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알고 계십니까?
당신이 사랑을 배신할 때 지구는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무섭죠? 그러니까 있을 때 잘 합시다.
'주식회사 사랑지킴'
- 이 글은 실화일 수도 있지요. -
* 기분 전환 삼아 단편 스토리 씁니다. 에효효. -.-;
* 제 글 읽어주시는 분들 항상 감사 드립니다.
친구 K는 더 이상 아무 말 하지 않고 빈 소주잔을 내밀었다.
나도 일단 주먹으로 한 대 때리고 나니 할 말이 없었다.
"이 쉑! 술이나 한 잔 받아라. 끌끌."
"후우~."
그는 며칠 전 갑작스레 결혼했다. 중고시절을 거쳐 대학도 같은
전공, 군대도 우연으로 같은 대대였기에 -쉽게 말해 '졸라' 친했
기에- 그가 여자를 사귀고 있었음은 알고 있었다. 허나 항상 파
멸은 한순간에 찾아오는 법. 나름대로 사회 생활에 있어서 신뢰
를 쌓아왔던 그는 이렇게 친구들 하나도 모르게 아주 급히(!) 결
혼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 '불결한' 인간이자 '불쌍한' 인간
이며 '운도 지지리도 없는' 인간이 되어버렸다. 뻔한 사건 전개이
었다.
드라마, 영화에서도, 심지어 세대를 초월해 '사고'라는 단어만으
로 다른 설명 필요 없이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스토리' 아니겠나. 난 앞에서 연신 소주를 들이키는
그에게 조용히 말했다.
"괜찮아. 애 낳고 행복하게 살면 되지. 임마. 학부형은 아무나 되
는 게 아니야."
"으아아아! 그런 게 아니라니까아아안!!"
연말이라 호프집은 시끌시끌했다. 그 모든 소리를 뚫으며 울리
는 친구 K의 목소리는 정말 우습게도 '슬펐다.' 고함 소리에 놀
랐던 사람들이 다시 제 할 이야기를 하며 떠들 때까지 친구 녀
석이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고 엉엉 우는 것을 멍하게 지켜봤다.
이 쪽을 바라보는 점원들의 눈초리가 심상치 않았음을 간신히
깨닫고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걸었을 때는 이미 K는 소
주를 병째 들고 마셔대고 있었다.
"너는 믿어줘야 해. 정말 믿어줘야 해. 난, 난 다 기억하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하는 거야."
"알았어. 믿을게. 야! 술병 내려놔!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
야?"
"나, 나, 훌쩍. 이제 고작 29살 밖에 되지 않았잖아. 그런데, 그런
데."
친구는 정말 구슬픈 목소리로 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있잖아, 난, 결혼하기 싫었어. 그래서, 그래서 세계를 정복해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면 결혼하겠다고 했어. 그냥 아무 생각 없
이 말했던 것인데■."
***
말이 끝나기도 전에 승혜는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그녀의 스물
한 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사온 케이크가 조금 망가져 신경
질이 나 있던 난 승혜의 자그마한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정말 그런 것이면 나랑 결혼해주는 거야?"
"응? 오렌지 생크림 케이크인데 너무 아깝다. 어째 포장을 좀 시
원찮게 하더라."
"오빠!"
"어?"
"정말 세계 정복만 해주면 나랑 결혼해주는 거야? 그럴 거야?"
후배의 소개팅으로 만난 한승혜는 과분한 여자였다. 물론 이 과
분하다는 것의 의미에는 '나이 차'에 대한 고려만이 들어있을 뿐
어딜 가나 흔히 볼 수 있는 보통 키에 보통 몸매에 그런 평범한
여자였다. 하긴 그렇다해도 내 나이에 저런 귀여운 애인이 있다
는 것은 행복한 일. 오랜만에 바쁜 회사 생활 중에 짬을 내어 잡
은 저녁 시간에 앞에 앉아 있는 사랑스러운 연인의 얼굴을 바라
본 난 대화에 말려들고야 말았다.
"엉? 응? 결혼? 세계 정복?"
"방금 전에 오빠가 그랬잖아. 내가 세계 정복하면 나랑 결혼해주
겠다고. 그랬지?"
삶에 있어서 중요한 결정이란 게 무얼까. 왜 그렇게 나랑 결혼
하고 싶은지는 몰라도 대학 초년생인 승혜는 사귄 지 1년이 지
난 후부터 결혼에 대한 확답을 듣고 싶어했다. 나? 물론 외롭지.
부모님과 떨어져 객지 생활하는 나다. 아무 것도 요리하기 싫어
서 족발 시킬 때 나오는 깻잎이나 오이, 손에 잡히는 대로 대충
썰어 넣고 미원에다가 고춧가루 듬뿍 푼 수제비나 끓여 먹는 나
에게 결혼이란 행복의 첫 관문일 것이다. 부모님과 함께 생활하
는 승혜이기에 어쩌다 가끔 만나도 일찍 집에 들여보내야 하는
이 심정. 어찌 결혼하고 싶지 않단 말인가. 하지만,
"결혼? 승혜야. 지금 네 나이가 얼만데 벌써 결혼을 해. 하고 싶
은 것도 많을 테고 내가 전부가 아니잖아."
"오빠는 날 사랑하지 않는 거구나. 그렇지?"
눈물이 글썽글썽. 오! 주여, 어찌 이 어린양을 험난한 세상에
내보내셨습니까? 승혜 옆자리에 서둘러 앉아 껴안아주었다. 오늘
아침에 드라이크리닝한 양복이지만 여인의 눈물 정도야 몇 톤이
쏟아져도 좋다. 품에 안겨오는 승혜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왜 널 사랑하지 않겠니. 사랑해. 정말 사랑해."
"정말? 날 사랑해?"
"응. 그럼~, 그럼~. 이렇게 귀여운 종달새를 누가 울렸어? 내가
때찌때찌 해줄까?"
***
"그만 입 닥쳐줬으면 정말 감사하겠네. 친구."
혈압이 오른다. 회사에서 돈줘서 받은 종합검진에서 고혈압 위
험이 있다고 이야기 들었는데, 이러다가 큰 일 나는 거 아니여?
K의 말을 끓을 수밖에 없었다. 이마에 손을 올린 난 자꾸만 잔
에 손이 가는 것을 억제하며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러니까 넌 너의 그 '귀여운 종달새'양에게 세계 정복을 해주
면 결혼해주겠다고 조건을 내걸은 것이군."
"그렇지!"
"야! 임마! 돈도 잘 벌겠다, 막내이겠다, 결혼하는데 도대체 무슨
문제가 있는데. 그냥 하면 되는 거 아니었냐?"
"내 집 근처엔 미녀 바텐더가 있는 바도 있고 가끔 연락이 오는
여자친구도 있어. 스포츠 마사지 잘해주는 집도 있고 말이야. 회
사에서 야근할 때 집에 늦게 들어가도 맘 편하고 일요일엔 늘어
지게 잠잘 수 있어. 그리고 귀여운 애인도 있어."
"그게 결혼 못할 문제냐? 정말 배부른 소리할래?"
"이 쉐이 보게. 귀여운 애인이랑 귀여운 마누라랑은 전혀, 네버,
이그젝틀리 다른 문제야! 결혼도 못한 녀석이 어른이 말하는데
토 달래?"
이러다가 누가 총각 딱지 먼저 뗐는지 말 나오겠군. 씩씩거리는
K에게 소주잔을 내밀었다.
"이야기나 하자. 그 종달새인지 참새인지는 넘어가. 부탁이다."
"흥."
한 번 더 날 노려본 친구는 술병이 비웠다며 소주 한 병을 더
주문했다.
***
더 놀고 싶다는 승혜를 억지로 들여보낸 후 집에 돌아온 난 일
거리를 찾아들고 맥주를 한 캔 땄다. 아무 생각 없이 골라든 CD
는 롤링스톤즈였다. 노랫 가사에 맞춰 흥얼거리며 문서를 작성한
후 잠자리에 드는 것. 모든 것은 일상에서 변함이 없었다.
적어도 신문을 들고 텔레비전을 키고 커피 한 잔을 끓여 마실
때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각국 정치 지도자는 이후 한승혜 마왕님의 세계 지배에 대해
깊은 신뢰를 표시했으며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유엔 사무총장
은~."
새로 받은 아침 신문에 마시던 뜨거운 커피를 뿜어본 것은 처
음 겪는 경험이었다. 부연하자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다. 텔레
비전에서 승혜의 어릴 적 사진과 현재의 사진, 기타 등등의 인적
사항이 베토벤 교황곡을 배경 음악으로 깐 화려한 영상으로 내
보내지는 것을 '것, 참~ 멋지군'이란 생각으로 보던 난 갑작스레
울리는 집 전화 벨소리에 놀라고야 말았다.
"오빠! 나 세계 정복했어요! 나랑 결혼해주는 것 맞죠?"
"승혜야. 이거 정말 재미있는 꿈이다. 그치?"
"백악관에서의 일은 다 끝났어요. 곧 한국에 도착할 거예요. 사
랑해요. 오빠. 조금만 기다려줘요."
"응. 일 잘 끝내고 와."
응, 응? 싱가폴 에어라인 1등석 타고 온다고? 좋겠네. 기념품
부탁해. 텔레비전에서는 국회의사당에 4년 계약직으로 묶여 있는
사람들이 여의도 공원에 모여 두 팔을 높이 쳐들면서 '마왕님 만
세~!'를 외치고 있었다.
"마왕? 세계 정복? 위대한 지도자라■. 커피나 마저 마시자."
그리고 난 다시 한숨 자겠어. 지금 몇 시야? 일곱시? 저기 푹
신한 베개도 있고 따뜻한 이불도 있네 그려. 이불 속으로 비집고
들어가 눈을 감았다. 참 푸근했다.
빌어먹을.
"난 왜 이럴 때 기절도 하지 않냐!"
우르르 아파트 복도를 뛰어내려가 주차장으로 한 달음에 도착
한 나는 뒤에서 부르는 수위 아저씨의 목소리를 들었다.
"어? 총각! 총각이 텔레비전에 나왔어! 이리 와서 봐!"
"아저씨. 저 출근합니다. 누가 찾아오면 회사 갔다고 하세요."
"응. 알았어. 어라? 그런데 마왕님? 마왕님이라니? 이게 무슨 소
리야?"
요란하게 차 소리를 내며 주차장을 빠져나온 난 서초 인터체인
지에 접어들었을 때야 지갑을 놓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리고 그와 동시에 연료부족 램프가 번쩍였다. 모든 것이 너무나
멋졌다. 정말■■ 너무나 멋졌다. 세상은 참 아름다웠다.
***
친구 K는 그 대목에 이르러 이상하다고 연신 고개를 갸웃했다.
난 담배를 빼물며 왜 그러냐고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아침 뉴스를 보고 사람들이 얼마나 황당했
겠어? 그런데 시내나 도로가 평온하더군. 그 수위를 제외하고 말
이야. 너도 모르잖아. 아침 뉴스에 나오기까지 했는데!"
"그래. 지금 막 만든 이야기이니까 어설픈 점들이 많겠지. 진부
하진 않다면 좀 구질구질하지 않냐? 사내답게 진짜 이야기를 털
어놔. 피임 실패했지? 짜식아! 여관에 비치된 콘돔엔 성질 더러
운 놈들이 구멍 뚫어놓는다고 몇 번이나 말했었냐. 쯧쯧."
"임맛! 나 결혼하기 전까지 승혜 손만 건드렸어!"
난 웃었다. 술잔을 들어 친구의 건강과 양심에 대해 건배했다.
"진짜라니까!"
문득 옛기억들이 떠오른다. 이 친구가 순수했던 시절들이 있었
지. 우리가 군대 갔다와서 복학했을 때 가장 신기했던 것은 비디
오방이었다. 대학가에도 유흥가에도 참 많이 있었다. 바로 그런
비디오방에서 저 친구와 마주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종로였던
것 같은데 물론 나도 커플이었고 그쪽도 커플이었다. 그 상황이
란 것이 참 묘한 게 다 같이 비디오방에 왔건만 난 친구 K를
두고두고 놀려먹을 수 있었다.
"화장이 지워져 있었지. 크하핫."
"오호? 그래? 그럼 그 때 본 비디오가 뭐였지? 아마 '개미'였을
거야. 한 번 내용 말해봐."
"하여간 83분짜리 영화였어."
"시간말고 내용을 말해봐."
친구 K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날 바라봤다. 때마침 비디오 테이
프를 골라 계산대에서 내미는 중이었기에 K는 나도 기억 못하
는 영화 제목을 아직도 기억했다.
"개, 개미가 한 마리 있었는데, 하필이면 배짱이 나라 공주랑 사
랑에 빠진 거야. 사랑에 빠져서■ 음, 그런데 그 배짱이 나라 공
주가 갑자기 마법에 걸려서 영원한 잠이 들고 말았지. 그 배짱이
나라는 온통 가시덩굴로 뒤덮였고, 그, 그 개미는 공주를 구하기
위해 신검을 찾아 여행을■■. 술이나 마시자. 여기 파전 참 맛
있네."
이 말을 하고 난 다음 난 우울해졌다. 결과적으로 그때 그 영화
를 같이 봤던 사람이 기억났다. 난 술잔을 들어 연거푸 들이켰
다. 친구 K는 씁쓸하게 미안하다고 했다.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래. 맞다. 그 일 때문에 같이 외박 나가서 사고 치고 같이 영
창 갔잖아. 난 미안할 일이 없지."
"이 새끼가!"
"술이나 마셔. 임마. 우리가 그때 술집에서 쌈박질만 안 했어도
한 학기 공으로 보내며 나중에 복학하지 않아도 됐어."
군대에서 애인이 고무신 거꾸로 신었을 때 이야기가 또 흘러나
왔다. 하지만 여기서 분명히 이야기할 것은 먼저 친 것은 내 친
구였지 난 아니었다. 곧 난 의자를 들었지만■. 2 대 2에서 시작
된 싸움은 곧 2 대 7으로 변했고 친구는 도망쳤다. 난 그 이야기
까지 끌어가고 이제 오늘 술값은 3차까지 이 녀석이 쏘게 만들
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친구는 콧웃음 쳤다.
"내 이야기 계속할까? 말까?"
"이 쉐이."
"이야기해? 말어?"
"해."
무서운 놈.
***
일단 부산으로 가려던 내 계획은 무너졌다. 배 타기는 글렀고
이제 남은 길은 될 수 있는 한 빠른 시간 내에 집에 돌아가서
필요한 현금을 찾아 잠적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차를 갓길에 세
워두고 멍하게 담배를 피우던 난 침을 뱉었다.
"내가 아침에 꿈을 꾼 것인가?"
일상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아침의 일을 모두 꿈이라고 하긴 너
무나 생생했다.
"친구들한테 전화나 해보자."
내가 핸드폰을 열어 통화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끼익 타이어
자국 남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보자 그 쪽에는
모범 택시가 한 대 서 있었다. 기름이 떨어져 멈춘 내 차 바로
옆에서 아저씨가 차 윈도우를 열고 내게 말을 걸었다.
"서울 시내로 안 가요?"
"가고 싶긴 하지만 지금 지갑이 없는지라■■."
수염이 덥수룩한 아저씨는 빙긋 웃었다.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거기서 돈 계산하면 되잖아요?"
"그래도 되나요?"
"그럼요."
난 내 차를 일단 놔두고 택시에 올라탔다. 그 친절한 아저씨는
정말 고맙게도 직접 견인차까지 불러주며 챙겨줬다. 대한민국에
이런 사람이 있을 줄이라, 진정 감탄했다.
"안녕하세요? 10시의 음악데이트, 최민주입니다. 요즘엔 결혼 시
즌이 따로 없다지요? 생각해보니까 겨울에 아름답게 내리는 눈
을 보며 결혼하는 것도 참 좋을 것 같아요. 여러분 생각은 어떠
세요? 자, 첫곡입니다. 이소라의 '청혼'."
라디오에선 귀에 익숙한 노래가 들렸다. 무언가 라디오의 멘트
가 어색했지만 넘어갔다.
"몇 살 이시우?"
"전 스물 아홉입니다. 호랑이띠죠."
"야~ 좋을 때네!"
차를 운전하던 아저씨는 뭐가 그리도 신이 나는지 노래까지 흥
얼거렸다. 뒷자석에 앉아 멍하게 있던 난 피식 웃었다.
"뭐가 그렇게도 좋으세요?"
"아, 이번에 내 딸이 유치원에 들어가거든요. 요즘 집에만 들어
가면 아빠아빠 하고 달려오고 그림도 그려주고 하지요. 지 어미
를 쏙 빼닮아서 얼마나 예쁜지~."
"좋으시겠어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백미러를 통해 눈이 마주치자 운전사는 툭
말을 던지듯 꺼냈다.
"아저씨는 길가는 아기들 보면 귀엽지 않나요? 난 그 나이 때
그랬던 것 같은데■."
"아기 귀엽죠. 후우, 요즘 유치원생들도 과외비가 수백이 넘는다
면서요? 그리고 초등학교 들어가면 왕따 당할까봐 걱정되고■.
요즘 중학생들은 인터넷 게시판으로 매춘까지 한다더군요. 용돈
이 부족해서요."
"그, 그게■."
난 별 생각 없이 말을 이었다.
"고등학교 올라가면 이제 본격적으로 대학교 준비해야지. 대학
안 간다고 하면 취업 준비나 기술 공부 시켜야 하지만 또 누가
알겠어요? 자기 인생 알아서 한다고 간섭하지 말라고 하겠죠. 대
학생 때는 또 이상한 길로 빠지지 않을까 걱정되겠고 대학 졸업
해서 회사 다닐 땐 결혼 문제로 피곤해지겠죠. 후유~. 쉬운 게
없는 것 같아요."
갑작스레 차 속도가 뚝 떨어졌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택시 기
사 아저씨도 나처럼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문득 무전기 같은
마이크를 들어 입에 댔다.
"한 선배님. 전 포기하겠습니다. 저로썬 역부족이에요. 무전 끝."
택시 기사는 마이크를 잡고 한참이나 기다렸다. 왜 차가 출발하
지 않느냐고 화를 내려는 순간 무전기에서 지직하는 소리와 함
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알았다. 다음 작전 진행된다. 무전 끝."
"예."
이해 못할 대화가 오고간 뒤 택시 기사는 차를 멈췄다. 당황한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기사는 뒤로 고개를 돌리고 말했다.
"여기서 내리세요. 돈이 없으면 태워드리지 못합니다."
"아깐 된다고 했잖아요?"
"그런데요, 아저씨. 정말 애 키우는 건 쉽지 않겠죠?"
이해 못할 이야기만 하는 택시 기사에게 드디어 난 화를 내기
시작했다.
"도대체! 사람 가지고 노는 겁니까? 따불로 드리면 되지요?! 어?
당신들 누구?"
그때 차 문이 벌컥 열렸다. 손 몇 개가 불쑥 들어와 나를 택시
안에서 끄집어냈다. 차에서 이끌려 내린 내 얼굴에 들이밀어진
것은 방송용 카메라였다. 리포터인 듯한 여자는 마이크를 내 입
에 들이대고 신나게 떠들었다. 그 옆엔 우스꽝스러운 인형옷을
입고 있던 남자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돌격! 즐거운 일요일! 최민주."
"한승운입니다."
양쪽에서 내 팔을 잡는 순간 펑 하고 폭죽이 터졌다. 흔히 보는
그런 캠페인걸들이 와아 함성을 지르며 먼지털이 같은 술을 흔
들었다. 곰돌이 인형옷을 입은 사내, 한승운은 내 어깨를 툭툭
쳐주며 카메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자, 오늘의 실험남 K씨입니다!"
"멋지네요~."
"뭐, 뭔■."
최민주라는 리포터는 내 팔을 잡아끌고 곰돌이 한승운은 내 등
을 밀었다. 울긋불긋하게 장식된 버스가 한 대 옆에 서 있었고
난 어리둥절한 사이 그 버스에 올랐다. 의자에 앉아 유치하게 생
긴 O, X 판을 들고 버스 주위를 돌아보는 순간 다시 큰 고함 소
리가 터져 나왔다.
"컷! 2분간 휴식입니다."
"나 물 좀 가져다 줘! 후욱. 정말 더운 날씨라니깐. 이런 인형옷
을 내가 왜 입어야 해!"
곰돌이는 덥다고 짜증부리면서 물을 연신 마셨다.
"아, 안녕하세요."
"예. 좋은 날씨죠?"
주위를 돌아봤다. 웃음을 머금고 있는 남자들이 날 쭉 둘러싸고
있었다. 나같이 판 2개씩을 들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저기 방송
국 카메라도 보인다. 이건 유추해보건데 무슨 연예프로 찍는 것
이었다. 난 진행 요원이란 딱지를 몸에 붙인 사람에게 다가갔다.
"뭐예요?"
"뭔가 착오가 있는 것 같은데, 전 여기 엑스트라로 지원한 적
이■!"
"촬영시작 10초전입니다!!!"
"저기! 난 아니라니깐!!!"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난 다시 끌려가 의자에 앉혀졌다. 버
둥거리는 나에게 리포터라는 최민주가 다가와 무시무시한 표정
을 지었다.
"당신, 이 방송 망치면 나 책임질 거야? 응?"
"도대체 무슨!"
"고!"
조명이 수십 개 켜지고 최민주는 고개를 불쑥 돌렸다. 어느 새
그녀는 가증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돌격! 즐거운 일요일! 그 첫 번째 시간입니다. 자~ 다 같이, 그
의 마음, 그녀의 사정!"
"와아아~!"
"자, 규칙은 다 아시겠죠? 묻는 말에 맞으면 O, 틀리면 X."
"가장 많이 맞춘 사람은 상품을 얻게 됩니다. 오늘의 상품은 바
로 이겁니다."
벤츠 S320. 자동차에 대해 잘 모르는 나였다. 하지만 상당히 비
싼 차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문제 1번!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과 한다. 틀리면 X, 맞으면 O!"
뭐, 뭐야?
"예! 정답입니다! 역시 멋진 분이 문제도 잘 푸세요."
주입식 교육의 승리라고 할까? 난 문제를 듣는 순간 O를 들었
다. 놀랍게도 나와 비슷한 상황에 있던 다른 남자들은 X를 들었
다. 최민주는 그 중 한 남자를 일으켜 카메라 앞에 세웠다.
"왜 X라고 생각하셨죠?"
"결혼이란 사전적 의미로 볼 때 당사자의 성적■심리적■경제적
인 결합을 뜻하는 중요한 행위이지만, 사회적으로는 사회의 기초
적 구성단위인 가정■가족을 형성하는 단서가 되며, 나아가서는
종족보존의 중요기능을 가지죠. 그러므로 모든 사회가 어떤 형태
로든지 혼인을 승인하고 이에 법적 규제를 하는데, 형태는 각 사
회의 경제적■종교적■민족적 요소에 따라 다릅니다. 첫 번째로
남자의 의사만으로 성립되는 혼인으로 약탈혼(掠奪婚)을 들 수
있습니다. 약탈혼은 한 종족이 부근의 타종족과 싸워 남자를 참
살하고 여자를 약탈하여 처로 삼으므로, 여자나 그 부모의 의사
는 무시되었다. 발해에 약탈혼의 풍습이 있었는데 이는 단지 혼
인과정에서 여자를 훔쳐가는 형식을 취한 것이므로 엄격히 약탈
혼이라고 하기는 어렵지요. 고려시대에는 처첩(妻妾)의 약탈이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과부약탈의 습속이 있었지만, 이것은 발해
의 혼속(婚俗)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 조선의 과녀(寡女)재가금
지제도 등에서 연유한 것입니■■."
그 사람은 정말 잘 외우고 있었다. 하여간 혼인의 형태를 세 가
지로 분류해가며 결국 현재의 결혼제도도 개인적인 의사를 존중
하고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에게 맹세하는 형태이지만 종전
까지의 제도와 그리 다른 점은 없다는 것이 그 사람의 논점이었
다. 맞는 말이었다. 돈 없으면 결혼 못하고 미래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여자나 남자나 서로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아직
도 돈에 팔려 결혼하는 사람도 있었고 사랑은 때때로 부정되었
다. 그런데■.
"이거 열 받네."
그렇지 않은가? 결혼이라는 이름으로 식을 올릴 때부터 싸우는
사람도 있다지만 이건 젊음에 대한 모독이었다. 아무리 생각이
거칠고 어리다고 해도 젊은 우리네에게는 열정이라는 것이 있지
않은가. 아쉽게도, 정말 아쉽게도 스스로 그 젊음을 포기하는 사
람들이 있다지만 난, 그리고 대다수의 우리들은 그러지 않았다.
그렇게 용기를■■ 잃지 않■았■다?
"후욱. 이제 그만 둡시다."
난 의자에 몸을 기댔다. 다른 사람들은 그런 날 물끄러미 쳐다
봤다. 갑자기 주위가 조용해졌다. 곰돌이 인형 옷을 입고 있던
한승운은 그런 나에게 씩 웃어줬다.
"우리 연기가 서툴렀나보죠?"
"아니요. 감사합니다. 이 버스는 아마도 인천공항을 향해 달리고
있겠죠?"
"그렇습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그보다 피곤하신 듯 하니 좀 조용하게 이야기하죠. 어이, 정리
좀 하지. 뜨거운 커피■, 커피 드십니까?"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커피 한 잔 가져
다 줘.' 승운의 목소리가 끝나자 주변은 다시 웅성웅성 소리가
들렸다. 최민주라는 여자는 날 부축해서 뒷자석 조용한 공간으로
옮겼다. 의자에 앉아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커
피믹스였다. 최민주는 미안하다는 듯이 고개를 반쯤 숙였다.
"우리 회사 사람들의 입맛이 좀 싸구려라서요. 이런 것 밖에 없
네요."
"괜찮습니다. 상황 설명 부탁할 수 있나요?"
"상황설명이라■. 혹시 버터플라이 효과에 대해 아십니까?"
"버터플라이? 나비? 잘 모르겠는데요."
"뭐라 설명을 해야 하나■."
한승운과 최민주는 서로 난감하다는 듯이 바라봤다.
"민주씨, 이런 건 민주씨가 더 잘하지 않나?"
"한대리님. 난 이런 것 신입사원연수 받을 때 배우고 그 이후로
머릿속에 떠올린 적이 없다구요. 선배님이 하시죠."
"상관 말을 안 들어요? 이것도 자주 해봐야 연습이 됩니다."
"연습은 선배님도 하셔 야죠."
"전에 필리핀에서도 내가 설명했잖아! 이번엔 당신이 좀 해봐!
맨날 사고쳐서 나까지 시말서 작성하게 만들지 말고."
"뭐시라? 그 필리핀에서 화산 폭발 일어나게 만든 사람이 어디
사는 누구시더라?"
둘은 내 앞에서 말다툼을 시작했다. 그저 듣고 있어도 재미있었
다. 엘에이에서 지진 난 것은 최민주라는 사람이 커피 마신다고
연인의 이별장면을 놓쳐서 설득을 하지 못해 일어난 것이었고
필리핀에서 화산이 폭발한 것은 어떤 꼬마가 눈물 흘리며 어머
니랑 생이별할 때 술에 취해 입양하려는 사람의 차를 너무 늦게
멈추게 했음에서 비롯되었다. 난 진지하게 고민했다.
"혹시, 두 분 테러 조직에서 일하십니까?"
순간 말싸움을 멈추고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한승운과 최민주
는 부산스럽게 명함을 꺼내 나에게 건넸다. 나도 반사적으로 내
명함을 꺼내 교환했다. 그리고 읽었다.
"'주식회사 사랑지킴' 대한민국 지사 영업부?"
"상장 기업은 아니지요. 잘 모르실 겁니다."
홍보, 홍보! 이렇게 외치는 듯한 얼굴이었다.
"실례지만 무슨 일하는 회사입니까?"
최민주는 한승운이 자신을 떠밀자 한숨을 내쉬고 예의 영업용
미소를 띄운 채 말했다.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이 속담 아시
죠?"
"예. 알죠."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하시나요?"
"예?"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나요. 남녀간의 사랑이던 부모와 자식간
의 사랑이던 모든 사람들의 인연에는 특이점, 터닝 포인트가 있
어요. 문제는 사람들의 인연관계에서 무작위적으로 이런 요소가
발생하는 것이죠."
"어떤 요소?"
최민주와 한승운은 날 진지하게 바라봤다. 최민주는 조용히 선
언하듯 말했다.
"당신이 사랑을 배신할 때 지구는 멸망할 수도 있습니다."
***
친구 K는 말을 멈추고 다시 술 한 잔을 들이켰다. 난 좀 당황
했다.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지구가 멸망할 수도 있었다니■.
그게 도대체 뭔 뜻이지?
"내가, 말을 해도 되는 상황이냐?"
"말 해."
"일단 네 녀석이 하는 말을 다 믿는다고 할게. 그래. 뭐 그럴 수
도 있겠지. 그래서 넌 지구를 구하기 위해 널 희생한 거냐?"
"아니."
"응?"
소주를 한 병 더 시키며 K는 웃었다.
"아니야. 그때야 좀 놀랐고 이게 진실인가 싶었지만 솔직히 믿을
수가 없잖아. 그리고 그 이후로 난 인천공항에 도착할 때까지 혼
자 생각했어. 그 사람들이야 나중에 조사해보니까 평범한 결혼
정보 회사더라구. 의뢰를 받아서 그런 일을 한 것이 아닐까 싶
어. 문제는 나였어. 내가 자신이 없었던 거야. 그렇게 승혜의 큰
사랑을 받아낼 자격이 있던가 하는 생각이었어."
이제야 철이 좀 들었군. 난 잔을 들어 친구와 건배했다.
"공항에 가서 울먹이는 제수씨를 꼭 껴안아줬냐?"
"응. 그랬지. 미안하다면서. 이런 생각해. 남자가 결혼을 하기 싫
어하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두려움이 아닐까? 드라마나 영화
나 소설에선 다들 꿈 같은 행복을 안겨주잖아? 동화에서도 결혼
장면까지만 나오고 그 이후로는 안 나오지. '그저 행복하게 살았
습니다.'하고 말이야. 결혼은 현실이야. 두렵지. 어느 새 우리가
그것을 알아버렸던 거야. 동화에서 다루지 못할 정도로 결혼은
현실이야. 하지만 우린 좋은 핑계거리를 가지고 있지. 우린 젊어.
나이가 많이 들어도 젊은 거야. 죽기 바로 직전에도 젊어. 용기
를 잃지 않으면 아직 젊은 거야."
난 웃었다. 친구는 드디어 취했다.
"네 놈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많이 변했구나."
"후후."
술잔이 다시 한 번 오갔다. 난 친구와 함께 앉아 있다가 무언가
허전함을 느꼈다. 이미 친구는 많이 취해서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하고 있었다. 군대에서 축구한 이야기. 결국 이 녀석, 다시 한 번
나를 통해 자신의 용기를 확신 받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한 거
잖아. 그래도 친구라는 것이군.
"나 화장실 좀 다녀오마."
"그래."
화장실에 들어가 소변을 눌 때도 난 킥킥 웃었다. 남자들이란
이렇게 단순한 종족이었다. 나도 남자지만 수다를 떨고 싶을 때
가 많았다. 지퍼를 올리는 순간 난 생각이 떠올랐다. 맞다! 이야
기가 여기서 끝나면 안 돼지! 마왕이었다는 그 이야기. 난 뭔가
조급한 마음으로 변했다. 사라진 기억 속에서 무언가 꾸물거리고
올라왔다. 친구의 말을 들을 때 왠지 익숙한 느낌이었다. 난 그
때 분명히 우유를 한 잔 마시면서 뉴스를 봤다. 맞아! 그랬어!
나도 그 장면을 봤어!
"실례합니다."
"예? 예?"
"시간 좀 있으시죠?"
황급히 친구에게로 달려가려는 날 막아서는 한 남자가 있었다.
단정한 감색 정장을 입고 코가 좀 큰 남자는 시원스럽게 생긴
용모였다. 그 뒤에서 여자 둘이 나타났다. 짧은 커트머리의 여자
는 바지 정장을 입고 있었고 한 명은 조금은 길다 싶은 치마 정
장을 입고 머리를 길게 기르고 있었다.
"지금 좀 바쁜데요."
"잠시만요~. 저흰 이런 사람입니다."
남자가 나에게 준 것은 명함 한 장이었다. '주식회사 사랑지킴'.
자, 잠깐! 지금까지의 일이 모두 사실이었단 말이야?
"표정이 참 다채로우시군요. 맞습니다. 친구분이 하신 말씀은 다
사실입니다. 다만, 이제 그것을 잊어주셔야 하는 점이 중요하죠."
"어? 어?"
"자! 빨리 들어와요. 시간 없어요."
날 살짝 밀고 남자화장실로 성큼성큼 다가온 한승운은 뒤에 서
있는 여자들에게 손짓했다. 머뭇거리는 긴머리 여자의 손을 잡고
커트머리 여자는 화장실 안으로 들어왔다.
"우린 기억을 없애진 않습니다. 다만 고객께서 좀더 편안한 생활
을 영위하시기 위해 나쁜 기억들을 희미하게 만들 겁니다."
"왜 내 기억을 당신들 맘대로 조정합니까?!"
"그게 고객께서 원하는 것이니깐요. 고객께서 생활하면서 몇 번
이나 지구를 멸망시킬 뻔했다는 것을 알고, 또 앞으로도 그럴 수
있다는 일을 알면 고객께서는 못 견디십니다. 자, 김주희 과장님.
부탁해요."
"당신들 영업사원들은 참 일을 어렵게 한다니깐요. 고객님. 걱정
마세요. 제가 손으로 이마를 잠깐 짚으면 모든 것이 끝납니다."
긴머리 여자가 손을 내 이마에 짚었다. 차가웠다. 난 후 한숨을
쉬었다. 사랑이라~,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했던 그 모든 것
들은 아주 큰 의미가 될 수도 있었다는 것인가? 그래? 사람이란
결국 망각이란 도구로 아무리 크나큰 슬픔이라도 잊을 수 있다
는 것인가. 그래. 그렇겠지. 왠지 서글펐다. 그때 왜 그 자리에
이들이 없었지? 난 조용히 말했다.
"왜 그때 그 자리에 당신들이 없었죠? 내 사랑이 그렇게 쉽게
떠나가게 만들었죠? 당신들은 왜 그때 날 도와주지 않았죠?"
내 이마를 짚었던 긴머리 여자의 손이 멈칫했다. 한승운은 담배
한 대를 빼어 물었다. 커트머리의 여자는 내 뺨에 손수건을 대주
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렀나보다. 조금 창피했다.
"고객■, 아니 당신은 그렇게 힘들어했지요? 당신을 떠난 그 여
자분도 마음이 아프셨을 거예요. 이 일을 하다보면 조금은 느껴
요. 그 차이를■, 믿음이랑 사랑은 달라요. 당신은 사랑을 배신하
지 않았어요. 그 여자분도 믿음을 배신했어도 당신과의 추억, 사
랑을 배신하진 않으셨을 거예요."
차가운 손이 날 조금 진정시켜주었다. 다신 울지 않으리라 결심
했는데 또 생각이 떠올라 버렸다. 남자의 손바닥이 내 어깨를 툭
툭 두드려주었다.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주위는 어두워졌다.
"이거 하나만 알아주세요. 깊은 슬픔을 안고 세상을 바라볼 때
세상이 아무 것도 달라지지 않았어도 누군가, 당신이 모르는 사
람들이 당신의 아픔을 위해 한숨을 내쉬고 있음을■."
***
친구의 말을 종합한 결과, 저 자식은 신혼의 재미를 나에게 자
랑하기 위해 오늘 날 부른 것이었다. 이 바쁜 와중에! 난 손을
씻으며 결심했다. 오늘 저 녀석을 그냥 보내진 않으리라. 적어도
4차까지 간다. 세수를 한 후 거울을 바라봤다. 왠지 눈이 조금
붉어져 있었다.
"뭔 일이래■."
화장실 밖으로 나오자 어떤 여자 두 명과 남자 한 명이 서 있
었다. 그들은 날 잠시 바라봤다.
"음?"
모르는 사람들인데. 난 고개를 한 번 가볍게 끄덕였다. 그 사람
들도 나에게 가볍게 목례했다. 이 아가씨, 예뻤다.
"헤헤."
미녀에게 인사 받으면 기분 좋은 것은 당연지사 아닌가. 난 휘
파람을 불며 내 자리로 돌아갔다. 의자에 앉자 친구놈은 제수씨
와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응? 사랑하지, 우리 예쁜 종달새. 응. 금방 들어갈게."
"이 새끼가. 전화 끊어!"
"아~ 이 소리? 옆집 개가 짖나봐. 내 사랑하는 종달새, 무서워?
웅~, 뽀뽀! 조금 있다가 전화할게. 사랑해. 먼저 자. 웅? 혼자
자기 싫어? 금방 들어갈게. 응~."
"죽고 싶냐? 아니면 맞고 싶냐?"
헤헤 웃고 마는 친구 놈의 목을 잡고 장난을 쳤다. 난 문득 아
까 그 사람들이 서 있던 곳을 바라봤다. 어느 새 사라져 있었다.
뭔가 아쉬웠다. 후후.
"임마! 카드 내놔! 내가 그걸로 오늘 한 번 쏜다."
"내 카드로 네가 왜 쏴! 이거 놔!"
친구 K와 난 그 날 기분 좋게 취했다. 그리고 11시에 집에 들
어갔다. 덧붙여 말하자면 나중에 제수씨에게 난 미운털이 박혀버
렸고 케익을 하나 사들고 찾아 가야했다. 에이 씨! 나도 님이나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