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고려수지침 대구 복현지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역사이야기 스크랩 친일청산 왜 중요한가
오분순타 추천 0 조회 57 13.08.23 05:4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친일청산 왜 중요한가

 

일제 시대에 사회 상층부에 진입했던 사람들은 대부분점령 세력인 일본에 협력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친일파’라고 불리는 민족반역자들이 그 뒤 줄곧 진행된 근대화 과정에서 전혀 처벌받지 않고 사회의 주역으로 행세합니다. 경제와 정치와 언론과 교육과 문화에 대한 거의 모든 권한을 다 가지게 됩니다. 그 자손들 역시 공부 많이 하고 해외 유학도 다녀오고 기업을 물려받음으로써 우리 사회 지도자가 됩니다. 그러나 독립 투사의 자녀들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보십시오.

 

민족문제연구소의 연구에 따르면 독립 운동했던 사람들의 자녀들 절반 이상의 학력이 중졸입니다. 독립유공자 60퍼센트가 극빈자로 살았습니다. 전통을 이승만 정부가 고스란히 이어받습니다. 그 이후에 군사 독재 정권이 역시 고스란히 이어받습니다. 근대화가 진행되는 백 년의 세월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세력은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 집단이었습니다. 식민지 부역세력이 해방된 뒤에 그 사회의 근대화 과정을 지배한 나라는 전 세계에 거의 없습니다. 대한민국과 월남이 그 드문 예에 속합니다.

 

도덕적 우월성을 상실한 세력이 사회를 지배한다는 것은 그들의 개인적 비도덕성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반에 근대적 합리성과 이성적 상식이 자리잡지 못하는 비극이 초래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교육, 언론, 경제, 정치, 각종 제도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 부도덕한 사람들이 자신에게 불리한 내용들은 절대로 실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친일청산 왜 중요한가

(일하는 사람들의 작은책 7월호)

 

친일파 얘기를 하면 “아~ 또 그건가” 합니다. 그러나 우리 현대사에서 워낙 중요한 과제이기 때문에 얘기를 안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오늘날 해결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의 영원한 암적 존재로 남아서 앞으로도 큰 비극이 일어나게 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아마 여기 오신 분들에게는 오히려 이런 이야기가 필요 없을지도 몰라요. 여기 안 오시는 분들, 지금 이 시간 어디선가 나쁜 짓을 하는 사람들이 이 얘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생전 들을 생각을 안 하고 꼭 안 들어도 되는 분들을 앉혀 놓고 제가 이 재미없는 얘기를 또 해야 된다는 걸 고맙게 생각하면서도 대단히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여기서 들으시는 분들은 가셔서 ‘이런 얘기를 들어야 되는 사람들’에게 좀 전해 주십시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을 어떻게 바로 잡느냐, 거기에 초점을 맞춰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세계사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가 식민지 전성시대죠.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 홉스봄이 분류한 시대 구분에 따르면 1875년부터 1914년까지를 세계 제국주의의 전성시대(The Age of Empire)라고 합니다. 이때 지구 위의 모든 나라가 식민지가 돼요. 제국주의 세력이 산업혁명 이후에, 괴테의 말을 빌리면 ‘군함과 대포를 먼저 만들었다’는 이유로 남의 나라를 침략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전에는 <<아라비안나이트>>를 낳은 아랍 문명이나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문명이 유럽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아랍인이 스페인까지 쳐들어갔잖아요. 한때는 전 유럽의 반을 지배했습니다. 십자군의 원정도 실패하잖아요. 오히려 기독교 문명보다 회교 문명이 더 과학적으로 앞섰을 때도 있었습니다. 기독교 문명 초기에는 고대 과학의 최고봉인 아리스토텔레스조차도 금서 취급해 버리니까 과학이 발전하지 못했지요. 나중에 아리스토텔레스가 기독교 문명권에서 금서에서 풀리면서 과학이 발달하기 시작했고 또 동로마제국이 멸망(1453)해서 학자들이 유럽으로 들어가면서 르네상스와 대양 항해의 시대가 급격하게 발달합니다.

 

그러다 군함과 대포를 기독교 문명권에서 먼저 만들고 '지리상의 발견'이니, '복음 전파'니 뭐니 하는 이치에 안 맞는 술어를 조작해 내면서 식민지 약탈을 감행해 나갔습니다. '발견'이라는 것도 말도 안 되죠. 왜냐면 아무도 못 본 걸 처음 봐야 발견인데 거기 원주민들이 살고 있는데 가서 처음 봤다고 하면 원주민들은 뭐에요? 제가 문학평론가로 등단한 직후에 쓴 글에 그런 내용이 있었습니다. '아메리카 ‘발견’이라는 말은 우리나라 세계사 교과서에서 고쳐야 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어째서 그게 발견입니까? 이제는 미국에서도 발견이라는 말을 빼야겠다고 콜럼버스에 대한 재평가가 나오고 있습니다.

 

인디언들이 살고 있는데 가서 발견했다고 하며, 땅 이름도 ‘아메리고’가 발견했다고 ‘아메리카’라고 짓고……. 말이 됩니까? 여러분들이 살고 있는 집에 누가 와서 “아, 내가 집 한 채 발견했다. 이거 우리 집이다” 하면 여러분은 가만히 있겠어요? 미국의 원주민들이 일어나서 땅 소송 굉장히 많이 걸고 있어요. 제가 미국 원주민 문학에 관심이 있어서 조사해 보니까 지금 재판 걸린 것도 많고 이긴 경우도 있어요. '지리상 발견'의 시대부터 백인 기독교에 의한 지구 식민지 역사가 시작되거든요.

 

 제일 먼저 유럽에서 가까운 곳부터 식민지를 찾습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로 바로 내려가려니 아랍권이 하도 세니까 못하다가 나중에는 결국 아프리카와 중동도 약탈의 대상이 되지요. 그리고는 인도를 약탈하려는데 중동이 가로막고 있으니 바다 건너로 찾다가 찾다가 중남미를 점령했죠. 그 다음 인도, 베트남, 캄보디아로 죽 오면서 동남아시아를 다 식민지로 만듭니다. 동남아는 태국을 빼놓고 전부 식민지가 되었죠.

 

그런데 유럽에서 제일 멀리 떨어진 곳이 중국과 한국, 일본입니다. 태평양을 건너오자니 너무 멀죠. 19세기만 해도 미국에서 우리나라로 올 때 지금처럼 태평양을 바로 건너서 못 왔습니다. 미국에서 북상, 캐나다, 알래스카, 알류샨 열도, 캄차카 반도, 쿠릴열도를 따라 일본 홋카이도를 거쳐 오면서 계속 연료를 공급받아야 했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유럽의 식민지가 안 된 거예요. 그리고 조선은 중국 것이란 관념이 팽배했습니다. 서양 사람들 머릿속엔 조선은 중국 땅이라는 생각이 있었어요. 조선을 차지하려면 중국의 허가를 맡아야 되는 거라서 함부로 침략을 못한 겁니다.

 

1858년 북상하여 아편전쟁 패배로 맺은 1842년의 난징조약(南京條約) 이후에는 중국도 야금야금 먹어 들어갔죠. 제2차 아편전쟁으로 다구포대(大沽?台, 天津 소재)가 침략자에게 뺏김으로써 동양의 질서가 무너지는 계기가 디지요. 우리나라 양반들에게도 하늘 같이 믿었던 중국이 '서양 오랑캐'에게 항복을 했다는 것은 우주관이 뒤바꾸는 사건입니다. 그런데 중국은 너무 크기 때문에 식민지로 못 만들고 분할해서 여러 나라가 나눠 먹자고 된 겁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明治維新, 1867)으로 빨리 서구 문명을 받아들입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러시아 등에 유학생들을 보내 국가 정책부터 문학, 예술까지 한꺼번에 다 받아들입니다. 일본이 그때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던 속도는 KTX보다 더 빨랐어요.

세계 패권의 흐름을 보면 처음에는 포르투갈이 패권을 잡습니다. 그 패권이 스페인으로 넘어갔다가 무적함대(Spanish Armada)가 영국에 패하면서(1588) 패권은 영국으로 넘어갑니다. 그 다음에는 영국과 프랑스가 패권을 놓고 대결하는데, 그러는 동안에 독일은 유럽에서는 후진국이 됩니다. 그래서 독일이 식민지 수는 제일 적어요.

 

식민지는 스페인, 영국, 프랑스가 독식했죠. 물론 폴투갈과 네델란드 등이 식민지 쟁탈전에서 획득한 게 있지만 대충 이 세 나라가 세계를 삼등분합니다. 미국은 그때까지 별 여유가 없었어요. 미국은 1861년부터 1865년까지 남북전쟁을 하거든요. 자기 나라 수습하기 바빠서 남의 나라 먹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1860, 70년대가 되면 지구의 거의 다를 차지해 버립니다. 동남아는 다 그 나라들 식민지였잖아요. 너무 큰 중국과 너무 먼 조선과 일본만 빼고 말입니다.

 

19세기 말이 되면 이제 먹을 사람이 더 많이 나와요. 미국이 남북전쟁 끝난 뒤에 몸을 추스려서 뭘 좀 먹어야겠다고 돌아보니까 전부 임자 있는 땅입니다. 먹을 땅이 없어요. 그러니까 남이 먹은 걸 뺏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미국이 먹은 땅이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쿠바와 필리핀입니다. 1898년 미국과 스페인 사이에 전쟁이 일어나죠. 정확히 말하면 쿠바 독립전쟁에 미국이 몇 가지 구실을 붙여 끼어든 전쟁입니다. 지금도 미국은 그러지 않아요? 어떤 명분이든지 내걸고 전쟁을 하는 거지요. 남의 뱃속에 있는 걸 뺏어내려니까 전쟁 말고 뭐가 있겠습니까. 스페인이 졌죠.

 

그래서 쿠바는 명목상 스페인으로부터는 독립했으나 미국의 그늘로 들어가 지금 세계인의 이목을 받고 있는 관타나모가 미군의 해군기지(1903)가 되었고, 푸에르토리코 ·괌 ·필리핀은 미국 지배로 들어갑니다. 그리고 필리핀을 기지로 해서 동남아를 먹으려고 하니 동남아는 다 임자가 있어요. 임자 없는 나라를 보니 조선, 중국이에요. 눈독을 들이는 거죠.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에 제일 눈독을 들인 나라는 러시아죠. 중국은 조선은 이미 자기 거라는 인식이 박혀 있었습니다. 러시아, 미국, 영국이 조선을 탐내죠. 영국이 우리나라를 먹을까 생각하고 만든 게 거문도(巨文島事件)입니다.

 

남의 나라에 허가도 없이 대포 장치(1885년 4월 - 1887년 2월)를 다 해 놓고 있다가 결국 자진 퇴각합니다. 그 다음에 한반도에 손을 뻗은 게 일본입니다. 그 목적을 위해 일본은 1902년 영일동맹을 맺은 겁니다. 그에 앞서서는 1894년 갑오농민전쟁을 핑계로 청일전쟁을 일으켜서 청나라가 조선에서 물러나게 만들었죠. 그러고 나서 영일동맹을 맺어서 중국에서의 영국의 이권을 인정해 주는 대신 영국이 조선을 포기하도록 만듭니다. 그 다음 한 것이 1904년 러일전쟁입니다. 러시아가 조선을 먹으려 했기 때문에 그것을 막기 위해서 일으킨 전쟁입니다. 러시아가 패배했죠.

 

그 다음 남은 게 미국이죠. 그래서 맺은 게 카츠라-태프트밀약(1905. 7.29)입니다. 그 조약의 내용이 조선은 일본이 먹고, 그 대신 필리핀은 일본이 손 안 댄다 하는 겁니다. 일본이 필리핀과 가깝기 때문에 일본이 필리핀에 가면 미국이 큰 손해를 보게 되니까요. 이걸 우리는 전혀 모르고 있었어요. 그러다 2차 세계 대전 끝난 뒤에 비밀문서가 공개되면서 알게 된 겁니다. 그것도 모르고 미국이 독립운동 도와준다고 이승만이 미국 가서 독립운동 한 거 보면 참 가관이지 않아요? 미국 정부는 이미 조선은 일본 거라고 다 합의를 해 놓았는데 거기 가서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독립청원운동하고 있었던 게 이승만입니다.

 

카츠라 테프트조약의 잉크도 안 마른 3달 남짓 뒤인 11월 17일 일본은 바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강압, 사실상 한국은 식민통치로 들어갑니다. 왜 이런 얘길 자세히 하냐면 일본이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삼게 된 근본적인 원인을 정확히 알아야 친일파의 개념과 본질을 정확하게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걸 모르고 무작정 친일파 나쁘니 어쩌니 하면 얘기가 안 돼요. 국제 조약이란 건 강대국에 의해서 하루아침에 휴지가 되고는 합니다. 항상 힘이 센 나라가 파기하지 힘이 약한 나라가 파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북핵 문제도 그렇습니다. 우리나라 신문 보면 전부 이북이 약속을 파기한 것처럼 되어 있어요. 하지만 사실은 미국이 파기한 겁니다. 부시가 대통령이 되더니 그 전에 했던 약속을 어기고, 준다던 기름도 안 주고 하면서 이북이 화나도록 일부러 만든 거예요. 그래 놓고 화를 내면 너 왜 약속 안 지키고 화내나? 하고 몰아가죠. 약소국을 침략하는 명분은 항상 강대국, 침략자에 의해서 만들어집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가면, 그렇게 일본이 미국한테도 다 손을 써 놓고 조선을 전쟁으로 침략했습니까?

 

왕과 장관을 위협해서 도장을 강제로 찍게 했죠. 한일 합방, 사실 이 ‘합방’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됩니다. ‘강제 병탄’이라고 써야 합니다. 합방이라고 하면 마치 우리가 남녀가 죽이 맞아서 결혼을 하듯이 우리가 일본과 뜻이 맞아서 땅을 내준 것처럼 됩니다. 강제 병탄이 되자 조선에서는 의병운동이 일어납니다. 일본이 우리 의병을 얼마나 잔혹하게 탄압했습니까? 그 뒤 1931년 만주에 엉터리 국가를 세웁니다. 그 다음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1941년 2차 세계 대전 때는 미국에게도 선전 포고를 하고 동남아까지 다 쳐들어갔습니다.

 

나폴레옹이 독일을 침략했을 때만 해도 독일은 112개의 군소 영주 국가들로 나눠져 있었습니다. 나폴레옹이 다스리기 좋게 그것들을 통폐합합니다. 합스부르크 왕가(오스트리아)와 프리드리히 왕가(프로이센)가 그 가운데 가장 강력한 나라였습니다.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는 재상이 되어 빌헬름1세 밑에서 통일 공작을 합니다. 독일이 통일을 하면 누가 제일 배가 아플까요? 프랑스입니다. 독일이 나누어져 약해져야 프랑스가 평화로운데. 독일이 커지면 프랑스가 빼앗아 먹을 게 없으니 독일 통일을 반대합니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보불(프로이센-프랑스)전쟁(1870-1871)입니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의 시대적 배경이 바로 이때입니다. 보불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를 제외하고 독일이 통일(1871)됩니다. 그런데 독일 통일 선언을 베르사유궁전에서 합니다. 굉장히 상징적이죠. '너 프랑스, 우리 독일 통일 반대했지? 너 이제 전쟁에서 졌으니 우리 여기서 독일 통일 선언한다.' 이게 역사입니다.

 

독일이 통일한 뒤에 힘이 생겼어요. 그리고 식민지 먹으려고 하니 먹을 데가 한 곳도 없었습니다. 그게 바로 독일이 세계 대전을 일으킨 이유입니다. 그러니까 지구상의 모든 전쟁은 약탈 전쟁인 것입니다. 어떤 명분도 없습니다. 지금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일어난 비극도 그 명분이야 뭐든 따지고 보면 약탈 전쟁입니다. 독일이 1차 세계 대전 일으켰다가 실패했는데 포기 안 하고 또 재기합니다. 그것이 2차 세계 대전입니다. 아마 또 어느 나라는 3차 세계 대전을 틀림없이 준비할 겁니다.

 

그래서 친일파를 쳐내야 된다는 겁니다. 설마 그럴 리가 있겠냐고요? 미국이 이라크를 침략할 이유가 있었습니까? 일본이 우리나라를 다시 침략하려면 명분이 없어서 못할까요? 명분은 얼마든지 찾으면 돼요. 일단 전쟁을 일으켜 놓으면 명분은 학자들이 만들어 줘요. 머리 좋고 양심은 불량한 학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이렇게 말하면 유럽에는 좋은 정치인들 많지 않느냐고 하는데 유럽에 그런 정치인들이 왜 많은 줄 압니까? 국민들이 하도 비판을 하니까 그런 거예요. 지금 이탈리아 베를루스코니 총리 하는 꼴을 봐요. 그게 우파 보수주의 정치인들의 본질입니다.

 

모든 권력은 다 그것을 남용하려 하고 국민들의 것을 뺏고 싶어 하고 남의 나라를 쳐들어가고싶어 하며 지구 위의 뭐든 마음대로 차지하고 싶어 합니다. 나라 밖으로 보면 작은 나라를 계속 침략하려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왜 다 그렇게 못하냐면, 국민들과 세계인들이 하도 비판하니까 그런 거예요. 국민들이 눈 똑바로 뜨고 나쁜 정치행태를 물어뜯는 수밖에 없어요. 이 본질을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친일파도 이해 못합니다. 일본은 노략질을 늦게 배웠거든요. 조선 먼저 먹고, 만주에 괴뢰국 만들어서 마음대로 주무르다가 중국을 다 먹으려 하려는데 그 경쟁자가 미국이니 제2차대전을 할 수밖에 없죠.

 

 중국을 먹는 방법을 일본은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일단 만주를 잘라냈죠. 만약 일본이 망하지 않았으면 티베트도 잘라내고 위구르도 잘라내고 그랬을 거예요. 지금 중국의 내분 문제도 이런 관점에서 봐야 할 겁니다. 티베트나 위구르 문제를 미국이나 영국에다 대입시켜 보세요. 미국의 캘리포니아나 흑인 밀집지역을 독립시키라거나, 아일랜드 문제를 거론하면 미국과 영국이 가만히 있을까요? 자기 나라의 약소민족은 탄압하면서 남의 나라 인권문제는 거론하는 이 제국주의의 모순!

 

태평양전쟁은 미국과 일본의 동남아 쟁탈전입니다. 우리는 괜히 학도병으로 가서 죽은 거죠. 이광수 같은 사람은 만약에 이 전쟁에서 일본이 이기면 캘리포니아 주지사는 일본 사람이 하겠지만 그 밑에 군수 정도는 조선 사람도 시켜 줄 것 같아서 친일에 앞장섰다고 해요. 어째 그런 생각밖에 못하는지. 그런 건 시켜 주지도 않을 테고, 시켜 줘 봤자 우리가 얻을 게 없습니다. 이미 우리말도, 우리 이름도 없어져 버렸어요. 그런데 우리가 캘리포니아의 어느 고을 군수를 해서 찾을 게 뭐가 있겠어요. 더욱 강력해진 일본이라 오히려 독립은 더욱 어렵게 되었겠지요. 독립운동 하던 사람들은 망명지에 따라서 크게 나뉩니다.

 

미국으로 간 미국파, 소련으로 간 소련파, 중국으로 간 중국파. 그런데 중국파는 또 둘로 나뉩니다. 국민당 쪽에 있던 김구파가 있고 모택동 쪽에 있던 연안파가 있습니다. 그리고 국내파가 있었고, 그 밖에는 거의 친일파입니다. 그럼 국내에 있던 사람들은 또 어떻게 나뉠까요? 처음 나라를 빼앗겼을 때 세 파가 있었습니다. 첫째, 가장 열렬한 애국주의자들이 바로 동학 농민전쟁파입니다. 이들은 나중에 거의 다 의병이 됩니다. 동학이 나중에 천도교가 되는데 그 가운데 이용구를 비롯한 세력이 친일에 앞장서잖아요. 동학이 둘로 나뉘어져 친일파 돼 버린 동학과 항일하던 동학으로 나눠집니다.

 

둘째, 위정척사파가 있습니다. 최익현 같은 유학자들입니다. 올바른 유학자는 다 애국자입니다. 물론 그 가운데 변절한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나라 뺏겼다고 자결도 하고 의병도 됩니다. 사실 의병이 된 유학자들 가운데는 '쌍놈'들하고 같이 의병을 하려니 밥도 같이 못 먹겠다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래서 의병들 사이에 그런 봉건적 벽이 있다가 나중에는 없어져요. 나중에 중국으로 간 독립군들은 완전히 계급을 타파하고 그야말로 평등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그 다음 셋째가 개화파입니다. 개화파는 우리도 빨리 일본처럼 서구 문명을 받아들여서 힘을 기르자는 사람들이데, 개화파에서 친일파가 제일 많이 나옵니다. 개화파의 우두머리 윤치호가 한 명언이 있습니다. 조선 사람이 행복해지는 길은 하나다. 전 조선의 복음화, 전 조선의 일본화란 겁니다. 그런데 모순이 있죠? 일본 사람들은 기독교 안 믿거든요. 어쨌든 윤치호의 생각은 전 조선인들이 일본 사람이 되고 기독교인이 되는 게 행복해지는 길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철학을 가진 사람이 친일 하겠어요, 안 하겠어요?

 

개화파들이 친일 하는 것은 아주 쉬워요. 위정척사파는 ‘우리의 왕국’이라는 관념이 강하고 무엇보다 의리를 중요하게 여기잖아요. 물론 민주주의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없지 않지만. 동학도 그런 점에서는 철저하죠. 그런데 지금으로 말하면 개발론, 경제성장론 이런 게 전부 잘못된 개화파 논리의 변종입니다. 쉽게 말해서 남의 노예가 돼도 좋다. 돈만 모으면 된다 하는 건데, 그러면 남의 노예 되는 거죠. 개화파가 다 그런 건 아닙니다. 1920년대 들어온 마르크시즘도 개화파가 들여온 것입니다. 그네들은 주체성이 있는 개화파죠. 그래서 저는 용어를 바꾸었어요. 민족주체적인 개화파와 사대의존적인 개화파. 사대의존적인 개화파는 다수가친일파입니다.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한 것은 단순한 무력 침략이 아닙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우리나라를 지배하기 위한 충분한 준비를 한 것입니다. 그런 반면 당시 우리나라의 썩어 빠진 학자들이나 왕실, 관리들은 나라를 발전시킨다면서, 국민을 잘 살게 해주겠다면서 도리어 외세에 업혀서 그 힘을 끌어들인 겁니다. 쉽게 말하면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를 '애국'이나 '문화운동'이나 '산업 발전'이란 명목으로 착착 진행시켯다는 뜻입니다.


3 ? 1운동을 계기로 이른바 ‘문화 통치’를 하겠다며 허가를 내준 것이 <조선일보>, <동아일보>입니다. 이 신문들은 창간 기념일만 되면 민족지라고 주장합니다. <동아일보>가 자랑하는 품목 중에 ‘손기정 일장기 말소 사건’이 있습니다. 여운형이 사장으로 있던 <조선중앙일보>와 <동아일보>가 비슷한 시기에 이 사건을 다뤘지요. 당시 동아일보 일부 기자들이 우리가 가만히 있으면 되겠냐고 조금 손을 댄 거죠. 그때는 체육부가 따로 없고 사회부 안에 체육 담당 기자가 있었어요. 애국적인 소설가 현진건이 그때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어요. 그는 엄청나게 고생하고는 목이 잘렸습니다.

 

현진건은 그때 자하문 밖에서 닭을 기릅니다. 글만 쓰고 살던 사람이 닭 기를 줄을 압니까? 이 훌륭한 작가는 만년을 무척 어렵게 살다가 작고했죠. 돈이 없어서 쓴 소설이 그 혹독한 식민통치 아래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한 <흑치상지>, <무영탑> 같은 역사 소설들입니다. 지금까지도 <동아일보>는 유신 때 쫓아낸 기자들한테 사과를 않고 버티잖아요. 그런 사례가 이미 일제 때 있었습니다.

우리가 역사를 알면 오늘의 한국은 달라질 겁니다. 우리나라의 제일 큰 문제는 빈부 격차도 있지만 지식의 격차가 너무 큰 것이에요. 경상도와 전라도는 지역감정만이 아니라 역사인식이나 사회와 세계를 보는 시선도 무척 다릅니다.

 

역사를 너무 모르기에 생긴 가치관의 차이입니다. 내 고향이 경북 의성인데, 거기서 박정희가 여순사건과 관련됐다고 하면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해요. 여순사건이 뭔지도 몰라요. 그런 사람들이 우리나라 정치를 망치잖아요. 정말로 박정희가 자기들 먹여 살린 줄 알아요. 1970년대에 내가 얼마나 가난하게 살았는데. 여러분들은 1970년대에 잘 살았습니까? 다 어렵게 살았습니다. 그렇건만 추억은 아름답다는 식으로 그때가 좋았다고들 합니다.

 

다시 일제 강점기로 돌아가면, 이렇게 문화 통치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조선인들에 의한 조선인 통치’를 시작합니다. 그건 헌병 통치에서 경찰 통치로 바뀌지만 사실 아무것도 바뀐 건 없어요. 그냥 헌병대 가서 조사받던 것을 경찰서 가서 받은 겁니다. 오히려 경찰이 헌병보다 더 악질이에요. 그때 이런 변화를 앞장서서 선전한 것이 이광수 같은 사람들입니다. 이광수는 처음에는 일진회의 장학금을 받아서 일본 유학을 다녀왔고 그 다음에는 김성수의 도움을 받아서 유학을 갑니다. 와세다대학교를 다니면서 1917년에 우리나라 근대 소설의 효시라고 하는 <무정>을 연재합니다. 그런데 이 <무정>을 연재하게 된 과정이 참 기가 막힙니다.


이광수가 1916년에 <매일신보>에 <대구에서>라는 기행문을 써요. 이 글은 당시 타락하고 방황하는 국내외의 조선 청년들(실은 그 원인이 경제적인 어려움일 수도 있고, 나라 잃은 설음도 있으며 망국한의 독립투사일 수도 있는데 이를 뭉뚱그려서 이광수는 강도 사건으로 포장한다)에게 "동경에 와서 2,3년간 교육을 받노라면 번연(?然) 인구몽(引舊夢)을 버려 이전 동지(독립운동가 동지)에게 부패하였다는 조소까지 듣게" 된다고 썼다.

 

이에 감동한 <<매일신보>> 사장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 1862-1936)의 조력으로 소설 <<무정>>을 연재하게 된 이광수는 군국주의 지지자 도쿠도미 소호(德富蘇峰·1863~1957) 등의 도움으로 승승장구했지요. 일본 유학을 가기 전에 이미 결혼을 해서 조선에 아내가 있던 이광수는 1918년 일본에서 만난 연인 허영숙과 베이징으로 여행을 갑니다. 거기서 신채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을 만나 도쿄와 너무 다른 분위기에 일말의 충격을 받고 옵니다.

 

그 충격 때문에 1919년 2월에 도쿄의 유학생들이 모여서 2·8독립선언운동을 하잖아요. 이광수가 이때 독립 선언문를 씁니다. 변절을 한 거죠. 이광수가 독립운동을 하다가 나중에 친일로 변절한 게 아니라 쭉 친일을 하다가 이때 잠깐 변절을 한 겁니다. 그러고 나서 상하이로 피신을 합니다. 상하이에 있던 망명객들이 너무 반가워하면서 임시정부(1919.4 발족) 기관지 <독립신문>의 사장 겸 편집국장을 맡게 되지요.

 
일본이 보기에 참 아깝죠. 잘 길러 놨더니 엉뚱한 길로 빠졌거든요. 여러분이 일본 경찰이라면 이광수를 어떻게 다시 끌어내겠어요? 허영숙 밖에 없었을 겁니다. 허영숙의 상하이행이 자진인지 일경의 사주인지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그녀나 이광수가 바보가 아닌 이상 무작정 사랑을 찾아 이역만리 떠날 허영숙도 아니고, 아무리 사랑이 좋아도 여인을 따라 귀국할 이광수도 아니겠지요. 그 공간은 여러분 상상에 맡깁니다. 어쨌든 상하이의 독립 운동가들이 극구 만류했지만 이광수는 그것을 뿌리치고 조선으로 들어와요.

 

국경을 넘자마자 잡혀 갈 줄 알았는데, 일본 경찰이 '어서 오십시오' 하고 서울로 오도록 둡니다. 그는 허영숙과 정식 결혼, <민족적 경륜>, <민족 개조론> 따위의 글을 씁니다. 우리나라가 망한 것은 일본이 쳐들어왔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 국민들이 우리나라를 다스릴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에게 독립을 줘도 우리 힘으로 우리나라를 못 다스려 나가니까, 지금은 열심히 교육에 힘쓰고 각자 자기 계발하고 수양하고 마음을 닦자 라는 글들입니다. 그런 글들이 발표되니까,

 

당시 학생들이 이광수를 때려죽인다고 들고 나서서 피신해 다니곤 했답니다. 그런데 요새 어떤 출판인은 이런 역사를 다 빼 버리고 <민족 개조론>이 명문이라고 책을 내기도 했어요. 참 미치겠어요. 이게 우리나랍니다. 그런 활약 덕분인지 이광수는 1923년 <동아일보> 논설위원에 앉기 됩니다. 당시 기자들 봉급이 30-40엔이었는데 그 10배나 되는 300엔 봉급을 받았답니다.


1920년대 후반 사회주의 문인 단체인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1925년 결성)’ 쪽에서는 <동아일보>에 일절 글을 안 썼습니다. 민족지가 아니라고. 카프 쪽에선 단체적으로 <동아일보>에 집필 거부를 하고 다 <조선일보>에 글을 썼어요.

 

 <조선일보>는 그렇게 잘 하다가 나중에 경영난에 부딪혀요. 그래서 사채를 빌려 썼는데, 사채업자가 욕심이 생겨서 자기가 사장이 되고 싶은 거예요. 기자들 중에도 돈 많은 사채업자를 사장으로 모시자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래서 사채업자를 사장으로 모시자는 기자들과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런 사람이 사장이 되면 안 된다는 기자들이 두 파로 나뉘어서 신문을 따로 내기도 하지요. 유신 때 <동아일보> 해직 기자들이 ‘진짜 동아일보’라는 뜻으로 <진동아>를 낸 것처럼.

 

이러는 틈에 이광수와 같은 평안도 출신의 시인 주요한과 몇몇 사람들이 방응모(方應謨,, 1883~1950년 납북)를 추대한 것이 제2기의 조선일보, 즉 친일지입니다. 이렇게 1920년대에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를 일본에 갖다 바치도록 만든 게 세칭 문화 통치였다는 말이죠. 그러고 나서 1931년에 만주에 가짜 나라를 만들어서 병참 기지화 해 놓고, 군관 학교도 만들었는데, 박정희도 거기 들어가잖아요. 그래서 중일전쟁(1937), 1941년에는 미국과 전쟁을 하다가 패망한 거거든요. 이런 과정 속에서 친일 세력들이 생겨납니다.

 

온갖 유형의 친일이 다 있어요. 관리로서 친일한 사람부터, 지식으로 친일한 사람, 글로 친일한 사람, 웅변으로 한 사람, 언론으로 한 사람, 기술로 한 사람, 독립운동가 때려죽이는 걸로 친일한 사람까지 온갖 유형의 친일이 다 있습니다. 그런 친일 행위자들을 해방이 된 뒤에 처벌합니까, 안 합니까? 못한 겁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란 이 격랑의 시대에 열강들은 대외적으로는 반소 전략과 식민지 확대라는 두가지 목표 달성을 위하여 이합집산을 거듭하면서도 내면적으로는 진보파를 억눌러야만 했습니다. 이런 기묘한 국제관계가 세계를 제2차 대전으로 몰았는데, 전쟁에 대한 단적인 국가이기주의의 예를 해리 트루만(Harry S. Truman, 1884-1972)의 말에서 절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아래와 같이 말합니다. 만일 독일이 승리할 것 같으면 우리는 러시아를 도와야 하며 러시아가 승리할 것 같으면 독일을 도와주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한 한 서로 많이 죽이게 하는 것이 좋다.


당시 상원의원이었던 트루만은 1944년 부통령에 당선, 이듬해 4월 루즈벨트(Franklin Delano Roosevelt, 1882-1945, 대통령 재임 1933-45, 미 역대 첫 4선 대통령) 사후 대통령이 되어 세계사는 물론 한반도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정치가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소련이 일본이나 독일하고 전쟁할 때 되도록 많이 죽도록 놔두라는 거였습니다. 소련군이든 일본군이든 독일군이든 많이 죽을수록 미국에게 이익이 된다고 했습니다. 소름 끼치지 않아요? 소련이 당시에는 같은 연합국이지만 전쟁이 끝난 다음에 자신들이 세계를 제패해야 되니까 전쟁을 하면서 이미 그때를 대비해야 한단 말이에요.

 

이념이나 동맹조차 국가 이익 앞에서는 무기력해져 주축국(독.이태리.일본)도 대러시아 공격에서 독일과 일본이 협조체제를 이룰 수 없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입니다. 뿐만 아니라 독일 침략으로 고전 중이던 러시아의 요청으로 연합국과 노르망디 상륙잔전 같은 대독 전선을 약속(1942)했으나 미.영은 오히려 독. 소 두나라의 약화를 노려 실행을 회피했습니다. 정작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실시된 1944년 6월 6일 경에는 이미 독일 주력군이 붕괴되어 유럽 전역에서 수세에 몰린 때였고 특히 러시아군이 이 해 3월부터 공세로 전환하여 동유럽으로 진격할 즈음이었습니다.

 

러시아의 유럽 점령은 연합군과 독일 모두에게 초비상사태였기에 독일은 대러시아 동부전선 방어를 조건으로 나치스 체제의 유지를 연합군과 흥정을 벌릴 지경이었으나 좌절되었습니다. 이미 그때는 독일이 계속 후퇴할 때에요. 독일의 항복은 시간 문제였어요. 소련이 독일을 밀어내면서 서유럽까지 물밀 듯이 들어옵니다. 그런데 만약에 미군과 영국군이 서유럽에 들어가기 전에 히틀러가 항복해 버리고 프랑스까지 러시아가 들어와 버린다면 어떻게 돼요? 유럽이 전부 사회주의화되는 거예요. 그걸 막기 위해서, 소련군이 유럽에 한 발이라도 덜 들여 놓았을 때 히틀러를 빨리 항복시키기 위해서 무리한 상륙 작전을 한 거예요.

 

일본에 원자 폭탄을 떨어뜨린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일본에 원자 폭탄이 떨어진 건 1945년 8월 6일과 9일입니다. 그때는 오키나와를 미군들이 점령했을 땝니다. 일본의 항복은 한 달 뒤냐 두 달 뒤냐가 문제였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어요. 원자 폭탄을 떨어뜨릴 필요가 없었어요. 하지만 소련에 대한 위협과 원자 폭탄의 실전 실험을 위해서 일본에 떨어뜨린 겁니다. 일본이 지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인데 문제는 소련군이 들어오는 거였죠. 소련군이 만약에 도쿄까지 들어간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일본이 분단되는 겁니다.

 

제1차 대전 이후의 베르사이유 체제가 유럽과 미주 제국주의 나라들의 세계 지배를 위한 반볼셰비즘 방역선이었면 제2차 대전의 산물인 얄타체제는 러시아 세력의 확산 억제와 식민지 해방투쟁의 근절을 위한 냉전체제의 구축이 그 목적이었습니다. 특히 지구 위에서 임자 없는 땅으로 남게 된 동북아시아 지역(중국 대륙과 한반도 일대)은 얄타체제 아래서 두 세력 간의 가장 탐스러운 대지로 부상하여 그 각축전이 치열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은 바로 이런 상황 아래서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립니다.

 

8.15 후 미국은 바로 한반도에서 소련을 포위하려고 했습니다. 그때만 해도 미국은 중국에서 국민당이 승리할 줄 알았어요. 스탈린조차도 마오쩌뚱의 공산당이 집권하리라고는 상상을 안 했습니다. 근데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이 집권을 했습니다. 1945년 당시에는 소련군은 우리나라 38선까지도 못 왔어요. 그런데 어차피 중국에서도 장개석이 집권할 거니까 한반도는 반 토막 내서 북쪽은 소련에 양보하고, 중국과 한반도 남쪽과 일본에서 소련을 포위하려고 작정하고 원자 폭탄으로 해결한 것이란 유추가 가능하지요.


그러자니 친일파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거기에다 이념적으로는 종교문제가 대두됩니다. 바로 기독교를 통한 반공 정신무장이지요. 기독교가 국교가 아닌 국가 중에서 가장 성공한 나라는 바로 대한민국일 겁니다. 우리나라 기독교의 본산은 평안도입니다. 1930년대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 기독교 신자는 10퍼센트도 안됐을 거예요. 근데 평안도에서는 그때 30퍼센트가 기독교 신자였어요. 평안도가 왜 그렇게 됐느냐면 다 우리나라 국정이 문란해서 그런 겁니다.

 

19세기 말이 되면 행정 조직이 말 그대로 개판이 되거든요. 관리들이 제 잇속을 채우려고 돈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무조건 때려요. 왜 때리느냐 하면, 무조건 “네 죄를 네가 알렸다”죠. 며칠 동안 매를 맞다가 논문서를 갖다 주면 풀어 줘요. 관리들이 그리 하는데도 아무도 지주들을 보호해 주지 못합니다. 근데 그 관리들에게 그 사람 풀어 주라고 나섰던 이들이 바로 서양 선교사들이었어요. 서양 선교사들한테는 관리들이 꼼짝 못했어요. 이러니까 부자들이 선교사를 찾아가서 예수 믿을 테니까 재산을 보호해 달라고 다 기독교인이 돼요. 그래서 1907년에 평양에서 한국 최초의 부흥회가 벌어지잖아요.

 

그 부흥회 주제가 이 고통스러운 시대에 어떻게 하나님과의 고고한 영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가라는 거였습니다. 한창 나라를 빼앗긴 판이었는데, 이런 혼란스러운 걸 떠나서 하나님과의 고고한 영적인 대화를 하자는 거예요. <몽조(夢潮)> 같은 그때 기독교 소설은 남편이 독립운동 하다가 사형 당해요. 부인이 너무 억울해 남편 원수를 갚고 싶어 못 견디고 있는데, 전도 부인을 만나 교회엘 나가면서 마음을 바로잡는다는 얘깁니다. 쉽게 말하면, 애국이니 독립이니 그런 걱정 하지 말고, 하나님과의 고고한 영적인 대화를 해서 위로를 찾고 천당 갈 준비나 하라는 겁니다.

 

물론 그때 선교사들은 순수하게 신앙을 전한다는 마음도 있었겠지만, 그리고 어떤 면에서 보면 그네들의 활동은 약소국에 강대국의 종교를 전한다는 것 자체로 약소민족의 민족의식을 일깨워주기도 했지만 그 역효과도 있었습니다. 물론 훌륭한 기독교인이 더 많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8·15해방이 되자 그렇게 미국 선교사한테 영어를 배우고 미국 유학을 다녀오고 사회 곳곳에서 권력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미군정 아래에서 교과서도 만들고 관리도 되고 경찰도 됩니다. 일제의 지배 구조 속에서 역할을 하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채용되는 거예요. 이것이 이승만 정부의 기초가 됩니다.

 

《친일인명사전》을 내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물어요. “그럼 친일파 후손들이 차별 대우받지 않느냐?” 세상에 그걸 질문이라고 하고 있어요. 우리나라에 자기 조상이 친일파였기 때문에 차별받은 사람이 얼마나 됩니까? 친일파가 대통령까지 한 나라로 차별 대우받은 건 언제나 독립운동가들이었죠. 성균관대 초대 총장이었던 김창숙 선생이 한 유명한 말이 있잖아요. 일제 때 독립운동 하다가 잡혔을 때 자기를 고문하던 사람이 해방 뒤에 이승만 반대하다가 잡혔을 때 또 자기를 고문하더래요.

 

그게 우리나랍니다. 친일파 후손이 누가 차별받아요? 자기 아버지, 할아버지가 친일했던 사람들 지금 전부 잘 살아요.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오히려 눈치 보고 차별 대우받죠. 우리는 유럽이 왜 그렇게 잘사는지 부러워하는데, 그들은 민족의식과 국민의식, 민주의식이 있기 때문에 잘 사는 겁니다. 독일이 과거사 사과 다 하고 돈도 다 나눠 줬다고 독일인의 국민성이 일본인들의 그것보다 우수한 게 아니에요. 독일이나 일본이나 다를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런데 독일만 왜 그렇게 했느냐? 유럽의 분위기에서 독일이 그리 안 하면 공존을 못하기 때문이에요. 지금도 파시즘에 부역했다는 증거가 발굴되면 공무원에서 해직됩니다. 지금도 재판 받고 징역 살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60년 전 이야기를 지금 왜 하느냐”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유럽에서는 지금 그때 사건 재판을 왜 합니까? 그러니까 유럽은 잘살고, 우리는 이 모양 이 꼴인 거예요.


일본은 어때요? 반성 안 해요. 태평양전쟁 일으켰던 그 철학이 그대로 있으니 선거하면 자민당이 당선되잖아요. 우리나라보다 더 보수적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하고 얼마나 죽이 잘 맞겠어요. 참 분통이 터져요. 그래서 저는 누가 지금 《친일인명사전》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가 뭐냐고 물으면 이렇게 말해요. 이걸 지금 해야 되는 가장 큰 이유는 동아시아의 평화를 위해서라고. 우리나라 친일파들을 심판하는 것은 나중 문제고 동아시아 평화가 먼저라고요. 일본을 보십시오.

 

일본은 70년 동안 정권 교체 한 번 못하다가 이번에 했어요. 우리나라보다 못해요. 일본 지식인들도 비겁해요. 하지만 일본이 계속 그렇게 뻔뻔하게 버틸 수 있었던 제일 큰 이유는 뭐냐? 우리나라가 이러니까 가능한 겁니다. 일본이 볼 때 우리나라는 자기들이 주입한 침략 철학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대를 이어 권력과 부를 물려받아 온단 말이죠. 당한 쪽이 아직 이렇게 정신 못 차리고 오히려 식민통치에 감사하고 있는데 가해자인 일본이 변할 이유가 없는 거죠. 그러니 기히가 있을 때마다 독도문제니 교과서 파동 등등이 간헐적으로 터지잖아요.

 

친일파들을 볼 때 행위 자체만 볼 게 아니라 그 철학을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사람들은 생리적으로 민주주의를 싫어해요. 그러니까 이승만 독재 지지, 5·16쿠데타 지지, 박정희 유신독재 지지, 전두환 지지로 이어지죠. 김대중, 노무현을 빨갱이라 보는 것도 같은 맥락이에요. 일제 때도 독립운동가하고 사회주의자를 같이 봤거든요. 일제 때도 일본이 물러가면 한국은 사회주의화되니까 한국이 사회주의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일본이 영원히 지배해야 된다고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기가 막힌 논리지요.

 

우리나라가 이렇게 《친일인명사전》도 내고 친일의 역사를 반성함으로써 중국이나 일본의 지식인들이 각성을 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한국이 저렇게 친일파 청산에 나섰는데 우리가 옛날에 했던 나쁜 짓들을 사과해야 되지 않을까’ 하고 반성을 하기 시작하면 일본이 민주화됩니다. 일본의 자민당이 다시 집권하게 둬서는 안 돼요. 자민당이 다시 집권하게 되면 우리나라도 민주화를 이루기가 굉장히 벅찹니다. 일본과 우리나라의 수구 세력들은 다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유럽처럼 우리나라도 과거사 청산을 깨끗하게 해 버리면 우리나라의 민주화뿐 아니라, 일본의 민주화까지 이루어질 수 있고, 그것은 바로 동아시아의 평화로 이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동아시아의 어떤 나라도 다시 다른 나라를 침략하겠다는 생각을 꿈에도 안 할 거 아닙니까? 그것이 우리가 친일파들을 청산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그리고 친일의 철학, 독재를 지지하고 외세에 빌붙어서 우리 국민들을 착취하는 철학 자체를 뿌리까지 없애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프랑스는 독일의 지배 아래에서 2주 이상 발행한 신문은 무조건 폐간시키고 재산을 다 압수해 버렸어요. 나치의 지배 아래에서 2주 이상 발행했다면 그 신문의 논조가 친나치든 아니든 반민족적 행동이라는 거예요. 그때 살아남은 신문들은 독일이 점령했을 때 나치의 지배 밑에서는 신문을 안 내겠다고 자진 폐간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프랑스가 해방된 뒤에 그 신문들만이 다시 살아납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유럽의 과거사 청산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봅시다.

 

프랑스는 나치 협력 혐의조사 대상자가 2백만 명, 체포 99만, 수십만의 공직. 군부 장교의 해직, 6천7백여 명의 사형 선고, 종신 강제 노동 2천 7백여 명, 유기 징역 2만 6천 여, 공민권 박탈 3천 6백 여 등등에 이르렀습니다. 이 수치는 프랑스 전 인구 10만 명 당 94명이 교도소에 갇힌 꼴인데, 이것조차도 오히려 유럽의 다른 나라에 비하면 적은 수자라는 것입니다.

즉 덴마크는 인구 10만 명 당 374명, 네덜란드는 419명, 벨기에는 596명, 노르웨이는 633명이었습니다.

 

역사학은 오늘의 유럽 민주주의가 정착하여 사회복지를 이룩한 바탕에 이런 나치 처리의 철저성 때문에 가능했다는 데 거의 다른 의견이 없습니다. 물론 현대 유럽을 인류의 유토피아로 보거나,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이냐는 문제는 다른 논란을 야기할 수도 있겠지만 지구 위에서 현존하는 여러 정치 경제 체제 중 인도주의가 상대적으로 잘 실현되고 있는 지역이란 점에서는 동의할 것이며, 이런 취지에서 볼 때 반인륜적인 범죄에 대한 처리가 얼마나 신속 정확하게 이뤄지느냐는 문제는 과거 청산에 그치지 않고 오늘과 내일의 국민국가 사회의 안정에 필수 불가결의 요인임을 느끼게 해줍니다.

 

그런 나라와 우리나라를 비교해 보면, 국민 복지라는 것도 다 그런 가치관에서 나온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병원비가 없어서 병을 못 고치고, 등록금 걱정 때문에 자식을 학교에 못 보내는 게 무슨 나랍니까? 기본적으로 병 없이 건강하게 살 수 있게는 해 주고, 아이를 낳으면 공부는 나라에서 시켜 줘야 하지 않아요? 그런 가치관이 제 목숨을 바쳐서 자기 민족을 지키겠다는 독립운동가의 머리에서 나오지 동포를 팔아서 제 뱃속만 채우자고 친일했던 사람 머리에서 어떻게 나옵니까? 이래서 친일파 청산은 과거의 일이 아니고 바로 오늘의 현실인 것입니다.


질문과 대답

청중 _ 《친일인명사전》을 준비하는 동안 여러 가지 방해와 위협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요즘은 어떤지요?

일주일 전에 어떤 단체 사람들이 와서 우리 연구소 앞에서 시위를 했는데, 우리 연구소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사람들이 나왔어요. 막 계란을 던지고 난리였죠. 《친일인명사전》을 내고 한 일주일 동안은 전 직원들이 업무를 못할 정도로 욕설 전화가 계속 걸려 왔어요. 지금은 거의 없어졌고 대신 연구소 신입 회원들이 짧은 시간 동안 700~800명 정도나 엄청나게 늘어났어요. 여러분들도 가능하면 회원으로 입회해 주시고 둘레에 입회를 권해 주시면 대단히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최규화(작은책 일꾼) _ 《친일인명사전》이 나오자 수구 세력 가운데에서는 ‘친북인명사전’을 내겠다는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그런 움직임들을 어떻게 보시는지요? 동기가 뭔지는 모르겠는데 《친일인명사전》이 나오니까, 그쪽에서도 뭐라도 애국하는 걸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인 것 같아요. 제가 충고를 드린다면, 그렇다면 ‘친북인명사전’이 아니라 ‘독립운동가사전’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해요. 친일파의 반대 세력은 독립운동가들이잖아요. 그럼 그쪽에도 참 좋은 명분이 생길 것 같은데 그게 아니고 ‘친북인명사전’이라고 하니, 마치 ‘친일’의 반대가 ‘친북’인 것처럼 돼 버려서 저절로 이북이 항일운동을 잘 한 걸로 격상시켜 줘 버려요.

 

그게 과연 그 사람들이 노리는 것인지 좀 의아합니다. 근데 우리 사전에는 이북 사람도 많이 나와요. 저는 이북도 친일파 청산을 완전히 한 건 아니라고 보거든요. 물론 여기보단 낫지만 거기도 실권 있는 사람들 가운데 친일파들이 많아요. 신문을 보니 ‘친북인명사전’이 내년에 나온다던데, 아마 지구상에 10년 안에 나오는 사전은 극히 드물 겁니다. 사전은 모든 학문에서 최고 단계에 있는 연구의 집적물입니다. 《친일인명사전》도 거의 18년이 걸렸습니다. 연구소가 처음 생긴 때부터 해 왔고, 임종국 선생 때부터 하면 20~30년 걸린 셈입니다. 친일이 뭔지 그 개념을 잡는 데에만 몇 년 걸렸어요.

 

수십 회 심포지엄도 열고 국민 여론을 조합했거든요. 그렇게 보면 《친일인명사전》처럼 그렇게 많은 연구와 자료 섭렵을 해서 학술적으로 멋진 사전이 될 수 있을까도 상당히 염려스럽고, 과연 그 사전에 실린 사람들을 이북에서 알아줄까도 의심스럽고, 참 걱정이 많아요.

 

청중 _ 친일파 청산이 나라 안팎에서 볼 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조금 더 자세하게 정리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친일파 청산을 위해 《친일인명사전》 발간에 이어 무엇이 더 이루어져야 하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지금 우리가 올바른 민족의식을 가질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에서 친일파 청산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프랑스의 드골이 그런 말을 했죠. “앞으로 프랑스가 다른 나라로부터 외침을 또 당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때처럼 우리나라를 배신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 왜? 하도 혼을 내 버렸으니까요. 《친일인명사전》이 나옴으로써, 앞으로 만약 다른 나라가 또 우리나라를 침략한다면 사람들이 적어도 ‘아, 나중에 민족문제연구소 같은 데가 또 생겨서 내 이름을 거기 올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하지 않겠어요?

그리고 우리가 통일이라는 과제를 앞두고 있는데 적어도 통일에 앞장서는 사람은 친일의 철학을 가진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병적인 분단 상태이기 때문에 정치가 기형화될 수도 있는데, 적어도 남북이 통일된 상태에서는 그래도 민족에 대해 올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나라를 어떻게 만들어 나갈지 연구해야지 파시즘이나 외세 의존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앞장서서는 안 된다는 걸 이 사전이 교훈으로 말해 주는 겁니다.

 

그 밖에 지식인들이나 능력 있는 사람들, 자산가들, 관리들 같은 사람들이 각자 자신이 할 일이 뭔지를 깨우칠 거라고 봐요. ‘내가 할 일을 못하고 내 힘을 함부로 쓰면 반드시 역사의 심판을 받는다. 역사학자들은 다 알고 있다’ 하는 교훈을 머릿속에 심어 주는 거죠. 그리고 민족문제연구소 말고 민주주의문제연구소 같은 게 생겨서 ‘반민주주의인명사전’ 같은 걸 낼 수 있는 첫걸음도 이 사전에 힘입어 나올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세계사적으로 과거사 청산의 절차를 보면, 첫째는 정치적인 청산입니다. 정치적으로 거기에 관련된 사람들의 공민권을 얼마 동안 박탈한다는 정치적인 조처지요.

 

둘째는 거기에 따른 각종 시민권 제한과 같은 법률적인 청산, 셋째는 재산을 압수한다든가 하는 경제적인 청산, 넷째는 그런 것들을 교과서에 어떻게 쓸 것이냐 하는 등의 교육적인 청산입니다. 그리고 다섯째로 따르는 것이 학문적인 청산입니다. 학문적인 청산은 역사적으로 이걸 어떻게 봐야 되느냐를 연구하는 것이죠. 우리 민족문제연구소가 하는 것은 학문적인 청산에 해당하는 역사적인 연구입니다. 여기에 바탕 해서 국민계도를 위한 박물관이나 기념관 등을 통한 범국민운동의 차원으로 승화되어야 합니다.

 

저는 자부합니다. 《친일인명사전》은 우리나라 근대 인문학 7, 80년 역사에서 손꼽히는 위대한 업적일 겁니다. 이렇게 깊이 우리나라 일제 식민지 시대의 삶을 꼼꼼히 연구한 학자들은 없어요. 생각해 보십시오. 그 많은 사람들의 행위를 일일이 하나하나 검증했습니다. 그 후손들도 자기 아버지가 몇 년부터 몇 년까지 무슨 관리를 하다가 언제 어디로 전근됐는지 모릅니다. 여러분도 여러분들 아버지의 이력 사항을 꼼꼼히 모르잖아요. 우리가 다 찾아냈어요. 그 몇 천 명의 삶의 족적을. 어떤 학자든 《친일인명사전》을 보면 아마 입이 벌어질 겁니다.

 

《친일인명사전》은 정치적, 법률적, 경제적, 교육적인 힘은 없어요. 오로지 학문적인 작업의 성과입니다. 유럽 같은 데서 해 왔던 순서와는 반대로 우리는 맨 뒤의 것이 제일 먼저 나온 거예요. 하지만 이걸 계기로 해서 역순으로 과거사 청산 작업이 이루어질 겁니다. 그것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국민들의 몫입니다. 이 사전을 가지고 학자들은 더 연구를 해서 더 많은 걸 찾아낼 수 있을 것이고 국민들은 누구의 재산을 빼앗자 하고 운동을 벌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냥 도서관에 꽂아 놓고 아무도 안 보면 그저 학문적인 성과로 끝나 버리는 겁니다. 지금부터는 국민들의 몫입이다.

 

그래서 제가 《친일인명사전》의 출간 보고대회에서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이 사전이 우리나라에서 영광스럽게 되면 우리 민족도 세계사에서 영광스러운 민족이 될 것이고. 이 사전이 시련을 받으면 우리 민족도 세계 열강들 속에서 시련을 당할 거라고 말입니다. 이 사전을 가지고 또 연구하고 더 캐내서 그 전에 했어야 했던 일들을 역순으로 다 해 낸다면 그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이겠습니까? 그리 못하고 사전도 제대로 안 팔리고 민족문제연구소도 막 적자가 나고 그러면, 참 우리 민족이 앞으로 어떻게 될지 대단히 염려스러워지지 않겠습니까?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