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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지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쌍학리 285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고송리 수리봉에서 이방(離方)으로 발원(發源)한 용맥(龍脈)에서 진방(震方)으로 분지(分枝)한 일맥(一脈)이 수차(數次)에 걸쳐 대단과협(大斷過峽)을 형성하면서 약동굴곡(躍動屈曲) 행룡(行龍)하다가 재차(材次) 손방(巽方)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행도(行度)를 계속하던 용맥(龍脈)이 진처(盡處)에 이르러 결인속기(結咽束氣)하고 돈기(頓起)하여 현무봉(玄武峰)을 기봉(起峰)한 하처(下處)에 조선시대 명문가 중에 하나인 덕수이씨 일맥(一脈)을 이룬 승지공(承旨公) 이섭(李涉), 찬성공(贊成公) 이안성(李安性), 문정공(文靖公) 택당 이식(李植)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덕수이씨 7세 공조참의 이양(李揚) ㅡ 8세 지돈령부사 이명신(李明晨) ㅡ 9세 온양군사 이추(李抽) ㅡ 10세 홍주목사 이의무(李宜茂) ㅡ 11세 우의정 이행(李荇)으로 대(代)를 이으면서 탄탄대로를 달리던 집안에서 갑자기ㅡ 12세 도총부도사 이원상(李元祥), 생원 이섭(李涉), 찬성공(贊成公) 이안성(李安性)대에 이르러 기울었다가 택당 이식선생을 기점으로 다시 부활하여 영의정 2명, 좌의정 1명, 대제학 2명, 판서 6명, 문과급제 22명, 무과급제 18명, 생원진사 68명을 배출한 명실상부한 명문가가 되었다.
▼ 혈후(穴後)에서 분지(分地)한 일맥(一脈)은 묘지가 있는 곳으로 래맥(來脈)을 하였고, 분지(分地)된 또 다른 일맥(一脈)은 묘지가 있는 앞쪽으로 길게 뻗으면서 우선(右旋)을 하면서 우선국(右旋局)을 형성하면서 안산(案山)을 이루고 있다.
인물 : 승지공(承旨公) 이섭(李涉 1533-1570)
승지공의 자는 사제(司濟)이며, 1533년 1월 6일 판서공 원상(元祥)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555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같은해 11월 21일 아버지인 판서공 원상(元祥)이 별세한 후 외가인 전라도 정읍 고부(古阜)의 우일장으로 이주하여 세거하다가, 1570년 1월 2일 별세하니 향년 38세였다.
▼ 현무봉(玄武峰)에서 개장천심(開帳穿心)한 중출맥(中出脈)이 짧게 낙맥(落脈)하는 입수맥(入首脈)을 살펴보면 웅룡(雄龍)에서 자룡(雌龍)으로 변모(變貌)하여 후부(厚富)하고 견실하며, 급락(急落)하는 맥진처(脈盡處) 즉 음래양수처(陰來陽受處)에 점혈(點穴)한 것으로 보인다. 개장(開帳)한 좌변각(左邊脚)은 근거리에서 좌선(左旋)하면서 혈처(穴處)를 감싸는 모습이고, 개장(開帳)한 우변각(右邊脚) 역시 근거리에서 혈처(穴處)를 견실하게 회포(廻抱)하면서 감싸고 있는 형국(形局)이 유정(有情)하고 아름답다. 또한 좌우변각(左右邊脚)이 서로 상교(相交)하여 수구(水口)를 긴긴관쇄(緊緊關鎖)하여 내당수(內堂水)가 소수(消水)함이 불견(不見)이다. 그러나 당판(堂版)과 전순(氈脣), 선익(蟬翼) 등을 살펴봤을 때 정혈처(正穴處)는 5보(五步)정도 위로 보인다.
▼ 조산(朝山)
인물 : 찬성공(贊成公) 이안성(李安性 1554-1613)
찬성공의 자는 양백(養伯)이고, 1554년 5월 11일 승지공 섭(涉)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17세인 1570년에 부친상을 당하여 3년상을 마치고 전남 고부에서 서울집으로 이주한 후 여러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다가, 1599년 46세에 접대도감 낭관이 되었고, 1600년 군자감 주부를 거쳐 1602년 1월 20일 상의원 별좌에 임명되었다가 12월 26일 안기도 찰방으로 전임한 후 조봉대부에 올랐으나 1605년 모친의 병환으로 사직하였다.
1613년 8월 12일 여주 대신면 보통리 농막에서 60세에 별세 하였다.
▼ 현무봉(玄武峰)에서 낙맥(落脈)하여 좌선(左旋)하는 용맥(龍脈)의 진처(盡處)에 후부(厚富)한 입수도두(入首到頭)가 만두형태(巒頭形態)를 이루고 하처(下處)에 역시 후부(厚富)한 육지(肉地)를 이룬 곳에서 생기취결(生氣聚結)하여 결지(結地)한 정혈처(正穴處)에 택당 이식의 부친인 이안성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묘후(墓後)에서 분지(分枝)한 일조맥(一條脈)이 좌선(左旋)하면서 혈처(穴處)를 다정(多情)하게 회포(廻抱)하고 있으며, 현무봉(玄武峰)으로 래맥(來脈)하기전 분지(分枝)된 일맥(一脈)이 우선(右旋)하면서 혈전(穴前)으로 다가오면서 우백호(右白虎)와 안산(案山)을 형성하고 있다.
좌선룡(左旋龍)이 우수도좌(右水到左)하는 1차수(一次水)를 만나 음양(陰陽)의 조화를 이뤄 충화(冲化)함으로써 강노지기(强老之氣)을 탈진(脫盡)한 지기(地氣)가 화순(化醇)를 이뤄 생기(生氣)의 융결(融結)을 도모하기 마땅해 보인다.
전순(氈脣) 부분에는 택당 이식선생의 아들인 좌의정을 지낸 이단하의 묘가 자리잡고 있으나 정혈처(正穴處)는 아니다.
인물 : 문정공(文靖公) 이식(李植 1584~ 1647).
당대의 뛰어난 학자이자 문장가로 문풍을 주도하여 많은 제자를 배출했다. 이정구·신흠·장유와 더불어 한문4대가(漢文四大家)로 꼽혔으며, 여한9대가(麗韓九大家)로도 꼽혔다.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고(汝固), 호는 택당(澤堂)·남궁외사(南宮外史)·택구거사(澤癯居士). 좌의정 행(荇)의 현손이며 좌찬성에 증직된 안성(安性)의 아들이다. 1610년(광해군 2) 문과에 급제하여 7년 뒤 선전관이 되었으나 폐모론이 일어나자 낙향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이조좌랑이 되었다. 대사간으로 있을 때 실정(失政)을 논박하다가 여러 번 좌천되었다. 1642년(인조 20) 김상헌 등과 함께 척화(斥和)를 주장하여 청나라 군사에게 잡혀갔다가 돌아올 때 다시 의주에서 잡혔으나 탈출하여 돌아왔다. 그뒤 대사헌, 형조·이조·예조 판서를 지냈다. 문장의 짜임새를 정교하게 다듬는 것을 장기로 삼았고, 고문다운 문장이란 한문이 지닌 표현능력을 최대한 살리면서 간결하고도 품격이 높고 꾸미지 않은 것 같은 데서 우아한 흥취가 살아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5언율시를 가장 잘 썼다. 소설배격론이 대두되었을 때 한문4대가의 한 사람으로서 문풍을 바로잡는 책임을 절감하며 소설의 폐단을 강경하게 지적하고 허균을 공격했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다음백과)
▼ 현무봉(玄武峰)에서 곤방(坤方)으로 낙맥(落脈)한 주용맥(主龍脈)이 개장(開帳)하고 짧게 천심(穿心)한 맥진처(脈盡處)에서 육지(肉地)를 형성하고 생기취결(生氣聚結)한 정혈처(正穴處)에 택당 이식선생의 묘가 자리잡고 있다. 음래양수처(陰來陽受處)인 혈처(穴處)는 와혈상(窩穴象)이며, 개장(開帳)한 양변각(兩邊脚)이 근거리에서 혈처(穴處)를 회포(廻抱)하면서 감싸는 모습이고, 현무봉(玄武峰)으로 래맥(來脈)하기전에 분지(分枝)된 일맥(一脈)이 외백호(外白虎)를 형성하면서 혈전(穴前)으로 다가와 안산(案山)을 이루고 있는데, 그 모습이 토체(土體)를 이루고 있다.
와혈(窩穴)의 특징인 현릉우각사(弦稜牛角砂)가 분명하고, 와처(窩處)에 형성된 후부(厚富)한 당판(堂版)도 그 혈증(穴證)을 입증해 주고 있으며, 근거리에서 회포(廻抱)하는 좌우변각(左右邊脚)이 내당수(內堂水)가 소수(消水)하는 지호(地戶)를 긴밀(緊密)하게 관쇄(關鎖)를 이루고 있다.
▼ 택당(澤堂) 이식(李植, 1584~1647)의 문집(文集)인 택당집(澤堂集)의 『택당선생별집(澤堂先生別集) 제 11권 계산지(啓山志)』에 전라도 정읍 고부에 있던 할아버지 무덤을 옮기는 과정을 직접 주관한 일에 대해서는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계산지(啓山集)』의 내용을 살펴보면 나도 처음에 산을 정할적에는 그 방서를 좋아하고 그 술사를 좋아하면서 지극히 경도(傾倒)되었던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천장(遷葬)하여 묘를 합치는 것이야말로 선인(先人)의 뜻이었다. 내가 조고(祖考)의 영구(靈柩)를 모시고 북쪽으로 향할적에 매일 밤 꿈속에서 선부군(先府君)이 영구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보았는데, 꿈을 깨고 나서도 바로 옆에 계신 것과 같은 방불한 느낌을 갖곤 했다. 그 당시에 죽산(竹山) 땅에 있는 늙은 종에게 중로(中路)에서 양식을 운반하라고 명령을 내려놓고 있었다. 그런데 그 종도 홀연히 꿈속에서 부군(府君)을 뵈었는데, 부군이 명령을 내리기를 영구가 이미 출발하였다. 나도 배행(陪行)하기 위해서 남쪽으로 내려갈 것이니, 기일을 어기지 않도록 빨리 식량을 운반하라고 하였다 한다. 이렇게 두 꿈이 맞아떨어졌으므로 일행이 감동하면서 감히 나태한 생각을 갖지 못했다.
그 때 전후로 재력을 있는대로 끌어 모아 험하고 먼길을 넘어서 세 차례의 상례(喪禮)를 행하고, 두 기의 묘(墓)를 조성하는 일을 완료하느라고 갖가지로 소요되는 비용이 이루 말할 수가 없는 가운데, 외로운 우리 형제와 이 일에 동원된 종과 말 모두가 손상을 받은적이 한번도 없었으며 일마다 순조롭게 진핼되어 하나도 차질을 빚은 것이 없었다.
다만 처음에 하나의 산을 가릴적에 방서를 본 떠서 대략 형세를 점쳐보고, 선조의 묘소를 조성한 다음에 자손들이 대대로 여기에다 장례를 행하면서 깍듯이 받들어 지킨다면 그러대로 정령(精靈)과 혼백(魂魄)이 서로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의 기운이 유통(流通)되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이 또한 길한 상서(祥瑞)를 열개하는 아름다운 일이요, 은연중에 복을 듬뿍 받게 되는 일이 될 것이니, 이를 어겨서는 안 되리라 여겨진다. 자사(子思)가 중니(仲尼)는 위로 하늘의 운행을 법도를 삼고, 아래로 물과 땅의 이치를 쫒았다. 그 땅을 정할 때 논한 바 그 땅의 좋고 나뿜을 점칠적에는 소목(昭穆)을 지리(地理)로 삼아야 할 것이다라는 말 등이 가장 적당하다고 할 것이니 우리 자손들은 이 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택당선생(澤堂先生)의 조부(祖父)인 생원 이섭(李涉)이 묻혀 있는 명당(明堂)을 이식(李植)이 차지한 과정이 『택당집』에 비교적 소상히 적혀 있다.
당시의 이름난 풍수사 이의신 선생이 이 땅을 찾아 자기와 친한 재상에게 주어 그 부모를 장사 지내게 하려고 하였으나, 재상이 이곳에 무덤을 쓸 경우 그 권세에 눌릴 것을 두려워한 벽아골 앞에 마을주민들이 이를 저지하려고 하였으나 이룰 수가 없게 되자, 그 재상을 찾아가 다른 지관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땅을 보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술사는 평소 이의신의 실력에 경쟁심을 가지고 있었던지라 이를 방해하고자 하였다. 그 술사는 백아골에 도착하여 박씨 집에 숙박하면서 이의신이 자리잡은 곳을 아십니까라고 마을 주민들에게 묻자 바로 이곳인데, 조상대대로 살아오면서 살펴보건데 여름철이면 큰 비가 올 때마다 샘이 솟아 큰물이 지곤합니다라고 말하자 그 지관은 크게 기뻐하면서 이튼날 산에 올라가 말뚝을 꽂아 놓고 손가락으로 가르키며 아무개 산 밖에 샘이 있습니까라고 묻자 마을 사람들이 있다고 대답하니 이 땅은 비록 아름답기는 하지만 반드시 수맥이 있을 것입니다. 한 자만 파보아도 증명할 수 있을겁니다라고 그 재상에게 전하자 재상은 이 땅을 쓰지 않았다,
그 후에도 근처 지방에서 풍수를 논할 때마다, 이 산을 가장 좋은 산으로 꼽아서 한양의 많은 사대부들이 이곳에 와서 산세를 둘러보곤 하였지만 그 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부모를 물 속에 장사지내려 하느냐고 반문하는 바람에 번번히 이곳에 묘를 쓸 생각을 하지 못하고 돌아가 버렸다.
그러나 우리 집이 양평읍 근처에 있었는데, 초야에 묻혀 사는 친구가 그 속임수를 알고 있었고, 나 역시 풍수지리설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풍수지리법에 의거하여 그 땅을 살펴보니, 본래 흉하거나 꺼려할 것이 없었다. 지사 오세준 선생은 이기론(理氣論)에 정통한 사람인데 역시 이곳이 길지임에 틀림없다고 하여, 마침내 이에 의심하지 않고, 그곳에 도착하니, 처음에 마을사람들이 역시 같은 말을 하기에 내가 말하였다. 그렇겠습니다. 그런데 시험 삼아 한 번 살펴보는 것이야 어떻습니까 하면서 두 곳의 땅을 파보니, 흙은 토실토실하고 단단하여 마치 고기의 지방질을 자르고 옥을 자른 모양으로서 습하거나 질퍽하지가 않았다.
이와 같이 길지임을 확인한 『택당(澤堂) 이식(李植)』은 정읍 고부에 있던 조부묘를 이곳으로 이장하게 되었는데, 할아버지의 무덤 자리의 광중을 천광(穿壙)해보니 흙은 오색을 구비하여 그 빛깔이 빛나는 모양이 마치 무늬와 같았으며 흰색 석고와 비취색 돌들이 보였다.
당시대의 명풍『이의신』은 이 자리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형세는 반룡(蟠龍)이며, 안산은 옥대와 같으며, 그 조용한 모습은 처녀와 같다. 也字 모양의 국세로서 자좌오향의 위치가 최고의 길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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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상세한 설명에 잘 봅니다.감사합니다.
글 윗대목에 전남고부가 아니고 전북정읍시 고부면입니다.
예전에는 고부현 이었구요.두승산 서북쪽에 위치합니다.
잘 보았습니다....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