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제 : 배도/탐욕
제목 : 발람의 길을 따르는 배도자
성경 : 벧후 2:15~22
찬송 : 149장
저자 : 이삼규 목사
출처 : 20230924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벧후 2: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벧후 2: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벧후 2: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 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벧후 2: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벧후 2: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벧후 2: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벧후 2: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벧후 2: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탈무드에 이런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는 토라 공부에 열중하는 랍비였습니다. 경건하기로 소문이 나있었습니다. 그는 늘 해처럼 빛났고, 얼굴은 천사처럼 찬란하였습니다. 그러나 평생 여자에게 눈길을 준 적이 없었습니다. 사단이 시기가 났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말했습니다.
“하나님!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를 어떻게 보십니까?”
“진짜 성인이다.”
“그러면 내가 이성으로 유혹하여 보아도 되겠습니까?”
“너는 실패할 것이다.”
“허락해 주십시오.”
“허락한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고 사단은 창조 이래 가장 어여쁜 여자의 모습으로 분장하였습니다. 그리고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에게 나타났습니다. 헤레쉬 랍비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제자에게 말했습니다.
“불과 화젓가락을 가지고 오라.”
갖다 주자 시뻘겋게 달궈서 자기 눈을 찔러 지져 버렸습니다. 사단은 실패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이를 보시고 라파엘 천사를 보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가서 마티티야 벤 헤레쉬 랍비 눈을 고쳐 주거라.”
헤레쉬 랍비는 라파엘 천사를 보자 말했습니다.
“나는 이대로 살겠습니다.”
라파엘이 하나님께 보고 드렸습니다. 하나님이 보장하여 주셨습니다.
“절대로 너를 유혹하지 못 하게 할 터이니 눈을 고치고 살거라.”
이 말을 듣고서 그는 눈 고치기를 허락하였습니다. 그리고 평생 죄를 짓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유혹을 뿌리치고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왜 그럴까요? 마귀가 우는 사자들처럼 삼킬 자를 찾아 두루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탐욕 때문에 유혹에 빠진 거짓 선지자 발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배도자의 길을 걸어간 대표적인 거짓 선지자가 되었습니다.
√불의의 삯을 사랑한 배도자
√벧후 2: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거짓 교사의 대표적인 구약의 예가 바로 발람 선지자입니다. 발람 선지자의 이야기는 민수기 22~24장에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습니다.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간청을 받아 이스라엘을 저주하라는 요구와 함께 엄청난 금, 은 보화를 약속받았습니다. 발람은 처음 두 번까지는 여호와께서 주시는 말씀을 그대로 전하여 이스라엘을 축복하다가, 세 번째 그 유혹에 굴복하여 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발람은 이스라엘을 두려워해 저주해 주기를 원했던 모압 왕의 청대로 하지 않았고, 끝까지 하나님께서 주시는 대로 이스라엘을 축복하는 말씀만 전했습니다. 민수기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확실히 발람은 끝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만 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발람을 두고 굳이 그를 ‘불의의 삯을 사랑한’ 거짓 선지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전설적인 불명예를 뒤집어쓴 것일까요?
단서는 없지 않습니다. 먼저는 유다서 역시 거짓 교사에 대해 저주를 선포하면서 (“화있을진저”) 발람을 언급합니다.
√유 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 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유다는 세 사람을 언급하는데 가인, 발람, 고라입니다. 여기에서 ‘발람의 어그러진 길’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발람의 삯의 속임’이라는 뜻입니다.
우선, ‘발람의 삯’은 모압 왕 발락이 제안했고 선지자 발람이 받았던 그 재물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그 삯을 ‘불의의 삯’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발람이 그 불의한 제물을 받아 ‘속았던’ 혹은 ‘미혹되어 바른 길을 떠났던’ 전례를 가리킬 수도 있고, 또는 발람이 받았던 그 불의한 재물이 지금도 ‘속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 발람이 받았던 재물로, 발람 자신이 ‘바른 길을 떠났다’는 것은 기정사실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발람은 분명 그 ‘불의한 재물’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려 했다는 의도를 놓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 흔적이 민수기에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발람은 처음 두 번은 거절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는 함께 가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발락이 처음보다 높은 지위에 있는 신하들을 보내고 많은 재물을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그때 발람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민 22:18 발람이 발락의 신하들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발락이 그 집에 가득한 은금을 내게 줄지라도 내가 능히 여호와 내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덜하거나 더하지 못하겠노라
그러면서도 발락의 신하들을 붙듭니다.
√민 22:19 그런즉 이제 너희도 이 밤에 여기서 유숙하라 여호와께서 내게 무슨 말씀을 더하실는지 알아보리라
여기에서 그의 마음이 탐심으로 흔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했습니다.
√민 22:12 하나님이 발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그 백성을 저주하지도 말라 그들은 복을 받은 자들이니라
그러니 더 이상 하나님께 여쭈어 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금 은 보화가 그의 눈을 어둡게 만든 것입니다. 불의의 삯을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를 보십시오. 삼 년 동안 따라다니면서 예수님의 회계 역할을 감당했던 그가 은 삼십에 눈이 멀어 선생님을 대적들에게 팔아넘긴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말씀합니다.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 것은 곧 파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하여서 배도의 길을 간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떻습니까?
√탐욕을 따르는 짐승만도 못한 배도자
√벧후 2: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발람의 불법이 무엇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그것을 버리더라도 얻을 수 있는 세상 지위와 재물을 탐했고 그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그 결과 그는 ‘탐욕의 어그러진 길’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아침에 일찍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귀족들과 함께 길을 떠납니다.
민 22:21 발람이 아침에 일어나서 자기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모압 고관들과 함께 가니
먼저 나귀에 관련된 사건이 흥미롭습니다. 여호와의 사자가 진노함으로 나타났는데, 나귀는 그 천사를 알아보았지만 발람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짐승도 알아보는 주의 사자를 발람은 보지 못할 만큼 눈이 어두워진 것입니다. 탐심은 영적인 눈을 멀게 합니다. 하나님을 앎으로써 신적 성품에서 자라지 않으면, ‘소경이 되어 옛 죄를 깨끗하게 하심도 잊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1:8-9).
발람은 영문을 모르고 더 이상 길을 가려 하지 않는 나귀를 세 번이나 후려칩니다.
√민 22:28 여호와께서 나귀 입을 여시니 발람에게 이르되 내가 당신에게 무엇을 하였기에 나를 이같이 세 번을 때리느냐
√민 22:29 발람이 나귀에게 말하되 네가 나를 거역하기 때문이니 내 손에 칼이 있었더면 곧 너를 죽였으리라
우리는 이 대목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금 발람의 마음이 굉장히 분노에 가득찼습니다. 아마도 칼이 그 손에 있었더라면 나귀는 죽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심정이었습니다. 발람은 주인 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고 탐심을 따라가는 자기 자신이 마땅히 받아야 할 처분을 자기 입으로 선포하고 있는 셈입니다. 즉, 자신이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전혀 모른다는 뜻이며, 그만큼 탐욕으로 눈이 멀어 있고 영적 판단력도 상실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기에 짐승에게 없는 이성과 영혼이 있습니다. 그러나 타락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파괴되어 짐승과 같이 본능을 따라 행하는 어리석은 존재로 전락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탐욕에 빠진 발람 선지자는 오히려 짐승보다 더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자기가 타고 다니는 나귀로부터 책망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귀는 평소에 고분고분 주인을 잘 태우고 다녔습니다. 그런데 나귀가 말을 듣지 않은 것입니다. 왜 그랬습니까? 나귀가 보니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 칼을 들고 길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나귀의 눈에 보였지만 탐심으로 눈이 먼 발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나귀가 칼을 든 하나님의 사자를 피하려 할 때 발람은 나귀를 세 번 지팡이로 후려칩니다. 그때 나귀가 사람의 말로 발람의 어리석음을 책망한 것입니다.
√민 22:30 나귀가 발람에게 이르되 나는 당신이 오늘까지 당신의 일생 동안 탄 나귀가 아니냐 내가 언제 당신에게 이같이 하는 버릇이 있었더냐 그가 말하되 없었느니라
그 후에 하나님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셨습니다.
√민 22:3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발람의 눈을 밝히시매 여호와의 사자가 손에 칼을 빼들고 길에 선 것을 그가 보고 머리를 숙이고 엎드리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타락한 인간은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된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탐욕에 눈이 멀면 짐승보다 못한 존재가 되고 맙니다. 거짓 교사들이 바로 이 발람의 후예라는 것을 베드로는 선포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짐승보다 못한 존재로 전락하면 되겠습니까?
√멸망하는 배도자
√벧후 2: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벧후 2:18 그들이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벧후 2: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베드로는 다양한 비유로 거짓 선생들을 묘사합니다.
1)물 없는 샘 - 거짓 교사들은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줍니다. 물을 기대하고 샘에 가까이 갔지만 물이 없음을 알게 되었을 때 실망하는 것처럼, 거짓 교사들은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는 헛된 약속을 줍니다.
2)광풍에 밀려가는 안개 - 이것도 물 없는 샘과 비슷합니다. 안개는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움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공허한 가르침이 불확실하고 혼란스러움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의 거짓 교훈은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캄캄한 어두움이 그들에게 예비 되어 있습니다.
3)허탄한 자랑 - 거짓교사들이 심판을 받는 또 다른 이유는 사람들을 악한 길에 빠뜨린 것 때문입니다. 그들이 유혹의 대상으로 삼은 자들은 최근에 간신히 신앙의 길로 들어선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유혹하는 방법은 허탄한 자랑을 늘어놓는 것입니다. 확신에 찬 태도로 진리가 아닌 것을 진리인 것처럼 선언하며 사람들을 유혹합니다.
4)음란 - 육체의 정욕 즉 음란으로 유혹합니다.
이와 같은 배도의 심각성을 베드로 사도는 말씀합니다.
√벧후 2: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벧후 2: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벧후 2: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세상의 더러움을 피했다는 것은 회심을 의미합니다. 회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기인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 인식 상태를 넘어 믿고 고백하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고 고백함으로 회심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회심한 이들이 이전으로 돌아간 경우에 대해 말씀합니다. 그들이 거짓교사인지, 18절에서 언급한 최근의 회심한자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이전으로 돌아가 더러움에 얽매이면 나중 형편이 전보다 나쁘게 된다는 것입니다.
마 12:43 더러운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갔을 때에 물 없는 곳으로 다니며 쉬기를 구하되 쉴 곳을 얻지 못하고
마 12:44 이에 이르되 내가 나온 내 집으로 돌아가리라 하고 와 보니 그 집이 비고 청소되고 수리되었거늘
마 12:45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욱 심하게 되느니라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
베드로는 여기에서 배교의 위험을 경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면 세상의 더러움을 피하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안다면 세상의 부패한 것들을 멀리할 수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고 죄 사함을 받은 자가 또다시 범죄에 빠지는 경우에 대해 개가 토한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고 나서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다는 속담에 비유합니다. 이것은 믿음을 가진 성도가 세상 유혹에 빠져 하나님의 은혜를 배신하는 무서운 죄에 대한 경고입니다. 이러한 배교자는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할 수 없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히 6:6). 그러므로 성도는 어떠한 세상의 위협과 유혹에도 흔들리지 말고 구원의 도를 굳게 잡고 의의 길로 행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신으로 모시지 않고 자기 배를 신으로 모시는 탐욕의 종들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영벌에 처하게 됩니다. 성도는 영생의 복을 소유한 자로서 모든 탐욕을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의 의와 그의 나라를 먼저 구하는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시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