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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요트장을 벗어나 곧바로 범장(帆帳)하여 正南(180도)으로 침로를 잡았다. 처음 계획대로라면 上對馬島의 西南단의 小松埼(Kamatsu saki)까지 평균 4 Knot로 11시간 항해하여 5월5일 오전 8시에 도착후 엔진을 사용하여 복잡한 아소만 (Aso wan) 과 만관교(万關橋/Manjeki-basi)를 밝을 때 통과하여 이즈하라 항에 12:00에 도착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출항 후 곧바로 北西風이 약 20 Knot로 불어와 變針(Tacking)을 한 번도 하지 않고 그대로 180도를 유지하여 약 50 Miles을 7시간 40분 동안 항해하여 5일 02:40에 小松奇앞 해역 (34-21-00N/129-12-00E)에 도착하여 평균 6.5Knot의 선속을 유지하였다. 이 해역에서 파랑이 너무 높아 돛을 내리기에는 무리가 있어 아소만을 조금 더 헤집고 들어가 섬과 충분한 여유를 두고 돛을 내렸고, 03:20에 엔진을 사용하여, 그믐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칠흑 같은 섬 주위를 등대와 GPS로 위치를 정확히 확인하고, 섬의 모퉁이를 돌고 도는 우리의 모습이 그야말로 어두운 벽을 손으로 더듬어 대문을 연 다음, 또다시 더듬어서 문을 여는 꼴 이였다. 다행히 이명철 선생에게 빌린 GPS가 있었기에 정확한 船位를 확인 할 수 있어 어두운 곳에서 섬과 섬 사이의 항해가 가능했다. |
사실은 GPS를 맹목적으로 믿어서는 안 된다. 경험 많은 요트인 들에 의하면 GPS의 位置(10미터 이하의 오차)는 매우 정확한데 비교하여 海圖는 항공 촬영을 하고 아무리 정밀하게 제작하여도 GPS만큼 정확한 위치가 표시되지 않는다. 그래서 항상 GPS 船位는 참고하고, 해도와 물표를 기준 하여 船位를 해도 위에서 구해야 실수 없다. 그러나 앞으로는 점차 GPS에 맞는 해도가 나오고 있다.
오늘밤 항해는 滿月이었다면 더욱 좋았겠지만, 대신 총총한 별들이 20여 년 동안 도시 생활에 잊어버리고 살았던 별자리들이 하늘에 그대로 걸려 있었고 바람은 더욱 좋았다. 해면 또한 센바람에 비하면 매우 부드러운 편이다. 그야말로 Sailing 낭만의 삼박자가 합치되었다. 해운대의 불빛은 2시간 정도 계속 보이다가 없어지고 이제는 대한해협을 한참 넘어섰고 일본 영해를 들어서서 태종대의 등대불도 확연히 뒤로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이 상쾌한 야간 항해를 즐기기 위해 당직 시간은 훨씬 지났지만 그대로 두터운 외투를 껴입고 새벽 2시까지 갑판에서 마음 것 자연을 즐기면서 武陵桃源을 생각하고있는 동안 깜깜하던 바다 위에 탐조등이 우리 배를 비친다. 일본해상보안청의 감시선일 것이라 생각 들어 손전등으로 배의 흰 돛을 비추어 주었더니 쫓아오던 탐조선이 돌아간다. 이런 경우를 대비하여 소형선으로 현해탄을 건너 일본 연안으로 항해할 시는 반드시 출항 전에 일본해상보안청에 통고 해 두는 것이 좋다. 이 해역은 한일 양국의 어선들이 어군을 따라 조업을 하다가 본의 아니게 월경을 하는 경우가 많고 또 밀항선 감시를 위하여 한, 일 양국의 신경이 서로 교차되는 곳이다.
1995년 5월 5일: 대마도 이즈하라(嚴原) |
아소 (Aso Wan)을 지나 만관교(万關橋: Manjekibasi)를 통과후 부근의 수산회사의 암벽에 계류 후, 5일 04시경에 엔진을 정지하고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2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고 이른 아침 식사 후 06:40에 출항하여 약 10마일 거리에 있는 목적지 이즈하라(嚴原)항을 향하였다.
` 만관교(Manjekibasi): 대마도가 처음에는 하나의 섬이었으나 1922년 일본해군의 군함들의 통과 할 수 있도록 폭 40-50m, 길이 450m의 운하를 만들어 상도와 하도의 두 개의 섬으로 분리되었던 것으로 1956년에 붉은 색의 아치형 다리를 설치하였다. 그 길이는 82m, 수면에서 높이는 조석에 따라 19-25m으로 표시되어 있으나 아치형의 상층 만곡부에 전선과 파이프들이 가로로 놓여 있어 18m이하의 돛대라면 조석에 관계없이 통과 가능하다. ***사실 최초의 대마도 운하는 만관교에서 약 4 km 남쪽에 위치한 大船越(Oofunakosa)에 있다 그러나 작은 소형 선박의 통행만이 가능하다. 현재 만관교의 교통량 때문에 또 다른 다리의 기초공사를 시작했다.. *** |
이즈하라 외항에 도착하여 부두에 계류 할 것인지 검역묘지에 대기해야 할 것이지 몰라서 VHF 12로 "Izuhara Port Control"을 호출하였으나 응답이 없었다. 방파제 안으로 들어와야 통신이 가능하여 내항 방파제 안쪽에 접안하라는 회신이 왔다. 港 안에서 큰 페리호의 출항을 보았는데 배의 옆구리에 한글과 영어로 행선지가 표시되어 있어 한국과 가까운 섬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10:30에 방파제 안면(관공서 부두)에 계류 할 때 해상보안청(한국의 항만청과 해경 역할)직원들이 접안을 도와주었다. 10분 후에 검역원이 필요한 서류 작성하고 검역증서를 주고 돌아가고, 다시 20분쯤 후에 세관이 와서 입항서류 작성 후 세관출항증서를 받았다. 그러나 출입국 관리소 직원은 이곳에 2명이 상주하고 있는데 일본 연휴라서 한 명은 본토에 가고, 나머지 한 명은 낚시를 가서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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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우리는 점심을 먹은 후, 나는 지난밤에 1시간밖에 자지 못하여 곧 잠들어 버렸다. 낮잠 자는 동안 동료들이 우리 앞쪽에 나포되어 있는 한국 어선에 방문하여 소주와 생선을 교환하여 맛있게 먹었나 보다. 어선은 일본측에서는 영해 침입 이여서 범법자로 취급하여 선 내의 소주(술)를 모두 압수 당하여 생선과 소주는 쉽게 물물교환이 되었다. 그 후에도 나포되어 있는 어선을 자주 방문하니까 보안청 직원이 와서 주의를 주고 금지를 시켰다. 사실 우리도 출입국 심사가 끝나지 않은 상태라서 상륙은 불법이 이었지만 출입국 직원이 부재중인 이유로 방파제에 한하여 다녀도 좋다고 허가를 받았었다.
그리고 보안청 직원은 날씨가 점점 거칠어지니 港의 안쪽으로 이선(泥線) 할 것을 권고하였다. 이미 풍속은 25 Knot 정도가 되었고, 이곳에서는 지중해식(Mediterranean Anchoring)으로 선수 닻을 내린 후 후진하여 안벽(岸壁)에 붙여야 하나, 거센 바람과 닻이 좋지 않아서 끌리는 바람에, 그리고 다행히 안벽도 많이 비어 있어 보안청 직원이 Along Side Mooring을 하라고 허가하였다. 이곳에는 좁은 항구에 많은 어선들이 있어 모든 배들은 닻을 내리고 배를 세로로 접안(지중해식) 해야 한다. 나중에 옆으로 계류한 우리 배를 보고 어민들이 불평을 하였으나 관청의 허가를 받았다고 하니까 모두 이해 해 주었다.
오후 6시에 저녁을 먹고 있는 중에 출입국 관리소 직원이 일본 공무원답지 않게 私服으로 나타났다. 너무 오래 기다리던 터이라 원망에 앞서 너무 반가웠다. 준비한 서류를 주고 여권을 갖고 함께 부근에 있는 합동 민원실로 가서 입국 도장을 받았다. 부산을 출항하면서 전화로 해상보안청에만 입항예고를 하였다 (다른 일본 항구에서는 해상보안청에만 통고하면 이곳에서 각 QCI- 검역, 세관, 출입국 관리소로 연락하는 경우가 많다.) 가능하다면 이곳 입항은 주중에 하는 편이 좋겠으나 부득이 휴일에 입항 할 경우 각 QCI로 예고를 해 두어야 담당 직원이 대기하다 는 것을 알았다.
출입국 허가를 받고서 Mr. Cobacs를 배에 남겨 두고, 이미 석양이 되어 가는 이즈하라의 작은 마을을 무리 지어 산책을 하였다. 시내 중심을 흐르는 시냇물에 많은 숭어들이 떼를 지어 다니는 것이 이채로웠고, 특이한 것은 개울 양쪽에 조선통신사의 행렬도 모습을, 난간에는 아크릴 채색 그리고 제방에는 대형 타일 벽화를 그려 놓았다. 우리의 목적은 목욕하는 것이 이었으나, 10여명의 주민들, 택시 운전수, 그리고 호텔에서도 물어 보았으나, 모두들 이곳에는 공중 목욕탕이 없다고 확정하였다. 일본에 어느 小邑이라도 센또(목욕탕)가 없는 곳이 없는데 17,000정도의 사람이 사는 주거 지역에 목욕탕이 없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자전거가 다른 곳 보다 눈에 뜨이지 않는다. 결국 선술집에서 라면과 정종을 한잔씩하고, 배로 돌아와서 모두들 세면 도구를 챙겨 들고 부근에 있는 여객 터미널의 공동 화장실에서 양치질과 세수를 할 수 있었다. 그후 이틀 동안에도 이곳을 잘 이용하였다. 다행인 것은 그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본토에서 젊은이들이 페리 보트로 승용차를 가져와서 여행을 하고 여관비를 아끼려고 차안에서 자고 이곳의 화장실을 이용하고 있었다.
1995년 5월 6일 : 버스 여행 |
특별한 여행 계획이 없었지만, 인간의 귀소본능(歸巢本能)이 발동되었는지 혹은 異國에 와서인지, 떠나온 지 이틀밖에 되지 않은 釜山을 보기 위하여 北섬의 한국 전망대를 갈려고 버스 터미널에 갔다. 그러나 그곳까지(약 57 km) 왕복 버스비가 1인당 6,200엥 (약46,000원)이였다. 아무리 물가가 높다지만 이것은 너무한 것 같았다. 그래서 비교적 가까운 북쪽 대신 최남단인 쯔쯔자키(豆 崎)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버스는 험한 산길과 울창한 숲들을 구비를 돌아 내리막길을 내달려 작은 포구로 내려섰다가, 다시 산중턱으로 돌아서 갯마을로 내려가고, 산자락을 돌 때마다 아름다운 어촌들이 나타나고, 마을들은 마치 낭떠러지에 떨어진 돌들처럼 산자락에 을 낀 곳에 박혀 있다. 필시 도로가 생기 기전에는 모두들 배로만 왕래가 있었으리라... 섬의 88%가 산악(산림)이라는 것을 실감하였다. 약 1시간30분 (40 km)을 굽이돌아 종착역인 쯔쯔세라는 마을에서 회차를 한다. 이 버스에는 우리 일행 4명(나, 승철 문형, Mr wilding) 그리고 뒤쪽에 여행 중인 일본 대학생 한 명이 타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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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학생은 약 5시간 산림 지역을 걸어서 다른 곳에서 버스를 타고 이즈하라로 간다고 하였다. 이곳은 제법 농토가 형성되어 있고 농부들이 한가롭게 일하는 모습이 흡사 한국과 같았다. 일본 변두리를 여행하면서 항시 의문스러운 것은 이렇게 높은 物價의 사회에서 미국처럼 대형 농장을 경영하는 것도 아니고 한국 농촌이나 진배없는 농부들이 어떻게 생활비를 마련하는 것일까 ? |
우리가 타고 간 버스는 30분 쉬었다가 다시 그 차를 타고(하루 3차례 왕복) 시내로 나와서 영국인 Mr Wilding은 배로 돌아가고 우리는 12:30분에 다시 만관교(關橋)를 관광하기 위해 버스로 갔으나 大越船의 다리를 잘못보고 내려서 약 4 km를 더 걸어서 붉은 만관교 위에서 얽히고 설킨 아소만의 섬들을 볼 수 있었고, 우리의 항적(航跡)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칠흑 같은 밤에 그곳을 항해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는다.
다시 시내로 돌아와 팔번궁(八幡宮)신사에서 가져온 도시락으로 허기를 채우고 對馬歷史民俗資料館에 들렸다. 그곳 두루마리 그림으로 된 조선통신사의 행렬도의 여운이 가시질 않았다. 그리고 鄕土資料館을 관람하여 통신사 관련 책 한 권을 구입하고, 지도를 보고 부두에서 얼마 멀지 않는 의병장 연암 崔益鉉 기념비를 찾아 나섰다. 골목길에서 묻고, 물어서 찾아간 수선사(修善寺: 수젠지) 안뜰에 마치 구들장 같은 검은 石片에 "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碑"가 세워져 있었다. 구한말(舊韓末) 역사의 격동기에 이곳에 유배(납치) 와서도 지조를 잃지 않고 순국한 것을 기리기 위하여 황수영(黃壽永) 前동국대총장 등 한일 양국 인사들에 의해 1986년에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곳은 1907년 1월 선생의 유해를 한국으로 옮겨지기 전까지 임시로 유치하였던 장소였다.)
온갖 치욕을 격은 1906년, 이해도 저물어 가던 어느 날 高麗門 (이전에는 통신사의 숙소로 쓰였으나 당시에는 대마도 경비대)으로부터 하나의 영구(靈柩)가 쓸쓸하게 반출되었다. 그 안의 주인공은 국권 회복을 위해 일본과 맞서 싸우다가 이곳으로 납치, 감금당한 연암 최익현 선생의 시신이었다. 그때의 나이 74세였다. 노유(老儒) 최익현은 강화도 조약(을사늑약)을 반대하고 일본을 "洋賊을 前導하는 寇賊: 서양 오랑캐를 몰고 오는 도적떼"라고 날카롭게 규탄했다.
그는 이곳에서 적국의 밥은 먹지 않겠다고 단식하여 분사(憤死)하였다. 그의 죽음은 전보로 고향에 통보되었고, 그의 아들 최영조(崔永祚)가 이곳으로 달려와 그 시신을 인수하였다. 이때의 광경을 靑柳南冥라는 일본인은 이렇게 기록해 놓고있다. "영구를 받들고 배를 타 막 조선으로 떠나려고 한다. 경비 대원 및 도내의 유지들은 촛불을 들고 항구로 배송 한 후 눈물을 흘리면서 헤어졌다." 당시에는 역사를 날조하기 시작하였으나 아직까지 일반인들에게는 교린 우호의 감정이 남아 있었다. (조선통신사의 발자취/김의환저, 54 페이지와 신문기사에서 발취하여 조합함, 사진 국립박물관 소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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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다리를 이끌고 배로 돌아오니 17:00시가 되었다. 배에는 오전에 버스를 함께 탔던 그 대학생이 배 위에서 Mr Kovacs 와 Wilding과 대화를 하고 있어 놀랐다. 그 학생은 동경에서 관광 왔다고 한다. 우연히 구경한 배에서 우리를 만났으니 아마 전생에 친한 이웃 친구이었던가 ? 그는 이즈하라 Youth Hostel에 묶는다고 한다. 93년 판 YH 안내 책을 보면 이곳 주인(Master)은 요트 여행 중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20:00시 줌에 지나가던 한 주민이 배의 돛대를 보고서 말을 건네 온다. 그는 이곳의 치과 의사(Masami Sato: 2-1564)로 어제 아리랑 레이스 참가하고 돌아 왔다고 한다. 그 후에도 밤늦게 해상보안청 직원이 내일의 기상도를 갖다 주었다.
낮 동안 배를 지키던 Mr Covacs가 밤 9시경에 Mr. Wilding과 함께 술 한 잔을 하러 간다고 외출하였다. 새벽 3시쯤에 문형의 코고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 갑판에 올라갔더니 Mr. Covacs가 귀선 하여 저녁에 먹다 남은 차가운 스파게티를 먹고 있었다. 그의 술 주정을 들어주고 4시경에 두터운 외투를 껴입고 갑판 위에서 잠을 청했다.
1995년 5월 7일: 귀국 항로 |
대원: 전 우홍, 문 성의/울산, 이 중열, 정 병언, 백 승철(학생),
Mr. Stephen R. Kovacs (미국인)Mr. Graeme Wilding (영국인)
(항해 메모를 정리하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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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트 여행시 참고 사항) |
1. 출 국전에 일본 각 QCI에 개별 접촉하여 입항예고를 하여 입항 즉시 곧바로 수속을 받을 수 있도록 한다. 대마도는 가능하면 공휴일에 입항은 피하는 것이 좋다. 2. 대마도 관광시 4명 이상이면 버스보다 렌터카가 경제적이다.(렌터카 전화: 09205-4-2220)
3. 부산과 이즈하라항은 70 마일 (부산-충무와 같음): 야간 항해를 즐기지 않는다면 새벽에 출 항 하면 저녁에 입항 할 수 있음 4. 대마도에는 공중 목욕탕이 없음 5. 西山寺 Youth Hostel 일일 숙박료: 2,500엔, 목욕 가능 (전화: 09205-2-0444) 6. 이곳 부두 시설은 어선 부두인 관계로 선측 접안을 하면은 어민들로부터 불평을 감수해야 함. 선수 닻을 내리고, 선미 쪽을 부두로 계류하는 지중해식 계류를 할 것 (좋은 Anchor와 Fender를 준비 할 것) 7. 이곳은 국경의 섬으로 밀항의 단속이 심함, 특히 출입국 관리소의 심사가 까다로움 (입출항 시 여권 사진과 인물 대조) 8. 오징어, 전복, 표고버섯 등이 특산물로 가격이 한국보다 싸거나 동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