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4일. 오늘은 아침부터 바람이 차다. 날씨가 풀리는 것 같더니 오늘은 다
시 겨울이다. 마음이 시리다. 무차별적으로 시리다. 올해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초컬릿 선물을 하고 싶었는데...
침대 위에 난잡하게 흩어러진 이불, 또 그 위에 엉망으로 벗어 놓은 잠옷. 쿠
쿠, 잠옷이라야 추리닝인데... 나 서른살 내숭쟁이. 도도하고 고고한 척 하지만
나는 그냥 한 마리 외로운 암사슴. 모가지가 길어 슬픈게 아니라 남자가 없어 슬
프다 씨.
나는 왜 무턱되고 눈만 높은 걸까? 아니다, 독야 청청 홀로 서 있는 소나무가
외로울 지는 몰라도 아름답다. 나 계속 아름다울 것이다. 29년 동안 기다린 것
도 아까운데 아무 남자나 사귈 수 없다. 남자면 된다,라고 말하는 여자들? 경멸
한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는 여자들? 싫다. 자기의 존엄성을 잃어 버린 기집
애는 더 이상 여자가 아니다. 여자는 고고하고 도도해야 한다. 내 철학이다. 근
데 외롭다.
부르스 음악이 들리고 마지막 잎새도 져버린 길고 긴 겨울 밤, 빨간 추리닝에
베개를 부여 안고 침대에 앉아 백마탄 왕자만 꿈 꾸며 뜬 눈으로 밤을 지새어보
지 않고선 외로움을 논하지 말라. 한 번 그래 봐라. 그게 얼마나 외롭고 처량한
짓인지 알 것이다. 나 어제 밤에도 그랬다. 나는 내가 가여워 눈물을 자주 흘린
다. 이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밤마다 눈물을 흘린다면 이 얼마나 아름다운 영상
이 아닌가? 처량한 것인가?
옆 집 신혼부부... 꼴 사나운 옆 집 신혼 부부. 그냥 해라. 무슨 할 때마다 샤
워냐? 어제 샤워 물 내리는 소리 네 번 들렸다. 가여운 사슴 생각도 좀 하고 살
지. 후후, 밤마다 내가 그 쪽 벽에다 칼 던지는 줄 모를거다.
외로운 마음에 아침 대신으로 소주 한잔 마셨다. 캬. 한 병 마셨다.
기분따라 술 마시다 보니 출근 시간이 지나 버렸다. 야호! 잘 됐다. 이왕 늦은
거 회사 나가지 말자. 오늘 같은 날 회사 나가면 불 지르고 싶을 거다. 초컬릿
사서 퇴근 시간만 기다리는 여직원들. 괜히 추근되며 초컬릿 내 놔라 하는 과장
님 이하 여러 아저씨들. 싫다.
술 냄새 날까봐 더운 물에 샤워를 했다. 머리가 핑 돌았다. 현기증! 나는 가련
한 여인인가 보다. 현기증에 쓰러질 듯 우아한 모습으로 한 손을 올려 벽을 짚었
다. 안타갑게 가여운 여인은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일으킨다고 한다. 뜨거운 물
이 흘러 내리고 증기로 가득한 욕실, 빈혈이라도 걸린 가녀린 여인처럼 쓰러질
듯 타일 벽에 손을 짚었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지만 그래야 된다. 고독한 척,
고고한 척. 쭈욱...! 왜 미끄러 지는겨. 손이 쭉 위로 올라가고 내 얼굴이 그대
로 타일 벽에 가 붙어 버렸다. 에고 아파라. 이런 코피! 다음부터 벽을 짚을 땐
손을 씻고 거품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부터 해야 겠다. 아침부터 재수 열라 없
다. 아니다 오늘은 뭔가 인연이 있을 것 같다. 나는 벽이나따나 입맞춤을 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두르고 목욕 가운을 입고 밖으로 나왔다. 잠옷은 추리닝이지
만 가운은 그럴싸 하다. 화장대 앞에 앉아 한쪽 콧구멍에다 화장지 돌돌 말아 끼
우고 화장을 했다.
오늘은 회사 나가기 싫다. 하지만 외출을 해야 인연이 생기는 법.
"과장님이세요?"
"응. 왜 안나와?""
"저어... 머리가 아프네요. 빈혈인가 봐요. 세수하다 코피가 터졌어요. 나가야
되는데..."
"많이 아파?"
"지금 제 목소리 들어보면 몰라요?"
"팔팔한데?"
내가 아프다면 아픈거야.
"말할 기운도 없어요. 전화 끊어요. 월차 내는 걸로 해요."
전화를 끊고 봄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그리고 롱코트를 외투로 걸쳤다. 내가
봐도 너무 도회적이고 세련되어 보인다. 아차, 휴지는 빼자. 에구, 아까운 내
피. 거울 보고 코를 오물 거렸다. 혹시나 한 쪽 콧구멍이 더 크게 보일까봐 신경
을 썼다.
외출이다. 가자! 내 인연을 찾으러. 겨울 바람을 맞으며 앙상한 나뭇 가지 아
래 고고한 척 더운 종이컵을 물고 있으면 그 분위기를 못 이겨 근사한 남자가 다
가와 줄 지도 모른다. 아자!
7센티 높은 굽 구두를 신고 외출을 했다.
뭐 이런기 다있노.
문 열자 마자 들어 온 낯 간지러운 장면.
"자기 잘 갔다 와."
"알았어."
"야단 안 맞겠어?"
"자기를 위해서라면 지각이 문제겠니? 회사 때려 치울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지만 먹고는 살아야지."
"이별이 너무 슬프다. 왜 우리는 아침마다 이별을 해야 하지?"
"나도 너무 슬퍼. 그치만 자기야. 잘 갔다 와."
옆 집 신혼 부부가 현관문 앞에서 아주 쌩쇼를 한다. 여자는 나이트 가운을 입
고 있다. 에구 요시러버라... 남들이 보면 어쩔려구.
"흠, 흠!"
헛기침을 해 주었다. 빤히 날 쳐다 보는 두 년,놈. 뭘 봐 짜샤.
"자기 들어 가."
남자가 무안한 듯 여자를 안으로 들여 보낸다.
"그래. 잘 갔다 와. 갔다 오면 초컬릿 줄게."
"알았어."
그만해라. 눈 꼴 시러 못 보겠다. 어색한 척 날 돌아 보는 아저씨.
"하하, 좋은 아침입니다."
니 뿡이다 새꺄. 좋겠다 짜식아. 밤새 그 짓 했지?
"그렇네요."
그 신혼 아저씨와 나란히 엘레베이터를 탔다. 9층에서 7층까지. 7층에서 멈췄
다. 7? 행운의 숫자다.
간혹 보던 어떤 총각이 코를 파며 서있다가 나를 보고 씩 웃는다. 웃지마라 정
들까 무섭다. 들어 와서도 코를 자꾸 만진다. 내 코는 이상 없겠지?
그 총각을 쳐다 보았다. 코에 자주 손이 간다. 저 녀석도 나처럼 샤워하다 코
피 터졌나?
어제는 분명 현관 바로 근처에 세워 놓았는데 어느새 저기까지 밀려 나갔냐? 사
람들 참 힘도 좋지. 오늘 저 신혼 아저씨 차 알아 뒀다가 언제 기회봐서 저 아저
씨 차 바로 앞에다 사이드 브레이크 올려 놓고 주차 시켜 놔 봐야 겠다. 저 아저
씨 차 번호가 몇 번인지 따라 가 보자.
그 남자의 발렌타인 오전과 오후.
해뜨자 마자 일어 났다. 침대에 멍하니 앉아 한숨을 길게 쉬고 마음의 준비를
한 다음 달력을 보았다. 이월 십사일. 아름다운 날이다.
컴퓨터를 켜고 통신 접속을 했다.
"메일이 왔습니다."
쿠쿠. 메일이 한 통 와 있다.
"오늘 하루 내 깊은 마음 속으로부터
구름 사이로 내리는 햇살처럼
참을 수 없는 그리움으로 당신에게 메일을 보냅니다.
기분 나쁘지만 출근은 해야 겠지. 라면 끓일 냄비를 렌지 위에다 올려 놓았다.
아침부터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야 하다니 더욱 처량하다.
라면을 넣고 계란까지 넣었다. 띠리리! 아침부터 누가 전화를 하는 것일까?
"여보세요?"
"장가 안 갈겨?"
우리 어머니다.
"갈게요."
"언제 갈 건데?"
"갈때 되면 가겠죠."
"지현이는 벌써 가서 애까지 있는데."
"걔야 뭐..."
"동생 보기가 부끄럽지 않냐?
"아침부터 왜 그러세요?"
"어제는 왜 그랬어?"
"뭘요?"
"선 보랬더니 어디 갔었냐구?"
"보러 갔었어요."
"어제 그 말 사실이야?"
"네."
"내 새끼지만 참 너무한다."
"헤헤. 그럴수도 있죠 뭐."
"뭐가 그럴수도 있어. 애가 왜 그리 멍청하니."
"저 잘난 놈이에요."
"에휴. 다음 주에 다시 잡을테니까 그땐..."
"알았어요."
전화를 끊고 잠시 생각에 잠겨 보았다. 내가 진짜 멍청한지. 어제 나 맞선 약
속 잡혀 있었다. 근데 여자가 안 나왔다. 안 나온게 아니었다. 나 신촌 se커피숍
이랬는데 신천 se커피숍에 가 있었다. 하필이면 그날따라 헨드폰도 가지고 나가
지 않았다. 나 바본가? 그리고 선 보는게 007팅이야 뭐야. 딸랑 약속 장소와 시
간만 가르쳐 주고 나가라고 하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뭔가 이상한 냄새가 난
다. 내 밥!
잘못하면 불날 뻔 했다. 다행이다 냄비만 태워 먹어서. 아침에 할 일이 생기면
좋다. 열심히 냄비를 씻었다. 뭘 잊은 것 같지만 한 가지 일에 열중한다는 것은
참으로 좋은거다. 까맣던 남비가 원상태로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보람을 느꼈
다. 꼬로록! 뭘 잊은 것 같다는 느낌은 아침을 먹지 못했다는 것인가 보다.
깨끗이 씻은 냄비에다 다시 물을 올려 놓았다. 라면을 맛있게 먹었다. 기분 좋
다. 찌꺼기 묻은 냄비 그냥 물에 담궈 두고 출근 준비를 했다.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메고 자켓까지 입었다. 뭔가 빠진 것 같다. 이런 씨, 세수
를 안했다. 욕실로 들어 가 넥타이를 풀고 거울을 보았다. 머리가 엉망이다. 수
염도 더부룩하다. 잘못하면 이대로 나갈 뻔 했다. 미리 알아 냈다는 게 다행이
다. 머리부터 감기로 했다. 세면조에 더운물을 받아 머리를 담궜다.
"딩. 딩."
시계 울음 소리가 들렸다. 머리에 샴푸를 풀고 열심히 손질을 하다가 벨 소리
를 들었다. 하나, 둘, 셋,...
일곱, 여덟, 아홉. 아홉시구나. 아홉시? 아홉시면 나 회사에 있어야 되는데. 이
런! 우쒸! 지각이다!
쾅!
나 멍청한 놈이다. 급한 마음에 눈도 뜨지 못하고 머리에 거품을 문 채 뛰어 나
가다 욕실 문과 정면 충돌했다. 머리에 거품을 물고 쪼그려 앉아 울었다. 아파
서... 이런 씨! 코피 터졌다. 급하다. 화장지로 대충 구멍을 막고 빨리 출근 준
비하자.
이왕 지각 한 거 천천히 하자. 머리 마저 감고 면도하고 젖은 와이셔츠 다시 갈
아 입었다. 거울을 보았다. 한 쪽 코가 불쑥하다. 아, 휴지를 안 빼냈구나. 물
에 젖어서 그럴까? 휴지가 젖어 잘 나오지 않았다. 빼 내려다 더 깊이 처 넣고
말았다. 그 휴지 빼내는 데 이십분을 소비 했다. 빼내기는 했으나 코가 많이 아
프고 간지럽다.
뭔가 빠진 게 없는지 잘 살피고 아파트 문을 나섰다. 코가 자꾸 간지럽다.
휴지가 덜 빠졌을까? 코 후비는데 엘레베이터 문이 열렸다. 출근 시간에 간혹
보던 어떤 여인네와 눈이 마주쳤다. 쪽팔려 씩 웃어 주었다. 저 여자도 날 바보
로 생각할까? 안되는데 그리고 저 아가씨 오늘 늦네.
기억자! 다른 사람 다 출근했는지 주차장 텅 비었다. 주차장에는 내 차와 어제
주차할 공간을 못 찾았는지 빨간색 마티즈 승용차 하나가 내 차 꽁무늬에 가로
로 주차 되어 있다. 그래서 기억자다. 누군겨? 아침부터 힘써야 겠다.
졸라 밀고 있는데 아까 엘레베이터에서 마주쳤던 아가씨가 날 가만히 쳐다 보
고 있는 걸 발견했다. 왜 쳐다 보지? 있는 힘껏 차를 밀어 버리고 헤헤 웃어 주
었다. 차 잘도 간다. 조금 내리막 길인가? 내가 너무 세게 밀었나? 아니면 경차
라서 그런가? 차는 멈추지 않고 계속 굴러 갔다. 저대로 가면 가로대에 부딪칠
것도 같다. 가만히 날 쳐다 보던 아가씨가 그걸 보더니 뛰어 갔다. 그리고 그
차 꽁무늬에 가 손을 짚고는 세우려고 오만 쌍을 찌푸렸다. 푸하하! 저 아가씨
개그맨인가? 픽 꼬꾸라 졌다.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쯔쯧.
구경할 시간 없다. 빨리 출발하자. 차를 출발 시켰는데 내 차 쪽으로 뛰어 오
는 그 아가씨를 보았다. 모른 척 그냥 내 뺐다. 차 뒤에서 앞으로 뒷 굽이 부러
진 구두가 날아 가는 걸 보았다. 저런 거 신경 쓸데가 아니다. 나 지각했다.
실장에게 욕 좀 들었다. 지가 날 짜를겨 어쩔겨?
비서실에는 나 말고 예쁜 여직원이 둘이 있다. 다들 예쁘고 성격도 좋다. 한가
지 흠이라면 둘 다 애인이 있다는 게... 유니폼이 참 잘 어울리는 김성희씨는 에
비씨 초컬릿이나 따나 몇 개 갖다 주었는데 조금 더 예쁜 최혜지씨는 아예 나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자기 애인에게 줄 초컬릿 포장에만 정신이 가 있었다. 나이
가 몇 살인데 바구니에다 낱개로 된 초컬릿 사서 일일이 포장을 하냐. 일 해야
되는데... 내가 상사니까 뭐라 야단을 쳐도 되겠지? 한마디 할까? 친한 사인데
그럴 수는 없다.
"최혜지씨!"
"네?"
"애인 줄거야?"
"네."
"나도 몇 개만 주라."
"싫은데요."
"왜?"
"작년에도 뺏어 먹었잖아요. 대리님도 빨리 애인 만드세요."
"그러지 말고 몇개만 주라."
"자꾸 그러면 못 사귄다니까요."
"너무하네."
"저도 주고 싶은데 대리님 위해서 참는거에요."
"최혜지씨!"
"네."
"나 성격 이상하지 않지?"
"그럼요."
"나 못생기지 않았지?"
"송대리님 정도면 잘 생긴 편이죠."
"고마워. 나 능력없지 않지?"
"당연하죠. 영어 잘하죠. 일본어 회화 가능하죠. 일찍 대리 되셨죠. 대리 되고
서 바로 비서실로 왔죠."
"나 멍청하지 않지?"
"왜 그런 생각을 해요?"
"여자에게 인기 있을 것도 같지?"
"네."
"애인 있을 만 하지?"
"아니요."
"왜?"
"노력을 안하잖아요."
"그래도 못나진 않았지?"
"네."
"나 싫지 않지?"
"오히려 좋아하죠."
"그럼 몇 개만 죠."
"싫은데요."
독한 년이다.
점심 시간 때 예전 있던 부서로 가 초컬릿 여러 개 뺏어 왔다. 제법 푸짐하다.
그러나 처량하고 슬프다. 어제 선보는 장소만 제대로 알았어도...
그 여자의 발렌타인 데이 오후와 저녁.
그 놈 때문에 오전에 외출을 못했다. 잡히기만 해 봐라.
엘레베이터에서 본 그 놈이 내 차를 밀고 있는 걸 보았다. 낑낑되며 힘 써는
걸 보니까 말리고 싶지 않았다. 오늘 내 기분은 남 약 올리고 싶은 마음으로 가
득찼었다. 기껏 밀어 내 놓으니까 주인이 와서 고고한 척 차에 타 버리고 휭하
니 사라지면 그 놈이 엄청 열 받을 것 같았다. 그 넘도 오늘 초컬릿 받겠지? 오
늘 초컬릿 주고 받는 년,놈들 다 열 받았으면 하는 그런 마음이었다. 그래서 그
놈이 내 차를 밀고 있을 때 말리지 않았다. 그 넘 히임 좋았다.
그 놈은 차를 힘 껏 밀어 버리고 난 뒤 날 보며 씩 웃었다. 그리고 자기차로 아
무렇지도 않게 가버렸다. 내 차! 내 차는 어이없이 그냥 밀려 나 버리고 있었
다. 멈추지 않았다. 산 지 두달 밖에 안됐는데 할부금 반도 안 낸 찬데 저대로
밀려가면 가로대에 부딪쳐 상처 입을 것 같았다. 아침에 술 먹던 힘으로 달려가
막았다.
틱! 내 예쁜 종아리에 힘을 주고 버텼는데 그만 내 오른 쪽 구두 뒷 굽이 부러
져 버렸다. 물어 내! 그 놈 그냥 가버렸다. 에이 나쁜 놈아! 구두를 벗어 그 놈
차를 겨냥하고 힘껏 던졌는데 맞추지 못했다. 다음에 기회봐서 그 놈 차 긁어 버
려야 겠다.
구두 맡기고 오전은 집에 있었다. 심심했다. 회사나 갈 걸.
점심으로 라면 하나 끓여 먹었다. 양치질 하고 슬리퍼 신고 구두 찾으러 갔다.
구두를 신었다. 반짝 반짝 빛났다. 구두를 신고 이리 저리 살피고 있는데 구두
수선 아저씨가 날 보며 웃어 주었다.
"아가씨가 예뻐서 고치는 김에 광내서 닦아 놨어요."
그럼 나 한 미모 하지. 나는 고고하기 때문에 고맙다는 말 하지 않겠다.
"괜한 짓 했네요."
"네?"
"헤, 너무 고마워요. "
내 본 모습을 찾았다. 다시 예전 모습으로 돌아 왔다. 섹쉬한 옷차림에 빛나는
구두. 자랑하고 싶다. 차를 몰고 나가지 말자. 슬리퍼를 차에 넣어두고 그 길로
지하철 역으로 달렸다. 오늘 같은 일 당하지 않게 차는 주차 공간에 잘 파킹 시
켜 놓았다.
대학로를 나갔더니 어린 것들이 바구니에 초컬릿을 담고 히히덕 거리며 돌아 다
니는 걸 보았다. 엄청 배 아팠다. 저런 어린 것들도 다 지 짝이 있는데... 불쌍
한 내 신세여. 이것 저것 구경하며 나도 약속이 있는 것처럼 돌아 다녔다.
잔 가지 사이로 오렌지가 익는다. 잔 가지 사이에 비추어지는 오후의 해는 오렌
지 같다. 노을은 갓 따다 놓은 오렌지처럼 곱다. 마로니에 공원 이제는 오후가
지치고 사람들의 재잘 거림이 저녁을 얘기 할 때 난 보았다. 난 파란 공중 전화
박스 옆 도도하게 혼자 있는 빈 벤취를 보았다. 찬 바람에 초췌한 얼굴을 하고
누구를 기다리며 저 벤취는 혼자인가?
쓸쓸한 듯, 그러나 고고하게 난 거기 앉아 있었다. 추웠지만 홀로 고독을 즐기
는 척 두손으로 종이컵을 가슴에 안은 채 사슴같은 눈망울로 앉아 있었다. 껍질
벗겨진 애처로운 이 벤취만이 내 친구가 되어 쓸쓸한 바람을 피하지 않고 맞고
있었다.
공중 전화 박스에 안기는 사람들은 저마다 뭔가의 약속 얘기를, 사연 얘기를 하
고 그 곳을 떠나 갔다. 지나치는 사람들의 걸음. 추운 겨울의 비둘기 만이 내 옆
을 앉았다 그 걸음에 놀라 어디론가 날아가곤 했다. 하나 둘 켜지는 조명등. 아
름답다. 너무나 아름다와 콧물이 흐른다.
이것들이 진짜. 아무도 내게 말을 걸어 주지 않았다. 내 예쁜 종아리 아래에는
담배 꽁초만이 쌓여 갔다. 사람 앉아 있는 거 안 보여? 왜 여기다 꽁초를 버리
는 겨!
추워서 도저히 안되겠다. 점심 때 라면 먹은 게 오늘 식사량 전부다. 근싸한 레
스토랑을 들어 갔다 바로 나왔다. 눈 꼴시러 그 곳에 앉을 수 없었다. 전부 쌍쌍
이었다. 기분 나빠서 그냥 나왔다.
대포집을 들어 가려다 그러면 내가 너무 초라할 것 같았다.
근처 횟집을 들어 갔다. 우럭 한 사발을 시키고 공기 밥 하나를 추가했다. 그리
고 매취 순 한 병을 시켰다. 혼자 하나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크억! 배부르
다. 횟집까지 초컬릿 들고 들어 오는 년, 놈들은 도대체 뭐냐? 어쭈! 기분좋은
데 시비나 걸어 볼까?
내 옆좌석에 앉은 어린 커플에게 말을 걸어 보았다.
"둘이 연인 사이에요?"
"네."
"초컬릿 주고 꽃 다발 받았나 보네?"
"네."
여자가 다소곳이 대답을 한다. 가증스러운 것. 너도 집에서는 추리닝 입고 자
지?
"초컬릿 주고 횟집 들어 오면 깨지는 거 아니? 여기 초장이 괜히 있는 게 아
냐. 초 친다는 말 몰라?"
"네?"
"별로 잘 어울리지도 않는데 갈라 서라."
우쒸, 요즘 어린 것들 어른 공경 할 줄을 몰라요. 대들었어? 너네 집에는 애비
애미, 아니다 참, 언니 오빠도 없냐. 뭐 재수 없다구? 그래 나 재수 없다.
집에 들어 가기는 싫고 이렇게 그냥 걷기는 싫고 그래 나도 초컬릿을 사자. 그
래 나도 만날 사람이 있는 것처럼 초컬릿을 사자.
"바구니 하나에 이만 오천원이나 해요?"
좀 쪽팔렸다. 주위를 한 번 돌아다 보고 헛 기침을 한 다음 넌지시 한 마디 했
다.
"별로 안 비싸네."
초컬릿은 만원치만 샀다. 엽서도 하나 샀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을 했다.
아자! 초컬릿 바구니를 끼고 걸으니 한 결 가뿐하다. 후후, 오늘 같은 날은 브
루스 음악이 들리는 카페가 약속 장소로 괜찮겠지? 혼자 있다가 헨드폰 꺼내 전
화 받는 척 하고 태연히 나가면 된다. 가자!
카페에 앉아 음악을 들으며 엽서를 썼다. 많은 연인들의 재잘거림을 들으며 나
도 사랑을 꿈 꾸었다.
"언젠가 말하고 싶었어요.
사랑이 뭔지 아직은 잘 몰라요.
여기 소근거리는 연인들 속에서
그 답을 찾고 싶지는 않네요.
가르쳐 주실래요?
그대가 내게
사랑이란 걸 가르쳐 주시면
난 어쩌면 행복해 할 것 같아요.
초컬릿은 그 걸 부탁하는 의미에서
드리는 겁니다. From. S.J.Lee.
예쁜 글씨로 엽서를 메꾼 다음 초컬릿 바구니 포장 사이에 집어 넣었다.
음악이 흐른다. 체리 주스의 빨간 색깔이 내 마음을 유혹하고 있다. 그래서 조
금 슬프다.
주스 양이 많았나? 아까 횟집에서 먹은 술 때문인가? 화장실을 가고 싶다.
그 남자의 발렌타인 데이 저녁.
"실장님 왠 꽃다발입니까?"
퇴근 시간 실장님이 꽃다발을 안고 나오는 걸 보았다.
"하하, 마누라가 퇴근할 때 꽃다발 사오라네. 무슨 날인가?"
"발렌타인 데이잖습니까."
"그런가? 그럼 초컬릿 주려구?"
"사모님이 젊게 사시네요."
"우리 마누라 젊어 나랑 아홉살 차인데... 자네는 초컬릿 받나?"
"여기 이만큼 있습니다."
"허허. 누구에게 뺏었나?"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힘듭니다."
"내일은 지각하지 마."
"제가 언제 지각한 적 있습니까?"
"오늘."
아, 오늘 지각했구나.
"시정하겠습니다. 내일은 꼭."
실장님은 꽃다발의 냄새를 쓰윽 음미하듯 맡고는 손을 흔들고 나가셨다. 멋있
다. 갑자기 속이 쓰리다. 저 나이도 초컬릿 받는데... 그 참 꽃다발 탐스럽다.
약속 없는 월요일 퇴근 시간이 이렇게 서글퍼긴 처음이다. 내 호주머니에는 초
컬릿이 가득 있다. 도대체 몇 사람에게 뺏은 거야. 불쌍하다며 미리 건네 준 사
람도 있다. 이렇게 처량한 날은 일찍 집에 들어 가 자빠져 자는 게 최선이다.
집에 도착했다. 아침에 본 마티즈가 내 전용 주차 공간에 주차 되어져 있다. 기
분 나쁘다. 그 차 바로 앞에다 사이드 브레이크 올려 놓고 내렸다. 내일 그 여자
가 따지면 아무렇지도 않게 배째라 그래 봐야지. 처량한 이 세상 여자가 배째 주
는 것도 어디냐. 그 여자 그런대로 예뻤다. 배 째는 걸 계기로 무슨 인연이 닿
을 지도 모른다. 참 내, 내 마음이 오죽 허했으면 이런 생각을 다 할까? 다시 좋
게 주차 시키자. 차 문을 여니까 내 겉옷이 보였다. 하마터면 다시 내려 올뻔
했다. 겉 옷 호주머니에 아파트 키가 있는데. 겉 옷을 꺼내고 문을 닫았다.
라면 끓일 물을 렌지에 올렸다. 그리고 저녁으로 라면을 먹었다. 아니 먹지 않
았다. 먹으려고 하다 보니 내 자신이 너무 비참했다. 이럴 순 없다. 오늘 미스최
가 내가 애인이 없는 이유를 노력하지 않는 것 때문이라고 했다. 노력해야지. 그
래야 인연이 만들어지지. 그래 나가자. 내가 이렇게 비참해선 안된다.
라면을 변기에 버렸다. 버리다 보니까 내가 냄비를 씻고 물을 올렸는지 긴가 민
가 했다. 안 먹길 잘했다. 뭔가 될 것 같다. 오늘은 인연이 있을 것 같다. 멋진
레스토랑서 식사를 하고 또 멋진 카페에 가 칵테일을 마시자. 그리고 고독한 척
하자. 누군가 외로운 사람이 손을 잡아 줄지도 모른다.
신나게 외출을 했다. 술 먹을 것 차는 가져 가지 말자. 내가 왜 차를 저런 식으
로 주차 시켰지?
가로등과 건물의 밝은 불 빛, 이 곳에도 외로움이 있을까? 잘 못 나온거 같다.
수많은 연인들이 꽃을, 초컬릿 박스를 들고 다닌다. 부러버라...
레스토랑을 들어 갔더니 모두 쌍쌍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런 것에 주눅 들까?
주눅 들었다. 하지만 꿋꿋하게 육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아 스테이크 시켜 먹었
다. 후식 먹고 느긋하게 담배 몇 가피도 피웠다. 자리가 없어 돌아 가는 사람들
을 보며 흐뭇해 했다. 주위를 돌아 보니 혼자 앉아 있는 놈은 나밖에 없다. 그리
고 카운터에서 못마땅한 눈빛으로 날 보고 있는 점원과 주인을 보았다. 그려 나
가면 될 거 아냐. 돈까스 시켜 먹을 걸. 괜히 비싼 스테이크 시켜 먹었다.
거리를 걸었다. 새어 나오는 음악, 재잘 거림, 기다림이 좋은 사람들의 눈망
울. 그런 것들에 난 흔들리고 있다. 좋겠다. 사랑을 꿈 꾸는 마음은 흘러 나오
는 음악처럼 설레일 것이고 곁에 누군가 있다면 마음이 포근하겠지. 누군가 곁으
로 오고 있다면 기다림이 즐거울 것이다.
나는 혼자다. 빈 손으로 걷고 있는 내 자신이 초라했다. 오늘 꽃다발을 들고 즐
거운 퇴근을 하는 실장님이 떠오른다. 흠, 그래 나도 누군가 만날 사람이 있다
고 가정하자. 초컬릿을 받을 것처럼 꽃 다발을 안고 있자. 꽃을 든 남자는 쪽팔
리기도 하겠지만 아름답다.
"에? 장미가 다 떨어졌어요?"
"오늘 꽃다발이 많이 나가네."
"왜요?"
"고등학생들 졸업식도 있었고, 발렌타인 데이잖아요."
"씨."
"다른 꽃도 괜찮은데. 애인에게 줄 것 맞지?"
"당연하죠. 초컬릿 받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뭐가 좋을까?"
국화는 좀 이상하다. 국화는 초상집에서 많이 봤는데... 그래도 내가 들고 있
는 것은 소국이다. 노랗고 하얀 소국 한 다발을 가슴에 품고 걸었다. 국화 안고
걷는 사람 한 명도 안 보였다. 변명하자.
선물의 집에 들어 가 엽서 한장과 귀여운 펜 하나를 샀다. 어디가지? 그래 카페
가 좋겠다. 어짜피 칵테일 마시려고 나왔는데 잘 됐다. 애인을 기다리는 척 칵테
일을 두 잔 시켜 놓고 기다리자.
카페에 앉아 포즈를 잡았다. 헨드폰을 꺼내 놓고 담배를 물었다. 그리고 내 한
쪽 옆 좌석에다 소국 한다발을 내려 놓았다.
메뉴판을 보았다.
"딱!"
멋있게 웨이터를 불렀다.
"난 체리 블러섬, 그리고 한 사람 더 올거야? 아도니스로."
체리 블러섬은 위스킨가 브랜딘가를 섞어 좀 독하고 아도니스는 와인에다 쉐리
를 섞어 순한 편이다. 나 상대를 배려하며 멋있게 시킨 거 같다.
우쒸! 색깔이 같다. 어떤게 아도니스지? 에라 모르겠다. 어짜피 두 잔다 내가
마실거. 아무렇게나 놓아 두자. 웨이터가 알아서 내려 놓았겠지. 난 체리 블러
섬 했으니까 내 앞에 놓인 게 그게 맞을 거다.
이제 소국에 대한 변명을 하자.
엽서를 꺼내었다. 그리고 적었다.
국화는 늦은 가을 서리를 먹고
꽃을 피우지요.
그리고 높은 하늘을 배워 갑니다.
국화에게 가을 하늘은
아마도 사랑의 대상이겠지요.
소국 한 다발은 외롭지 않습니다.
내 청춘 이제는 늦가을입니다.
당신과 어깨를 기대어
하늘을 보고 싶습니다.
초컬릿을 주신 당신께
나는 국화가 되어 사랑을 배워 가겠습니다.
From.S.H.Song
변명 했다 씨. 카드를 소국 다발 깊숙히 박아 넣었다.
가만히 앉아 있었다. 내 앞에 놓인 체리 빛의 칵테일을 차마 마실 수 없었다.
너무나 곱다. 내 맞은 편에 놓인 칵테일도 곱다. 누군가 내 맞은 편에 앉았으면
좋겠는데... 먹은 것도 없는데 화장실은 왜 가고 싶냐?
그 여자의 발렌타인 데이 밤.
화장실에서 나오다 낯이 익은 어떤 놈과 마주쳤다. 어디서 봤을까? 날 보고 히
죽 웃는다. 그래! 그 놈이다. 아침에 내 구두 망가뜨린 놈. 우리 아파트 7층에
사는 놈. 우연이네. 오늘 여기서 약속이 있나 보다. 배 아프다.
나중에 저 사람 나오면 어디 앉는지 잘 봐야지. 그리고 그 넘 여자 친구가 얼마
나 예쁜지도 봐야 겠다. 못생겼으면 놀려 줘야지. 아니다, 저 넘 차에다 락카로
이 새끼 애인 열라 안 생겼다. 라고 써 놔야 겠다. 예쁘면 어떡하지? 그러면 슬
플 것 같다.
자리에 앉아 저 녀석이 잘 보이게 테이블 위에다 초컬릿 박스를 올려 놓았다. 절
대 꿀릴 순 없다.
주스 잔이 허전하게 비워져 있다. 오랜 시간 여기 앉아 있었던 걸 들키면 안된
다.
"여기요. 잔 좀 치워 주시구요. 메뉴판 다시 갖다 주세요."
다행히 그 넘이 나올 때 웨이터가 메뉴판을 가지고 와 주었다. 금방 들어 온 것
처럼 주문해야 겠다.
"알콜 없는 칵테일이 어떤 거에요?"
아침에 소주 한 병, 저녁에 매취 순 한 병. 더 이상 알콜이 들어 가면 큰일 날
것도 같다. 하지만 주스나 커피를 시키기는 싫었다.
"골드메달리스트로 드세요."
그 넘이 앉은 자리에는 체리 빛의 고운 잔이 두 개가 있었다. 녀석은 담배를 물
고 앉아 나를 힐끔 힐끔 쳐다 본다. 기다리는 사람이 애인인가? 애인이 나보다
못생겼나? 국화? 발렌타인 데이때 국화가 뭐냐? 삭막한 놈 같다.
한 시간 동안 그 넘과 대치했다. 힐끔 힐끔 쳐다 보며 서로 의식하고 있는 중이
다. 바람 맞았나 보다. 맞은 편 고운 잔의 모습이 애처롭다. 녀석은 빈 잔의 스
트로를 열심히 빨고 있다. 그게 쭈쭈바냐? 그만 빨아라 짜샤. 그 넘은 나와 눈
이 마주칠 때마다 웃는다. 비웃는거냐? 자네도 뭐 처량하긴 마찬가지네. 난 최소
한 바람 맞은 건 아니다. 헤헤, 같이 웃어 주었다. 저 녀석 보다 먼저 나가면
나 바람 맞은 걸로 오해 받는다. 버티자.
녀석이 일어 섰다. 가려나? 아니다 내게로 온다.
나에게 말을 걸면 어떻하지? 저 넘이 혹시 바람맞고 나에게 화풀이 할 생각은
아니겠지? 아니면 저 넘이 내게 수작을 부릴려구? 긴장 된다.
녀석은 내 앞에 서 히죽 웃고는 그냥 지나쳐 화장실로 가 버렸다. 저건 분명 비
웃음이다. 나쁜 놈.
골드메달리스튼가 뭔가 이거 양 엄청 많네. 그냥 앉아 있기 그런데 화장이나 고
치고 오자.
우뛰! 이런 쪽팔린 경우가. 그 넘이 날 보고 있다는 착각에 우아하게 걷는 다
는 게 그만 다리를 헛 디뎠다. 틱! 그대로 옆으로 넘어 졌다. 다행히 최대한 우
아하게 넘어 지려고 한 탓에 그냥 바닥에 꿇어 앉는 것에 그쳤지만 많은 사람들
이 쳐다 본다. 오늘 고친 구두 뒷 굽이 또 나갔다. 내일 구두 수선한 아저씨에
게 따져야 겠다. 이딴 식으로 고쳤단 말이지? 가만 이게 누구 때문에...
"안 다치셨어요?"
그래도 꼴에 내가 예쁜 줄은 알아가지고... 그 넘이 내게 달려 와 날 일으켜 세
우고 부축해서 내 자리에 데려다 주려 한다.
"괜찮은데..."
부축 받다가 그 놈 힘들게 하려고 아예 매달렸다. 힘들지 이 놈아. 뭐야 이거!
한 번 더 꼬꾸라 졌다! 녀석이 힘을 주지 않고 있었다. 나는 다시 주저 앉았고
그 넘은 등 높은 의자에 코를 박았다. 피!
여기 더 이상 못 있겠다. 쪽팔리다. 기회다. 바람 맞은 것처럼 보이지 않고 이
카페를 나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근데 나 나가지 못했다.
계산하면서 그 넘을 보았는데... 나도 아침에 코피를 흘렸는데 저 사람 나와 뭔
가 인연이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뒤 돌아 섰다.
그 남자의 발렌타인 데이 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화장실에 들어 가다 낯익은 아가씨와 마주쳤다. 아 맞다. 우리 아파트 아가씨구
나. 저 여자도 애인이 있었나 보네. 에구, 내 주위에는 모두들 애인있는 여자들
뿐이구나.
막 들어 왔나? 그녀는 이제 주문을 한다. 두 잔 시켜 놓기를 잘했다. 최소한
난 지금 누굴 기다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국화지만 꽃 다발을 테이블 위에 올
려 놓고 여유 있는 척 담배를 물고 음악을 감상했다. 그리고 힐끔 힐끔 그 여잘
쳐다 보았다. 저 여자도 날 자주 쳐다 보았다. 후후, 카페 조명 탓일까? 제법 예
쁘다. 저 정도 미모니까 오늘 같은 날 초컬릿 줄 사람도 당연히 있겠지. 정성이
담긴 초컬릿 바구니가 참 부럽다.
잔을 비우고 스트로우만 빨고 앉았더니 그 여자가 혀를 차는 것 같이 보인다.
뭐 자네 혀 찰 처지는 아닌 것 같네. 벌써 한 시간이다. 이쯤 되면 바람 맞았거
나 차였다고 생각해라. 생긴 건 멀쩡한데 아침부터 좀 안되어 보인다. 저 여자
의 애인 얼굴이 궁금하다. 나 절대 저 여자에게 바람 맞은 꼴 보이기 싫어 버티
고 있는게 아니다. 과연 나타날까? 나타나면 얼마나 멋있게 생겼을까? 그 것이
궁금하여 여기 앉아 있는 것이다.
안 나타난다. 저런 건 비웃어 주어야 한다.
그 여자 앞으로 가 보았다. 그리고 실 쪼개 주었다. 큰 눈망울을 위로 하고 날
보는 그 여자의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순간 잘못왔다는 생각을 했다. 바로 내
심장이 굳어져 가고 싶지도 않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저 여자 아침에 본 것처럼 개그맨인 것 같다. 화장실에 다녀와서 그녀와 대치
를 계속 했다. 그녀가 섹쉬하게 잔을 놓고는 나 쪽으로 야릇한 눈 빛을 보이고
는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 나 사뿐히 화장실 쪽으로 걸어 갔다. 우아하게 잘
가다가 픽 꼬꾸라 졌다. 바닥에 섹쉬한 포즈로 꿇어 앉아 멍청한 표정으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있다. 이웃 사촌인데 모른 척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아
는척 하자니 쪽팔릴 것 같다. 그래도 오늘 아침의 인연과 우연히 같이 있게 된
지금의 인연으로 달려 가 그녀를 부축해 주었다.
한발 짝 떨어 져 있을 땐 코메디처럼 보이더니 가까이 가니 가슴이 떨린다. 그
녀를 일으켜 세울 때 손을 잡아 주었고 부축할 때는 그녀의 등을 감싸 안은 모양
새가 되어 버렸다. 두근거림, 그리고 조심스러움, 그녀의 좀 추운듯한 원피스의
촉감이 그 속에 있는 그녀의 살 내음새 때문에 부담스럽다. 그냥 손을 대고만 있
었을 뿐 그녀와 접촉이 될 때마다 떨려서 힘을 주지 못했다. 뭐야 이거! 많이 다
쳤나? 갑자기 그녀가 무거워 지더니 한 쪽으로 휘청 기울어 졌다. 그녀는 다시
주저 앉았고 난 잠시 별을 보았다.
피! 아침에도 흘렸는데...
뭐 저런 여자가 다 있냐? 자기 때문에 코피가 터졌는데 혼자 쪽팔림 면해 보자
고 계산을 해 버리다니... 나 저 여자에게 시위를 했다. 웨이터가 네프킨을 갖
다 주며 닦으라 했지만 나 그대로 피 흘리며 나가려는 그녀를 째려 보았다. 뭘
보냐? 코피가 뚝 뚝 흘러 내 와이셔츠를 버리고 있다. 다른 사람들이 막 쳐다 보
지만 닦지 않았다. 그냥 피를 흘리며 나가는 그녀만 바라 보았다.
생각해 보니까 저 여자 차 앞에다 내 차를 주차시켜 놓았다. 내일 나 전철 타
고 갈 거다. 두고 보자.
그녀는 나가지 않았다. 나가다 고개를 돌리고 내게로 왔다. 미안해서, 그리고
내 고마움에 답을 해야 할 것 같아서, 그래서 내게로 오는 줄 알았다.
"구두 값 내 놔요."
"에?"
"오늘 댁 때문에 구두 뒷 굽 나갔어요. 내 놔요."
"내 피 값 내 놔요."
어라! 그녀가 백에서 손수건을 꺼내 준다. 나 그녀의 백에서 휴대용 화장지 보
았다. 하지만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주었다.
"괜찮아요?"
그녀의 손수건을 받아 테이블 위에 놓고 냅킨으로 피를 닦았다. 그리고 구멍을
막았다. 괜히 미안해서 그녀에게 괜찮냐고 물었다. 그녀가 내 연인의 자리에 실
앉는다. 그리고 웃는다.
"저도 그런 말 하려고 한 게 아닌데... 아까는 고마웠어요."
"괜찮아요."
"바람 맞았어요?"
"네?"
"기다리는 사람이 안오나 보네요?"
"하하. 그 쪽도 바람 맞았어요?"
"아니에요. 전 그냥 뭐..."
"저도 바람 안 맞았어요."
"기다린 사람이 누구에요?"
"그 쪽은요?"
"저 기다린 사람 없어요."
"나도 마찬가진데."
멀뚱히 서로를 보고 뭔가 아는 듯한 웃음을 웃었다. 난 그녀에게 동질감을 느꼈
다.
"전 702호에 살구요. 송승헌이라 합니다."
"저는 902호에 살구요. 이수지라고 해요."
"그럼 그대는 바로 제 위에서 잠들고 깨고 했겠네요."
"그렇나요?"
"이웃인데 알고 지내요."
"그러죠."
"오늘 바람 맞았죠?"
"아니에요!"
그 여자와 이야기를 했다. 한 시간을 더 그녀와 함께 카페에 있었다. 푸하하!
난 너무나 웃었다. 그녀의 사정을 듣고 너무나 웃기고 가슴이 따뜻해져 웃었다.
그 여자도 내 얘기를 듣고 비웃 듯 웃었다. 밝은 표정으로... 기분 나쁘지 않았
다. 저 여자는 나와 같은 처지다. 하하, 이런 인연도 다 있구나.
뭐여? 내가 언제 마시라고 했냐? 그녀는 자연스런 분위기가 되자 자기 앞에 놓
여 있던 칵테일을 마시기 시작했다. 나도 한 잔 더할까? 아까 독한 걸 마셨으니
이 번엔 그녀와 같은 걸로 마시자.
"여기요. 아도니스 한 잔 주세요."
웨이터가 가지고 온 아도니스, 그녀가 지금 마시고 있는 것과 같지 않았다. 아
까 내가 마신 거와 같았다. 그럼 저게 체리 블러섬인가?
그녀는 그 걸 다 마시고 나더니 혀가 꼬꾸라 졌다.
둘이 어깨 동무하고 나왔다. 그녀의 부러진 구두가 좋은 핑계거리가 되었다. 그
리고 기분 좋게 택시 타는 곳까지 걸었다.
"발렌타인 데이? 코메디야. 사랑하면 이딴게 뭐가 필요 있어? 안그래요 승헌
씨?"
"맞아요. 초컬릿? 다 상술이야."
"그래요. 하하."
그녀는 한 손에 초컬릿 바구니를 들고 기분이 좋은 듯 흔들었다. 나도 한 손에
든 소국 한다발을 공중에 흔들었다.
그녀와 같은 택시를 타고 집으로 왔다. 그녀는 술이 좀 깼는지 날 보고 한 번
웃어 주더니 잘 자라는 인사를 해 주었다. 그래 잘 자요.
엘레베이터도 같이 탔다. 인사를 한 탓일까? 우리는 엘레베이터 안에서 침묵했
다. 그녀는 술이 덜 깼는지 좀 더 수줍게 서 있다. 머리를 엘레베이터 벽에다 대
고 수줍게 눈을 감고 있다. 한 쪽 구두는 맛이 갔다. 웃기다.
나 칠층에서 내리지 못하고 9층까지 따라 올라 갔다. 그녀는 깰 생각을 하지 않
았다. 엘레베이터에서 자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를 부축하고 그녀의 아파트 앞까
지 갔다. 그리고 그녀가 집으로 들어 가는 걸 보고선 내려 왔다.
내 방에 들어 와 기분이 좋았다. 하루 중 대부분이 처량했지만 그 끝은 괜찮았
다. 내일 그녀를 보면 인사나 해야지. 그러다 친해지고 정들고 하는 거지 뭐.
근데 뭔가 이상하다. 내가 오늘 이런 초컬릿 박스를 받은 기억이 없는데... 내
가 이걸 왜 들고 왔지? 그 참... 바뀌었구나. 내일 도로 갖다 주자.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침에 일어 나 내 책상위에 있는 그녀의 초컬릿 바구니를 보았다. 어제의 기억
이 좋았다. 그녀와의 기억이 오늘 아침을 상쾌하게 만들고 있다. 초컬릿 박스.
어쩌면 저건 날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인연인가?
하나만 빼 먹을까? 그래 그러지 뭐.
어랏! 엽서가 있네. 읽어 볼까? 그래 이왕 뜯은 거 읽어 보지 뭐.
읽고 나 가슴이 저려왔다. 그냥 이 초컬릿 박스 나하고 싶다. 그래 이건 분명
나를 위한 거다. 내 꺼 해 버리자. 그리고 이 엽서는 그녀가 내게 준 것이다. 하
하. 배째. 여자에게 배 째어 보이는 것도 낭만이 있을 것 같다.
출근하러 나갔다가 날 기다린 그녀를 보았다. 하하. 그녀는 내게 막 화를 내려
다 내 웃는 모습을 보고 웃었다. 그녀는 내가 준 꽃 다발을 가지고 오지 않았
다. 그리고 초컬릿 바구니 내 놔란 소리도 하지 않았다. 그래! 우리는 발렌타인
데이 때 초컬릿과 꽃다발을 주고 받은 사이다.
그녀를 내 인연으로 하고 싶다. 이제 부터 노력하면서 말이다.
"좋은 아침입니다!"
"차나 빨리 빼줘요. 오늘 지각이에요!"
그런가? 나도 지각이네.
그녀의 발렌타인 데이 다음 날.
아침에 일어 나니 내 머리 맡에 국화 한 다발이 놓여 있다. 내가 왜 저걸 들고
왔지? 이상하네... 그 넘이 주었나? 아닌데... 아, 술 기운에 바뀌었구나. 오늘
퇴근하고 바꿔와야 겠다. 에구 머리야. 어제 외출 나갔던 그대로 잤구나. 샤워부
터 해야 겠다.
오늘 아침은 왠지 외롭지가 않다. 샤워기의 더운물이 좋다. 피어나는 증기가
또 곱다.
왜 피가 나는 걸까? 더운물에 샤워를 하고 가운을 입었다. 머리를 수건으로 말
아 올리고 시원하게 찬 물에 세수를 했다. 그랬더니 피가 났다. 피곤했던 탓일
까? 아니면 사연일까? 어제 그 사람을 생각하라는 암시일까? 나 코에서 흐르는
피를 보며 웃었다. 어제 그 사람 모습이 떠 올랐기 때문이다. 후후.
방으로 돌아 와 그대로 놓여 있는 국화를 보았다. 그냥 돌려 주지 말고 이 걸
내가 할까? 이왕 바뀐거 그냥 바꾸어 버릴까? 바구니 들고 와 물어 내라 하면 어
쩌지? 설마... 그렇게 쫀쫀하려구. 기분 괜찮다. 나도 초컬릿을 주고 꽃다발을
받았다는 생각 때문에... 어짜피 그 사람도 나와 같이 혼자 있는 처량함을 달래
려 꽃다발을 샀다고 했다. 나 하자.
유리 화병을 들고 왔다. 봄이 오는 계절에 가을 국화라. 괜찮을 것 같았다. 화
장대 위에 화병을 놓고 국화 다발을 풀었다. 떨어지는 엽서 한 장을 보았다.
엽서의 글을 읽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하하, 이게 날 위한 사연일까? 그런 걸
까? 그럼 그 사람이 내 인연? 그런건가?
국화를 정성스레 화병에 꼿았다.
그래, 오늘 아침 만약 그를 보게 되면, 우연히 그를 보게 되고 그가 초컬릿 박
스를 돌려 주지 않고 그냥 모른 채 하면 그 사람을 인연으로 생각해 보자.
엘레 베이터는 칠층을 서지 않고 그냥 지나쳐 버렸다. 그 사람은 인연이 아닌
가 보다. 주차장에서 기다려 봐? 그러지 말자. 괜히 초라해 질 뿐이다.
어떤 놈이 차를 이딴 식으로 주차 시킨겨?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려 놓고 이 딴
식으로 주차 시킨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가진 놈은 도대체 누구여? 차가 낯이 익
다.
그 남자, 송승헌씨는 오분 뒤에 내려 왔다. 초컬릿 박스를 들지 않고... 내 얼
굴은 지금 웃고 있다. 그 남자가 내게로 오며 날 보고 웃었다.
난 고고하고 도도하기 때문에 화를 내야된다.
"차나 빨리 빼 줘요."
그는 웃을 뿐이다. 날 바라보며 내 화내는 말투에는 신경쓰지 않고 그냥 웃을
뿐이다. 나도 그냥 그를 따라 웃었다.
"다음달 십사일에 사탕 선물하면 되죠?"
"그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