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케다 선생님 회장 취임 60주년
청년부가 하라다 회장에게 듣는다 2부
제5회 인간 찬가의 시대 여는 대문화운동(中)
△아르헨티나 탱고의 거장 모레스 씨 부부와 따뜻한 대화를 나누는 이케다 선생님.(1988년 4월, 옛 세이쿄신문사)
음악으로 세계 민중의 마음을 잇는다
니시카타 남자부장(이하 니시카타) -
1963년 10월 18일,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은 민주음악협회(민음)를 창립하셨습니다. 이후 반세기를 넘어 지난해에도 약 50명의 주일대사가 민음문화센터를 방문하는 등문화, 예술 교류의 일대 거점이 되었습니다.
하라다 회장(이하 하라다) -
소설 ‘신·인간혁명’ 제8권 <청류>에 씌어 있는 대로 선생님이 민음 설립을 구상하신 때는 1961년 2월에 인도, 버마(현 미얀마), 타이, 캄보디아로 평화 여정을 향하신 때입니다.
특히 버마는 선생님의 큰형이 전사하신 곳이기도 했습니다. 선생님은 인류가 비참한 전쟁과 결별하고 평화를 구축하려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계속 생각하셨습니다.
그리고 민중과 민중의 상호이해를 도모하는 일이 불가결하다고 사색이 깊어져, 그러려면 음악 등 예술, 문화 교류가 중요해진다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이때 선생님은 학회가 모체가 되어 음악, 예술 교류 등을 목적으로 한 단체를 만들자고 결의하셨습니다. 음악으로 세계 민중의 마음과 마음을 잇고 평화사회를 건설하자는 원대한 목적을 내걸고 민음은 탄생했습니다.
오구시 여자부장(이하 오구시) -
50년 뒤, 100년 뒤를 내다보는 포석인 셈이었군요. 민음은 지금까지 110개국·지역의 단체 및 연주가들과 교류했습니다. 중일 관계가 어렵던 2014년 10월에는 무극 ‘따오기’가 프리뷰로 공연되었습니다.
하라다 -
이는 민음과 중국의 문화 교류 40주년 기념으로 중국인민대외우호협회, 상하이가무단 등과 민음이 공동으로 제작했습니다.
아시다시피 2012년부터 중일 관계는 엄동설한이라 할 만큼 얼어붙어 있었지만 프리뷰 공연은 아베 총리도 관람했고, 직후 11월에 개최한 중일정상회담에서는 그 프리뷰 공연이 화제가 되어 분위기가 누그러졌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문화의 위대한 힘을 느낍니다.
민음은 국교 정상화 3년 뒤인 1975년 이후 중국에서 40여 개의 문화단체를 초청해 2100회 이상 공연했습니다. 이러한 ‘문화 교류’는 중일 우호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중국 분들이 말합니다.
선생님은 1974년 첫 중국 방문 때부터 중국 측 요인에게 ‘문화 교류’를 강력히 주장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문화 교류는 그야말로 상호이해의 가교이자 평화의 선구’라는 일관된 신념이 있었습니다.
실제로 선생님은 전 세계에 문화 교류, 민중 교류의 길을 개척하셨습니다.
선생님이 구축하신 끈끈한 우정의 유대
오구시 -
민음은 지금까지 밀라노 스칼라극장, 함부르크 발레단, 모스크바 아동음악극장, 실크로드 음악여행, 남아프리카공화국 드라켄즈버그 소년합창단, 요르단 국립예술단을 비롯해 전 세계 저명한 단체의 공연을 실현했습니다.
하라다 -
민음의 문화 교류 역사에는 이케다 선생님이 각국 예술가와 맺은 끈끈한 우정과 신뢰의 유대 덕분에 쌓은 것이 많습니다.
지난해 민음의 탱고 시리즈가 50회째 공연을 실시했습니다. 아르헨티나 공공 미디어 콘텐츠청은 민음 창립자인 이케다 선생님에게 ‘예술과 평화의 푸른상’을 수여했습니다. 아르헨티나의 ‘예술, 문화의 보급’과 ‘세계에 우정과 평화를 넓힌 공적’을 기린 상입니다.
아르헨티나에서는 1940, 1950년대가 탱고의 황금기였습니다. 그러나 1970년대, 위대한 거장들의 죽음으로 아르헨티나 국내에서 연주할 기회가 줄어 많은 악단이 해체 위기에 빠졌습니다.
그러한 1970년에 민음 공연이 시작되었습니다. 많은 악단이 일본에 가고자 재결성되었습니다. 아티스트들은 일본에서 연주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점은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아르헨티나 탱고의 부흥은 이케다 선생님과 민음이 이룩했다’고 단언하는 전문가도 있습니다.
하야시 女대학부장(이하 하야시) -
소설 ‘신·인간혁명’ 제30권(하)에는 탱고의 거장이라 일컫는 분들과 맺은 감동적인 교류도 씌어 있습니다.
하라다 -
제게 특히 인상 깊은 분은 1984년에 민음의 초빙으로 처음으로 일본을 방문한 거장 마리아노 모레스 씨입니다.
이 일본 공연에서는 가장 사랑하는 아들인 니트 모레스 씨도 아버지와 함께 무대에 설 예정이었습니다. 그러나 일본 방문 직전에 아드님에게 악성 암이 발견되어 급히 취소되었습니다. 일본 공연이 시작되고 1개월 뒤 아드님은 30대의 젊은 나이로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습니다.
선생님은 1988년에 모레스 씨와 만나셨습니다. 모레스 씨를 다 함께 환영한 로비에는 모레스 씨와 돌아가신 아드님이 함께 연주한 명곡 ‘안녕 초원이여’가 흘러나왔습니다. 모레스 씨는 “그렇습니다. 이 곡입니다!”라며 감동한 표정으로 말했습니다.
선생님은 모레스 씨 부부를 전혼을 담아 격려하셨습니다. “아드님은 지금도 아버님, 어머님 곁에 있습니다. 가족을 지켜보며 지탱하고 계십니다. 생명은 영원합니다. 영원한 부자(父子)입니다. 적적한 것 같아도 생명 차원에서는 결코 적적하지 않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또 두방지 한 장을 모레스 씨에게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선생님의 말씀과 함께 붓으로 직접 그린 후지산에 점 하나가 찍혀 있었습니다.
곁에 있던 우리도 ‘무슨 뜻일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선생님은 모레스 씨에게 힘차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점은 아드님입니다” 하고 말입니다.
모레스 씨는 깊은 눈길로 두방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엄연히 지켜주는 아드님을 위해 어떠한 풍설에도 미동도 하지 않는 후지산과 같은 경애로’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처지나 직함을 뛰어넘어 눈앞의 한 사람을 반드시 격려하시는 선생님의 진심에 모두 깊이 감동했습니다.
니시카타 -
현재 가수로 활약하고 있는 모레스 씨의 손주가 당시를 회상하며 “이케다 선생님의 진심과 배려를 할아버지가 정말 기뻐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격려가 없었더라면 할아버지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하라다 -
1993년 2월에는 선생님이 참석하신 가운데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제11회 ‘세계청년평화문화제’를 개최했습니다. 공연장은 시내의 유서 깊은 극장 중 하나인 콜리세오극장이었습니다. 이
곳에서 현지 멤버의 강한 요청으로 마리아노 모레스 씨와 또 다른 거장 오스발도 푸글리에세 씨가 합동 공연을 개최했습니다.
푸글리에세 씨는 문화제를 개최하기 4년 전인 1989년에 민음 공연을 위해 일본을 방문했습니다. 은퇴 공연을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내와 함께 방문한 푸글리에세 씨를 선생님은 진심으로 환대하셨습니다.
선생님의 꾸밈없는 인격과 평화를 향한 신념에 완전히 빠져든 푸글리에세 씨는 이후 ‘빛나는 도쿄’라는 제목을 붙인 헌정곡을 만들어 선생님에게 드렸습니다. 그의 부인은 “남편이 특정 인물을 위해 곡을 만들어 드린 것은 지금까지 오로지 선생님뿐이었다”고 말했습니다.
1989년에 이 은퇴 공연을 성공리에 마치고 ‘이제 무대에 오를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한 그가 4년 뒤, 여든일곱의 나이로 다시 스포트라이트 속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둘 중 어느 한쪽만 무대에 올라도 대단한 일인데, 두 사람이 함께 무대에서 합동 공연을 개최하는 일은 기적이라며 참석자들도 대단히 놀랐습니다. 위치나 감정 등 일체를 벗어 던지고 오로지 이케다 선생님과 맺은 우정을 위해서, 두 사람은 이러한 심정으로 문화제에 출연했습니다.
서민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자리 만들다
가바사와 男대학부장(이하 가바사와) -
선생님은 ‘민음을 설립한 목적은 어디까지나 민중의 손에 음악을 되돌리는 데 있다’고 쓰셨습니다.
하라다 -
발족 당초부터 ‘서민들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콘서트를 열자’고 선생님은 몇번이나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그 바람대로 ‘민중의 기쁨에 넘친 찬가’인 음악이 일본 곳곳에서 꽃피는 시대를 만드셨습니다.
세계 일류의 발레나 오페라와 같은 ‘그림의 떡’이라고 여긴 작품들을 선생님이 창립하신 민음의 초청으로 우리는 친숙하게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일본의 문화 교류에도 커다란 의의를 갖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세계 최고봉의 가극단인 밀라노 스칼라극장의 일본 공연은 16년이라는 오랜 세월에 걸친 교류 끝에 1981년 9월에 실현했습니다.
어느 전문가는 “완벽한 무대입니다. 이런 굉장한 무대에 초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했습니다. ‘민중이 최고의 예술을 접하는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는 선생님의 반석과 같은 신념이 불가능이라고 여긴 스칼라극장의 일본 공연을 실현한 것입니다.
하야시 -
최근에는 TV 인기 프로그램에서 ‘민음 음악박물관’을 잇달아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세계세이쿄회관과 민음 사이에 있는 도로 표지판은 ‘민음음악박물관’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하라다 -
박물관에는 고전 피아노나 각국의 민족악기 등 귀중한 악기를 비롯해 저명한 음악가의 악보 등을 수장하고 있습니다.
30만점에 이르는 음악 자료를 소장해 ‘민간에서는 국내 최대급 규모’라고 평가받는 ‘음악 도서관’도 병설되었습니다. 도쿄의 등록 박물관에 허가를 받아 전 세계에서도 몇 안 되는 음악 박물관 중 하나입니다.
중·고등학교 종합학습이나 수학여행차 견학하는 등 전국의 학교에서 사랑받고 있습니다. 학예원의 실습생을 받아들여 학생들을 지원하고, 복지시설이나 지역 노인회의 견학처로서 많은 사람이 방문하고 있습니다.
동일본대지진 때는 ‘노래를 연대로’를 주제로 재해를 입은 3개현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도호쿠 희망콘서트’를 개최했습니다. 지난해까지 116개 학교에서 81회에 걸쳐 매번 정말 감동적인 공연을 개최했습니다.
가바사와 -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보내 마음의 유대를 맺는 음악의 역할은 정말 위대합니다.
하라다 -
법화경 <수량품>에 ‘제천격천고(諸天擊天鼓, 제천은 천고를 쳐서) 상작중기악(常作衆妓樂, 항상 여러 가지 기악을 울리고)’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천인(환희에 넘친 사람들)이 ‘천고’를 쳐서 늘 여러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은 행복할 때나 기쁠 때,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음악이 넘쳐나는 것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생님은 이 경문을 인용해 ‘민중의 활발한 노랫소리가 들리는 곳에 자유가 있고 약동이 있다. 음악에는 강제성이 없다. 문화에는 폭력이 없다. 모두 인간성의 개화로 이어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음악 예술을 통해 ‘평화·문화·세계의 길’을 여는 민음의 사명은 더욱 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