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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GM 넌 모를 거야 – 골든차일드
꼭 들어주세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되는데. 셋이 사귀는 거.”
결국 우리는 셋이 사귀기로 했다. 그게... 그렇게 됐다.
“그러게. 셋이 사귀는 건 처음이라...”
“나도 처음이야.”
“두 번째면 더 이상한 거 아니냐?”
이재현의 말에 김영훈은 그것도 그렇다며 웃었다.
“평소처럼 하면 되는 거 아냐?”
“그래. 그냥 평소처럼 하자.”
“그럼 사귀는 게 아니라 그냥 친구잖아 바보들아.”
“사귀면 뭐해야 되는데?”
“뭐, 많지. 데이트, 스킨쉽, 뽀뽀, 키스?”
빨대를 휘젓자 얼음이 요란하게 유리잔에 부딪혔다. 문득 고개를 들자 이재현이 빨개진 귀를 만지작대고 있었다.
“...귀는 왜 빨개지냐?”
“아니, 너는... 무슨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냐.”
“하긴. 키스를 셋이 할 수는 없지.”
유교보이 이재현 옆에서 김영훈은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주섬주섬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종이와 펜 한 자루였다.
“그럼 규칙을 정하자!”
“규칙?”
“셋이 할 수 있는 건 셋이. 둘이 해야 되는 건 둘이 하자고. 일단 데이트는 공평하게 셋이~”
아, 누가 연애하는데 규칙을 정해요 진짜... 한숨을 쉬며 이마를 문지르는 나와 달리 김영훈은 신난 목소리로 덧붙였다.
“손도 셋이 잡을 수 있잖아. 같이 잡자.”
“진짜 미친놈들 아냐...”
“근데 어차피 우리 셋이 계속 붙어있을 텐데 둘이 하는 건 언제 하냐?”
천진한 이재현의 물음에 하얀 손이 멈추었다. 까만 펜이 붉은 입술을 톡, 톡. 일정 간격으로 두들겼다. 흠, 그건... 잠시 고민하던 김영훈이 나를 쳐다보았다.
“뭐. 왜. 뭐.”
“이렇게 하자.”
다시 고개를 숙인 까만 머리통이 무언가를 열심히 써 내려갔다. 큼직한 별을 다섯 개나 그려낸 김영훈이 종이를 북 찢어 내게 내밀었다.
“뭐야, 이게?”
“쿠폰.”
웬 쿠폰? 받아든 작은 종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는 제법 앙큼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너 쓰고 싶을 때 써.”
내가 피식 웃자 김영훈이 따라 웃었다.
쿠폰을 제게 쓰리라 확신하는 얼굴이 틀림없었다.
셋이 사귀는 썰 또 푼다
헤엄 作
“쭈야. 사이다 맞지?”
“땡큐.”
김영훈이 음료 컵 세 개를 내려놓으며 옆에 앉았다. 자연스레 내 앞으로 빨간 빨대가 꽂힌 컵을 내민다. 곧 이재현이 커다란 팝콘통을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맞은편에 앉았다.
“저것도 재밌겠다.”
전광판이 푸른 물결로 가득 찼다. 수영선수를 꿈꾸는 한 여자의 이야기인 듯 화면은 계속 푸른 수영장과 바다를 번갈아 가며 보여주었다.
“여기서 질문.”
영화의 제목이 나오려던 찰나, 시야에 들어찬 건 타이틀이 아닌 하얀 얼굴이었다. 커다란 눈망울을 반짝이던 김영훈이 눈을 깜빡였다.
“우리 둘이 물에 빠지면 누구 구해줄 거야?”
“일단 넌 아님.”
“아, 왜!”
“김영훈 너 수영선수였잖아. 내가 안 구해줘도 알아서 잘 나올 거고. 이재현 너도 수영 잘하니까 알아서 나오셈. 됐지? 끝.”
“에이. 그런 거 다 제외하고! 꼭 한 명만 구해야 한다면?”
김영훈이 또 얼굴 공격을 했다. 너 그 꽃받침 아무 데서나 막 하지 좀 말랬지. 으름장을 놓아도 생글생글 웃기만 한다. 애꿎은 팝콘만 한 움큼 쥐어 입에 털어 넣었다.
“꼭... 누굴 구해야 할까? 나는 혼자 살고 싶은뎅.”
“야.”
“알써.”
흠... 누굴 구하지. 우적우적 팝콘을 씹으며 고민했다. 김영훈은 여전히 꽃받침을 한 채 얼굴 공격을 하고 있었고, 이재현은 기대 안 하는 척 은근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음. 이재현?”
“아싸.”
“왜?!”
“넌 수영선수였잖아.”
“그런 게 어딨어!”
“여기 있다, 어쩔래. 슬슬 들어가자.”
이재현이 실실 웃으며 팝콘통을 들고 일어섰다. 김영훈은 입술을 삐죽이며 컵들을 품에 안았다. 영화관에 들어서서도 뒤끝 작렬이시길래 이재현 구하고 너도 구하러 갈게. 됐지? 했더니 그제야 좀 풀렸다. 이렇게 단순해서야, 원.
팝콘통은 내가 안고, 왼쪽엔 이재현이 오른쪽엔 김영훈이 앉았다. 항상 앉던 구도이긴 한데 정식으로(?) 사귄 뒤엔 처음인지라 묘하게 어색했다. 사귀기 전과 별다를 게 없어서 딱히 차이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영화가 시작한 지 절반은 지난 것 같은데 팝콘이 영 줄지를 않았다. 나만 처먹은 탓이었다. 슬쩍 옆을 보자 이재현은 초집중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내 쪽으로 조금 넘어온 김영훈의 팔을 툭툭 쳤다.
“왜?”
소곤소곤 묻기에 팝콘 안 먹을 거냐고 눈짓으로 가리켰다. 그러자 김영훈은 씩 입꼬리를 올리더니,
“아.”
입을 벌렸다.
“미쳤냐?”
“아~~~~”
점점 더 소리를 키우려는 통에 결국 팝콘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두 볼 가득 팝콘이 들어찬 김영훈은 그래도 좋다고 실실 웃었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영화를 마저 보려던 그때, 이번엔 왼쪽에서 내 팔을 톡톡 건드렸다.
“아.”
이번엔 이재현이 입을 작게 벌리고 있었다. 이것들이 쌍으로 염병하네, 진짜. 비록 김영훈처럼 소리를 내지는 않았지만, 얘는 안 먹여주면 집 갈 때까지 저러고 있을 놈이라 그냥 먹여줬다. 이재현이 만족하는 얼굴로 팝콘을 우적우적 씹었다.
“맛있냐?”
“어, 맛있다.”
그 뒤로 또 먹여달라고 입을 벌렸다가 이재현은 결국 한 대를 얻어맞았다. 김영훈은 눈치껏 알아서 혼자 먹었다. 그러다 내 입에 먹여주려고 하길래 손가락까지 콱 깨물었다. 울상을 짓던 김영훈은 호 해달라며 손가락을 내밀었다가 결국 한 대를 얻어맞았다. 하여튼 이것들은 매를 번다, 벌어.
셋이 먹으니 팝콘은 금방 동이 났다. 다 먹은 팝콘통을 내려놓고 이제 영화에 집중했다. 영화는 절정에 치닫고 있었다.
“.......”
일회용 물티슈를 뜯은 김영훈이 내 손을 닦아주었다. 무슨 애기 손 닦아주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까지 살살할 필요는 없는데... 괜히 기분이 이상해 가만히 정면만 응시했다.
“뭐. 앞에 봐.”
손을 다 닦아준 김영훈은 자연스럽게, 내 손을 잡아 왔다. 고개를 돌려 쳐다보자 김영훈은 씩 웃는 채로 영화를 봤다.
망했다. 나 아직 얘 좋아하나?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억지로 빼내는 것도 이상해서 그냥 잡힌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보고 있는 걸 알았는지 잡은 손에 힘이 더 들어갔다. 진짜 망했다. 나 아직 얘 좋아하나봐... 심장이 튀어나올 기세로 뛰었다.
“.......”
불쑥. 왼손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이번엔 이재현이 내 눈을 똑바로 보고 있었다. 뭐하냐? 입 모양으로 묻자 눈짓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김영훈과 꼭 잡고 있는 오른손이었다. 어이가 없지만 어쨌든 손은 셋이 잡기로 약속했으니 그냥 뒀다. 손에 땀 나겠네...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이젠 영화가 무슨 내용인지 잘 모르겠는데 얘네는 잘도 보고 있더라. 그래서 나도 그냥 재밌는 척 정면을 보고 있었다. 근데 김영훈 이 자식이 자꾸만 손을 가만 안 두는 거다. 쪼물딱, 쪼물딱. 한 5초 쉬다 또 쪼물딱.
“야. 가만히 좀 있어.”
참다 참다 주변을 둘러보며 귓가에 소곤댔다.
김영훈은 미동도 하지 않고 생글생글 웃었다.
“왜. 신경 쓰여?”
“어. 엄청.”
“그럼 더 만져야겠다.”
일부러 더 과장되게 손을 만지작댄다. 내가 너한테 뭔 말을 하겠니... 그냥 말을 말지 싶어 다시 정면을 보았다. 그러자 이번엔 왼쪽에서 깍지를 껴왔다.
“...뭐하냐.”
암만 그래도 깍지는 좀... 기분이 영 이상해서 슬쩍 손을 뺐다. 아니 빼려고 했는데, 기다란 손이 더 얽매여왔다. 대체 영화를 보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이래서는 도저히 영화를 볼 수가 없겠다 싶었다. 나는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걍... 사이다나 먹게 좀 줘봐.”
김영훈이 착실하게 사이다 빨대를 내 입에 물려줬다.
쪼로록. 탄산이 입안 가득 팡팡 터졌다.
“이 나이 먹고 뭔 놀이공원이야.”
“재현이 곧 과제전 시즌이잖아. 바빠지기 전에 착실히 놀아야지.”
“그냥 너네 둘만 착실히 놀면 안 될까?”
“미쳤냐?”
“미쳤냐?”
놀이공원은 무조건 손을 잡아야 한다는 김영훈의 개논리에 떨떠름하게 손을 잡았다. 근데 좀... 한국 정서상 이건 그림이 좀 그렇지 않냐? 지나가는 사람들도 다 큰 어른 여자 하나와 남자 둘이 손을 잡고 걸으니 영 이상하다는 눈치였다. 한 스무 걸음도 채 안 걸었을까. 참다못한 내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며 손을 슬쩍 뺐다.
“...손잡아주면 안 돼?”
김영훈이 입술을 삐죽였다. 얼굴 공격 금지령을 내렸더니 이젠 입술을 삐죽이고 난리다. 귀엽게 진짜...
“그냥... 너네 둘만 잡는 건 어때?”
“미쳤냐?”
“미쳤냐?”
하는 수 없이 다시 손을 잡았다. 이재현이 손 시렵다며 내 손을 잡은 채 제 주머니 안에 손을 넣었다. 김영훈도 질 수 없다는 듯 내 손을 잡은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졸지에 나는 두 남자 주머니를 터는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우리도 저거 하자!”
하얀 손가락이 어딘가를 향해 쭉 뻗었다. 아기자기한 동물 머리띠들을 파는 선물샵이었다.
“이 나이 먹고 뭔 머리띠야...”
나는 질색하며 한 걸음 물러섰는데, 이재현은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곰탱이 머리띠를 머리에 썼다. 다 쓰고 나서야 좀 민망했는지 뒷머리를 긁적이는 얼굴이 퍽 웃겼다.
이번엔 김영훈이 내 머리에 머리띠를 씌워줬다. 떨떠름하게 거울을 보니 호랑이귀가 쫑긋 솟아있었다. 그래, 호랑이면 뭐 양호하지. 머리띠를 빼지 않고 가만두자 신난 김영훈은 제 머리에도 머리띠를 썼다. 귀여운 토끼 머리띠였다. 그게 썩 잘 어울려 이재현과 마주 보고 웃었던 건 비밀이다.
문제는 롤러코스터를 탈 때 생겼다.
“내가 앉을 거라니까?”
“솔직히 네가 맨날 옆에 앉았잖아. 이번엔 내가 앉자.”
“공평하게 데덴찌 하자. 아님 가위바위보?”
“초딩이냐?”
“지는.”
“얘들아, 제발.”
자리는 둘인데 사람은 셋이라. ‘내 옆자리에 누가 탈 것인가’를 두고 두 사람은 차례를 기다리는 내내 투닥거렸다. 결국엔 가위바위보 삼세판을 하더니 김영훈이 이겼다. 생글생글 웃으며 내 옆에 앉으려던 김영훈은 결국 내 옆에 앉지 못했다. 내가 이재현 옆자리에 앉혀놓고 냉큼 뒤에 탔기 때문이다. 우리 뒤에서 기다리던 초등학생 아이들이 실랑이를 벌였다. 듣자 하니 그쪽도 홀수라 한 명이 혼자 앉아야 하는 모양이었다.
“언니랑 같이 앉을래? 언니두 홀수라 혼자 앉는데.”
그 말에 한 아이가 활짝 웃으며 내 옆자리에 앉았다. 이재현과 김영훈이 찌릿 나를 돌아봤다. 뭐. 당당하게 턱을 들자 두 장정은 입술을 삐죽이며 안전벨트를 맸다.
롤러코스터는 곧 출발했고, 나는 새로 사귄 친구와 손을 꼭 잡았다.
김영훈이 내 팔을 보며 제가 다 아픈 듯 울상을 지었다.
“오른팔을 다쳐서 어떡하냐.”
“넌 아스팔트 바닥에 그렇게 겁 없이 뛰어드냐.”
“애가 넘어질 뻔했는데 어떡하냐, 그럼.”
진짜 사건은 롤러코스터를 타고 내려온 후 벌어졌다. 이재현에겐 츄러스, 김영훈에겐 옥수수 심부름을 시켜놓고 태평하게 벤치에 앉아있을 때였다. 지나가는 사람 구경이나 하며 시간을 떼우고 있던 내 앞으로 웬 작은 아이가 지나갔다. 솜사탕을 꼭 쥐고 아장아장. 딱 봐도 걷는 폼이 서툰데 주변에 아이 보호자로 보이는 사람이 없었다. 괜히 신경이 쓰여 아이만 보던 찰나, 작은 발이 바닥을 헛디뎠다.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아이를 안았다. 아이의 무릎 대신 내 팔꿈치가 아스팔트 바닥에 갈렸다.
나는 우는 아이를 엉엉 달랬고, 뒤늦게 달려온 김영훈과 이재현이 아이의 보호자를 찾아주었다. 츄러스와 옥수수는 먹어보지도 못한 채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팔꿈치가 욱신거린다는 말에 두 사람이 곧장 나를 데리고 나와 병원으로 향한 탓이었다. 그렇게 아프진 않았는데 팔꿈치에는 금이 가 있었다. 하필 또 오른팔을 다쳐서 막막했다. 나 오른손잡인데.
“...나 왼손으로 숟가락 들 줄 알거든?”
과잉보호 작렬인 두 남자 때문에 더 막막했다. 누가 보면 저 숟가락 들 힘도 없는 환자인 줄 알겠어요... 아주 양쪽에서 반찬을 하나라도 더 떠먹이려고 난리였다.
“야. 근데 이제 어떡하냐.”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짐짓 진지한 투로 말했다. 덩달아 진지해진 김영훈과 이재현이 심각해진 얼굴로 귀를 기울였다.
“...나 이제 한 명밖에 손 못 잡아준다.”
그리곤 킥킥 웃었다. 곧 웃음소리가 들려올 줄 알았는데, 돌아온 건 싸한 정적이었다. 아, 왜 정색을 하고 그러냐. 너네 너무 굳어있어서 장난친 건데. 영 반응이 머쓱했던 나는 웃음을 그쳤다.
“지금 그게 문제냐.”
“...아, 놀래라.”
그제야 아차 싶었다.
이 두 놈들은 지금, 진심으로 속상해하고 있었다.
딴 건 다 어찌어찌 해냈는데, 세수를 하려니 막막했다. 머리도 감아야 하는데... 미용실에 갈까 했지만 이미 시간이 너무 늦었다. 창민이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야작 때문에 늦는단다. 와서 머리만 감겨주면 안 되냐고 했다가 가차 없이 전화가 끊겨버렸다.
한참을 고민하던 나는 하는 수 없이,
“양치는.”
“했어.”
“이리 와.”
이재현을 불렀다.
세수도 못하냐며 놀리거나 장난을 칠 줄 알았는데, 녀석은 의외로 고분고분하게 화장실로 들어가 물 온도를 맞췄다. 내 목에 수건을 둘러준 손이 조심조심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평소에 워낙 거침없는 성격이라 세수도 팍팍 해줄 줄 알고 부른 건데. 무슨 아기 다루는 것보다 더 조심스러운 손길에 되레 당황한 건 나였다.
“그냥 벅벅 해도 돼.”
“...야. 어떻게 그러냐.”
머리도 감겨달랐더니 이재현은 식탁에서 의자 하나를 가져왔다.
“왜? 그냥 고개 숙이고 하면 되는데.”
“그럼 너 힘들잖아. 나도 이게 편해.”
안 그렇게 생겨선 은근 섬세하단 말이지. 암튼 이재현은 섬세한 손길로 머리도 잘 감겨주었다.
“이 집 샴푸 잘하네~”
“또 장난치지.”
감고 있던 눈을 슬쩍 떠보니 안 그런 척하면서 은근 좋아하는 얼굴이 보였다.
“너 오늘 왜 이렇게 말이 없냐?”
“내가?”
“엉. 아까 놀이공원에서부터.”
“...그랬나.”
평소 같았으면 벌써 한참 놀리고도 남았을 녀석이, 묘하게 조용했다. 15년 빅데이터로 봤을 때 저건 분명 기분이 가라앉았다는 신호다. 근데 어디서 가라앉은 건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았다. 이따금 웃는 걸 보니 또 나 때문은 아닌 거 같기도 하고.
“그냥. 속상해서 그러지.”
“뭐가?”
“뭐긴 뭐야. 너 다친 거.”
“금 좀 간 거 가지고, 뭘.”
“내가 좀만 더 일찍 갔으면 안 다쳤을 거 아냐.”
“뭘 또 그렇게까지... 덕분에 내 머리 감겨주는 경험까지 해봤으면 좋은 거 아냐? 이거 김영훈은 못 해본 거다. 영광인 줄 알어~”
결국 못 이기겠다는 듯 이재현이 웃었다. 린스까지 발라준 손이 샤워기를 틀었다. 그리곤 문득,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야.”
“호.”
“...초딩이냐.”
“그건 니잖아.”
“너나 나나.”
“그건 아니거든?”
“아니긴 무슨. 암튼, 야.”
“외 수영장.”
실없는 농담을 건네며 웃었다.
“너 아직도 영훈이 좋아해?”
담담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진.
아니 얘는 무슨... 어제 뭐 먹었냐고 묻는 투로 물어, 저런걸.
“아니?!”
“아님 말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김영훈 안 부르고 나 불렀길래.”
“......? 그럼 널 좋아한다고 생각해야 하는 거 아냐?”
“보통 좋아하는 사람한테 눈곱 낀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하진 않으니까.”
“참나. 나 눈곱 안 꼈거든?”
“그래, 안 꼈다.”
의자에 기댄 채 반쯤 누워있던 날 일으켜준 이재현이 수건으로 머리를 꾹꾹 짰다.
“야, 근데 웃기네.”
“뭐가?”
“너 나 좋아한다며. 눈곱 낀 모습은 싫다 이거냐?”
제법 뻔뻔한 질문에 이재현이 웃었다. 어이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누가 싫대?”
“그럼 좋냐?”
“어, 좋다.”
“어우, 잠깐만. 그런 말은 제발 좀...”
“지가 물어봐 놓고.”
“아니 니가 그렇게 냉큼 대답할 줄은 몰랐지.”
화장실에서 나와 소파에 앉았다. 쟤는 대체 그동안 이러고 싶었던 거 어떻게 참았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발을 까딱이고 있으니 곧 뒷정리를 하고 나온 이재현이 방에서 드라이기를 가지고 나왔다. 코드를 꼽고 수건으로 먼저 말려주는 손길은, 여전히 더럽게 조심스러웠다.
“근데 어떻게 알았냐? 내가 영훈이 좋아했던 거.”
잠시 침묵하던 이재현은 허탈하게 웃었다. 어떻게 알았겠냐. 그러면서 드라이기를 켰다. 머리칼을 말리는 이재현의 손끝을 타고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그걸 어떻게 몰라.”
나는 계속 너만 봤는데. 드라이기 소리에 작은 목소리가 묻혔다.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꼭 내 마음에 얹히는 것처럼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재현은 말없이 내 머리칼을 말려주었다.
나는 김영훈 얼굴에 약했다. 그냥 어릴 때부터 그랬다.
김영훈도 알았다. 그리고 그걸 종종 이용했다. 이를테면, 지금처럼.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초인종이 울렸다. 비밀번호도 알면서 왜 꼬박꼬박 초인종을 누르냐고 묻자 니가 열어주는 게 더 좋아서, 라며 실없이 웃는다. 헛소리하지 말라며 이마를 밀쳐내고 안으로 들어섰다.
이런 건 분위기 잡고 봐야 한다며 김영훈이 커튼이란 커튼은 모조리 쳤다. 그리곤 불도 끄고, 우리는 소파에 나란히 앉아 나쵸를 씹어먹으며 노트북으로 스위트홈을 봤다. 엄청 무섭다더니, 생각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그래 무섭지는 않은데. 생각보다 좀...
“슬프잖아... 허엉...”
그것두 아주 많이. 눈물, 콧물 다 빼는 내게 김영훈이 휴지를 건네주었다. 김영훈은 눈 하나 깜짝 않고 화면을 보고 있었다.
“넌 안 슬퍼?”
“슬퍼.”
“근데 왜 안 울어?”
“슬프다고 다 우냐.”
“너 울보였잖아. 허엉.....”
우리 중에 제일 울보는 김영훈이었다. 초등학생 때는 우리랑 다른 중학교에 갈까 봐 울고, 중학생 때는 이재현 혼자 이과인 게 슬프다며 울고, 고등학생 때는 뒤늦게 졸업식에 온 우리 엄마 아빠를 보고 울었다. 자기 엄마 아빠도 아니고, 나도 안 우는데 왜 지가 울었는지 아직도 의문이지만. 아무튼. 울 때마다 눈이 빨개진 채 울어서 이재현이 눈이 체리 같다고 놀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 빵훈이가 언제 이렇게 컸나 싶어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잠깐. 근데 고등학생 때 얘기하니까 또 빡치네.
지창민은 얘기 안 했다는데 얜 그걸 어디서 주워들은 거지?
“너 근데 어떻게 알았어?”
“뭘?”
“내가 너... 그랬던 거.”
물끄러미 나를 보던 김영훈이 사이다 캔을 하나 더 따서 건넸다.
“모르면 바보 아냐?”
네 눈에서 그렇게 하트가 뿅뿅 나오는데 어떻게 몰라.
와, 그럼 모르는 척을 했다고? 다 알면서? 어째 더 억울해졌다.
참을 수 없이 빡쳐서 테이블에 사이다를 내려놓았다. 주먹으로 김영훈의 어깨를 때리니 아야, 하며 아픈 시늉을 낸다.
“근데 왜 모른척했냐? 개빡치네.”
“니가 대학교 가기 전에 애인 안 사귄다며.”
김영훈이 퍽 억울한 투로 말했다. 엥, 내가? 응, 네가.
“그래서 기껏 참고 너랑 같은 대학교 가려고 열심히 공부했더니. 입학하자마자 과외 해주던 고삐리랑 사귄 게 누구시더라~”
“야. 그거는 걔가 그러면 1등급 찍겠다고 각서 써서 하는 수 없이...”
“어쨌든. 나 진짜진짜 상처가 컸어, 쭈야.”
하얀 손이 제 가슴팍을 문지르며 울상을 지어 보였다. 내가 그런 말을 했다고? 시바, 기억도 안나는구만... 딱 봐도 어디서 영화나 드라마 보고 이상한 로망이 생겨서 생각 없이 뱉은 말이었을 거다. 얜 평소엔 내 말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뭐 그런 걸 새겨듣고 난리야?
“그래서 헤어지고 지금 니랑 사귀잖아.”
“그러니까~ 우리 둘만 사귀는 거면 더 좋을 텐데. 그치.”
“너 이재현한테 이른다.”
“걔도 나랑 같은 마음일걸?”
김영훈이 웃으며 내가 내려놓은 사이다를 마셨다. 꿀꺽꿀꺽 삼킬 때마다 목젖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어느덧 노트북 화면은 새빨간 피로 잔뜩 뒤덮여있었다. 김영훈이 나쵸를 치즈소스에 푹 찍어 내밀었다. 입을 벌리자 똑 반으로 나뉜 나쵸가 입안으로 들어왔다.
“근데 그 고딩 군대는 갔냐.”
“나랑 헤어지자마자 갔을걸.”
“그럼 제대할 때 됐겠네.”
“알 바냐?”
“쓰레빠다.”
“진짜...”
“근데 왜 헤어졌어?”
“알 바냐구. 나쵸나 먹어.”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너 때문이라고.
“남친이면 남친이지, A는 뭐고 Z는 뭐야?”
쉼 없이 울려대는 핸드폰을 보던 지우가 눈썹을 찡그렸다. 니 남친 26명임? 편견 없는 말에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원래 남친1, 2로 해놨는데 2였던 애가 자기가 후자 된 기분이래. 그래서 이재현은 제일 처음이 좋다고 A, 김영훈은 자기가 마지막 사랑이 될 거라고 Z.”
“꿈들도 야무지시네.”
“그니까.”
화면에는 끊임없이 이재현과 김영훈이 보내는 메시지가 미리보기로 떴다. 학생회 회의 지루하다, 난 야작 중, 저녁 뭐 먹냐, 쭈야는 저녁 먹었냐. 그런 시답지 않은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넌 누가 더 좋은데? 언젠가는 결정해야 하는 거 아냐?”
“꼭... 결정을 해야 할까?”
“걔넨 진짜 괜찮대? 셋이 하는 연애?”
“몰라. 지들이 하자고 했는데 괜찮겠지.”
그 와중에 이재현은 정직하게 약속한 대로 단톡방에서만 말을 했다. 김영훈은 때때로 갠톡도 섞어 보내며 간간이 플러팅을 걸어댔고. 남이 보면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힐 이 상황에서, 지우는 침착하게 내게 물었다.
“넌 괜찮고?”
그 말을 듣는데 왜 눈물이 날 것 같던지! 씨바. 지우야...
코를 훌쩍이며 소주병을 들자 자작하면 재수 없다며 작은 손이 내 소주잔에 잠시 닿았다.
“둘 중에 좋은 사람이 있긴 해?”
“야, 그건!”
“응.”
“...당연히 있으니까, 내가 이 미친 짓을 하고 있는 거겠지?”
단숨에 잔을 들이켰다. 망했다. 소주가 달았다.
“그래서. 넌 누가 더 좋은데?”
지잉, 지잉. 남친A와 남친Z가 화면에 번갈아 떴다.
주머니에 푹 손을 쑤셔 넣으니 작은 종이 하나가 잡혔다.
스킨쉽은 여주가 하고 싶을 때!
스킨쉽 허용권 ☆☆☆☆☆
꾸깃꾸깃한 종이에 가지런한 글씨가 가득 들어차 있었다.
암만 생각해도 내가 더 좋아하는 사람은. 그러니까...
.
.
.
ㅡ Epilogue ㅡ
“으, 머리야.”
지끈대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한참을 앉아있었다. 어제 어떻게 들어왔지? 그 뒤로 지우랑 미친 듯이 달리긴 했는데, 기억이 듬성듬성 있었다. 필름 끊길 때까지 마신 건 또 오랜만이네. 뭐, 별일 없었겠지?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방문을 열었다.
“...아침부터 이게 무슨 그림이니?”
이재현은 국을 뜨고, 김영훈은 밥을 뜨고, 지창민은 반찬을 놓고 있었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조합에 머리를 긁적이고 있으니 창민이가 혀를 끌끌 찼다.
“아침 아니고 점심이거든?”
“와서 앉아. 다 됐어, 이제.”
“쭈야, 계란후라이 해줘?”
“아니...”
조용히 지창민 옆에 앉아 숟가락을 들었다. 김치 콩나물국 한 숟갈에 속이 확 풀리는 기분이었다.
“근데 나 어제 어떻게 들어왔냐? 기억이 안 나네... 1학년 때 이후로 필름 끊긴 적 없는데. 나 뭐 실수 안 했지?”
셋 중 하나가 데려왔겠지 싶어 툭 던졌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고개를 들자 세 사람 모두 숟가락을 멈춘 채 나를 보고 있었다.
“기억이... 안 난다고?”
“언제부터? 아니. 어디부터 안 나는데?”
“몰라. 소맥 말아먹을 때부터...? 근데 이거 국 이재현 니가 끓였냐? 진짜 시원하다.”
‘깼어?’
뭐야, 씨발. 불쑥 떠오른 기억에 숟가락이 멈췄다.
너른 등짝. 옅은 비누 냄새. 다정한 목소리. 아니, 하면서 목을 끌어안자 작게 들썩이던 어깨까지. 감각이 너무도 생생했다.
“왜.”
“맛 이상해?”
“아니 그게 아니라...”
‘이거, 지금 쓸래.’
주머니에 넣어뒀던 종이를 손에 쥐여주던 기억. 그걸 보고 낮게 웃던 목소리. 그리고 왼손으로 그 멱살을 잡아다가......
“세상에.”
벌떡 일어나자 시선이 집중됐다. 세 사람이 동시에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 얼굴만 봐선 모르겠는데...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파왔다. 상황은 생생한데 얼굴이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꿈이었나?
“어제 누가 나 데려왔어?”
순간 또 떠오른 기억에 입을 틀어막았다. 내가 그 멱살을 끌어다... 키스를 했다. 그것도 존나 찐하게! 잠시 굳어있던 큼직한 손은 분명 내 허리를 감쌌다. 진하게 엉겨오던 그 감촉은, 꿈이 아니었다.
끼룩끼룩,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정적을 깨트린 건 문 소리였다. 굳게 닫혀있던 화장실 문이 별안간 벌컥 열렸다. 뭐야. 누가 또 있어? 화장실에서 누군가 수건으로 머리를 탈탈 털며 나왔다. 곧 하얀 김이 걷히고, 나는 경악했다.
“어? 누나 깼네.”
나의 전 남자친구, 이주연이었다.
전남친 주연이의 등장~~~! 과연 누가 찐남친이 될 것인지 ^___^
는 여러분의 상상에 맡기도록 하겠습니다~ 아마 여기서 끝일 듯!
그리고 영화관 손 쪼물딱, 놀이공원 자리쟁탈전은 독자님께서 주신 리퀘예요! 소중하고 맛난 리퀘 감사합니다 독자님♡
신규 에디터로는 거의 첨 써보는데 가독성 괜찮은가요? T_T
마지막으로 TMI를 몇 가지 알려드리자면...
1. 주연이는 창민이와 친구다 2. 주연이는 여주의 과외생이었다 3. 재현, 영훈 둘과 주연은 서로 모르는 사이 (존재만 앎) 4. 주연은 누나 마음이 심란한 걸 알고 있기도 했고 어차피 군대에 가야했기 때문에 일부러 헤어져주었다 5. 근데 이제 제대도 하고 복학도 했음 ^___^ |
새로운 한 해, 한 주도 힘내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여러분!
오늘도 함께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알라뷰♡
+ 전편에서 독자님이 주신 짤인데 넘 웃기고 귀엽잔아ㅠ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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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ˋˏ 와 ˎˊ˗ 이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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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어떡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