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3/25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루스벨트
- Chris Martin and Gwyneth Paltrow
2014 - 기네스 펠트로-크리스 마틴, 결혼 11년 만에 이혼 할리우드 톱스타 기네스 팰트로(41)가 남편인 크리스 마틴(37)과 고심 끝에 결별한다고 밝혔다. 기네스 팰트로의 남편 크리스 마틴은 영국의 유명 밴드 콜드 플레이의 보컬이다. 기네스 팰트로와 크리스 마틴은 2003년 결혼해 11년 간 결혼생활을 유지했으며 슬하에 9세 딸과 7세 아들을 두고 있다. /동아일보 2014-03-26 16:54:00
2012 - 호랑이굴 ‘금의환향’ 한 타이거 PGA 정규투어 아널드 파머 대회서 챔피언 “피지에이(PGA) 투어 선수들이여, 조심해라! 타이거가 돌아왔다.” 타이거 우즈(37·미국)가 25일(현지시각) 30개월 만에 미국프로골프 투어 우승트로피를 다시 들어올리자, 미국 <엔비시>(NBC)의 분석가 조니 밀러는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 ‘골프황제’의 화려한 귀환과 이후 투어 무대에 이어질 파장에 경고 메시지를 보낸 것이다. 우즈는 이날 미국 플로리다주 올랜도의 베이힐클럽&로지(파72·7381야드)에서 열린 시즌 15번째 대회인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총상금 600만달러)에서 합계 13언더파 275타로 우승했다. 4라운드 버디 4개와 보기 2개를 묶어 2타를 줄이며, 챔피언조에서 동반플레이를 펼친 그레임 맥도월(북아일랜드)을 5타 차 2위로 따돌렸다. 우승상금 108만달러. 우즈가 피지에이 투어 정규대회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린 것은, 2009년 9월13일 베엠베(BMW) 챔피언십 이후 정확히 924일, 108경기째 만이다. 피지에이 투어가 아닌 11월 호주 마스터스 우승을 기준으로 하면 2년4개월 만이다. 우즈는 그동안 아널드 파머 인비테이셔널에서만 무려 7승을 쓸어담았다. 피지에이 투어 통산 우승도 1996년 프로데뷔 이후 72회(메이저대회 14승 포함)로 늘렸다. 챔피언조에서 맥도월을 제압한 것도 뜻깊었다. 우즈는 2010년 12월 이벤트 대회인 ‘셰브런 월드 챌린지’에서 맥도월과 맞대결을 펼쳐 연장전에서 패했다. 그러나 1년3개월 만에 통쾌하게 설욕을 했다. 우즈는 경기 뒤 “기분이 너무 좋다. 그동안 성원해주신 많은 사람들에게 정말 감사한다”고 했다. 재미동포 나상욱(29)이 공동 4위(5언더파)로 선전했고, 노승열(21·타이틀리스트)은 공동 20위(2언더파)에 이름을 올렸다. 한편, 우즈가 우승하던 이날 아널드 파머(82)가 고혈압으로 병원에 이송돼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이 때문에 파머는 자신이 주최하는 대회 우승트로피도 주지 못했다. 김경무 선임기자 kkm100@hani.co.kr /한겨레 2012.03.26 19:52 http://www.hani.co.kr/arti/sports/golf/525286.html
2010 - 안중근 순국 100주년 '추모제향' 엄수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년을 맞아 오늘 저녁 서울 백범기념관에서는 안 의사의 넋을 기리는 '추모제향'이 거행됐습니다. 권순표 앵커 kspja@imbc.com /MBC 뉴스 20100325 http://imnews.imbc.com/replay/nwdesk/article/2594481_5780.html
- 'The Little Mermaid', by Edvard Eriksen
2010 - 덴마크 `인어공주'像, 생애 첫 해외여행 나서 상하이 엑스포 덴마크관 홍보 전시 위해
2008 - T-50 최종호기 초도양산 완료 한국항공우주산업은 오늘 오전 경남 사천시 사남면에 위치한 본사에서 공군과 방위사업청 등 관계자 2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산 초음속 고등훈련기 T-50 최종호기 납품 기념식을 열었습니다. http://www.ytn.co.kr/news/theme_view.php?tidx=573&key=200803251325461756
2006 - 벨라 바르토크 생가 박물관으로 단장 헝가리가 낳은 세계적인 작곡가 벨라바르토크(1881-1945)의 생가가 그의 탄생 125주년을 맞아 박물관으로 개조돼 지난 25일 일반에 공개됐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시내 부더지구에 자리잡은 생가는 바르토크가 나치의 압박을피해 미국 망명길에 오르기 전인 지난 1932년부터 40년까지 살던 곳으로, 일부는 콘서트홀로 바뀌었지만 3개의 방에는 그가 쓰던 피아노와 가구를 그대로 보존했다. (부다페스트=연합뉴스) /쿠키뉴스 2006.03.27 10:33 http://news.kukinews.com/article/view.asp?page=1&gCode=kmi&arcid=1143385279&code=30110000
1998 - 마다가스카르 메뚜기떼 공습 [책갈피 속의 오늘]1998년 마다가스카르 메뚜기떼 공습 소설 ‘어린왕자’에 등장하는 바오밥나무는 별 B-612의 ‘골칫거리’였다. 막 꽃을 피웠을 때는 아름답지만 땅속 깊이 뿌리를 내려 큰 나무가 되면 별을 망가뜨리는 ‘위험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어린왕자는 작은 지혜를 발휘한다. 바오밥나무가 막 싹을 틔웠을 때 양이 먹도록 한 것이다. 이 소설로 유명해진 바오밥나무의 본고장은 아프리카 동남쪽 인도양에 위치한 마다가스카르다. 58만7041㎢에 인구 1660만 명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섬나라다. 그러나 실제 마다가스카르의 골칫거리는 바오밥나무가 아니었다. 1957년에 이어 1998년 3월 25일, 이 섬의 하늘은 시커멓게 물들었다. 메뚜기 수십억 마리가 훑고 지나간 논과 밭은 눈 깜짝할 사이에 폐허가 됐다. 마다가스카르 정부는 군대를 동원해 피해복구에 나섰고 유엔까지 메뚜기 떼를 퇴치하기 위해 농약과 항공기를 지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메뚜기의 반란’은 아프리카는 물론 한국과 인접한 중국 하이난(海南)과 칭하이(靑海) 성에서도 최근 발생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는 이들 메뚜기 떼로 인한 피해가 세계적으로 100만 ha(약 30억2500만 평)가 넘을 것으로 추정했다. 이처럼 메뚜기가 극성을 부리는 까닭은 인간의 무분별한 개발로 인한 환경 훼손이 주 원인이다. 전문가들은 최근 수십 년간 대량 벌목으로 삼림 면적이 감소하면서 일부 지역이 열대성 초원상태로 바뀌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했다. 마땅한 간식거리가 없었던 30∼40년 전 한국에서 메뚜기는 어린이의 영양 간식이었다. 메뚜기 다리를 떼어낸 뒤 기름에 살짝 볶으면 고소한 맛이 일품이었다. 요즘도 일부 음식점에서 메뚜기 튀김을 맛볼 수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 메뚜기를 보기는 쉽지 않다. 농약을 많이 쓴 탓에 일부 유기농 농가를 제외하고는 메뚜기의 씨가 말랐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과하면 탈이 나는 모양이다. 메뚜기 떼의 공습으로 큰 피해를 본 마다가스카르나 메뚜기 만나기가 힘들어진 한국이 그렇다. 메뚜기가 ‘지구 황폐화’의 상징이 되고 있는 현실은 새삼 환경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는 듯하다. 소설 속 어린왕자는 이렇게 말했다. “정성들여 별의 몸단장을 해 줘야 해. 규칙적으로 신경을 써서 장미와 구별할 수 있게 되는 즉시 그 바오밥나무를 뽑아 버려야 하거든…그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쉬운 일이기도 하지.” 황태훈 기자 beetlez@donga.com /동아닷컴 2006-03-25 03:00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30000000134/3/70030000000134/20060325/8288640/1
- Mir, Cosmonauts' Day, 1989 우주정거장 미르호(Mir)에서 우주 탐사임무를 수행하다가 구 연방의 해체로 지구귀환이 늦추어진 세르게이 크리칼료프와 알렉산데르 볼코프 등 우주비행사 3명이 우주선 소유즈 TM-13호를 타고 우주미아생활 313일 만인 1992년 3월 25일 귀환했다. 1991년 5월 18일 구 소련 우주정거장계획의 하나로 미르호에 탄 크리칼료프는 만10개월 열흘간을 우주에 머물며 각종 측량과 기계실험을 해왔다. 크리칼료프가 우주미아가 된 것은 러시아가 돈이 없어서 그의 귀환을 위한 우주선을 발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날 그가 돌아오게 된 것은 독일이 2천4백만달러를 지원해 귀환을 위한 우주선 발사가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조선
1983 - 마이클 잭슨, 문워크를 처음 선보이다. 팝 황제의 ‘위대한 유산’ [세상을 바꾼 노래 97] 마이클 잭슨의 <빌리 진>(1982년) 마이클 잭슨의 죽음은 그의 삶만큼 논쟁거리다. 그럼에도 어떤 긍정성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건 이제 비로소 객관적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됐다는 사실일 것이다. 지난 몇 년간 잭슨을 향해 미디어가 보여준 조소 어린 태도는, 연예계의 냉정한 생리를 고려하더라도 지나친 것이었다. 인격체로 크기도 전에 스타로 키워졌고, 인생을 알기도 전에 무대를 살아야 했던 한 인간의 뒤틀린 삶에 대한 공감은 그만두더라도, ‘팝의 황제’로 사랑받았던 예술가에 대해 일말의 존중도 보이지 않았던 잔인함은 소름이 끼칠 정도였으니까. 마키아벨리는 “군주는 사랑받는 자가 되기보다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했다. “인간이라는 이해타산적 족속에게 사랑은 손쉽게 팽개쳐버릴 수도 있는 가치지만, 두려움은 처벌에 대한 공포로 유지된다는 점에서 효과적”이라는 그의 통찰은, 유폐된 황제로서 잭슨의 말년에 대한 완벽한 메타포다. 그런 점에서 <타임>의 비평가 조시 타이런기엘의 관점은 모범이 될 만한 균형감각을 보여준다. 그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대중음악 작품들을 꼽으며 마이클 잭슨의 <스릴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얼마나 훌륭하냐고? 지금 당장 앨범을 (플레이어에) 올려놓으면 알 수 있다. (잭슨의) 20세기 말 가장 기괴한 대중적 이미지가 얼마나 쉽게 사라져 없어지는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잭슨에 대한 피상적 관념의 존재를 인정한다 하더라도 그의 음악적 위업을 부인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뮤지션이자 엔터테이너로서 마이클 잭슨의 위대함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스릴러>만으로도 족하다. 단일 앨범으로 역사상 유일하게 판매량 1억장을 돌파했고, 7곡을 히트 차트 톱텐에 올려놓았으며, 8개의 그래미 트로피를 쓸어 모은 이 작품은 잭슨 이력의 정점일 뿐만 아니라 팝 음악 역사의 고원이기도 하다. 예술적인 혁신은 말할 것도 없다. 비평가 게리 멀홀랜드의 말마따나 이 앨범은 “그 이전 30년 동안 미국 팝의 근간을 이루었던 ‘흑인=솔/백인=록’의 등식을 영원히 바꿔”놓음으로써 대중음악사를 새로 썼다. 그러므로 <스릴러>의 성공을 촉발한 기폭제로서 ‘빌리 진’의 가치는 그 자체로 심대한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앨범의 가장 독보적인 트랙으로서 ‘빌리 진’의 아이콘적 위상은 전방위의 자취를 남겼다. 미니멀하게 축소시킨 다양한 사운드 요소들의 중첩을 통해 아르앤비의 미래를 연 파격은 말할 것도 없고, 흑인 뮤지션의 곡으로는 최초로 엠티브이의 집중 방송을 끌어낸 비디오의 파괴력 또한 거대했다. 문워크를 처음 선보인 1983년 3월 25일의 ‘모타운 레이블 창립 25주년 기념 콘서트’는 티브이로 방영되어 5000만명의 시청자를 사로잡기도 했는데, 비평가 앤서니 디커티스는 “그날 이후, 더 낫게든 혹은 더 나쁘게든, 모든 것은 예전과 같을 수 없었다”고 평했을 정도다. 잭슨의 죽음 이후 ‘빌리 진’은 새로운 의미를 얻었다. 광적인 여성 팬의 스토킹에서 가져온 노래의 소재가 스타의 삶에 드리운 그늘을 상징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모든 이를 즐겁게 했으나 스스로는 결코 즐겁지 못했던 잭슨의 인생이 거기 투영되어 있다. 박은석 대중음악평론가 /한겨레 2009-10-20 오후 06:08:26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382888.html
- 1982 Constitution 1982 - 영국 의회, 캐나다 헌법 승인
1981 - 민족대표 33인 중 마지막 생존자 이갑성(李甲成) 사망 역사속 오늘[1981년 3월 25일] 3.1운동대표 연당 이갑성 타계 3.1운동 때 민족대표 33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마지막 생존자였던 연당 이갑성 선생! /YTN 2011-03-25 금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3250219350110&s_mcd=0422&s_hcd=
- 'Homage to the Square' - 'Homage to the Square'
- 'Sanctuary, Zinc Lithograph, 1942'
앨버스 [Albers, Josef, 1888.3.19∼1976.3.25] 독일 보트로프 출생. 베를린·에센의 미술학교에서 수학하고, 바우하우스를 졸업한 뒤 교사가 되었다. 입체주의·구성주의, 또 그룹 <다리>의 영향도 받았다. 1933년 미국으로 가서 블랙마운틴대학·예일대학에서 교편을 잡았다. 즉흥적 또는 계획적인 방법에 의한 실험을 하였는데, 시각의 상대성이라는 생각에 입각하여 기본적인 형체의 조합을 통한 색채표현을 탐구하였다. 대표작으로 《정사각형 예찬》 연작이 있다. 회화 이외에도 그래픽아트·유리·브론즈 등을 사용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야후 백과
- Saudi Arabia, 5 Riyals (Banknote)
1975 -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이살(Faisal of Saudi Arabia) 암살 파이살 [Faisal ibn Abdul Aziz Al Saud, 1906(1903)~1975.3.25] 사우디아라비아 파이잘왕 피살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국왕이 1975년 3월 25일 조카에게 피살돼 오후 2시13분 사망했다. 향년 68세였다. 조카는 현장에서 체포됐지만 리야드 궁전에서의 암살 사건은 국민에게 충격을 던져 주었다. 왕실은 정신이상인 조카의 우발적인 사고라고 발표했지만 나중에 파이잘 국왕에 대한 사적인 감정과 절대왕정에 대한 사상적 비판이 있는 것으로 판명되어 단두형에 처해졌다. 1964년 11월 국왕에 즉위한 파이잘은 곧 국가재정을 건전히 하고 노예제도를 폐지해 국민들로부터 신망이 두터웠다. 제3차-4차 중동전 때는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서방국가들에게 석유금수라는 강한 태도를 보였으나 중동평화에 대해서는 이집트의 사다트 대통령과 함께 평화추진을 위해 노력했다. /조선
1967 - 마틴 루터 킹, 반전집회 이끌다 [어제의 오늘]1967년 마틴 루터 킹, 반전집회 이끌다 ㆍ미국의 베트남전 맹렬히 비판 1967년 3월25일 미국 시카고에서 5000여명이 참여한 베트남전 반대 집회가 열렸다. 집회를 이끈 이는 마틴 루터 킹 목사. 킹 목사는 이 자리에서 미국의 베트남 침공이 “미국이 표방하는 모든 것에 대한 신성모독”이라고 말했다. 킹 목사의 본격 가세로 미국의 반전운동은 흑인 민권운동과 만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흑인과 빈민의 친구가 왜 전쟁 반대에 큰 목소리를 내게 되었을까. 당시 킹 목사는 시카고 서쪽의 한 빈민가에서 민권운동을 벌이던 중이었다. 시카고는 킹 목사가 미국 남부에서 이미 몇 차례 성공적으로 이끈 민권운동을 확산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택한 북부 도시였다. 시카고 집회 열흘 뒤 뉴욕 집회에서 했던 그의 연설에 흑인 민권운동이 반전운동과 만나야 하는 이유가 설명된다. 바로 미국 흑인들이 자신들을 이등시민 취급했던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워야 하는 “잔인한 역설”이다. 킹 목사는 전쟁에 쏟아붓는 막대한 돈이 실은 미국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쓰일 돈이라고도 했다. “해마다 국방에 쓰는 돈이 사회적 향상을 위해 쓰는 돈보다 더 많은 이 국가는 영적인 죽음으로 다가가고 있습니다.” 손제민 기자 jeje17@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3-24 18:17:56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 201003241817565&code=100100&s_code=ap005
- 국제상업위성통신 개시기념, 1967 텔스타위성 [Telstar] - 미국 최초의 실용 통신위성. 1호는 1962년 7월 10일에 발사되어 근지점 948㎞, 원지점 5636㎞, 주기 157.6분의 궤도에 진입하였다. 무게는 77㎏이며 최초의 능동형 통신위성으로서 발사 다음날에는 미국∼유럽 사이의 전화 및 텔레비전 중계에 성공하여 우주통신시대의 막을 열었다. 이 텔스타 1호를 이용하여 다중전화·사진전송·고속데이터전송·컴퓨터제어·일기도전송 등도 시도하였으나 4개월 뒤 핵폭발에 의한 방사능오염으로 인한 고장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다음해 5월 7일 2호가 발사되었는데, 원지점이 1만㎞로 끌어 올려져 이용가능시간과 범위가 증대되었다. 현재의 통신위성은 이런 종류의 이동형이 아닌 정지형이며, 미국전화전신회사(ATT)도 그 뒤 통신위성 사업에서 손을 떼었다. /야후 백과
1963 - 소련 국방장관 인도네시아 방문 역사속 오늘[1963년 3월 25일] 소련 국방장관 인도네시아 방문 1963년 오늘! 공산당을 불법화해 두 나라의 관계는 멀어지게 된다. /YTN 2011-03-25 금 http://www.ytn.co.kr/article/article_view.php?key= 201103250220400055&s_mcd=0422&s_hcd=
- 10th Anniv. of the Treaty of Rome, establishing the European Common Market, 1967 Mar. 25
1957 - 유럽 6개국 대표가 유럽경제공동체 설립을 위한 로마조약에 서명 유럽경제공동체 (EEC) 출범 유럽은 작은 땅에 여러 나라가 얽혀 있는 탓에 역사적으로 늘 경쟁과 대립, 그리고 이로 인한 전쟁이 끊이질 않았다. 이는 중국과 이슬람 세력에 뒤져 있던 유럽이 역사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한 동인(動因)이 되기도 했지만 피해가 너무 컸다. 2차 대전이 끝나자 유럽인들은 반복되는 재앙을 피하기 위해 그들의 오랜 꿈인 유럽통합을 모색한다. 1950년 5월 9일,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슈만이 석탄과 철강산업의 통합을 제창하며 꿈의 실현에 나섰다. 이 제안은 유럽연합이 이 날을 ‘유럽의 날(Europe Day)’로 기념할 만큼 유럽통합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이듬해 4월 프랑스·서독·이탈리아·벨기에·네덜란드·룩셈부르크 등 6개국이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발족시키면서 ‘유럽 합중국’을 향한 유럽인들의 먼 여정이 시작됐다. 1957년 3월 25일에는 6개국 대표가 로마에 모여 회원국 간 자본·상품·노동력·서비스의 자유로운 이동을 목표로 한 유럽경제공동체(EEC)와 유럽원자력공동체(EURATOM) 창설에 조인함으로써 유럽통합은 이제 거역할 수 없는 대세로 굳어졌다. /조선
1954 - 제1회 학-예술원 회원 선출 대한민국학술원은 학술발전에 공적이 있는 과학자를 우대·지원하여 학술발전에 이바지할 것을 목적으로 설립된 과학자들의 대표기관이다. 1952년 제정된 문화보호법에 따라 1954년 3월 25일 초대 학술원회원 50명을 선출하고 같은 해 7월 17일 개원하였다. 1985년 8월 12일 대한민국학술원 사무국과 대한민국예술원 사무국이 통합되었으며, 1988년 12월 31일 대한민국학술원법이 제정되면서 문화보호법은 폐지되었다. 1990년 1월 3일에는 대한민국학술원 사무국과 대한민국예술원 사무국이 다시 분리되었다. ...
1951 - 이라크, 석유국유화 법안 결정
1947 - 영국의 가수, 작곡가, 피아노 연주자 엘튼 존(John, Elton) 출생 존 [John, Elton Hercules, 1947.3.25~ ] 미들섹스주(州) 피너(Pinner)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레지널드 케니스 드와이트(Reginald Kenneth Dwight)이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를 연주하였고 11세 때 장학금을 받고 왕립음악원에 들어갔다. 이후 리듬앤드블루스에 심취하여 팝음악을 하게 되었으며 1961년 밴드 블루솔로지(Bluesology)를 결성하여 1967년까지 3장의 싱글을 발표하였다. 1967년 한 레코드 회사의 오디션장에서 버니 토핀(Bernie Taupin:1950∼)을 만났으며 버니는 이후 그의 노래 대부분의 가사를 만들었다.
1939 - 미국의 작가, 사회운동가 토니 케이드 밤바라(Bambara, Toni Cade) 출생 밤바라 [Bambara, Toni Cade, 1939.3.25~1995.12.9] Toni Cade Bambara (March 25, 1939 – December 9, 1995) was an American author, social activist, and college professor. Biography Bambara was born Miltona Mirkin Cade on March 25, 1939. She grew up in Harlem, Brooklyn, and Jersey City. She attended schools in New York City and the southern United States. She said that she would change her name to Toni while in kindergarten, and in 1970 added "Bambara" when she learned that her grandmother had taken that name as well. She studied English and theater at Queen's College and mime in France in the 1960s. She also became interested in dance before pursuing graduate work in African fiction at the City College of New York. Bambara taught at Rutgers University and Spelman College. Bambara participated in several community and activist organizations, and her work was influenced by the Civil Rights and Black Nationalist movements of the 1960s. Trips to Cuba in 1973 and Vietnam in 1975 prompted Bambara to contextualize the struggles of African Americans in relation to the Third World. Bambara battled with and finally died of colon cancer in 1995. Writing http://en.wikipedia.org/wiki/Toni_Cade_Bambara
- 서울대학교 개교 20주년 기념, 1966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은 1920년 6월 100여 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재단법인 조선교육회(朝鮮敎育會)를 발기하고 '조선민립대학설립운동'을 전개하여 종합대학의 설립을 추진하자, 이에 일제(日帝)가 한국인의 고등교육기관을 봉쇄할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1928 - 안창호, 김구 등 중국 상하이에서 한국독립당 결성 1924년 중국국민당이 중국 공산당과 연합하여 ‘국공합작(國共合作)’으로 국민당의 단일정당으로 결속된 것을 계기로 중국·만주 등지에 망명하여 독립투쟁을 전개하고 있던 한인들 사이에 ‘유일당(唯一黨)’ 촉성운동(促成運動)이 일기 시작하였다. 사상과 주의 ·주장을 초월하여 독립운동자들이 하나의 정치조직 아래 결속해야 한다는 데 그 명분을 두었다. 1927년 임정요인들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헌법을 개정하여 “광복운동자가 대단결한 정당이 완성될 때 최고권력은 그 당에 있는 것으로 한다”고 헌법에 밝힘으로써 유일정당이 최고헌법기관임을 명시하였다. 여기에는 이동녕(李東寧) ·안창호(安昌浩) ·김구(金九) ·조소앙(趙素昻) 등이 참여하였다. /네이버
1928 - 미국의 우주비행사 제임스 러벨(Lovell Jr, James) 출생 러벨 [Lovell Jr, James Arthur, 1928.3.25~ ]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시험비행사가 되었고, 1962년 9월 제2기 우주비행사로 선발, 1965년 12월에 제미니 7호로 E.올드린과 함께 지구를 206바퀴 선회했고, 1966년 11월 제미니 12호로 올드린과 지구를 56바퀴 선회하였다. 1968년 12월 아폴로 8호로 F.보먼, W.앤더스 두 비행사와 함께 인류 최초의 달 왕복여행에 성공하여, 미국과 러시아를 통해 최장 우주비행의 기록을 세웠다. 1970년 4월 아폴로 13호로 네번째 우주비행을 시도하여 달 착륙을 시도했으나, 우주선의 기계선부(機械船部)에 적재한 산소탱크의 폭발사고로 달 착륙을 포기하고 달을 한 바퀴 돈 뒤 지구로 귀환하였다. /네이버
1921 - 프랑스의 연극, 영화 배우 시뇨레(Signoret, Simone) 출생 시뇨레 [Signoret, Simone, 1921.3.25~1985.9.30] 본명은 Simone Kaminker. 프랑스의 연극, 영화 배우. 본명은 Simone Kaminker. 따뜻하고 용감한 여성역을 훌륭하게 해낸 것으로 유명하다. 독일에서 프랑스 국적의 부모 밑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자랐다. 소르본대학교에서 공부하고 좌익 운동에 참가했으며, 여러 편의 연극에 출연한 뒤 영화 〈금투구 Casque d'or〉(1951)로 스타가 되었다. 〈꼭대기에 있는 방 Room at the Top〉(1958)으로 영국과 미국의 영화협회 및 칸 영화제에서 최우수 여배우로 상을 받았으며, 1965년에는 〈바보들이 탄 배 Ship of Fools〉로 다시 오스카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1951년 첫 남편인 영화감독 이브 알레그레와 이혼한 뒤 가수이며 배우인 이브 몽탕과 결혼했다. 그들 부부는 함께 로젠버그 처형과 베트남 전쟁, 알제리 전쟁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벌여 프랑스에서 격렬한 비난을 받기도 했다. 1956년의 헝가리 사태로 그들은 공산주의에 환멸을 느끼게 되었으며, 그녀가 자신의 자서전 〈그리움은 옛날의 그리움이 아니다 La Nostalgie n'est plus ce qu'elle était〉(1976)에서 적고 있듯이 그들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소련의 지도자 니키타 흐루시초프에게 그들의 느낌을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그녀는 몇 편의 텔레비전 연속극에도 출연하여 성공했으며, 1985년 출판한 2번째 소설 〈안녕, 볼로디아 Adieu, Volodia〉를 비롯한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출판하여 좋은 평가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 'Kneeling Woman' - 'Young Man'
1919 - 독일의 조각가 빌헬름 렘브루크(Lehmbruck, Wilhelm) 사망 렘브루크 [Lehmbruck, Wilhelm, 1881.1.4~1919.3.25] 독일의 조각가. 광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장학금으로 1901∼1907년 뒤셀도르프미술학교에서 배웠다. 1910∼1914년 파리에 머물면서 A.로댕, C.브랑쿠시, 특히 A.마욜의 영향을 받고, 1914년부터 베를린에서 활동하였다. 1911년부터 마욜의 조각에서 볼 수 있는 풍만한 완결성과 선을 강조하는 가느다란 고딕적 지체(肢體)를 융합하고, 공간과 매스의 독특한 긴장표현에 가능성을 보였다. 그러나 고뇌와 애수로 가득한 청년상이 많다. 주요작품으로 《엎드린 남자》(1915∼16:슈투트가르트 미술관 소장) 《앉아 있는 청년》 등이 있다. /네이버
- France, 20 Francs (1995. Banknote)
1918 - 프랑스의 작곡가 드뷔시(Debussy, Claude) 사망 드뷔시 [Debussy, (Achille-)Claude, 1862.8.22~1918.3.25] ‘방탕한 아들’ ‘펠레아스와 멜리장드’ ‘유희’ ‘아라베스크’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의 근대 작곡가 드뷔시가 1918년 3월 25일 파리에서 암으로 사망했다. 드뷔시는 근대음악에서 제일 처음으로 낭만음악에 반대하여 인상주의를 개척한 인상파 음악의 원조이다.
1914 - 프랑스의 시인 미스트랄(Mistral, Frédéric) 사망 미스트랄 [Mistral, Frédéric, 1830.9.8~1914.3.25] 프레데리크 미스트랄(Frédéric Mistral, 1830년 9월 8일 - 1914년 3월 25일)은 19세기에 오크어 문학의 진흥을 일으킨 프로방스 출신의 시인이다. 펠리브리지 운동의 중심적 인물이었으며, 190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생애 그는 프랑스의 옛 프로방스 출신의 농부였으며, 미스트랄은 아비뇽의 왕립대학(이후 프레데릭 미스트랄 학교로 개명)을 다녔다. 미스트랄은 1851년 액상프로방스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특별히 직업을 가져야 할 필요가 없었기에 미스트랄은 일찌감치 프로방스의 문화와 언어 부흥을 위해 힘쓰기로 결정했다. 1854년 프로방스와 오시타니아 전체의 언어와 문화를 보존, 진흥하기 위한 조직인 펠리브리지를 세웠다. 미스트랄은 트루바두르들의 오크어 문학전통을 부흥하기 위해 그 자신이 오크어로 많은 작품을 썼으며, 1878년에는 2권짜리 사전을 편찬했다. 미스트랄은 오크어 부흥운동을 하며 프랑스어의 철자법에 맞춘, "미스트랄 표기안"이라는 오크어의 새로운 표기법을 만들어 냈는데, 현재까지도 중세의 표기법에 기준한 "표준안"과 병용되고 있다. /위키백과
1912 - 프랑스의 연극 배우, 연출가 빌라르(Vilar, Jean) 출생 빌라르 [Vilar, Jean, 1912.3.25~1971.5.28] 남프랑스의 세트 출생. 20세 때 파리로 가서 생 바르브교(校)의 자습감독 일을 하며 소르본대학에 적을 두었는데 아틀리에극장에서 C.뒬랭의 《리처드 3세》를 구경한 것이 자극이 되어 그의 제자가 되었다. 1941년 순회극단 ‘룰로트’를 조직하고 A.스트린드베리, T.S.엘리엇 등의 작품을 연출하여 인정을 받았고 영화배우로서도 활약하였다. 1947년 이후 아비뇽의 연극제를 연출하였다. 업적을 정부로부터 인정받아 1951년 샤이요궁(宮) 운영을 위촉받고 국립민중극장(TNP)의 총감독으로 취임하였다. 그 후 학생 ·노동자 등 새로운 관객층을 개척하여, 고전의 현대화와 외국극 소개 등에 힘썼다. 1963년 퇴임한 후 오페라 개혁에 뜻을 두었지만 5월혁명에서 비판 받은 뒤로 침묵을 지켰다. /네이버
1909 - 프랑스계 캐나다 출생 소설가 루아(Roy, Gabrielle) 출생 루아 [Roy, Gabrielle, 1909.3.25∼1983.7.13] 제2차세계대전 당시의 몬트리올 서민의 모습을 묘사한 소설 《잠시 동안의 행복(1945)》과 《은행원 알렉산드르 셴베르(1955)》로 이름을 떨쳤다. 그 밖에 고향인 매니토바주(州)에서 제재를 취한 단편소설집 《칠면조가 사는 곳(1950)》 《샹보 거리(1955)》, 북극캐나다를 무대로 한 소설 《비밀스런 산(1961)》, 단편소설집 《잠들지 않는 강(1970)》 등 주옥 같은 작품을 많이 남겼다. 대부분의 작품이 영역되어 폭넓은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야후 백과
- 'Lawrenc of Arabia'
1908 - 영국의 영화감독 데이비드 린(Lean, David) 출생 린 [Lean, David, 1908.3.25~1991.4.16] [역사 속의 인물]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데이비드 린 명절이나 국경일이 되면 TV에서 자주 보는 몇몇 영화가 있다. '아라비아 로렌스'에서는 사막의 장엄한 풍경, '닥터 지바고'에서는 눈 풍경과 오마 샤리프의 표정, '콰이강의 다리'에서는 휘파람을 불며 행진하는 포로들의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모두 데이비드 린(1908~1991) 감독의 작품들이다. 1908년 오늘, 런던 교외에서 회계사의 아들로 태어나 공부가 싫어 영화관에서 빈둥거렸다. 그러다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라"는 친척의 충고에 정신이 번쩍 들어 영화판에서 심부름 소년부터 시작했다. 초기작인 '위대한 유산' '올리버 트위스트'는 2차대전 후 영국 영화를 부흥시키는 역할을 했다. 흥행과 비평에서 동시에 성공한 작품은 '아라비아의 로렌스'였다. 족장 역으로 출연한 오마 샤리프의 얘기다“스타도, 여성도, 러브스토리도, 액션도 나오지 않는 4시간짜리 영화를 만든 것만 해도 기적이다." 대작영화들은 수백 일씩 텐트 치고 현지에서 촬영했다. 그럼에도 거대한 스케일에 매몰되지 않고 그 속에 있는 인간 심리를 탁월하게 그려냈기에 거장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기사 작위와 두 차례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다. 박병선 편집부국장 /매일신문 2011년 03월 25일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14295&yy=2011
- Pope Paul VI, King Hussein and Patriarch Athenagoras I
1886 -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 아테나고라스 1세(Athenagoras I) 출생 아테나고라스 1세 [Athenagoras I, 1886.3.25~1972.7.7] 본명은 Aristokles Spyrou.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콘스탄티노플 근처의 할키 섬에 있는 신학교에 다녔으며, 1910년 보제(輔祭)가 되었다. 그뒤 아테네로 가서 대보제(大輔祭)가 되어 뒤에 에큐메니컬 총대주교가 된 대주교 멜레티오스를 위해 일했다. 그때부터 그는 차례로 고위성직으로 진급했다. 1922년 코르푸의 수도대주교가 되었고, 1930년 남북 아메리카 그리스 정교회(교인수 195만 명)의 대주교가 되었다. 그 직위에 있는 동안 미국 그리스 정교회 사제 양성을 위한 신학교를 포함하여 여러 학교와 새 교구들의 설립을 감독했다. 1948년 아테나고라스는 에큐메니컬 총대주교로 선출되었고, 교황 파울루스 6세의 말에 따르면 "모든 그리스도교도를 화해시킨 위대한 주인공"이 되었다. 1964년 그는 주도권을 쥐고 예루살렘에서 교황 파울루스 6세를 만났는데, 이것은 1439년 이래 로마 가톨릭 교회 지도자와 그리스 정교회 지도자가 만난 첫 회담이었다. 1965년 두 지도자는 1054년 양 교회가 서로에게 내린 파문령을 취소하는 데 동의했다. 이 역사적인 사건은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과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교회에서 동시에 예배를 거행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브리태니커
1881 - 헝가리의 작곡가 바르토크(Bartók, Béla) 출생 바르토크 [Bartók, Béla, 1881.3.25~1945.9.26] 나지센트미클로슈 출생. 5세 때부터 어머니에게 피아노를 배우고 10세 때는 자작 피아노소품을 연주할 정도의 음악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1899년 부다페스트 왕립음악원에 입학하여 피아노를 토만(Thomán István)에게, 작곡을 쾨슬러(Koessler János)에게 배웠다. 이 시기에는 F.리스트, J.브람스, W.R.바그너의 영향을 받았으나, 1902년 R.슈트라우스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였다 Also Sprach Zarathustra》의 초연을 듣고 작곡기법에 관한 깊은 계시를 받았다. 이러한 기법상의 영향과 민족의식의 결정이 이 무렵 작품의 토대가 되어 교향시 《코수트 Kossuth, symphonic poem》(1903) 《랩소디 Rhapsody》(1904) 등이 작곡되었다. 1905년부터 코다이와 함께 헝가리민요의 수집을 시작, 조국의 농민음악을 다룬 일련의 작품을 썼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그는 인상파의 화성법, 쇤베르크의 표현주의, 스트라빈스키의 원시주의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독자적인 스타일을 확립해 나갔다. 즉 피아노곡 《알레그로 바르바로 Allegro barbaro》(1911), 발레음악 《허수아비왕자 The Wooden Prince》(1916), 오페라 《푸른수염공작의 성(城) Duke Bluebeard’s Castle》(1911) 등은 이 무렵의 작품으로 그의 명성을 떨치게 한 최초의 작품들이다. 그 후 두 곡의 바이올린소나타(1921∼1922)를 작곡한 시기부터는 새로운 작풍을 보이고 있으며, 그는 있는 그대로의 민요를 소재로 한 작법을 지양하고 인상파적인 기법, 쇤베르크의 음렬작법과 민족성이 융합된 독자적 작법을 사용하였다. 이런 그의 작풍은 중기의 첫번째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피아노소나타》(1926)와 《제1피아노협주곡》(1926)에서 잘 구현되었다.
1872 - 일본의 시인, 소설가 시마자키 도손[島崎藤村] 출생 시마자키 도손 [島崎藤村, 1872.3.25~1943.8.22] 본명 하루키[春樹]. 나가노현[長野縣] 출생. 1891년 메이지학원[明治學園] 보통학부를 졸업하고 이듬해 메이지여학교 교사가 되었다. 1893년 기타무라 도코쿠[北村透谷] 등과 공동으로 《문학계(文學界)》를 창간, 극시(劇詩) ·수상 등을 발표하였다. 1897년 간행된 처녀시집 《와카나슈[若菜集]》가 간행되면서 신체(新體) 시인으로서의 명성을 얻었고, 이어 1901년까지 《일엽주(一葉舟)》 《여름 풀》 《낙매집(落梅集)》을 간행함으로써 일본 근대 시사상 불멸의 이름을 새겼다. 그 후 산문으로 전향, 1905년 최초의 장편 《파계(破戒)》를 발표하여 크게 성공을 거두어 자연주의 문학의 선구자적 지위를 확립하였다. 1913년 프랑스로 건너갔다가 제1차 세계대전을 만나 16년에야 귀국할 수 있었고, 그 후 《신생(新生)》(1918∼1919) 《어떤 여인의 생애》(1921) 등에 이어 1935년에는 아버지에 대한 추억과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전후의 동란을 묘사한 대작 《날이 샐 무렵》을 발표하였다. 이것은 그의 노년을 장식할 만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1913년과 1936년, 두 차례 외유(外遊)하였는데, 그 때의 체험이 《바다로》(1918) 《순례(巡禮)》(1940) 등 뛰어난 기행 ·문명비평을 탄생시켰다. /네이버
1867 - 이탈리아의 지휘자 토스카니니(Toscanini, Arturo) 출생 토스카니니 [Toscanini, Arturo, 1867.3.25~1957.1.16] 파르마 출생. 9세 때 파르마음악원에 입학하여 첼로와 작곡공부를 하고 졸업 후 1886년 리우데자네이루의 이탈리아오페라와 첼로 연주자로서 계약을 체결하였다가 그곳 지휘자의 대리로서 《아이다》를 지휘하여 인정을 받았다. 그후 이탈리아 각지에서 오페라를 지휘하여 30세 전후에 명성을 떨쳤다. 20세기의 지휘자로서는 데뷔가 빨라 《팔리아치》(1892), 《라보엠》(1896) 등의 역사적 중요작품을 초연하고 또 바그너에도 흥미를 가져 《신들의 황혼》 《지크프리트》 등을 이탈리아에 소개하기도 하였다. 1898년 밀라노 스칼라극장의 수석지휘자가 되었으며 그후 뉴욕 메트로폴리탄오페라단을 본거지로 《서부의 아가씨》 《보리스 고두노프》의 미국 초연을 맡는 등 많은 활동을 하였다. 그의 연주는 시기에 따라 다르지만 연주사(演奏史)에 이룩한 가장 중요한 역할은 신즉물주의적(新即物主義的)이라고 불리는 바와 같이 연주자의 해석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악보에 떠오르는 작곡자의 의도를 재현시키려 한 데 있다. 이러한 그의 시도의 정부(正否)는 논외로 하더라도 악보의 지시를 잘 이해한 지휘기술과 이에 필요한 악단의 통제를 해내는 역량면에서는 20세기 전반을 대표하는 지휘자로서 높이 평가된다. /네이버
- Statue of... - 'A. Lincoln'
- Sculptured Heads on Mt. Rushmore
1867 - 미국의 조각가 보글럼(Borglum, Gutzon) 출생 보글럼 [Borglum, Gutzon, 1867.3.25~1941.3.6] 천연의 바위에 거대한 정치가 조상(彫像)들을 새겨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전통을 되살렸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술을 공부한 뒤, 1890~93년에 파리에 있는 줄리앙 아카데미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파리에서는 살롱전에 그림과 조각을 모두 출품했으며, 영국에서는 중요한 작품의 주문들을 받고 왕실의 인정을 받았다. 1901년 뉴욕 시에서 〈디오메데스의 암말 The Mares of Diomedes〉이라는 청동 군상(群像)을 만들어 이름을 날렸는데, 이 작품은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 미국의 조각품으로는 처음으로 사들인 것이다. 다재다능한 솜씨로 뉴욕 시에 있는 세인트존더디바인 대성당의 〈12사도상(像)〉과 같은 장엄한 조상들을 비롯해 애국자들의 흉상을 많이 만들었다. 얼마 후 설형문자 등 중동지역의 여러 문자들을 연구하는 학자였던 그의 아내가 말한 것처럼 '작품의 크기가 정서에 미치는 영향'을 중시하게 되었으며, 그결과 무게가 6t이나 되는 대리석으로 워싱턴 D. C.의 캐피털로툰다에 있는 링컨 대통령의 거대한 두상을 만들었다. 일부 남부지방의 여성들은 보글럼에게 이것을 본떠 남부 연합군의 장군이었던 로버트 E. 리의 두상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했다. 그러나 보글럼은 그 대신 조지아에 있는 스톤 산에 대열을 지어 행군하는 리 장군과 참모들 및 병사들의 거대한 조상을 만들 것을 구상했는데, 후원자들과 논쟁을 벌인 끝에 이 방대한 작업을 포기했으며 결국 이 작업은 다른 사람들이 완성했다. 그뒤 그는 정부당국에 고용되어 또다른 산을 기념물로 만드는 일에 종사했다. 그는 사우스다코타주의 러슈모어산 국립기념공원에 있는 워싱턴과 제퍼슨,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의 두상을 조각했다. 그는 뛰어난 공학 기술로 많은 양의 돌을 빠른 시간에 쪼아낼 수 있도록 다이너마이트와 공기 해머의 기능을 이용한 새 방법들을 창안했다. 이 기념물 작업은 1941년 보글럼이 죽은 해에 완성되었는데, 마무리 세부작업은 그의 아들 링컨이 해냈다. /브리태니커
러시모어산은 높이 1,829m, 사우스다코타주 남서부 블랙힐스산지에 있는 산봉우리로, 래피드에서 남서쪽으로 40㎞ 떨어져 있다. 산허리의 화강암에는 조지 워싱턴, 에이브러햄 링컨, 토머스 제퍼슨,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거대한 두상(頭像)이 조각되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1865 - 타이완의 학술사상가, 국민당 원로 우징헝(吳敬恒) 출생 우징헝 [吳敬恒, 1865.3.25~1953.10.30] 자 치휘(稚暉). 장쑤성[江蘇省] 우진[武進] 출생. 청(淸)나라 말기에 향시(鄕試)에 합격한 거인(擧人)이며, 1901년 일본에 유학하였다. 이듬해 귀국하여 청나라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단체 광복회에 참가하였으나, 1903년 쑤바오사건[蘇報事件]으로 영국·프랑스로 망명하였다. 1907년 파리에서 잡지 《신세기》를 발간하여, P.크로폿킨 등의 무정부주의를 중국에 소개하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난 직후에 귀국하여 탕산[唐山]대학 학장이 되었으나, 위안스카이의 탄압을 받아 1913년 다시 유럽에 망명하여 프랑스에 유학한 중국 학생들을 돕는 단체에 관계하였다. 1919년에 일어난 5·4운동의 중심인물이며, 후스[胡適]와 함께 서양문명의 전면적 수용과 과학지상주의를 주창하여 낡은 사상을 공격하였고, '백발의 젊은이'라 불렸다. 아이궈학사[愛國學社]·중파[中法]대학 등을 창설하여, 교육으로 중국을 혁신하려고 노력하였다. 또 국어독음통일회(國語讀音統一會) 회장으로서 국어운동에도 활약하였다.
1862 - 영국의 자수 미술가 메이 모리스(Morris, May) 출생 모리스 [Morris, Mary "May", 1862.3.25~1938.10.17] Mary "May" Morris http://gbstamp.co.uk/article/royal-mail-britons-of-distinction-stamp-issue-246.html
1846 - 아일랜드의 정치지도자 대비트(Davitt, Michael) 출생 대비트 [Davitt, Michael, 1846.3.25~1906.5.31] 아일랜드 정치지도자, 공화주의자. 아일랜드 토지동맹(1879)의 창설자. 부재지주제에 반대하는 저항운동 단체를 조직하고, 고정 소작료, 정당한 임대료, 소작권의 자유매매제 등을 확보하여 소작농민의 빈곤을 경감시키려고 했다. 그는 쫓겨난 소작민의 아들이었다. 1856년 10세의 나이에 면직공장에서 일을 시작했으며 1년 후 기계 사고로 한쪽 팔을 잃었다. 1865년 그는 혁명적인 페니언 단에 가입하였는데 이는 아일랜드의 정치적 독립을 획득하기 위해 조직된 국제적 비밀결사였다. 1868년 페니언단과 유사한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Irish Republican Brotherhood/IRB)의 서기가 되었다. 그는 아일랜드에 총기를 보낸 혐의로 런던에서 체포되어(1870), 1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감옥에서 찰스 파넬의 헌법 개혁운동과 페니언단의 행동주의를 결합하여 정치적 농민폭동을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1877년 가석방으로 풀려나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에 재가입하였으며 페니언 운동의 발상지,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곳에서 토지독점과 빈곤과의 관계에 대한 헨리 조지의 사상에 크게 영향을 받았다. 아일랜드에 귀국한 그는 파넬과의 협력하에 토지연맹을 조직하는 데 성공했으나 이로 인해 아일랜드 공화국 형제단 최고회의에서 제명되었다(1880). 미스 군 의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1882), 기결수였으므로 그 자격을 박탈당했다. 그러나 선동적인 연설을 하여 재수감되었다(1881~82, 1883). 그가 헨리 조지의 토지개혁이론을 공공연히 주장하자 파넬은 그와 절연했다. 그는 파넬 위원회(1887~89)에서 민족주의자들을 열렬히 변론했다. W. H. 오셰아 대령의 이혼사건에 파넬이 관련된 문제를 놓고 1890년 아일랜드당이 분열되었을 때 대비트는 앞장서서 파넬의 당수직 고수를 반대했다. 그는 1892년과 1893년에 의원으로 선출되었으나 번번이 자격을 박탈당했다. 남 마요 의회에 당선되었으나(1895) 남아프리카 전쟁에 반대하여 1899년 사퇴했다. 저서 〈아일랜드 봉건주의의 몰락 The Fall of Feudalism in Ireland〉(1904)은 그가 살던 시대를 기록한 귀중한 자료이다. /브리태니커
1808 - 에스파냐의 시인, 혁명가 에스프론세다(Espronceda, José de) 출생 에스프론세다 [Espronceda (y Delgado), José de, 1808.3.25~1842.5.23]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소년시절부터 정치운동(비밀결사)에 가담하고, 18세 때 외국으로 망명하였다. 외국에 있으면서도 격렬한 정치운동에 종사하였으나, 한편으로는 영국 ·프랑스의 시(詩)를 가까이 하고, 특히 바이런의 영향을 받아서 낭만주의자가 되었다.
- Vaclav Hollar
- 'Spring' - 'Lady wiyh Fur Hat'
1677 - 보헤미아의 에칭 판화가 바츨라프 홀라르(Hollar, Václav) 사망 홀라르 [Hollar, Václav(Wenceslaus), 1607.7.13~1677.3.25] (영)Wenzel Hollar. 그의 작품들은 17세기에 대한 정보를 풍부하게 제공하고 있다. 홀라르는 1627년 프랑크푸르트로 가서 판화가이자 출판업자인 마테우스 메리안 밑에서 공부했으며, 뒤에 스트라스부르로 갔다가 1633년 쾰른으로 갔다. 거기에서 애런들의 백작이자 수집가인 토머스의 주목을 끌어 생애의 대부분을 그와 관계를 맺고 살았다. 홀라르는 1637년 영국에 정착했지만, 1644년경 안트웨르펜으로 이주했다가 1652년 다시 돌아갔다. 그의 뛰어난 에칭 작품은 지금도 감식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수많은 책에 삽화를 그렸으며, 1666년의 대화재 이후 유명한 〈런던의 풍경 Views of London〉을 그렸다. 약 3,000점의 판화를 남기고 아주 가난하게 살다 죽었다. /브리태니커
1655 - 크리스티안 하위헌스, 토성의 가장 큰 위성 타이탄을 발견 티탄 또는 타이탄(Titan)은 토성에서 가장 큰 위성으로, 태양계 내에서는 목성의 가니메데에 이어 두 번째로 큰 위성이다. 토성 VI라고 부르기도 한다. 짙은 대기를 가진 유일한 위성이며, 표면에 안정된 상태로 존재하는 액체가 확인된 지구 외의 유일한 태양계 내의 천체이다. 대기 구성이 지구와 유사하여 다양한 관심을 받고 있다. 티탄은 토성에서 20번째로 먼 위성이자 구형 외관을 지니는 일정 질량 이상 되는 위성들 중에서는 여섯 번째로 떨어져 있기도 하다. 행성과 비슷한 특징을 지닌 위성으로 자주 기술되는 것처럼 티탄은 반지름이 달의 약 1.5배이고 질량은 1.8배나 된다. 목성의 가니메데에 이어 태양계에서 두번째로 큰 위성이며, 크기만으로 따진다면 수성보다 더 크다. (그러나 질량은 수성의 반 정도이다.) 천문학자 크리스티안 하위헌스가 1655년3월 25일 최초로 발견했다. 당시 티탄은 토성의 위성들 중 첫번째로 존재가 증명된 존재였다. 태양계의 위성 중 갈릴레이 위성 다음으로 발견된 첫 천체다. 명칭은 그리스 신화의 티탄 신족에서 이름을 따왔다. 티탄 신족은 가이아와 우라노스 사이의 12남매를 지칭한다. 티탄의 표면은 주로 얼음과 암석으로 이루어져 있다. 티탄은 짙은 대기로 둘려싸여 있기 때문에, 2004년, 카시니-하위헌스 호가 도착하기 전까지 인류는 티탄의 표면에 대하여 거의 알지 못했다. 카시니-하위헌스 호의 탐사로부터 탄화 수소로 채워진 호수들이 티탄의 극지에 존재함을 확인하게 되었다. 표면은 지질학적으로 젊었으며, 산과 얼음 화산으로 보여지는 지형들이 몇몇 관찰되었다. 티탄의 표면은 전체적으로 평평했으며, 충돌 크레이터는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티탄의 대기는 대부분 질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소량의 메테인과 에테인이 섞여 있다. 티탄 표면에는 바람과 비 등의 기상 현상이 발생하며, 지구 해변과 비슷한 물결 모양의 지형도 형성되어 있다. 표면 및 지하에 있는 액체 물질 및 질소로 충만한 대기 때문에 티탄은 온도가 훨씬 더 낮다는 점만 제외하면 마치 원시 지구의 모습과 유사해 보였다. 이 때문에 티탄은 예전부터 미생물 혹은 적어도 복잡한 유기 화합물 형태의 생명체가 태동할 환경이 형성되어 있을 것으로 믿어져 왔다. 과학자들은 티탄의 지하에 있는 액체 바다가 생명체가 생겨날 환경을 제공할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위키백과
- Illustration for Canada's first Christmas carol, written by Father Brebeuf, 1649
1593 - 예수회 선교사, 캐나다의 수호성인 브레뵈프(Brébeuf, Jean de) 출생 브레뵈프 [Brébeuf, (Saint) Jean de, 1593.3.25~1649.3.16] 1930년 성인으로 추증되었으며, 축일은 10월 19일. 캐나다의 수호성인이며, 뉴프랑스에 파견된 예수회 선교사. 1617년 예수회에 가입하고, 1623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뒤 1625년 뉴프랑스에 도착했다. 조지아 만과 후론 호(湖) 사이에 사는 후론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받고 죽음의 위협 속에서 일하다가 1629년 영국인들의 강요 때문에 프랑스로 귀국했다. 1634년 후론족 거주지역으로 다시 돌아와 15년 동안 원시적인 환경에서 일했다. 후론족과 적대관계에 있었고 모피 거래의 경쟁 부족이었던 이로쿼이족과 프랑스가 1647년에 평화협정을 맺을 당시, 브레뵈프는 18군데에 선교구역을 둔 노련한 선교사였다. 이로쿼이족은 후론족 동맹을 무너뜨리기로 결심하고 오랫동안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1648~50년 후론족의 모든 마을과 선교구역을 파괴해버렸다. 그들은 브레뵈프와 동료 선교사 가브리엘 랄르망을 붙잡아 생이냐스 근처에서 모진 고문을 가해 죽였다. 브레뵈프는 돌에 맞고, 칼에 난도질을 당했으며, 뜨겁게 달군 돌도끼에 데이고, 끓는 물로 '세례'를 받았으며, 불에 타죽었다. 그가 조금도 고통스러운 모습을 보이지 않자 이로쿼이족은 그의 심장을 먹어버렸다. 1930년 브레뵈프는 랄르망 및 다른 예수회 선교사들(북아메리카의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으로 추증되었다. 역사가들과 민속학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는 그의 저서들 가운데는 후론족의 문법서와 후론족 언어로 번역한 교리문답서가 있다. 그의 새해 강론들은 R.G. 트웨이츠의 〈예수회의 이야기들과 관련 문서들 Jesuit Relations and Allied Documents〉(73권, 1896~1901)에 번역되어 실렸다. /브리태니커
1252 - 독일의 공작, 로마의 왕, 시칠리아의 왕위 계승권 주창자 콘라딘(Konradin) 출생 콘라딘 [Konradin, 1252.3.25~1268.10.29] (영)Conradin. Konrad Ⅴ, Konrad der Jüngere라고도 함. 독일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마지막 혈손. 슈바벤의 공작이며 로마의 왕이자 시칠리아의 왕위 계승권 주장자이다. 이탈리아의 반(反)교황파인 '기벨린'(황제파)의 주요인사로서 1267년 이탈리아로 원정을 나가 앙주의 샤를로부터 시칠리아를 되찾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황제 콘라트 4세의 아들이며 프리드리히 2세의 손자로서 시칠리아 왕국의 상속권과 예루살렘의 왕위를 주장했다. 그러나 1258년 프리드리히 2세의 서자였던 그의 삼촌 만프레디가 시칠리아의 왕위를 찬탈했다. 콘라딘은 슈바벤 공작령의 남아 있는 지역을 회복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만프레디는 1266년 베네벤토 전투에서 프랑스 출신의 교황 클레멘스 4세로부터 시칠리아 왕국을 얻게 된 앙주의 샤를과 싸워 패했다. 당황한 기벨린들은 샤를로부터 시칠리아를 탈환하기 위해 콘라딘을 이탈리아로 불러들였다. 1267년 9월 그가 상당 규모의 군사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진격하자 이탈리아인들은 그를 열렬히 환호했다. 황제파 도시인 베로나·파비아·피사·시에나 등을 휩쓴 그는 교황에게 파문당하기는 했으나 1268년 7월 의기양양하게 로마에 입성했다. 콘라딘은 이미 승리를 거두었다고 믿고 지나치게 낙관하며 그의 추종자들에게 땅을 분배해준 뒤 시칠리아로 향했다. 그러나 뜻밖에도 8월 23일 탈리아코차에서 샤를의 군대에 패했다. 콘라딘은 처음에는 로마로 도망갔으나 그곳을 장악하고 있던 교황파는 그를 환영하지 않았다. 이에 아스투라로 도망가 그곳에서 시칠리아로 들어가고자 했다. 그러나 체포되어 샤를에게 인도된 뒤 나폴리에서 샤를의 배심원 앞에서 재판을 받았다. 교회와 국왕에 대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장터에서 여러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 참수당했다. /브리태니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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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상이 창안하여 2004년 4월부터 매일 연재하고 있는 [우표로 본 오늘의 인물과 역사]는 세계최초의 <우표를 이용한 매일역사연재물>입니다. 수집한 우표를 이용하여 오로지 취미와 교육적 목적으로 만들고 있지만, 자료의 충실을 기하느라 본의 아니게 저작권에 저촉되는 일이 생길까 염려하고 있습니다. 혹시 문제가 있으면 미리 알려주셔서 고칠 수 있는 기회를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_@)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