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달 경의선 전철화로 5량 '미니기차' 퇴역 아담했던 역사들도 헐려
지난 5일 오전 10시50분 서울역 6번 승강장. 미끈하게 쭉 빠진 KTX 열차들 틈바구니에 달랑 다섯 량짜리 경의선 통근열차가 종착점인 파주 임진강역을 향해 발차 채비를 하고 있었다.
경의선 통근열차는 매일 새벽 5시50분 서울역을 출발하는 첫차를 시작으로 하루 39회 운행한다. 출발시각이 되면 묵직한 저음을 내며 몸을 일으키는 KTX와 달리, 경유를 때서 디젤 엔진을 돌리는 경의선 통근열차는 '부르르르르릉' 하고 자동차 비슷한 소리를 낸다.
1951년부터 서민과 군인들을 태우고 서울과 파주 사이를 달려온 경의선 통근열차가 이달 말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코레일은 "다음달 1일부터 문산~도라산 구간(9㎞)을 제외한 경의선 전 구간에 전철을 투입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제 곧 사라질 다섯 량짜리 미니 기차에는 정다운 시설물이 많다. 우선, 차량 등받이를 조정해 승객들끼리 마주 보고 갈 수 있다. 화장실은 두 칸이다. 문짝에 '동양식'이라고 적혀 있다. 삐걱거리는 문을 열면 화변기(和便器·쪼그리고 앉아서 사용하는 일본식 변기) 옆에 두루마리 휴지가 걸려 있다. 열차가 흔들릴 때 넘어지는 '봉변'을 피하기 위해 앉으면 오른손이 닿는 위치에 손잡이가 달려 있다. 코레일 관계자는 "지금은 바닥이 막힌 수세식이지만, 90년대 중·후반까지만 해도 선로를 향해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는 '개방형'이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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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의선 통근열차가 이달 말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다음 달부터 문산~도라산 구간을 제외한 경의선 전 구간에는 전철이 다니게 된다./김건수 객원기자 kimkahns@chosun.com
경의선은 1906년 개통됐다. 용산에서 출발해 개성과 평양을 지나 신의주까지 518.5㎞에 걸쳐 갓 쓴 선비와 망토 입은 대학생, 단발머리 신여성을 태웠다. 한국전쟁으로 허리가 끊긴 1951년부터는 서울과 문산 간 46㎞ 구간만 한 시간에 한 대꼴로 기차가 다녔다. 비둘기호·통일호·통근열차 등 값싼 열차들만 투입된 '서민 노선'이었다. 이 가운데 비둘기호와 통일호는 진작 사라지고, 통근열차만 마지막까지 운행해왔다.
1970~80년대 경의선 통근기차는 시장통처럼 시끄러웠다. 일산에 5일장이 설 때면 전대를 찬 시골 아주머니들이 고무대야 한가득 배추·고추·양파·대파·호박·가지·깻잎 등을 이고 지고 팔러 나왔다. 공들여 군복을 다려 입은 까까머리 군인들이 통근열차를 타고 휴가를 나왔다. 얼굴 절반을 가리는 뿔테 안경을 쓴 대학생들이 기타를 메고 장발을 쓸어 넘기며 백마 카페촌에 놀러 갔다. 무인역에서 기차에 올라 검표 차례가 오면 얼른 자는 척하는 얌체 승객들도 있었다.
문산역·금촌역 등지에서는 기차 시간에 맞춰 마분지로 만든 열차표를 손에 쥔 승객들이 좁다란 개찰구를 향해 줄 섰다. 승무원이 펀치로 '또깍' 하고 표를 끊을 때마다 차표 조각이 싸락눈처럼 바닥에 흩어졌다.
연간 경의선 통근열차 승객은 1960년 442만7000명에서 1970년 548만2000명, 1980년 1566만명으로 계속 늘다가 1990년 736만명, 2000년 379만명으로 줄어들었다. 도로 사정이 좋아지고 지하철 3호선이 일산 신도시까지 들어온 데다, 서울행 버스편이 많이 생긴 까닭이다. 이후 2005~08년에는 연간 500만명 선을 유지했다. 출퇴근 시간과 주말을 빼면 시골 기차처럼 한가롭다.
전철화를 앞두고 요즘 경의선 주변은 공사가 한창이다. 빨간색 수색역사, 갈색 백마역사는 진작 헐렸다. 개구리 울고 백로 나는 논밭을 따라 아담한 역사와 낮은 승강장이 있던 자리에 번듯한 전철역이 속속 들어서는 중이다.
전철로 바뀌면 배차 간격은 지금의 1시간에서 10분 안팎으로, 운행시간은 1시간 20분대에서 50분대로 단축된다. 철로의 굴곡에 따라 승객이 '헉!' 소리를 삼키며 손잡이 쥔 손에 불끈 힘을 주게 만들던 이른바 '동양식 화장실'도 추억 속으로 아물아물 멀어질 것이다.
그래도 사라지는 옛 기차를 아쉬워하는 승객이 적지 않다. 정장에 중절모를 쓴 노신사 이은서(80·파주시 금촌동)씨는 "서울 사는 친구 병문안을 다녀오는 길"이라며 "경의선 통근열차를 탈 때마다 고향(충남 예산)에서 소싯적에 자주 타던 장항선 기차가 떠올라 푸근했는데…. 전철은 깨끗해도 이런 맛이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서울 돈암동 집에서 매일 새벽 옥수수 30봉지를 쪄다가 경의선 통근열차 손님들에게 판매해온 백모(여·70)씨는 "승무원들이 '이러시면 안 된다'고 하면서도 슬쩍 눈감아주는 경우가 많았는데, 앞으론 장사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한숨을 쉬었다. 1980년대부터 백마 카페촌으로 문인과 대학생들의 발길을 이끈 '숲속의 섬' 주인 김애자(여·60)씨는 "'386세대' 단골들이 '기차가 없어져 섭섭하다'고 한다"며 "카페 옆에 새로 전철역이 생긴다지만 기차 기적소리와 덜컹거리는 소리가 사라진다는 생각에 별로 반가운 줄 모르겠다"고 했다.
코레일 윤영국(48) 여객전무는 "경의선 통근열차는 느리고 값싸고 복잡하지만 사람 냄새가 물씬 나는 기차였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