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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스크랩 산시역사박물관 3 - 중국의 신석기시대 ① 개관
눌인 추천 0 조회 205 07.12.05 22:0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산시역사박물관 3 - 중국의 신석기시대 ① 개관

 

19세기 초 덴마크의 C.J.톰센이 인류 역사의 99%이상을 차지하는 선사시대(先史時代)를 석기시대와 청동기, 철기시대로 구분한 바 있었다. 그 뒤 영국의 고고학자 J. 러벅은 〈선사시대 - Prehistoric Times〉라는 그의 책에서 석기시대를 구석기시대·신석기시대로 처음 나누었다. 구석기시대가 홍적세에 속하는데 반해 신석기시대는 충적세에 속하며, 구석기시대에는 타제석기만을 사용했던 데 비해 신석기시대는 마제석기를 사용한 것이 특징이며, 농경과 가축의 사육, 토기의 사용 등도 기준으로 꼽았다.

 

그 후 영국의 L. 브라운에 의해 구석기시대와 신석기시대의 사이에 과도적인 단계로서 중석기시대를 두는 것이 제창되었고, 20세기에 들어와서 중석기시대의 개념이 널리 쓰이게 되면서, 러벅이 주장한 '신석기시대'의 일부는 중석기시대로 분류되고 있다.

유럽, 아프리카 북부, 서아시아에서의 조사·연구의 진전은 홍적세에서 충적세로의 전환, 타제석기만에서 마제석기 출현으로의 전환, 그리고 수렵·어로·채집에서 가축사육·농경으로의 전환이 모두 동시에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밝혀냈다. 또 정교하게 만든 타제석기가 신석기시대를 특징짓는 것만은 아니며, 칼·화살촉·낫으로서 청동기시대에 들어와서도 중요하게 쓰였다는 사실이 판명되었다.

 

위에서 기술한 3가지의 전환 중 지질학적·석기제작기술사적인 구분이 아니라 경제사적인 기준으로 신석기시대를 정의하는 방법이 영국의 V. G. 차일드에 의해 제창되었다. 그는 앞의 구석기시대·중석기시대가 식량의 채집경제단계였던 데 비해 신석기시대는 식량의 지급자족을 위한 생산경제단계에 속하며, 산업혁명에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의 이 큰 비약은 '신석기혁명'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식량생산으로 생긴 여유는 전문기술자를 낳았으며, 계급의 성립, 도시·국가의 탄생을 촉진하게 되었다. 그러나 차일드에 의해 새로이 정의된 신석기시대의 개념은 범세계적으로 공통하여 적용되는 것은 아니었다. 식량채집에서 식량생산으로의 비약적인 발전이 지방에 따라서는 반드시 석기시대에 실현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즉 남시베리아의 알타이 지방에서는 청동기시대에, 연해주(沿海州) 등지에서는 철기시대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오늘날에는 신석기시대의 개념은 세계 각지에서 몇 가지의 의미로 사용되고 있으며, 이 용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곳도 있다.

 

산시역사박물관(陜西歷史博物館) 패널 - 2007년 10월 촬영

 

 

앙싸오문화(仰韶文化)

 

 하남성박물원(河南省博物院) 패널 - 2007년 9월 촬영

 

 하남성박물원(河南省博物院) 소장 앙싸오(仰韶)촌 출토 유물 - 2007년 9월 촬영

 

 하남성박물원(河南省博物院) 소장 앙싸오(仰韶)촌 출토 유물 - 2007년 9월 촬영

 

중국 황하 중류 지역의 대표적인 신석기시대 문화로서 河南省 승池縣 앙싸오(仰韶)촌에서 처음 유적이 발견됨에 따라 이름이 붙여졌다. 앙싸오문화(仰韶文化) 유적은 황하 중류 유역과 위(渭), 분(汾), 낙수(洛水) 등의 황하 지류(支流) 유역 등 이른바 중원(中原)지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는데, 동으로는 하남성(河南省) 동부, 서로는 감숙성(甘肅省)과 청해성(靑海省) 접경지대, 남으로는 호북성(湖北省) 서북지방, 북으로는 만리장성(萬里長城) 지대에까지 이른다. 이제까지 1,000여 곳 이상에서 仰韶문화의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대규모 발굴을 거친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10여 곳이 있다. 仰韶문화의 절대연대는 방사성탄소연대의 보정연대치에 따르면 B.C. 5000년기에서 3000년기에 해당한다.

 

 산시역사박물관(陜西歷史博物館) 소장 앙싸오(仰韶)기 유물 - 2007년 10월 촬영

 

산시역사박물관(陜西歷史博物館) 소장 앙싸오(仰韶)기 유물 - 2007년 10월 촬영

 

 산시역사박물관(陜西歷史博物館) 소장 앙싸오(仰韶)기 유물 - 2007년 10월 촬영

 

참고문헌 新中國的考古發現和硏究(中國社會科學院考古硏究所, 文物出版社, 1984)

 

롱산문화(龍山文化)

 

중국 신석기시대 만기(晩期) 문화로 1928년 山東城 章丘縣 龍山鎭 城子厓에서 처음 발견되어 이러한 이름이 붙었고, 1930년에 발굴되었다. 롱산문화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검은색의 광택이 나는 토기가 있기 때문에 과거에 ‘흑도문화(黑陶文化)’라고도 불리웠다.

 

최근까지의 연구에 의하면 롱산문화는 하나의 계통이 아니라 산똥롱산문화(山東龍山文化), 미아오띠꼬우 2기문화(廟底溝 2期文化), 허난롱산문화(河南龍山文化), 샨시롱산문화(陝西龍山文化)의 네 계통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 전형(前型) 롱산문화가 산똥롱산문화이다. 유적들은 주로 산똥지방에 분포하며 방사성탄소 교정연대로는 B.C. 2500-2000년에 해당하는데 위로는 大汶口文化를 이어서 아래로는 岳石文化를 열어준다. 미아오띠꼬우 2기문화는 예서(豫西)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방사성탄소 교정연대는 B.C. 2900-2800년 사이이다. 앙싸오문화(仰韶文化)를 계승하는 한편 중원지구의 조기 롱산문화를 열어준다. 허난롱산문화는 위시, 예북(豫北), 예동(豫東) 등에 주로 분포하며 방사성탄소 교정연대는 B.C. 2600-2000년 사이에 드는데 미아오띠꼬우 2기문화를 계승하면서 장차 二里頭文化로 발전하는 것이다. 샨시롱산문화는 ‘귀성주앙 2기문화(客省庄 2期文化)’로도 불리운다. 유적은 陝西省 涇水와 渭水 유역을 중심으로 분포하며 방사성탄소 교정연대는 B.C. 2300-2000년 사이이다.

 

토기에 있어서 뻘질(泥質)과 모래섞인 회도(灰陶) 위주이며 흑도(黑陶), 홍도(紅陶) 및 백도(白陶)가 약간 나온다. 그릇 모양은 정(鼎), 력, 심복관(深腹罐), 배(杯), 분(盆), 완(완), 가, 규(規), 등 매우 다양하며 제도기술(製陶技術)이 매우 발달하여 물레를 사용했고 토기 소성온도도 높으며 가마도 개선되어갔음을 보여준다. 무늬로는 승문(繩文), 람문(藍紋), 격자무늬(格字文), 덧무늬(隆起文) 등이 있다.

사회경제는 농업위주이며 생산도구 가운데 뗀석기(打製石器)는 적고 잘 만든 간석기(磨製石器)가 많다. 주요한 도구로는 돌삽, 돌낫(石鎌), 돌칼(石刀), 조개낫 등이 있다. 가축기르기도 발달하였는데 집자리(住居址) 유적에서는 돼지의 이(齒)가, 무덤에서는 돼지의 머리뼈가 잘 나타난다. 집자리는 반움집과 지상가옥의 2가지 형태가 있는데 거주면은 모두 백회(白灰)로 발랐다. 사람들은 죽은 뒤 공동묘지에 묻혔는데 신분, 지위에 차이가 있었음을 볼 수 있다. 규모가 큰 무덤의 경우 껴묻거리(副葬品)만 해도 도기(陶器), 목기(木器), 옥기(玉器), 석기(石器), 뼈도구 등 종류를 갖추어 200여 가지나 될 정도로 수량이 풍부하며 질도 뛰어난 편이다. 돼지뼈도 사유재산이 많고 적음을 알려주는 표지유물(標識遺物)이다.

주요한 롱산문화의 종류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다.

 

산똥롱산문화(山東龍山文化) : 가장 처음 알려진 롱산문화는 산똥롱산문화로 대표적인 유적인 성자애에서는 항토기법으로 만든 벽건조물이 발견되었다. 원래의 벽은 파손되었지만 발굴자들은 벽 윗부분의 평균너비는 9m이고, 벽의 원래 높이는 아마도 6m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러한 거대한 성벽을 만들기 위해서 집중적인 노동력이 필요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그를 감안할 때, 거대한 노동력이 요구되는 공공적 성격의 최초의 구조, 그리고 선사시대 정착에 의한 방어벽의 최초 건립 등이 충분히 예상되며, 그 사실은 산똥롱산문화가 비교적 발달된 복합사회였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집자리에는 일반적으로 바닥시설과 저장공, 매장지가 있다. 몇 개의 집자리는 呈子에서 발견된 것과 같은 직경이 약 4.5-5.0m의 반지하식이지만 東海谷 같은 다른 유적에서의 집자리는 한변이 약 6m이고 얇고, 견고한 층으로 구성된 낮은 평면에 지어진 장방형(長方形)이다. 특히 새로운 사회질서가 반영되는 것은 매장지인데, 그 안의 부장품으로 보아 大汶口式의 사회분화가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呈子에서의 롱산층들로부터 87개의 매장유구가 1976-77년에 발굴되었다. 그들은 남동향의 두침(頭枕)을 가진 장방형 묘광의 단장(單葬)이다. 이들 중 11개는 묘광의 벽과 흙을 가진 관(棺) 사이의 공간을 다시 채우는 것에 의해서 형성된 2단의 좁은 선반을 가졌고, 이 무덤들의 대부분은 토기, 장식품 또는 돼지의 아래턱뼈가 부장되어 있다. 구조 형태와 부장품에 따라서 이 매장유구는 4개의 집단으로 묶여질 수 있다. (1)대형묘, 2단의 선반, 목관, 그리고 많은 무덤 물품을 가지는데, 여기에는 항상 높은 굽을 가진 얇은 잔과 돼지 아래턱뼈가 포함된다. (2)작은 묘광, 2단의 선반, 몇 개의 관, 그리고 의미 있는 수의 유물을 가지고 있고, 때때로 높은 굽을 가진 얇은 잔과 돼지 아래턱뼈를 포함한다. (3)더 작은 묘광, 2단의 선반이나 관을 가지지 않고, 극소수의 유물을 가진다. (4)매우 좁은 묘광, 안에 시신을 겨우 놓을 수 있는 크기로 부장품과 관이 없다. 대체로 대형묘가 5기, 작은 묘광의 묘가 11기, 더 작은 묘광의 묘가 17기, 그리고 매우 좁은 묘광이 54기가 있다. 의미심장하게도, 매장유구는 34개의 매장지에 덩어리져 있다. 그러나 각 덩어리는 모두 무덤의 4종류를 가진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층을 이룬 부족사회와 관계된 매장형태의 최초 예이다.

 

롱산 도구는 여전히 돌, 뼈, 그리고 조개껍질로 만들어졌다. 이런 도구들에 대한 한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나타난다. 창끝과 화살촉의 수가 엄청나게 많고, 특히 이때에 높은 수준의 농업 생산성을 가진 것으로 추정되는 呈子에서 116점의 석기 중 28점이 화살촉으로 분류되었다. 그리고 53점의 뼈도구 중에서 29점이 화살촉이다. 姚官莊에서 수집된 194점 석기 중에서 64점이 화살촉이고 7점이 창끝이다. 그리고 50점의 골기와 사슴뿔도구 중에서 23점이 사슴뿔 화살촉이다. 이것은 활과 화살 (그리고 창)이 사냥도구일 뿐만 아니라 무기였다는 것의 강한 암시이다. 三里河에서 2개의 금속 송곳이 발굴됐다. 이것들은 약간의 납과 주석을 포함하고 아연과 합금된 동으로 판명됐다. 그들이 산똥에서 발견된 최초의 동합금이다. 大汶口, 仰韶와는 대조적으로 롱산 토기는 작은 비율의 갈색, 적색, 백색을 나타내고, 대부분이 회색과 검정색이다. 이 토기는 물레로 제작되었고 경질이다. 종종 용기는 무문(無文)이지만, 각문(刻文)이나 조각 같은 장식들이 또한 일반적이다. 형태는 정(鼎), 규(規), 손잡이 달린 잔, 두(豆), 뚜껑이 달린 그릇이 포함된다. 롱산 토기의 특징적인 유물은 매우 얇고 흑색을 띠며, 광택있는 컵, 상자, 그리고 항아리로 대표되는데 그것은 아마도 의례적(儀禮的)인 용기일 것이다. 다른 공통의 롱산의례의 주제는 복골(卜骨)을 들 수 있다. 균열을 만들기 위해 태워진 사슴이나 다른 포유류의 견갑골, 흑도, 복골, 그리고 옥도끼와 흑도에 있는 동물문양은 전에 없었던 새로운 의례적인 생활을 암시한다. 새겨진 동물문양과 점토예술 유물은 롱산미술을 만드는 사람의 행동을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인데, 그것은 의심할 바 없이 섞기 쉬운 물건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미아오띠꼬우 2기문화(廟底溝二期文化) : 陝縣-廟底溝 유적의 상층(上層) 퇴적층에서 발견되었다. 앙싸오문화에서 롱산문화로 발전해가는 과도기로서 ‘롱산초기문화(龍山初期文化)’라고도 한다. 미아오띠꼬우 2기문화는 앙싸오문화 뿐만 아니라 허난롱산문화의 특징을 갖고있어 과도기적 성격이 분명하다. 토기는 회도(灰陶) 위주이고, 소량의 흑도(黑陶)와 붉은간토기(紅陶)도 있다. 주요기형은 정(鼎), 각종의 관(罐), 쌍이분(雙耳盆), 배(杯), 첨저병(尖底甁) 등이 있으며, 부분적으로 채색된 것도 조금 있다. 문화성격은 앙싸오와 롱산문화 모두와 달라서 또 다른 성격을 갖고있다. 과도기적 특징으로는 주로 붉은간토기의 수량이 앙싸오보다 많지 않고, 채도가 끝나가며 수량도 적고 문양도 간단한, 주로 능형대상문(菱形帶狀文)이다. 이 기형은 소구첨저병(小口尖底甁)과 관류처럼 앙싸오문화와 같은 기종을 이은 것이 분명하고, 롱산문화의 기원적인 특징도 분명하게 보인다. 연대는 B.C. 2780년경이다.

 

허난롱산문화(河南龍山文化) : 安陽-后岡의 중층(中層)에서 처음으로 발견되어 ‘후강 2기문화(后岡二期文化)’라고도 한다. 허난롱산문화의 토기는 회도위주이며 소량의 흑도가 있고 그 중에는 소량의 단각흑도(蛋殼黑陶)가 있다. 전형적인 기형은 정, 력, 가, 쌍복분, 대이배, 규, 옹 등이다. 그 중에는 관형심복정(罐形深腹鼎), 쌍복분(雙腹盆), 고경소평저옹(高頸小平底瓮) 등이 가장 대표적이며, 채도는 보이지 않는다. 시문은 박인(拍印)한 승문, 바구니문, 방격문 위주이고 부가퇴문 등도 있다.

 

허난롱산문화는 지역적인 차이도 많다. 대체로 예서, 예남, 예동, 예북과 기남으로 구분하는데, 각 지역을 서로 다른 문화유형으로 나누기도 한다. 예서에는 三里橋·王灣유형, 예동에는 王油坊유형, 예남에는 下王崗유형, 예북과 기남에는 后岡유형이 그것이다. 이들 유형은 기종과 기형, 시문 특징상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 三里橋유형은 허난롱산문화의 특징과 샨시롱산문화의 특징이 모두 있고, 하왕강 유형에서는 굴가령문화의 특징과 허난롱산문화의 특징이 함께 보이고, 예서의 왕만 유형에서는 단각흑도가 드물게 보이고, 또 ‘헌’이 보이지 않으며, 예동의 王油坊유형과 예북의 后岡유형은 단각흑도와 ‘헌’, ‘규’ 등의 기형과 비교적 많은 산똥롱산문화의 특징을 갖고있다.

 

 

 

산시역사박물관(陜西歷史博物館) 패널 - 2007년 10월 촬영

 

샨시롱산문화(陝西龍山文化) : 西安-客省庄에서 처음 발견되었기 때문에 ‘귀성주앙 2기문화(客省庄二期文化)’라고도 한다. 토기의 특징은 회도 위주이고 흑도는 적게 보인다. 시문에는 람문(藍文)과 승문(繩文)이 있고 방격문(方格文)도 조금 보인다. 주요기종은 력, 정, 규, 분, 가, 관, 완 등이 있다. 그 중에서 ‘력’은 대이(帶耳), ‘가’는 관형심복(罐形深腹), ‘규’는 수장체단류(瘦長體短流)가 많다. 이들 기형은 허난롱산문화, 산똥롱산문화와 모두 다르고, 특히 다른문화에서 드물게 보이는 절견소평저옹(折肩小平底瓮)이 가장 대표적인 기종이다. 샨시롱산문화에는 또 쌍이(雙耳)가 많이 보이는데 이것은 제가문화(齊家文化)에 가깝다. 연대는 B.C. 2300-2000년이다.

 

산시롱산문화(山西龍山文化) : 이것은 비교적 최근에 山西省 襄汾縣 陶寺村에서 발견한 롱산기의 한 문화이다. 문화성격은 허난, 샨시, 산똥의 롱산문화와 모두 다르다. 이 유형의 롱산문화는 전기와 후기로 나뉘는데, 전기의 기종은 미아오띠고우 2기와 허난롱산문화의 성격에 가깝고, 후기는 三里橋유형의 특징과 비슷하다. 전기 도기(陶器)의 색깔은 복잡해서 회색, 갈색, 흑색 등이 있다. 부(釜)와 ‘소’가 이어진 취기, 편족정(扁足鼎), 관형과 분형의 ‘가’, 직구통형관(直口筒形罐), 절복분(折腹盆)과 편호(扁壺) 등이 항상 보인다. 후기 도기는 대부분 회도 위주이다. 대대족(大袋足)‘력’, 절복(折腹)‘가’, 단이배(單耳杯), 절연편호(折沿扁壺) 등이 항상 보이고, 부, 소, 정은 보이지 않는다. 시문은 주로 승문, 람문이고 방격문은 비교적 적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연대는 C14측정의 수륜보정치에 의하면 B.C. 2500-1900년이다. 주로 汾河 하류와 澮河유역에 분포한다.

허난롱산문화의 뒤를 이은 것은 偃師-二里頭문화로 이는 청동기시대의 문화이다. 河南 臨汝-煤山에서 허난롱산과 二里頭문화의 관계를 알려주는 지층을 발견하였다. 상층은 二里頭 1·2기의 문화이고, 하층은 허난롱산문화에 속한다. 煤山 유적의 문화성격은 허난롱산과 二里頭 1·2기의 문화특징을 모두 지닌다. 즉 煤山 유적은 허난롱산문화의 말기이며 二里頭문화로의 과도기 단계이다.

참고문헌 中國新石器時代文化(張之恒, 1988), 龍山文化(瞳柱臣, 19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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