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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펀이 주목한 시집
송 진 시집 『미장센』(사이펀의 시인들2)
사이펀이 여름호에 주목한 시집은 송진 시인의 최근 화제작 『미장센』(작가마을)을 선정했다. 본지 책임편집인의 시집을 우리가 선정하기엔 부담감이 없진 않았으나 워낙 세간의 주목을 받은 시집이기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간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유려한 시어들이며 현대시의 복합적 이미지들을 모두 쏟아 부은 듯한 감각적 사유들이 주목시집으로 선정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특히 최근 시단에서 보기 드문 장시 ‘인간의 얼굴’까지 114편의 시가 264쪽에 달하는 두툼한 페이지로 엮여있다. 물론 시편이 많고 두꺼워 선정된 것은 아니다. 송진 시인이 그동안 줄기차게 추구해온 현대시의 자유분방한 사유의 결과물들이기에 가능했다. 시집 小서평은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권성훈 경기대 교수가 맡아 송진 시인의 작품세계에 담긴 폭과 상상력을 짚어주고 있다.
송 진 1960년 부산에서 출생하였으며 본명은 송필애이다. 1999년 《다층》 제1회 신인상으로 등단하였으며 시집으로 『지옥에 다녀오다』, 『나만 몰랐나봐』, 『시체 분류법』이 있다. 요산창작지원금을 수혜 받았으며 계간 《사이펀》에 ‘송진 시인의 시 특강’을 연재하고 있다.
------------------------------------------------------------------------------------------------- 시집 속 시 읽기/송 진
네가 앉았다 간 자리 참 따듯하다 외 4편
이제 자리가 잡혀가고 있어
그 말이 여름의 귀를 삼킬 때 목젖에서 미지근한 젖이 흘러나온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너의 이야기를 시작할까 동그란 간이의자 밑, 점선 잘 찢어지지 않는 두루마리 휴지처럼 너는 앉았다 간다
네가 있는 줄 알았으면 햄버거 조금 남겨둘 걸 그랬어
햇빛 알러지 피부 물방개처럼 톡톡 가지는 가지 빛깔로 꽈리는 꽈리 빛깔로
네 말이 반가워 시멘트 마당에 널어놓은 고추의 빨간 구두를 만지작거리는 너의 팔을 부드러운 연잎 밥처럼 감싸지 그래? 고래.
무뚝뚝한 포경의 꽃이 피고 지는 사이 옥상에 감귤이 익어가는 사이 잠지에는 네가 장난처럼 물고 간 물고기 이빨자국 남아
네가 앉았다 간 자리 불두화 360도 회전하고
이제 자리가 잡혀가고 있어 그 말
참 듣기 좋다.
--------------------------- 중도
동쪽에서 햇살이 쏟아졌으므로 거위들이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아갔습니다 거위들이 날개를 펴고 훨훨 날았으므로 연못에 흰 알이 떨어졌습니다 연못에 흰 알이 떨어졌으므로 개구리들이 흰 알 위로 뛰어 올랐습니다 개구리들이 흰 알 위로 뛰어올랐기에 파문이 생겼습니다 파문이 생겼기에 연못 가장자리의 풀들이 씻어졌습니다 풀들의 얼굴이 씻어졌기에 이슬들이 놀라서 연못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이슬들이 놀라서 연못 밖으로 뛰어내렸기에 쑥들이 쑥 땅 위로 솟아올랐습니다 쑥들이 땅위로 쑥 솟아올랐기에 산책 나온 송아지들이 쑥을 먹습니다 산책 나온 송아지들이 쑥을 뜯어 먹었기에 똥에 쑥이 섞여 나왔습니다 똥에 쑥이 섞여 나왔기에 자줏빛 감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자줏빛 감자들이 모여들었기에 자줏빛 감자꽃이 피었습니다
---------------------------------------- 플레인 베이글
과 진한 아메리카노. 그가 빨간왕관커피전문점에 도착하면 늘 주문하는 메뉴다. 그는 여름바다축제 파도 위에 둥둥 떠다니는 동그란 튜브처럼 먹기 좋게 두 조각으로 나누어져 있는 베이글에 포말 같은 크림치즈를 펴 바르며 이중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P시 기차역에서 멀지않은 N중심지는 화요일 오후 네 시이지만 걸어가는 사람들의 어깨가 부딪칠 정도로 붐비고 있다. ‘걸어 다니는 마네킹 도로’라고 그는 늘 하는 버릇대로 생각나는 문장을 혀로 움직이다 침과 함께 꿀꺽 삼켰다. 피서철에 흔히 있는 일이야. 그는 혼자 말하고 혼자 고개를 끄덕이는 그를 보고 피- 피체리아 피자 같은 웃음을 흘러내렸다. 베이글은 곧 연주를 앞둔 잘 닦여진 피아노 건반처럼 깔끔한 맛이었고 진한 아메리카노는 허기진 배를 기분 좋게 해주었다. 그리고 건조한 식도를 촉촉하게 해 주는 일이 커피의 본분임도 잊지 않았다. 그가 어떤 작은 결단을 내릴 때에는 (서가에 꽂힌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발견해 그 책에 남은 오후 시간을 쏟기로 하는 그런 자잘한 일상의 결정들) 숨소리가 힘이 센 가스불에 삶기다가 터진 메추리알처럼 약간 거칠게 부풀어 오르고 두세 번 연거푸 숨을 몰아 내쉬기도 해서 옆에서 공무원기출시험문제집을 보던 남자가 흰자위가 더 많은 눈으로 힐긋거렸다. 그의 혀는 해바라기 씨앗을 보고 달려가는 햄스터처럼 즉시 반응했다. ‘계란 흰자는 흘러 흘러 어디로 가지?’ 라는 문장이 방금 그의 침샘에서 빠져나온 침과 버무려져 목젖으로 흘러 내려갔다. 그의 목젖에서 꿀꺽 소리가 났고 그 소리는 그가 앉아 있는 작은 메추리알 같은 공간을 달걀의 방에 들어선 하얀 책벌레가 어리둥절해 하는 것처럼 느껴지게 했다. 지금 그가 생각해도 그의 결단은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 결단은 딸의 전화벨 소리에 절대로 놀라지 않겠다는 단호한 결심이어서 그도 의외인 듯 조금씩 놀라움을 생 메추리알의 하얀 양수막같은 속껍질을 까듯 깨닫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레너드 코헨의 ‘Nancy'를 길고 여린 아기의 핏줄 같은 이어폰으로 듣고 있었다. 그에게 어떤 일이란 늘 동네에 있는 작은 서점에서 일어났다. 엄마-엄마- 어떤 아이가 등 뒤에서 끊임없이 엄마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돌아보았지만 책에 둘러싸여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엄마-엄마- 소리가 들려왔고 그는 칭얼거림도 아닌 오래된 애정결핍에 의한, 집착이라고 말해도 좋을, 그리움처럼 부르는 슬픈 목소리에 조금 불안해진 탓에 오른쪽 엄지와 검지로 읽던 책의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서른 두 번의 엄마-라는 소리 후 그의 옆을 지나는 그 아이는 놀랍게도 그의 배꼽 정도 오는 키를 가진 두 볼이 넓적하고 통통한 남자아이였다. 분명 여자아이 목소리였는데…… 비바람 치던 날 경사 길에 놓여있는 어두운 다락방 가까이 고양이 울음소리가 아기의 울음소리와 같았을 때의 소름이 훅-돋았다. 그는 그의 두 가지를 의심했다. 한 가지는 그가 엄마-라는 목소리를 왜 여자아이라고 단정했는지에 대한 그의 내면의 지각현상에 대한 고뇌의 결과물인 심리적인 것이었고 또 하나는 사춘기가 끝나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중학교 2학년인 딸에 대한 인내심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슬픈 자각이었다. 플레인 베이글은 손끝에서 사라졌고 이국의 푸른 눈 스님 같은 진한 아메리카노 향기도 차갑게 식어있다. 앞에서 서로 팔꿈치를 만지작거리던 앳된 소년소녀들도 어디론가 사라졌고 빨간 왕관지붕은 몇 달 전 참석했던 G결혼식 웨딩홀 지붕처럼 활짝 열리지도, 새털구름이 흘러가는 푸른 하늘에 노랑 파랑 빨강 풍선이나 하얀 비둘기가 날아가지도 않았다. 중복의 저녁은 이미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형광등은 안구건조증으로 자주 깜박거렸고 선풍기는 어깨날개에 통증이 심한 듯 미간에 세로주름을 만들었다. 삐거덕거리며 길고 두꺼운 목을 백팔십도 회전하고 있다. 사실 그건 회전이라기보다 스스로 마지막 호흡을 책임지려는 확고한 강박증처럼 보였다. 콘크리트 건물이 식은땀을 흘리며 엄마- 엄마- 부르고 있다. 그는 작은 동네 서점의 막혀있는 콘크리트 벽 바깥이 맑은 날 찍은 춘천댐 사진처럼 선명하게 잘 보인다고 상상해본다. 오래 전 죽은 주황색 가사를 걸친 단짝 친구 영미가 황금빛 부적을 팔러온다고 점점 그의 팔의 소름들이 느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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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 옆에 누워 앓았다
낙엽들이 무덤처럼 쌓여있고 나는 그 무덤 속으로 한없이 빠져 들어갔다 시침이 흐를 때마다 핏방울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머리 안에 화산이 들어있어 밤새 누군가 내 옆에 와서 끙끙 앓았다 친구의 입마름병을 낫게 하기 위해 나의 간을 바위 위에 올려놓은 것에 대한 비웃음을 당할 때였다 괜찮아 이번 생에 비웃음을 당하였으므로 내일의 시간이 좀 더 좋아 질 거야 무명의 절들이 시내로 내려와 부처들의 녹취록을 건네주었다 밤새 누군가 이마 위에 차가운 물수건을 올려주었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당신을 챙겨줄 사람이 이렇게 없는 거예요? 궁금해진 나는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기어이 입 밖에 그 말을 꺼내어 사랑방문 손잡이에 걸고 말았다 그 말은 나 자신에게도 건네는 말처럼 들려와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정말 예상치 못한 눈물이었다 눈물이라는 것 그처럼 아름다운 물방울이 내 몸 안에 남아있다니 학교 간 아이의 돼지 저금통에서 천원을 꺼낼 때처럼 조심스러웠다 약국에는 결국 안 가겠지 병원도 역시 안 갈 거야 그럴 시간에 커피포트에 물을 끓이고 몇 알의 커피를 머그잔 안에 띄우고 향기로운 시간을 기다리겠지 창밖의 낙엽은 물들고 떨어지고 낙엽은 자신의 할 일을 알아서 잘 하고 있을 거야 아무리 아파도 병원은 안 가 누군가 이마 위에 올려놓은 물수건이 뜨거워지면서 툭, 한 마디 내뱉었다 오늘은 4시에 광화문 집회 가야하는데 병원에 안 가면 안가에라도 끌려갈지 모르는데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그런 말을 하냐고 누군가 끙끙 앓으며 웃는다 그런가 나는 중세시대의 사람인가 나는 영국인인가 나는 스티븐 호킹인가 영국의 정원처럼 아름다운가 나의 시간은 아직 꿈꾸고 있는 정치인가 폭풍처럼 밀려왔다 지진처럼 갈라지는 아킬레스건의 만추 숨을 잘 쉬지 못하는 옆구리가 고개를 푹 숙인다 누군가 내 옆에 누웠다 목사가 지나갔고 신부가 지나갔다 자전거가 지나가고 오토바이가 지나갔다 말이 지나가고 소가 지나갔다 우리를 개돼지라고 부르던 그들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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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小寒
그즈음, 나는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고 술을 갖다 날랐다
서점은 바뀌어 있었다 일층이 이층으로 이층이 일층으로 너무나 교묘히 바뀌어 있었으므로 고객들은 아무 것도 모르는 거미의 걸음으로 공중을 걸어 다니거나 올려다보았다 책은 폭죽처럼 쏟아지거나 튀겨지는 팝콘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음악코너가 어디예요? 바로 여기. 무뚝뚝한 뚝배기에 넘치는 불그스름한 단어는 유쾌하지 못한 국물이 뚝뚝 떨어지는 듯한 교묘한 자음과 모음들로 이천 십 칠년 새해 넷째 날을 비켜나가고 있다 새해의 입술은 과장한 듯이 붉게 크게 바른 여중생들의 틴트, 서가 속에서 숨바꼭질을 했다 나는 가느다란 손가락처럼 생긴 담배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웠고 그건 어딘지 모르게 음란스러워 보였다 그즈음 나는 여장을 하기 시작했고 담장 밖에 죽어 있는 장미처럼 검고 앵무새 깃털 달린 모자의 리본처럼 푸른 언어를 찾아다녔다
진입금지라 적힌 에스컬레이터는 고요했다 죽은 시체의 무릎 같았다 삐걱일 것 같았지만 삐걱이지 않는 기다릴 때는 죽은 자의 시간과 다름없었다 사실 나의 생활은 초미세먼지를 따라 중국으로 흘러갔다 러시아로 넘어갔다
서점의 영화가 시작되려면 네 시간 삼십분을 기다려야 했다 지금 다정해 보이는 저 연인들은 철제테이블에 붙어 앉아있는 두 마리의 파리.
없는 피를 수혈하고 빵과 우유를 나에게 먹였다 그건 소가 양이 되는 화면의 순간과 겹쳐지기도 했다
웅덩이의 물이 들숨을 쉬다가 날숨을 쉰다 옛 역전 H거리는 축제의 빛으로 더럽혀지고 검붉은 하트는 싸구려 스웨터에 뒤섞인 촌스러운 반짝이 같았다
겨울 북곰 세 마리가 일자리를 구하고 있었다 지저분해진 붕대 손가락으로 모래 속에 뭔가 찾고 있었다 담배꽁초 속에 들어있는 마지막 한모금의 달콤하고 씁쓰레한 물고기를 포기하지 않은 채 바다의 식탁 위 초콜릿들의 하얀 거품들 파도가 칠 때마다 온 몸이 젖곤했다
그즈음 나는 한 줄기 침묵처럼 옷을 벗었고 월드클리닝으로 걸어 들어갔다 그것은 시간의 흐름과 다른 점이었고 합의점이었다 크로뮴산 혼액이 출렁거렸다
드문드문 거리의 모자들이 거리의 풍선들이 거리의 인형 뽑기가 거리의 문어들이
끈적끈적 칡의 바다 납빛 같은 수평선 지친 유람선의 기름들
이분법으로 나누어진 정류소 공사가 끝난 뒤 안내방송이 고장 난 버스들은 길을 잃고 경적을 울렸다 아스팔트는 검고 큰 지네처럼 내 몸 위를 훑고 지나갔다
어쩌면 수많은 추위들이 깨진 타일 속의 청포도처럼 뼈아프게 흘러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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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대단한 시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