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歷史와 文學의 眞實性
1. 개화시대(開化時代)의 새로운 역사인식
경상도 청도 유학자 박장현(朴章鉉 1908~1940)의 글이다. 이 글은 청말(淸末)의 사상가 양계초(梁啓超 1873~1929)의 「신사학(新史學)」을 읽고 조선의 구사학을 논한 것이다. 과연 역사란 무엇이었을까?
사학(史學)은 국민의 밝은 거울이다. 사상(思想) 진보(進步)의 원천이다. 빠져서는 아니 되는 학문의 일부분이다.
[史學者(사학자) 國民之明鏡也(국민지명경야) 思想進步之源泉也(사상진보지원천야) 學問上(학문상) 是一部分而不可闕者也(시일부분이불가궐자야)]
오늘날 유럽 민족이 늘 진보한 것은 사학의 공이 절반이다. 우리나라가 이다지도 어리석은 것은 사학이 없기 때문이다.
[今日歐洲民族所以日進步者(금일구주민족소이일진보자) 史學之功(사학지공) 居其半(거기반) 而吾東之蠢蠢若是(이오동지준준약시) 以其無史學也(이기무사학야)]
우리나라 역대사(歷代史)를 살펴보면 위로 김부식의 『삼국사기』, 정인지의 『고려사』, 서거정의 『동국통감』부터 아래로 『국조보감』 및 현재 국내에 돌아다니는 야사까지 수십 종 아래로 내려가지 않는다.
[試繙我邦歷代史(시번아방역대사) 上自金富軾三國史(상자김부식삼국사) 鄭獜趾高麗史(정린지고려사) 徐居正東國通鑑(서거정동국통감) 下至國朝寶鑑(하지국조보감) 及野史之見行域內者(급야사지견행역내자) 不下數十種(불하수십종)]
그러나, 거의 모두 진부한 것을 서로 이어 받아 사학계가 혁신되어 사학의 공덕이 국민에게 미치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 4천 년은 된다. 문제의 근원을 찾으면 두 가지가 있다.
[然率皆陳陳相因(연솔개진진상인) 未有能爲史界關一革新(미유능위사계관일혁신) 而史學之功德及於國民(이사학지공덕급어국민) 四千年于玆矣(사천년우자의) 推其病源有二(추기병원유이)] ◆중국 梁啓超의 『飮氷室文集』9, 「新史學」p.1 ~ p.2를 인용했음이 나타난다.
첫째, 사실은 알아도 이상(理想)은 모른다는 것이다. 사람의 몸은 40여 종의 원질이 합쳐 형성되었다. 하지만 40여 종의 원질을 채집해서 눈, 귀, 코, 입, 심장, 폐부, 살갗, 털, 뼈마디를 모두 구비해도 정신이 없으면 사람이라 할 수 없다.
[一曰(일왈) 知有事實(지유사실) 而不知有理想(이불지유리상) 人身者(인신자) 合四十餘種原質而成者也(합사십여종원질이성자야) 然使採集四十餘種原質(연사채집사십여종원질) 作爲眼耳鼻口心臟肺腑皮毛骨節(작위안이비구심장폐부피모골절) 無一不具(무일불구) 而無精神(이무정신) 則不可謂之人也(칙불가위지인야)]
역사의 정신은 무엇인가? 이상이 그것이다. 서양 학자 스펜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사람이 내게 고하기를 이웃집 고양이가 어제 새끼를 낳았다고 한다면 사실이야 참으로 사실이지만 그것이 쓸 데 없는 사실임을 누가 모르겠는가?
[史之精神維何(사지정신유하) 曰理想是已(왈리상시이) 西儒斯賓塞曰(서유사빈새왈) 或有告者曰(혹유고자왈) 隣家之猫昨日産一子以云(린가지묘작일산일자이운) 事實誠事實也(사실성사실야) 然誰不知其爲無用之事實乎(연수불지기위무용지사실호)]
왜냐하면 그것이 다른 일과 조금도 관계가 없어서 민족 생활상으로 조금도 영향이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을 미루어 역사를 읽는 사례를 보겠다. "○○일 일식이 있었다." "○○일 지진이 있었다." "○○일 태자를 책봉했다." "○○일 비빈을 책봉했다." "○○일 대신 아무개가 죽었다." "○○일 어떤 교서가 내려졌다.“
[何則以其與他事(하칙이기여타사) 豪無關涉(호무관섭) 於民族生活上(어민족생활상) 豪無影響也(호무영향야) 推此言以觀讀史之例曰(추차언이관독사지례왈) 某日日食也(모일일식야) 某日地震也(모일지진야) 某日封太子也(모일봉태자야) 某日冊妃嬪也(모일책비빈야) 某日某大臣卒也(모일모대신졸야) 某日有某敎書也(모일유모교서야)]
종이에 가득찬 것이 모두 이웃집 고양이가 새끼를 낳은 사실과 같아 왕왕 책 한 권을 다 읽어도 한 마디 말도 머릿속에 들어오는 것이 없으니 얼마나 지겨울까? 이른바 이상이라는 것은 거기에 인군(人羣)도 있고 시대(時代)도 있다. [滿紙塡塞(만지전색) 皆隣猫生子之事實(개린묘생자지사실) 往往有讀盡一卷(왕왕유독진일권) 而無一語入腦之說(이무일어입뇌지설) 其可厭不更甚耶(기가염불갱심야) 所謂理想者(소위리상자) 有人羣焉(유인군언) 有時代焉(유시대언)]
인군(人羣)이 서로 마주하고 시대가 서로 이어질 때 혹은 그 원인(遠因)을 말하고 혹은 그 근인(近因)을 말하며 기왕의 큰 사례를 비추어 장래의 풍조를 보여 주고 사건 갑의 영향을 기록하여 사건 을에 유익한 연후에야 민지(民智)를 늘리는 책이 될 것이고 민지를 없애는 도구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人羣之相際(인군지상제) 時代之相續(시대지상속) 或言其遠因(혹언기원인) 或言其近因(혹언기근인) 鑑旣往之大例(감기왕지대례) 示將來之風潮(시장래지풍조) 書甲事之影響(서갑사지영향) 有益於乙事(유익어을사) 然后乃益民智之書(연후내익민지지서) 而非耗民智之具也(이비모민지지구야)]
오늘날 우리나라 역사를 다스리고자 해도 착수할 곳이 없다는 개탄이 없을 수 없다.
[今日欲治我邦史(금일욕치아방사) 不能無無從下手之慨焉(불능무무종하수지개언)] ◆梁啓超의 『飮氷室文集』9, 「新史學」 p.4 ~ p.5를 인용했음이 나타난다.
둘째, 조가(朝家)는 알아도 민간은 모른다는 것이다. 우리들은 항상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역사가 아니라 세 가문의 집안 족보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 말이 조금 과당한 것 같지만, 역사책을 지은 사람의 정신을 생각하면 실제로 틀림이 없다.
[二曰(이왈) 知有朝家(지유조가) 而不知有民間(이불지유민간) 吾黨常言(오당상언) 金富軾三國史(김부식삼국사) 非史也(비사야) 乃三家之家譜而已(내삼가지가보이이) 其言似稍過當(기언사초과당) 按之作史者精神(안지작사자정신) 其實際固不誣也(기실제고불무야)]
무릇 책을 지음에 종지를 귀하게 여긴다. 전에 역사책을 지은 사람은 조가(朝家)를 위해 계보를 정리했는가? 약간의 대신을 위해 기념비를 지었는가? 약간의 과거사실을 위해 가무극을 만들었는가? 아니다. 후세에 거울로 삼아 권면하고 징계하기 위함이다.
[凡著書貴宗旨(범저서귀종지) 前作史者(전작사자) 爲朝家而修譜系耶(위조가이수보계야) 將爲若干大臣(장위약간대신) 作記念碑耶(작기념비야) 爲若干之過去事(위약간지과거사) 爲歌舞劇耶(위가무극야) 殆非也(태비야) 將使后世鑑之以爲勸懲也(장사후세감지이위권징야)]
이 때문에 권면하고 징계할만한 민간의 사건을 채집하여 역사의 재료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영웅의 무대이다. 영웅이 아니면 거의 역사가 없다. [是故使採集民間之事可勸可懲(시고사채집민간지사가권가징) 爲歷史之材料(위력사지재료) 然歷史(연역사) 英雄之舞臺(영웅지무대) 舍英雄(사영웅) 幾無歷史(기무역사)]
따라서, 인물을 시대의 대표로 삼아 하나의 인군(人羣)이 휴양하고 생식하고 한 몸으로 진화한 모습을 지어 후세에 독자가 거기에서 흥기하고 진보하게 하려는 것이다. 전에 역사가는 역사를 조정왕가[朝家]의 전유물이라 여기고 조가가 아니면 기재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故以人物爲時代之代表(고이인물위시대지대표) 以述一羣人所以休養生息同體進化之狀(이술일군인소이휴양생식동체진화지상) 使后世讀者(사후세독자) 有興起焉(유흥기언) 有進步焉(유진보언) 前史氏(전사씨) 認歷史爲朝家專有物(인역사위조가전유물) 舍朝家外(사조가외) 無可記載(무가기재)]
때때로 야사의 서술에 의지해 조각이라도 볼 수 있지만 백에 하나도 얻지 못한다. 이것이 민기(民氣)와 학풍이 날로 쇠하고 패한 까닭이다.
[時或藉野史之叙述(시혹자야사지서술) 窺其片鱗殘甲(규기편린잔갑) 然百不得一(연백불득일) 此所以民氣學風(차소이민기학풍) 日以衰敗也(일이쇠패야)]
시 삼백 편이 주변[周家]의 역사인데 민풍(民風)이 그 절반이니 옛날 역사책도 그렇지 않던가? 우리나라가 민족사상(民族思想)이 지금까지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어찌 역사가가 그 잘못을 피할 수 있을까?
[詩三百篇(시삼백편) 乃周家之史(내주가지사) 而民風居其半焉(이민풍거기반언) 古之史不其然乎(고지사불기연호) 我邦民族思想(아방민족사상) 至今不能興起者(지금불능흥기자) 史家豈能辭其咎耶(사가기능사기구야)] ◆梁啓超의 『飮氷室文集』9, 「新史學」 p.3에서 많이 인용했음이 나타난다.
오늘날 민족주의를 제창해서 우리 동포가 능히 우승열패(優勝劣敗)의 세계에 일어서게 할 수 있을까? 우리나라 사학 한 분과는 실로 노소, 남녀, 지우(智愚)를 막론하고 모두가 종사해서 목말라 물마시듯 굶주려 밥을 먹듯 한 순간도 늦추지 말아야 한다.
[今日欲提倡民族主義(금일욕제창민족주의) 使我同胞(사아동포) 能立於此優勝劣敗之世界乎(능립어차우승열패지세계호) 我邦史學一科(아방사학일과) 實爲無老無幼無男無女無智無愚(실위무로무유무남무녀무지무우) 皆所當從事(개소당종사) 視之如渴飮飢食(시지여갈음기식) 一刻不容緩者也(일각불용완자야)]
그러나, 4천 년간을 거쳐도 우리가 원하는 것을 길러 주고 우리가 구하는 것을 제공하는 역사책이 거의 하나도 없었다.
[雖然歷數四千年間(수연역수사천년간) 著錄無一可以養吾所欲(저록무일가이양오소욕) 給吾所求者(급오소구자) 殆無一焉(태무일언)]
아아! 사계혁명(史界革命)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 민족은 끝내 구원받지 못할 것이다. 유유하게 흐르는 만 가지 일 중에 생각해보면 이것이 중대하다. 「신사학(新史學)」을 지은 것이 어찌 호사가의 일이겠는가? 마지못해 그런 것일 뿐이다.
[嗚乎(오호) 史界革命不起(사계혁명불기) 則吾民族(칙오민족) 終不可救(종불가구) 悠悠萬事(유유만사) 惟此爲大(유차위대) 新史學之著(신사학지저) 豈其好事哉(기기호사재) 吾不得已也(오불득이야)] ◆梁啓超의 『飮氷室文集』9, 「新史學」 p.7에서 많이 인용했음이 나타난다.
- 박장현(朴章鉉) 「구사학론(舊史學論)」 『문경상초(文卿常草)』 (『中山全書』下)
2. 연쇄살인범 사도세자가 성군감인가.
사도세자가 뒤주 속에서 죽었다는 것이 마치 골방에 있는 뒤주를 상상하거나, 당쟁 때문이라고 왜곡된 역사기술을 보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잘못 알고 있으나 왕조실록 1762년 윤5월13일 기사를 보면 그렇지 않다. 사도세자를 직접 낳은 선희궁 영빈이씨가 영조에게 친자식 사도세자의 처분을 내리자고 말한 여인이다. 어머니가 자식의 목숨과 맞바꿀 당파적 이익은 무엇인가?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되겠지만 없다.
한양굿이나 경기도당굿에서는 지금도 사도세자를 신처럼 모신다.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의 원혼이라는 역사조작이 신의 지위로까지 격상되어 ‘당쟁의 와중에 억울하게 뒤주 속에서 죽은 세자로 포장되어 250년간 줄기차게 이어온 역사조작 때문이다. 진실은 무엇일가?
사실 사도세자는 살인자일 뿐이다. 살인자 중에도 100명이 넘는 무고한 사람을 파리 잡듯이 연쇄살인을 했다. 실증사료를 목숨처럼 아끼는 역사학자 중에 사도세자의 살인을 부정한다면 역사학자라 할 수 없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1762년(임오) 윤5월13일 성군 영조대왕은 군사를 궁궐 담장을 향하여 지키게 하고 세자궁의 군사들을 무장해제 시켰다. 세자를 그 자리에서 자결하라고 명한다. 세자주변 신하들이 칼을 뺏어서 만류하자 어영군이 뒤주[斗支]를 들여오고 세자를 폐하는 반교문을 반포하고 사가들이 차마 기록할 수가 없다고 했지만 “대천록”에 폐세자 반교문에 세자가 살인한 사람의 숫자가 백여 명이라는 내용이 나온다. 뒤주는 골방이 아닌 선인문 안뜰에다 엄하게 덮어두고 군사들 100명을 윤5월22일까지 지키게 하였다.
사도세자의 살인을 왕조실록은 차마 기록할 수 없다거나 운운 등으로 생략했지만 궁노와 환시를 죽이고 후회했다는 기록은 1762(임오)년 5월22일 및 윤5월13일에도 나오니 인터넷사이트에 확인하여 원문을 볼 수 있다. 한글로 기록한 혜경궁 홍씨의 목격담을 보면 세자는 내관 김한채를 죽여서 그의 목을 잘라 들고 궁내를 돌아다녔으니 살펴볼수록 심각하고 매우 끔찍하다.
“그 머리를 들고 드러오오셔 내인들에게 회시하오시니 내가 그때 사람의 머리 버힌 거슬 보아시니...” - 『한중록』
혜경궁 홍씨가 거짓말을 일기에다 적었을까? 그러나 실록에서도 사도세자는 1757년, 1758년 살인을 시작해서 그 후에도 자신의 친자식을 낳은 후궁도 죽였고 점치는 맹인도 죽였다. 그가 죽인 사람의 수는 오늘날 연쇄살인범이 죽인 숫자보다 더 많다. 정조가 읽고는 제목을 ‘『천유록(闡幽錄)』’에서 ‘『대천록(待闡錄)』’으로 직접 고쳐준 책 속에 그 어머니조차 생명의 위협을 느껴 선희궁 영빈이씨의 증언이 나온다.
“세자가 죽인 중관(中官 : 조정에서 근무하는 관리) 나인 노속(奴屬 : 종의 무리)들이 백여 명에 이르고 그 낙형(烙刑 : 지지거나 찔러 죽이는 형벌) 등이 참혹(慘酷 : 비참하고 끔찍하여 애처로움)하다. [世子戕殺中官內人奴屬將至百餘(세자장살중관내인노속장지백여) 而烙刑等慘(이낙형등참)]”.......
“요사이 궁궐의 그 곳에 가서 피살당할 번하다가 겨우 몸만 빠져나왔다. [頃日往彼闕幾乎被殺(경일왕피궐기호피살) 僅以身免(근이신면)]” - 『대천록(待闡錄)』 40쪽
사도세자가 1749(기사)년~ 1751(신미)년 윤5월까지 세자청정(世子聽政 : 세자가 임금을 대리할 수 있는 기간) 동안에도 무고한 자기 백성을 직접 살해하였으니 동서양 어디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들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간 나경언의 고변이 있던 1762(임오)년 5월 22일 왕조실록을 보면 그날 밤 영조는 뜰에 엎드린 세자에게 말한 첫마디 내용이 역시 살인에 대한 것이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죽이고, 여승(女僧 : 비구니)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 - 궁궐 서쪽의 계방(桂坊:지금의 계동)을 말함]에 행역(行役:민패를 끼치는 일)하고, 북성(北城:평안도 지방)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汝搏殺王孫之母(여박살왕손지모), 引僧尼入宮(인승니입궁), 西路行役(서로행역), 北城出遊(북성출유), 此豈世子可行之事(차기세자가행지사)?]
........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 : 불같은 증세)입니다.” 하니, [世子泣對曰(세자읍대왈): “此果臣之本病火症也(차과신지본병화증야)。”]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 : 미친 기운이 발동하여 마음을 다스릴 수 없는 정도)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 위에서 대죄하였다. [上曰(상왈): “寧爲發狂(녕위발광), 則豈不反勝乎(칙기불반승호)?” 命退出(명퇴출), 世子出外(세자출외), 待罪于禁川橋上(대죄우금천교상)。]
영조는 ‘박살’이라고 표현했다. 세자가 제 자식을 낳은 후궁을 때려서 살해했다는 것이다. 세자가 화내는 증세는 있어도 미치지는 않고 정상적인 수준임을 말해주고 있다. 또 세자가 살인한 이유를 아버지 영조가 심하게 대하여 그랬다는 터무니없는 옹호를 하거나 왕위를 물려주지 않아서 그랬다고 옹호하려는 말도 있지만 이는 전혀 맞지 않다. 그 이유를 보면 영조와 세자는 다른 궁궐에서 살고 문안인사도 서면으로 대신했고 세자가 임금을 대리(代理)통치를 하는 중에도 살인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병으로 한두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독한 마음에서 살인행각을 벌였다.
『한중록』에는 어머니인 선희궁 영빈이씨의 나인도 살해당한 것이 적혀있다. 결국 일은 점점 심각해져 심지어 여동생 화완옹주에게도 칼을 들이댔다. 사도세자가 왕이 되었으면 또 다른 불행을 불러올 것이 예고된 사람이었을 뿐이었다. 영조는 자신이 지은 세자 묘지문[대천록(待闡錄) 52쪽 임오 윤5월 23일 어제사도세자지문(御製思悼世子誌文)]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 옛날부터 무도한 군주가 어찌 없다 하리오만 세자시절에 이런 자, 나 듣지 못했다. [噫(희) 自古無道之君何限(자고무도지군하한) 而於世子時若此者(이어세자시약차자) 予所未聞(여소미문)]”
세자의 그 패악이 소문나지 않은 이유는 장인인 홍봉한이 영의정으로서 사건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대신들은 세자가 병으로 인해 생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말했고 세자는 죄책감조차 없었다.
친어머니가 영조의 신변이 위험하여 세자를 죽이자고 말해도 당시 신하들이 한 이야기는 오히려 궁중의 여인이 국본을 흔들었다고 말하는 뻔뻔스런 이야기는 왕조실록에도 나온다.
세자의 살인이 제대로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승정원일기』가 삭제된 영조52년(1787) 2월부터의 기록이다. 정조는 아버지를 흉악한 살인마로 내버려 둘 수 없었고 그래서 일기는 오려지고 사라졌다. 규장각에 보관되어 있는 『승정원일기』는 관련 부분이 유독 너덜너덜하고 통째로 찢겨져 나갔다.
찢겨져 나간 곳이 100여 곳이 넘는다. 여기에 사도세자 죽음의 진실이 있었을 것이다. 『승정원일기』 곳곳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이 아래 한 장은 칼로 삭제되었다. 병신년 전교로 인해 세초했다. [此下一張刀削(차하일장도삭) 丙申因傳敎洗草(병신인전교세초)]”
역사의 조작을 반드시 악인만이 하는 것이 아님을 잘려나간 『승정원일기』는 잘 말해준다. 진실을 오려내는 역사조작은 상당부분 성공해서 오늘날 경기도당굿에서는 수많은 연쇄살인을 저지른 사도세자를 신처럼 모시며, 방송드라마는 당쟁으로 억울하게 죽은 사도세자를 성군감으로 그려 시청자들은 눈물로 그를 동정하게 됐다. 어떤 서적에는 사도세자가 성군의 자질을 지닌 인물이라고 단정하는 역사서까지 진열되어 어머니가 당쟁에 사로잡혀 자식을 죽였다는 거짓말도 별다른 의심 없이 떠돌게 되는 것이다.
250년이 지난 지금은 만인평등의 세상이다. 모든 인간은 모태에 잉태하고부터 태어나 죽을 때까지 똑 같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진 밝은 세상이다. 배웠다는 식자층에서도 연쇄살인행위를 저지른 자가 임금이 되지 못한 것을 애석하다고 책에다 쓰고 있다는 사실은 진실을 가려놓은 역사조작 때문인가. 아니면 연쇄살인으로 그 때 죽은 인간은 개만도 못한 존재라서 덮어두고 죽인 자가 성군감이라는 것인가. 진정한 역사 바로 새우기란 무엇인가?
3. 문학이 역사보다 진실한가?
“시는 역사보다 진실하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한 말이다. 그 시대의 고대 헬라스 극을 말했는데 후대인들이 유형, 무형의 문학을 말한다.
그러나, 역사는 기록된 사실(fact)을 다루는 학문이라면 시는 인간 삶의 진실한(real) 측면을 적은 문학이다. 역사는 반드시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fact)을 평가와 판단[褒貶(포폄)]을 가하여 기술한 것이고, 시는 누구에겐가 ‘일어났음 직하거나 일어날 수도 있는’ 삶의 한 조각을 빚어낸 것이다.
중국의 정사인 『삼국지』의 주인공은 조조이지만 소설 『삼국지연의』의 주인공은 유비다. 중국의 학자 곽말약(郭沫若)의 『중국소설사략』에는 장터에서 이야기를 팔아먹고 사는 이야기꾼이 『삼국지연의』의 한 대목을 이야기하는데, 조조가 잘 되는 장면이 나오면 구경꾼들이 다 화를 내고 유비가 이기는 장면이 나오면 다 같이 손뼉을 치고 환호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역사적 영향력이나 업적, 역사의 흐름과 성취의 측면에서 유비는 조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왜 일반민중은 유비의 실패를 안타까워하고 기꺼이 유비의 편을 들고자 했을까!
『조조』의 인물됨을 살펴보면 그의 친구를 만나 하룻밤을 의탁하는데 저녁이 되어 친구는 보이지 않고 밖에서 칼 가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보니 친구의 아버지가 칼을 갈고 있었다. 조조는 자신을 헤치려는 줄 착각하여 그를 죽여 버렸는데, 돼지를 잡으려고 묶어둔 것을 보았다. 죽인 것이 잘못임을 깨달아 허겁지겁 도망쳐 나오는 길에 친구와 마주쳤다. 아무 것도 모르는 친구는 ‘돼지를 잡기로 하고 반찬을 사오는데 벌써 떠나면 되느냐’고 했다. 급한 듯 둘러대고 헤어진 후 다시 그 친구 집으로 되돌아가 전부 살해하고 갔다. 이유는 후환을 미리 없애버린 것이다. 지금 세상이면 일가족 살해범이 승상(국무총리)이 될 수 없을 것이다. 반면 『유비』는 자기의 야심 때문에 보통사람들을 배신하지 않을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삼국지를 읽는 사람들이 존경하고 희망을 갖는다.
역사와 정치가 지향하는 바는 다수 백성들의 삶의 질이 나아지고 자유롭고 안전하게 살도록 보장하며 동등한 권리와 존엄성이 향상되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적 사실에서 옳은 것은 옳고 나쁜 것은 나쁘다고 판단하는 것도 보통사람들의 지향점을 기준으로 볼 때 역사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문학에서 희망을 구하려 하는 것이다.
4. 사육신묘에 가짜묘를 끼운 역사왜곡이 가당한 일인가?
선조 9년(1576년) 6월 24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남효온이 지은 《육신전》을 보고 상이 괴이하게 여겨 토론에 부치다”는 내용은 누구든지 국립중앙도서관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인쇄할 수 있으므로 내용은 생략하고 이와 관련된 율곡전서의 내용 일부를 아래에 소개한다.
... 예전에 김종직(金宗直)이 성묘(成廟, 성종)에게 “성삼문은 충신입니다.” 하고 아뢰었다. 성묘가 놀라 낯빛이 변하였다. 김종직이 조심스럽게 “행여나 변고가 있으면 신은 마땅히 성삼문이 되겠습니다.” 하였다. [昔者(석자), 金宗直啓于成廟曰(김종직계우성묘왈), 成三問是忠臣(성삼문시충신). 成廟驚變色(성묘경변색). 宗直徐曰(종직서왈), 幸有變故(행유변고), 則臣當爲成三問矣(칙신당위성삼문의).]
그제야 성묘의 안색이 평온해졌다. 애석하다! 시종하는 신하로서 이러한 말을 상의 앞에서 아뢰는 이가 없었다. [成廟色乃定(성묘색내정). 惜乎(석호)! 侍臣無以此言啓于上前者也(시신무이차언계우상전자야).]
- 이이(李珥, 1536~1584), 「경연일기(經筵日記)」, 『율곡전서(栗谷全書)』
이 일화는 김시양(金時讓)의 『부계기문(涪溪記聞)』 내용에도 명종 초년에 윤해평(尹海平)이 『육신전』을 인쇄하여 반포하기를 청하니 명종이 매우 성을 내며 끌어내라고 명하였다. 그 뒤 선조가 “집에 『육신전』을 간직하고 있는 자는 반역으로 논죄하겠다.” 하여 신하가 모두 두려워하였다. 류성룡이 “국가가 불행히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신들이 신숙주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성삼문이 되기를 바라십니까?” 하고 묻자 선조가 노여움을 풀었다.
성종 때는 김종직이 명종 초에 윤해평이, 선조 때는 이이가 성삼문을 들먹이고 『육신전』으로 소동이 일어났다는 것인데 행여나 국가에 변고가 있다면 성삼문이 되겠다고 하는 말은 유교적 충성과 의리의 가치관으로 세조의 원죄를 풍자한 것이다. 김종직, 이이, 류성룡의 말은 이미 세조의 쿠데타를 비평하고 성삼문의 충성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육신전(六臣傳)은 사육신과 생육신 중에서 사육신(死六臣)에 관한 이야기다. 지은이는 생육신의 하나로 알려진 추강(秋江) 남효온(南孝溫)이다. 국립중앙도서관 인터넷사이트에 검색하면 80쪽짜리 영인본 원본을 누구든지 볼 수 있다. 1~3쪽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무인(武人) 유응부(兪應孚)가 나오고 성삼문은 여러 곳에 나오며 유응부는 13~14쪽에 더 자세히 나온다. 하위지(河緯地)는 10~11쪽에 나오며 12쪽에 유성원(柳成源), 이개(李塏)가 나오는데 이개는 5쪽에도 나온다. 이들 중에 무인 유응부 외 5명은 세종시대 집현전 학자들로서 한글창제에도 공을 세웠고 성삼문과 하위지는 장원급제한 수재였다.
효종3년 1652년 11월13일 왕조실록 2번째 기사에서 판서를 지낸 조경(趙絅)의 상소내용에도 사육신 이름이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로 적혀있다. 생육신 김시습이 시신을 거두에 장사지냈다고 전한다.
숙종 때(1680년 12월22일 왕조실록 2번째 기사) 강화유수의 상소에 따라 사육신과 황보인 김종서의 신원을 윤허하였다. 그 후 1691년 9월2일 숙종은 육신묘를 둘러보고 제사를 논의하고 12월6일 사육신을 복작하고 사당을 편액 치제하고 임금이 친히 비망기를 내렸다. 이 날짜는 누구든지 왕조실록 싸이트에서 읽어볼 수 있다. 그런데 가짜 묘를 더 만들어서 사칠신으로 해 놓았으니 그야말로 역사왜곡의 산 교육장이 되었다. 5.16 군사쿠데타는 무고한 일반인의 인명살상은 없었지만, 세조의 계유정란과 단종복위운동은 김종서를 비롯한 수많은 조정충신과 일가족이 죽었다. 그 중에서 외직에 나가 있던 무관 김아무개가 뜻을 같이 하겠다고 함으로서 함께 잡혀서 죽었다고 뜬금없이 육신의 묘지에 가짜로 끼워 넣어 칠신으로 만드는 역사왜곡이 가당한 일인가? 김아무개가 사육신이라고 우기는 인간들 중에는 허수아비로 들러리 선 인간도 있겠지만 소송을 했느니 하는데 육신전을 쓴 남효온을 상대로 소송했는지 공식인정한 숙종임금을 상대로 소송했다는 것인가? 참으로 개가 웃을 역사왜곡이다.
5. 왜곡한 역사는 바로 잡아야 한다.
권력이 역사를 주무르면 역사는 뒷설거지에나 쓰이는 행주나 걸레짝이 되고 역사를 기록한 책은 화장실의 휴지만도 못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들을 소설이나 연극대본처럼 각색한다면 언제 어떻게 왜곡되고 역사적 범죄를 덮는데 욕되게 사용될 수도 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기록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왕조시대에 하늘 아래 ‘나 한 사람’인 왕의 권위도 역사적 사초를 엿보지 못하게 했다. 권력이 역사에 개입하는 순간 비극이 잉태되었다. 선비들은 진실을 생명보다 중하게 여겼다. 사초를 훔쳐보고 사관을 죽인 폭군도 있다.
그렇다면 누가 역사를 평가해야 하는가? 역사는 일반인의 보편의지(普遍意志)를 기준으로 평가해야 한다. 보편의지는 헤겔처럼 자유를 신장하거나 인류 공동체 삶의 질이 나아지는 것, 일반인의 연대감, 우애의 신장 등 보통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고 누구나 바라는 세상을 만드는데 도와주는 것을 말한다. 특별한 사람을 위하여 일반인의 권리를 줄이거나 궁핍해진다면 외면을 당한다.
역사적 사실(fact)은 일어난 대로 전달하는 것이지 가상의 세계(real)는 문학작품에서나 있을 수 있다. 인간세계에서 희망사항은 종교적 믿음일 뿐 역사적 진실이라 할 수는 없다. 또 인간의 내면세계를 기술한 것은 철학적영역일 수는 있어도 역사라고 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실은 발생한 그대로 기술하는 것이고 평가는 일어난 사실을 바르게 전달받은 후대인들의 몫일 수 있다.
유럽에서는 나치 전범을 지금까지도 찾고 있고 찾는 대로 법정에 세워 어떤 형식으로든 처벌을 한다는데 나치에 희생되었거나 저항하여 인류의 보편의지를 실현하려고 한 사람의 행적은 기록하고 기념물로 남긴다고 한다.
이에 반해 일본은 전범의 두목 일왕을 살려둔 결과 주변국에 수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고통을 준 반인륜적 전범의 위패 앞에 정치인이 머리를 조아리고 반인륜 성노예 역사도 반성하지 않고 후손에게 정당한 듯이 교육하고 있다.
역사란 부끄러운 일과 자랑스러운 일을 바르게 기록하고 정리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일제강점기에 살던 사람이 출세했거나 살기위하여 교육받았다고 매국노 반열에 무조건 올린다면 농사짓고 나무장사나 했던 사람만 애국자란 말인가. 적어도 을사늑약에 가담했거나, 민족말살에 앞장섰거나, 애국지사나 동포들을 학살했거나, 일제로부터 귀족작위를 받아 호의호식하고 후손에게 대물림한 인간은 진정한 매국노라 할 것이다. (完)
특별부록 - 환단고기 바로알자
일본 가지마 노보루(鹿島昇·1925년생)가 번역한 것으로 돼 있는 양장본 ‘환단고기(桓檀古記)’를 국회도서관에 비치한 것은 서기 1982년인 쇼와(昭和) 57년, ‘역사와 현대사(歷史と現代社)’를 발행인으로, ‘(주)신국민사(新國民社)’를 발매인으로 도쿄에서 출간된 일본어 책이었다.환단고기는 1911년 계연수가 ‘삼성기’ ‘단군세기’ ‘북부여기’ ‘태백일사’란 네 가지 책을 한데 묶어 편찬하면서 붙인 이름인데 실상은 1982년 가지마 노부루가 출판한 후 3년이 지난 1985년 이후 출판된 것이다. 사단법인 행촌학술문화진흥원에서 발행한 “행촌선생연구총서 제1집”에 보면 정사인 고려사나 조선시대 문헌에는 단군세기를 썼다는 기록이 없다. 다만, 그의 현손인 이맥이 쓴 “고려국본기”에 행촌시중이 “단군세기”를 지었다는 내용이 나오지만 한단고기 안에 구성되어 있다면서 조선 말 평안도 태천사람 백관묵(白寬默)의 집에서 나왔다는 것이다.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편에는 환웅이 신지 혁덕이라는 사람에게 명하여 천부경을 ‘녹도문(鹿圖文)’으로 적게 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환단고기는 녹도문이 어떻게 생긴 문자인지는 그 모양을 그려놓은 게 없어 녹도문을 원시 한글로 추정하기는 어렵다.그런데 단군세기는 세 번째 가륵(嘉勒)단군 2년, 삼랑 을보륵에게 명하여 정음(正音) 38자로 된 지금의 한글과 아주 비슷한 ‘가림토(加臨土) 문자’를 만들었다고 기록하고 모양을 보여준다. 또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 편은 단군세기를 인용해 삼랑 을보륵이 정음 38자를 만들었는데 이를 가리켜 ‘가림다(加臨多) 문자’라고 한다며 앞의 가림토와 같은 모양의 문자를 보여준다. 단군세기에는 ‘가림토’로, 태백일사에는 ‘가림다’로 한 글자가 다르게 표기돼 있지만, 왜색이 물씬 풍긴다. 우리 한글 창제당시 28자에 열자만 다른 모양을 추가한 것이다. 세종실록과 훈민정음해례본 등에 의할 때 한글의 독창성과 우수성은 전 세계가 격찬하는 것을 깎아내려 보려고 아무리 발악해도 일본어는 비과학적이어서 아이티시대에 한국을 따라올 수 없다. 또 3대 단군 때에 예읍의 반란추장 소시모리를 참하니 그 후손이 삼도로 도망가서 천황을 칭하게 되었다는 내용은 단기고사에 없는 것을 끼워넣어 빈약한 일본역사를 접목시켜 연대를 올려보려고 발버둥 치는 천왕 밑에 엎드린 동물들의 노력이 가소롭고 측은하기조차 하다.
위서 시비에도 불구하고 환단고기가 주목받는 것은 정확성 때문이다. 우리 민족이 기록을 남기지 못한 옛날의 일은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추적해볼 수 있는데, 요즘 실시된 고고학적 발굴로 새로이 밝혀지는 사실 중에 환단고기의 내용과 일치하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결정적 단서로 보기는 쉽지 않다. 가령 낭하리의 사슴뿔 모양의 석각이 단순한 그림인지 녹도문인지는 알 수 없다. 사실 환단고기에 담긴 내용이 인터넷을 통해 유포되어 그것을 따르는 사람이 늘고 있어 2002년 한일월드컵 때 한국축구대표팀 응원단인 ‘붉은악마’는 치우천왕이 그려진 엠블램을 들고 나왔다.치우를 단군보다 앞선 우리의 조상으로 인식하게 해준 것은 바로 환단고기다. 물론 환단고기에 앞서 치우를 우리 선조로 규정한 책이 있었다. 1675년(조선 숙종 1년) ‘북애노인’이라는 호를 쓴 사람이 펴낸 ‘규원사화(揆園史話)’가 그것이다. 그런데 규원사화는 사서(史書)가 아닌 사화, 즉 ‘역사 이야기책’이란 이유로 역사학계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규원사화에 담긴 내용이 모두 허구는 아니다. 일부는 분명 진실일 텐데 우리의 사학자들은 이를 연구조차 하지 않았다. 규원사화가 살려내지 못한 치우를 환단고기가 화려하게 부활시켰다.그런데 치우가 우리 조상이 아니라 중국인의 선조라고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러한 사실이 중국 학자들에 의해 밝혀진다면 치우를 앞세우며 좋아했던 한국인은 정말 우스운 존재가 될 것이 아닌가. 문제는 치우를 중국의 선조로 만들려는 작업이 이미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인들은 황제, 염제와 더불어 치우를 중국인의 3대 시조로 꾸미고 있다. 그렇지만 치우천황은 분명 동이족의 제14대 자오지 환웅천황으로서 우리 조상들의 활동지역에서 중국인들이 야만족으로 취급해 왔고 황제헌원은 그의 통치 아래서 독립운동으로 중국시조가 되었다.오행론은 금목수화토 사이에 다양한 관계를 만들어놓고, 어느 것과 어느 것이 어떤 조건으로 만나면 어떻게 된다는 것을 정리해놓은 것이다. 음양론과 오행론이 공자를 태두로 한 유교에 흡수됐고, 그러한 유학은 조선시대 퇴계와 율곡에 이르러 성리학이 꽃을 피우는데, 퇴계의 성리학이 정유재란 때 일본에 잡혀간 강항(姜沆·1567~1618)에 의해 일본 승려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 등에게 전파되어 한 중 일의 공통된 사유세계가 됐다.천부경은 환단고기와 별도로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천부경의 우주관은 불교의 우주관과도 다르다는 점은 환단고기에 실려 있을 뿐 중국이나 인도에서 나온 서적에는 없지만 중국동부에서 도교서적에 보인다. 이 때문에 천부경적 사유는 민족주의 성향이 강한 학자들 사이에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들어가 ‘천부경’을 입력하면 김백호 최민자 수월제 이중철 김현두 김백룡 최동환 문재현 유정수 권태훈 조하선 윤범하 등 수많은 학자가 주해한 천부경 관련 서적이 뜬다.현재 단군을 모시는 대종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고 있지만 1909년 나철이 개창한 ‘단군교’에서 비롯되어 1910년 대종교로 개칭했는데, 당시의 대종교와 단군교는 천부경을 경전으로 삼지 않다가 대종교를 이끈 나철은 1916년 자살하고, 이듬해인 1917년에 대종교에서 떨어져 나간 단군교에 천부경을 전달했다고 한다. 그런데 1920년 일제가 단군교를 없앰으로써 단군을 모시는 종교는 대종교만 남게 됐다. 대종교가 천부경을 경전으로 채택한 것은 55년이 흐른 1975년에 일이라고 한다.천부경이 환단고기에만 실려 있지 않다. 환단고기의 태백일사 ‘소도경전본훈’편에 천부경을 찾아낸 최초의 인물이 신라의 최치원(857~?)이라고 기록돼 있지만, 최치원의 후손인 최국술은 최치원 사후 1000년 이상이 지난 1925년에 최치원의 글을 모아 ‘최문창후전집’을 펴냈다. 이 ‘최문창후전집’에 천부경이 실려 있어 81개의 한자로 구성돼 있다는데 환단고기에 실린 천부경과 74자는 같고 나머지는 다르다. 조선말의 기정진(奇正鎭·1798~1879)도 그의 제자인 김형택씨가 ‘단군철학석의(1957)’란 책에 남겨놓았다. 이 책에 실린 천부경은 환단고기에 실린 것과 1자가 다르다. 1911년 계연수가 단군세기 등 4권의 책을 묶어서 필사했다는 환단고기는 전하는 것이 없고 간접적으로만 확인된다. 중국 도교 전문가인 전병훈(全秉薰·1857~1927)은 ‘정신철학통편(1920년)’이라는 책을 펴냈는데, 그는 이 책 서문에 천부경 전문을 싣고 해석을 달아놓았다. 이 책은 천부경을 인쇄한 가장 오래된 책이다. 계연수는 환단고기 필사본 30부(1911년)를 만들었다고 주장했다면 이를 입수한 전병훈이 출간을 앞둔 ‘정신철학통편’에 천부경을 올렸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고려말 민안부의 후손이 그의 유품에서 찾아낸 초기한자의 모습인 갑골문형태로 된 천부경이 인간의 보편적사유로 해독하면 현대과학과도 일치하는데 계연수의 천부경과는 4자가 다르다. [필자의 저서 “후천개벽의 횃불” PP72~85 참조] 환단고기는 일본에서 먼저 출판됐고 계연수가 30부를 손으로 썼다는 환단고기는 없고 그의 제자로 자처하는 이유립이 수십년 지나서 환단고기를 내놓기 전에 일본에서 환단고기가 나왔다. 그러면 거꾸로 일본판 환단고기를 베껴 한국에 나왔을 수도 있지 않은가? 확인된 바로는 한국 출판사에서 출간된 환단고기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1985년 김ㅇㅇ씨의 ‘주해 환단고기’ 임ㅇㅇ씨가 1986년 5월 내놓은 ‘겨레를 밝히는 책들-한단고기’이다. 그런데 일본인 가지마 노보루가 출판한 환단고기가 일본인이 여기저기 자료를 모아 창작한 것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는 그것도 모르고 환단고기를 ‘민족의 시원을 밝혀주는 역사서’ ‘민족의 철학을 밝혀주는 지침서’로 흠모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민족이 될 것인가.환단고기는 참으로 많은 출판사에서 출간됐다. 앞에서 언급한 한단고기 외에도, 1987년 다섯 권으로 펴낸 ‘대배달민족사’ 제1권에 실린 환단고기, 1989년 김ㅇㅇ씨가 주해해서 펴낸 환단고기, 1994년 모출판사 편집부가 출간한 환단고기, 1996년 계연수를 편자로 해서 내놓은 환단고기, 1998년 모출판사가 모학회연구부를 엮은이로 해서 출간한 환단고기, 2000년 문ㅇㅇ씨의 풀이로 내놓은 환단고기 등 여러 가지가 있다.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와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를 비교한 어떤 신문기자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 원문(한자)과 국내에서 출간된 환단고기의 원문이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가지마 노보루의 환단고기를 한국어로 번역해 출판했다는 사실이 된다. 놀랍게도 가지마는 환단고기를 일본 신도(神道)의 원류를 찾는 작업의 일환으로 번역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서기는 모략위서(謀略僞書)다’라는 제목을 단 머리글에서 위서 시비가 있는 일본서기의 일부 내용을 부인하며 환단고기 내용을 토대로 새로운 신도 이론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환단고기를 구성한 중요한 사서가 한반도에서 가져간 약탈 문화재임을 밝혀야 했다.
메이지(明治)시대 일본 엘리트들은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古事記)’ 등 일본의 고유 자료를 강조한 시점에 성리학을 수용한 막부를 날려버리고 천황 중심으로 뭉치자는 주장으로 이어져, 천황 숭배가 강화됐었다. 일본 천황의 위패는 대개 신궁에 있으니 신도를 부흥시킬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인류역사상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수 많은 사람을 죽이고 괴롭혀 왔다. 군국주의자들이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일본인들은 비판 없이 수용했다. 가지마 노보루는 이들 맹종이 일본인에게 패전과 피폭(被爆)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고통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환단고기에 따르면 일본이 동북아의 중심이 돼야 한다며 그 일을 할 주체세력으로 신국민을 설정했다. 한반도와 만주에 살던 형님이 못한 일을 섬에 살던 일본인이 대신해서 하자며, 신국민을 그 일의 중추로 삼은 것이다. 가지마는 신국민사를 통해 ‘신도이론대계(神道理論大系)’라는 신도 교과서를 펴냈는데, 여기에 그는 한국의 선도를 연구한 속셈을 분명히 밝혔다. ‘신도이론대계’의 제5장은 ‘신교오천년사(神敎五千年史)’란 제목인데 여기에 ‘귀도 단군교(鬼道 檀君敎)’란 문구가 있다. 가지마는 단군교를 귀신 숭배하는 종교로 정의하고 일본 신도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다고 연결했다. 근대 일본의 신도가 한국과 중국에 영향을 줬다는 가지마 노보루의 주장은 만주와 조선이 일본인의 역사공간이라는 교활한 일본우익의 논리로 연결된다. 한국인과 중국인의 외모는 비슷하지만 언어는 전혀 다르다. 언어학적으로 한국과 가까운 것은 일본이다. 왜 한국과 중국은 같은 인종인데도 완전히 다른 언어를 갖게 됐을까. 그 이유는 문명의 뿌리가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인은 황하를 중심 무대로 넓혀갔고 한민족은 요하에서 시작해 중국 동해안과 만주, 한반도로 이동하고 그 일부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러한 한민족 가운데 고구려, 발해, 금나라가 있고, 청나라를 세운 동족은 중원을 넘어 전 중국을 점령하고 티베트(서장)와 위구르(신장)까지 차지했다. 그러나 고구려와 청나라는 중국인들에게 나라를 넘겨주어 중국사로 편입될 구실을 만들고 말았다. 환단고기는 이러한 연유를 밝히는 책인데 왜 우리 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위서로, 심지어 계연수를 실존인물로 여기지 않는 것일까.계연수의 환단고기 서문에서 ‘삼성기와 단군세기를 주었다고 한 백관묵과 북부여기를 주었다고 한 이형식’도 평안도 태천과 삭주 사람이다. 왜 환단고기를 이루는 책들은 평북지방에서만 전해진 것일까. 그 해답은 조선왕조실록 세조3(1457)년 5월26일 3번째 기사, 예종1(1469)년 9월18일 3번째 기사, 성종즉위(1469)년 12월9일 6번째 기사 등에서 고조선비사, 대변설, 조대기, 삼성밀기, 삼성기 등 환단고기를 구성한 중요사서가 존재하였고 이를 회수했다. 심지어 숨기면 참한다고 까지 했다.[필자의 저서 “후천개벽의 횃불”PP68~70 참조] 그러나 세조의 왕위찬탈로 김종서를 척살했다. 그는 4군6진 개척과 국토를 완성한 민족의 위대한 영웅이다. 시조 2편도 남겼고 그의 영향이 큰 지역인 평안도와 함경도에 사서보존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나라(奈良)에 있는 동대사(東大寺) 뒤편의 정창원(正倉院)은 고대 일본의 문서를 많이 소장하고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으나 일본은 정창원 문서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문서를 공개하면 일본 문화의 원류가 한국이라는 것이 밝혀지기 때문이다. 일본은 100여 년 전 만주와 조선을 그들의 역사 무대로 만들어야 한다는 이른바 ‘만·선(滿鮮) 사관’을 만들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국을 세웠다. 만선사관의 꿈은 제2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좌절됐지만 일본 우익들은 이를 다시 내세우려 날뛰고 있다. 중국은 역사 기록이 없는 시절의 역사를 복원하는 ‘단대공정(斷代工程)’을 펼쳤다. 그리하여 하나라와 은나라는 물론이고 3황5제 시절까지도 역사로 편입시키게 되었다. 그리고 고구려가 있던 주변을 중국의 역사 공간으로 끌고 오는 동북공정을 사실상 완료했다. 중국은 요하문명을 비롯해 황하문명보다 앞선 문명을 중국사에 넣으려는 탐원(探源)공정도 펼치고 있다. 북한은 구월산에 환인과 환웅 왕검(1대 단군)을 모신 삼성사가 있고, 묘향산에는 단군사라는 사당이 있다. 과거 북한 역사학계는 고조선이 요하에 있었다는 주장을 해 오다가 최근에는 평양의 단군릉을 건립하면서 고구려유물을 단군유물로 둔갑하고, 고조선이 대동강에 있었다는 역사의 폭을 좁혔다. 이러한 북한의 변화는 황하문명이나 요하문명과 구분되는 대동강문명을 만들려 하고, 수백만 동족을 죽이고 천만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만든 김일성가의 세습왕조 체제를 구축함에 있다. 김정은이 등장하자 일본은 언론에서 김정은이 천왕제도에 관심이 많다고 하더니 최근 드디어 아배총리 측근을 북에 파견하는 동물적인 본성을 드러냈다.
종전 후 미국이 저지른 최대의 실수는 전범괴수 일본왕을 처단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백성은 인간의 존엄과 가치가 동등한 자유와 평등이 없고 왕의 발아래 엎드린 동물에 불과한데 이를 북한의 수령에게 전수시키려 소름끼칠 일이 일어날 것이 아닌가.
한국의 강단(講壇) 사학계는 환단고기를 연구 대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환단고기 연구를 피해간다면 한국은 중국의 동북공정, 일본의 만선사관에 맞서기 어려울 것이다.
[2013. 10. 19. 국민행복회, 21C신문화연구회 김 기 현 (金 基 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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