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65년 시리아를 무혈점령하여 이름뿐인 셀레우코스 왕조에 종지부를 찍은 로마의 장군 폼페이우스(Pompeius)는, 유대왕국의 내분을 기회로 BC63년 유대왕국마저 점령하고, 그의 부하장수였던 가비니우스(Gabinius)에게 점령지의 통치를 맡긴 후 로마로 귀환하였다. 가비니우스는 유대왕국은 다섯 지역으로 구분하여 각각의 공회(Council)를 구성한 다음, 공회가 백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제1공회는 예루살렘(Jerusalem), 제2공회는 가다라(Gadara), 제3공회는 아마투스(Amathus), 제4공회는 여리고(Jericho), 제5공회는 갈릴리의 세포리스(Sepphoris)였다. 이렇게 하여 유대인들은 마카비왕조의 왕정에서 벗어나서 귀족정치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그렇지만 대제사장을 왕(각하)이라고 호칭하며, 그가 명목상의 유대국의 최고 통수권자로 있어서, 마치 근대에 생긴 입헌군주제와 같은 정치체제가 되었다.
가비니우스를 뒤이어 BC54년에 크라수스(Crassus)가 시리아총독에 부임하였는데, 그는 로마의 제1차 삼두정치의 한 명이었다. 그의 목적은 중동지역의 패권을 놓고 로마와 경쟁하는 파르티아왕국을 원정하는 것이었다. 파르티아는 알렉산더 대왕에게 멸망한 페르시아제국의 뒤를 이어 바빌론 지역을 기반으로 형성된 후, 중동에 진입한 로마의 패권에 대항하는 강력한 왕국이었다.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원정을 위해서 예루살렘성전에 있던 돈 2천달란트와 금 8천달란트를 몰수하였고, 순금박으로 된 성전의 들보(beam)를 뽑아갔다. 그러나 파르티아원정에 나선 크라수스는 BC53년6월12일에 전사하였고, 미리 전선에서 이탈한 카시우스(Cassius)를 빼고는 로마군 약4만명이 죽거나 포로가 되었다.
율리우스 시저는 로마원로원이 내세운 폼페이우스를 BC48년 파르살로스 전투에서 이기고 로마의 권력을 잡았다. 율리우스 시저는 유대국을 선대하였으나, BC44년 그가 로마의 원로원파에게 암살당하자 로마는 다시 내전에 휩싸였다. 그러나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 연합하여 BC42년에 있었던 필리피 전투에서 원로원파인 카시우스와 부르투스를 이김으로써 로마의 권력을 장악했다. 유대국에서도 헤롯과 안티고누스간에 권력싸움이 벌어졌다. 멸망당한 마카비왕조의 왕자인 안티고누스는 파르티아의 군대를 끌어들여 헤롯을 공격하였다. 이에 헤롯은 로마로 가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BC40년 헤롯은 로마원로원의 결의로서 유대국왕에 임명되었다. 헤롯은 로마의 기대에 부응하여 유대지역의 정치적 안정을 이루었으나, 그는 유대인이 아니라 이두매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에 의해서 그의 왕권에 대한 정통성시비가 항상 따라다녔다. 이두매인들은 유대인들이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가자 남유대지역을 차지하고 살다가, 마카비왕조때 유대인들에게 복속되어 할례를 받고 유대교로 개종한 에돔(or 에서)의 자손들이다.
헤롯은 로마의 후원으로 유대국왕이 되었지만, 그의 유능함을 처음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가 인정하였고, 안토니우스가 BC31년 악티움해전에서 패배하고 자결한 후에는, 아우구스투스와 그의 오른팔인 아그립바가 인정해주었다. 헤롯의 정책은 로마에 충성하고 자신의 혈통으로 유대왕국을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는 유대교에 따르지 않는 현실정치인이었기 때문에 로마의 문화를 유대 땅에 이식시켰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로마에 충성하는 것을 굴욕으로 생각했고, 이두매인이 유대국왕으로 있는 것에 대하여 반발하였다. 따라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헤롯은 로마의 앞잡이고,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서 유대공주인 아내의 친족들을 모두 죽인 잔인한 사람이고, 모세의 율법을 따르지 않는 이방인이었다.
BC4년에 헤롯왕이 죽자 그의 상속자들은 로마로 가서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헤롯의 유언장을 승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한편 시리아 총독 바루스(Varus)에게서 유대국의 자유를 로마황제에게 청원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유대인 대표 50명도 로마에 도착하였는데, 로마에 거주하는 8천명 이상의 유대인들이 그들을 지지하고 있었다. 황제는 왕궁 안에 있는 아폴로신전에 로마에 사는 모든 유대인의 유력인사들을 소집했다. 이에 많은 유대인들이 유대인 대표들과 함께 한쪽 편에 서고, 반대편에는 헤롯왕의 유언장에서 유대왕국을 상속받은 그의 아들 아켈라오와 아켈라오의 측근들이 서게 되었다. 그러나 아켈라오의 형제들과 친척들은 양쪽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들은 아켈라오에 대한 미움과 질투심 때문에 같은 자리에 설 수 없었고, 그렇다고 그의 반대편에 서자니, 황제의 눈에 유대인 대표들처럼 아켈라오의 고소자로 비칠까봐 두려워서 설 수가 없었다.
황제는 먼저 아켈라오의 고소자들에게 발언권을 주었다. 유대인 대표들은 이렇게 말했다. "헤롯은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폭군중의 폭군이었습니다. 헤롯에게 죽음을 당한 사람은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습니다. 그러나 그의 통치 밑에서 살아남은 것은 오히려 고역이었습니다. 그는 외국인들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 유대인들을 피흘리게 한 자였습니다.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행복을 주는 대신 가난을 안겨다주었으며, 조상 전래로 내려온 율법을 준수하는 대신에 우상으로 유대국을 가득차게 만들었습니다. (중략) 저희들은 헤롯이 저희를 노예나 다름없이 만들어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자발적으로 헤롯의 후계자인 아켈라오에게 복종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3천명의 시민들을 학살함으로서 그의 통치의 서막을 장식했습니다. 황제께서는 저희 유대인들을 불쌍히 여기시어 폭군의 손에서 구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유대국을 시리아에 편입시키시고, 로마에서 파견한 총독들의 통치를 받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이번에는 헤롯왕의 고문이었던 니콜라우스(Nicolaus)가 고인이 된 헤롯왕과 그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아켈라오를 변호하면서 유대인 대표들이 제기한 고소를 조목조목 논박하였다. 그는 "유대인들은 다스리기 힘든 민족이며, 천성적으로 왕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민족입니다"라고 말한 후, 아켈라오를 버리고 오히려 그를 비난하는 자들 편에 가세한 아켈라오의 형제들과 친척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황제는 양편의 주장을 들은 후에 아무런 결정도 내리지 않고 바로 모임을 해산시켰다. 그리고 나서 며칠이 지난 후에 결론을 내렸다. 아우구스투스는 아켈라오를 유대국 전체 왕이 아닌 헤롯왕이 다스렸던 영토의 반(이두매와 유대와 사마리아)을 다스리는 분봉왕(Ethnarch, 연세수 600달란트)으로 임명하면서, 선정을 베풀면 후에 왕으로 격상시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남은 영토는 두 개의 분봉국(tetrarch)으로 나누어, 베레아와 갈릴리는 안티파스(연세수 200달란트)가 다스리고, 나머지는 필립(연세수 100달란트)이 다스리게 하였다.
아켈라오는 그의 분봉국을 차지한 후에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을 가리지 않고 폭정을 휘둘렀다. 그의 통치 10년만인 AD6년에 아켈라오의 형제들 및 유대와 사마리아의 유력인사들은 백성들을 학대하는 아켈라오의 통치를 견디다 못해 아우구스투스에게 고소했다. 이에 황제는 아켈라오를 로마로 소환하여 그를 면담한 후에, 아켈라오를 고울(Gaul)지방의 비엔나(Vienna)시로 추방하고 그의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때부터 로마의 황제에 의해서 유대총독들이 파견되었고, 그들이 시리아총독의 감독을 받으면서 아켈라오가 다스리던 유대땅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누가복음 19장11절~27절은 '은화 열 므나 비유'가 나온다. 이것은 마태복음 25장14절~30절의 '달란트 비유'를 약간 다르게 서술한 것이다. 즉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의 종 열을 불러 돈(은화)을 주면서 자기가 돌아올때까지 장사를 하게 했다.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중략)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