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골 마을 위의 대암봉에서 남쪽으로 바라 본 풍경. 가까이로 옻골 최씨 고택들이 고즈넉하고, 둔산동 들판을 거쳐 멀리로는 동대구JC에서 부산으로 달릴 대구∼부산 고속도로가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끄트머리에 희고 둥글게 서 있는 것은 대구월드컵경기장.
610m봉에서 서쪽으로 출발해 율하천골의 서편 울타리가 된다고 했던 산줄기는, 북의 불로천골(대구 평광동)과 남의 율하천골(매여동)을 갈라붙이며 달린다. 그런 중에 잔가지를 내 평광동을 시량이골과 당남리골로, 율하천골을 큰골과 점동골로 쪼개 놓은 후 330m 높이로 낮아져 '돌곡재'를 내주니, 그걸 통해 당남리와 점동골이 이어진다.
하지만 산줄기는 돌곡재를 지난 뒤엔 곧바로 492m봉으로 치솟는다. 앞으로 달릴 구간 중 최고의 봉우리. 이 봉우리를 일부 등산객들은 '능천산'으로 알고 있었고, 인근 몇 개 마을 어르신들은 '감태봉'이라 불렀다. 하지만 그 봉우리 바로 밑에 있는 '소동골'에 가 들은 얘기를 종합하면 '요령봉'이라 부르는 것이 적절할 듯했다. 흔들어 소리를 내는 요령을 닮은 '요령 바위'가 꼭대기에 있어 그 이름으로 불러왔다는 것. 한때 큰 채석장이 있었다고 어르신들은 기억했다.
산줄기는 요령봉에서 서쪽으로 달리기 시작해 결국엔 '용암산'으로 맺히면서 그 북쪽에 있는 평광동골의 남쪽 울타리가 된다. 동시에 남쪽으로는 여러 개의 잔줄기를 내 여러 개의 골과 마을들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용암산 가는 줄기.
용암산 가는 줄기는 먼저 출발점인 요령봉에서 남동쪽으로 높이가 300m대에 불과한 능선을 흘려 보내 율하천골의 서편 울이 되도록 함과 동시에 건너편에는 '소동골'을 들어 앉힌다. 그 줄기에 있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369m봉인 바, 2만5천분의 1 지형도와 인근 사람들은 이것을 '능천산'이라 지목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5천분의 1 지도는 그 봉우리 북에 인접해 있는 337m봉을 능천산이라 했다. 정리가 필요할 터. 산줄기는 능천산을 거쳐 흐르다 남녘의 상매동과 부동(釜洞)에서 들판이 된다. 그 자락에 어떤 성씨의 대규모 묘원과 상매동 마을이 있었다.
요령봉에서는 능천산 가는 잔줄기가 출발한 직후 이 봉우리 밑 소동골을 둘로 쪼개는 짧은 산줄기도 하나 남쪽으로 흘러내린다. 이 줄기에는 또 하나의 높은 봉우리인 476m봉이 솟은바, 소동골 어르신들은 이 봉우리가 감태봉이라 했다. 감투같이 솟구쳤다고 해서 여기서도 이런 이름을 붙였다는 것. 그 북에 있는 요령봉은 이 봉우리에 가려져 소동골에서 보이지 않았다.
출발점인 요령봉에서부터 이렇게 잔가지를 치기 시작한 산줄기는 곧 이어 442m봉에 도달하고, 거기서도 남쪽으로 한 가지를 떨어뜨려 소동골과 '옻골'을 가르니 그 줄기에 411m 높이의 '검덕봉'이 솟았다. 다닥다닥 근접한 짧은 산줄기들에 검덕봉과 감태봉 같은 높은 봉우리들이 밀집한 형상. 그래서 일대 산세는 덩치 큰 산 못잖게 준열했다.
442m봉을 지난 뒤 산줄기는 120여m나 폭락해 높이 320m의 '옻골재'를 내줬다가 다시 솟구쳐 465m봉을 만든다. 인접 마을 어르신들의 증언을 종합해 판단한 465m봉의 적절한 이름은 ''(臺巖峰)일 듯했다. 대암은 대(臺)를 닮아 널찍하고 높다랗게 솟은 암괴라는 뜻. 이 봉우리를 옻골 마을에서는 '대암산'이라 했고, 그 밑 '토골' 마을 어르신들은 그냥 '대암'이라 호칭했다. 그 이름을 따 산밑에 있는 토골 등 마을이 전에는 '대암'으로 불렸다고 했다. 지금도 토골 안 못 이름은 '대암지'였고, 경로당도 '대암경로당'이란 이름표를 붙이고 있었다.
대암봉에서는 두 개의 가지가 또 남쪽으로 내려간다. 먼저 내려간 줄기는 '생구바위' 혹은 '생우바위'라 불리는 돌봉우리를 거치며 옻골과 토골을 구분 짓는다. 생구바위는 살아 있는 거북 바위라는 말. 한자로는 생구암(生龜岩)이라 썼으니, 평평한 대암은 거북의 등이 되고 이 생구암은 머리가 되는가 싶었다.
두 번째 빠져나간 가지는 토골로부터 '기미실골'을 구분시킨다. 그런 다음 다소 길게 이어가다가 서쪽에서 차고 오르는 계곡에 '바리재'를 내주고는 세 갈래로 갈라진다. 그 중 하나는 천연기념물 1호 측백수림이 있는 향산으로 맺히고, 다른 하나는 불로동쪽으로 향하다 해서초등학교 못미처 멈춘다. 마지막 갈래는 토골 앞산 줄기가 되니, 그 자락에 대구비행장이 있고 옛날엔 해안현(解顔縣) 치소(治所)가 있었던 듯 생각되고 있다. 해안현은 금호강 이북의 대구 동부권 땅 대부분이 속했던 행정 구역이었다.
토골의 뒷담에 해당한다고 판단하면 될 대암봉의 정상은 넓고 길뿐 아니라 암반 바닥이 나무를 키우지 않아 걸림 없이 뛰어난 전망을 갖고 있었다. 동으로는 환성산군 주맥이 맨모습을 드러냈고, 서로는 단산지와 금호강 물가 자락이 시원히 펼쳐지는 가운데 고속도로에 고립된 향산이 안타까웠다. 북으로는 팔공산 본체의 주능선이 막힘 없이 드러났다. 넒게 펼쳐진 평광동 마을들이 여기서야 드디어 모습을 훤히 드러내고, 그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골짜기에 있다는 당남마을까지 훤히 들여다보였다. 남으로 몸을 돌리니 생구바위 돌봉우리가 보이고 토골과 그 마을 위의 대암못이 훤했다.
하지만 그 환하던 전망은 길게 이어지는 대암봉 최고점 헬기장 한쪽에 세워져 있는 표석 하나로 인해 어두워지고 말았다. '해발 368m 용암산'. 어느 산악회에서 올 1월 1일 세웠다는 표석은 465m의 이 대암봉을 368m의 용암산으로 안내하고 있었다. 하도 놀라운 일이라서, 기자의 독도법(讀圖法)이 잘못됐는지 아니면 그 표석이 잘못됐는지 지금도 혼란스러울 지경. 만약 기자의 판단이 맞다면, 해당 산악회가 나서든, 아니면 행정 당국이라도 나서서 표석을 진짜 용암산으로 옮겨다 놔야 할 듯했다.
대암봉을 거친 뒤 줄기는 340여m 높이로 또 120여m나 낮아졌다가 용암산(368.7m)으로 마지막 봉우리를 맺는다. 요령봉에서 출발한 줄기가 대암봉을 거치며 그렇게 여러 골을 갈라붙이고 새끼 줄기까지 치고야 최종점에 도달하는 것이다.
용암산 정상은 수천 평은 될 평평한 고원이었다. 그리고 전망이 좋았다. 온통 창궐한 칡넝쿨이 나무들을 못살게 해 그런 전망이 확보된 듯했다. 넓은 고원을 갖추고 이렇게 좋은 전망을 갖춘 용암산에는 삼국시대부터 산성이 들어섰다고 했다.
현지 안내문에 따르면, 이곳은 안심과 하양으로 통하는 통로인 데다 그 길목을 모두 살필 수 있는 지형상 요충지. 거기다 동서 양쪽 산록은 45도나 되는 급경사이다. 이런 좋은 조건을 활용하고 상대적으로 완만한 남사면에는 대규모 인공절벽을 구축해 둘레가 1천m나 되는 큰 산성을 만들었다. 신라 토기가 발견되는 것으로 봐 삼국시대 고분임이 확실하다고 했다.
문제는 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고원이 넓고 절벽을 갖췄어도 물이 없으면 그건 몹쓸 땅. 그 때문에 왜란 때 이 산성에 들어가 있던 주민들과 의병들이 적군의 고립 전술에 말려 위기를 맞았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다. 그걸 돌파하기 위해 모두가 합심해 판 것이 '옥천'(玉泉)이라고 했다.
용암산 동록에 있는 '옥천' 유적. 임진왜란 때 이곳 산성으로 피신해 있던 의병과 주민들의 절망적이던 목마름이 이 우물 파기로 해소됐다는 이야기가 전해져오고 있다.
취재팀은 용암산에서 요령봉을 향해 거꾸로도 걸어 봤다. 답사의 출발점은 측백수림 앞 도동. 거기서 기미실골 입구로 이동해 대구∼포항고속도 옆으로 올랐다. 용암산 정상에 도달하는데 걸린 시간은 겨우 30여분. 산성 옛터를 살핀 뒤 요령봉을 향해 걷던 중, 산성 권역을 거의 벗어난다 싶을 즈음 푹 꺼진 곳에서 '옥천' 터를 만났다. 장방형으로 주위에 돌을 쌓고 우물가도 그래 놓은 것이 마을 안의 우물을 연상케 했다. 가슴이 뭉클했다.
340여m 높이의 산길이 어느덧 가파른 오르막으로 이어졌다. 120여m나 올라가야 하는 대암봉. 봉우리를 거치자 옻골재로 낮아졌다가 다시 442m봉으로 향했고, 곧이어 이 줄기 최고봉인 요령봉에 도달했다. 출발점에서 요령봉까지 걸린 시간은 두루 살펴가며 걸어야 3시간쯤. 짧은 노정에 그만한 전망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이 감격스러웠다.
글 박종봉 편집위원 사진 정재호 편집위원
대암봉 남록에 만개한 참꽃 행렬. 이 풍광을 즐기려는 사람들의 발길이 평일에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