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坤抱會 (곤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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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由 揭示板 (하고픈 말 마음대로) 스크랩 발로 쓰는 기행 /충효의 고장 예천
정대 추천 0 조회 17 08.02.24 19:0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발로 쓰는 기행 /충효의 고장 예천

 

독수리가 날개를 편 듯한 흑응산이 병풍처럼 감싸고 낙동강 지류인 내성천이 휘감아 돌고 있는 경북 예천은

임진왜란 당시 당쟁의 희생으로 모함에 빠져 이순신 장군이 죽음에 직면했을 때 선조에게 이순신 장군의 출중한

무예와 인격을 논하며 정유재란에서 백의종군 할 수 있게 했던 약포 "정탁" 대감을 배출한 충절의 고장이다.

명심보감 효(孝) 편에 전설처럼 내려오고 있는 효자 "도시복" 의 생가가 있는 명실상부한 효의 고장이기도 하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동쪽과 서쪽의 두 재(嶺)사이에 개재(介在)한다는 윤상(尹詳)의 기문이 있어 예로부터 
죽령과 조령 사이의 교통의 요지이며 전략상 요충지였던 예천은 농토가 비옥하여 쌀의 미질이 좋고 특히 양잠과  
참깨가 지역 특산품으로 전국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전형적인 농업 군(郡)이다.

 

오랜만의 화창한 일요일에 시간이 닿는 데 까지 예천주변을 나들이 하기로하고 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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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천의 명찰(名刹) 용문사를 가는 길 중간에 용문면 소재지가 있고 면사무소 옆이 첫 걸음으로 택한 "금당마을"

이다.용문면사무소 입구에 서있는 용도천문(龍跳天門) : 용이 하늘 문에서 뛰논다는 뜻을 자연석에 새긴 멋진

글씨가 눈에 띈다.이고장 출신의 서예대가 초정(艸丁) 권창륜(權昌輪) 선생의 글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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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사무소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국도변 삼거리에 서있는 십승지지 금당실(十勝之地 金塘室)이란 마을 표지석.

이 역시 초정 선생의 예서체 글씨다. 십승지지(十勝之地) 또는 십승지(十勝地)라 함은 

풍수지리에서, 전쟁이나 천재()가 일어나도 안심하고 있다는 군데의 . 흔히 피난지를 말하는데

 

경북 풍기의 금계촌, 경북 봉화의 춘양, 충북 보은 속리산 증정 근처, 경북 운봉 두류산,경북 예천의 금당동,

충남 공주의 유구·마곡, 강원 영월의 정동 상류, 전북 무주의 무풍동, 전북 부안의 호암 변산 동쪽, 경북 성주의

가야산 남쪽 만수동을 이른다.

 

일반적으로 은행나무가 서있는 마을을 금당실이라 부르는데, 이마을 역시 면사무소앞에 보호수로 지정된

400여년의 수령인 은행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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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당마을은 방사형으로 난 길에 정감어린 돌담을 쌓아 미로를 형성하면서 관광객들의 산책로로 인기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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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한 전통체험을 할 수 있어 도시의 생활에 찌든 몸과 마음을 잠시 내려 놓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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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집은 중앙의 초가로된 2층 누각이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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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 안에는 구한말(舊韓末) 법부대신 이유인(李裕寅)의 99칸 대저택이 있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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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외곽에 있는 "전통서예체험관"

이 고장 출신의 서예대가 초정 권창륜선생이 예천군의 지원을 받아 후학양성을 목적으로 세우신 것이다.

건물의 공사는 끝난 듯 보이고 현재 주변의 조경공사가 한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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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을 감싸고 있는 산등성이에서 바라본 전통서예체험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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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끝자락에 있는 금당실 송림.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있다.

예천 `금당실 송림’은 천재나 전쟁에도 마음 놓고 살 수 있다는`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한 곳인 이곳의 수해방지와

바람막이를 위해 조성된 숲이다.

금당실 서북쪽에 위치한 이 숲에는 약 800m에 걸쳐 소나무 수백 그루가 울창하게 조성돼 있다.

 

이 송림은 1863년 동학을 전파하던 최제우가 체포돼 처형되는 과정에서 큰 나무들이 일부 벌채되고 1894년

동학혁명 당시 노비구출비용 마련을 위한 나무 벌채로 훼손이 심각했지만,당시 법무대신이던 이유인이 금당실에

99칸의 집을 짓고 거주하면서  이 숲을 보호해왔다고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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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당실에서 용문사로 가는길을 따라 북으로 2킬로미터쯤 가면 울창하게 우거진 길가의 숲속에 자그마한 전통

기와집이 보인다. 이 기와집이 초간 권문해가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을 집필했다고 하는 초간정이다.

 

<대동운부군옥>은 은나라 음시부의 <운부군옥>을 본따서 단군 이래 선조 때까지 수천 년 간의 사실을 지리,국호,

성씨, 효자, 열녀, 수령, 선명, 화명, 금명 등의 유목으로 총망라하여 운자의 차례대로 배열해 놓은 일종의 백과

사전이다.  초간정(草澗亭)은  권문해(1543~1591)가 관리를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와 노년의 수양처로 지은

정자이다. 작은 계곡의 암반 위에 자리잡아 그 풍광 또한 수려하다.

 

초간이란 뜻은 당나라 시인 위응물의 시 중 '홀로 물가에 자라는 우거진 풀 사랑하노니(獨憐幽草澗邊生)'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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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정에는 정자 주위를 100번 돌면 과거에 합격한다는 전설과 관련된 흔적이 지금도 남아있어 색다른 흥미를

더해준다. 한 선비가 99번을 돈 뒤 현기증으로 난간 밖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게 되자 그 장모가 도끼를 들고 와

기둥을 찍었다고 한다. 정자 낭떠러지 쪽 한 기둥에 도끼로 찍힌 흔적을 지금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언 시내물이 흐르고 꽃이피고 단풍이 드는 계절이면 절경의 경치에 감탄이 끊이질 않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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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정에서 금당실을 지나 예천읍내 방향으로 가다보면 "병암정"이란 안내판이 보인다. 

안내판 아래에 "K.B.S 황진이 촬영장소"란 글이 눈에 띈다. 요즈음은 드라마 촬영지가 관광객들의 발길을 잡아

두기 때문에 저리하는가 이해를 하면서도 문화재 본래의 역사와 가치를 알리는데도 소홀함이 없어야 할 것 같다.

 

병암정의 연못은 우리의 궁궐이나 전통조경에서 보이는 천원지방 [天圓地方]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

는 개념으로 축조하였다. 네모진 연못과 중앙부의 둥근 섬이 그러하다. 때가 겨울이라 연못의 연꽃은 볼 수 없어

아쉬움이 남았으나, 활짝핀 연꽃을 머리속에 그려보며 바라보니 은은한 연꽃향기가 연못에서 풍겨오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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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촬영이 끝난 후 정자와 다리는 철거 되었다고 한다.격에 맞지 않는 것은 당연히 그리해야 되겠지만

"황진이"란 드라마를 나도 보았는데 그때 어디에 저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을까하고 생각했건만 그곳이

바로 이곳 병암정이라니...... ( 촬영세트가 설치된 빌려온 사진)

 

꽃잎 뿌려진 길을 걸어 황진이와 김은호가 데이트를 즐기던 곳,첫키스장면, 반지를 끼워주며

'오즉여, 여즉오(吾則汝 汝則吾)'의 사랑을 고백하던 장면, 마침내 이루지못한 사랑에 은호가 죽음을 맞던 장면.

드라마 '황진이' 초기방영분 중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이 그려지던 최고의 명장면, 흐뭇한 미소와 감동 그리고

눈물로 기억되는 바로 그 장면, 병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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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한 사랑은 목숨과 바꾸어도 아깝지 않다는 사랑의 절대힘,위대함을 보여준 죽음을 앞둔 은호도령의 독백이다.

이 생이 남 달리 짧았던 것은... 억울하지 않습니다 / 그대를 만나 마음에 담았던 시간 /

그 기억이 제게 있는데 억울 하다니요 / 당치 않습니다 / 허나 후회는.. 뼈 아픈 후회는 남습니다 /

그대를 더 많이 사랑 하지 못한것... / 세상이 친 덫을 내 손으로 걷어주지 못한것이 /후회스럽습니다/

그대가 나로 인해 너무 많이 울지는 않기를 바랍니다 / 눈물이 그대의 몫이 되길 원치 않아요/

차라리... 내가 그대의 외로움을 울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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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정은 처음에 구한말(舊韓末) 법부대신 이유인(李裕寅)이 세우고 옥숙정이라 하였는데, 예천권씨 문중에서

구입하여 병암정이라 고쳤다 한다.

깍아지른 암벽에 뿌리를 내린 잘 생긴 소나무 한 그루가 얼어 붙은 연못 탓일까 외롭고 쓸쓸해 보인다.

예천 권씨 문중의 소유인 병암정은 19세기 후반 정자건축과 조경양식 연구의 귀중한 자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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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암정에서 예천읍내로 들어와 28번 국도를 따라 영주 방면으로 향하면 예천 천문과학문화센터를 지나 좌회전

하여 3km정도 거리에 세금내는 부자나무 "석송령(石松靈)"을 만난다. 석송령은 나이가 600년 정도로 추정되며,

높이는 10m, 둘레는 4.5m이다. 나무는 밑동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 있어 전체적으로  우산모양을 하고

있으며, 곁가지의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곳곳에 돌로 된 기둥을 세워 놓았다.
주차장 건너편에서 얕은 뒷산을 배경으로한 석송령을 바라보면 마치 그자신이 작은 山인양 고고히 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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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송령은 마치 사람처럼 재산을 가지고 세금과 장학금을 내는 등 세계적으로 그 예를 찾기 어려운 나무로 우리

민족의 나무에 대한 생각을 엿볼 수 있는 문화적 자료로서의 가치가 매우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이 나무의 유래(由來)는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전 풍기지방에 큰 홍수(洪水)가 났을 때 석관천(石串川)을

따라 떠내려 오던 소나무를 주민들이 건져 지금의 자리에 심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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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8월 경에는 당시 이 마을에 살던 이수목(李秀睦)이란 사람이 영험(靈驗)있는 나무라는 뜻으로 石松靈

이라는 이름을 짓고 자기소유 토지 5,259㎡를 상속(相續) 등기해 주어 이 때부터 이 나무는 수목(樹木)으로서는
토지를 가진 부자(富者)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재산을 가지고 세금(稅金)을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1985년에는
새마을사업을 잘한다고 하여 故박정희 대통령(大統領)이 하사한 500만원으로 이 나무의 이름을 따서 장학회를

조직하고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여 장학금도 주고 있다.매년 정월 대보름에 마을의 평화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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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올려다본 석송령의 속살. 세월의 흔적이 곳곳에 스며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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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송령에서 오던길로 1km정도 되돌아 나오면 알카리 온천수인 예천온천이 있다.

하루의 여정을 마감하고 지친 나그네의 몸을 따뜻한 온천수에 맡긴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던가! 일요일이라

그런지 산악회회원들이며 관광객과 인근주민들로 욕탕안은 벌거숭이들로 꽉 차있다.

식인종 유우머가 생각나는 광경이다.

" 누가 내 밥을 물에 저렇게 많이 말아 놨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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