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신화,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요 특징 세 가지는 매체와 예술과 오락이다. 영화는 시대 문화를 반영하는(사회와 소통하는) 종합 예술인 동시에, 미적 감흥과 연예-쇼비지니스적인 오락을 대중에게 제공하는 현대 대중문화의 총아인 것이다. 이 세 가지 중 어떤 것에 치우치느냐에 따라, 또 어떤 조합을 하느냐에 따라 영화는 달라진다. 호메로스의 대서사시이자 그리스 신화인 '일리아드'를 줄거리로 삼은 영화 <트로이>는 기획단계부터 이 세 가지 특징을 나름대로 조화시키려고 노력한 듯싶다. <트로이>는 이라크 문제라는 시대 상황에서 인간 내면 심리의 원형들이 드러난 신화(전쟁에 관한)를 주제로 제작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인 까닭이다. 보통 신화의 의미는 종교적인 환상 또는 위대한 이야기로만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화는 단순히 비논리적이거나 허구적인 이야기가 아니다. 질투나 분노 같은 인간의 다양한 내면 심리 상태들과 부합되어 인간 행위와 사고 방식들을 설명하기도 하고 사회 윤리의 준거를 제시하는 기능도 한다.
호메로스의 원작 '일리아드' 따라잡기 '오디세이'와 더불어 그리스 신화의 절정으로 불리는 '일리아드', 곧 트로이 전쟁 이야기는 애초부터 그리스 올림포스 신들의 욕망과 질투와 권력과 다툼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바다의 정령 테티스(후에 아킬레스를 낳는다)와 인간이자 뮈르미돈의 왕인 펠레우스는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그런데 이 때 초대받지 못했던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결혼식장에 돌연 나타나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글귀가 새겨진 황금사과 하나를 던져 놓고 사라진다. 몇 년을 두고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 세 여신은 서로 자기가 사과의 주인이라고 다툰다. 결국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녀들은 트로이 평야에서 양을 치던 무지렁이 파리스(트로이 미래의 화근이란 예언 때문에 버려진 왕자)에게 사과 주인에 대한 객관적인(?) 결정을 의뢰하며 각자 대가를 제시한다. 파리스에게 헤라는 지상의 권력과 부를, 아테나는 지혜와 용기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약속한다. 파리스가 선택한 것은 아프로디테. 왕자의 신분을 되찾고 바다를 건너간 파리스는 스파르타 메넬라오스 왕의 왕비인 헬레네를 데리고 트로이로 도주하는데 성공한다. 그는 보상을 받은 것이었다. 이에 스파르타를 포함한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를 침공하나, 트로이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쟁은 9년이란 긴 소강 상태에 빠진다. 이윽고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다시 최전선에 나간 아킬레스는 트로이의 수호자인 헥토르를 죽이지만, 며칠 뒤 파리스의 화살에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를 맞아 죽는다. 파리스 역시 그리스 군 장수의 독화살을 맞아 죽게 되고, 마침내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은 그리스 군의 지장 오디세우스의 목마 작전으로 트로이는 궤멸된다. 원작과 영화 사이에서 고고학자 하인리히 실리이만이 트로이 유적을 발굴해서 신화를 인간의 역사로 만든 것처럼, 영화 <트로이>는 원작 신화와 다르게 신들의 이야기들을 전혀 묘사하지 않는다. 또한 원작의 내용도 상당 부분(특히 엔딩 부분)이 생략되거나 변조되었다. 영화는 원작의 주요 사건들만을 소재로 한 것이다. 그러나 신들에 대한 묘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욕망, 권력, 전쟁과 관련된 인간의 다양한 모습들이 영화에서 부각되는 탓에 신들은 보이지 않게 여전히 등장하는 셈이다. 올림포스 신들 자체가 인간의 여러 내면 심리들 하나 하나를 확대해서 표상해 놓은 상징들인 까닭이다. 게다가 이야기의 기본 주제는 인간의 감정들과 뒤엉킨 인간의 비극이다. 이는 내용 속의 다양한 인간 관계들, 특히 파리스와 헬레네의 사랑, 브리세이스를 둘러싼 아가멤논과 아킬레스 대립, 파트로클로스와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관계 등에서 명확히 드러난다. 그리고 아킬레스의 분노에서 그 절정에 도달한다.
이런 태생적 한계와 불타오르는 분노로 표상되는 아킬레스의 성격은 안락하고 평범한 삶을 거부하고 전투의 화신이 되어 전쟁과 죽음을 스스로 선택하는 그리스 비극의 전형적인 주인공으로 그를 이끌어 간다. 영화는 이와 같은 반신반인인 아킬레스의 성품과 행동을 원작만큼이나 잘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점들도 꽤 많다. 영화의 멜로적 요소는 장엄한 서사적 맥락을 약간 김빠지게 만들며, 할리우드주의가 가미된 원작 내용의 지나친 수정은 원작에 친숙한 사람들에겐 실망을 충분히 줄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비극적 주인공인 아킬레스가 목마 작전에까지 참여하는 각색은 지나친 감이 없지 않다. 신화에서 현실로 이어지는 인간의 욕망, 권력 그리고 전쟁 바다를 뒤덮는 함선들, 박진감 넘치는 양국 병사들의 백병전, 근육질의 관능적인 아킬레스와 헥토르 대결 등, 영화는 온갖 마초적이고 계급주의적인 요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래도 부담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이유는 트로이 전쟁이 청동기 시대에 해당하는 약 B.C. 1190년대에 발생한 역사인 탓이다. 영화는 시종 왕족들과 정치가들의 야망, 전사들의 분노와 용기 등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주요 등장인물을 통해 인간의 질투와 욕망, 권력에 대한 갈망, 전쟁의 폐해들 역시 잘 드러난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들은 욕망을 발산하고, 권력을 추구하며, 이는 충돌되어 전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무작정 사랑에 빠진 파리스와 헬레네, 권력을 위해 온갖 술수를 부리는 아가멤논, 가족과 애인 사이에서 방황하는 브리세이스, 불사신 인생의 나른함에 빠져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반항아 아킬레스, 덕과 중후함으로 국가를 수호하다가 전사하는 헥토르, 전쟁터에서 아들을 잃고 슬퍼하는 프리아모스, 그리고 이들 모두를 바라보는 오디세우스. 영화 <트로이>에는 이렇게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모습들이 그려져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현실의 상황과 사회를 별로 어렵지 않게 떠올려 볼 수 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의 스펙터클한 장면들만큼이나 인간 군상들의 심리 묘사에 좀 더 공이 들어갔다면 좋았을 것이라는 안타까움이 많이 남는다.
| |||||||||||||||||||||||||||||||||||||
![]() | |||||||||||||||||||||||||||||||||||||
| |||||||||||||||||||||||||||||||||||||
2004/05/28 오전 6:15 | |||||||||||||||||||||||||||||||||||||
ⓒ 2004 OhmyNews |
첫댓글 '트로이' 아직도 두근거리는군요ㅎ 마지막이 생각외로 허무하게 끝나서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