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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운틴포럼(제3호·부산산악포럼)이 그간 일부 산악인들에 의해 제기돼 온 한국 히말라야 등정 의혹에 대한 심층 기사를 특집으로 실었다. 1월 19일 발간된 연감은 지난해 ‘여성 세계 최초 8,000m 14개 고봉 완등’을 공표한 오은선의 캉첸중가 등정 의혹에 대해 심층 분석한 특집을 싣는 한편 총 50쪽 분량의 ‘국내외 등정 의혹 사례’편에서는 1970년 추렌히말을 비롯, 등정 의혹을 사고 있는 한국 원정 등반들에 대해 전반적으로 다루었다. 이 부분을 발췌, 또는 일부 요약해 싣는다. 본지는 오은선의 캉첸중가 등정 의혹에 대해서는 이미 2010년 10월호에 자세한 분석 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편집자 주>
- ▲ 거대한 눈사태에 휩싸인 안나푸르나 북면. 1984년 은벽산악회는 여성 동계 초등정을 발표했으나 등정사진을 내놓지 못해 훗날 중앙봉 동계 초등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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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최초의 등정 시비 ‘1970년 추렌히말’
한국 히말라야 등반사상 최초의 등정 의혹은 1970년 창립 25주년을 맞아 추렌히말(7,371m·최고봉 동봉)에 도전한 한국산악회 원정대(대장 김정섭)다. 추렌히말은 네팔 히말라야 서부 다울라기리산군에 위치한 준봉으로 같은 높이(7,371m)의 동봉, 중앙봉, 서봉 세 개봉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산에 한국대가 도전하기 전에 일본(1962년)과 이탈리아대(1969년)에 위해 중앙봉만이 두 차례 도전을 받았으나 정상을 허락하지 않은 채 미등봉으로 남아 있었다.
당시 원정대는 김호섭(25) 부대장과 고소포터 린지 왕겔 셰르파가 4월 29일 처녀봉인 추렌히말 동봉(7,371m)을 초등했다는 소식을 외신을 통해 국내에 전했으나 같은 해 가을 시즌 남동벽으로 중앙봉 초등에 성공한 일본의 정강대(靜岡大)팀은 “한국대의 등정을 믿지만 6,300m 지점에서 동봉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동봉 상의 7,000m에서만 등정이 가능하다”며 등정의혹을 제기한다.
이 의혹은 일본 산악 전문지 ‘岳人’(1970년 11월호)과 <월간山> 전신인 ‘등산’(1970년 12월호) 양 산악전문지를 통해 갑론을박의 논쟁이 이어지다가 1971, 1972년 김정섭 대장의 친동생인 김기섭, 김호섭 형제가 마나슬루에서 조난사하면서 잠시 묻히고 말았다.
- ▲ 1988년 추렌히말 동봉 정상에 오른 중동산악회 대원. 1970년 한국산악회 팀의 등정 의혹을 마무리짓는 등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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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의혹은 1987년에 이어 1988년 추렌히말 재등반에 나선 중동산악회 원정대에 의해 풀렸다. 중동 팀이 확인한 동릉 마지막 구간은 양쪽이 천여 길 절벽인 데다 길이가 무려 1km에 이르는 험난한 칼날 설릉이었다. 중동산악회는 루트를 바꾸어 정상에 올라선 뒤 한국산악회 팀이 오른 봉이 동봉 아래 무명봉일 가능성이 높다고 단정지었다.
1971, 1972, 1976년 세 번의 도전에서 16명의 희생자가 나와 한국인에게는 ‘비운의 산’으로 각인됐던 마나슬루(8,163m)가 1980년 봄 동국대팀에게 정상을 허락한다. 1976년 일본대 등정 이후 4년 만에 정상에 오른 동국대팀은 마나슬루 한국 초등, 국내 두 번째 8,000m급 등정, 대학산악부 국내 최초 8,000m급 등정 등 뛰어난 등정 성과로 알려졌다.
그러나 3년이 지난 1983년 가을 마나슬루 단독 등정에 성공한 허영호는 동국대가 오른 봉우리는 정상이 아니라고 이의를 제기한다. 허영호가 등정 길에 촬영한 마나슬루 전위봉의 사진이 3년 전 동국대팀이 정상이라 주장한 암봉과 흡사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동국대 마나슬루 등정에 대한 허영호의 시비
이러한 의혹은 공개적으로 제기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동국산악회는 의문 자체를 일축해 오다가 1992년 4월 발간된 ‘동국산악’ 제6호에서 정상 등정을 강력히 주장했다. 동국산악회는 ‘마나슬루 등정을 재천명한다’는 글을 통해 산악계에 음성적으로 떠돌고 있는 ‘14개 팀 의혹설’(1990년 9월, 현 대한산악연맹 김병준 감사가 산악전문지에 기고한 ‘의혹청산 외치는 시대적 요청에 부응하여 등정 의혹 14팀을 밝힌다’ 칼럼 내용)에 1980년 마나슬루 등정도 포함돼 있음이 이 글을 발표하게 된 동기임을 밝히고, 1984년 1월 남벽을 통해 마나슬루를 동계 초등한 폴란드팀이 정상부에서 동국대의 깃발을 가져온 사실이 확인됐다고 밝혔다.
당시 폴란드팀은 정상 30여m 아래 지점에서 동국대팀이 놓고 내려온 깃발과 카라비너를 발견했다. 그리고 ‘사진에 나타난 정상 암부가 8,163m의 거대한 봉우리의 꼭대기 중에서도 극히 작은 부분인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면서 좁은 바위 끝에 올라서지 않았다고 해서 정상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상식 밖이라고 주장했다. 이로써 6년에 걸친 등정시비는 허영호의 완패로 끝을 맺었다.
1984년 은벽산악회 안나푸르나 동계 초등의 비운
1984년 안나푸르나(8,091m)에서는 세계 산악계를 놀라게 한 등반이 이루어졌다. 은벽산악회는 전년도 가을 대원 1명과 고소포터 2명을 잃고 패퇴한 안나푸르나1봉에 도전, 베이스캠프 도착 15일 만인 12월 7일 김영자(31) 대원이 고소포터 4명과 함께 7,700m 지점의 마지막 캠프를 떠나 10시간 만인 오후 3시20분 안나푸르나1봉 정상에 섰다고 발표했다. 이 등정은 여성 최초의 안나푸르나 등정이자 동계 초등이라는 경이적인 기록이었다.
이 등반은 당시 한국대와 같은 시기에 북면 초등 루트로 등반하던 프랑스대에 의해 의혹이 제기되면서 파문이 인다. 프랑스 팀은 한국대가 정상을 등정했다고 발표한 오후 3시20분경 베이스캠프에서 목격한 김영자 일행이 정상에서 적어도 두 시간 못 미치는 지점의 능선에 있었다는 점 등의 이유를 들며 등정 의혹을 제기한다.
그러나 이와 같은 등정 의혹설에 은벽산악회팀은 등정 진위를 가려줄 분명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무엇보다 김영자 대원은 정상에 함께 올라선 셰르파 4명 중 2명이 하산 길에서 추락사하면서 정상 모습이 담긴 카메라를 잃어버려 등정 사진을 내놓지 못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 등정은 의혹을 샀고, 이후 명확한 해명이나 항의가 없이 시간을 넘김으로써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게 되었고, 3년 뒤인 1987년 2월 2일 폴란드팀의 예지 쿠쿠츠카가 정상에 올라 동계 초등정으로 공식적으로 기록했다. 김영자 대원의 등정은 중앙봉 동계 초등이자 제5등으로 기록되고 말았다.
1984년 자누 등정 사진은 아직껏 공개하지 않아
1984년 한국대의 안나푸르나1봉 동계 초등에 이어 전국합동 자누 원정대(대장 김기혁)가 역시 동계 초등을 이루면서 주목을 받았다. 1962년 봄 시즌 프랑스대에 의해 초등정된 ‘히말라야의 괴봉’ 자누(Jannu·7,710m)는 ‘스핑크스’ 또는 ‘잠자는 사자’라 불리는 난도 높은 산이다.
12월 8일 박성만, 신교봉, 송정두 대원이 고소포터 2명과 함께 1차 등정을 시도했으나 강풍으로 무위로 끝나고, 다음날 김기혁 대장이 두 명의 고소포터와 함께 오전 6시10분 마지막 캠프를 출발해 8시간30분 만인 오후 2시40분경 정상에 섰다. 그러나 정상 사진을 등반기에 공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국내 산악계는 등정의혹을 제기했다. 이에 김 대장은 정상 사진을 갖고 있으며 공개할 의사가 있음을 분명 밝혔으나 현재까지 그 사진은 공개되지 않고 있다. 이 등정시비는 국내에서 이루어졌을 뿐 국제적으로는 확산되지 않아 세계 산악계는 한국 전국합동대의 동계 초등을 인정하고 있다.
1985년 가우리상카 등정은 국내에서만 시비 일어
1985년 겨울 진주 마차푸차레산악회가 가우리상카(7,134m)에 도전, 이 산의 통산 세 번째 등정에 성공하면서 동계 초등을 일구어냈다. 네팔 쿰부히말의 남서쪽에 위치한 가우리상카는 1952년 영국대의 첫 도전 이후 1979년 가을 미국팀에 의해 초등정됐고, 1984년 미국팀의 재등 이후 정상을 허락하지 않은 산으로 네팔의 7,000m급 봉우리 중 자누, 가네시1봉(GaneshⅠ·7,442m), 록느와르(Roc Noir·7485m), 팡(Fang·7,647m), 눕체(Nupthtse·7,864m) 등과 함께 난이도가 높은 산으로 정평이 나 있다.
전원 히말라야 초행자였던 마차푸차레산악회 원정대원들은 5명의 고소포터들과 함께 등반을 시작, 몇 차례의 기상악화로 텐트가 찢기고 장비가 유실됐지만 남서벽상에 고소캠프 3개를 설치하며 등반시작 30일 만인 1986년 1월 16일 오후 2시30분경 최한조(33) 대원과 고소포터 앙 카미 셰르파가 정상에 섰다고 전했다.
지방 단일산악회로 조촐하게 팀을 꾸려 동계 초등이라는 쾌거를 이루어낸 이들은 커다란 등반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내 산악계로부터 등정 의혹을 받는다. 대상산과 루트의 까다로움, 등정 기록의 불충분 등이 그 원인이었다.
당시 최한조 대원의 등정 모습을 망원경으로 지켜본 성락건 대원은 1990년 ‘14개 팀 등정의혹설’에 휘말리자 등산 전문지를 통해 등정 당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며 분명 정상에 도달했음을 강력히 주장했다. 성락건 대원은 등정 당일 무전기 고장으로, 그리고 베이스캠프에서는 정상부가 보이지 않아 베이스캠프에서 2시간 거리에 있는 5,000m 높이 무명봉에 올라 망원경으로 정상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오후 1시경 정상 설원 부근에 까만 점 3개가 보였고, 그로부터 1시간 후인 오후 2시경 까만 점 둘이 정상 부근으로 이동한 것을 분명 확인했다고 증언했다. 이 등정시비 역시 국내에서만 논란이 있었고 국제적으로는 동계 초등을 인정하고 있다.
1987년 대륙산악회 캉첸중가 등정, 여러 점에서 의문 제기돼
1987년 겨울 대륙산악회는 창립 30주년기념 사업으로 세계 제3위봉인 캉첸중가(8,586m)에 한국대로서는 처음으로 도전한다. 캉첸중가는 1955년 영국대에 의해 초등정됐지만 대륙산악회가 원정을 처음 계획한 1985년 당시만 해도 동계 미등으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듬해인 1986년 1월 ‘살아 있는 전설’ 라인홀트 메스너와 8,000m급 14좌 완등레이스를 펼쳤던 폴란드의 예지 쿠쿠츠카가 먼저 등정해 버렸다.
대륙산악회는 두 번째 동계 등정을 목표로 정상무(49) 대장, 하해룡(37) 부대장 등 9명을 파견한다. 고소포터 1명이 베이스캠프로 이동 중 고산병으로 사망했고, 다음날 후발대의 이성호 대원이 캐러밴 도중 지병으로 목숨을 잃는 등 아픔을 겪지만 이를 극복하고 12월 12일 베이스캠프에 도착, 곧바로 남서벽 노멀루트를 공략한다.
한 해를 보내는 마지막 날 이주이 대원이 고소포터 2명과 함께 1차 등정에 나서 8,470m 지점까지 진출했으나 동상증세로 돌아섰고, 이틀 후인 1988년 1월 2일 오전 6시 이정철 대원과 고소포터 3명이 2차 등정에 나섰다. 이정철은 산소통 하나를 지고 20~30분 간격으로 1~2분 정도 산소를 마시면서 정상을 향했다.
혹한에 발가락이 얼어 감각이 없었으나 등반은 계속됐다. 오전 10시, 해발 8,250m 높이의 능선에 올라섰다. 그곳에서 고소포터 앙 카미가, 오후 2시 8,400m 지점에서 앙 키파가, 8,500m 부근에서 앙 린지가 차례로 등정을 포기하고 돌아섰다. 혼자 남은 그는 산소마저 바닥나 몹시 지쳐 있었다. 하지만 단독으로 등반을 감행, 마지막 캠프를 출발한 지 11시간20분 만인 오후 5시20분경 정상에 도달했다고 등반대는 전했다.
최초의 히말라야 원정에서 세계에서 세 번째로 높은 봉우리를 동계에 단독으로 오른 이정철의 대기록은 당시 국내 산악계로부터 1987년 허영호의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버금가는 큰 성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그는 정상에서 카메라 작동 미숙으로 사진을 남기지 못해 국내 산악계로부터 등정 의혹의 시비에 휘말린다.
무엇보다 히말라야 초행에서 8,000m급 거봉을 단독으로, 그것도 거의 산소를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11시간20분 만에 고도차 600여m를 극복하고 정상에 오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이견 때문이었다. 당사자들은 아무런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등정 의혹은 계속됐음에도 대부분은 정면으로 등정 의혹을 제기하지 않았고, 세계 산악계도 이들의 등정을 인정했다. 등정자 이정철은 불신의 눈초리에 시달리다 일본으로 떠나가 버렸다.
21년이 지난 2009년 오은선의 캉첸중가 등정 의혹이 제기되자 잠잠해졌던 대륙산악회의 캉첸중가 등정 의혹은 수면 위로 재부상했다. 2010년 8월 26일 대산련 사무국에서 개최된 일명 ‘오은선 캉첸중가 청문회’인 캉첸중가 등정자 모임에 캉첸중가 한국 초등자로 기록돼 있는 이정철은 초청되지 않았다.
홍경표, “내가 오른 곳은 초오유 정상이 아니었다” 고백
1989년 가을 대구·경북 초오유원정대는 베이스캠프 설치 16일 만인 9월 2일 서면 루트로 이동연(31), 홍경표(27) 대원이 고소포터 왕겔(34) 셰르파와 함께 정상 등정에 성공했다고 발표한다. 이들은 네팔 정부로부터 허가된 남면루트를 버리고 중국 측 루트인 서릉 노멀루트를 택해 속공으로 등정해 시즌 초등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 원정대는 후일 등정 시비에 휘말린다. 초오유 정상은 아주 넓어 정점을 찾을 수는 없지만 높은 곳을 향해 가다 보면 반대편인 남면으로 기울어지는 곳을 만나게 되고 그곳에서 남쪽의 에베레스트가 보인다. 그런데 대구·경북팀의 사진에는 맑은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에베레스트가 없어 의혹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95년 12월 등정자 홍경표대원이 “내가 오른 곳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양심선언을 한다.
- ▲ 1989년 대구경북 초오유 원정대가 제시한 등정사진. 그로부터 6년이 지난 1995년 12월 등정자 홍경표 대원이 “내가 오른 곳은 정상이 아니었다”고 양심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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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히 저는 정상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그걸 공식적으로 명확히 하고 싶었습니다. 정상을 얼마쯤 남겨놓았는데도 감히 ‘정상’이라고 말한 게 너무도 부끄럽습니다. (중략) 그리고 당시 귀국한 후 첫딸의 이름을 ‘초오유’라고 지었는데 딸아이를 볼 때마다 왠지 부끄러웠습니다.”
실종으로 영원히 묻혀 버린 등정여부의 진실
1989년 가을 영남대학교 안나푸르나 원정은 영광과 비극이 함께한 원정이었다. 9월 20일 오전 11시30분 정준모(26), 조원배(26) 두 대원이 안나푸르나4봉(7,525m) 등정을 이룩한 기쁨을 누렸고, 이튿날인 21일 오후 김용규(28), 정갑용(27) 대원이 안나푸르나2봉(7,937m) 등정 길에 실종된 것이다.
21일 오전 6시 김용규 정갑용 대원, 그리고 고소포터 2명은 안나푸르나2봉 등정을 위해 캠프3(7,400m)을 출발했다. 약 30분간 운행하던 중 고소포터들이 간밤에 눈이 내려 여러 사람이 지나가면 눈처마가 내려앉으므로 고정로프 없이는 전진을 못 하겠다고 돌아섰다. 하는 수 없이 캠프3으로 돌아온 이들은 의논 끝에 두 대원만 등정을 시도하기로 하고 오전 8시30분경 비박색을 챙겨 정상을 향했다.
그날 오후 3시경 김용규 대원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상 직하의 암부이며 정갑용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등정 후 하산하다 비박하게 될 것 같다”는 교신을 마지막으로 베이스캠프와의 연락이 두절됐다. 다음날 장병호 등반대장과 고소포터 2명이 한 가닥의 희망을 걸고 캠프3에 진출해 수색작업을 폈으나 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정상을 오르던 중이었을까? 아니면 등정 후 하산하다 실종한 것일까? 영원한 의문을 남긴 채 두 대원은 사라졌다. 원정대는 오후 5시30분경 정상 등정에 성공하고 하산하다 추락사한 것으로 결론지었다. 당시 대구지역에서는 등정의혹의 눈길을 보내는 이는 없었다. 하지만 국내외 산악계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실종된 두 대원의 등정을 인정하지 않았다.
1989년 동계 얄룽캉 등정의 진실은 아직도 미궁
1989년 가을 한국대가 1971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도전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숙제로 남아 있던 로체샤르(8,382m) 등정에 성공한다. 대구등산학교 출신들로 구성된 로체샤르 원정대는 등반시작 40여 일 만인 10월 4일 오전 6시20분 권춘식(27) 대원이 고소포터 다와 왕추(31)와 린지(33) 셰르파와 함께 8,100m 지점의 캠프5를 출발해 동봉을 거쳐 8시간40분 만인 오후 3시경 정상에 도달, 한국 초등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들도 등정사진을 제시하지 못해 한동안 의혹설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이 원정대는 ‘공포! 그러나 영광의 로체샤르’란 상세한 보고서를 남겨 등정 의혹을 불식시켰다.
같은 시즌 캉첸중가산군의 또 다른 8,000m 자이언트봉인 얄룽캉에 원주치악산악회가 출사표를 던졌다. 캉첸중가 주봉 왼쪽에 8,505m 높이로 솟아 있는 얄룽캉은 1973년 일본대에 의해 초등된 산으로 캉첸중가에 비해 등반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원주 지역 기업체와 시민들의 성원으로 구성된 이 원정대에는 박순조(43) 대장 등 모두 8명의 대원이 참가했다.
이들은 베이스캠프 도착 28일 만인 10월 13일 서강호(22) 대원과 두 명의 고소포터가 오전 7시경 마지막 캠프를 출발, 8시간55분 만인 오후 3시55분 어렵게 등정에 성공, 한국 초등으로 기록됐다.
치악산악회는 1984년 캉그루(6,981m) 등정에 이은 두 번째 히말라야 등정에 성공하면서 강원도 지역에서의 첫 8,000m급 등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두 명의 고소포터 파상 곰부(34) 셰르파와 아 다와 타망(33)이 네팔인으로는 처음으로 얄룽캉에 오르는 영광을 안았다.
산악계 일각에서는 이 팀에 관한 의혹설은 그 자체가 근거 없는 것이라는 견해였다. 이후 등정 의혹은 잠잠해졌으나 치악산악회는 등정 15년 만인 2004년, 86일간(1989년 8월 7일~10월 31일)의 원정기록 ‘얄룽캉 원정등반 보고서’를 발간해 등정 의혹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같은 해 겨울 영남 지봉산악회는 김특희(42) 대장 등 5명의 대원과 고소포터 8명으로 원정대를 구성, 얄룽캉(8,505m) 동계 초등에 도전한다. 12월 20일 진교섭 대원, 앙다와(29) 셰르파, 치링 테베(36) 셰르파 등 3명이 새벽 4시30분 마지막 캠프를 출발, 인공산소의 도움을 받으며 남동벽을 통해 11시간35분 만인 오후 4시5분경 정상에 도달, 동계 초등에 성공했다.
이들은 약 10분 후 등정사진을 촬영하고 하산을 시작한다는 베이스캠프와의 무선교신을 마지막으로 연락이 두절됐다. 원정대는 다음날 캠프1~캠프4 구간의 남서벽을 수색했으나 이들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정상에서 하산하다 8,500m 부근에서 북벽으로 추락사했음이 분명했다. 이들 역시 등정자가 실종돼 등정여부의 진실은 영원히 묻히고 말았다. 그러나 세계 산악계는 이 팀이 동계 초등에 성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등정 의혹 쏠린 허영호의 1989년 로체 등반
1989년 가을 허영호(35) 대장은 단독으로 로체 등정에 성공했다고 발표한다. 당시 국내 최초로 8,000m급 봉우리에서 야간 단독등반을 감행했다는 점에서 크게 평가됐다. 부인과 아들(5)을 데리고 가족원정대를 꾸린 허영호 대장은 사진작가 성동규(40)와 합류해 등반에 나섰다.
몇 번의 고소적응 등반 끝에 10월 13일 오전 9시 단신으로 캠프2(6,500m)를 출발한 허 대장은 로체 페이스에 설치된 캠프3(7,300m)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수면을 취한 후 오후 8시경 출발해 야간등반을 감행, 7,600m 록 밴드부터 산소를 사용하며 다음날 새벽 4시경 정상에 섰다. 정상에서는 날이 밝지 않아 사진 촬영을 하지 못하고 곧바로 하산, 오전 8시경 캠프3를 거쳐 오후 2시경 캠프1로 내려왔다.
- ▲ 1989년 가을 해발 7,300m 지점의 캠프3에 오른 허영호. 그는 한밤중의 등정으로 정상사진을 찍지 못한 채 아들의 장난감만 정상에 묻고 하산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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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에베레스트 동계 등정에 이후 2년 만에 이루어진 그의 로체 등정은 좀더 진보된 등반방식을 택했다는 점에서 산악계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이 등정은 이듬해에 몇 가지 의문이 공개적으로 제시되면서 시비에 휘말린다. 당시 대한산악연맹 김병준 이사는 ‘야간에 7,300m 제3캠프에서 8,516m 높이의 정상에 이르기까지 표고차 1,216m 높이를, 그것도 7,800m 이후 러셀이 전혀 되어 있지 않은 고산을 8시간 만에 올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로 허영호의 로체 등반에 이의를 제기하는 글을 대산련 계간지 ‘산악인’(1990년 봄호)에 기고했다.
이에 허영호는 ‘등반 당일 날씨가 좋았고 루트가 어렵지 않아 야간등반에 전혀 문제가 없었으며, 등반시간에 대한 의혹부분에 대해서도 그 루트로는 너무나 당연한 시간임’을 강조하고, ‘고산에서의 경험이 많은 사람은 눈의 상태를 이용해서 등반시간을 얼마든지 단축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근래 대부분의 국내 로체 등정자들은 허영호의 로체 등반에 대해 고개를 가로젓는다. 보통 러셀이 잘 돼 있고 고정로프가 설치된 상태에서 캠프3(7,300m)~캠프4(7,800m) 구간에서 3~4시간, 캠프4~정상 구간은 7~8시간 이상이 걸리므로 아무리 체력이 뛰어난 사람이라도 캠프3에서 정상까지는 10~12시간 이상이 소요된다는 주장이다.
이미 2007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서 고인이 된 고 오희준(30)의 등반능력은 가히 허영호와 버금간다는 것이 국내 산악계의 평이다. 그는 2001년 박영석팀의 대원으로 로체 등정에 성공했다. 당시 오전 1시15분 캠프3(7300m)을 출발, 14시간30분 만인 오후 3시45분 정상에 섰다. 그도 산소를 사용했고 시즌 초등으로, 허영호와 똑 같은 조건이었다.
그리고 고 오희준과 등반능력이 버금간다는 부산연맹팀의 김창호(38), 서성호(28)의 경우, 허영호의 출발지점보다 500m 높은 7,800m의 캠프4에서 정상까지 7시간45분이 걸렸다. 이들은 전날 한국의 4개 팀이 시즌 초등하면서 러셀과 고정로프 설치를 마쳐둔 덕분으로 수월하게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고 한다. 단지 무산소로 올랐다. 이들은 정상에서 1시간가량 머문 뒤 캠프4, 캠프3을 거쳐 4시간 만에 캠프2(6,500m)까지 하산할 정도로 당시 컨디션은 최고였다.
그런데 자기 주장대로라면 부산연맹팀보다 약 1.5배의 속도로 정상에 올랐다는 허영호는 캠프3(7,300m)까지 하산하는 데 4시간 소요됐다(부산연맹팀은 2시간 15분 소요). 등정 당시 왼쪽 눈의 이상으로 하산이 늦었는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있지만 대부분 그의 등정을 믿을 수 없다는 분위기다.
1989년 정상용의 에베레스트 서릉 등정은 믿기 어려워
허영호의 로체 등정과 함께 1989년의 등정 중 가장 관심을 끌었던 원정대는 에베레스트 서릉 등반대다. 한국산악회 소속 이석우(36) 대장을 비롯한 11명의 대원들로 구성된 전국 합동대는 1989년 10월 23일 오후 2시30분 정상용(26) 대원과 두 명의 고소포터가 서릉 직등 루트를 통해 정상을 밟고 다시 서릉을 통해 하산했다고 네팔 관광성에 보고함으로써 이 경이적인 등정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한국대의 서릉 직등루트 등정이 사실이라면 놀랄 만한 기록이었다. 에베레스트 최난의 루트로 등정한 것도 그렇지만, 그 길로 하산했다는 보고가 산악계를 더욱 놀라게 했다. 이때까지 등정에 성공한 외국대도 그 루트의 어려움으로 인해 하산 도중 실족했거나 아예 정상에서 노멀루트인 남동릉으로 우회해 하산했기 때문이다.
등정 소식을 가지고 카트만두에 먼저 도착한 이석우 대장은 홀리 여사를 만났다. 한국 원정대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관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그의 성공담을 믿지 않고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녀의 상식으로는 한국대가 서릉 루트로의 성공은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러나 나중에 본대가 카트만두로 나온 후 고소포터들로부터 등정 소식을 전해 듣고서야 ‘금세기 최고의 등반’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국내 산악계도 원정대장을 제외한 모든 대원들이 히말라야 초행자이기에 그들의 쾌거에 찬사를 아끼지 않으면서도 이 엄청난 결과에 대한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귀국 후 원정대가 제시한 사진에 나온 정상은 이미 여러 팀의 수많은 산악인이 올라 너무나도 낯익은 세계 최고봉의 정상은 아니었다. 에베레스트 정상은 두 사람이 서고도 평평한 설면이 많이 남아 있는 사진 속의 그곳이 아니라는 것이 앞서 등정한 사람들의 증언이었다. 무엇보다 최고 난이도 5급 정도의 서릉 상단부를 어떻게 올라갔으며 어떻게 내려 왔는가에 대한 원정대의 구체적인 정황 설명이 없자 이 등정에 강한 의혹이 쏠리게 된다.
이에 대해 이석우 대장은 정상 파노라마 사진을 갖고 있으며 마땅한 기회가 있다면 공개하겠다고 말했으나 그 사진은 공개되지 않았다. 국내외 산악계는 이 팀의 등정은 여러 정황증거로 보아 미등정으로 보인다고 결론 내렸다.
1991년 낭가파르바트, 동료 대원들이 등정 의혹 제기
1991년 여름 서울 은정산악회가 주축이 된 한국-홍콩 합동대가 낭가파르바트(8,125m) 서면(디아미르벽) 킨스호퍼 루트에 도전한다. 최초로 홍콩 산악인과 합동으로 꾸린 한국-홍콩 합동대는 김형주(35) 대장 등 8명의 한국 대원과 곽감홍(31) 부대장을 비롯한 4명의 홍콩 산악인이 참가했다.
폭설과 이상기온으로 40일 이상을 고전한 끝에 1,000m에 이르는 급경사의 설벽과 대암벽 지대를 돌파, 마지막 캠프(7,500m)를 설치하면서 정상 공략을 위한 준비를 모두 마친 원정대의 김형주 대장과 홍콩인 곽감홍 부대장, 창푸이룬 대원이 8월 6일 새벽 4시 정상공격에 나섰다. 이들은 무릎까지 빠지는 심설을 러셀하느라 체력을 많이 소모한 데다가 정상에 이르는 루트를 찾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7,900m 지점에서 되돌아섰다. 캠프4로 돌아온 이들은 알파미 한 봉지를 나누어 먹으며 악천후 속에서 3일간을 버틴 끝에 9일 오후 7시30분경 두 번째 정상 등정을 시도, 밤새 등반한 끝에 정상에 올랐다고 발표했다.
- ▲ 한국-홍콩 합동대가 눈내리는 새벽에 올라 촬영했다고 자랑하며 공개한 낭가파르바트 등정 사진. / 낭가파르바트 서면 디아미르벽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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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이래 한국인에게 여섯 차례나 패배를 안겨주었던 낭가파르바트의 등정소식은 1991년도 히말라야 등반 중에서 가장 뛰어난 성과로 꼽혔다. 그러나 놀랄 만한 등정에 대한 의혹이 함께 등반에 참여했던 대원들이 등정을 부인하고 나섰다.
김 대장 일행의 등정을 믿지 않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함께 등정한 홍콩인들의 체력과 고소적응 상태가 다른 한국대원들보다 못했는데도 1차 등정에 실패한 후 하산하지 않고 7,500m 고도에서 3일간이나 머물고도 다시 정상 등정을 했다는 점, 둘째 정상 200m 전부터 정상을 다녀올 때까지 전혀 무선교신을 하지 않은 점, 셋째 굳이 야간등반을 택해 확실한 등정 사진을 촬영하지 않은 점 등이 그 이유였다.
이에 대해 김 대장은 “등반에 불만을 품은 몇몇 대원이 퍼트린 소문에 불과하다”며 “홍콩 산악인들이 기술적으로는 한국 대원보다 뒤졌지만 끈기가 있고 등반에 대한 열의가 더 강해 등정에 성공한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이후 여러 정황과 증거미비로 등정 의혹을 불러일으키다가 이듬해 등정한 한국 팀들에 의해 거짓으로 밝혀져 한국 산악인들의 안타까움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