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 미루어 짐작하다
정왕을 태운 마차와 허인회 일행은 불원평을 떠나 길이 없으면 마차를 들고 산을 넘을지언정, 경사로 이어진 이십여 개 현과 부의 성안으로 들지 않고 혹여 관원의 눈에 띌까 멀리 둘러 움직였다.
경사의 서화문을 앞두고서야 입성을 허락받고자 조정에 정왕의 서신을 전했다.
조정은 즉시 벌집을 쑤신 듯 분주해졌지만, 정왕을 이끌고 온 사람이 허인회라는 것을 알고는 입성을 막지 말라는 교지가 내려졌다.
교지를 받은 군관이 일행을 통과시키자 승천문 앞 광장에서 정왕과 능걸, 문도 두 장군을 두고 허인회는 더는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한 마디 말도 건네지 않고 뒤돌아섰다.
황궁 정문인 승천문 앞에 자리를 편 정왕과 능걸, 문도 두 장군은 머리를 풀고 석고대죄에 들었고, 소문을 듣고 나온 무수한 백성들은 그 모습에 경악하며 지켜봤다.
허인회는 정왕이 석고대죄에 들자 즉시 경사를 떠나려 했던 생각을 바꿔 일행과 함께 야래향으로 향했다.
비록 일행이 많고 낭자들과 함께했지만, 여러 가지 문제로 경사에 근거를 마련하지 않은 허인회는 어떤 방식으로든 조정의 관여가 있을 것이라 짐작했기에,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객점보다는 그나마 뜻이 통하는 야래향을 찾은 것이었다.
경사가 정왕의 소식으로 어수선해졌는데 아직 시간이 일러 문을 열지 않은 야래향이었지만, 총관 후담은 서둘러 사람을 풀어 살피게 하였다. 그들 가운데 눈치 빠른 자가 있어 허인회 일행의 움직임을 살피고는 즉시 총관 후담에게 알렸다.
허인회 일행이 야래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후담은 놀랄 틈도 없이 화접에게 즉시 알렸고, 화접은 손님을 받지 말라는 지시를 내리고 가장 큰 별채를 비워 허인회 일행을 맞아들였다.
"대인, 명색이 기방인데 이렇듯 어린 낭자들과 함께하시면 어찌합니까? 호호호"
"달리 머물 곳이 마땅치 않아 왔으니 번거롭더라도 받아주시오."
"일을 크게도 만드셨더군요, 대인께서 이곳에 계시는 동안 영업은 꿈도 못 꿀 터인데 어찌하시렵니까?"
"손해는 끼치지 않을 것이고 예약된 손님들이야 동창이 알아서 막아서지 않겠소이까? 그러니 그리 번거롭지는 않을 것이오."
"호호호 동창을 무슨 순천부 포졸로 여기십니다."
"다를 것은 또 뭐가 있겠소이까?"
화접은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이익이 나면 났지 손해는 없는 일이었기에, 하인들에게 허인회 일행 한 사람 한 사람 모두를 돌보게 하고 쉴 곳과 음식을 원하는 대로 내주라 지시했다.
그렇다고 일행 가운데 흐트러질 사람은 없었지만, 그래도 야래향의 규모와 화려함에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정왕의 석고대죄가 시작된 지 사흘을 넘기자 소식은 천하에 전해졌고, 지켜보는 백성이 늘어 갈수록 민심은 정왕에 대한 측은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조정으로서도 한시바삐 처리하지 않아 만일 정왕이 석고대죄 중에 변고라도 생기는 날이면 그 불똥이 어디로 튈지 예상하기 어려웠다.
모두의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허인회는 물론이고 누구도 예상 못 했을 황제의 교지가 허인회에게 내려졌고, 걸음을 재촉한 별감들이 성지를 들고 와 야래향의 문을 두드렸다.
"진평 출신 허인회는 성지를 받으라."
허인회는 생각지 못한 일에 내심 갈등이 일었지만, 북향 구배하고 성지를 받아들였다.
성지에는 누구도 모르게 건청궁으로 들라 적혀있었는데, 별감들도 성지의 내용은 모르는 듯했고 따로 명이 있었는지 성지는 봉해진 채 허인회에게 전해졌다.
별감들이 돌아가고 허인회는 서문자숙을 불러 상의했다.
"황제가 소생을 찾는 이유를 아시겠소이까?"
"주공께서 정왕을 모시고 오셨으니 주공의 의중을 묻고자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지존의 자리에 앉아 의견을 듣는다는 것이 가능하다 생각하시는 게요?"
"정왕을 살려 데리고 온 이유를 묻고 정왕과 화해 한다면 주공께 황실의 안녕을 책임지라 하지 않겠습니까?'
"말씀이 되는 소리를 하시오. 황실과 소생의 사이가 좋은 것도 아니고, 더구나 지난 일을 생각하면 황제는 소생을 죽이고 싶을 것인데, 그 모든 것을 억누르고 소생과 손을 잡을 일이 있겠소이까?"
"황실로서는 복중우환꺼리였던 정왕을 끌고 나왔으니 한시름 던 것 아니겠습니까? 감숙과 청해의 일로 주공의 힘을 달리 판단했을 수도 있고, 세상이 모르는 사연이 감춰져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천사루라면 가능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들은 황실을 보위하기 위해있는 자들이 아니오?"
"불과 몇 년을 참지 못하고 야욕을 드러낸 척씨 세가도 있는데, 수백 아니 적게 잡아 수십 년을 음지에서 숨어지낸 자들 아닙니까, 그 속을 누가 알며 누가 믿고 의지할 수 있겠습니까?"
"황제가 천사루와 갈라서려 한다는 것이오?"
"모릅니다. 말씀하신 대로 황제의 의중에 달린 일이니 만나보셔야 답을 알지 않겠습니까?"
"황제의 칙서가 내렸으니 승상부에서 가만있지 않았을 것인데 어찌 소식이 없는 것인지 모르겠소이다."
"조정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대전에서 드러낼 일은 아니니 백관이 모여 논의하지는 않았겠지만 상선감과 사례감, 승상부라면 암중조정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정왕을 받아들이면 힘의 균형이 어디로 향할 것이라 생각하시오?"
"이미 힘을 잃은 정왕이고 보면 명분을 얻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남은 일이야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황제가 정왕을 받아들여도 변할 것이 없다는 말씀이시오?"
"정왕에게 더하고 뺄 것이 없는데 변하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서로 자신의 공덕을 높이려 할 것이나 백성들의 신망은 황제를 향할 것이란 점에서 황실의 이득이 조금은 더하지 않겠나 짐작해 봅니다."
달도 없는 밤이지만 별은 더 많이 드러나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고 있었지만, 황궁의 높은 담장 안에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많은 화톳불이 밝혀져 있어 대낮처럼 밝게 보였다.
허인회는 날개를 편 붕새처럼 승천문을 밟고 그대로 태화전까지 옮겨가고, 중화전 , 보화전은 건드리지도 않고 건청문에 내려 건청궁을 살폈다.
황명이 있었는지 주변을 순시하는 친위대 위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건청궁 곳곳에 몸을 숨기고 황제를 호위하는 자들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허인회가 건청궁을 한 바퀴 돌아 호위 무인들을 모두 잠재우고 건청궁 옆문을 열고 들어가자, 상선감 허 공공이 내관들과 함께 황제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허인회는 용상 앞으로가 놀라는 이들을 무시하고 황제께 절을 하고 나서 말했다.
"폐하, 좌우를 물려주시기를 청합니다."
"물러나거라."
상선감 허 공공은 황제의 명에 당황했지만 내관들 모두를 이끌고 건청궁 대전을 나섰는데, 황제는 문득 의문이 드는지 물었다.
"오는 동안 막는 이가 없었느냐?"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선덕제는 허인회가 보지 못한 것인지 숨은 호위가 보지 못한 것인지 알지 못했지만 그런가 했다.
황제의 생각에 허인회는 워낙 불가해한 인물이었기에 잠시 허인회를 내려 보는 것으로 대신했다.
"짐이 보자 한 이유를 아느냐?"
"정왕 전하를 모시고 왔으니 소생의 의도와 황실에 미칠 영향을 아시고자 부르신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옳다. 짐의 생각이 그러했다 하니 대답해 보거라."
"먼저 천사루의 담천무를 우려하시는 것은 아니신지 말씀해 주시면 답을 드리겠습니다."
"담천무 말이더냐? 그자가 이 일과 관련이 있다는 게지?"
"알고 계셨습니까?"
"아무리 힘이 없다 하나 들리는 것이 이 자리 아니겠느냐?"
"감숙의 일에 그가 관여한 것이 사실로 드러났으니 정왕 전하와는 관련이 없다는 것도 아실 것 아니겠습니까?"
"백성들의 눈은 어찌하고 그리 쉽게 끝내라는 것이냐?'
"백성들이 본 것이 있다면 그대로 믿게 두고, 폐하의 성덕을 널리 알리는 것도 한 방법 아닐까 싶습니다."
"좋은 생각이로구나, 하지만 네 말대로 하면 그가 가만있겠느냐? 이렇게 터놓고 말하는 것도 네가 아무도 듣지 못하게 하는 기예를 갖고 있다 하여 말하는 것이지 황궁의 소리는 어디서고 새는 것을 알지 않느냐?"
"그와 소생의 인연은 끝나지 않았다 말씀드립니다."
"황묘의 일을 말하는 것이더냐?"
"그에게 처와 자식을 잃었습니다."
"허허, 그대와 같은 사람에게 그런 일이 있었는지는 몰랐구나, 천하가 다 아는 일도 황제가 모르는 일이 있곤 하는데 네 일이 그랬던가 보구나, 그럼 네 말을 믿고 정왕을 받아들일 것이다. 비록 네가 짐과 펀하지 않은 사이이기는 하나 공이 크니 상을 내리려 하는데 원하는 것이 있느냐?"
"정왕을 모시던 자 가운데 능걸과 문도라는 맹장이 있습니다. 그 둘을 정왕과 가까이 두기 꺼려하시면 동북방으로 발령을 내시는 것을 원합니다."
"상을 내린다 했더니 엉뚱한 놈들의 죄를 사해달라.......... 알겠다."
날이 밝자 선덕제는 교지를 내려 천하에 선포했다.
정왕 담진의를 형제로 받아들여 왕위를 유지하고 그 식솔들의 격 역시 모두 복원토록 하라는 내용이었다.
아울러 정왕을 건청궁으로 불러 그동안 못 나눈 정을 나누고 앞으로 황실의 안녕을 위해 힘쓰라 말했다.
황제는 정왕을 위해 그동안 비워둔 황실의 저택을 내줘 왕부로 삼게 하고, 정왕의 건강이 회복되는 대로 연회를 열어 형제가 돌아온 것을 축하하기로 했다.
조정은 황제의 선덕을 높이 받들어 천하에 널리 전하고 감숙과 청해의 뜬 소문을 잠재웠다.
허인회는 건청궁을 나온 즉시 일행을 모두 이끌고 진평 건곤장으로 돌아갔는데, 가는 길에 불원평에 들려 참장 석덕우를 허씨 세가 식솔들을 억압한 죄를 물어 참하고, 허씨 세가 식솔들을 모두 풀어 주고 은자를 넉넉히 내줘 어디로 가든 스스로 택하라 했다.
진평 건곤장으로 돌아와 용병들에게 그동안 수고를 치하하고 상으로 많은 은자를 내준 뒤 용병대를 해산시켰다.
무한에 모였던 무림인들은 예상 밖의 전개에 놀랐지만, 결국 감숙과 청해, 섬서의 일이 모두 끝난 것으로 여겨 속속 자신들의 근거로 돌아갔다.
하지만 오대 세가와 구파 일방의 무인들은 일이 생각 밖으로 전개되자 다시 천하를 돌아보게 되었고, 힘을 합쳐 정보를 모으니 근 삼 년 사이의 변화를 찾아내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모두들 받아 보셨겠지만 상가의 판도가 이리 변했는데도 감조차 잡지 못하고 있었다니 세가의 모사라 자칭하는 사람으로서 부끄럽기 짝이 없소이다."
"그게 어디 제갈 세가 뿐이겠소이까, 오대 세가는 물론이고 구파 일방의 속가 상단마저 이 지경으로 변했으니 어찌 알 수가 있었겠소이까?"
"상단을 탓할 수도 없는 것이 놈들의 수단이 그토록 교묘한데 어찌 짐작이나 했겠소이까?"
"그 많은 물량이 어디로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는 것 아닙니까?"
"지난 감숙의 예를 보면 어딘가 숨겨진 것이 분명하지만 아는 이가 없소이다."
"그 말씀은 지난 감숙과 청해의 일이 척씨 세가와 정왕의 난이 아니라 천사루의 짓이라는 말씀이시오?"
"정황상 천사루의 짓이 분명하지만 드러난 것이 어디에도 없으니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렵소이다."
"감숙과 청해에서 드러났다 하지 않으셨소이까?"
"짐작도 못 하던 물량이 나와 쓰인 것을 두고 추측된 것이지, 누가 언제 준비했는지 알지 못하는데 그들이라고 지목하는 것은 아니라 여겨집니다."
"아직도 그들을 믿는 마음이 남은 듯싶소이다, 하지만 곧 발톱을 드러낼 시기가 가까워졌으니 각자 잘 생각하시어 대비하는 것이 좋을 것이오."
"기왕이면 어떻게 대비하라 일러주시는 것이 어떻겠소이까?"
"스스로 찾아야 할 것이고 답이 정해져 있다 해도 각자 갈 길은 다르니 방법도 다르지 않겠소이까, 오늘 이 자리에 계신 것만으로도 크게 덕을 본 것이라 여기셔도 될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