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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경북 지방 스크랩 대구 팔공산 송림사의 아름다운 오층전탑
普願 추천 0 조회 63 16.06.23 18:2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대구 팔공산 송림사의 아름다운 오층전탑

 

송림사

 

송림사(松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 동화사의 말사로서, 신숭겸 등 고려 태조 왕건의 충신 8명을 추모하고자 이름 지어진 팔공산(八空山)의 서쪽,  칠곡군 동명면 구덕리에 위치해 있다. 

팔공산은 불교가 수용되면서부터 자연히 신라불교의 성지로서 자리매김 되었으며 불교문화를 꽃피운 영산이다. 동화사, 파계사, 선덕여왕? 원찰 부인사, 갓바위부처로 유명한 선본사, 은해사 등 많은 절들이 모두 팔공산에 위치하고 있다

송림사의 북쪽에는 일명 칠봉산(七峰山)으로 불리는 가산이 자리하고 있는데 7개의 봉이 7개의 골짜기를 이루어 칠곡(七谷)이라 한 것이 오늘의 칠곡(漆谷)이 되었으며, 1640년(인조 18)에 이곳에 가산성을 쌓고 칠곡도호부의 치소가 약 180년간 산성내에 있었다고 한다.

 

 

 

 

소나무 숲에서 절이 솟아낫다는 전설을 간직한 송림사(松林寺)는 확실한 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오층전탑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에 의해 삼국시대 말기인 7세기 후반, 통일신라인 8세기, 또는 9세기로 각각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신라 제19대 눌지왕대 묵호자 또는 진흥왕 26년(565) 중국 진(陳)에서 귀국한 명관(明觀)이 불사리를 봉안하기 위해서 절을 창건하고 그때 탑을 세웠다고 하거나, 신라 하대인 제40대 애장왕 대에 초창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1092년(고려 선종 9)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1055~1101)이 중창하였으며, 1243년(고려 선종 30)에 몽고병에 의해 가람이 소실되었다. 이후 복구되었으며『삼국유사』와 깊은 인연이 있는 보감국사(寶鑑國師) 무극(無極)이 만년인 1322년(고려 충숙왕 9)에 밀양 영원사에서 송림사로 옮겨 주석하다가 입적한 바 있다.

 

조선시대에 는 임진왜란 당시인 1597년 왜병들의 방화로 소실되었다가 오랜 기간이 지나 1686년(조선 숙종 12)에 이르러 기성대사(箕城大師)가 대웅전과 명부전을 중창하였는데, 지금도 숙종이 내린 대웅전 현액이 그대로 전해온다. 이어 1858년(조선 철종 9)에는 영추화상(永樞和尙)이 나머지 전각들을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전각배치도

 

일주문이 본래의 입구이나 대부분 일주문에서 왼쪽으로 50여m 떨어진 곳의 입구로 출입을 한다. 입구에는 안내소 겸 매점이 있고 입구로 들어가면 가람이 구성된 왼쪽으로 넒은 공간이 있는데, 주차장 등으로 활용되고 있다.

송림사는 높낮이 없이 전체적으로 평지에 모든 전각이 배치되어 있는 펑지가람이다 

 

 

 

오층전탑-보물  제189호

 

 

 

흔히들 한국은 석탑의 나라라고 이야기 할 정도로 탑이 많다. 그러나 순수한 전탑은 몇 기 되지 않아 탑의 상륜부 까지 오롯이 갖추고 있는 송림사 5층전탑은 미술사적 가치뿐만 아니라 희소가치 또한 높다.

 

탑의 겉모양뿐만 아니라 이 탑에서 나온 유물 역시 그 가치가 이루 말할 수 없는 데, 1959년 해체수리를 할 때 쏟아져 나온 사리엄구와 함께 여러가지 유물들은 양과 질 모두를 만족시켰다.

그 중에서도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의 화려한 아름다움과 정교함은 어떤 표현으로도 모자랄 지경이어서 대구박물관의 입장권 전면에 새겨지기도 했다. 또한 미국 매트로폴리탄 박물관에 대여되어 한국의 문화와 미술품을 알리는 메신저로서 유물의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오층전탑

 

송림사 대웅전 앞에 서있는 5층 전탑(塼塔)으로, 흙으로 구운 벽돌을 이용해 쌓아 올린 탑으로 우리나라레 몇 기 남아있지 않은 귀중한 탑이다.

탑을 받치는 기단(基壇)은 벽돌이 아닌 화강암을 이용하여 1단으로 마련하였는데, 기단의 4면에는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조각하였다. 탑신(塔身)은 모두 벽돌로 쌓아올렸다.

2층 이상의 몸돌은 높이가 거의 줄어들지 않아 전체적으로 높아 보이나, 각 몸돌을 덮고 있는 지붕돌이 넓은 편이어서 안정되고 온화하다.
지붕(옥개석)은 벽돌로 쌓은 점을 고려한 듯 밑면의 받침부분 외에 위의 경사면까지 층급을 두어 쌓았다.

꼭대기에는 금동으로 만든 머리장식이 남아있는데, 이는 1959년에 해체하여 복원작업을 하면서 원형대로 복제한 것이다. 비록 복제품이지만 통일신라시대 금동 상륜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 귀중한 자료가 된다.

 

9세기 통일신라시대에 세워진 것으로 추측되며, 보수를 하면서 탑신의 몸돌 내부에서 나무로 만든 불상과 사리장치 등이 발견되었다.

 

현재의 모습 일제                                                   강점기시의 모습

 

기단부

탑의 기단 외관은 흙으로 쌓은 이층기단으로 하층기단은 가공된 면석위에 판석으로 외곽을 덮어 기단을 이루었다. 동측면의 하층기단 면석을 보면 좌우의 우주와 4개의 탱주가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좌측 탱주가 없어 확실하지는 않다. 서측면에는 우측 우주와 4개의 탱주, 남측면에는 양쪽 우주와 2개의 탱주, 북측면에는 좌측 우주와 3개의 탱주가 있으나, 각각의 간격이 맞지 않고 흐트러져 있음을 알 수있다.

상층기단은 막돌로 1~2단 쌓아서 흙을 쌓아 외곽을 마감한 형식이다. 이 중 동측면의 상층기단 중앙 상부에는 1매의 가공된 판석이 섞여있다.

 

한편 이 탑의 기단위치는 현재 대웅전의 남북 축선에서 동쪽으로 6m정도 벗어나 있다. 그러므로 이 전탑이 원래의 위치를 지키고 있다고 보면 대웅전의 위치나 규모가 변경·축소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탑신부

이 탑 축조에 사용된 전(塼 흙벽돌)은 가로·세로 각 27㎝, 두께 5.5㎝ 내외의 정방형전과 이를 2등분한 크기의 장방형전이다.
1층 탑신의 하부는 2단의 벽돌을 쌓았는데, 그 위의 탑신보다 2~3㎝ 내어쌓아 탑신받침으로 삼았다.

바로 위에는 장방형 벽돌을 가로로 세워 쌓아 눈에 띄는데 이런 방식으로 쌓은 것은 1층 하부 뿐이며 그 위층에는 내어쌓기 방식의 탑신받침은 보이지 않는다.
각 층 탑신부는 모두 장방형 벽돌을 가로면과 세로면이 상하로 어긋나게 쌓아 효과적으로 무게의 분산을 도모하였다.
탑신의 층단수는 1층으로부터 31·10·9·8·7단이다. 1층과 2층탑신사이의 큰 체감률은 대부분의 탑에서 볼 수 있지만, 2층에서 5층까지는 1단씩 줄여나간 정확성이 주목된다.

각층의 옥개부는 가장 취약한 모서리부분에 정방형 벽돌을 배치하고 (3·4층 옥개부 모서리에는 이보다 큰 장방형 벽돌이 5~6매 섞여 있다) 나머지 부분은 장방형 벽돌의 좁은 세로면이 바깥에 있도록 쌓아 올렸다.

 

 

 

  

옥개석의 벽돌쌓기                                            탑신의 벽돌쌓기

 

 

이 탑의 특징 중 하나는 지붕면의 내쌓기가 잘 되어 있어 전탑으로서 석탑의 옥개석에 비견할 수 있을 만큼 넓은 옥개부를 가지고 있으며, 안정된 모습을 구현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탑신부의 정연한 체감률과 더불어 옥개부의 옥개받침과 지붕면의 층단수가 그만큼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

옥개받침수는 1층으로부터 9·7·7·6·4이다. 또 지붕면의 층단은 1층으로부터 11·9·8·7·5단으로 좁혀 나갔다. 2~3층 사이는 옥개받침수가 같으므로 주로 탑신의 넓이 축소에 의지하여 체감률을 조정한 것으로 보이며 또한 5층의 경우 옥개받침과 지붕면의 층단수 감소가 2단으로 2~4층보다 심하다. 이러한 결과는 상륜부를 올려야하는 노반의 넓이 조정 때문에 나타난 현상으로 짐작된다.

 

1층의 탑신 남쪽면에 감실이 있었으나 나중에 폐쇄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상륜부 

 

 

 

상륜부는 노반, 복발, 앙화, 보륜, 수연, 용차, 보주가 있으며 노반하부에서 찰주끝까지의 전체 높이는 4,806㎜이다.
5층 옥개부 위에 3단으로 쌓은 벽돌이 노반이며 여기서부터 이 탑의 상륜부에 해당한다.

노반을 덮고 있는 복발의 철판 각 모서리에는 길이 15㎝가량 되는 풍령이 달려 있다. 복발부터는 구리(銅)로 만들었는데 두꺼운 동판으로 나무기둥을 감싼 목심찰주(木心擦柱)를 중심으로 상륜 각부가 부착되어 있다.
이 찰주의 하부는 지름이 27.1㎝에 달한다.

복발(지름 78.2㎝)위에는 석탑의 경우보다는 훨씬 작은 앙화(상부 가로 49.4㎝)가 놓여있다. 앙화에는 화문(花文)이 새겨진 입식(立飾) 8매가 4면의 양쪽 모서리와 중앙부에 배치되어 있는데 상부가 바깥으로 휘어져 그 화려함을 뽐내고 있다.
앙화 위에는 크고 작은 둥근 산봉우리 모양으로 상부를 잘라낸 대륜형(帶輪形)의 보륜 3개가 있는데 앙화보다 훨씬 커서 이제까지 알려진 석탑 상륜부의 모습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위에 수연부분은 거의 떨어져 없어지고 남쪽의 촉에는 둥근 고리 안에 +자형 장식이 있는 것 1개만 남아있다. 이 부분에 장식을 달 수 있는 촉은 상하 모두 합하여 6군데로 모두 수연에 해당하여 처음부터 보개가 생략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용차·보주까지 남아있는 이 금속상륜부의 높이는 4.62m로 오늘날까지 그 모습을 전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복발에 달려있는 풍령

 

현재의 상륜부는 1959년에 해체복원작업을 하면서 원형을 복제하여 올렸다. 복제품이기는 하지만 통일신라시대 탑의 금동상륜부 원래 모습을 알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이다

 

 

 

기울어진 상륜부

 

옛 사진을 보면 상륜부가 굽어져 있다. 상륜부가 이렇게 굽어져 있는데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임진왜란 때 왜구들이 탑신 속에 들어있는 사리를 약탈하려고 들이닥쳤다.

스님들은  왜구들은 송(松)자를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상륜부에 밧줄을 걸어 당기는 순간 '송림사(松林寺);라고 외치자 왜구들이 혼비백산하여 달아났으며 이 때 상륜부가 굽어졌다고 한다

 

전탑은 비교적 단기간에 큰 규모의 탑을 건립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유지·보수 하는데는 많은 공력이 자주 투입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보수공사가 누적되다보면 초건 당시의 형태가 변형되거나 탑의 규모가 축소되기 쉽다.

 

송림사 오층전탑도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원래의 모습에서 많이 벗어나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해체 수리 시에 밝혀진 것처럼 1층탑신 남측면에 조선왕조시대의 목불(木佛)이 봉안된 감실이 있었다가 그 후 폐쇄되었던 것도 이 탑의 변모를 증명하는 한 예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리장엄구에 포함되어있는 은제도금수지형장식구(銀製鍍金樹枝形裝飾具)7) 나 경내에서 수습된 명문석은 송림사가 7세기 전반경에 창건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탑의 초건 시기도 그 무렵까지 소급시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2014년 1월 현재 보수중인 오층전탑>

 

 

송림사 오층전탑 사리함(국립대구박물관)

송림사오층전탑(松林寺五層塼塔)에서 발견된 사리구는

사리를 담은 녹색 유리사리병과 표면에 고리 모양의 무늬(환문(環文)가 장식된 녹색 유리잔이

 금판과 금봉(金棒)을 조립하여 만든 전각(殿閣) 형태의 사리기에 안치한 독특한 형식을 취하였다.

 

 

  송림사 사리구

 

송림사는 진흥왕 5년(544) 명관(明觀)이 중국에서 가져온 사리를 모시기 위해 세운 절로, 여기에는 우리 나라에 몇 개밖에 남아 있지 않은 벽돌로 만든 송림사 오층전탑(보물 제189호)이 있다.

 

1959년 이 탑을 수리하기 위해 해체하면서 탑 안에 있던 많은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탑의 1층 옥신부와 2, 3층 옥개부, 복발 등에서 10여점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모든 보물 제325호로 일괄 지정되었다.

 

사리장엄구란 부처의 사리와 사리를 봉안하기 위한 다중 구조의 용기 및 탑 안에 들어가는 각종 공양구를 포함한 일체를 말하는데 송림시오층전탑에서는 거의 모든 층에서 유물이 나왔다.

 

 

사리장엄구 발견 위치

 

◈ 1층 탑신에서는 

조선시대의 목불(木佛)과 파손된 석불, 동불(銅佛)이 나왔고,

 

 

 

금동전각형 사리기

 

금동제수형장식구                                                           구슬목걸이

 

     유리잔                                                                        사리병


2층에서는 채색된 거북 모양의 석궤(石櫃) 안에 넣은 높이 14.2cm 크기의 금동전각형사리기(金銅殿閣形舍利器)가 발견되었다.

이 사리기는 네 기둥의 아랫부분에 난간을 두르고 중앙에 앙련좌(仰蓮座)를 두어 유리잔을 받치게 하고, 기둥 위로는 보개(寶蓋)를 올려놓았다. 보개에는 은도금한 수형(樹形) 장식구를 달았으며 200여 개의 영락으로 장엄했다

 

가운데에는 높이 7.0cm, 입지름 8.7cm의 녹색 유리잔을 안치하고, 그 안에 다시 높이 6.3cm, 입지름 3.1cm의 녹색유리제 사리병을 얹어놓았다.

녹색의 유리제품은 사리장엄구로서는 유일한 것으로 잔의 표면에는 12개의 둥근 고리 모양의 장식이 있고, 사리병은 보주형 마개로 막았다.

녹색 사리병은 금동사리기 중앙에 놓여있던 컵모양의 유리잔 속에 들어있던 것이다. 높이 6.3㎝, 배지름 3.1㎝로 약간 황갈색이 도는 녹색의 투명한 유리로 만들어졌으며, 배가 부르고 목이 긴 형태를 하고 있다. 짙은 녹색의 보석형태를 한 마개가 달려있다

금동전각의 노란색과 유리제품의 녹색은 서로 대비되어 호사스럽고 강한 인상을 준다.

 

사리기 옆에는 높이가 18.0cm에 달하는 금동제수형장식구(金銅製樹形裝飾具)가 세워져 있다.

높이 18㎝로 보리수나무 모양을  한 용도를 알 수 없는 공예품이다. 밑이 뾰족한 뿌리 위에 좌우 대칭으로 뻗은 가지를 새긴 은판을 나무모양으로 접어 만들고 금으로 도금하였다.

보리수 형태로 된 가지에는 200여 개의 원형장식들이 달려있다

 

3층에서는 나무 뚜껑이 덮혀있는 돌 상자 안에서 목개(木蓋)와 부식된 종이들이 발견되었으며

 

 

 

5층 위에 있는 머리 장식부인 복발(엎어놓은 대접모양의 장식) 안에서는 높이 7.8cm, 입지름 18.0cm의 청자상감원형합(靑磁象嵌圓形盒)과 지름 3.0cm, 두께 7.5cm의 금동원륜(金銅圓輪) 2개가 나왔다.

중 상감청자원형합은 국화 꽃무늬와 덩굴무늬로 장식한 것으로, 유약 색깔과 문양으로 보아 12세기후반 상감청자의 전성기 때인 고려시대 것으로 보이는 뛰어난 작품이다.

 

이 밖에도 구슬 281개, 은 고리(은환) 15개, 향목 7개와 보리수 열매로 보이는 열매가 1개가 발견되었다.

하나의 탑 안에서 통일신라 시대와 고려 시대의 다양한 유물들이 발견된 점으로 보아, 보수가 여러 차례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2층에서 발견된 거북 함 속의 금동사리기와 유리사리병은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유물로 사료로서 그 가치가 크다.

 

 

             본래의 뚜껑                                                        분실 후 만든 모조품 뚜껑

 

 

대웅전 앞에는 오층전탑의 2층에서 발견된 석 거북 사리함이 놓여있다. 가구형 사리함과 금동제수형장식구가 들어있던 석괘이다

출토 후 사리구 일체는 국립대구박물괸으로 가지고 가 보물로 지정 보호되고 있으나 석조사리함은 방치되어 대웅전 앞에 놓여 있다가 관리소홀로 어느 날인지 모르게 거북석함의 뚜껑이 도난을 당하였다.

지금은 모조 뚜껑이 대신하고 있다

 

 

대웅전(大雄殿)

 

 

 

 

대웅전은 1686년에 세워졌으며, 1755년과 1830년, 1850년의 중수 사실을 적은 상량문과 중수기를 남기고 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불전의 양식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3칸, 다포계 겹처마 맞배지붕으로 단청이 되어있다. 장대석 기단 위에 화강석 정평주촉을 놓고 원주 기둥을 세웠다.

 

대웅전 안에는 낮은 수미단에 높이 3m의 삼존상이 있다.  삼존상은 향나무로 만들어진 불상으로 국내에서 보기 드문 큰 불상이다.

불상의 뒤로 후불탱화 3폭과 우측벽에 목각 신중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용두가 달린 소종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숙조임금의 글씨로 알려진 대웅전 편액

 

송림사 대웅전의 편액은 조선 숙종대왕의 친필이라고 하며, 가로 366㎝, 세로 160㎝나 되는 큰 편액으로 4개의 판자를 붙여 만들었고, 편액을 꽉 채운 글씨는 방정하면서도 획이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송림사 대웅전 목조석가삼존불좌상(松林寺大雄殿木造釋迦三尊佛坐像. 보물 제 1605호

 

본존 석가모니불

 

좌협시 지혜의 문수보살

 

우현시 질천의 보현보살

송림사 대웅전 수미단 위에 봉안된 이 삼존상은 석가여래와 문수·보현보살로 구성된 석가삼존형식으로, 본존불(277cm)의 높이가 3m에 육박하는 거대한 목조불상으로 향나무로 조상이 되었다,

복장기에 의하여 효종 8년(1657)에 조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삼존상은 규모가 큰 불상임에도 불구하고 신체비례가 적당하고 안정적이며, 당당한 형태미를 보여주고 있다. 본존 석가모니불은 오른손을 무릎 아래로 내리고 왼손은 무릎 위로 올려 구부린 항마촉지인을 결하고 있다. 본존과 거의 흡사한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좌·우협시보살상은 양손의 수인의 위치만 달리하여 두 손으로 긴 연꽃줄기를 잡고 있는데, 연꽃줄기는 보관과 함께 후대에 보수된 것으로 추정된다. 

건장하고 당당한 형태미, 엄숙한 얼굴표정에 입가를 눌러 만들어 낸 생경한 미소, 간략하고 단순화하지만 강렬한 힘이 느껴지는 옷주름 등의 양식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양대전란 이후 17세기 전·중엽경의 재건불사 과정에서 제작된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상통하며, 특히 17세기 전반에 활약했던 조각승 무염(無染)계에 속하는 수화원 도우(道祐 또는 道雨)를 비롯하여 18명의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제작한 대형작품이다. 따라서 이 삼존상은 17세기 전반과 후반을 잇는 기념비적 작품이자 조각유파 연구에도 귀중한 작품으로 평가된다

2009년 3월 5일보물로 지정이 되었다.

 

대웅전 어칸문의 좌우 신방목에 새겨진 무늬

 

 

삼천불전(三千佛殿)

 

 

누구든지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근본사상을 의미하는 삼천불전은 과거천불(과거 장엄겹천물), 현재 천불(헌재 현겁천불), 미리천불(미래성수천겁불)을 모신다.

삼천불전은 선영당으로 사용하던 전각을 개보수하여 사용하고 있으며 보물 1606호로 지정된 칠곡 송림사 석조 아미타삼존여래(아미타여래불,관음보살,지장보살)과 삼천불을 봉안하고 있다.

 

일반 사찰에서 천불전은 대개 현재 현겁천불을 모시고 있다

현겁(賢劫)은 시간의 개념으로, 세상이 개벽하여 다시 개벽할 때까지의 기간을 이른다. 불경에 따르면 현겁에 1,000명의 부처가 나타나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송림사 석조아미타여래 삼존불(石造 阿彌陀如來 三尊佛)-보물  제1606호

  

본존 아미타여래

 

지장보살

 

관음보살

삼존상 모두 수인이 특이하다

 

 삼천불전에 봉안된 삼존상은 아미타여래와 관음·지장보살로 구성된 아미타삼존형식으로 본존에서 발견된 복장조성기에 의하면 순치 12년(1655)의 조성된 것이다

현재는 두터운 개금과 후대 보수로 인해 세부적인 분석은 어렵지만 대체로 조선후기의 안정된 구도를 보이는 상이다.

본존은 상체에 비해 하체가 다소 약한 듯 하고 다리 앞으로 부채꼴 주름이 길고 높은 편이다. 불두는 육계표현은 없으나 정상육계, 중간육계가 있고 나발로 덮었다. 어깨도 약하게 각진 형태에 오른어깨로 대의 자락이 걸친 통견이다. 내의는 가슴 아래에 굵은 띠로 표현되었고 띠매듭은 없다.

양손은 모두 다리에 얹어 촉지인형태를 하고 있다. 좌우 협시의 양식도 본존과 흡사하며 특히 민머리의 지장보살 불두가 본존의 불두와 흡사하다.

석조의 대작에 속하므로 조선후기 불교조각사에서 기준작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 삼존상은 ‘불석(Zeolite, 沸石)’이라고 불리는 돌로 제작되었다고 한다.

불석이란 경주지역에서 채석되는 연질의 석재로서 목조각을 전문으로 하는 조각승들도 비교적 쉽게 다룰 수 있는 재료이다. 상들의 표현은 재질에서 기인한 탓인지 얼굴이나 신체의 표현에서 다소 딱딱한 느낌을 준다.

이 삼존상에서 특기할 만한 표현은 수인의 형태로 삼존 모두 두 손을 다 같이 손바닥을 밑으로 하고 두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이러한 수인은 조선후기 불석제 불상에서 많이 보이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특히 이상은 이러한 수인을 취한 불석제 불상 중에서 선구적인 예에 속하는 것으로 조각사적 의의가 있다.


 

명부전(冥府殿)

 

 

 

명부전은 지장전이라고도 불리며, 사찰에서 지장보살을 주불로 봉안한 법당으로 죽은 사람의 넋을 인도하여 극락왕생하도록 기원하는 곳이다.

 

송림사 명부전은 전국에서도 제일 큰 규모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주심포계, 홑처마에 맞배지붕이다. 막돌허튼층 쌓기 전에 장대석을 깐 기단으로 화강석 정평주초 위에 원주 기둥을 세웠다

내부천정은 연등천장이고 바닥은 나무마루로 문 옆으로 금강역사가 서 있고 죽은 사람의 생전의 죄를 심판하는 시왕이 모셔져 있으며, 불단 중앙에는 지장 삼존상을 봉안하고 그 뒤로 후불탱을 봉안하고 있다

 

송림사 명부전에 봉안되어 있는 삼장보살좌상은 국내 유일의 조선후기 석조 삼장보살상으로 그 가치가 매우 높다. 봉안된 상의 조성연대는 허공장(지지)보살의 좌협시상에서 나온 발원문을 통해 1665년임을 알 수 있다.

시왕(十王)상, 판관상 등 명부전의 다른 22구 제상(諸像)은 조형성이 돋보이고 미술사적 자료로 가치가 높아 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리되고 있다.

 

 

응진전(應眞전)

 

 

 

응진전은 바로 부처님의 제자인 승보(부처님의 제자)를 봉안한 전각이다. 나한전(羅漢殿)이라고도 불린다

나한(羅漢)이란 남방 소승불교에서 최고의 깨달음을 얻었음을 가리키지만 넓은 의미로서는 소승, 대승(小乘, 大乘)을 막론하고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성자의 뜻이다.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모시고 좌우에 석가모니의 제자 중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얻은 성자들의 그림이나 조상을 봉안하고 있다

 

송림사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익공계에 겹처마로 맞배지붕이다. 가구식 기단에 둥근 다듬돌 주초석를 놓고 그 위에 원주기둥을 세웠다. 어칸과 좌우협칸은 궁판이 있는 띠살무늬 2분합문을 달았다.

내부에는 마루바닥을 깔고 불단을 조성하여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하여 좌우보처로 제화갈라보살과 자씨미륵보살이 협시하고 16나한이 봉안되어 있다. 삼존상 뒤로는 후불탱화가 봉안되어 있다

 

 

설법전(說法殿)

 

 

화재로 인하여 소실 후 다시 지은 설법전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로서 자연석으로 쌓은 기단 위에 잘 다듬은 주초석을 높게 놓은 뒤 원주형의 짧은기둥을 올린 누각형태로 지어진 건물이다.

대웅전 쪽으로 통유리를 설치하여 외부가 환히 보이도록 하였으며 내부에는 관음보살이 봉안되어 있다

종전의 설법전건물은  2008년 6월 26일 화재로 소실되고 2011년에 다시 복원한 건물이다.

설법을 하는 용도로 주로 사용한다

 

 

2008년 화마로 사라진 설법전

 

 

당간지주(幢竿支柱)

 

 

당간지주는 대웅전에서 서쪽으로 약 100m 떨어진 담장 밖 밭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최근 경지 정리를 하면서 거대한 당간지주의 밑부분이 노출되었는데 받침의 기단석은 보이지 않는다.

당간지주의 윗부분은 부러져 길이 60cm, 폭 50cm, 높이 90cm 정도가 남아 있다. 표면은 다듬어지기는 했으나 약간 거친 편이며, 부러진 윗부분을 보면 구멍을 뚫었던 흔적이 보인다. 건립년대는 송림사의 창건 당시로 추정되며, 나머지 한 기도 비슷한 크기에 역시 부러진 채로 조금 떨어져 있다. 당간지주의 위치로 보아 과거의 송림사 입구가 이곳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승탑(僧塔)

 

기성대사 비각과 승탑

 

승탑은 송림사에서 동쪽으로 약 300m 지점에 있는 2m 높이의 기성대사비각(箕城大師碑閣)옆에 잇대어 모두 4기가 모여져 있다. 대부분 조선시대의 석종형 부도에 속하며, 송림사에 주석했던 고승의 부도인데, 다만 어느 스님의 묘탑인지는 알 수 없다.


 

오층전탑 앞의 석등

 

일주문

 


◈ 송림사의 전설

옛날 어느 추운 겨울날, 어느 부자집에 초상이 났다. 장례 전날밤 상주의 꿈에 어떤 노인이 나타나 “내 시키는 대로 한다면 너의 집안은 대대로 복을 누릴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큰 화가 미칠 것이다. 장례를 끝마치기 전에는 누구에게도 물건이나 음식을 주지 마라”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조상이 현몽하여 일러준 것으로 믿은 상주는 조상객이나 인부들에게도 음식을 못 먹게 했다. 인부들은 배가 고팠으나 일을 마치고 나면 품삯을 두둑히 주겠다는 상주의 말을 듣고, 참고 일했으며, 마을 사람들도 추위 속에서 장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장례를 치루는 곳을 알고 찾아온 걸인들이 음식을 좀 달라고 졸라도 상주는 떡 한쪽 주지 않았다. 오히려 장례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음식을 챙겨 집으로 내려 보냈다. 그러나 인부를 시켜 집으로 돌려보낸 것이 걱정이 되어, 자신이 직접 뒤쫓아 가기로 하고 남아 있는 인부들에게 신신 당부를 했다.

“절대로 장례 물건을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말게. 품삯 은 두 곱으로 쳐 주겠네”, “염려마십시오,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다 불살라 버릴 테니까요” 다짐을 받은 상주는 허겁지겁 집으로 달려갔다.

 

산에는 인부들이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일을 마치고 나자, 짚푸라기 하나 남기지 않고 모두 한곳에 쌓아 태우기 시작했다. 이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위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거지 아이가 모닥불 옆으로 다가와 떨며 애원했다. “저는, 오늘밤 얼어 죽을 것 같습니다. 제발, 그 가마니 한 장만 주십시오”

측은한 마음이 든 인부들은 상의 끝에 헌 가마니 한 장을 줘 보내고 연장을 챙겨 막 내려오려는 순간 ‘펑!’ 하는 소리와 함께 거지 아이가 가고 있던 그 자리에는 웅장한 절이 생기고, 가마니는 그 절의 대웅전에 걸려 있었다.

그 후, 그 상주집안은 점점 몰락하고, 대도 끊기고 말았다. 그러나 거지 아이에게 온정을 베풀어 주었던 인부들은 점점 살림이 늘고 자손도 번창 하였으며, 절의 이름은 소나무 숲에서 생긴 절이라 하여 ‘송림사(松林寺)’라 하였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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