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권 성읍 |
四夷之君類, 多依山谷, 就水草, 隨時遷徙, 以爲便適, 固未嘗知有國邑之制. 西域車師鄯善, 僅能築墻垣作居城. 史家卽指爲城郭諸國, 蓋誌其異也. 若高麗則不然, 立宗廟社稷, 治邑屋州閭, 高堞周屛, 模範中華. 抑箕子舊封, 而中華遺風餘習, 尙有存者. 朝廷間遣使, 存撫其國, 入其境, 城郭巋然, 實未易鄙夷之也. 今盡得其建國之形勢而圖之云. |
오랑캐의 군장들은 흔히 산과 계곡을 의지하거나 물과 풀이 있는 곳을 따라 수시로 옮겨 다녔으므로, 원래부터 나라에 도읍 제도가 있었는지 알 수 없다. 西域의 차사(車師)와 선선(鄯善)등이 겨우 담장을 쌓아 거주하는 성을 만들 줄 알았다. 역사가들이 그들 나라를 가리켜 ‘성곽제국(城郭諸國)’이라 하였으니, 대개 그 특이함을 기록한 것이다. |
그러나 고려는 그런 나라들과는 달리 종묘와 사직을 세우고, 고을과 마을을 만들고, 높은 성 위에 담을 둘러쌓아 中華를 모방하였다. 아마도 이것은 기자(箕子)가 봉작 받은 옛 땅이라서 중화의 풍속과 습관이 아직도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우리 조정에서 간간이 사신을 보내 고려를 위무하는데, 그들의 땅에 들어가면 성곽이 우뚝우뚝하여 쉽사리 업신여길 수 없다. |
・ 차사 : 한나라 때부터 북위시대까지 중국 天山山脈 동부에 있던 나라 ・ 선선 : 한나라와 위나라 때 지금의 중국 신장자치구에 있던 나라 |
영토의 경계(封境) |
高麗南隔遼海, 西距遼水, 北接契丹舊地, 東距大金. 又與日本流求聃羅黑水毛人等國, 犬牙相制. 唯新羅百濟, 不能自固其圉, 爲麗人所幷, 今羅州廣州道是也. |
고려 남쪽은 요해(遼海)로 막히고 서쪽은 요수(遼水)와 맞닿았고 북쪽은 옛 거란 땅과 이어지고 동쪽은 금나라와 맞닿았으며, 또 일본, 유구, 담라(聃羅), 흑수(黑水), 모인(毛人) 등의 나라와 견아상제(犬牙相制)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신라와 백제가 그 국경을 견고히 하지 못하여 고려 사람들에게 합병되니, 지금의 나주도(羅州道)와 광주도(廣州道)가 그 지역에 해당된다. |
其國, 在京師之東北, 自燕山道, 陸走渡遼, 而東之其境, 凡三千七百九十里. 若海道則河北京東淮南兩浙廣南福建, 皆可往. 今所建國, 正與登萊濱棣相望. 自元豐以後, 每朝廷遣使, 皆由明州定海, 放洋絶海而北. 舟行皆乘夏至後南風, 風便不過五日, 卽抵岸焉. |
고려는 경사(京師)의 동북쪽에 있는데, 연산도(燕山道)에서 육로로 가다가 요수를 건너 동쪽으로 고려 국경에 이르기까지 무릇 3790리이다. 바닷길로 가려면 하북(河北), 경동(京東), 회남(淮南), 양절(兩浙), 광남(廣南), 복건(福建)에서 모두 갈 수 있는데, 지금 세워진 나라는 바로 등주(登州), 내주(내州), 빈주(濱州), 체주(체州)와 서로 마주보고 있다. |
원풍 연간(1078~1085) 이후부터 조정에서 사신을 보내면, 언제나 명주 정해(定海)에서 출항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북으로 간다. 夏至뒤에 부는 남풍을 이용하여 배를 운행하는데, 5일이 못되어 곧 해안에 닿는다. |
舊封境, 東西二千餘里, 南北一千五百餘里, 今旣幷新羅百濟, 東北稍廣, 其西北與契丹接連. 昔以大遼爲界, 後爲所侵迫, 乃築來遠城, 以爲阻固. 然亦恃鴨綠, 以爲險也. 鴨綠之水, 原出靺鞨, 其色如鴨頭, 故以名之. 去遼東五百里, 經國內城, 又西與一水合, 卽鹽難水也. 二水合流, 西南至安平城入海. |
예전에는 영토의 경계가 동서는 2000여리, 남북은 1500여리에 달했다. 지금은 이미 신라와 백제를 합병하여 동북쪽은 조금 넓어졌지만, 서북쪽은 거란과 접하고 있다. 옛날에는 대요(대요)와 접하고 있었는데, 훗날 대요의 침입을 받자 내원성(來遠城)을 쌓아 요새로 삼았다. 이는 압록강(鴨綠江)을 믿고 요새로 한 것이다. 압록강의 水源은 말갈에서 나오는데, 그 물빛이 오리의 머리 색 같으므로 그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요동에서 500리쯤 흘러가다 국내성을 지나서 서쪽으로 흘러 한 강물과 합류하니, 이것이 염난수(鹽難水)이다. 두 강물이 난나 서남쪽으로 안평성(安平城)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
高麗之中, 此水最大. 波瀾淸澈, 所經津濟, 皆艤巨艦. 其國恃此, 以爲天塹, 水闊三百步. 在平壤城西北四百五十里, 遼水東南四百八十里. 自遼已東, 卽舊屬契丹, 今虜衆已亡. 大金以其地不毛, 不復城守, 徒爲往來之道而已. 鴨綠之西, 又有白浪黃嵓二水, 自頗利城行數里, 合流而南, 是爲遼水. 唐正觀間, 李勣大破高麗於南蘇, 旣渡, 怪其水淺狹問之, 云是遼源. 以此知前古未嘗恃此水以爲固, 此高麗所以退保鴨綠之東歟. |
고려에서는 이 강이 가장 크다. 물결이 맑고 투명하여 지나는 나루터마다 모두 큰 배가 정박해 있는데, 고려에서는 이를 천연의 요새로 여긴다. 강물의 너비가 300보인데, 평양성에서 서북으로 450리, 요수에서 동남으로 480리 떨어져 있다. 요수 동쪽은 옛날에는 거란 땅이었는데, 지금은 그 오랑캐 무리가 멸망하였고, 그 땅이 볼모지이기 때문에 후금(後金)에서는 다시 성을 쌓아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한갓 왕래하는 길이 되었다. 압록강 서쪽에는 백랑(白浪), 황암(黃嵓) 두 강이 있는데, 파리성(頗利城)에서 2리쯤 가다가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른다. 이것이 바로 요수이다. 당나라 정관 연간(627~649)에 이적이 남소(南蘇)에서 고구려 군을 대파하고, 강을 건너가서 그 강물이 매우 얕고 좁은 것을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이것이 요수의 근원”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로써 옛날에는 이 강을 요새로 여기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고려가 후퇴하여 압록강 동쪽을 확보한 것이 아니겠는가? |
・ 견아상제 : 땅의 경계가 일직선으로 되어 있지 않고 개의 이빨처럼 들쭉날쭉 서로 어긋나 있는 형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