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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13] I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묵상 I 마르 7,14-2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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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묵상] : 얼짱. 몸짱. 맘짱! <독서 : 창세 2,4ㄴ-9.15-17 / 복음 : 마르 7,14-23>
요즘 텔레비전을 보면 예쁜 사람이 참 많다. 여자만 예쁜 것이 아니라 남자 아이들도 어쩜 그렇게 예쁜지 모르겠다. 원래 남자는 ‘멋있다.’, ‘잘생겼다.’고 했는데, 요즘 아이들에게는 ‘예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것 같다.
아무튼 요즘 사람들은 외모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얼짱이니, 몸짱이라는 말을 많이 듣게 된다. 몸짱이 되려고 열심히 운동하는 것이야 뭐라 할 수 없지만, 살을 빼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죽어라 살을 빼는 모습이 안쓰럽다. 생긴 것이야 타고나는 것인데 ‘놀라운 현대 의술’ 덕분에 예뻐지려는 사람도 많다.
“어느 날 하느님이 자매에게 ‘너, 앞으로 40년은 건강하게 살게 해주마.’ 하고 말씀하셨다. 자매는 기왕 사는 거 예쁘게 살겠다고 있는 돈, 없는 돈 다 들여서 싹 뜯어고쳤다. 이제 좀 살아야지 하는데 그만 죽었다. 하느님께 항의를 하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무 뜯어고쳐서 못 알아보았다.’”
물론 건강하고 예쁜 것도 좋지만 중요한 것은 얼짱•몸짱이 아니라 ‘맘짱’이 아닐까? 마음이 따뜻한 사람, 사랑이 많은 사람이 아닐까? 가난한 이들,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게 기꺼이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 사랑이 많은 맘짱. 하지만 세상은 맘짱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 것 같다. 오히려 남들은 어찌되었든 자기만 더 많이 가지고, 더 많이 누리면 그만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주님께서는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더럽힌다고 하신다. 주변 것들보다 우리들 마음의 더럽고 추한 것을 가려내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씀이다.
맘짱인 사람이라면 마음에서 아름답고 좋은 것들이 흘러넘칠 것이다. 그래서 맘짱인 사람들한테서는 그리스도의 향기가 난다.................◆
[말씀자료 : 이재학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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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5주간 수요일(19-02-13) I 묵상기도방(사이버기도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
시작기도 :
하늘에 계신 아버지, 저는 당신의 지혜와 사랑을
믿으며 또한 당신이 천국을 위하여 저를 창조하시고
그곳에 이르는 길을 가르쳐 주시며 충실한 종에게
약속하신 상을 주시고자 기다리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나에게 빛을 주시고 그 길을 보여주시며
관대한 마음으로 소명에 항구할 힘을
주소서. 임종 때에 성 바오로와 같이
“나는 훌륭하게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습니다. 이제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고 말할 수 있게 하소서.
(‘바오로 가족 기도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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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기도지향 : 소년, 소녀 가장들을 위하여 기도합시다.
사랑이신 주님, 이 땅의 모든 소년, 소녀 가장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들이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사랑과 위로로 함께 해주시고,
그들 어깨에 놓인 짐을 저희가 함께 지고 갈 수 있도록 저희에게 당신의 사랑의 마음을 부어주소서.
오늘의 복음 : [다해] 연중 제5주간 수요일 마르 7,14-23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다시 군중을 가까이 불러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모두 내 말을 듣고 깨달아라.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 예수님께서 군중을 떠나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그 비유의 뜻을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도 그토록 깨닫지 못하느냐?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1152943D4D39B8891C)
영적독서 : 내어줌에 대하여 (On giving)
당신은 내어주는 기쁨을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나는 당신이 풍요로운 가운데 베푸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이 아낌없이 자신을 내어 주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베푼 것에 담긴 당신의 사랑이 가장 중요합니다. 주는 것은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당신이 남긴 것을 주는 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나눔의 의미를 느낄 때까지 부족한 가운데서도 베풀 수 있기를 바랍니다! “1주일 동안 담배를 끊었습니다. 담배를 사지 않고 아껴둔 돈을 보내드립니다.” 이는 틀림없이 엄청난 희생이었을 것입니다. 나는 그 돈으로 빵을 사서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주는 이도, 받는 이도 큰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고통 받는 가난한 이들에게 친절하십시오. 한없이 친절하십시오. 우리는 그들이 무엇을 겪어냈는지 모릅니다. 서로 진실하게 대하며 용기를 내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시다..........<마더 데레사,「이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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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연중 제5주간 수요일(2019-02-13) I 말씀 묵상방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cfs12.blog.daum.net%2Fimage%2F7%2Fblog%2F2008%2F08%2F08%2F23%2F22%2F489c56693dddb%26filename%3Dda_icon01.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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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께서는 인간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에게 숨을 불어넣으시어 생명을 주셨다. 창조주께서는 사람에게 아름다운 정원을 자유롭게 이용하도록 하시고는 당신께 대한 순종의 여부를 시험하셨다. 사람은 선한 것과 악한 것을 자기 마음대로 정할 수 없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따로 개인적으로 말씀의 뜻을 설명하시면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가르침을 비판하셨다. 정말로 깨끗한 사람은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다. 정결 예식의 참된 뜻을 깨닫지 못하는 한, 정결 예식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정결 예식의 의미는 사람들에게 모든 악한 지향을 버리고 마음을 깨끗이 하도록 하는 것이다(복음). |
<말씀묵상-1> : † 예수님의 윤리와 양심 법에 어긋난 시대의 역설들
조상들의 지혜와 슬기로 생겨난 전통들이 우리에게까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은 대단히 값진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전통을 준수하고 지키는 것은 그 사회를 존중하는 것이며 때로는 이롭다.
그러나 오랜 전통을 지킨다고 해서 스스로 자신을 두고 선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선하다’라고 스스로 자부하는 우리의 위선과 가면을 성실하게 벗겨 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나아가 그 전통들이 한낱 인습에만 매달려 천륜과 인륜을 어기는 일이 있다면 개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아무리 좋은 전통이라고 해도 그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법이 파손된다면 그 전통은 쇄신되거나 부정(否定)되어야 한다고 본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 당신 반대편에 있는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음식 먹기 전에 손을 씻는 인습(1-8), 코르반에 대한 비판(9-13)에 이어 ‘금기 식품’에 대한 이스라엘의 형식적인 전통주장들을 비판하시고, “사람 밖에서 몸 안으로 들어가 그를 더럽힐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그를 더럽힌다.”(마르 7, 14-16)고 하시면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마음이라는 것을 예수께서 밝히신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정결례가 아닌 새로운 윤리를 말씀하시는데,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히는데, 마음의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7, 20-23)고 하신다.
예수님의 윤리는 양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사실 우리 인간의 행동의 모든 방향과 계획은 양심에서 나온다. 마음의 굴절, 편견, 거짓과 위선적인 사회일수록 사람을 차별하고, 특권층과 소외층, 억압자와 피억압자를 낳는다. 당시 이런 사회는 만연하였지만 새로운 윤리를 말씀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불결해지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으신다.
그런 예수님의 태도는 오히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걸림돌이 되고 갈등을 낳는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오류를 인내로 참아주시지만, 거짓과 위선은 가차 없이 단죄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의 윤리야말로 안전한 윤리이며 겉모습이 아니라 양심을 중요시 여기시며, 마음을 덮고 있는 완고한 가면마저 벗겨 내신다.
예수님의 윤리와 양심 법에 어긋난 시대의 역설들은 우리들 가운데에서 잔재하여 우리들 시야를 어둡고 흐리게 하고 있다. 사람과 건물이 높아졌지만 우리 인격도 그만큼 높아졌는지? 고속도로는 넓어졌지만 우리의 시야도 그만큼 넓어졌는지? 과거 어느 때보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기쁨도 그만큼 많아졌는지? 학력과 지식은 높아졌지만 상식과 판단력 또한 그만큼 높아졌는지? 전문가들이 많이 늘어났지만 그만큼 세상 문제는 줄어들었고, 약은 많아졌지만 양심은 그만큼 맑아졌는지? 아니면 너무 분별없이 향락에 빠지고 소비는 늘어나지 않았는지, 너무 성급히 화를 내며, 너무 드물게 기도하지는 않습니까?
우리는 시간 속에 삶의 의미를 더 깊게 배우고 넣는 법도 배워 익혀야 한다. 달도 갈 수 있는 시대라고 하지만 우리 반대편에서 인생길을 외롭게 가는 이웃들에게 사랑과 평화의 선물도 나눠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주를 정복했고, 공기 정화기는 갖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 안의 세계는 더욱더 회복하고 영혼의 오염은 더욱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말씀자료 : 박기흠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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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2> : † 정결한 마음에서 정결한 생각, 정결한 행동이 나온다
여러분, 카나의 혼인 잔치를 기억하십니까? 그 잔칫집 입구에 돌 항아리 6개가 놓여져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 항아리 6개에 물을 담게 하셨고, 이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카나의 혼인잔치집 뿐 아니라 모든 유다인들의 집에 입구에는 이렇게 항아리가 놓여져 있습니다. 이 항아리에 담긴 물을 먹기도 하고 씻기도 하였습니다. 특별히 외출하고 돌아온 뒤에, 음식을 먹기 전에는 꼭 손을 씻었습니다.
예전에 감기약을 선전하는데 “감기에 안 걸리려면?” “일찍 자요, 손을 씻어요” 그래도 감기에 걸리면 “감기약이 있지요”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이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건강하게 살도록 손을 자주 씻으라고 하셨습니다.
요사이 우리들은 왜 손을 씻어야 하는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병을 옮기는 병균이 손에 많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손에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수많은 균들이 살고 있답니다. 오래 전 TV에서 ‘미지의 세계’란 것이 방영되었는데 지구의 인구보다 더 많은 균들이 우리 몸에 살고 있다고 합니다. 손을 씻으면 많은 균들이 씻겨 내려간답니다. 그러나 1-2시간 지나면 다시 증식하여 그만큼 된답니다. 이러한 사실은 현미경이 발견되면서 알려진 것입니다.
그러나 예전에 현미경도 없고, 병균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백성들에게 설명하실 수가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손을 자주 씻어라.” 말씀하셨습니다. “옷을 자주 빨아 입어라. 시체를 만지지 말고, 혹시 만졌으면 빨리 손을 씻고, 옷을 빨아라. 문둥병 같은 병은 병균에 의하여 전염되니 병에 걸린 사람들은 격리 수용하도록 하여라 말씀하셨습니다.”
유다인의 성경학자들, 즉 율법학자들이 모여서 하느님의 말씀을 잘 지키기 위한 세부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이 613가지의 규례(세칙)가 되고, 전통이 되고, 조상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달되는 전통이 되었습니다. 이 규례들을 쉽게 풀어 쓴 것을 모아 놓은 책이 탈무드가 되었습니다.
이 규례 가운데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도록 규정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음식을 먹는데 규정을 어기고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입니다. 이를 본 예수님께서 “애들아, 그렇게 하면 어떻게 하니, 손을 씻고 먹어야지” 하셔야 하는데 보시고도 아무 말씀을 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며 사는 바리사이들이 이를 보고 예수님께 따져 물었습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밖에서 사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무엇이든 그를 더럽힐 수 없다는 것을 알아듣지 못하느냐? 그것이 마음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배 속으로 들어갔다가 뒷간으로 나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모든 음식이 깨끗하다고 밝히신 것이다. 또 이어서 말씀하셨다. “사람에게서 나오는 것, 그것이 사람을 더럽힌다. 안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쁜 생각들, 불륜, 도둑질, 살인, 간음, 탐욕, 악의, 사기, 방탕, 시기, 중상, 교만, 어리석음이 나온다. 이런 악한 것들이 모두 안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힌다.”
이 말을 들은 바리사이들은 심히 마음이 상해서 돌아갔습니다. 이런 일이 있은 후에 예수님께서 제자들, 군중들에게 “그들을 내버려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이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앞을 볼 수 없는 눈먼 사람이 어찌 앞을 볼 수 없는 눈먼 사람을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앞을 볼 수 없는 사람은 결코 남의 길잡이, 인도자가 될 수 없습니다. 둘 다 구덩이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철저하게 지키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신앙의 길, 생명의 길, 구원의 길을 가르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앞길도 볼 수 없는 영적 소경입니다. 그러면서도 앞을 볼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길잡이요 인도자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구원에 이르지 못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구원에 이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들도 망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도 망하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굽게 잡고 있으면, 율법을 알고 철저하게 지키면 생명의 길로 간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구원을 받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구원에 있어서, 생명에 있어서 잘 못 알고 있는 것입니다. 잘못 알고, 잘 못 믿고, 잘 못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바리사이들만큼 철저하게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단 한번이라도 안식일을 범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결코 부정한 음식을 입에 대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헌금하는 일, 기도하는 일, 자선하는 일, 단식하는 일 등을 힘을 썼습니다. 우리 가운데 이렇게 철저하고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심한 책망을 많이 들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 무덤, 위선하는 자 그리고 오늘 말씀에는 눈먼 이(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칭찬을 하시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데 도리어 심하게 꾸짖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구원의 길, 생명의 길, 영생의 길을 알고 나면 책망을 받는 것이 마땅함을 알 수 있습니다.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이라고 비난 받는 것이 마땅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이솝 우화에 개구리와 황소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늪이 있는 초원에서 놀고 있던 개구리들이 갑자기 들어온 황소 때문에 많이 밟혀 죽었습니다. 살아남은 새끼 개구리가 이 무서운 소식을 가지고 엄마 개구리에게 달려갔다. “엄마, 너무 무서워요. 그 놈은 아주 큰 놈이었습니다.” “커다랗다고? 이만하더냐!” 엄마 개구리는 숨을 들이 마시며 자기 몸을 한껏 부풀게 하였습니다. “아니요, 그 보다 훨씬 더 컸어요.” “그럼 이만 하더냐?” 다시 숨을 들이마셨습니다. “엄마, 그 보다 훨씬 더 컸어요. 무지 무지하게 컸단 말이예요” 화가 난 엄마 개구리는 숨을 더 들이마시면서 “이만하더---” 그만 배가 터져서 죽고 말았습니다.
이 우화가 주는 교훈은 - 아무리 숨을 들이마셔도 개구리는 황소 만해 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태산이 아무리 높아도 하늘 아래 봉우리 입니다. 호박에도 색을 칠해도 수박이 될 수 없고, 걸레를 아무리 빨아도 행주가 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이 아무리 의롭게 살아도, 진실하게 살아도 하느님 앞에 이를 수 있을 만큼 의로와 질 수 없고, 진실해 질 수 없고, 완전해 질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안식일을 지키고, 단식하고, 자선하고, 착한 일을 하고, 율법의 모든 내용을 지킨다고 하여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의롭고, 보통 사람들보다는 정직하고, 세상 사람들보다는 온전하지만 하느님 앞에 이를 수 있을 만큼, 하느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 만큼 의롭지 않고, 정직하지 않고, 온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로마서를 통하여 분명하게 선언하셨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율법이 말하는 것은 모두 율법 아래 사는 사람들에게 해당됩니다. 그래서 모든 입은 다물어지고 온 세상은 하느님 앞에 유죄임이 드러납니다.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완전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구원함에 이르렀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세리와 창녀를 죄인이라고 비난하였습니다. “하느님 우리들이 저 더럽고 추한 세리와 죄인과 같지 않음을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까지 드렸습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음으로 율법을 어긴 예수님의 제자들을 비롯하여 단식하지 않는 사람, 자선하지 않는 사람,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꾸짖고 비난하고 단죄하였습니다. 의롭다고 생각하는 그들은 어느덧 남을 판단하고 단죄하는 하느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이러한 바리사이들은 소경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함을 받고, 어떻게 하여야 하느님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는 무지한 소경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은 바리사이처럼 율법을 지킴으로, 자신의 행위로는 결코 받을 수 없습니다. 로마 3,21에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즉, 하느님 앞에 이르는, 하느님 앞에 당당히 설 수 있을 정도로 의롭게 되는 길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느님이 값없이 주시는, 우리의 더러운 죄를 사죄하시는, 우리의 추한 죄를 용서하시는 은혜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율법을 하느님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율법으로 하느님 앞에 설 수 없다면 하느님께서 왜 율법을 주신 것입니까? 로마 3,20에 “어떠한 인간도 율법에 따른 행위로 하느님 앞에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통해서는 죄를 알게 될 따름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보듯이 우리들이 얼마나 추한 죄인입니까? 우리들이 얼마나 불완전합니까?...우리들이 힘쓰고, 노력해도 결단코 하느님 앞에서 설 수 없는 존재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도록 율법을 주신 것이라는 뜻입니다.
죄인임을 깨닫고, “하느님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하느님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하느님 앞에 나오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씻어 주시고, 우리의 허물을 감춰 주셔서 우리를 의롭게 하여 주십니다. 우리를 정결케 하여 주십니다. 하느님 앞에 담대히 나아갈 수 있도록 우리를 새롭게 하여 주십니다.
마치 카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화되는 것처럼, 더럽고 추한 죄인들이, 하느님 앞에 감히 설 수도 없고, 하느님을 바라 볼 수도 없는 죄인들을 의롭게 하시고, 정결케 하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되게 하십니다. 천국 백성,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바리사이들처럼 행함으로 받지 못합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것처럼 공덕으로 받지 못합니다. 요사이 탁닛한 스님이 한국을 방문하여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베트남 사람으로 프랑스에서 명상 수련원을 통하여 현대인들에게 평안함을 준 분 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명상으로 죄를 씻지 못합니다. 마음에 평안을 줄 수는 있지만 하느님의 나라에 이르지는 못합니다.
죄 씻음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용서하시는 하느님,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부족하고, 다 죄인이고, 다 불의하지만 하느님의 향한 믿음을 보시고, 겨자씨만한 아주 작은 믿음이라 할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사는 자들을 어여삐 여기시고, 자비롭게 여기셔서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사죄의 은총, 하느님의 은혜로 우리가 의롭다고 함을 얻는 것입니다.
세상에 영적인 소경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행함으로써 의롭다라는 평가를 얻으려는 바리사이들은 분명히 영적인 소경입니다. 초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할례를 받아야 합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구원함을 받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켜야 됩니다..라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셨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을 믿는 자,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이요 구세주이심을 믿는 자들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예수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과 하느님의 은총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게 되는 은총 -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그 이상이거나 이하이면 다른 사이비 말입니다.
믿어야 하지만 할례도 받아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은 다른 복음입니다. 믿어야 하지만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유대인들의 주장은 다른 복음입니다. 초대 교회 때에 헬라 철학의 영향을 받아서 믿어야 하지만 지식이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를 영지주의라고 하는데 역시 다른 복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천사도 믿어야 한다. 그의 어머니 마리아도 믿어야 한다면 역시 다른 사이비 종교의 말입니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모 마리아를 율법과 계명에 의거 어버이를 공경하듯이, 공경의 대상으로 가르치고 있을 뿐이지, 예수님과 같은 선상에서 믿으라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런데 공연히 시비거는 무리들이 잡설을 해댑니다. 그런 잡설을 해대는 무리들은 다른 복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전부를 잃는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은 맞는 말입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하여 아침마다 테니스를 칩니다. 아침 운동 때에 안식일 교인들이 많이 나옵니다. 사람들이 신사입니다. 진실합니다. 명랑합니다. 60대가 되신 남자 분이 계신데 배가 하나도 안 나왔습니다. 돼지고기를 먹지 않아서 그렇다고 말합니다. 안식일 교인들은 유대인들의 안식일인 토요일을 지킵니다. 안식일 교인들은 구약에 나오는 율법을 따라 돼지고기, 장어 등을 먹지 않습니다.
본인들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에 명시된 과월절을 지키지 않고, 초막절을 지키지 않고, 오순절을 지키지 않습니다. 율법의 가르침대로 할례를 행하지도 않습니다. 안식일 교인들에 의하면 율법을 따라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데 건강에 그렇게 좋다고 합니다. 그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합시다. 그러나 건강에는 좋을지 모르지만 결코 그것으로 구원함을 얻지는 못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교회에서는 율법이 폐하여졌음을 선언하였습니다. 할례를 행하지 않아도 되고, 돼지고기를 먹어도 되고, 장어구이를 먹어도 된다고 허락하였습니다. 이렇게 결정한 것은 할례 받는 것이 짐이 되어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할까! 늘 돼지고기를 먹고 살았는데 그것을 먹지 말라는 것 때문에 예수님 앞에 나오지 못해서 구원을 받지 못할까!... 육신의 건강에 안 좋을지 몰라도, 그의 영혼, 생명을 구원하기 위하여 다 허락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제물이 되셨고, 예수님의 속죄의 피를 통하여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우리가 먹는 것으로, 할례 받음으로, 행함으로 구원함을 받는다면, 우리 스스로 구원함에 이를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돌아가셔야 했습니까?
칼라 2,21에서 “나는 하느님의 은총을 헛되게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율법을 통하여 의로움이 온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선언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안식일 교인들이 점잖고, 진실하고, 율법을 잘 지킨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교리는 다른 복음입니다.
안식일 교회나, 여호와의 증인이나 출발이 비슷합니다. 1992년 10월 28일 주님 재림하시니 다가올 미래를 준비하라고 외치며 주님의 오심을 기다렸던 다미선교회처럼 언제 주님이 오시니 기다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미선교회에 그랬던 것처럼 그날에 주님이 오시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추종자들이 떠났습니다. 오늘날도 다미 선교회에 사람들이 남아 있는 것처럼 그 때에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을 모아놓고, 성경을 자신들에게 맞도록 해석하고, 교리를 수정하여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 교회, 그리고 여호와의 증인이란 교단이 생겨난 것입니다. 이 모두에게 분명한 것은 다른 복음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눈먼 자(소경)가 되어 소경을 인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믿음을 갖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바른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내 놓고, 사랑하는 남편을 전쟁터에 보내 놓고, 새벽 일찍 일어나 목욕 재개하고, 큰 느티나무 밑에다 정한수를 떠 넣고 간절히 기도하는 어머니! 얼마나 경건함이 있습니까? 우리보다 더 경건합니다. 우리보다 더 진실합니다. 우리보다 더 순수합니다. 그러나 경건함이 있다고, 진실함이 있다고, 순수함이 있다고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바른 믿음이 아닙니다. 역시 소경의 길인 것입니다.
지금까지의 역사 가운데, 21세기인 오늘날, 우리 인생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소경이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천국, 낙원, 유토피아를 꿈꾸어 왔습니다. 자본주의가, 민주주의가 낙원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공산주의가 사람들을 낙원으로 이끌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잘 사는 낙원을 세우기 위하여 어떤 이들을 민주주의를 위하여, 어떤 이들을 공산주의를 위하여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과학이 우리를 낙원으로 인도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첨단 의술이, 기계 문명이, 인터넷 정보화가 우리를 더없는 행복의 나라로 이끌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생명공학에서 한 때 총애를 받던 일명 황우석 신화도 그 일례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삶을 편리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하고, 우리의 생명을 조금더 연장시킬 수는 있지만 결단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신령한 하늘의 복을 채워 주지는 못합니다. 모두가 소경을 인도하는 소경인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느님께서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 다른 구세주, 다른 복을 주시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십니다. 구원을 주십니다. 참 평안을 주십니다. 참 기쁨을 주십니다. 21세가 최첨단 과학, 기술, 정보화 사회이지만 21세의 희망은 역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더럽고 추한 마음(나쁜 마음)에서 더럽고 추한 생각을 하게 되고, 더럽고 추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한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정결하게 합니다. 정결한 마음에서 정결한 생각, 정결한 행동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정결한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영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총을 알고 감사하고 기뻐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나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기 위하여, 나를 하느님의 자녀로 삼으시기 위하여, 나에게 영광된 천국을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하늘의 영광 자리를 내어 버리시고 죄 많고, 눈물과 근심과 아픔이 있는 인간의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나의 더럽고 추한 죄를 씻어 주시고 가리워 주시기 위하여 기꺼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손과 발에 못이 박히고, 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서지는 아픔 겪으며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서서히 죽어가는 십자가를 향하여 기꺼이 걸어가셨고, 기꺼이 자신의 생명을 던지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사랑과 아픔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함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주님 앞에서 어떻게 사는 것이 당연하겠습니다.
갈라 2,20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위하여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 주님을 귀하게 받들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
우리 마음 속에 주님을 향한 사랑,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 나를 대신하여 돌아가신 주님을 향한 찬양이 충만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내가 (무엇 무엇을 했더니….) 의로워졌다고 생각하지 말고, 나를 무조건 불러주시고 구원하여 주신 은총에 감격하여 감사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처럼 내가 율법을 지켰으니 의로와졌다고 생각하지 말고, 더럽고 추하지만 나를 올바르게 하신 하느님께 감사함으로, 사랑함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말씀대로 살아가게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속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을 향한 사랑과 감사함이 충만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한 마음, 감격한 마음으로부터 감사한 생각을 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되기를 주님으로부터 받은 영적인 마음으로부터 영적 생각, 영적 생활을 하게 되기를 기도드립니다...............◆
[말씀자료 : --- 신부 / 편집 : 까따꿈바 묵상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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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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