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고, 苦)
2023 06 23 하지(夏至)지나 이튿날
아프다고 말한다. 의사는 어디가 아프냐고 묻는다. 그리고 발이 아프다거나 배가 아프다고 말해야 의사는 발과 배를 진단한다. 그 진단에는 징후가 있어야 하지 그렇지 않으면 의사는 환자에게 신경성이야 또는 괜찮아(꾀병 같아) 하면서, 처방으로 발이 아프면 쉬라고 배가 아프면 먹는 것을 조심하거나 물을 마시며 배를 비우기를 권한다. 그러면서도 환자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준안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몇 가지 약을 줄 수 있다. 전래적으로 노인의 처방으로는 젊은이에게 아프다는 징후가 드러나지 않으면 그냥 조심하고 지내, 무엇을 잘못 다루었는지, 무엇을 잘못 먹었는지를 되돌아보고 다른 방식으로 몸을 사용하고, 달리 음식을 조정하면서 먹으라고 한다. 이런 처방은 늙은이가 살아오면서 병과 아픔이란 아픔을 거의 거쳐 왔기에, 자식 일곱을 키운 어머니는 엔간한 소아과 의사보다 낫다고 하듯이, 그에 대한 대처 방식으로 준안정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을 말해주거나, 즉 세월이 약이라는 방식으로 설명하고 또 살아왔다. 늙으면 그 삶 속에 아픔은 겹겹이 중첩되어 세상 뜨기를 준비하는 것과 같이, 준안정 상태의 정도가 젊은 시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위태롭다는 것도 안다. 플라톤이 말하기를 철학은 죽는다는 배운다고 하듯이, 노인이 되기까지 준안정 상태를 유지하는 삶은 배우고 익히고 있는 중이다.
아프다. 몸이 아프다. 너무 넓은 범위라서, 의학은 세분화하여 전공의들이 각 부분을 다룬다. ‘아프다’의 부분이 해소되었다고 전체가 아프지 않는 것이라기보다, 몸의 일부분을 다른 부분이 대체하면서 아프다는 징후를 달리 내보내고서 사는 것도 준안정상태이다. 예전에는 시골 농부는 일하면서 아픈 부분을 잊고 산다고 한다. 자연 상태와 어느 정도 보조를 맞추어 살아왔기에, 쉬거나 계절의 변화를 거치면서 준안정상태를 유지하는 방법을 터득하였다. 도시민은 아픈 부분을 기브스를 하거나 약으로 견디면서 출근하여 일하면서 산다할 때도 준안정상태가 유지되기에 일한다. 도시의 환경은 기계와 사람들 사이에서 유지되기에, 한편으로 기계적 체제에 적응해야 하고 다른 한편 인간관계를 유동적으로 유지해야한다. 그 기계에 부적응이란, 첨단기계 사용에서도 배워야하는데, 적응하려해도 여러 번 잘 적응이 안 되면 몸이 불편하여 아프다고 한다. 사람들은 그런 경우에는 아픔이라기보다, 무지에서 오는 것이라 한다.
몸이 아픈 것도 무지인데, 기계와 접속의 불편에서 오는 아픔을 무지라고 넘긴다. 미국 이민자가 미국식 크기의 도구 때문에 아프다고 하는 경우가 그 예이다. 지식 일반의 차이 또는 문화적 차이가 새로운 유입자에게는 지식일반의 공유면으로 자리 잡지 못한 것이라 한다. 이런 기계와 불협화에서 오는 아픔도, 몸이 아픈데 대한 아픔처럼 무지라고 하면서 의사에게 넘긴다. 그 의사는 관례대로 검진하고 처방할 것이다. 그 이민자 속절없이 자기조절로서 준안정상태를 찾아갈 것이다. 노력과 고생 끝에. 고생이 아픔이다.
몸도 기계처럼 치료와 치유의 가능성이 몸을 대상화할 수 있을 때, 대상들의 현상과 재현을 조작하면서 어느 정도 준안정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고 여긴다. 이런 아픔의 상태를 잊거나 뒤로 밀어두는 삶에서, 재현 또는 겉보기에는 거의 멀쩡하게 살아간다. 아픔을 잊고 사는 것이라기보다, 세상을 버린다(죽는다)는 것을 미루고 사는 삶이며, 한시적 유예연장과 같다. 기계처럼 고치면서 또는 부품을 교체하여 바꾸면서 영원히 유예연장 할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 한시적 유예는, 생체이식이든 칩이든, 여러 분야에서 부분적 조작으로 대체하고 있고, 영원 유예는 종교가 저세상에서 이루어질 것으로 여기에 만들어 유예를 늘이면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착각하게 한다. 이 착각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오늘도 살아가야 하는 과정에서 그나마도 준안정상태를 믿고 사는 것이 ‘아프다’라기보다 그나마 그런대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즐기면서(?) 사는 수 밖에 없다고 한다. 아픔을 벗어나 즐거움을 찾는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과 불교의 중요과제이기도 하였다.
아프다에 매이는 매일수록 아픔은 계속되고, 자신도 피곤하며, 일상사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잘 알고 있다. 그러면 아픔을 벗어나는 즐거움을 찾을 노력을 하는가? 그것은 즐거움의 한쪽 끝이 아픔이라는 것도 경험할 것이다. 고(苦)와 쾌(快)는 한쪽이 늘면 한쪽이 주는 관계가 아니라, 옛 현자들의 행복과 진리에 대한 고민처럼, 이 양자가 고정적으로 있는 것도 아니면서 있다고 판단하고 믿는데서 오는 오류일 지도 모른다. 그 유동성의 끝이 세상을 뜨는 것이라고 해서 열반에 든다면해서 지금 떠서 해결한다는 것도 답은 아니다. 그럼에도 의학과 생리학의 실증적 발달로 태어나면서부터 누구에게도 양도할 수 없는 자유가 주어진 것이 아니라 고통이 주어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고통의 해방은 즐거움도 자유도 아니라 과정일 것이다. 그럼에도 그 과정에서어느 날 갑자기 모든 단절이 온다는 것을 그런대로 알고 살아간다.
갑자기 닥치는 일에 대해 누구도 좋다(선) 나쁘다(악)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런 갑다 한다. ‘아프다’의 총체적 고(苦)가 갑자기 닥친다. 어쩌면 인민들의 아프다고 하는 폭발이 갑자기 닥치는 것과 같을 수 있다. 다른 한편 인간이 사는 지구가 아프다고 한다. 인격화된 표현인데, 생명체들이 자기 체온의 상하의 한계 안에서 자기를 유지하듯이, 지구가 아픈지 준안성 상태를 유지하려고 움직이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구의 준안정상태는 생명체의 준안정상태와 전혀 다른 길이지만 말이다.
그런데 인간에게는 준안정상태(삶), 안전상태불균형(병), 균형완전상실(죽음)이 있다. 태어나면서 아픔을 내재하고 있다고 여기는 쪽도 있고, 태어나면서 순진무구한데 살면서 온갖 병을 경험하다가 완전상질로 이른다고 생각하는 쪽도 있다. 탄소중립화 등으로 지구의 아픔을 진단한다고 말하지만, 인간이 사는 방식 안에서 준안정상태를 규정하고 유지하려는 것이지, 지구 자신의 준안정상태가 무엇인지는 누구도 모른다. 이와 유사하게 생명체로서 인간이 아프다고 하는데, 인간들 중 일부의 준안정상태의 유지를 위해, 다른 인간들이 또는 다른 생명체들이 자기 유지 상태를 넘어서 훼손과 파괴로 가고 있는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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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는 말로서 표현하는 것이 먼저가 아니라, 그 상태의 지속을, 그리고 단면으로 드러난 사건들을 원인과 과정에 대해 검토하고 성찰해야 하는 것이 먼저이다. 아프다의 일반화의 개념이 먼저가 아니라, 아프다는 징후와 사건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났던 과정들에 대한 사유가 먼저이다. 인간과 관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지구를 환자이자 스스로 치유하는 의사라고 말하고 있듯이, 인간도 준안정상태를 유지하려는 노력에서 환자의 징후를 드러내고 또한 스스로 치유하는 방법을 창안하고 만들어 간다. 그 환자이자 의사는 말로서보다 삶의 행위가 먼저라는 것이다.
이런 고통을 해소하는 방안을 찾은 것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도 인도의 불교에서도 있었다. 그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 또는 상쾌함을 찾는 것은 인간의 오랜 숙제였다. 그런데 자연과 인간의 문제일 경우에는 자연과 일정한 방향을 같이 하는 가운데 고통을 줄이고 즐겁게 산다고 말하기도 한다. 시대의 변화에서 산업사회 이래로 자연과 인간 사이에 기계가 개입하면서 아픔을 병이라고 할 때, 그 만큼 발달하게 된 생물학, 의학, 병리학의 실증적 자료들에 의해 치료 방식을 찾는다. 기계가 개입하고 신체와 관계 속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기계의 병을 부속의 교체로 하듯이, 인간의 신체의 일부를 교체하는 기계화의 길을 간다. 그나마 기계의한 기계를 위한 교체는 유예인 셈이다.
게다가 정치경제학의 시대에는 사회와 제도로서 국가의 부속물인 인간이 기계처럼 작동하고 있다. 벩송은 우주가 자신을 대변하는 신들을 만드는 기계라고 하지만, 자본은 제국을 위해 인민들이 기계화되고 보다 더 긴 시간을 집행유예하려고 한다. 요즈음은 인민을 개돼지로 취급하여 기계화의 생산적 에너지 공급쯤으로 여기고, 새끼를 낳아 유예를 넘어서 대를 이으라고 소란법적이다.
이에 반하여 들뢰즈는 기계처럼 사는 것만이 아니라, 자본의 체제 안에 인간은 구체적으로 기계라고 말한다. 그 기계가 아프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자본은 기계 바꾸면 되지, 아프다는 인간에게 자치와 자유를 부여할 이유가 없다고 여긴다. 들뢰즈는 인간기계는 물체기계와는 달리 동일생산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달리 생산하고 달리 실행할 권능을 가졌다는 것이다. 기계인데 생성꼐는 준안정상태에서도 징후를 드러낸다는 것이다. 말이 먼저가 아니라 징후가 먼저이며, 저항은 있어왔고 그 폭발은 간헐적이다.
‘말로서 아프다’고 하는 것은 자기의 불편을 인간 기계로 대체하려는 입말이다. 입말은 나중에 말하겠지만, 내부의식의 외화된 것으로, 의식의 외재화 한 표현이다. 내부의식을 무의식이라도 하였는데, 내부의식은 누구에게나 실재하며 과정을 겪어왔고 겪고 있다. 이 내부의식을 잘 들여다 볼 수 없기에, 외부로 투사된 의식을 현상이니 이데아 라는 말로 대체한다. 그 외재의식이 귀결이 이데아론이며 현상학이다. 현상학이 재현의 학문인 이유이기도 한다. 내재의식의 집결점으로서 현재의식이 있다. 현재의식이 그 자체로 사건이다. 이 사건 속에는 온갖 즐거움도 아픔도 있다. 고대인들이 - 공자도 열락이라 하였고 – 아픔을 잊기 위해 즐거움을 찾는 것은 당연하였다.
아픔을 고친다는 생각은 어디에서 나왔을까?를 생각해 보자. 내부의식을 외재화하여 현상으로 보여 주는 외부의식의 집결체, 그것은 원자들의 결합의 방식을 닮은 기계 현상이다. 또는 추억들의 결합을 내부의식으로 착각하는 것과 같다. 이런 점에서 영화도 내부의식의 외부로 투영의 방식이다. 그럼에도 영화를 이데아라고 부르지 않는다. 들뢰즈 표현으로 영화는 입말의 파라독스인 셈이다. 왜냐하면 연속극 같은 시리즈 물이 같은 구성이면서도 거의 주기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독사(doxa)의 변형으로써 파라독스이기 때문이다.
입말의 표현들은 파라독스들이다. 용왕에 나라에 토끼의 이야기는 파라독스이고, 하늘나라에 야훼 옆에 모세가 있다는 것은 독사인가, 또는 이데아 세계에 플라톤이 있다는 것은 독사이고, 천상에 환웅이 있었고 그 옆에 원숭이가 놀고 있다는 것은 파라독스일까? 입말이 의미가 있다는 것은 이야기를 사건과 연관없이 진리라 판단하고 게다가 믿고 따르면서, 그 입말이 의미있다고 말, 또 말, 말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사실과 사건의 시대와 환경, 그 시대의 인간의 능력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입말의 경우에서 자기가 한 말을 진리와 거짓으로 구별하는 것, 그것은 예전에는 지식(에피스테메)라고 했지만, 내재의식의 외재화에 의한 전도된 사유 사유이며, 또한 스토아적 사유에서는 그 지식(본질 인식)이 수많은 파라독스들 중의 하나라는 것이다. 그것도 마치 기계에 부속처럼 갈아 끼우기 할 수 있는 파라독스라는 것이다. 야훼 자리에 알라를, 옥황상제를, 환웅을, 용왕을, 부타를 무한 소급하여 하찮은 똥작대기를 갈아 끼워도 이야기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재현의 학문은 대체와 갈아 끼우기의 기계론의 학문이며, 이런 기계를 유물론이라고 할 때 통속적 유물론이며, 이런 기계론을 신실재론이라고 할 때, 레고의 조립이 실재가 되는 것이다. 여기에는 최소한 가상적 화면인 영화는 신실재론에 들어가지 않겠지만, 기계의 대체를 신실재론으로 해야 인간의 신체의 부분으로 대체된 사이보그가 신생물론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말의 장난은 자본이 인민을 개돼지취급하여 에너지원 정도로 생각하는 사악한 집단의 부의 축적에 있다. 그들은 천국에 가지 못하는 것으로 겁주는 것이 아니라 혁명을 통해서 단두대 이슬로 보내져야 할 것이다.
젊은이여 자신의 삶은 어느 누구도 남이 대신 살아줄 수 없고, 기계처럼 대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부품으로라도 대체한다고 조금이라도 생각하는 만큼, 그 만큼 자본 제국의 포로가 되고, 제국기계의 부속이 된다는 것이다. 삶은 일회적이고, 두 번도 없고 부활은 더더군다나 없다. 그리고 반대방향으로 돌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세상사에 나서는 젊은이는 아버지, 할배, ... 올라가서 저 끝의 옥황상제의 자식이 아니라는 것이며, 각각은 모든 생명있는 존재의 가장 최근 창조물로서 아버지, 할배 ... 옥황상제 등등는 후배, 후배의 후배, 후배.... 뒷 후배들이라는 것을 잘 생각해야 할 것이다.
불가역적이고 일회적인 그 삶은 준안정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아프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 자연의 필연성 속에서, 생명이 자기 노력과 자발성으로 아픔과 함께 지니고 즐거움을 찾아가는 노력, 돈수돈수, 수양수양 하면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간다. 그 삶에서 다른 사람 중에서 진정한 벗이 있다면, 공자가 말씀하듯이 “친구(동지)가 찾아오니 어찌 즐겁지(락樂) 아니한가”라고 한다. 즐거움은 아픔의 해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노력하는 자, 세상을 바꾸려는 자들의, 저항과 혁명의 노력자들의 만남에 있을 것이다.
삶의 과정에서 입말의 진리를 추구하는 자들이 아니라, 진실은 구체적 징후를 드러내고 스스로 치유의 방법을 찾아 노력하는 친구를 만나는 것, 스스로가 징후를 드러내지만 준안정상태를 유지하면서 치유하면서 사귀는 것이다. 이 준안정상태의 유지가 삶에 진리이며 선이며, 성스런 것이다. 그런 노력을 하는 가운데, 이런 노력을 하는 친구를 만날 수 있다. 세상사에 이건희가 어찌 누워있었는지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빌게이츠가 뭘 먹고 싸는지를 아는 사람도 거의 없다. 그런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없다. 친구란 뭘먹고 싸는지 그리고 어떤 징후를 드러내는지를 알 때 친구이다. 그 친구는 기계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다.
대체 없는 친구를 만드는 노력으로 20수년을 노력해보라. 길다고? 활동의 확장의 시기는 마흔이 넘어야 한다는 점을, 준안정상태는 항상 동일한 것이 아니라 계절에 따라 나이에 따라 변하는 것을 얼마나 잘 겪느냐에 따라서 벗과 세상사의 즐거움이 있을 것이다. 먹고 싸고 자는 자연과 더불어 그리고 아픔을 안고 준안정상태를 사는 벗과 더불어, 그 속에는 즐거움과 행복이 있다.
아픔을 벗어나 즐거움을 찾는 고대철학은 여전히 내재의식 속에 있다. 그 즐거움을 지속하는 데는 벗과 함께이고, 세상사에서 인민 속에 있다. 즐거움과 행복이라는 실천의 노력에서는 아버지, 할배, ..큰 할배 등등은 후배이며 먼 추억들이라는 것이다. 추억을 트라우마로 갖지 말고, 생명의 이 긴 과정을 이겨온 노력의 끝에 있는 각자의 자신이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연, 기계, 자본제국에서도 자주와 자발성을 실현하는 길을 찾는 노력과 저항이 있고, 나와 벗, 이런 결합이 셋으로 불어날 때 저항은 혁명이 될 것이다.
새로운 세상은 새로운 징후로부터. 그 새로운 치유는 징후를 아는 동지와 함께... .
(3:24, 56QMB) (4:38, 56QM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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