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서울시건축사등산동호회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 기행후기(국내) 스크랩 풍수지리 현장 답사(아산 윤보선 전 대통령 선영 및 생가)
이종호(노원) 추천 0 조회 142 10.07.16 16:52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서울건축사 풍수지리연구회 현장답사 보고서

아산 윤보선 전 대통령 선영 및 생가를 찾아


   서울시건축사회에서는 회원들끼리 전문연구회를 발족하여 3년전부터 활발한 연구 활동을 해 오고 있다. 그 중 풍수지리연구회(위원장 박시익)는 매월 셋째 주 화요일 협회에 모여 이론 공부를 하고 반기별로 현장답사를 실시해 오고 있다.

그동안 서울 인왕산 일원, 고창 인촌선생 고택, 덕소 청풍김씨 묘소, 여주 명성황후 생가 및 영릉, 신륵사 등을 두루 다녀왔다. 이를 통해서 알게 된 것은 “뿌린 대로 거둔다”는 사실이다. 생기가 넘치는 명당 산소와 좋은 집에서 큰 인물을 배출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2010년 첫 답사지는 제 2공화국 윤보선(尹潽善:1897~1990) 전 대통령 선영과 생가가 있는 충남 아산이다. 윤 대통령의 집안 내력을 아는 사람들은 몇 대에 걸쳐 한 문중이 그토록 번성할 수 있는지 부러워하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구한말에서 현대까지 윤보선 대통령의 친인척처럼 출세를 많이 한 가문은 찾기 힘들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해평 윤씨인 윤보선 대통령의 선대는 당파싸움이 한창일 때인 조선 후기에 공찬(恭贊)벼슬을 지낸 윤득실이 세상살이에 염증을 느껴 아산으로 낙향하여 살게 되었다. 그는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했지만 선비의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는 삶을 살았다. 자식들에겐 어렵더라도 착한 삶, 즉 선행을 당부하며 세상을 하직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가세는 더욱 기울어져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윤득실의 셋째 아들인 취동공(윤 대통령의 증조부)은 사십이 넘도록 자식도 없었다. 그리고 생활이 궁핍했지만 항상 죽을 쑤어 대문 앞에 놓고 걸인들을 보살피는 등 남을 위한 적선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추운 겨울 어느 날 취동공이 둔포장에 갔다가 돌아오던 중, 길바닥에 쓰러져 기진맥진해 있는 걸인 차림의 노스님을 보게 되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모두 그냥 지나쳤지만 노스님을 집으로 데려다가 정성껏 간호하면 보살폈다. 추운 날씨가 풀리고 기력을 회복한 노스님은 생명을 구해준 은혜에 보답할 길이 없다며, 다만 소승이 풍수지리를 터득했사온데 부모님 묏자리로 좋은 곳을 알려드리고 가겠다면서 산으로 올랐다.

노승은 산을 한참 오른 후에 묏자리를 점지해주었다. 그러나 노승이 잡아준 자리는 남의 산인 데다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후예인 덕수 이씨 문중의 소유라 돈이 있더라도 구입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노승은 윤 선비의 심중을 읽었는지 인간만사는 전생의 인연으로 이어져 있으므로 모든 것은 물각유주(物各有主)라 하면서 모든 물건은 임자가 따로 있기 마련이므로 다소 어려움이 있더라도 부친 묘를 속히 이장하라고 했다. 그렇게 해서 윤 선비는 우여곡절 끝에 부친 윤득실(윤 대통령의 고조부) 묘를 이장하게 되었다.

 

노스님이 잡아준 명당자리로 이장한 후에 윤 선비는 아들까지 낳게 되고 아산의 해평 윤씨 집안은 용광로에서 불이 타오르듯 많은 복을 받게 되었다. 후손들이 하는 일마다 이루어지고 재물을 크게 모으는가 하면 자손들이 객지에 나가서는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그야말로 풍수에서 중요시하는 貴, 富, 孫을 다 얻게 된 것이다.

 

명당 산소로 이장한 후에 많은 발복을 받았다는 이 얘기는 현재까지 널리 회자되고 있는 풍수 이야기이다. 윤보선 대통령도 전직 대통령 예우에 의해 마련된 국립묘지도 마다한 채 아산시 선영에 영면해 있다.

우리는 5월 19일 오후에 이곳을 찾아갔다. 아산시 음봉면 동천(東天)2리 입구에서 1km를 들어가니 비룡산 아래 윤보선 대통령과 그 가족들 묘역이 조성돼 있었다. 쭉쭉 뻗은 아름드리 소나무가 기품 있게 서 있고 가까운 곳에서 꿩 울음소리가 들린다.

 

산소는 맨 위에서부터 윤보선 대통령과 영부인 공덕귀 여사 묘소 그리고 아래로 고조부 협판공 득실 내외 묘 등 전체 6기가 축을 이루며 일렬로 위치하고 있다. 계단을 통해 오를 수 있는데 윤 대통령 묘소부터 올라가 배례를 하고 풍수의 대가인 박시익 위원장으로부터 현황 설명을 들었다.

                            (사진1: 윤대통령 내외분 묘소)

 윤 대통령이 조상의 산소보다 위에 있는 것은 할아버지가 손자를 무등 태운 것으로 보았고 스케치북에다 지형도를 그리고 산소의 위치를 표시하며 상세히 설명해 주었다. 비룡산의 9부 능선에 위치, 좌청룡과 안산이 완벽하다. 그러나 우백호가 멀고 희미한 것이 흠인데 소나무 숲으로 비보를 해 놓았다.

                             (사진2: 명당개념도(음택)  

 

진정한 명당자리는 바로 그 아래 고조부 묘이다. 확실히 더 아늑하게 느껴지고 L-rod로 측정해보니 안쪽으로 크게 벌어지고 밖으로는 닫혀 진다. 한마디로 기가 충만한 곳이다. 바로 이 자리가 해평 윤씨 가문이 번성하게 된 시발점이 되어 결국 대통령까지 배출하게 된 곳이다.

 

외형상으로도 명당의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다. 용(龍), 혈(穴), 사신사(四神砂), 물(水)이 그것인데 산맥을 용이라고 볼 때 이 곳은 용의 자궁에 해당된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다 조상을 묻으면(씨를 뿌리면) 용(임금)이 태어난다. 입수(入首: 산소에서 머리가 처든 곳으로 여자의 음핵에 해당)와 선익(볼록한 부분아래 움푹 패여 쏠린 곳)도 분명하다. 산 아래 물의 흐름이 산소의 축과 반대방향(逆水: 물을 만나야 명당)이며 수구(水口: 사람의 항문에 해당, 좁혀 있어야 명당)또한 좁게 되어있다. 물은 생명의 원천이고 산은 기의 원천으로 이 둘이 만나 생기(生氣)를 이루게 된다.

                           (사진3 : 윤대통령 고조부 묘)

사람은 부모(조상)로부터 몸을 받고, 부모(조상)의 유골이 생기를 얻으면 자식(자손)은 그 음덕을 받게 된다고 본다. 이것을 동기감응이라고 하는데 부모와 자식이나 조상과 후손은 같은 유전자, 즉 동일한 DNA를 가진 동조된 진동자(振動子)이므로 당연히 공조체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명당 발복의 원리가 이러한 것이다.

 

윤보선 대통령 부모 묘소를 둘러보고 내려와 인근에 있는 윤 대통령 생가를 가보기로 했다. 음택과 양택을 다 보고자 하는 것이다. 명당 산소 못지않게 좋은 집(터)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는 우리 건축인들 에게 더욱 중요한 관심사가 아닐 수 없다. 

 

윤보선(尹潽善) 전 대통령 생가


국도에서 1.7km를 들어가니 전형적인 시골마을에 솟을 대문이 있는 사대부 가옥이 우리를 맞는다. 아산시 둔포면 신항리 143번지, 여기가 윤보선 대통령께서 태어나 3살까지 살았던(이후 서울 안국동으로 이사) 집이다. 현재 아무도 살지 않는 생가는 그런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사진4: 대문입구에서)

                       

 

                     (사진5: 생가 안에서 대문 밖 모습)  

대문 앞에 안내판이 서 있는데 내용은 이렇다.

‘제 2공화국 윤보선 전 대통령(1960.8~1962.3재임)께서 태어난 집. ‘ㄴ’자형 행랑채의 뒤쪽에 ‘ㄱ’자형 안채와 ‘ㄴ‘자형 안 사랑채가 안마당을 둘러싸고, 행랑마당 오른쪽에 ’ㄴ‘자형 바깥 사랑채가 자리잡고 있어 전체적으로 파(巴)자형의 평면구조를 하고 있다. 바깥 사랑채에는 대문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다. 안채는 원래 안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건넌방, 작은 부엌, 오른쪽에 웃방이 배치되고 웃방 앞으로 샛방, 안방, 부엌이 튀어나와 있었는데 후대에 가로 칸의 6칸을 추가로 설치하였다. 1907년에 윤보선의 선친 윤치소가 건립하였고, 바깥 사랑채는 건축 양식으로 미루어 보아 1920년대에 지은 것으로 짐작된다. 후대에 부분적으로 다시 고쳐졌지만 전형적인 중부지방의 평면구성을 잘 보여주는 건축물이다.’

 

그러나 안채는 잠겨있어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들여다봐야 했기에 아쉬움이 컸다. 전체적인 규모나 풍모가 대가집 다웠다. 기(氣)도 충만하고 명당으로서의 요건을 갖추고 있었다. 여기서도 박 위원장의 설명은 계속 되었다. 윤 대통령 생가도 좌청룡이 특히 좋다. 윤일선(사촌)가옥 뒤편으로 길게 뻗어 내린 산줄기가 바로 그것인데 우백호는 여기서도 빈약하다. 그래서 여자들 쪽에는 큰 인물이 없다는 것. 앞에 보이는 안산이 길게 누워 있는 토산 형국이다. 큰 인물이 배출될 산세다. 물 흐름을 비롯, 전체적인 지형이 선영과 흡사한 조건을 보여주는 명당 터임이 분명하다. 

                               (사진6: 서쪽에서본전경)

 

(사진7: 명당 개념도(양택)  

그곳에서 반가운 제비를 보았다. 예전에는 흔하던 제비가 이젠 좀처럼 보기 힘든 세상이다. 명당 또한 그렇다. 우리가 난개발로 자연 환경을 어지럽힌 결과이기도 하다. 풍수지리는 터무니없는 속설이 아니라 터무니를 살리고자하는 자연과학이요 환경공학이다.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우리 건축사들이 풍수를 제대로 배워 좋은 터를 잡는 방법(입지선정)에서부터 건물배치, 건축 외부 디자인 및 인테리어, 부동산 개발, 납골당? 공원묘지설계, 단지 및 도시설계, 해외진출, 풍수 건강상담 등의 일을 도맡아 설계비도 더 받고 사회에 공헌하는 길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쓴이 : 이 종 호 / 시원건축사사무소  010-3210-4783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