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도 짧았던 윤동주의 일생
윤동주의 증조부는 함경북도 종성에서 살다가 1886년 북간도(현 중국 길림성 용정시)로 이주하였다. 이후 할아버지가 명동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이때 아버지 윤영석은 독립지사인 김약연의 누이동생 김용과 결혼, 1917년 12월 30일 윤동주를 낳았다.
할아버지는 기독교 장로였고, 아버지는 명동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소학교 시절 동주는 큰 기와집과 깊은 우물, 뽕나무밭과 과수원, 그리고 교회당이 있는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자랐다. 윤동주의 일생 28년 중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소년시절을 이곳 명동에서 자랐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과 멀리 떨어져 있는 고국에 대한 남다른 향수를 안고 살았다.
소학교 4학년 담임선생인 한명준 목사에 의하면 ‘동주는 어린 시절 공부도 잘하는 축이었고, 그래도 어쩌다 문답을 할 때 대답이 막히면 금방 눈물이 핑 도는 거예요… 동주 할아버지가 그 동네에서 제일 부자였고 밭이 많았거든요. 늘 말을 기르고 있어 나다닐 때 그걸 타고 다녔지요. 그리고 아들(윤동주의 아버지)을 동경 유학도 시켰다’고 한다.
소학교 때부터 고종사촌인 송몽규와 함께 서울에서 발간한 월간 『아이생활』과 『어린이』라는 잡지를 구독해 읽었다. 5학년이 되면서 몽규와 함께 원고를 모아 『새명동』이란 신문 형식의 등사판 문예지를 만들어 동요·동시 등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그러다 14세 되던 해 동주의 교육을 위해 가족들이 명동에서 다시 용정으로 이사하여 캐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미션스쿨인 은진중학교에 입학시켰다.
동주와 소학교·중학교 동기인 문익환 목사는 “은진중학교가 있는 언덕 일대는 일본 순경이나 중국 관원들도 마음대로 출입할 수 없는 치외법권 지대여서 우리는 그곳에서 태극기를 휘두르며 애국가를 마음껏 부를 수 있어 신났다”고 했다. 그런데 이때(중 3)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자로 발표되자, 이에 자극된 윤동주가 다시 시를 쓰기 시작, 그때 쓴 첫 작품이 「초 한 대」란 시였다.
내 방에 품긴 향내를 맡는다.// 광명의 제단이 무너지기 전/ 나는 깨끗한 제물을 보았다.// 염소의 갈비뼈 같은 그의 몸/ 그의 생명인 심지(心志)까지/ 백옥 같은 눈물과 피를 흘려/ 불살라 버린다.// 그리고도 책상머리에 아롱거리며/ 선녀처럼 촛불은 춤을 춘다.// 매를 본 꿩이 도망하듯이/ 암흑이 창구멍으로 도망한/ 나의 방에 품긴/ 제물의 위대한 향내를 맛보노라.’-윤동주. 「초 한 대」, 1934. 12. 24
문익환에 의하면, 이때부터 그는 “일본군국주의의 마수가 아무리 드세어도∼,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다(요한1:15)는 복음서의 말씀으로 역사를 바로 보는 눈이 열렸다.”고 한다. 그러다 18세 되던 1935년 평양에 있는 숭실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자 이를 거부하고 자퇴하여 용정으로 다시 돌아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했다.
1938년 광명학원 중학부 5학년을 졸업하고 다시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 이때 『조선일보』와 『소년』지에 산문과 동요를 발표하였다. 28년 생애에서 4년간의 연희전문학교 시절이 윤동주의 일생에서 가장 풍요로우면서도 자유로웠던 시기였다. “연희전문학교가 민족정서를 살리기에 가장 알맞은 배움터였다”고 훗날 동주는 술회하였다. 동기인 장덕순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그는 말이 적은 외유내강형의 성격이었으나 ‘지조’라든가 ‘의지’는 감히 누구도 어쩌지 못하게 강했다고 한다.
이 무렵 그 유명한 명시 「별 헤는 밤」과 「서시」가 탄생하였다. 연희전문 4년을 졸업하고 1942년(25세) 2월 동경의 립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하여 한 학기를 마치고, 동년 가을 교토의 동지사대학 영문과로 다시 전학, 만 3년을 일본 땅에서 살았다. 그러던 1943년 독립운동 혐의로 송몽규와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감되어 이름 모를 주사(생체실험?)를 맞다 1945년 2월 16일 28세의 나이로 옥사하였다.
김동수<시인/전라정신연구원장>
첫댓글 지금까지 오롯히 꺼지지 않은 윤동주시인
너무나 짧은 생을 마친 서시를 다시한번 읽어보아요
무식 해서리
별을 헤는 밤과 서시 밖에 모르니
그것도 어느 한 대목만
제작년인가 윤동주 시인이 머물렀다는
곳에 들린 적이 있다
옛그대로 보전되고 있는
어느 바닷가 에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