향신료를 찾기
위한 열정에 불을 붙여 신대륙을 발견하는 계기를 가져다 주었다.
열대 지방에 속하는 인도는 풍성한 나무로부터 인도 특유의 맛을 내는 향신료를
만들어 조리하는 데 사용했다.
향신료는 인도말로 마살라라고 하는데, 마살라는 주로 식물의 열매, 씨앗, 잎,
뿌리 등으로 만든 향신료로 그 맛과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
간단히 말하면 인도 요리는 재료를 조리한 후 여러 가지 마살라를 섞어 만든 종합
향신료로 각 요리 특유의 맛을 내는 것이다.
단순한 반찬에서 고급 요리까지 인도 요리에서 이 마살라는 빼놓을 수 없다.
또한 인도 전역은 이 마살라 문화라는 공통된 성질을 갖고 있으면서도, 각 지역마다
주로 쓰는 마살라가 모두 다르다.
음식에 사용되는 향신료로는 월계수 잎, 고수풀열매, 고추, 계피, 정향나무 열매, 박하,
심황 뿌리, 회향풀, 백리향, 육구두 등 대략 25개가 기본을 이루고 있으며 이것들은
한약재로도 이용되는 것이어서 건강에도 좋다.
이 재료들을 개인의 취향에 맞게 배합해 향신료로 사용하고 있다.
이 점이 바로 소스로 대변되는 프랑스 요리나 양념으로 맛을 내는 한국 요리, 그리고
자연 그대로 원 재료의 맛을 소중히 하는 일본 요리 등과 큰 차이점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노란색의 카레(정식 명칭은 ‘커리')가루는 사실은
향신료에 익숙지 않은 서양에서 대중적인 입맛에 맞게 섞어만든 것이다.
오랫동안 인도를 지배한 영국인들은 여러 가지 향신료를 섞어 쓰는 인도요리가
익숙지 않았다.
그래서 영국의 유명한 식품 회사에서 영국인들의 취향에 맞는 향신료만을 섞어
만들어 보급했고, 2차 세계대전 때 전세계로 보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