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대에서 성악을 전공해 시립단원이 된 한 친구의 어릴적 꿈은 예술가였다고한다. 예술가가 되려면 대학에 들어가야 한다고 해서 성악실기 입시학원을 다녔다. 첫 레슨은 오실로스코프에 매달려 자기 음성의 매개변수를 측정하고 ‘성악적’인 목소리를 만들기 위해 테크닉훈련만 했다고 한다. 예술가를 꿈꿨던 그의 영혼은 테크니션(technician)으로 재빨리 적응해갔다. 대학을 졸업해 시립단원이 된 친구는 모친 환갑잔치에서 ‘쨍하고 해뜰날’을 불러달라는 친지들의 청에도 굳이 리골레토(Rigoletto)에 나오는 아리아 ‘여자의 마음(La donna e mobile)’을 불렀다고 한다. 노래 부르는 동안 친지들은 박수조차 칠 수 없었다는 것을 그는 몰랐다고 한다. 왜냐고 물었더니, 성악가는 공식석상에서 유행가를 부르면 안된다고 했다. 필자가 알고 지내는 또 한명의 친구는 지역 여대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대학1학년때 거리에서 춤을 췄더니 담당교수가 ‘길거리에서 춤추면 질 떨어진다’며 앞으로 허락받고 나가라고 했다고 한다. 대학교육에서 가장 답답했던 점은 수업을 통해 예술가로서의 마음가짐과 창의성을 훈련받을 수 있는 계기가 부족했다고 회고했다. 무용훈련도 항상 실내와 마루바닥에서만 하다보니 동일한 조건이 마련되어야지 공연이 가능했다고 하며 대부분의 대학생들이 보는 관객을 고려한 즉흥성과 애드립(ad lib)이 떨어지는 박물관적인 작품을 ‘OO무용단’ 혹은 ‘OOO의 제자’라는 무명(無名)으로 졸업했다고 한다. 지역에서 화가로 활동하는 한 선배는 ‘그림’을 그리기보다 ‘그림 그리는 법’부터 배웠다고 한다. 드로잉과 소재를 가르치는 선생과 교수로부터 미술관과 갤러리에 그림을 유배시켜 커리어를 키우는 법도 함께 전수받았다고 한다. 아직까지도 선배는 애호가나 소장가와 주로 대화를 하기보다 교수, 갤러리사장, 큐레이터, 기자들과 식사를 한다고 했다. 아직도 선배는 그림은 ‘보는 문화’인지 ‘그리는 문화’인지 확신이 안 선다고 한다. 더욱이 화실이 작가가 작업하는 공간인지 ‘배움의 거래’가 있는 공간이지 의문스럽다고 했다. 선배가 더욱더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이런 모든 의문에 무기력하게 대답할 수밖에 없는 자신의 모습이었다고 한다. 경계허물기를 통한 일상의 회복 대구 중구에서 어느 새벽 두 명의 연극인이 옷을 벗고 거리를 달려봤다고 한다. 샤킹(shaking)이라고 부르는 데 마친 후 형언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꼈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무대에서 조차 전라로 출연하기 힘들다. 한국에서 옷을 공개적으로 벗을 수 있는 곳은 목욕탕 밖에 없을 것이다. 예술을 인간의 ‘세련된 광기’라고 한다면 관객들은 그 ‘광기’를 누릴 때까지 수많은 사회적 검열을 받게 되는 것이다. 한국에선 삶의 일상에서 예술행위를 한다는 것이 아직은 ‘천하다’라는 비판을 받고 있는 실정이며 아티스트의 작품속에서도 ‘일상’은 철저히 거세되어 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에서 우리는 그 동안 배제되었던 ‘일상’을 지켜보며 뜨끔해 하는 것이다. 술을 좋아하는 한 시민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나 보던 작품을 어느날 삼덕동2가의 ‘WES’라는 레스토랑에서 술을 마시며 감상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인테리어인 줄 알았는데 그날 가게에서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고 한다. 술집에서 전시회가 열릴 수 있다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한다. 작년 삼덕동 까페에서 열렸던 'OUTDOOR'를 우린 기억한다. 갤러리문을 열고 나간 미술품들이 우리 삶의 구체적인 일상속으로 파고들며 술마시다 신명이 난 한 배우가 테이블위를 올라가 뮤지컬 한소절을 부르는 해프닝도 한 두 번 보았다. 소리와 몸짓은 함께 시작했다는 ‘일상’을 회복하기 위해 ‘소리짓퍼포먼스’를 벌였던 아티스트그룹도 기억한다. 5월에 대구를 방문한 얌모얌모콘서트는 성악가들의 재미난 일상을 공연요소에 가미함으로써 보러간 시민들은 무엇보다도 ‘몸’이 즐거웠다고 한다. 예술가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는 대구거리문화축제를 통해 시민들은 예술가들에 대한 엄숙주의를 깨며, 예술가들은 시민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하게 된다. 우리 삶의 주요한 일상공간인 거리, 골목, 광장, 공원은 이제 훌륭한 문화예술 무대로 자리잡아 가고 있는 것이다. 시민들은 이제 무대와 실내를 떠난 일상의 공간에서도 동시대의 ‘문화적 세례’를 받고 싶어 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뒷면의 눈가림과 조절된 실내조명을 통해 발전한 ‘마술’이라는 장르를 해온 지역의 프로마술사는 뒤에서도 관객이 보는 거리공연을 했더니 마술이 가진 한계와 장애를 구체적으로 느꼈다고 했다. 그러면서 360도 어느 방향에서 봐도 마술쇼가 가능하기 위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되는 훈련을 한다고 했다. 마술에서 마술사 뒤에서 관람하는 것은 철저히 배제되어 왔던 것이다. 대부분의 예술장르가 일상적 요소 중 뭔가를 배제시키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을 부정할 순 없다. 락밴드는 음향의 용량(KW)이 일정수준 되지 않으면 공연을 못하는 치명적인 장애를 가진 것이다. 작년 10월 대구에 ‘아트포럼 일상의예술’이라는 예술가포럼그룹이 탄생했다. 선언적 의미를 지니는 발제문은 이렇게 말한다. 『대학의 학제 때문에 장르구분이 빨랐다. 장르로 구분된 예술가들이 TOTAL의 문제를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그러니 ‘개별적 독창성’이라는 신화가 생겼다. 독창성은 매일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옛것에 대한 터부가 생겼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그리고 싶은 것’, ‘내 곁에 친숙한 것들을 그리는’ 혹은 ‘회사의 중역이 우동을 말기 시작하는’경향으로부터 변화의 조짐은 시작되고 있다. 예술가들도 <이제 행복해 보자>6회의 포럼을 마친 ‘아트포럼 일상의 예술’은 이제 예술가들의 공동작업을 통해 예술과 일상의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 예술의 소품 수준에 그쳤던 일상과 직업적 에너지로 점철된 예술이 화해를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952년 현대음악가 존 케이지(J. Cage)는 사다리꼭대기에 올라가 강의를 했다. 강의 내용은 긴 침묵과 춤이었다. 거대한 얼음덩어리 20개를 길거리에서 녹게 내버려두어 해프닝(happening)을 연출한 작가도 있었다. 길거리에 천지로 깔린 볼트와 너트, 빌딩만한 립스틱이나 전기플러그, 립스틱으로 그린 그림 등은 과연 무엇을 전달하고자 했던 것일까? 친숙한 것을 낯선 것으로, 낯선 것을 친숙한 것으로 보여주는 행위들은 퍼포먼스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지만 그 본질은 ‘해프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글자 그대로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을 우발적이며 즉흥적으로 행한다는 의미다.
예술이 스스로 만든 편집증 해프닝은 즉흥성과 애드립, 관객참여, 예측불허의 코드로 이루어지므로 변수가 많다. 무엇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관객은 자연스레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시각적 효과와 청각적 소재들이 중요 전달 매체로 사용되며 폐쇄된 극장이 아닌 화랑이나 거리, 공원, 시장 등과 같은 일상적인 공간이 무대가 된다. 공유공간에서 벌어지므로 소비될 염려도 없는 것이다. 논리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사건과 행동들이 파편적으로 이어져 있어 기이하고 추상적이기도 하다. 대사가 생략되거나 아예 없으며 때로 산발적으로 튀어나오는 말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를 통해 해프닝은 우리 삶의 고통이나 희망 등을 논리적인 말로는 더 이상 전달 할 수 없다는 것을 내세운다. 지금까지의 예술장르가 발전시킨 논리도 높은 무대, 화려한 조명, 확대된 음향효과, 관객 관람각도효과 등이 사라진다면 무력해진다는 것을 잘 알고있다. 해프닝은 또한 원시반본(처음으로 되돌아 감 혹은 카오스)이다. 퍼포먼스라는 개념으로 통합되기도 하지만 미술의 콜라주, 영화의 몽타주, 길바닥무대공연, 프리스타일 랩, 사이키델릭, 부조리연극 등으로 세분화되어 발전해 왔다.
예술가가 행복하면 관객도 행복하다 다양한 예술장르의 벽을 무너뜨리며 장애를 극복하려는 시도인 해프닝은 기존 예술에서 관객의 역할을 변화시켰다. 행위자들은 관객에게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고함을 지르거나 물을 끼얹으면서 관객들을 자극하고 희롱하며 즐겁게 만든다. 이는 굿판에서의 무당과 굿관객과의 관계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우리민족은 이미 수천년 전부터 해오던 방식인 것이다. 공연은 정해진 어느 한 곳이 아니라 이곳저곳,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기도 한다. 볼거리를 따라 옮겨 다니면서 각기 다른 관점을 지닌 장면을 보기도 한다. 관객들을 공연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신명을 일으키고 자신의 삶에 답을 가져다 줄 의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해프닝은 삶과 예술을 화해시키며 궁극에 일상적 삶에 개입하는 의식이 되고자 하는 것이다. 요즘 예술이 우리 삶을 어떻게 변화시키며 얼마나 감동시키는 가를 살펴본다면 삶의 언저리에 가지도 못하는 박제된 예술상품들만이 난무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해프닝은 기본적으로 공공성을 유지하며 예술시장에서 소수 사이에서 거래되는 ‘상품’이 되는 것을 거부한다. 또한 박물관과 갤러리에 완성된 작품으로 전시되고 보존되는 것도 저항한다. 인습적인 사회제도에 순응하는 것을 비판하고 고정된 예술의 개념을 바꾸려했던 해프닝은 예측불허의 즉흥성, 작가의 자의식 등을 강조해서 ‘천하다, 개인적이다’라는 비판을 듣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 일상과 예술의 관계를 새롭게 모색하는 이러한 모험은 좀 더 다양한 모습으로 예술의 지평을 넓혀 갈 것이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일관된 논리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다는 사실이야말로 해프닝과 삶 자체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결국 예술이 스스로 만든 편집증(paranoia)을 치유하며 일상 속에 실존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아티스트들이 저마다의 장르가 지닌 ‘장애’를 인정하는 그 순간, 해프닝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유가 생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