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순의 시세계
그리움의 파도가 부르는 노래
-빈 잔의 독백에서 아직 중년의 뜨락 사이
김진광(시인, 문학평론가)
1. 들어가기
김정순 시인은 동해 지역에서 오랫동안 작품 활동을 하다가 늦깎이로 2012년 『시사문단』으로 등단하여 동해문협과 동해여성문학회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시인이다. 필자가 김 시인을 알게 된 것은 동해여성문학회 출판기념회 겸 작품 낭송회에서 혹은 동해와 삼척 문학행사에서 가끔 만나면서 부터이다. 대화를 나누다가 강릉김씨 같은 집안이라는 걸 알면서부터 가까워졌고, 그래서 이번에 작품해설을 맡게 되어 몇 차례 만나 차를 마시며 시집에 게재될 작품과 작품집 얘기를 나누었다.
올해가 칠순이 되는 해라서 칠순 기념으로 시집을 내려고 하였다. 그는 품성이 따뜻하고 말수가 적고 겸손하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 수준을 낮추어 작품집이 혹 세상에 공해가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을 하며 몇 번이고 망설였다.
김정순 시인의 작품집은 그의 처녀 시집이다. 시력으로 봐서는 두세 권 정도의 시집이 이미 나왔어야 하는데, 서두르지 않는 성격이라서 시집 발간 또한 등단처럼 좀 늦은 편이다. 이번 작품집은 시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창작한 작품 중에서 고르다보니 시의 소재와 내용이 다양하다. 소재는 바다, 계절, 종교(기도), 자연(꽃 포함), 가족, 차(茶), 추억, 삶 등에 관한 것이 많았다. 주제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그리움’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그 외에 현실 비판과 자아 성찰, 자연과의 동화, 종교를 통한 어려운 현실 극복 의지, 삶을 통한 깨달음의 세계 등이었다.
독일 최고의 시인이자 극작가인 괴테는 “꽃을 주는 것은 자연이고, 그 꽃을 엮어 화환을 만드는 것은 예술이다”라고 하였다. 그럼 예술의 한 장르인 시는 무엇인가? 시는 사람의 감정을 심상(image)과 운율(rhythm)을 살려서 압축하여 표현한 짧은 글이다. 좋은 시란, 바깥 사물인 외연(外延)과 성질의 전체인 내포(內包)가 모든 의미를 통일한 것으로, 정서와 상상력을 통한 인생의 표현이며, 생명의 재해석이 되어야 한다. 좀 쉬운 말로 하면, 표현하려는 대상을 시란 형식의 좋은 그릇에 의미인 좋은 내용물을 담아서 읽는 독자에게 재미와 감동을 주었을 때 좋은 시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김정순 시인의 좋은 시를 찾아 함께 여행을 떠나보자.
함께 작품을 살펴볼 제목을 「그리움의 파도가 부르는 노래」라고 붙여 보았는데, 이것은 바다에 시적자아가 자신을 의탁한 작품이 많기도 하고,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가 사랑하는 그리운 임을 향해서 밀려오는 시인의 마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살펴볼 범위를 시의 제목을 인용하여 흘러간 추억과 쓸쓸히 앉아 마시는 ‘빈 잔의 독백’에서,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용기를 내어보는 ’아직 중년의 뜨락‘ 사이로 잡아 보았다. 되도록 필자의 시 이론이나 시 해설은 간략히 줄이고, 다양한 소재와 내용의 시를 분류해서 많이 소개하고 안내하고자 한다.
2. 빈 잔의 독백
시집 제목을 놓고 차를 마시며 논쟁이 있었다. 최종 「아직, 중년의 뜨락」, 「빈 잔의 독백」, 「문득」 등이 최종 결선에 올랐는데, 교직에서 퇴직을 한 여동생은 「빈 잔의 독백」이 언니에게 딱 맞는 시집 제목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본인은 정작 웃기만 하고 결정을 하지 않아서, 필자도 시집 제목이 궁금하다. 시인은 같이 행복하게 사랑의 포도주를 마셔야할 대상이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바다에 나가 빈 잔에 바다를 부어 마시며 독백을 한다. 그렇다고 김 시인을 페시미즘(pesimism, 비관주의)라고 할 수 없지만, 아래의 시들은 그러한 분위기가 조금은 묻어난다.
마음이 추워/ 따끈한 커피를 마신다/ 가느다란 향 따라/ 아련히 다가오는 그리움//
매서운 겨울바람 싣고/ 월파하는 작은 배/ 왜 슬퍼 보일까//
사랑이었을 때/ 정겹던 별들/ 가슴에 사무치는 한 조각 파편//
마주할 이 없는/ 바람부는 거리/ 반가운 이 만날까/ 옷깃을 매만져 보지만//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 무심히 돌아보는/ 인적 끊긴 보도/ 흩날리는 낙엽만 말이 없다//
등대 잃고 표류하는/ 난파선처럼/ 오늘도 덧없는 하루였는가//
마음의 주인은 누구이며/ 바라볼 푯대는 어디인가//
식어버린 빈 잔에/ 독백을 담는다
-「빈 잔의 독백」 전문
소개한 시는 여동생의 말처럼 시인의 마음을 가장 잘 대변한 그의 대표작품 중의 한 편이다. 시적자아는 마음이 춥다. 그래서 따뜻한 커피를 마셔보지만, 그 것이 어찌 사람의 마음속까지 따뜻하게 하겠는가. 그의 마음은 등대 잃고 표류하는 파도에 휩쓸린 슬픈 한 조각의 작은 배일뿐이다. 혹 반가운 사람을 만날까 거리를 걸어보지만 역시 함께 동행하는 건 흩날리는 낙엽뿐이다. 그래 식어버린 빈 잔에 독백만 담고 돌아오는, 시인의 쓸쓸한 가을 거리 같은 심정을 쉬운 말로 서정적으로 잘 표현한 좋은 작품이다.
빛바랜 망루대
해변을 무심히 보고
접힌 파라솔 찬바람 깃들고
바다는 침묵으로 고요하다
지나는 여인들
모래 위 흔적 남기고
파도는 허무를 외친다
계절처럼 변하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고
갈매기 울음소리 빈 하늘에 꽂힌다
촛대바위 너머
거대한 상선 말없이 떠 있고
삿대 없는 조각배는
목말라 떨고 있다
조개껍질로 엮은 인연
잊지 못할 추억의 해변
벌거벗고 뛰놀던
그립다 그 바다
-「추암, 가을 해변」 전문
세월이 약이라지만/ 뜨겁던 사랑도 추억도/ 해무 속으로 자꾸 묻히고
책상설합에 넣어두었던/ 오래된 곷씨/ 모래 위에 뿌리고/ 사랑했노라 써 보았지만
희미한 기억 범벅되어/ 후회와 아쉬움/ 썰물처럼 휩쓴 자리
야속한 파도 밀려와/ 주름의 허무만 남긴다
-「망각의 바다」 전문
김정순 시인이 쓴 시 중에는 바다에 자신을 의탁한 작품이 많다. 「추암, 가을 해변」 은 그의 시 중에 드물게 지역성(locality) ‘추암 해변’이 드러난 작품이며, 한 장의 바다 풍경을 눈으로 보는 듯한 생생한 표현이 공감각적으로 잘 표현된 좋은 작품이다. 뜨겁던 여름 잔치가 끝난 해변을 시적자아에 비유하며 옛 추억을 그리워 한다. 여기에 나오는 단어 몇 개 ‘빛 바랜, 접힌 파라솔, 침묵, 고요, 흔적, 허무, 빈 하늘, 삿대 없는’를 살펴보아도 그런 분위기를 감지할 수 있겠다.
역시 바다를 소재로 한 작품 「망각의 바다」도 뜨겁던 사랑도 추억도 바다 해무 속으로 자꾸 묻힌다. 시적자아는 책상서랍에 넣어두었던 꽃씨를 꺼내 모래 위에 뿌려보지만, 사랑의 씨앗이 싹터서 자랄 수 없다. 그래 썰물이 밀려간 자리에는 모래톱 파도의 주름만 남는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세월 속에 아픔이 잘 치료되지 않음이다.
그래서 황혼 즈음에 문득, 꿈틀거리는 참을 수 없는 통증에 아물지 않는 상처를 쓰다듬으며, 나의 뜨겁던 사랑, 혹은 내 꿈인 은하수 저 멀리 있는 내 별을 찾는다. < 문득, 꿈틀거리는/ 참을 수 없는 통증// 점점 희미해지는/ 놓아 버릴 수 없는 미련들// 화산처럼/ 가슴 조이며/ 뜨겁던 사랑아, 사랑아,// 폭풍이 몰고 온 아픔과 고통/ 몸부림 쳐 보지만// 아물지 않는 상처/ 잡히지 않는 바람아// 은하수 저 멀리/ 내 별은 어디에( 「내 별은 어디에」전문 ) >
충고나 조언을 하지 마세요/ 마음이 아파요/ 백 마디 말 대신/ 그냥 같이 있어요
선입견 편견 갖지 마세요/ 사람마다 말 못할/ 상처 하나 쯤 다 있어요
잘못과 오류도 지적 마세요/ 어리석고 미련한 것 다 알아요
지금은 정답 필요 없어요/ 그냥 들어주세요
-「공감이 필요해요」 일부
약장수의 말은/ 매력적이고/ 제비의 유혹은 달콤하여/ 정신을 잃는다//
그들의 말에 숨어있는/ 비수와 함정/ 거짓과 모순들이 황홀하다//
말 탄 왕자님 꿈꾸고/ 하루 밤 기와집/ 열두 채 짓고 부수며/신기루 따라/ 아지랑이 길을 간다//
오늘도/ 이룰 수 없는 현실과/ 버릴 수 없는/ 꿈속에서/ 헤매고 있다
-「감언이설」 전문
앞의 작품들은 현실 비판의 시이다. 「공감이 필요해요」 는 살아가면서 힘들 때. 오히려 충고나 조언, 선입견이나 편견, 잘못과 오류 지적에 더 마음이 아플 때가 있다. 그냥 같이 있어주고, 그냥 들어주는 것이 더 필요하다는 작품이다. 「감언이설」 은 사자성어를 제목으로 하여 작품을 시로 형상화한 좀 특이한 작품이다. 약장수의 말, 여자를 꾀는 물 찬 제비는 춤과 말로 상대방을 유혹한다. ‘그들의 말에 숨어있는/ 비수와 함정/ 거짓과 모순들이 황홀하다’는 역설적(paradox)인 기법이 이 시를 돋보이게 한다. 마지막 연처럼 살아간다는 건, ‘이룰 수 없는 현실과/ 버릴 수 없는/ 꿈 속에서/ 헤매는’ 것이 아닐까? 이 외에도 현실을 비판한 시들로는 숙성되지 않고, 얄팍하고 천박한 왜곡된 진실 ‘계산은 맞는데/ 쓰린 마음’을 노래한 「마음의 이끼」 등의 작품들이 있는데, 이것들도 현실 부정의 어둠을 노래한 시들이다.
이따금 꿈속에서 만나는 당신/ 지난 세월만큼 희미해져/ 미쳐 몰라보면 어쩌나 걱정도 됩니다// 작은 인연으로 만나/ 사랑으로 맺어진 당신과 나의 끈이 있어/ 서러운 마음 여미고 다독이다// 져며오는 그리움에 가슴 아프면/ 한편 모퉁이 숨겨둔 마음/ 애써 꺼내 때려주곤 합니다// 전화 왔구려/ 야속히도 복이 없어 함께 잡지 못한/ 당신의 끈에게서……
-「끈」 전문
나를 쏙 빼어 닮은 첫돌배기 우리 손녀/ 별로 잘 나지 않았지만 재롱이 얼마나 귀엽고 예쁜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아/ 손뼉 치며 즐거워하는 아들과 며느리// “우리 채경이 얼굴은 별로지만 하는 짓이 너무 예쁘지?”// 순간 야릇한 기류를 타고 아들이/ “어머니, 윤숙이 지금 삐쳤거든요”/ “왜?”/ “내가 못 생긴 코미디 여배우 닮았다고 했거든요”/ 또 다시 흐르는 침묵…// 옛날 누가 말했던가/ 자기 새끼는 눈이 배꼽에 붙어도 예쁘다고…
-「실수」전문
김정순 시인의 시에는 사랑하는 애인에 대한 ‘그리움’의 많은 시 외에도 가족과 관련된 시들도 여러 편 있다. 「끈」에서 끈은 당신과 나를 이어주는 ‘자식’을 일컫는 은유(metaphor)로, 서러운 일이 있을 때는 자식을 생각하고 마음을 여미고 다독이는 대상이다. 그러나 시의 맨 끝부분에서 ‘야속히도 복이 없어 함께 잡지 못한 끈에게서……’하고 함께 하지 못함을 복 없고 야속하게 생각하고 있다.
「실수」는 요즘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관계를 소재와 내용으로 한, 대화체 형식으로 재미있게 시로 형상화 한 작품이다. 시적자아는 오늘날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현실이 반영된 시다. 이러한 가족이야기를 다룬 시로는 추억과 그리움을 주제로 한 「오래된 서랍」, 김소월의 ‘초혼’이 생각나는 「그리움 」, 애완동물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다룬 「안녕, 예삐 」등이 있다.
3. 아직, 중년의 뜨락
시인은 금년 구월에 칠순이다. 그런데 시인의 바다는 봄이요, 중년의 뜰이다. 별을 헤아리고, 봄햇살을 받으며, 추억의 아련한 안개 속 바다를 걸어가며, 눈 속으로 구름이 흐르고, 마음에는 보랏빛 그리움이 싹튼다. 시인은 봄바다, 아직 중년의 뜰이다. 몸은 늙어도 마음은 젊다. 그리움의 파도가 되어 추억과 쓸쓸히 앉아 함께 마시는 ‘빈 잔의 독백’에서 이제 벗어나고 싶다. 그래서 탈출구를 찾는다.
중년의 뜨락에 서서
별들의 파편을 세어 본다
봄 햇살을 받으며
아련한 안개 속 바다를 걸어본다
내 눈에 작은 구름이 흘러가고
마음엔 보랏빛 그리움의 싹이 돋는다
아픔을 씻고 사랑을 노래하니
아름다운 연록의 봄이어라
바다에 손발을 담그면
초록물이 곱게 들 것 같은
봄 바다, 아직 중년의 뜨락
-「아직 중년의 뜨락」
시인은 자신의 삶을 붙잡고, 숨기고, 꼭 걸어 잠그기가 이제 무겁다. 세상으로 가는 길 쪽으로 난 잠겼던 문을 열고, 사람들 세상으로 걸어서 들어간다. 그러나 문을 활짝 열지 못하고, 문틈이나 문구멍으로 세상을 다시 바라본다. 그리고 망설이고, 다시 옛날처럼 마음이 허전해지기도 한다. 어찌 보면 추억의 바다와 마시는 빈 잔의 독백이 그리운지도 모른다.
김 시인이 등단한 시 「자화상」은 60대 중반 자신의 모습을 화폭에 그리면서도, ‘아직/ 꿈은 푸르러/ 오늘도 거울을 본다’며 그의 마음속에는 봄의 씨앗이 꿈꾸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면류관처럼/ 자랑스런 연륜인데/ 왜 부끄럽고 서글퍼질까// 돌아서면 자라는 야속한 백발/ 추하지 않으려는 작은 몸부림/ 삶의 심원한 힘이었는지 몰라// 지나간 젊음은 오지 않고/ 파뿌리 할머니 되어도/ 아직/ 꿈은 푸르러/ 오늘도 거울을 본다( 「자화상」일부 >
붙잡기
숨기기
닫아두기
너무 무겁습니다
-「삶」 전문
빼앗기고 싶은데
아무도 뺏지 않네.
문 쬐끔 더 열어야 하나?
-「내 마음」 전문
창밖을 본다/ 텅 빈 하늘 꼭대기/ 피뢰침만이 묵묵히 서 있고/ 석양이 드리워진 담벼락/ 유령처럼 흔들리는 나무// 문을 연다/ 뿌연 안개 낀 수평선/까마득히 다가오는/ 외로운 배 한 척// 자리에 누워본다/ 오랜 적막을 깨치는/ 작은 모기의 굉음//애써 잠을 청해 보지만/ 점점 희미해지는 얼굴들// 어느새/ 추억을 먹고사는 내가 우스워/ 바람 없는 풍선처럼/ 돌아 눕는다
-「허전한 마음」 전문
김정순 시인의 시는 대체로 호흡이 긴 편인데, 앞에 소개한 두 편 「삶」과 「내 마음」은 단시이다. 그의 단시들을 읽으면 시의 색다른 맛을 더해준다. 떠나는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을, 붙잡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희로애락(喜怒哀樂)의 자기 속마음을 숨기고 살기도, 헤프지 않게 적당히 마음을 닫아두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이런 말 앞에 수식어를 생락한 간결한 시의 맛이 담백하다. 사람들은 잠긴 대문은 빠끔히 들여다 보며 들어가 보고 싶어하지만, 열린 대문은 큰 관심이 없기도 하다. 그래서 잠가 놓았던 문을 살짝 열어두었는데도 관심이 별로 없다. 마음의 대문을 쬐끔 더 열어야 하나 하고 자신에게 묻고 있다. 두 편의 단시는 세상을 향해 문 열기를 시도한 간결한 시이다.
「허전한 마음」 은 시의 회화성(image)과 시적 비유를 통한 시의 형상화가 잘 된 작품이다. ‘텅 빈 하늘 꼭대기, 유령처럼 흔들리는 나무, 뿌연 안개 낀 수평선, 외로운 배 한 척, 바람 없는 풍선’ 등의 시구에서 시적자아의 허전한 마음을 읽을 수 있겠다.
비탈 쓰레기 더미
작은 나무
겨우내
홀로 떨더니
봄 되어
붉은 매화 만발했네
난, 아직도 엄동설한
언제 활짝 피려나
-「고진감래」 전문
창밖 춘설
다시 보니
벚꽃
눈꽃 같이
오는 계절
사월
그 길
나비 되어
날아가고파
-「사월」 전문
꽃샘추위 이기고/ 수줍게 핀
마음 설레게 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아픔과 슬픔 견디며/ 눈물 마르지 않지만
따뜻하고 부드러운/ 꽃잎처럼 살고파
오늘, 문득, 여기,
보아도 만져도 마셔도/ 질리지 않는
산수유 같은 인연 만나
예기치 않은 기쁨
꽃향처럼 맛 볼 런지
-「산수유」 전문
위의 시 3편은 모두 봄꽃을 소재로 한 시로, 앞 쪽의 2편은 격언이나 잠언 같은 아포리즘(aphorism)의 짧고 간결한 시이며, 봄꽃처럼 피어나고 픈, 나비처럼 날아가고픈 시적자아의 밝은 마음을 노래했다. 「고진감래」는 사자성어를 제목으로 하여 추운 겨울을 견뎌내고 꽃을 피운 매화나무를 시로 형상화 하며, 자신도 활짝 꽃 피우고 싶은 화자의 마음을 담은 군더더기 없이 간결한 시이다. 「사월」은 창밖에 온 춘설은 다시 보니 벚꽃일세, 사월은 눈꽃처럼 오는 계절이라 화자는 말한다. 쉽고 간결한 짧은 말 속에 4월이 담겨 있다. ‘그 길/나비 되어/ 날아가고파라’하고 시인의 서정(lyric)으로 마무리 한 시가 더욱 돋보인다.
「산수유」에서 시인은 ‘꽃샘추위 이기고/ 수줍게 핀/ 마음 설레게 하는/ 그대는 누구인가’하고 의인화 하여 묻는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꽃잎처럼 살고파’하는 참신한 표현이 돋보인다. 그리고 함께 동행할 ‘산수유 같은 인연 만나/ 예기치 않은 기쁨/
꽃향처럼 맛 볼 런지‘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 한다. 김 시인은 꽃을 소재로 한 시를 통해 봄처럼 새롭게 잎 피고 꽃 피어나기를 소망 한다.
자꾸 어딘가 떠나고 싶다./ 역마살이 끼었나?/ 살풀이 하러 어디로 갈까?/ 김동인의 소설 역 마 속/ 성기처럼……
-「여행 중독」 전문
알프스 빙하 덥힌/ 산맥 아래/ 레만 호수 떠도는/ 백조를 본다
차가운 마음 덥히려/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뜨거운 마음 식히려/ 냉커피를 마시며/ 그의 속마음이 궁금하다
마음은/ 파리에서 달려와 / 스위스 로잔에 왔는데
문득/ 둘러보니/ 동해의 카페 로잔
크로와상 빵조각을/ 앞에 두고 / 벽에 걸린 로잔의 황혼을/ 쳐다보고 있다
-「카페 로잔」 전문
화려한 가을 안에서
자꾸 슬퍼지는 나
발자국 친구 삼아 오솔길을 걷는다
레드 카펫처럼 펼쳐진 고운 단풍
내가 걸어야 할 길인가
이끼 낀 바위 말없이 쳐다본다
고즈넉한 산사
저마다 다른 사연으로
합장한 순례자들
간절한 소원 풍경에 매달면
물소리 되어
골골이 울려 퍼진다
더 높이 더 멀리 더 안으로
어서 오라 손짓하는 산
저물어 가는 가을 속
황홀하게 걷고 있다
-「가을 산행」 전문
시인은 여행을 즐긴다. 현실에 안주하기 어려울 때는 현실 밖의 세상으로 탈출구를 찾는다. 그래서 김동인의 소설 속 주인공 성기처럼 역마살이 끼었나 하고 자신에게 묻고 있다. 아래에 소개하는 시 2편도 앞의 시 「여행 중독」 과 관련 있는 시들이다.
「카페 로잔」은 시인이 자기 건물에서 운영하던 커피점 이름인 둣하다. 거기에 걸린 그림을 보며 쓴 시이다. 그림을 보며, 여행을 했던 스위스를 상상하고, 시적자아의 인생을 양념하여 버무려서 맛있는 김장을 담그듯이 좋은 시로 형상화 하였다. ‘차가운 마음 덥히려/ 뜨거운 커피를 마시고// 뜨거운 마음 식히려// 냉커피를 마시며/ 그의 속 마음이 궁금하다’에서 시인의 삶을 짐작할 수 있겠다. 시집에 함께 실린 「콜롬비아 슈프레모」는 해발 1,800m 안데스 산맥에서 원두커피의 최상급 커피인 ‘콜롬비아 슈프레모’ 쓴 맛의 커피를 마시며, 인생과 집시 영혼의 음악을 한 편의 시에 버무려 넣은 이색적인 시이다.
「가을 산행」 은 김정순 시인의 대표 작품 중의 한 편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의 맛은 시의 시작인 ‘화려한 가을 안에서/ 자꾸 슬퍼지는 나’와 시의 마무리인 ‘저물어 가는 가을 속/ 황홀하게 걷고 있다’의 역설적(逆說的) 표현의 묘미가 이 시를 더 빛내 준다. 그리고 ‘더 높이 더 멀리 더 안으로/ 어서 오라 손짓하는 산’을 향해 ‘내가 걸어야 할 길인가’하고 시인은 묻고 있다,
지금 와 생각하니/ 내 이름이 너무 귀하다/ 부모님 날 낳으시고 지어준/ 그 이름 석 자로 어엿하게 살았으니// 예전에는 몰랐다/ 내 인생이 아름답고 순탄하다는 걸/ 삶이 가시밭길이라 생각했는데/ 아프지 않은 인생은 없다는 것을// 지금 자세히 보니/ 내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앞만 바라보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아직 다리에 힘이 있으니// 중략 // 이제 알았다/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 지금 여기 내가 있다는 건 축복
-「늦게 드는 철」일부
메밀밭 애잔한 달빛처럼
슬픔이 내 안에 숨 쉬는 날
삶이란
사탕같이 달콤한 것이 아니라는 걸
왜 진작 몰랐을까
오늘도 한 발 한 발
짜디짠 소금 길
마음으로 녹이며 걷고 있다
슬픔조차도 찬란한
삶의 밑거름임을 배워가며
웃는 법을 배운다
길가에 피어나는 들꽃처럼
-「슬픔에서 홀로서기」전문
육이오 난리 통에
죽지 않고 살아났고,
마마, 장티푸스 이기고,
보릿고개 날 넘기고,
자식 셋
손자 여섯 얻었으니
이만하면
성공한 삶 아닌가
-「구사일생」전문
아버지여, 이 잔을 거두어 주소서/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중략// 경건한 마음/ 참회와 절제로/ 깨어 있게 하소서// 주님 가신 그 길 따라 가렵니다.
- 「사순절」일부
김 시인의 시에는 삶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깨달음이 담긴 철학적인 시들이 몇 편 있었다. 그 중 「늦게 드는 철」은 지금 와 생각하니 ‘내 이름이 너무 귀하고, 내 인생이 아름답고 순탄하고, 가장 소중한 것은 나 자신, 지금 여기 내가 있다는 건 축복이다.’는 걸 깨닫는다. 「슬픔에서 홀로서기」는 내 안에 존재하는 슬픔에서, 삶이란 사탕 같이 달콤한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고, 짜디짠 소금 길을 마음으로 녹이며 걷는다. ‘슬픔조차도 찬란한/ 삶의 밑거름임을 배워가며/ 웃는 법을 배운다/ 길가에 피어나는 들꽃처럼’의 역설적인 깨달음을 얻는 시다.
「구사일생」도 삶에서 깨달은 시이며, 육이오 사변 때도 살아나고, 마마와 장티푸스 같은 병 속에서 살아남아, 이제 아들 딸 놓아 손자 여섯을 보았으니, 이만하면 나도 성공한 삶 아닌가 하고 독자에게 묻고 있다. 자기 삶에 대한 긍적적 질문으로 바뀌었다.
「사순절」은 기독교인으로 시적자아가 내 뜻대로 삶을 살 때 아버지이신 하느님 뜻대로 살게 해달라는 기도의 시이다. 그리고 경건한 마음 참회와 절제로 깨어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기도하는 종교적인 시로는 ‘홀로 지새는 이 밤에, 감사, 생로병사, 가슴에 별 하나, 짝사랑’ 등의 많은 시들이 있다. 시인은 혼자서 헤쳐나가지 못하는 삶은 하느님께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다. 즉 하느님께 기도하며 삶의 용기를 얻고 있는데, 이것들이 시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도 한다.
4. 나가면서
김정순 시인은 세 자녀를 키우며, 여기까지 열심히 살아왔다. 이번에 칠순 기념으로 그 동안 창작한 발표 작품과 미발표 작품을 모아 처녀시집을 묶어낸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그는 품성이 따뜻하고 말수가 적고 겸손하다. 그래서 자신의 작품 수준을 낮추어 작품집이 혹 세상에 공해가 되지 않을까 하고 걱정을 하며 몇 번이고 망설였다. 그의 시는 ‘빈 잔의 독백’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용기를 내어보는 ’아직 중년의 뜨락‘ 사이의 글이다. 그는 작품을 쓸 때 쉬운 언어 선택으로 독백이나 대화를 하듯 쉽게 쓰는 편이다. 그래서 시낭송용으로 좋은 작품이 많이 보였다. 그러다가 보니, 압축이나 새로운 기법과 참신성에서 좀 아쉬운 면이 없지 않았다. 그러나 대체로 이미지(image)와 서정(lyric)이 좋고, 살면서 터득한 삶의 철학이 담긴 좋은 작품이 의외로 많았으니 첫 시집으로 이만하면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의 시 소재는 바다, 계절, 기도, 꽃, 가족, 커피, 추억, 삶 등에 관한 것이 많았다. 소제 중에는 봄에 관한 것들이 다수 있었다. ‘봄의 염원, 연두빛 미소, 봄맞이, 봄 감기, 나른한 봄 햇살, 이른 봄 바다에서’ 등이 봄과 관련된 작품이었다. 이것은 안개 속 힘든 삶에서도 봄이 내재된 일상이었음을 말해 준다고 할 수 있다.
시의 주제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 외에 현실 비판과 자아 성찰, 자연과의 동화, 종교를 통한 어려운 현실 극복 의지, 삶을 통한 깨달음의 세계 등이었다. 자연과의 동화(同化)를 꾀하는 작품으로는 「소나무」(호숫가/ 홀로선 늙은 소나무// 중략 // 보는 이 없어도 외로워하지 마/ 슬픔이란 덩어리/ 호수에 던지고/ 싱그러운 바람과 속삭여 봐/ 이름 모를 철새와 즐겁게 노래 해), 자연(새)을 친구로 삼아 자신의 마음을 의탁하여 동화를 꾀하며 유유자적하는 시인의 마음을 읊은 시로 「소나무」( 흔들리는 나뭇가지/ 날아온 작은 새// 집을 지을 보금자리/ 찾지 못하였나// 그 곳이 어디든/ 고은 정 들면/ 그런대로 살아지니// 그냥/ 여기서/ 친구하며/ 세월이나 낚자구나 <시의 일부>) 등이 있다.
유태인계 출신인 독일의 시인 하이네는 “봄이 뭣인가는 겨울이 돼서 처음 알게 된다. 자연에의 사랑은 감방의 꽃, 감방에 있으므로 처음으로 자유의 값을 알 수 있다.” 고 하였다. 김 시인의 시세계는 안개 속에 앞길이 잘 보이지 않거나 추운 겨울 ‘빈 잔의 독백’에서 봄을 내재한 ‘아직, 중년의 뜨락’으로 자유롭게 나비가 되어 날아 다니리라. 하니네는 또 “위대한 시인은 낡은 것을 파괴하는 동시에 새로운 일의 기초를 닦는다.”고 했다. 김정순 시인뿐만 아니라, 시인들은 모두가 시의 기법이나 테크닉과 내용물이 몸에 벤 메카니즘(mechanism)을, 낡은 시정신을, 탈피하고 새로운 시 창조와 사회개혁의 기초가 되기 위하여 감성이 살아 있어야 한다.
김정순 시인의 칠순 기념 처녀 시집 발간을 축하드리며, 지금까지 쓴 작품을 묶어 한 권의 시집으로 세상에 펴내었으니, 다시 새로운 마음으로 새 출발을 하여 더 발전된 작품들을 많이 발표하고, 늘 건강하기를 기원한다.
끝으로 천상병 시인의 대표작품 귀천(歸天)에 비교되는 김 시인의 시 「동행」을 함께 감상하며, 김정순의 작품집 시 여행을 마친다.
쫓기는 짐승처럼
달리는 석양
뜨겁게 상기되어
나를 따라 오네
그래 같이 가자
얼마 남지 않은 길
꽃향기 가득한 들판을 지나
싸리나무 숲을 헤치고
작은 시내 건너
양지 바른 아담한 집 잠시 머물고
산허리 서성이다
큰 산 넘어 가벼렸네
정답게 마주하고
나누고 싶은 마음
붉은 노을이 달래주네
쏜살같은 세월
70 킬로로 달리는
중고 자동차 즐거운 여행 길
첫댓글 칠순을 맞이한 시인의 첫 시집, 빈 잔에 열정의 해설주를 그득 채워 축하해주는 김진광 선생님 목소리가 들리는듯 합니다. 동해 파도 소리며 솔바람소리도 들리네요~~^^
늘 개성이 넘치는 좋은 동시와 시를 쓰시는 김춘남 시인 반갑네요. 긴 해설 읽어주셔서 감사![!](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
^^합니다. 늘 좋은 날 되소서![!](https://t1.daumcdn.net/cafe_image/pie2/texticon/ttc/texticon54.gi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