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유전 교단전전
내가 초등학교 4학년 겨울 방학을 앞둔 때였다. 담임 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종이 재질 좋은 인쇄물을 한 장씩 배부했다. 이걸 방학 들기 전까지 외워야 한다기에 나는 하룻밤 새 다 외워 갔다. 이튿날 나는 친구들 앞에서 한 자도 더듬지 않고 다 외웠더니 선생님은 과연 반장답다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게 다름 아닌 당시 권부의 통치 이념 근간으로 삼은 ‘국민교육헌장’이었다.
그 인쇄물 상단에 칼라로 무궁화가 선명하게 그려져 있던 기억이 난다. 당시 교과서 수록 사진은 모두 흑백이라 칼라 사진을 보기가 어려웠다. 단 미술책은 일부가 칼라였지 싶다. 국민교육헌장은 유신과 그 이후 신군부 집권 때도 국경일 기념식이나 학교 행사 의식에 빠지지 않고 낭독했다. 내가 교단에 서니 모범 교원에게 매년 스승의 날과 국민교육헌장 선포일을 즈음 상을 주었다.
그러고 이태 뒤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 이전까지는 시험을 거쳐 중학교로 가 모두 다 갈 수 없던 상급학교였다. 월사금 뒷받침이 되어야했고 성적도 일정 수준 이르러야 진학한 중학교였다. 선발고사를 거쳐 진학하다 무시험 진학이니 그 이전 초등학교 졸업생까지 한꺼번에 몰려 학급 인원이 60명이 넘었지 싶다. 또래보다 두세 살이 많은 형뻘들도 같은 학년 동급생으로 함께 다녔다.
중학교 2학년 때 우리나라 현대사에 굵직한 사건이 둘 있던 기억이 난다. 냉전 체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국에서 그해 여름 7․4공동성명이 발표되어 남북한 사이 일시 화해와 해빙 무드가 조성되는 듯했다. 그것도 잠시 그해 가을 10월 유신이 선포되어 박정희 정권 1인 장기 집권이 계속되었다. 언론은 통제되고 인권이 유린되는 국내 상황은 국제사회로부터 주목받는 시절을 맞았다.
이후 새마을운동이 펼쳐지고 산업화 과정에서 유보된 인권을 되찾아 민주화를 이룬 우리나라가 자랑스럽다. 앞서 내 소년기에 기억나는 두 차례 일을 소개함은 나의 성장 이력을 더욱 뚜렷하게 밝히기 위함이다. 이후 형제가 많은 빈농의 막내는 인근 도회지로 유학을 못 가고 고향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치고 대학 진학은 뒤늦게 하게 된다. 그나마 대학에 진학하게 됨만도 다행이었다.
학령 따라 정상 진학했다면 77학번이어야 할 대학이 3년이 늦은 80학번이 되었다. 그것도 고교 학비보다 싼 등록금으로 다닌 2년제 교육대학이었다. 재학시절 학군단 교육까지 함께 받아 졸업과 동시 예비역 하사로 전역하게 되었다. 그런데 졸업하던 그해 초등교사 임용 적체가 심해 1년을 기다렸다. 순조롭게 진학해 교육대학을 졸업해 마쳤을 경우보다 4년이나 뒤쳐진 교단 입문이다.
당시 신군부는 한때 졸업정원제를 시행해 편입학이 유명무실화 되었다. 시위에 적극 가담하는 대학생을 강제로 입영시켜 퇴출하려던 괴이쩍은 입시제였다. 그 시절 초등교사로 낮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밤엔 인근 도시 대학 야간강좌로 편입해 주경야독하는 선배가 있었다. 나는 졸업정원제로 편입학이 원천 봉쇄되어 예비고사에서 바뀐 학력고사를 봐 다시 대학 1학년부터 다녔다.
청운의 꿈까지는 아닐지라도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청년기를 보냈다. 밀양에 근무지를 두고 대구와 이웃한 대학 도시 경산으로 4년간 오르내렸다. 당시 한 방에서 지내던 선배는 오래 전 모교 교수가 되어 정년을 앞두고 있다. 나는 초등에서 중등으로 건너와 국어를 가르치는 교사가 되어 여기저기 전전하고 있다. 잠시 고성으로 옮겼다가 밀양으로 복귀해 창원에 생활근거지를 정했다.
공립 교사는 근무지역 연한이 있어 김해로 나갔다가 창원으로 돌아와 다시 만기를 채웠다. 작년 봄 거제로 오기 전 정년 잔여기간이 2년이야 하는데 출생신고가 늦게 되어 1년을 더 보탠다. 명예퇴직을 하려다 주변 지기들의 권유로 마음을 접었더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거제로 와 그렇고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다. 코로나가 세상을 바꾸어 놓아 화상 수업까지 해 보고 교단을 떠나려나. 20.04.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