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종중 |
종친회 |
좁은 지역사회 거주 |
전국(도시)에 산재 |
근친자로 구성 |
원친자로 구성 |
자연적 조직 |
인위적 조직 |
종손이 결합의 중심 |
회원 결의에 의한 대표자 중심 |
주요 기능: 제사 |
주요기능: 친목,제사,족보,정치 |
규약: 불문율 |
규약: 공식적인 규약·정관 |
가입·탈퇴가 운명적이다 |
가입·탈퇴가 자유롭다 |
이 둘의 차이점을 극단적으로 표현해 보면 서울과 같은 대도시는 동성·동족모임으로 ‘종친회’가 대표성을 가진다면, 지방의 농촌사회는 ‘문중’이 그 대표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우리 대구의 경우는 광역시임에도 불구하고 현대적 개념의 ‘종친회’와 전통적 개념의 ‘문중’이 모두 활성화 되어 있다. 그러나 그 실상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종친회 보다는 문중 쪽에 무게중심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 대구의 문중문화가 다른 대도시와는 다른 어떤 독특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반증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 대구가 지니고 있는 특별한 문중문화에 대해 좀 더 알아보기로 하자.
2) 문중의 형성과정
가) 16c 이전
대구문중의 형성과정을 살펴보기 위해서는 두 가지의 접근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역사적 측면의 접근이고, 다른 하나는 지리적 측면의 접근이다. 앞서 우리는 문중이라는 개념이 촌락과 같은 좁은 지역의 동성모임에 적용된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또한 동성촌락 곧 ‘집성촌’이 문중의 좋은 예가 됨도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집성촌의 형성과정’과 ‘문중의 형성과정’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다 할 수 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영남지역의 문중들은 그 형성과정에 있어 일정한 유형이 있다. 대구 역시 그 유형에서 벗어나지는 못한다. 대체로 문중의 시작은 여말선초에 형성된 ‘토성(土姓)’에서 유래된 바가 크다. 세종실록「지리지」에 근거한 대구의 토성은 <표2>와 같다.
<표2> 대구의 토성
군·현 |
토성 |
대구군 |
백(白), 하(夏), 배(裵), 서(徐), 이(李) |
수성속현 |
빈(賓), 라(羅), 조(曺), 혜(慧) |
하빈속현 |
신(申), 이(李), 송(宋) |
해안속현 |
모(牟), 백(白), 하(河), 신(申), 정(丁) |
팔거속현 |
도(都), 임(任), 현(玄) |
이 중 ‘이, 배’는 신라 6성에 해당한다. 참고로 현재 우리나라 5대 성인 ‘김, 이, 박, 정, 최’는 모두 ‘신라 3성과 6성’을 그 기원으로 한다. 이는 토성(土姓) 형성과정에서 내성(來姓)이 수용될 때 귀족성인 신라왕실의 성이 그 중심이 되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만 해도 각각의 토성들이 해당지역의 지배층을 형성하고 있던 시기였다. 이른바 ‘호족(豪族)’이라 불리는 집단이다. 하지만 이들은 고려시대를 거치면서 신분이 이족(吏族)으로 격하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호족들은 서울에서 파견된 관인(官人)들과 지역의 지배권을 두고 오랜 세월에 걸쳐 충돌과 야합을 거듭했다. 하지만 누대에 걸쳐 부와 권력을 세습해온 호족들은 여전히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쥐고 있었다. 그래서 논리적으로는 좀 비약이 있지만 대구 최초의 문중은 이들 토성 호족들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달성서씨’와 ‘달성하씨’이다. 한편 토성 호족들 중 일부는 벼슬살이를 위해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재경관인(在京官人)’ 그룹을 형성하기도 했다.
문헌자료를 통해 확인이 가능한 대구문중은 여말선초 정권 교체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등장한다. 바로 ‘절의파(節義派)’와 관련 있는 인물들의 대구 입향으로, 이른바 ‘대구 입향 1세대 문중’이다. 입향 1세대 문중은 대체로 2가지 유형이 있었다. 대구출신 재경관인의 신분에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낙향한 경우와 복지(福地)를 찾아 대구로 입향한 경우이다. ‘대구 입향 1세대 문중’의 대표적인 예를 몇 개 들어보면 <표3>과 같다.
<표3> 대구 입향 1세대 문중
성씨 |
입향조 |
입향지 |
사유 |
밀양박씨 |
귀림 박해 |
시지 |
절의·처향(妻鄕) |
단양우씨 |
정략장군 우전 |
월촌 |
절의·복지(福地) |
아산장씨 |
장흥부 |
시지 |
절의·처향 |
인천채씨 |
은수 채영 |
포정동 |
절의·낙향 |
‘대구 입향 1세대 문중’에 이어 조선개국 이후에는 ‘세조의 왕위 찬탈’과 ‘단종 복위운동’ 그리고 ‘사화’ 등을 거치면서 다시 ‘대구 입향 2세대 문중’들이 생겨나게 된다. <표4> 참고.
<표4> 대구 입향 2세대 문중
성씨 |
입향조 |
입향지 |
사유 |
능성구씨 |
부사공 구수종 |
범어 |
연산군 조 |
서흥김씨 |
참의공 김중곤 |
현풍 솔례 |
처향 |
성주도씨 |
우후공 도흠조 |
서재 |
복지 |
남평문씨 |
인산재 문경호 |
인흥 |
복지 |
일직손씨 |
참봉 손세경 |
수성 |
외손봉사 |
파평윤씨 |
아암 윤인협 |
다사 문산 |
복지 |
인천이씨 |
현감공 이말흥 |
파잠 |
연산군 조 |
인천이씨 |
태암 이주 |
무태 |
복지 |
영천이씨 |
부사공 이보관 |
팔공산 |
단종복위 피란처 |
전의이씨 |
예산공 이필 |
하빈 |
복지 |
동래정씨 |
임하 정사철 |
다사 연화 |
양친 묘소 수호 |
경주최씨 |
대암 최동집 |
옻골 |
복지 |
하양허씨 |
생원 허충 |
하양 |
단종복위 피란처 |
‘대구 입향 3세대 문중’은 조선중기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형성된다. 고을수령, 관군, 의병 등으로 활략하다가 대구에 정착하거나, 타국에서 원군으로 왔다가 조선에 귀화한 경우 그리고 피란처, 혼맥, 복지 등의 이유로 대구로 들어온 경우가 대표적이다. <표5> 참고.
<표5> 대구 입향 3세대 문중
성씨 |
입향조 |
입향지 |
능성구씨 |
계암 구회신 |
무태 |
김령김씨 |
모영 김귀송 |
노곡 |
사성김해김씨 |
모하당 김충선 |
우록 |
두릉두씨 |
모명 두사충 |
만촌 |
문화류씨 |
사월당 류시번 |
방촌 |
달성서씨 |
이재 서사진 |
산격 |
달성서씨 |
전귀당 서시립 |
도동 |
충주석씨 |
인산당 석언우 |
옥포 |
일직손씨 |
모당 손처눌 |
황금 |
남양제갈씨 |
제갈자경,제갈중경,제갈연경 |
현풍 |
중화양씨 |
지촌 양달화 |
지산 |
단양우씨 |
학사공 우익신 |
평광 |
함안조씨 |
동계 조형도 |
동촌 |
함안조씨 |
연담 조함장 |
원대 |
경주최씨 |
대암 최동집 |
옻골 |
경주최씨 |
충익위 최제남 |
봉무 |
김해허씨 |
직장공 허승립 |
이곡 |
이처럼 3번에 걸쳐 대구로 입향한 내성(來姓)들은 기존 대구지역의 토성과 더불어 17c 이후에는 대구를 대표하는 문중으로 발전하게 된다.
나) 17c 이후
살펴본 바와 같이 16c 이전 시기 대구문중의 형성은 영남문중의 형성과정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런데 16c 이전에 형성된 이들 문중은 오늘의 주제인 ‘집성촌·세거지로서의 문중’이라는 측면에서는 아직 완전한 모습을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시 촌락의 형태는 기존의 ‘토성’과 외부에서 들어온 ‘내성’이 함께 한 지역을 공유하는 일종의 ‘각성받이’ 촌락의 형태였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당시 유행한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2)’을 예로 들 수 있다. ‘서류부가혼’은 아버지의 성(姓)을 계승한 아들들은 처향(妻鄕)으로 빠져 나가고, 처향은 타성의 사위들이 들어오게 되는 시스템이다. 이러한 시스템에서는 집성촌의 형성을 기대할 수가 없다. 물론 ‘각성받이’ 촌락의 형성에는 ‘서류부가혼’ 외에도 ‘남녀균분상속제’ 등의 이유도 있으나 결국은 같은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다.
대구지역에서 ‘집성촌’의 형태를 갖춘 문중은 17c 이후에 비로소 정착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는 ‘종법(宗法)’제도의 정착과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서류부가혼’, ‘남녀균분상속제’ 등이 ‘각성받이’ 촌락을 유지케 했다면, ‘종법제도’는 ‘집성촌·세거지’를 형성케 하는 강력한 원동력이었다. 종법제도가 뿌리를 내린 17c 이후 조선사회에서는 더 이상 아들들이 처향으로 살림을 나지 않아도 되었다. 대신에 아들들은 자신의 고향에서 분가하여 일가를 이루어 나갔던 것이다. 동시에 이미 처향에 나가 살던 아들들도 가족을 거느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러한 현상이 지속되면서 기존의 ‘각성받이’ 촌락은 한 두 개의 특정 성씨만 거주하는 ‘집성촌’으로 변해 갔다. 이렇게 형성된 ‘집성촌’을 중심으로 대를 이어 가며 거주 및 자신들의 세를 확장해 나감에 따라 ‘문중’을 중심으로 하는 ‘문중 세거지’가 형성된 것이다. 따라서 ‘문중’이라는 개념은 ‘집성촌’, ‘세거지’와 함께 이해를 해야 제대로 된 이해가 가능하다.
3) 문중의 현재
현재 대구문중의 모습을 이해하는데 있어 다행이도 좋은 예가 하나 있다. 바로 「대구 24문중」이라 불리는 대구 대표문중이 그것이다. 「대구 24문중」3)이라는 이 결사체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각종 자료들을 통해 어느 정도의 추측은 가능하다. 현재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대구 24문중」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16c 이전부터 대구지역에 세거했던 문중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대구 24문중」은 기본적으로 대구라는 지역적 동질성 아래 ‘학맥’, ‘혼맥’, ‘향청·향교·서원’ 등을 통한 그들만의 강력한 공동체의식으로 결집되어 있었다. 이러한 공동체 의식은 그들 상호간은 물론 하층민에 대한 지배권 확보에도 큰 몫을 했다. 그 한 예로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대구 24문중」은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지역 내 사대부는 물론 노비와 농민들까지도 손쉽게 동원할 수 있었다. 게다가 그 공로로 조정으로부터 보상까지 받음으로써 「대구 24문중」은 지역사회에서 그 입지를 더욱 공고하게 굳혀나갈 수 있었다.
「대구 24문중」은 조선 후기 서인 집권기에 이르면 더 이상 중앙정계로의 진출은 단념한다. 대신 중앙정계와는 상관없이 향촌사회에서의 활동을 통해 재지사족으로서 구한말까지 그 세력을 지속했다. 그런데 특기할 만한 사실은 지금으로부터 약 400여 년 전에 형성된 「대구 24문중」이 현재까지도 대구 유림사회에서 그 위치가 변함없다는 점이다. 오히려 더 단결된 결속력을 보이고 있다. 참고로 「대구 24문중」은 본래 ‘27문중’이었는데 1,900년대 중반에 와서 ‘24문중’으로 정리·정착되었다.
<표6> 대구 24문중
번호 |
성씨 |
거주지 |
번호 |
성씨 |
거주지 |
1 |
달성서씨 |
남산 |
16 |
성산여씨 |
무금 |
2 |
인천채씨 |
연경 |
17 |
인천이씨 |
무태 |
3 |
순천박씨 |
묘골 |
18 |
동래정씨 |
연경동 |
4 |
전의이씨 |
하목정 |
19 |
영천이씨 |
지저 |
5 |
옥천전씨 |
만촌 행정 |
20 |
영동김씨 |
쌍암 |
6 |
단양우씨 |
월촌 |
21 |
문화류씨 |
검사 |
7 |
능성구씨 |
무태 |
22 |
현풍곽씨 |
창동 |
8 |
일직손씨 |
수성 |
23 |
함안조씨 |
원대 |
9 |
성주도씨 |
서재 |
24 |
수성라씨 |
분암 |
10 |
성주배씨 |
연천 |
※ 이상은 대구향교 ‘향안속수록’ 의거 | ||
11 |
수원백씨 |
구시장 | |||
12 |
옥산전씨 |
무태·파잠 |
밀양박씨, 달성하씨, 김해허씨, 안동권씨, 전주이씨, 행주은씨, 남평문씨, 초계주씨 등 ※이상은 기타자료에서 나타나는 경우 | ||
13 |
경주최씨 |
해안·안심 | |||
14 |
중화양씨 |
파잠 | |||
15 |
여주민씨 |
산격 |
나. 대구의 재실4)
1) 재실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는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시지, 지산, 율하, 도동, 무태, 칠곡, 성서, 옥포, 대곡 같은 신도시들이 많이 있다. 대구 도심을 원형으로 감싸고 있는 이 지역들은 아직까지 도시경관과 농촌경관이 공존하고 있는 지역이다. 현재 대구시는 2020년 완공을 목표로 이들 신도시 지역을 타원형으로 연결하는 4차 순환로 공사를 진행 중에 있다. 그런데 이 지역에는 대구의 ‘문중문화’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문중유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 있다. 7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진행된 도시개발 붐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문중문화와 유적은 몇몇 문중의 보종(保宗)사업의 노력으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화를 면할 수 있었다.
대구의 문중문화와 관련 있는 전통 건축물 중 수적으로 가장 압도적으로 많은 것이 ‘재실(齋室)’이다. 재실은 다른 말로 ‘재사(齋舍)’ 또는 ‘재궁(齋宮)’이라고도 불리는데, 용도에 따라 크게 2가지의 유형으로 나눌 수가 있다.
▖연거(燕居)5) 또는 강학의 용도: 적당한 터에 집을 지어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거나 강학을 목적으로 하는 건물.
▖재계6), 제사의 용도: 묘제를 포함한 각종 제사를 앞두고 재계, 준비, 제사를 행하는 건물.
하지만 지금은 이 같은 구분이 별 의미가 없다. 현재의 재실들은 대부분 ‘묘제’, ‘선조를 추모하는 장소’ 또는 ‘문중 회합장소’ 등으로 활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재실이라고 통칭하는 건물들은 대개가 ‘제사’ 또는 ‘문중 회합장소’로 사용하는 건물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그렇다면 이러한 재실은 어떤 곳에 세워졌을까? 다시 말해 입지선정의 기준이 무엇이었을까? 이는 앞서 언급한 ‘문중 세거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연거를 목적으로 한 재실이든지 묘제를 위한 재실이든지 간에 문중재실은 기본적으로 ‘문중 세거지’를 벗어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재실이 있는 곳은 십중팔구 그 재실을 소유한 문중의 세거지라는 말이다. 이는 입향조를 계승한 백파(伯派)는 물론 지손들에 의해 형성된 지파(支派)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세거지에 재실을 건립하는 현상은 조상을 현창하고 추모하는 것을 지상 최고의 덕목으로 치는 유교적 전통에 기인한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재실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누·정·서당·서원·정려’ 같은 다른 유교 건축물에도 예외 없이 적용되어 이들 역시 해당 문중의 ‘세거지’를 크게 벗어날 수는 없었다.
‘재실은 해당 문중의 세거지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러한 재실입지의 특성을 감안해 보면 여기서 중요한 단서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현재 대구 도심권 내에 남아 있는 여러 재실을 통해 과거 한 시대를 풍미했던 대구문중들의 세거지를 어느 정도 가늠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구는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를 거치면서 거대도시로 변모했다. 하지만 광역시답게 대구는 넓은 지역에 걸쳐 있다. 그래서 시가지화 된 도심을 조금만 벗어나면 농촌풍의 촌락들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우리는 이 지역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이 지역에는 아직까지도 세상과 보물찾기라도 하듯,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고 숨어 있는 많은 수의 재실과 문중이 곳곳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2) 대구의 재실
현재 우리 대구에는 과연 얼마만큼의 재실이 남아 있을까? 필자가 젊은 유림 층을 대상으로 이 질문을 해본 결과 가장 많이 들을 수 있었던 대답이 ‘30-50개’ 정도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2014년 현재 필자가 각종 자료 및 현장 답사를 통해 확인한 대구지역의 재실 수는 무려 350 여개나 된다. 이 중 절반가량은 아직까지 농업 위주의 전통문화권인 ‘달성군’ 지역에 산재해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나머지 절반에 해당하는 170여개의 재실은 대구광역시 도심권 안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수치를 절대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재 대구문중들에 의해 유지·운영·관리되고 있는 재실의 수가 이 만큼이나 된다는 것은 분명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까닭 없이 존재하는 사물은 없는 법이다. 향후라도 대구지역의 재실에 대해서는 전문가들에 의한 심도 깊은 연구가 꼭 필요하다고 본다.
필자는 평소 대구광역시 ‘동구·서구·남구·북구·중구·수성구·달서구’ 7개 지역7)을 대상으로 재실현황을 꾸준히 조사해 왔다. 조사는 기존의 기록자료8) 검토 및 현장 확인조사9)를 병행했다. 이렇게 얻어진 1차 자료를 토대로 다시 ‘지역별, 성씨별, 창건 년대별’로 분류하여 나름 의미 있는 2차 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참고로 필자는 이 분야를 전공하는 학자는 아니다. 더욱이 재실에 대한 이 조사는 완료상태가 아닌 아직까지도 진행 중에 있다. 따라서 자료의 정확성이나 논리의 전개과정 등 연구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부족한 점이 많음을 먼저 밝혀둔다.
3) 대구의 재실현황
가) 지역별 재실현황
다음의 <표7>은 대구 도심권 안에 산재해 있는 재실들을 ‘7개 구별’로 나누어 분류를 해본 것이다. 이 표를 참고하여 지역별 재실현황의 특이점들을 한번 살펴보자.
<표7> 대구의 재실(지역별)
지역 |
재실수 |
비고 |
동구 |
81 |
경주최씨16(도동·둔산·봉무·부동·용수·지묘·평광), 단양우씨12(평광·덕곡·안심),인천채씨9(미대·지묘·내동·둔산·부동), 경주이씨6(송정·사복), 문화류씨5(내동·부동·안심·평광), 성주배씨4(안심·봉무·숙천), 달성서씨4(내곡·도동·숙천·지묘), 장수황씨3(안심), 평산신씨2(지묘), 김해김씨2(내곡·백안), 영양남씨2(둔산·부동), 행주은씨1(중대), 경주김씨1(평광), 교하노씨1(신룡), 남양홍씨1(둔산), 대명동14현1(효목), 성산여씨1(부동), 성주이씨1(용계), 옥산전씨1(둔산), 월성배씨1(지묘), 일직손씨1(도동), 정선전씨1(중대), 진주강씨1(평강), 구로정(도동), 이제묘1(평광), 아양루(효목) 기타2 |
서구 |
3 |
달성서씨1(상리), 인천채씨1(상리), 안동권씨1(원대) |
남구 |
1 |
달성서씨1(봉덕) |
북구 |
34 |
인천이씨7(무태·도남), 달성서씨6(산격·태전), 능성구씨5(무태), 인천채씨3(검단·무태), 경주이씨2(노곡·동호), 함안조씨2(노곡), 김령김씨1(노곡), 달성배씨1(관음), 수원백씨1(노곡), 야성송씨1(매천), 영동박씨1(조야), 전주최씨1(국우), 창원황씨1(노곡),동래정씨1(연경), 칠곡향교1(읍내) |
중구 |
5 |
달성서씨1(봉덕), 대구향교1(남산), 대구시청년유도회1(남산), 대구향교여성유도회1(남산), 대구 노론계1(남산), |
수성구 |
30 |
아산장씨4(고산), 중화양씨4(지산·파동·황금), 달성하씨3(만촌·황금), 달성서씨2(만촌), 두릉두씨2(만촌), 경주김씨2(범물·지산), 일직손씨2(상동·황금), 풍기진씨1(상동), 경주최씨1(만촌), 고산서당유림회1(성동), 밀양박씨1(고산), 성산배씨1(황금), 순흥안씨1(고산), 옥산전씨1(만촌), 옥천전씨1(파동), 인천채씨1(성동), 청주정씨1(고산), 하양허씨1(파동) |
달서구 |
23 |
단양우씨9(상인), 밀양손씨2(상인), 순천김씨1(파호), 이락서당계 9문중1(파호), 경주최씨2(대곡), 고령김씨1(도원), 김녕김씨1(이곡), 김해김씨1(파호), 김해허씨1(이곡), 달성서씨1(파호), 밀양박씨1(도원), 성상전씨1(도원), 성주도씨1(용산) |
계 |
177 |
|
재실의 수는 동구가 81개로 압도적으로 많다. 다음은 북구 34개, 수성구 30개, 달서구 23개, 중구 5개, 서구 3개, 남구 1개의 순으로 나타난다. 이처럼 대구의 재실들이 ‘동구, 북구, 수성구, 달서구’에 편중되어 나타나는 것은 지역을 넓게 보는 현대적 지역개념 때문인 것 같다. ‘동구, 북구, 수성구, 달서구’ 지역은 ‘중구, 서구, 남구’에 비해 대구도심에서 상대적으로 거리가 멀다. 동시에 해당 구의 관할지역은 도심권과 함께 넓은 면적의 교외지역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 같다.
대구는 전형적인 분지형 지형이다. 사방이 산으로 막혀 있으며 신천과 금호강이 십자 형태로 만나면서 대구분지를 크게 네 구역으로 나누고 있다. 문중으로 대표되는 동성촌락 이른바 ‘문중 세거지’는 입지 선정에 있어 그 선정 기준이 비슷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외곽지역을 선호했다는 것인데, 가급적 지방관아가 있는 읍성과는 어느 정도 거리를 유지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문중 세거지’가 ‘재지사족층’을 중심으로 형성된 만큼 지방 관리로 부터의 간섭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지방관아에서 일정거리 이상 떨어진 ‘산록’과 ‘평야지대’를 주목했던 것이다.
조선시대만 해도 농경사회였던 만큼 ‘평야지대’를 선호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산록을 선호했다는 것은 어떤 이유 때문일까? 이는 ‘풍수설’과 함께 당시 영남을 중심으로 발달했던 각종 ‘수리시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배산임수(背山臨水)로 대표되는 풍수설은 그들로 하여금 가문의 발복이라는 기대감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줄 수 있었다. 한편 산간 개척은 보(洑)와 같은 수리시설의 발달과 함께 노비라는 노동력이 있었기 때문에 재지사족인 그들에게 있어 큰 문제는 아니었다. 예로부터 대구지역에 회자하는 ‘1파(巴)2무(無)’라는 말은 대구의 대표적 복거지(卜居地)를 이르는 말로 대구 최고의 복지(福地)는 ‘파동’과 ‘무태’라는 의미이다. 두 지역은 모두 내[川]를 낀 전형적인 산록지역이다. 이러한 내용을 참고하여 다시 <표7>를 살펴보자.
동구와 북구는 모두 팔공산 남쪽 산록에 접해있다. 이 지역은 불로천, 지묘천, 동화천 등으로 대표되는 팔공산 남쪽의 물을 끼고 있으며, 이 물들은 모두 금호강과 합류하는 지형적 특성을 보이는 지역이다. 또한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는 마을 뒷산격인 팔공산이 피난처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이러한 까닭에 대구의 많은 문중들이 동구, 북구 지역에 세거지를 형성했던 것이다.
수성구는 대덕산과 신천을 중심으로 한 산록과 평야지대로 신천, 범어천, 남천 그리고 멀리로는 금호강 유역도 일부 끼고 있다. 파동, 지산동, 황금동, 시지 같은 곳은 대덕산 산록 지역이며, 만촌동은 대표적인 평야지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달서구와 서구는 와룡산과 금호강을 중심으로, 중구는 대구의 진산(眞山)인 연구산(남산)을 중심으로, 남구는 앞산을 중심으로 문중의 세거지가 형성되어 있었다. 여하튼 이러한 해석은 「대구 24문중」이 당시 대구부의 외곽지역에 웅거하여 각각 그 세거지를 형성했다는 기존의 사실에도 부합한다.
참고로 중구의 경우는 한 가지 특기할만한 것이 있다. 현재까지 남아 있는 재실들이 모두 당시 지방관아, 노론계, 대구 토호세력과 관련된 건물이라는 점이다. 대구향교, 낙육재, 양사재는 당시 국가와 지방정부에서 운영한 공립교육기관이었고, 상덕사는 17c 이후 대구지역 노론계의 핵심사당이었다. 수덕사는 대구의 토성인 달성서씨의 재실이다.
나) 문중별 재실현황
<표8>는 문중별로 재실의 수를 정리한 것이다. 대구지역에는 52개 문중이 모두 177개의 재실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한편 이 표의 53번부터 62번까지는 ‘문중 연합체’ 또는 ‘유림단체’에서 운영하고 있는 재실인데 참고로 함께 실었다. 이들 단체까지 모두 포함하면 우리 대구지역에는 ‘52개 문중’과 ‘10개의 유림단체’가 모두 ‘177개’의 재실을 소유·운영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표8>를 참고하여 대구지역에서 10개 이상의 재실을 소유하고 있는 ‘단양우씨·경주최씨·달성서씨·인천채씨’ 4개 문중을 한번 살펴보자. ‘단양우씨 문중’의 재실은 모두 21개로 우리 지역에서 가장 많은 재실을 보유하고 있는 문중이다. 앞의 <표4>와 함께 비교검토를 해보면, 21개의 재실이 동구 평광동을 세거지로 하고 있는 예안군파(12개)와 달서구 상인동을 세거지로 하는 판서공파(9개) 두 문중의 재실임을 알 수 있다. ‘경주최씨 문중’의 경우는 모두 19개로 확인이 되는데 대부분이 동구의 ‘도동·둔산·봉무·부동·용수·지묘·평광’ 일원에 소재하고 있다. 기타 달서구 도원동(2개), 수성구 만촌동(1개) 등에서도 확인이 된다. ‘달성서씨’의 경우는 대구 전 지역에 걸쳐 재실이 확인되는 대구 유일의 문중이다. 재실의 수는 모두 16개인데, 동구(4개), 서구(1개), 남구(1개), 북구(6개), 중구(1개), 수성구(2개), 달서구(1개)로 나타난다. ‘인천채씨 문중’은 14개가 확인이 되는데 팔공산 자락인 동구 지묘·미대·내동·둔산·안심(9개), 북구 검단동·무태(3개), 서구 상리동(1개), 수성구 성동(1개) 등이다.
다음은 오랜 역사와 함께 대구를 대표하는 「대구 24문중」을 중심으로 한번 살펴보자. <표8>에서 ‘※’ 표시가 붙어 있는 성씨들이 「대구 24문중」에 해당한다. 총 177개의 재실 중 무려 70%에 가까운 119개가 이들 문중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이는 근대화 이후 대구로 입향한 많은 타성(他姓) 문중들의 수를 고려해 볼 때 매우 높은 수치라 할 수 있다.
참고로 이 표를 볼 때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먼저 「대구 24문중」 중 이 표에서 나타나지 않는 ‘순천박씨, 전의이씨’ 2문중은 대구시 달성군 지역에 집중적으로 재실을 소유하고 있는 문중이다. 이 표는 달성군을 제외한 대구시 7개구를 대상으로 한 결과이므로 이들 2문중은 빠져 있다. 그리고 ‘현풍곽씨, 성주도씨, 동래정씨’ 문중의 경우도 표에서 나타나는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실제로 이들 3문중 역시 대구도심권보다는 달성군 지역에 훨씬 많은 수의 재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함안조씨 문중은 한때 ‘원대조씨’라 불릴 만큼 원대동 일대에서 300년 이상을 세거한 큰 문중이었다. 그러나 구한말 종가(宗家)가 청송으로 환고(還故)하면서 원대동 세거지는 해체되고 말았다.
<표8> 대구의 재실(문중별)
번호 |
성씨 |
재실 수 |
번호 |
성씨 |
재실 수 |
번호 |
성씨 |
재실수 |
1 |
※단양우씨 |
21 |
21 |
영양남씨 |
2 |
41 |
※옥천전씨 |
1 |
2 |
※경주최씨 |
19 |
22 |
※옥산전씨 |
2 |
42 |
월성배씨 |
1 |
3 |
※달성서씨 |
16 |
23 |
청주정씨 |
2 |
43 |
전주최씨 |
1 |
4 |
※인천채씨 |
14 |
24 |
평산신씨 |
2 |
44 |
정선전씨 |
1 |
5 |
경주이씨 |
7 |
25 |
※함안조씨 |
2 |
45 |
진주강씨 |
1 |
6 |
※인천이씨 |
7 |
26 |
고령김씨 |
1 |
46 |
창원황씨 |
1 |
7 |
※능성구씨 |
5 |
27 |
교하노씨 |
1 |
47 |
풍기진씨 |
1 |
8 |
※문화류씨 |
5 |
28 |
※김해허씨 |
1 |
48 |
하양허씨 |
2 |
9 |
※성주배씨 |
4 |
29 |
남양홍씨 |
1 |
49 |
※행주은씨 |
1 |
10 |
아산장씨 |
4 |
30 |
달성배씨 |
1 |
50 |
※현풍곽씨 |
1 |
11 |
※중화양씨 |
4 |
31 |
성산배씨 |
1 |
51 |
흥해최씨 |
1 |
52 |
동래정씨 |
1 | ||||||
12 |
경주김씨 |
3 |
32 |
※성산여씨 |
1 |
53 |
※대구향교 |
1 |
13 |
김해김씨 |
3 |
33 |
성산전씨 |
1 |
54 |
담수회 |
1 |
14 |
※달성하씨 |
3 |
34 |
※성주도씨 |
1 |
55 |
※이락서당이락계 |
1 |
15 |
※일직손씨 |
3 |
35 |
성주이씨 |
1 |
56 |
고산서당 유림회 |
1 |
16 |
장수황씨 |
3 |
36 |
※수원백씨 |
1 |
57 |
※구로정 9인 시회 |
1 |
17 |
김령김씨 |
2 |
37 |
순천김씨 |
1 |
58 |
※대명동 14현 |
1 |
18 |
두릉두씨 |
2 |
38 |
순흥안씨 |
1 |
59 |
※상덕사 노론계 |
1 |
60 |
칠곡향교 |
1 | ||||||
19 |
※밀양박씨 |
2 |
39 |
야성송씨 |
1 |
61 |
대구시 청년유도회 |
1 |
20 |
밀양손씨 |
2 |
40 |
영동박씨 |
1 |
62 |
대구향교 여성유도회 |
1 |
소계 |
129 |
소계 |
25 |
소계 |
23 |
다. 대구유교문화의 키워드 문중과 재실
대구는 70-80년대를 거치면서 천지개벽에 가까운 눈부신 성장을 이룩했다. 그러나 성장의 이득만큼이나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잃었다. 선조들이 수 백 년 동안 일구어 놓은 ‘문중 세거지’도 그 중 하나이다. 우리가 미처 그 가치를 제대로 인식하기도 전에 이 땅에서 사라져 버린 것이다. 앞에서 우리는 대구의 도심권 안으로 지역 전체가 흡수된 중구, 서구, 남구의 경우는 그렇지 않은 지역에 비해 재실의 수가 턱없이 적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은 도시개발이 ‘문중 세거지’의 해체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감사하게 생각할 일도 있다는 점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도심과 교외지역을 함께 물고 있는 동구, 북구, 수성구, 달서구 등지에 아직도 많은 수의 재실들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 재실들 역시 개발지상주의라는 논리에 밀려 한 때 벼랑 끝까지 몰렸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절체절명의 순간에 ‘대구문중’과 ‘대구유림’이 있었다. 그들은 개발지상주의라는 무시무시한 상대와 협상을 벌였다. 양보할 것은 양보하되 지켜야 할 것에 대해서는 어떠한 논리에도 굴복하지 않았다. 이러한 각고의 노력 끝에 몇몇 문중들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온 수백 년 세거지와 문중의 자존심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이다. 거대한 도시개발의 광풍 속에서 그들이 택한 대처방법은 크게 2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개발에 따른 보상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문중유적을 고수한 경우: 능성구씨(서변동), 아산장씨(시지동)
▖개발에 따른 보상으로 그 지역에 문중유적을 재창조한 경우: 단양우씨(상인동), 성주도씨(용산동)
우리는 유교문화라고 하면 당연하게 안동을 머리에 떠올린다. 가까운 곳이라고 해도 성주, 구미가 떠오른다. 왜? 우리 대구에는 유교문화가 없는가? 물론 안동처럼 수 백 년 된 고택, 종택, 서원 등의 수는 턱없이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을 두고 대구의 유교문화가 안동에 비해 수준이 떨어진다고 보는 것은 분명 착각이다. 세상이 변했다. 지금은 21c 첨단 정보통신 시대이다. 유교 역시 시대의 흐름을 거역할 수는 없다. 이런 측면에서 대한민국 제3대 도시인 대구의 유교문화를 더 이상 간과해서는 안 된다. 대구현, 대구군, 대구부를 거쳐 400년 경상감영의 역사를 아우르고 있는 최첨단 거대도시 대구. 대구의 문중과 재실은 이러한 역사적 변천사의 전 과정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대구유교문화의 보고(寶庫)’이기 때문이다.
대구의 유교문화는 「대구 24문중」을 비롯한 ‘문중문화’를 빼놓고는 논할 수가 없다. 그런데 살펴본 바와 같이 ‘문중’은 또한 ‘재실’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상관관계에 있다. 이 둘의 관계를 컴퓨터에 한번 비유해보자.
컴퓨터는 본체에 해당하는 하드웨어와 프로그램에 해당하는 소프트웨어가 상호간에 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제대로 작동하는 법이다. 재실은 컴퓨터의 하드웨어 즉 본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반면 문중은 컴퓨터의 프로그램 곧 소프트웨어에 해당한다. 따라서 재실이라는 본체에 문중이라는 프로그램이 잘 담겨질 때 제대로 된 ‘유교문화’를 기대할 수 있다. 만약 컴퓨터(재실)가 망가지거나 없다면 제 아무리 좋은 프로그램(문중)을 가지고 있다한들 어디에 써먹을 수 있겠는가?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처럼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는 사양과 호환성에 앞서 일단 우리 눈앞에 존재하고 볼 일이다. 이것이 대구의 문중들이 ‘재실보존’에 각고의 노력을 다하는 까닭이자, 필자 또한 ‘재실’에 관심을 갖는 이유이다. 최근 동구지역의 신서혁신지구에 편입된 재실들 중 대여섯 개정도가 또 지구상에서 사라졌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몇 개의 재실은 해당 문중의 노력으로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구의 ‘문중’과 ‘재실’에 대해 살펴보았다. 무려 177개소에 이르는 많은 수의 재실이 우리 곁에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심지어 이들 중 절반에 가까운 수의 재실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동네의 골목어귀 또는 아파트 단지 안에 있음에도 우리는 그 존재와 가치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있다. 그런데 아는 것이 없으니 곁에 보물을 두고도 눈에 안 보이는 건 당연하다. ‘문중’과 ‘재실’은 대구의 유교문화를 읽어내는 핵심 키워드이다. 반드시 여기서부터 시작해야 대구유풍(儒風)을 일으킬 수 있다.
라. 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문중과 재실
요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등 다방면에 걸쳐 ‘스토리텔링’이 대세이다. 스토리텔링은 ‘이야기꺼리’와 함께 그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동시에 갖추어 질 때 그 전달력이 배가 되는 법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대구의 문중과 재실은 그야말로 ‘스토리텔링의 보고’라 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문중과 재실’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이야기꺼리’라는 측면을 한번 살펴보자.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문중과 재실은 ‘수백 년 내력의 이야기꺼리’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 문중의 경우는 시조의 탄생설화를 비롯해 대구 입향에 얽힌 이야기, 왜란·호란에 얽힌 선조들의 행적, 문중의 흥망성쇠, 사사로운 일상 등을 예로 들 수 있다. 또한 재실은 창건유래로부터 시작하여 사회현상에 따른 다양한 유형의 재실 변천사가 있을 수 있다. 이를테면 풍수지리, 문화재적 가치, 문중의 귀의처(歸依處), 문중의 흥망성쇠,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6·25사변, 일제 강점기, 근대화과정 등... 한자리에서 수 백 년 역사를 지켜온 재실인 만큼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꺼리를 담고 있겠는가?
스토리텔링은 픽션 보다는 사실을 기반으로 할 때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스런 몰입과 큰 감동을 줄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문중·재실 스토리텔링’은 강력한 특장점을 하나 지니고 있다. 바로 모든 이야기가 사실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이다. ‘전설 따라 삼천리’ 또는 ‘믿거나 말거나’ 식이 아닌 모든 이야기의 텍스트가 문자로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문중의 경우는 선조의 문집, 자료집, 간찰은 물론 족보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도 매우 다양하다. 재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창건기문, 중수기문, 상량문, 시판, 편액 등 재실의 모든 변천사가 현재의 시점 또는 당시의 시점(時點)에서 기록되어 있다. 물론 재실에 걸려 있는 편액들은 대부분 한문으로 되어 있지만 많은 경우에 있어 이미 한글번역이 되어 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아니다.
근년에 들어 우리 대구지역에는 위에서 말한 ‘재실 스토리텔링’으로 ‘대박’이 난 곳이 2곳 있다. 만촌동의 두릉두씨 문중의 「모명재」와 가창 우록의 사성김해김씨 문중의 「녹동서원」이 바로 그것이다. 이를 두고 사람들은 이렇게 말을 할 수도 있다. ‘거기는 당연하다. 임난 때 조선에 원군으로 와서 귀화를 한 인물이 있잖아!’ 하지만 이 말은 우리의 무지와 무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재실 스토리텔링’의 성공조건이 그 정도라면 대구도심의 재실 177개는 모두 다 대박감이다.
‘재실 스토리텔링’의 성공 가능성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실례를 한번 들어보겠다. 멀리 갈 것도 없이 가까운 수성구 지역을 중심으로 살펴보자. 특별한 선정기준도 없다. 다만 달구벌대로를 끼고 있어 접근성이 좋다는 점이 굳이 선정기준이라면 기준일 수도 있겠다. 이렇게 선정기준도 없이 무작위로 예시를 제시하는 이유는 대구의 177개 모든 재실들이 이 정도 수준의 스토리텔링은 기본적으로 가능하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지면관계상 관련 키워드만 소개한다.
<표9> 재실 스토리텔링 예
재실 |
문중 |
스토리텔링 키워드 |
고산서당 |
고산서원유림회 |
<퇴계와 고산서당> 퇴계에 의해 명명된 孤山, 퇴계와 우복의 講學遺墟碑, 퇴계 친필 편액, 고산서원으로의 복원문제 |
덕산재 |
아산장씨 |
<600년 내력의 아산장씨 문중벨트> 시지 세거 600년, 장자원과 김종직의 시판, 천을산 일대 아산장씨 문중벨트 경영(덕산재·덕양단·계술재·연호재·집성촌·선영), 장씨·박씨·전씨 3문중에서 600년을 이어오고 있는 강선계 모임. |
솔일재 |
밀양박씨 |
<대구지역 밀양박씨의 始原處> 대구거주 밀양박씨의 시원처, 입향 내력과 500년 된 입향조 묘소. 장씨·박씨·전씨 3문중에서 600년을 이어오고 있는 강선계 모임. |
청호서원 |
일직손씨 |
<조선시대 대구 동부권 최고의 사립대학> 황금동 입향 내력, 대구유풍의 르네상스를 이끈 학자이자 임란 의병장 손처눌, |
덕산서원 |
달성서씨 |
<두 편의 사극 영화> 판서공파 시원처, 派祖인 서섭과 세조 , 서감원과 성종의 대를 이은 악연, 父子의 행적이 드러나게 된 드라마틱한 사연, 조선왕조실록에 言路를 막아서는 안 되는 예로써 18번이나 그 이름이 등장하는 서감원. |
독무재 |
달성하씨 |
<대구 서인학맥·효자 문중의 랜드마크> 대구의 土姓 달성하씨, 경북에서 가장 오래된 효자정려, 망우공원과 달성하씨, 대구 서인학맥 주도. 서인관련 많은 文籍보유. |
경현당 |
대명14현 |
<대구의 숭정처사 대명동 14현> 14명이 동시에 崇禎處士를 표방하고 팔공산 입산 후 대명동 개척, ‘明’자를 넣은 自號와 詩. |
충효재 |
청주정씨 |
<2대에 걸친 충·효 정려> 시지 입향 내력, 고층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父子 2대에 걸친 충·효 정려비각. |
3. 에필로그
지금까지 대구의 문중들이 어떠한 형성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동시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177개의 재실을 통해 대구지역의 문중 세거지에 대해서도 개괄적으로나마 살펴보았다. 필자는 이 과정에서 대구의 문중과 재실이 지니고 있는 잠재적 가치와 중요성에 다시 한 번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작금의 ‘유교·유학의 추락’은 ‘유림, 그들만의 리그’가 자초한 것이다. 이웃과 자녀세대를 포함한 나와 다른 생각을 지닌 이들을 수용하고 배려하지 못한 탓이 크다. 결국 ‘그들만의 리그’는 세상으로부터 무관심과 소외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미움보다 더한 것이 무관심이라 하지 않던가!
유교·유학의 부흥을 위해서는 세상의 관심을 다시 이끌어 내는 일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필자는 ‘문중·재실 스토리텔링’을 그 방편의 하나로 제안해 본 것이다. 현대적인 감각의 쉬운 글과 이야기로 세상과의 대화를 다시 시작해야 한다. 혹시라도 ‘유교의 예법도 모르는 못 배운 사람, 조상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사람들과 어찌 자리를 같이 하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아직도 남아 있다면 이젠 그 생각을 내려놓아야 할 때이다. ‘교화(敎化)’는 유학의 덕목 아닌가! 현대에 맞는 ‘교화사업’을 개발하고 실천해야 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선조들의 얼이 담겨 있는 전통문화는 계승발전의 대상이지 전통고수의 대상은 분명 아니지 않는가?
필자가 사무국장으로 활동하고 있는 「대구시청년유도회」는 현재 3년째 ‘대구지역 유교관련 유적지’라는 테마로 답사를 진행하고 있다. 답사‘객’의 입장에서도 매번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지역의 재실과 문중 관계자들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재실에 이렇게 많은 청년유림들이 방문하기는 창건이후 처음’이라면서 말이다. 이제는 우리 유림들부터 먼저 의식의 전환이 있어야 한다. ‘유교=안동’이라는 명제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언제가 유학에 조예가 깊은 분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지구상에서 불과 100년 전에 작성된 조상들의 기록을 읽지 못하는 민족은 대한민국뿐이다”
참으로 가슴에 와 닿는 표현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우리보다 먼저 살다간 이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이다. 긴 호흡으로 볼 때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고작 해봐야 지붕에 기와 한 장 더 얹는 일에 불과하다.
황하의 격랑 속을 버티고 서 있는 저 ‘지주중류(砥柱中流)’는 중국과 안동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우리 대구에는 177개의 지주중류가 ‘변화와 지킴’의 사이에 서 있음을 우리들은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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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 대구시청년유도회 사무국장, 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2) 남자가 결혼을 하여 처가에서 장기간 체류하는 혼인풍습.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 십 년에 걸쳐 지속되는데 처향에서 영구 거주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구려의 서옥제(婿屋制)를 그 원형으로 볼 수 있다.
3) 「대구 24문중」은 일부 성씨에 대해서는 자료에 따라 차이가 있다. 관련 자료로는 영동김씨 소장 자료, 이경희의 小考, 양태열의 小考, 「草林雜記(서영하)」,「대구향교향안속수록」등이 있다.
4) 본 발표에서 사용하는 ‘재실’이라는 용어는 재실은 물론 정사, 서당, 서원, 정려 등 유교문화와 관련 있는 유교건축물 전체를 아우르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됨을 참고해주기 바란다.
5) 일 없이 집에서 편안하게 휴식을 취하는 평상의 일상을 말함. 한거(閒居)라고도 한다.
6) 齊戒·齋戒: 제사를 앞두고 행동과 마음가짐을 조심히 하는 절차.
7) 대구광역시 ‘달성군’ 지역에 대해서는 아직 기초자료 연구가 미진한 상태이다.
8) 대구누정록, 영남누대지, 「문중 자료집·문집·기문·재실 자료집·현장 안내판, 인터넷 자료」등
9) 기록자료 검토 후 현장 확인을 실시한다. 현장 확인 시 조사항목은 「유형, 명칭, 문중, 주소, (배향)인물, 창건·중수·중건·복원 내력, 편액, 보존상태, 기타」등이다.
이상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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