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강도 무한증가에 고용불안·인권침해 심각
노동현장에 '빅브라더'가 떴다. ERP(전사적
자원관리 시스템) 도입과 함께 실시간 노동감시·통제는 물론 노동자를 인간이 아닌 '자원'으로 간주하는 '디지털 착취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경영합리화'와 '효율적 자원관리'의 탈을 쓰고 나타난 ERP의 폐해는 노동강도 강화와 대량해고, 정보인권 침해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제조업-스트레스·피로 증가, 생산성은 별로 가장 먼저 불거지진 것은 제조업 분야로 지금도 갖가지
감시시스템이 쉴새 없이 도입되고 있다. 한라공조는 그 대표적인 사례. 한라공조에는 지난 2001년 ERP가 처음 도입됐으며, 지금도
'자동화'가 진행 중이다. 회사는 모든 생산라인에 자동센서를 설치, 작업 진행현황을 실시간으로 취합하고 있다. 노조가 반발하자 회사는 그 해
11월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생산량 압박, 과도한 경쟁 유발, 인권침해를 하지 않으며, 연봉제나 호봉제 등 개인평가 자료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확인서를 작성했다. 그러나 대다수 현장노동자들은 이 약속이 '공염불'에 그칠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로 경영진의 컴퓨터에는
실시간 공정 그래프가 뜨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새벽 4∼5시쯤 집중력과 체력이 한계에 이르기 마련이지만, 모든 작업공정이 경영진 컴퓨터에
입력되기 때문에 눈에 불을 켜고 작업한다. 산재위험과 심리적 압박이 동시에 가해지는 셈이다. 이는 노조가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전체 227명의 응답자 중 174명(76.7%)이 '업무 중 스트레스가 증가했다', 159명(70%)이 '육체피로가 증가했다'고
답했다. 216명 중 125명(57.9%)은 '생산성 향상이 이뤄지지 않았다'고 답한 반면 '고용불안이 높아졌다'는 응답자는
155명(71.8%)이나 됐다. 한라공조노조 조민제 위원장은 "ERP의 문제점은 노동자 스스로가 감시당한다는 느낌조차 갖지 못하게 하며
서서히 진행된다는 점"이라면서 "도입 이후 지금까지 각종 시간통제·현장통제가 알게 모르게 진행되고 있다"고
밝혔다.
공공부문-정보인권 침해 심각 제조업이 '노동통제'에 중심을 뒀다면 공공부문에선 '정보인권'의 문제가
심각하다. 특히 병원의 경우 ERP 도입과 함께 의료서비스의 질 저하까지 나타나고 있다. 병원 ERP의 폐해가 드러난 계기는 전북대병원
사태. 전북대병원은 지난 2001년 국내 병원으로는 처음으로 ERP를 도입해 시험가동해 왔다. 노조가 이에 거세게 반발하자 병원쪽은 지난해
△산출된 자료 활용범위 노사합의로 규정 △자료를 이용한 인사상 불이익 금지 △구조조정 수단으로 활용 금지 △환자 개인정보 보호 △향후 정보화
기술 도입 시 노조와 협의·합의 △ERP 운영에 노조참여 보장 등을 약속했다. 노조가 강력히 반발한 것은 ERP의 '메가톤급' 역효과
때문이다. '불필요한 물품남용을 막기 위해 통합시스템으로 관리한다'는 명목 아래 1회용 의료용품도 물로 씻어 재활용 됐다. 매일 교체하던 각종
의료기구도 3일에 한번으로 바뀌었다. 당장 상처를 소독해야 할 환자가 있어 옆 병동에 물품을 빌리러 가도 "소독비가 원가분석에 포함된다"면서
빌려주기를 꺼려하게 됐다. 환자보다는 원가분석이 우선이 된 것이다. 또 EMR(전자의무기록) 시스템 도입과 함께 환자의 모든 신상기록과
병력사항이 일일이 저장·공유된다. 산부인과 환자의 경우 유산을 몇 차례 했는지 등 은밀한 기록이 공개될 위험에 처한다. 과잉진료와 검사,
고가진료·처방이 남발되고, 저수익 중증환자는 꺼리게 된다. 이와 함께 인건비절감 차원에서 숙련간호사의 고용불안이 심화되고, 노동자는
생산성과 수익성을 기준으로 분류·서열화됐다. 축적된 ERP 정보는 연봉제의 기초가 됐다. 자연스레 노조활동도 어렵게
된다.
학습지-신상정보 유출 피해 우려 '사교육판 네이스'로 불리는 학습지회사 대교의 ERP 도입도 학부모와
학생, 교사의 신상정보를 인터넷에 뿌려 심각한 피해를 예고하고 있다. 대교가 지난 1월부터 도입한 ERP 시스템 '드림스'에는 학부모의
주거형태 등 일반정보는 물론 계좌번호와 주민등록번호 등 중요한 신상정보가 들어있다. 또 아이들의 학습수준과 진도그래프 등이 수록돼 학원과
출판사, 과외방에 악용될 우려가 높다. 검색을 위해선 아이디와 비밀번호가 필요하지만 회사는 "업무편의를 위해 비밀번호는 사번이나 주민번호
뒷자리로 할 것"을 사실상 강요하고 있어 모든 정보가 무방비상태에 놓여 있다. 특히 학습지를 끊은 '휴회원'의 자료도 5년 동안 보관토록 해 또
다른 영업목적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서무와 경리가 해오던 교재수급관리, 회비납부관리 등을 모두 교사가 맡게 되면서 교사들의 노동강도
강화, 서무·경리의 고용불안도 위험수위에 이르렀다. 또 컴퓨터만 있으면 어디서나 인터넷에 접속해 자료입력을 할 수 있게 해 재택근무를 부추기며
휴일까지도 노동자 감시를 할 수 있게 됐다. 실적관리가 모두 교사 몫으로 떨어지면서 명부상에는 회원으로 등록됐지만 회비를 내지 않는
'유령회원'도 급속히 늘어났다. 일부 교사들의 경우 '유령회원' 유지비용만도 월 1백만원 가까이 드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국학습지노조
대교지부 서훈배 지부장은 "회사가 주식상장에 맞춰 일방적으로 ERP 도입을 강행했다"면서 "민주노총 서울본부와 대교직원노조, 노동자감시근절연대
등과 함께 대책위를 꾸려 대책에 나서고 있다"고 말했다. 이승철 keeprun @
nodong.org <사진> 당신으 정보인권은 안전하십니까? 전국학습지노조 대교지부는 ERP는 노동감시뿐아니라
학습지 회원들의 정보인권도 침해한다며 ERP시행저지를 요구하고 있다. 이정원 leephoto @
nodong.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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