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그 사람
문학회에 가입하고 글 당번이었던 내가 처음 간곳이 진주에 있는 어느 식당이었다. 글을 낭독하고 돌아가며 합평하는 시간 어느 여선생 한분이 내 글을 평하며 앞으로 이분은 틀림없이 대가가 될 거라고 했다. 놀랍기도 했지만 나는 가슴 뛰게 하는 그 말이 너무 좋았다. 자리에 앉아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분에게는 뭔가 모르게 앞날을 예견하는 촉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자 선생의 말이 예사로 들리지 않았다. 그때부터 그 말이 큐피드의 화살처럼 내 심장에 깊숙이 박혀버렸다. 정말 기분 좋은 말이었다. 분에 넘치는 말이었지만 나 스스로 기대에 부풀어 자신감을 갖게 했다. 선생의 말은 문학적 공명이었다. 아마 선생의 찬사는 나에게 아웃사이드를 넘어설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동안 나는 조롱 속 새였다. 그때부터 조롱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꿈틀대었다. 내 맘대로 하늘을 날아다니며 높게도 날고 낮게도 날며 세상을 보고 싶었다.
나는 요즘 같은 상황이 그리 힘들지 않다. 마음도 전에 비하면 대천 한 바다처럼 넓어졌다. 그놈(癌)과 같이 살면서 미워하다 정이 들었는지 지금은 그렇게 밉지 않다. 요즘은 인터넷이든 유투브든 암과 관련한 이아기는 듣지도 보지도 않는다. 말 그대로 무식하면 용감하고, 모르는 게 약이란 말이 괜히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마음을 그렇게 먹으니 그때부터 두려움도 없어지고 견디기 힘들었던 하루하루가 평온해졌다.
불교의 모든 경전이 마음心자 하나로 귀결되듯이 이날 것 살아보니 잘살고 못사는 건 마음이었다. 세상에는 갖가지 짓궂은 불행이 있다. 내게 온 불행이 짓궂기는 하지만 그래도 나보다 더 짓궂게 다가간 다른 사람 불행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내가 오늘 같은 날 이런 글을 쓰게 된 것은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꿈같은 자리에서 내가 받은 만큼 글로서나마 내 이야기를 곁들여 정중하게 돌려주고 싶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은 지난날 빈 마음으로 깊은 가을날 지리산 둘레 길을 걸을 때와 같다.
언덕길 수레 미는 손
내가 쓴 책을 소개하는 경남 문인협회 카페에 가슴 떨리게 하는 댓글이 네 개나 달렸다. 두 번째는 그냥 축하인사이고 첫 번째와 세 번째는 내 가슴을 뛰게 했다. 두 선생의 나에 대한 찬사는 몸 둘 바를 모르게 했다. 경남 문인협회 카페에 들어온 뒤 처음 있는 일이다. 마지막 네 번째는 원로 시인이자 출판사 대표가 쓴 댓글이다. “이홍식은 천부적인 글 꾼이다. 그에게 걸리면 무엇이든 술술 풀려 읽을거리 넘치는 서사가 된다. 그리고 자신을 가림 없이 드러내는데 익숙하다. 그것도 보통사람들은 잘 드러내고 싶지 않은 아픈 곳을 어쩌면 저러랴 싶게 드러낸다. 사실 작가는 자기를 진정으로 잘 드러내야 성공한다. 거기에 진정한 감동의 핵심 요소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홍식의 이번 책은 그런 면에서 독서계의 반응이 크리라 본다.”
거기에 내가 쓴 답 글이다. 첫 댓글에는 남은 인생 수필가답게 살기로 약속했다. 세 번째는 선생님 말씀은 문학적 공명입니다. 아마 그것은 아웃사이드를 넘어설 계기가 될 것입니다. 저 스스로 기대감에 부풀게 하고 자신감을 갖게 합니다. 라고 썼다. 나는 이 네 번째 글을 몇 번이나 읽었는지 모른다. 수필가에게 이만한 찬사가 없다. 밤늦도록 그 생각으로 잠이 오질 않아 뒤척이다가 새벽 4시에 잠이 깨었는데 글이 날아갈까 봐 걱정되었는지 꺼 놓은 컴퓨터를 켜고는 다시 읽었다. 아무리 읽어도 가슴 떨렸다. 우리 곁을 떠난 평론가 김현의 칭찬보다 좋았다. 선생 역시 안목이 높은 작가라는 점에서 울림이 컸다. 선생의 댓글은 밤늦도록 잠을 못 들게 했다. 수필가로 살면서 어디 가서 문학상한번 받아보질 못한 나로선 상 받는 것 보다 더 기쁘다. 글 쓰는 사람에게는 그게 빈말이라고 해도 듣는 그 순간에는 가슴 떨리게 한다.
내가 쪽팔리게 왜 내 자랑 같은 이런 글을 쓰느냐 하면 수필가로 살면서 두 번 다시 이런 찬사를 듣기 힘들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찌 될 줄 모르지만 다시 듣는다 해도 수레에 무거운 짐 싣고 오르막길을 오른 뒤 고갯마루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힐 때이다. 내가 바랐던 것은 오르막을 오를 때, 뒤에서 밀어주는 따스한 손길이었다. 선생의 손길은 내가 오르막길을 달려가게 했다.
반년 간지 “작은 문학”을 만나며
반년 간지 “작은 문학”이란 책을 만난 지가 얼마 되질 않는다. 나는 이 글에서 책과의 인연을 이야기하려한다. 참, 어쩌다 문학의 길에 들어선 나는 겨우 현관문을 넘어서자마자 길을 찾느라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녔다. 그렇게 길을 몰라 이곳저곳 헤매고 다닐 때 그 길을 제대로 가게 해준 사람이 경남도서 발행인 오하룡 시인이었다. 작은 문학이란 책도 시인을 만난 다음이었다. 전에는 그런 책이 있는 줄도 모르다가 우편으로 온 책을 받아 들고는 정말 드물게도 책상 앞에 앉아 단숨에 읽어버렸다. 며칠 후 찾아간 나에게 있는 대로 챙겨준 것이 스물두 권이었다. 그 또한 여러 날을 공들여 읽었다. 중요한 것은 읽어갈수록 나도 모르게 생각이 바뀌기 시작했다. 읽으며 여태 뭣도 없이 시 건방 떨던 치기 어린 내 모습이 부끄러워졌다. 그 책으로 인해 스스로 가야 할 문학의 길을 찾게 되었다. 여태껏 나에게 중요한 것이라면 무조건 먼 곳에 있는 줄로만 알았다. 그렇게 멀리서만 찾으려 했던 게 이처럼 가까이 있다는 걸 깨닫게 해준 것이 ‘작은 문학’ 이었다.
매일 오르는 남산공원 길모퉁이 텃밭에는 누군가가 세워놓은 바람개비에 실려 봄은 가고 있다. 오늘따라 멀리 장복산 너머로 보이는 노을이 무척이나 곱다. 살면서 나와 인연이 되는 누군가를 만난다는 것, 그것이 꼭 사람만이 아니라 짐승이나 다른 것도 있겠지만 나에겐 책이다. 그런 매개가 되어준 시인이야 말할 것도 없다. 그 때문인지 요즘은 글 한 편이라도 놓칠세라 그동안 받아놓았던 수필집과 시집을 읽는다. 까딱했으면 평생 읽지 않았을지도 모를 책을 읽는 것도 시인과의 인연 때문이다. 지금 가고 있는 문학의 길이 온통 괴로움뿐이다가도 이래서 때로는 작은 즐거움이기도 하다. 나는 수필가라 내가 속한 수필모임에도 스승이 있지만, 아직 한 번도 제자 노릇 한 적이 없다. 옛사람 말처럼, 날은 어두워지려 하는데, 갈 길은 멀고, 내 딴에는 야무지게 묶었다고 생각한 바지 끈은 풀어져 흘러내리려고 한다. 서둘러 가서 노을이 지기 전에 노을 속으로 들어가고 싶다. 가서는 사람들에게 조금은 괴로웠다가 조금은 즐겁게 살다 간 얘기를 들려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