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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L OF DUTY(조국의 부름) 곽동환
2010년에 저에게 기억에 남는 사회적 사건이 2가지가 있었습니다.
2010 남아공 월드컵과 연평도 포격사건입니다. 연평도 포격사건은 저에게 있어서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집에 식사를 하러 왔다가 TV를 시청하던 중 MBC 뉴스특보 연평도 포격이라는 문구를 보게 되어 채널을 고정하였습니다. 전화연결 인터뷰를 하는데 상황의 긴박함이 전해졌습니다. 연평도 시민이 지금도 포탄이 떨어지고 있다고 전화인터뷰를 하였습니다. 저는 그 순간 이 사태가 얼마나 심각한지 느껴졌습니다. 저의 조국 대한민국이 북한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토 공격을 당한 것입니다.
저는 평소에 스포츠뉴스만을 시청하지만 그날만큼은 뉴스를 시청하였습니다. 뉴스를 시청하던 중 한국의 해병 두 분이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며칠 뒤 그분들의 영결식을 보면서 눈물이 흘렀습니다. 그 당시 북한의 갑작스런 포격에 당황하지 않고 자신들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한 해병들이 저는 진심으로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방탄헬멧이 불타고 있는 상황에서도 대응포격을 한 해병들이 저는 너무 자랑스러웠습니다. 연평도 포격당시 해병들이 그랬던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군인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는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초등학교 시절부터 풍요로운 한국사회에서 살아 갈수 있다는 것은 과거 임진왜란이나 일제시대, 한국전쟁때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신 애국자들 덕분이라고 생각하면서 애국자들에게 항상 경의를 표하며 감사하며 평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신체검사때는 4급 판정을 받았지만 언제나 국민들이 볼 수 없는 곳에서 조국을 지키는 군인들에 대한 존경심이 가슴속에 있었고 제 조국 한국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저의 선조 애국자들이 했던 것처럼 저의 가족과 친구들, 후손, 제 조국 한국을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다시 재검을 하여 조국의 부름에 응하였습니다.
그 당시 베트콩들은 존 메케인의 아버지가 해군 사령관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포로교환을 해준다고 제의하지만 존 메케인은 먼저 잡힌 포로들의 교환이 원칙이라면서 베트콩들의 제의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리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반미구호에 서명을 해달라는 요구를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1973년 미국과 베트남의 정전협정으로 메케인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그는 몇 년간의 고문으로 인해서 몸이 매우 불편한 상태로 귀환하였습니다. 영국의 경우도 노블레스 오빌리주의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앤드류 왕자는 1982년 포틀랜드 전쟁에 참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미녀 미들턴과 결혼을 한 윌리엄 왕자도 현재 군인으로 복무중입니다.
그는 공군 소속이지만 결혼식 당시 아프가니스탄에서 복무중인 보병의 제복을 입었습니다. 그 이유는 최일선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 보병들에 대한 경의를 표현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2006년 아프가니스탄에서 작전을 수행하다가 탈레반의 공격을 받아 온몸에 화상을 입으며 3개월간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살아난 자신의 전우 마틴 컴프턴을 결혼식에 초대하였습니다. 2010-2011 프리미어리그 최종전에서 프리미어리그 우승 트로피를 그라운드에 운반한 사람은 전쟁에 참전했다가 신체를 잃게 된 군인이었습니다. 저는 이런 장면들은 보면 가슴이 뭉클합니다.
영국은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하는 대표적 국가이고 그들은 조국을 위해 희생을 한 군인들을 기억하고 그에 걸맞는 존경을 언제나 표시하는 것 같습니다. 저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영향으로 저도 그들처럼 살고 싶었다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저는 사회적 지위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한국 사회의 최약자층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제가 뛰어난 것은 없지만 단 하나 내세울만한 것은 제 조국 한국을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지금부터 저의 군복무 시절을 이야기하겠습니다.
제가 당시 00연대로 배치 받게 되면 저는 군생활 동안 GOP에서 복무를 할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다행히 저는 상승불사조 00연대 2대대로 배치를 받았습니다. 더군다나 00사단 00연대는 한국전쟁 당시 평양선두 입성연대로써 김일성 대학에 태극기를 꽂은 명예로운 부대였습니다. 저는 자랑스러운 부대에 배치를 받아 자부심이 느껴졌습니다.
00연대 2대대는 2005년 3월에 GOP를 투입해서 1년을 GOP에서 근무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정말 만족하였습니다. 비록 바로 군생활을 GOP에서 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저의 상병부터 전역할 때까지 GOP에서 복무할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만족하였습니다. 제가 그 당시 배치 받은 중대는 특이하게도 격오지 중대였습니다. 일반적인 페바부대랑 떨어져 있는 곳이었으며 군생활의 낙인 PX가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 곳은 근무를 마치고 오면 내무실이 워낙 좁았기 때문에 제가 취침할 자리가 확보되지 않는 열악한 곳이었습니다.
일반적인 막사의 내무실이라면 1개의 매트리스에서 1명이 취침을 하지만 제가 있던 백암산의 내무실은 워낙 협소해서 2개의 매트리스에서 4명이 취침을 하는 환경이었습니다. 화장실은 푸세식이었기 때문에 비가 오는 날이면 구더기를 목격하며, 대변이 넘치기 때문에 대변을 삽으로 옮겨서 땅에 묻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비가 매우 많이 쏟아지는 날이면 재해재난 FTX가 발령이 되었습니다. 막사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에 취침 중 기상하여 군장을 결속한 상태에서 대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열악한 백암에서의 3개월 정도 근무를 하게 된 후 제가 있던 중대가 페바부대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2004년 6월 말이었습니다. 백암중대 격오지에서의 생활에 비하면 페바생활은 천국이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PX도 있었고 대변을 푸는 작업도 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한번씩 훈련을 뛰면 4박5일을 밖에서 생활하는데 훈련시 고지가 1000미터 정도의 고지대라 그곳까지 가는 것이 상당히 힘들었습니다. 강원도 지형이 험하다는 것을 직접 체험하는 순간이었습니다.
훈련시 낙오하는 사람들이 속출하였고 엠블런스에 실려 가는 보병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페바에서의 생활은 한달에 2주 정도는 훈련 및 훈련준비 때문에 폭발적으로 힘들었지만 그 이외는 상당히 편한 수준이었습니다. 2005년 3월 제가 그렇게 염원하던 제 군생활의 마지막 종착지인 GOP로 투입하였습니다. 제가 있던 막사는 구형막사였습니다. 백암중대 만큼의 열악한 구형막사는 아니어서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GOP는 소초마다 순찰을 하는 섹터가 있는데 저희 소초의 섹터는 롤러코스터를 만들어도 될 정도의 급경사 섹터였습니다. 경사가 63도 이상이며 안전을 위해서 밧줄이 설치되어있었습니다. 이번에도 격오지 소초였기 때문에 부식차량이 들어오지 않아서 부식이 들어오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마다 리어카를 몰고 가서 부식 및 가스통들을 운반하였습니다.
다 소모한 큰 가스통 및 쓰레기등도 리어카를 몰고 엄청난 오르막길을 올라가서 케이블카에 실어 보내는 작업도 하였습니다. 이런 작업들이 GOP에서의 일상이었습니다. 6월에서 10월까지는 지옥의 벌목작업이 이어졌습니다. 40도의 살인적인 더위 속에서 군사분계선 2선 밖인 DMZ(비무장지대)로 들어가서 벌목작업을 하였습니다. 더위 때문에 쓰러진 전우들도 있었고 벌떼에 습격을 당한 전우 및 각종 부상자들이 속출하였습니다.
주간에는 40도가 넘는 살인더위였지만 야간에는 폭우가 자주 내려서 주간에는 벌목작업, 야간에는 폭우를 맞으면서 급경사 오르막길을 순찰하는 열악한 상황이었습니다. 야간에는 비가 쏟아져도 날씨가 더웠기 때문에 전투복은 땀과 비로 항상 젖어있었습니다. 11월은 벌목작업도 없었기 때문에 비교적 편하였지만, 12월, 1월, 2월은 추위로 인해 항상 배관이 얼었기 때문에 세면세족 할 물을 미리 받아놓고 일정시간이 되면 배관이 얼까봐 배관을 다 분리시켜 놓는 퇴수작업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자연급수였기 때문에 그곳이 얼어버리는 경우가 많아서 근무가 끝나도 자연급수장으로 가서 도끼질을 하며 얼음물을 깨는 작업을 하였습니다. 눈이 새벽에 많이 내린 날은 밤을 지새우는 후반야 근무를 하고나서 수면을 취해야하는데 취침을 전혀 하지 못하고 바로 제설작업에 투입된 적이 많았습니다. 그 당시 저는 오로지 내일은 배관이 얼지 않기를, 눈이 오지 않기를 물이 잘나오길 바라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어느덧 시간은 흘렀고 2006년 3월 1일 저는 전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2004년 8월 훈련을 뛰다가 벌레들에게 공격을 당해서 팔에 많은 상처를 입었고 아직도 그 흉터들이 남아있어서 반팔을 입을 때 표시가 많이 나지만 저는 한번도 조국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조국을 위해 내 놓을 목숨이 한 개뿐인 것이 안타까울 정도로 제 조국 한국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군목부 하는 730일은 저에게 자랑스럽고 소중한 순간들이었습니다.
730일 군복무를 하고 느낀 점은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느꼈고 근성과 투지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평화가 우선인 것 같습니다. 2010년 4월쯤에 작전 중이던 헬기가 실종된 사건이 있었는데 그 당시 실종된 홍승우 대위가 저의 내성고등학교, 해양대학교 동기인 것을 얼마 전에 알게 되었습니다. 그 사실을 저는 늦게 접했지만 정말 슬펐습니다.
지금 이순간도 군인들은 조국을 위해서 목숨을 내걸고 임무를 수행중입니다. 이런 점을 국민들이 좀 더 알아주고 군인들을 존경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원하는 것은 조국을 위해 피를 흘려가며 싸운 선조 애국자들이 조국을 사랑한 만큼 조국이 그들을 기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언제든지 응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조국의 부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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