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역사는 큰 대륙답게 많은 문화와 시대적 배경에서 오는지라 이해하긴 힘들지만 나름대로 백과 사전이나 인터넷자료를 보고 정리한번 해보았습니다.
다소 길지만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는의미에서 한번쯤 정리해보는것도 괜찮을성 싶어 정리를 해봤습니다.
중국역사도 우리나라처름 구석기, 신석기 시대를 거치고 왔다고 합니다.
몽골인종과 관련성을 추측해주는 구석기시대 유물과 함께 호모사피엔스의 화석과 치아가 발견, 그리고 제작기술의 발달, 음식생산과 저장, 사회조직등 신석기 문화는 BC6000년경에 일어 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석기 문화가 일찍 발전했던곳은 물이 있는 황하강 주변이지만, 양쯔강 유역에도 또다른 신석기 문화가 발전 되었다고 하죠
그러던중 신석기 문화인 토끼가 발견 되고 주거가 발견 되면서 남부쪽에서는 탄화된 쌀이 대량발견 되면서 벼농사도 진행되었다는걸 알수 있으며 아마도 BC3300년까지 진행되어 왔다고 보면 될겁니다. 아마도....
그리고 BC17세기 중국의 청동기 문화에 기반을 둔 은나라가 들어 서게 되는데요
은나라 사람들은 자기나라를 상(商)이라 불렀다는데요 이는 은나라 수도 상읍(商邑) 에서 기안한것이라 보면 될겁니다.
주로 신석기시대 문화를 모체로하여 황허강 일대에 형성된것으로 보이는데요
태을(太乙)이 명재상 이윤(伊尹)을 임용 하(夏)나라를 무너뜨린후 은나라를 세우게 되죠
지금의 산둥에 도읍을 정하게 되는데요
이는 아마도 황허강 유역의 신흥문화 지역의 중심지 라는 의미일것입니다.
그이후 은나의의 특색인 부자상속과 왕위 계승으로 인한 도읍 이동등으로 다시 강해지는데요 22대 무정이후 전성기를 맡게 됩니다.
하지만 산시고원이나 산둥 안후이지방의 대정벌 동안 서쪽 산시 지방에서 세력을 넓히던 주나라 문왕에 의해 BC11세기에 은나라를 정복합니다.
문왕의 뒤를 이어 주나라 무왕은 시안근처의 호(鎬)로 옮기고 이를 종주(宗周)라고 했답니다.
그이후 무왕은 남은 은나라를 정벌케 하면서 은나라주왕의 아들 무경에게 엣영토를 다스리게 하면서 동생 관숙과 채숙에게 그를 감시케 했답니다.
하지만 무왕이 죽고 그의 아들 성왕이 제위에 오르지만 주공(周公)이 섭정을 하는데요
관숙과 채숙이 늘 불만을 품게되죠
해서 주공은 은나라의 남은 지역을 흡수케 하며 주공은 동방경영을 위하여 동도(東都) 낙읍(洛邑)을 건설케 합니다.
그뒤로 강왕,소왕,목왕 3대에 걸쳐 가장 번성했으며 군사정벌을 통하여 영토를 확장하게 됩니다.
하지만 목왕이후 지나틴 정벌로 국력이 차츰 쇠퇴해지자 10대 여왕은 국력을 회복하고자 전제정치를 하지만 귀족들의 반발로 지금의 산시성으로 망명하게 됩니다.
그 이후 여왕은 죽을때까지 수도로 들어 오지 못한비운의 왕이 되며 그가 자리를 비우자 재상 공백화(共伯和)가 국정을 장악케 됩니다.
공백화가 국정을 처음 다스리게 된해를 공화원년(共和元年:BC 841)이라 하여 이때부터 중국의 기년(紀年)이 분명해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흉작과 천재지변이 이어져 민심이 흉흉해졌으며 후계 문제로 내란이 일어난 틈에 북방민족의 침입을 받아 BC 771년 수도를 함락당하게 됩죠
이때부터 우리가 잘아는 춘추전국시대가 벌어 지는데요
동주시대(東周時代)의 다른 이름입니다.
주나라 왕실의 세력이 약해지자 100여 개국이 넘는 중원(中原) 지방의 제후들이 반독립적인 상태로 활약하기 시작하죠
이러한 세력들이 서로간의 세력 다툼으로 서로 찌지고 볶고 싸우는 사이 한때 200여개가 넘는 호족들이 말기에는 10여개로 감소 됩니다.
물론 각 호족에서 세력을 싸운 결과물인 셈이죠
해서 중국의 역사를 보면 제(齊)·연(燕)·진(秦)·초(楚)·한(韓)·위(魏)·조(趙)의 7개 국가가 큰 세력을 형성하고 서로 패권을 다투게 됩니다.
물론 전국 7웅(七雄) 가운데 가장 먼저 발전한 나라는 위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급속한 강국으로 부상한 진(秦)의 공격으로 위(魏)는 수도를 옮기면서 조(趙),한(韓),연(燕),제(齊)와 함께 진(秦)과 대항하려 하지만 실패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나라는 잠시나마 서북부 일대를 지배하면서 중원의 여러나라들과 어께를 겨룰정도이지만 그위세는 오래 가지 못하게 되죠.
그이후 진(秦)은 주를 멸망시키고 천하를 평정한 후 전국에 군·현(郡縣)을 설치하면서 천제에 비견하는 절대자라는 의미에서 자신의 존호를 황제라고 하고 시황제임을 선포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秦)은 6개의 국가가 동맹하는 연횡책을 쓰서 방해 하면서 BC 221년 중국을 통일케 합니다.
이에 진(秦)은 BC 214년 광둥·광시 지방과 베트남 북부를 정복, 그리고 흉노를 정벌하기도 합니다.
이에 조(趙)와 연(燕)의 장성을 수축·증축하여 만리장성을 쌓게 되는데요
공사와 정복전쟁으로 인해 농민들의 불만이 고조되면서 시황제가 죽은 후 농민반란이 일어나고 반진(反秦) 세력이 봉기하는 등 국운이 급격히 쇠퇴하다가 BC 206년 유방(劉邦)과 항우(項羽)의 연합군에게 패하여 결국 멸망하게 됩니다.
그해 항우는 자립하여 서초(西楚)의 패왕임을 선포하고 유방을 비롯한 공적이 있는 장군 18명을 각지에 분봉하는데요.
이들은 항우의 조치에 불만을 품어 곧 산둥 지역에서 반란을 일으키게 되죠.
이를 진압하기 위해 항우가 북상한 사이에 유방은 한중(漢中)지금의 산시 성에서 군사를 일으켜 옛 진의 땅으로 들어가 항우와 대적하지만 4년간의 싸움 끝에 패한 항우는 BC 202년 자살, 그리고 유방이 제위에 올라 수도를 장안(長安)에 세우고 한을 창건하게 됩니다.
그이후 국내 제도가 정비되고 주변국과의 관계도 안정되어 후한의 최대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하지만 외척들의 섭정과 함께 왕망정치로 인해 중앙정치가 쇠퇴할 무렵 오환족(烏桓族)과 선비족(鮮卑族)이 북방을 침입하기 시작, 기근과 반란이 이어져 빈곤한 농민들 사이에 미신과 민간종교가 확산되는 시점, 종교왕국의 건설로 인한 한의 타도를 목표로 삼았는데요 이때문에 한의 탄압을 받게 됩니다.
이에 184년 황색 머리띠를 두르고 일제히 봉기하게 되는데요 이을 황건(黃巾)의 난이라고 하는데 얼마 후 장각이 죽자 황건의 세력도 약화되게 됩니다.
그이후 189년 동탁은 소제(少帝)를 폐하고 헌제(獻帝)를 옹립하여 정권을 장악하지만 192년 동탁은 부하에게 살해되고 또 원소는 허난에서 일어난 조조(曹操)에게 격파당하게 됩니다.
그리고 조조는 동북지방의 오환을 정복하여 북부지방을 평정하고 오의 손권(孫權), 촉의 유비(劉備)와 대립하게 되죠.
그러나 적벽(赤壁) 지금의 후베이 성 대전에서 손권과 유비의 연합군에게 패하면서 조조는 아들 조비(曹丕)는 220년 헌제에게서 제위를 물려받아 황제가 됩니다.
이렇게 하여 전후 400년에 걸친 한조도 멸망하게 됩니다.
조비가 제위에 오를 무렵 강남에서는 손권이, 촉에서는 유비가 자신의 세력 기반을 굳혀 3국 정립의 형세를 이루어 지게 되는데요 우리가 많이 봐왔던 삼국지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오는 저장·장시 등의 산지에 사는 산월(山越)을 굴복시켰으며
촉은 재상 제갈량(諸葛亮)이 국정을 보좌하여 윈난[雲南] 지방의 원주민을 복속시켰으며
중원에 위치하여 세력을 키운 위(魏)의 국력이 가장 강했다고 하는데요
위는 사마의(司馬懿)의 아들인 사마소(司馬昭)의 계획에 따라 263년 촉으로 토벌군을 보내 항복시키게 되죠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司馬炎)은 265년 제위를 물려받아 진(晉)을 세우는데요
진은 280년 오를 평정 천하통일을 합니다.
통일 후 무제, 즉 사마염은 자신의 일족을 여러 나라의 왕으로 봉했다는데요
봉왕(封王)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에게 병권을 주어 지방관을 다스리도록 했다고 합니다.
이는 봉왕에 대한 충성심을 갖게 하고 봉왕은 황제에게 충성하도록 하여 관리들에 대한 황제의 지배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사실상 봉왕제의 강화가 도리어 동족간의 싸움을 격화시켜 8왕의 난(291~306)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기도 했엇죠
이때 여러 왕들이 흉노를 비롯한 북방민족의 무력을 이용함으로써 이들 민족은 본격적으로 중원의 분쟁에 개입하게 되는데요
결국 316년 흉노의 유씨(劉氏)에 의해 뤄양과 장안이 함락됨으로써 서진은 멸망하게 됩니다.
그 이후 강남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낭야왕(琅邪王) 사마예(司馬睿)가 건강(建康) 즉 지금의 난징에서 즉위 317년 동진(東晉)을 세우게 됩니다.
하지만 정치상 싸움과 반란이 잇따르지만 그레도 분열 되지는 않고 5호16국과 함께 이어 가게 되죠
5호(五胡)란 흉노(匈奴)·갈(?)·선비(鮮卑)·저(?)·강(羌)의 다섯 북방민족을 말하는데요
이들 민족들이 세운 성(成:漢)·하(夏)·전조(前趙)·후조(後趙) 등의 16국은 존속기간이 짧게 됩니다.
그이후 581년 제위에 오른 양견은 남북조시대의 오랜 혼란에 종지부를 찍고 400년 만에 중국을 재통일하게 되는데요
양견은 북주를 세운 우문태 휘하에서 활약한 무장 집안 출신입니다.
그리고 그는 개황율령(開皇律令)을 반포하여 제도를 정비하고 중앙집권화를 위한 관료지배를 강화하면서 강력한 군사력을 구축하고 북방 돌궐(突厥)에게 이간책을 써서 내부분열을 꾀하게 하는데요
물론 명목상 독립상태에 있던 양쯔 강 중류의 후량(后梁)을 정복하고 이어 강남에 있던 남조 최후의 왕조 진(陳)을 공격하기 위함입니다.
왕자인 진왕(晉王) 광(廣)을 총사령으로 한 수의 수십만 대군은 문약한 진을 곧 패배시키고 589년 천하통일을 실현, 천하를 통일한 뒤 문제(文帝), 즉 양견은 중앙과 지방의 통치조직을 중앙집권화하고 호족세력을 억압했으며 백성을 철저히 관리하게 됩니다.
즉 호구 조사를 강행하여 백성을 모두 호적에 등록시켰으며, 수적법(輸籍法)을 실시해서 조(租)와 조(調)를 효과적으로 징수했으며. 또한 남북을 잇는 운하를 건설하고 균전제(均田制)에 의해 민생안정을 꾀했으며, 관창(官倉)의 비축을 늘려 국가의 부를 충실히 했었죠.
물론 그뒤를 이어받은 양제는 황태자를 실각시키고 아버지 문제를 시해한 뒤 제위에 올라 대외팽창정책을 계속 추진하지만 고구려와 싸움에서 거의 괴멸 되는 수나라 입니다.
그렇게 수는 내분의 싸움으로 전국은 군웅할거상태가 되고 돌궐 방위의 요지인 태원(太原)의 유수(留守) 이연(李淵) 이 돌궐의 원조를 받아 수도 장안을 제압후 618년 놀이차 나온 양제가 친위군의 반란으로 시해되자 이연은 당나라를 세우게 됩니다.
이연의 아들인 이건성(李建成)·이세민(李世民) 형제는 뛰어난 용기와 지략으로 각지의 할거세력들을 차례로 평정하고 천하를 통일하게 되는데요
특히 이세민은 천하평정 뒤 태자인 형과 동생들을 죽이고 아버지로부터 제위를 물려받았는데요 한대 이래 최고의 위세를 과시하게 됩니다.
한때 고구려와 전쟁에서 연개소문에 의해 눈에 화살을 맞고 빼먹었다는 그런 설이 있는사람이죠
그이후 태종의 뒤을 이어 고종이 병사하자 황후인 측천무후는 자기아들을 내세워 섭정을 하게 되고 또 현종 제위 후반에 정치의 흥미를 잃어 양귀비리는 인물이 나오기도 하고 물론 그때 양귀비오빠인 양국충(楊國忠)이 정권을 장악했는데요
변방 10명의 절도사체제와 이민족 장군의 중용 등에 의해 지방세력의 비중이 커져 중앙의 권위를 위협하게 됩니다.
755년에는 안사(安史)의 난이 일어나 반란군이 뤄양에 이어 장안까지 점령했고 황제는 쓰촨으로 피난하게 되는데요
위구르족의 도움을 받아 일단 진정되었지만, 10년에 걸친 동란으로 수·당 전기의 지배체제는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됩니다.
결국 헌종(憲宗)이 환관에게 살해된 뒤 당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황제가 환관에 의해 옹립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 병란과 민란이 일어나고 특히 황소(黃巢)의 난은 전매정책으로 괴로움을 받는 주민과 연대관계에 있던 사염상(私鹽商) 무리를 핵심으로 하급병사와 굶주린 농민이 가세하여 당 제국을 거의 황폐화시켰으며, 한때 장안까지 점령합니다.
곧 난은 곧 진압되었지만 투항한 황소의 부하 주온(朱溫)이 당을 멸망시키고 제위에 오르게 됩니다.
주온이 후량(後梁:907~923)을 세운 뒤부터 소위 5대10국으로 불리는 분열시대가 시작되었죠.
후량 이후 후당(後唐:923~936)·후진(後晉:936~947)·후한(後漢:947~951)·후주(後周:951~960)로 이어지다가, 후주의 금군(禁軍)을 장악했던 조광윤(趙匡胤)이 제위를 이어받아 송을 세워 70년 만에 천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그리고 태조·태종 때는 각지에 할거하는 절도사의 권력을 빼앗아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게 하고 되는데요
태조는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채택하여 문관 관료정치기구를 확립시켰으며, 절도사는 관할지방에서 수도로 불러들였으며, 그들의 군대를 해체하여 그 가운데 정예부대로 금군을 확충·강화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러한 문치주의는 군대의 약체화와 조정 대신들간의 당파싸움이라는 폐단을 낳게 됩니다.
또 송은 요(遼)가 차지하고 있는 연운(燕雲) 16주를 회복하는 것이 건국 이래의 숙원이었지만, 실지 회복은커녕 진종(眞宗) 때 맺은 맹약에 의해 매년 요에게 은 10만 냥, 비단 20만 필을 세폐(歲幣)로 보내야 했으며 더욱이 인종(仁宗) 때에는 세폐가 더 증가했었다고 합니다.
또 서북변경에 탕구트족이 세운 서하(西夏)도 송에게 큰 부담이 되었었죠.
1044년에 맺은 화약에 따라 송은 서하에 매년 은 7만 2,000냥, 비단 15만 3,000필을 보냈지만 서하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자주 국경을 침범합니다.
이때문에 송은 항상 대군을 산시[陝西] 지방에 배치해야만 했는데 여기에 드는 방위비가 세폐와 함께 막대한 액수에다, 한편 조정에서는 과거제도와 관료제도상의 모순이 붕당을 형성하여 4대 인종 이래 당파싸움이 끊임없이 이어지기도 했었습니다.
이 무렵 만주 쑹화 강[松花江] 지류인 아르티카 강 유역에 살던 여진족의 일부인 완안부(完顔部)는 1115년 아구다(阿骨打)의 영도하에 금(金)을 세워 요를 치고 요동지방을 차지합니다.
송은 금과의 동맹으로 남북에서 요를 협공해 건국 이래의 숙원인 연운지방의 회복을 이루려 했지만. 금군은 송과의 맹약에 따라 파죽지세로 요를 물리쳤지만 송은 요에게 패하여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 공략에 실패합니다.
그리고 연경은 금군에 의해 함락되었으며, 1125년 요도 멸망합니다.
송은 금에게 거액을 지불하고 연경 및 6주를 넘겨받았지만 그때부터 금은 공격 목표를 송으로 돌리고 남하하기 시작하게 됩니다.
1127년 금군은 결국 수도 카이펑을 점령하여 황제와 종실 3,000명을 북으로 끌고 갔으며 온갖 금은 재화를 빼앗아 가고 결국 송은 멸망합니다.
칭기즈 칸에서 시작되는 몽골 제국은 13세기 중엽 중국을 포함한 동아시아 거의 전지역을 정복하고 원(1271~1368)을 세워 약 1세기에 걸쳐 이곳을 지배합니다.
원나라는 킵차크·차가타이·오고타이·일 한국(汗國)을 포괄하는 몽골 제국의 종주국이었고, 중국 전통을 이은 정통왕조로 세조 쿠빌라이 칸에 의해 처음 세워졌었다고 합니다.
거대한 중국 대륙 전체를 지배하게 된 원은 소수 지배민족이 인구나 생산력에서 훨씬 우세한 피지배민족을 다스릴 수 있도록 엄격한 민족차별정책을 취했는데요
자신의 지배하에 있는 민족을 크게 국족(國族)·색목인(色目人)·한인(漢人)·남인(南人)의 4개 부류로 분류하고. 국족이란 지배민족인 몽골족을 가리키며, 색목인이란 투르크계·이란계·유럽계 등의 서방에서 건너온 인종집단을, 한인은 발해인·여진족·거란족·한족 등 금의 지배하에 있던 사람들, 남인은 남송의 지배 아래 있었던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물론 이 가운데 색목인은 국족인 몽골족에 버금가는 대우를 받았으나, 한인은 색목인보다 한 단계 낮은 대우를 받게 됩니다.
남인은 가장 냉대받고 정치에도 거의 참여하지 못했는데요
7,000만 명의 한인과 남인이 100만 명도 안 되는 몽골족에게 차별 대우를 받으며 지배되던 원대에는 민족간의 갈등이 심각해졌다고 합니다.
그리고 원의 마지막 황제인 순제(順帝:토곤테무르)가 즉위 10년간 조정에서는 일대 내란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내란이 진정된 뒤에도 권신(權臣)들에 의한 전권(專權)이 이어집니다.
이같은 중앙의 정치적 혼란을 틈타 지방에서는 독립의 경향이 싹터 관군의 힘이 약해졌으며, 산둥과 강남지구에 한인·남인들에 의한 민족적 반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미 혼란에 빠진 중앙의 조정이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해 반란은 점차 다른 지역에까지 확대됩니다.
1368년 순제가 결국 명군(明軍)의 공격을 받아 대도를 버리고 고비 사막 북부로 도망갔다가 그곳에서 죽음으로써 원은 11대 98년 만에 멸망합니다.
주원장(朱元璋)은 빈농 출신으로 어려서 부모형제를 잃고 전국을 유랑하다가, 25세에 홍건군의 부장 곽자흥(郭子興)의 병사가 되어 처음으로 군대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데요
1356년 양쯔 강을 넘어 집경(集慶:지금의 난징)을 기반으로 하여 차츰 세를 넓혀 가는데요, 1363년 장시·후베이에서 진우량(陳友凉)을 격파하고 다음해 자립하여 오왕(吳王)임을 선포합니다.
1367년 장사성(張士誠)·방국진(方國珍)을 장쑤·저장에서 격멸하여 마침내 화중[華中] 일대를 제압하면서 서달(徐達) 등을 북쪽으로 보내 원군(元軍)과 대결하게 하고, 다음해인 1368년 정월에 제위에 올라 국호를 명(明), 연호를 홍무(洪武) 하면서 서달의 군대가 8월에 대도(大都:지금의 베이징)를 함락시켜 원은 고비 사막 북쪽으로 물러나게 하면서 1383년 윈난에 남아 있던 원의 일족인 양왕(梁王)을 멸망시켜 비로소 중국 전체를 통일합니다.
한족 왕조를 다시 세운 홍무제는 원의 이민족제도를 폐지하고 중국 고유의 제도로 돌아간다는 복고주의적 방침 아래 적극적으로 내정개혁에 착수하게 되는데요
중국 역사상 더욱 강화된 중앙집권에 의한 군주독재체제를 확립하게 됩니다.
하지만 1398년 홍무제가 죽고 손자인 건문제(建文帝)가 제위에 올랐을 때, 이들은 이미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는데요
건문제가 여러 왕들의 봉지를 줄이려 하자, 연왕(燕王)이 반란을 일으켜 4년간의 싸움 끝에 제위를 찬탈합니다.
이렇게 즉위한 영락제(永樂帝)는 찬탈자라는 지위상의 오점을 만회하기 위해 대외정벌에 적극적으로 나서는데요.
우선 동북쪽의 여진을 다스리고 남쪽 안난(지금의 베트남)의 정권 다툼에 개입하여 명에 의한 직접통치를 확립시키는 한편, 몽골의 타타르 부족에 대한 원정을 5차례 지휘하게 됩니다.
또 인도양을 거쳐 동아프리카까지 원정대를 보내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이후 정통제, 성황제, 홍치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정치가 문란해져 민란과 종실 봉건왕들의 반란이 일어나고
가정제 때는 북쪽 변방에서 몽골의 타타르 부족이 더욱 강성해져서 중국 국경을 자주 위협했으며 남동 연해지방에서는 왜구가 발호했다고 합니다.
그러는 사이 만주에서는 여진의 여러 부족이 누르하치(奴兒哈赤)의 강력한 통치력을 바탕으로 통일되어 강대한 세력을 형성하게 되는데요
누르하치가 1616년 후금(後金)을 건설하자, 명은 후금을 견제하기 위해 대군을 파견했지만 패하고 선양[瀋陽]·랴오양[遼陽]을 후금군에게 빼앗기게 됩니다.
그리고 북방 방위에 드는 군사비를 조달하기 위해 명이 각종 부과세를 징수하여 농민의 세금부담이 중가하는데다가, 1628년 산시 성[陝西省]에서는 옌안[延安] 지방의 대기근으로 농민반란이 일어납니다.
반란군은 기민(飢民)과 도망한 병사들을 흡수하면서 세력이 점차 확대되어 허난·쓰촨·후베이·안후이까지 세력을 뻗치게 되는데요
1643년 이자성(李自成)이 이끄는 반란군이 베이징을 함락시키자 숭정제(崇禎帝)는 자살하고 명은 멸망하게 됩니다.
이때 황후와 궁여들이 많아도 자살했다죠 아마도...뭐 더럽히기전에 자살하라는 어명이.....
만주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된 누르하치는 후금을 세우고 칸[汗]의 지위에 오르는데요
누르하치에 이어 칸에 즉위한 홍타이지(皇太極)는 우선 물자확보를 위해 조선을 침공하고 형제관계를 맺었으며, 원의 직계가 대대로 이어오던 옥새를 손에 넣고 스스로 제위에 올라 국호를 대청(大淸)이라고 하고 국가기구의 중심은 누르하치 때에 만주족을 재편성하여 만든 군사·행정 조직인 팔기제(八旗制)였지만 홍타이지는 한족 지식인을 대거 등용하고 명의 중앙관제를 모방하여 6부 등을 설치하게 됩니다.
그리고 홍타이지가 죽고 어린 순치제(順治帝)가 즉위하자 숙부인 도르곤이 섭정하는데요
1644년 명이 이자성의 난으로 멸망하자 청은 투항해온 명의 장군 오삼계(吳三桂)의 도움을 받아 산하이관[山海關]을 넘어 베이징에 입성합니다.
청군이 베이징에서 이자성을 몰아낸 뒤 순치제는 선양에서 베이징으로 옮겨와 이곳을 수도로 정하게 되죠
이때부터 청은 명을 계승하여 중국의 왕조가 됩니다.
그리고 청이 입관한 후 청에 대한 저항세력을 평정하는 데는 20여 년이 걸렸다는데요.
이 과정에서 큰 공로를 세운 오삼계(吳三桂) 등의 군벌이 윈난·광둥·푸젠 성에 봉해져 제후에 맞먹는 반독립적인 세력을 형성합니다.
이들은 강희제(康熙帝)가 자신들을 축출하려 하자 반란을 일으키는데요.
1683년 강희제는 결국 이들을 진압했으며, 같은 해 타이완[臺灣]까지 정복합니다.
청은 강희제·옹정제(雍正帝)·건륭제(乾隆帝) 때 전성기를 누리게 되는데요
1840년 아편전쟁 으로 결정적인 타격을 받은 청은 이후부터 1911년 신해혁명 으로 중국의 전제군주제가 무너지기까지 중국인들은 가중되는 외압 속에서도 근대화를 향한 자구(自救) 노력을 계속하게 됩니다.
그리고 봉건세력과 제국주의의 끊임없는 방해로 모두 실효를 거두지 못하고, 중국은 반식민지 사회로 전락해가죠
이는 1600년 대중국 무역은 영국이 인도 및 극동 지역과의 무역촉진을 위해 설립한 회사인 동인도회사를 통해 이뤄 졋는데요
계속되는 무역적자를 줄이기 위해 아편을 중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는데요 그뒤로 아편을 사용하는 풍습이 중국 전역에 확산되어 아편 수입이 갈수록 증가하자 청은 아편을 엄금하고 아편 사용자를 사형에 처하는 엄격한 법률을 만드는 한편 광저우에 임칙서(林則徐)를 파견하여 아편 수입을 금지시키도록 하면서 외국 상인들에게 앞으로는 아편을 가지고 다니지 않겠다는 서약서를 쓰도록 하고 또 그리고 이것을 거부한 영국 상인들을 마카오에서 쫓아내기도 합니다.
이에 1840년 중국에 선전 포고를 하면서 아편전쟁으로 이어졌는데요 결국 청은 영국에 굴복 홍콩 할양, 배상금 지불, 광저우·아모이 등 다섯 항구의 개항을 약속한 난징 조약[南京條約]을 맺게 됩니다.
그이후 1856년 홍콩에서 애로호(號)에 중국 관헌이 난입한 것을 빌미로 프랑스와 함께 중국을 공격하는데요 이 전쟁으로 톈진 조약[天津條約]과 베이징 조약이 맺어져 중국은 영국·프랑스에 배상금을 지불해야 했으며 이외에도 영국에 주룽 반도[九龍半島]를 할양하고, 한커우[漢口]·톈진·난징 등의 항구를 새로 개항하며, 공사의 베이징 주재, 외국인의 내지 여행, 그리스도교 포교의 자유 등을 허가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편전쟁은 18세기말부터 시작된 중국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켰고, 거액의 배상금 부담이 농민에게 전가되어 농민의 유민화는 더욱 심해졌으며 청의 위신은 땅에 떨어지고 곳곳에서는 폭동이 일어납니다.
하지만 폭동은 수십년에 걸쳐 진행되지만 결국은 청의 붕괴를 가져오는 계기가 마련 됩니다.
그리고 주변 열강들과의 전쟁에서도 직접적인 영향아래 놓이게 되는데요
프랑스와 배트남을 원조 하면서 싸운 전쟁, 그리고 조선에서의 세력권 확대를 위해 일본과의 전쟁에서 패하는등 많은 배상금을 지불하는 등 대내외적으로 많은 고통이 뒤따르게 합니다.
그리고 그이후 1911년 청의 철도국유화령은 광둥·후난·후베이·쓰촨 성민(省民)의 거센 저항을 불러일으켰는데요
민영철도를 외국에 팔아넘기는 것과 다름없는 철도국유화령의 철회를 요구하면서 도시에서는 파업, 농촌에서는 봉기가 일어납니다.
그해 8월 20일 혁명군은 우창·한커우·한양[漢陽]을 점령하고 리위안훙[黎元洪]을 도독(都督)으로 추대하는데요
리위안훙이 군정부를 조직하고 후베이 성의 독립을 선언하자 이에 호응하여 후난 성을 비롯한 전국의 각 성이 독립을 선언합니다.
그리고 독립한 각 성의 대표는 상하이에 모여 쑨원[孫文]을 임시대총통에 추대하고, 1912년 1월 1일 난징에 중화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합니다.
혁명군 진압을 위해 청 정부가 기용한 위안스카이[袁世凱]는 쑨원으로부터 임시대총통의 지위를 양보하겠다는 밀약을 받고 2월 12일 선통제(宣統帝) 푸이[溥儀]를 퇴위시키게 됩니다.
이리하여 청은 누르하치가 즉위한 이래 12대 296년, 명이 멸망한 지 268년 만에 멸망하게 됩니다.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중국 청년들은 사상혁명에 자극을 받아 정치적으로 눈을 뜨게 되어 베이징에서 파리 평화회의의 결정에 항의한 대규모 시위를 벌이게 됩니다.
물론 일본 상품 배척운동이 전개되었고, 정치운동과 사상적·문화적 개혁운동이 함께 일어났던 5·4운동은 대중적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운동의 기점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아 1921년 제1회 전국대표대회가 열린 후 약 2년간 중국공산당은 주로 당원 확보와 마르크스주의의 선전에 주력했는데요
반제국주의적·반군벌적인 국민혁명의 필요성을 대내외적으로 역설하고, 철도와 공장 노동자들의 노동조합조직에 힘을 기울이게 됩니다.
하지만 창당 초기에 계속되는 탄압으로 어려움을 겪던 중국공산당은 국공합작을 제안한 마링의 권고에 따라 국민당과 제휴할 것을 결정하는데요
소련의 지원을 받아 광둥 성에 혁명정부를 조직한 쑨원은 1923년 국민당 개조선언과 당의 강령초안을 발표하여 1924년초 공산당원을 개인 자격으로 국민당에 받아들이는데요
장제스[蔣介石]는 소련에 가서 소련군의 편제를 배우고 돌아와 황푸에 군관학교를 설립, 장교를 양성하고 이들을 중핵으로 국민혁명군을 조직하게 됩니다.
그리고 1925년 3월 쑨원이 죽은 뒤 분열이 표면화되기 시작, 1926년 3월에는 장제스가 공산당원들을 탄압한 중산함[中山艦] 사건을 일어키는데요
1926년 7월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관에 임명되어 혁명의 당면목표인 북방군벌의 타도, 즉 북벌(北伐)을 개시합니다.
북벌은 순조로이 진행되어 국민혁명군은 2개월 만에 후난·후베이를 장악하고, 1927년 3월에는 상하이와 난징을 점령합니다.
그리고 장제스는 국민혁명군 총사령부를 난창[南昌]으로 옮기고, 1927년 4월 12일 대대적으로 공산당원을 축출하죠
또한 국민당 우파를 이끌고 난징 국민정부를 세워 우한 정부와 대립하는데요
난징 정부가 강화되면서 우한 정부도 동요하다가 7월에 공산당과 결별 이로써 제1차 국공합작이 끝이 납니다.
그리고 1935년 일본군이 만주를 발판으로 삼아 화북에서 군사도발을 일으키자 중국인들의 반일감정이 격에 달하는데요
중국인들은 장제스에게 먼저 내정을 안정시킨 뒤에 외세를 물리칠 것을 주장하며 공산당 토벌에 주력하고 있는 국민당을 비판 즉시 내전을 중지하고 일치단결을 통해 일본군에 대항할 것을 호소하게 됩니다.
해서 공산당은 코민테른 제7회 대회의 반파시즘 인민전선 전술에 따라 장정 도중인 8월 1일 항일연합군을 결성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형성할 것을 제안하는데요
1936년 12월 12일 장쉐량과 양후청[楊虎城]이 일치항일을 요구하며, 장제스를 구금한 시안 사건을 일으키자 국민당도 정책전환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이로써 항일을 위한 제2차 국공합작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에 일본은 1937년 7월 중국에 대한 전면전을 개시하여 빠른 속도로 톈진·베이징을 점령하고 상하이까지 진격하는데요
국민정부와 중국공산당은 9월 통일전선 협정을 맺고 홍군을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는 군대로 재편성하면서
주력부대는 국민혁명군 팔로군으로 이름을 바꾸고 화중·화남에 흩어져 있던 게릴라 부대를 통합하여 신사군으로 개편합니다.
팔로군과 신사군은 일본군의 배후지역에서 항일근거지를 만들고 유격전을 벌이지만 일본군이 화북의 철도와 주요도시들을 점거. 이어 광둥까지 점령하자, 국민정부는 난징에서 우한·충칭[重慶]으로 차례로 옮겨갑니다.
그뒤 1939년부터 전쟁은 교착상태에 들어갔으며, 곳곳에서 소규모의 산발적인 전투가 있을 뿐 전선의 변동은 거의 없었는데요
이 시기에 장제스가 주력한 것은 전후의 통일문제로 그는 공산당에 의한 변구(邊區) 정부를 붕괴시키는 데 진력하게 됩니다.
하지만 공산당은 1940년 후반에 소위 백단대전(百團大戰)을 행하고 일본군에 대해 적극적 공세를 하면서 일본군의 반격을 받아 수천 명의 희생자를 내고 군대와 지배지역이 모두 크게 위축되데 됩니다.
전후의 통일문제와 관련하여 공산당은 국민당의 일당 지배의 폐지를 요구하고 항일정당 대표로 이루어진 연합정부의 결성을 요구하게 됩니다.
1945년 8월 일본이 패망하여 중국에서 물러나자 국·공 양당의 군사적인 충돌이 공공연해집니다.
미국은 1944년 이래 중국의 정치에 직접 개입하여 국·공 간의 대결을 피하도록 유도하고 중국의 대일 항전력을 강화시키려 하지만 아시아는 통일 중국이 존재해야만 안정되리라고 생각하여, 일본 항복 후 주중대사와 사절단을 보내 조정을 시도했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게 됩니다.
결국 1946년 여름 전면 내전이 시작되었는데요 1946년 후반에서 1947년 전반까지 국민정부군의 공세가 계속되었지만 공산당 마오쩌둥은 전세를 낙관합니다.
마오쩌둥은 12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특별회의에서 게릴라전을 기초로 하여 인민의 지지를 받으며 동북·화북·화동의 농촌지대를 장악하고 1948년 국민정부가 지배하는 도시지역에 대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해서 마오져뚱은 장제스를 몰아내고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100만 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합니다.
1976년 마오쩌둥[毛澤東]의 사망 후 무정부 상태, 테러, 경제적 마비 상태가 일어나는데요
곧 덩샤오핑[鄧小平]이 집권하여 온건 노선을 추진 덩샤오핑은 경제개혁을 단행했고 서방국가와 중국의 외교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면서 1970년대 후반 이후 경제는 중앙계획경제를 탈피하기 시작했고, 제조업과 서비스업 분야의 국영기업들이 국가 소유와 민간 소유를 혼합한 형태로 바뀌게 됩니다.
1989년에 발생한 톈안먼 사건[天安門事件]은 1980년대 이후 차츰 안정되는 정치적 변화에 대한 도전이었는데요 1997년 홍콩이 중국에 반환되었고, 1999년에는 마카오가 반환되면서 새로운 정치세계를 맞게 됩니다.
이상은 중국 역사를 간추려 봤는데요
중국을 아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는 의미에서 백과 사전에서 그리고 인터넷에서 줏어 모아 봤습니다.
이해 있으시길 바라면서 다녀온 여행기를 풀어 놓겠습니다.
3월 20일 아침
울산에서 07시 20분 KTX를 타고 서울로 향합니다.
11시에 인천공항에서 만나자는 두성관광(여행사)과의 시간은 아들과의 아침 식사 때문에 30분이나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먼저 왔던 일행들은 모두 들어 가고 아무도 없네요
부랴부랴 티켓끊고 이것 저것 하다보니 괜히 11시까지 오라는게 아니더라구요
서둘러 수속밝고 비행기 티켓을 받으니 13시 비행기라 12시 30분까지 탑승구로 오라는 가이드의 이야기에 짐 붙이고...
그리고 출국신고 하고..
또 인터넷 면세점에서 산 물건(아들시계,아내 화장품) 찾고...
그래도 아직 많은 시간이라 면세점 이리저리 둘러봐도 그저 그만....
13시 아시아나 비행기 문닫고 출발합니다까지는 좋았는데....
활주로에서 대기시간이 길다길다 생각했는데 너무 대기시간이 깁니다.
거진 50분 대기.....
그만큼 인천공항도 이착륙시가내문에 바쁘다는 이갸기 입니다.
드디어 13시 50분에 인천공항을 이륙합니다.
약 1시간 45분 정도 날아서 중국 텐진 앞바다를 지나 중국 북경 서우두 공항에 도착합니다.
베이징 서우두 국제공항 (Beijing Capital International Airpor) 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도 베이징 차오양 구에 위치한 국제공항으로 국영 기업인 베이징 수도 국제공항 유한공사에 의하여 관리되고 있는데요
1.2터미널에 이어 2008년 제 3터미널까지 확장 운영되고 있는데요
1터미널은 중국의 주요 VIP 이용공항인 반면 2터미널은 스카이팀 소속항공사가 이용하며 3 터미널은 주로 스타 얼라이언스 소속 항공사들이 운항하는데요, 베이징 올림픽의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터미널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 항공기중 대한항공은 터미널 2에, 그리고 아시아나는 터미널 3에서 운행하는데요 우리가 타고간 아시아나는 터미널3에 기작 열차를 타고 T2까지 이동 공항밖으로 나올수 있있습니다.
인원이 42명이다보니 단체비자 관계라던지 mbc직원들이라서인지 통제도 않되고....
국내에서 가이드가 따라 붙었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결국은 비자순서대로 공항에서 줄도 한번 서보고...
그렇게 조별로 순서대로 공항밖으로 빠져 나갑니다.
약 50명정원인 버스...앞 중간으로 문이 있는 차량입니다.
현지 가이드가 나오고 또 새끼 가이드도 나오고...
드디어 중국의 수도 북경 시내로 들어 갑니다.
가이드 이름은 이정현이라고 소개하는데....
나중ㅇ 혹 북경에 볼일잇으면 연락해달라는깃...
그리고 언제 왔는 누구라고 하면 알것 같다는 이야기와 함께...전화번호까지 알려주시네요
시내까지 차가 밀리지 않은면 1시간이면 족하는데 오늘은 보시다시피 많이 밀리고 있고 또 한국에서 늦게 출발한 관계로 일정을 조절한다며 오늘은 왕부정거리를 둘러보고 식사하고 호텔로 들어 간다는 스케줄이라하는군요
왕부정거리 입구
왕부정거리
왕부정거리
왕부정거리
왕부정거리
왕부정거리
왕부정 거리는 중국의 심장부인 천안문에서 동쪽으로 불과 1km 떨어진 황금상가(金街)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데요.
동서 1km, 남북 2km 정도라는데요 우리나라 명동처름 왕부정 차 없는 거리가 요즘 가장 유명하답니다.
요나라, 금나라 시대에 왕부정은 그저 이름없는 촌에 지나지 않았다는데요.
원나라가 들어서면서 인구가 많아지기 시작하는데요 명나라때 황족의 저택가와 황실 전용 우물을 만들면서 처음으로 왕부대가(王府大街)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합니다.
이후 청(淸) 말기인 1905년에 이르러 왕부정대가(王府井大街)라는 현재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1996년 중국정부가 왕부정거리를 재정비하면서 오늘날의 왕부정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합니다.
버스에 내리는 순간 중국 특유의 향로냄새가 코를 자극해옵니다.
약 50분간 자유시간을 준다는 가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왕부정 거리로 들어 서는데..
정말 없는게 없습니다.
살아 있는 전갈이며 불가사리, 굼뱅이, 지네등 정말 많은 음식이 조리 되고 있고 그들만의 식사가 이뤄지고 있네요
어떻게 함 도전해보려는 맘이 없어질정도로 고약한 냄새....
물론 지들도 한국와서 홍어라던지 청국장 냄새를 맡으면 기절 초풍할것임에 틀림없지만...
그렇게 아이쇼핑을 하고는 다시 차에 올라탑니다.
그리고 첫날이라 중국 현지 음식을 먹으로 가자는데....
Wahaha Hotel 식당입니다.
분위기도 괜찮고...
주최측에서 제공한 고량주를 곁들여 기름기 많은 중국요리를 집어 넣어 보지만 곧장 적응하기란 사실 힘들죠
그렇게 숙소에 도착하는데...
망경이라는 코리아타운입니다.
중국말로 왕칭이라는 동네인데요
조선에서 북경을 방문하다보면 이곳에와서 자금성의 금빛나는 지붕을 바라보고 하루 쉬었다해서 망경 즉 왕칭이라는 이름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다고 합니다.
boya hotel입니다.
거진 30층의 건물인데요 4일동안 광주분과 함께 묶을 방은 22층32호실 남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