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광산김씨 대구/경북 종친회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보라매
    2. Chi Soon Kim
    3. 청죽림
    4. 광산김씨청년회광..
    5. 高韻
    1. 삼이
    2. 김용철
    3. 학산
    4. 멋진아저씨
    5. 김성구
 
카페 게시글
검색이 허용된 게시물입니다.
보학강좌 스크랩 광산김(光山金)의 뿌리 바로알기.
鶴邨/김용찬 추천 0 조회 115 08.03.03 14:2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산 김 (光山 金) 연원 및 개략*

[특집]나의뿌리를 알고 생활하자  

*氏族의 연원* 

光山金氏의 연원은 경주시림의 김알지(金閼智:大輔公)의 탄강설화에서 비롯되니, 신라 제4대 탈해왕 9년(서기95) 3월에 王이 金城서쪽 시림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瓠公)을 보내 살피게 하였더니, 나뭇가지에 金빛 찬란한 작은 궤(櫃)가 걸려있고, 그 밑에서 닭이 울고 있거늘 호공이 돌아와 王에게 아뢰자, 王이 사람을 보내 그 금궤를 가져다 열어보니, 그 속에 사내아이가 있었는데 외모가 매우 출중하였다. 王이 기뻐하며 이르되“하늘이 나에게 아들을 준 것이 아니냐”하고 거두어 기르니 자라면서 총명하고 지략이 특출하니 이름하여 閼智라 하고 금궤에서 나왔다하여 성(姓)을 金氏라 하였다. 또 始林을 고쳐 鷄林이라 하고 국호를 삼았다. 알지가 후에 대보벼슬에 올랐고, 자손이 이어져 7世 김미추(金味鄒)가 신라왕조 11대 조공왕(助賁王)의 사위가 되고, 왕통(王統)을 이으니, 제13대 미추왕으로 金氏王朝가 이때부터 시작되어 신라왕조 56왕 가운데 金氏가 38大王을 계승하여 신라의 宗姓이 되었다. 우리 光山金氏의 始祖 王子公(諱 興光)은 憲康王 三子설과 神武王 三子설이 있으나 정확한 고증이 없고, 근거하기 어려워“新羅王子 興光으로 한다”고 정묘대보(丁卯大譜)에 기록되어 전해져온다.


시조 왕자공께서 신라말기에 종국(宗國)이 어지러워 장차 난리가 있을 것을 예견하고, 金城을 떠나 武州 西一洞에 은거하시니 무주는 지금의 光州이다.


이로 인해 관적(貫籍)을 光山으로 하였고, 고려조에 와서 후손에 평장사(平章事:현 장관급)가 많이 배출되니 西一洞의 동명을 平章洞으로 개칭하게 되었다.


이곳 평장동은 시조 왕자공께서 개기(開基)하시니, 지세와 형국이 아름다워 노령산맥 태조봉을 주산으로 하여 서남으로 수 백리를 뻗어내려 산맥의 정기가 불대산 소조봉에 응기하여 크게 넓고, 힘차게 펼쳐지면서 기치창검(旗幟槍劍)이 칼을 세워놓은 듯한 형상으로 서른여덟개의 장군봉으로 나누어져 웅장하게 옹위하고, 수 백리를 흘러온 黃龍江물과 서로 만나 평장동을 싸고돌아 山水의 정기가 빼어나 한곳으로 뭉쳐서 응기(凝氣)하니 만고대지(萬古大地)로 일컬어진다.


시조 왕자공의 사우에서 안대(案對)한 瑞石山은 멀리 하늘을 찌를 듯이 높고 웅장하며, 長江이 서로 만나 합류하니, 산맥(山脈)과 수맥(水脈)의 줄기가 살아서 움직이는 듯한 형국을“비봉포란형”이라 하는데, 시조공께서 이곳 천하 명기에 개기하신 음덕으로 유구한 千載의 역사 속에 혁혁한 명문화벌로 면면히 이어져서 三世 김길(金佶:司空公)께서 고려왕조의 통합 시에 기위(奇偉)한 계책으로 창업을 도와 공신이 되시고 5世 김책(金策:文貞公)은 문호를 열었고, 7世 김양감(金良鑑:文安公)이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종사(宗師)로 유학(儒學)의 터전을 열었으며, 김의원(金義元:忠貞公)이 여진족(女眞族)정벌에 수훈을 세우니, 모두 선세(先世)의 현조(顯祖)이다.


고려조에 김태현(金台鉉:文正公)과 아들 김광철(金光轍:文敏公)과 김광재(金光載:文簡公) 三부자가 문자(文字)시호를 받아 가문을 빛냈고, 김주정(金周鼎:文肅公), 김 심(金深:忠肅公), 김석견(金石堅:化平府院君)과 절의(節義)의 김종연(金宗衍)과 김 연(金璉:良簡公), 김사원(金士元:貞景公), 김 진(金稹:章榮公)3대의 영화가 광김(光金)의 문호를 크게 빛나게 하였다.


고려조와 조선조의 천여년 역사 속에 고관대작(高官大爵)과 문장절의(文章節義) 그리고 거유석학이 대대로 계승하여 淸白吏 4인, 대제학 7인, 부조묘(不祧廟)가 13인, 蒙諡한 분이 59인, 문과급제 265인과 특히 동국 18현에 沙溪, 愼獨齋 양 선생이 문묘에 배향되어 禮學의 태두로 추앙되어, 光金이 예문종가가 되었다. 

본관지 연혁 

관적지 광산(光山)의 유래는 평장동에 연원하였으니, 이곳은 본래 백제의 武珍州인데 景德王16년(752)에 武州로 개칭하였고, 고려 太祖23년(1228)에 光州라하고, 그 후 海陽縣이라 하였다가 또 고쳐서 羅州의 속현을 삼았다.


高宗46년(1259)에 翼州事로 승격하고 그 후 武珍州로 승격하였다가 다시 낮추어 光山縣을 삼고, 忠宣王때 化平府를 삼고 뒤에 翼陽郡으로 고치고, 恭愍王11년(1362)에 武珍州로 고쳐서 牧使를 두었다.


조선조 世宗12년(1430)에 武珍郡으로 강등하고 그 후 州로 복구하였으며, 成宗20년(1489)에 瑞石縣으로 강등하였다가 燕山7년(1501)에 다시 光州로 개칭하여 목사(牧使)를 두고 仁祖20년(1489)에 또 光山縣으로 강등하였다. 숙종 27년(1701)에 현(縣)으로 숙종33년(1707)에 光州로 복구하니, 일제(日帝)강점기부터 행정구역 개편으로 全南 潭陽郡 大田面 平章里의 동명으로 되어 지금에 이른다.


始祖王子公이 新羅의 국운이 기울자 이곳 武珍州(평장동)에 정착하여 자손이 세거함으로 이곳이 관적 즉 본관이 되니, 역사적 지명인 光州 海陽, 光山, 化平등은 모두가 光山의 관적에 속하게 된다. 平章洞의 지명유래는 왕자공 후손에 평장사가 많이 배출되어 이로 인해서 동명을 평장동이라 명명하게 되었다.


시조 왕자공의 유지(遺地)가 오랜 세월이 흘러오는 동안 타인소유가 되어 한동안 왕자공이 거처한 옛 터전이 수호되지 못하고 전설로만 전해져 왔으나, 조선조 成宗2년(1471)에 김현뢰(金賢賚:감찰공)가 유허서(遺墟序)에 그 전말을 기록하였다.


肅宗朝에 김만기(金萬基:瑞石)가 힘을 모아 옛 터를 찾았으나, 그 후에 또다시 타인 점유가 되었는데 景宗2년(1722)에 진사 김광수(金光洙)와 김사정(金泗鼎) 二公이 힘써 사우(祠宇)를 세우려다가 중지되고 김진상(金鎭商:退漁子)이 유허비각을 세웠고, 김진동(金鎭東:知樞公)이 김복택(金福澤), 현감 김성택(金聖澤)과 함께 입비통문을 해 3년 뒤에 준공하여 통덕랑 김회풍(金會豊)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주요 세거지*

앞에서 설명한 5파를 중심으로 세거지(世居地)를 설명한다면 주로 문정(文正), 문숙(文肅)공파는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연원지인 광주(光州)를 중심으로 하는 전라남북도(全羅南北道)에 골고루 퍼져 살고 있으며 양간(良簡)공파는 충청남도(忠淸南道) 논산(論山)을 중심으로 전북 고창(全北 高敞)과 경남 합천(慶南 陜川) 및 경북 안동(慶北 安東)으로 퍼져 나갔으며, 낭장(郎將)공파는 광주(光州)를 중심으로 사온직장(司醞直長)공파는 충북 충주(忠北 忠州)를 중심으로 후손들이 세거하였으나 지금은 각파 공히 조선시대의 양대 변란과 일제(日帝)강점기 등의 수난을 극복하고자 세거지를 떠나 이북 땅까지 우리나라 전역과 타국까지 퍼져나갔으며 광복 후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권(首都圈)에 집중적으로 옮겨와 사는 고로 전국 어느 고을 할 것 없이 백만종인(百萬宗人)이 골고루 분포되어 살고 있으니, 이와 같은 것은 역사의 흐름에 따라 생을 유지하기 위하여 옮겨 사는 사례라 본다. 

 

씨족史 

광산김씨(光山金氏)는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인 가문으로서 삼한갑족(三韓甲族)중에서도 으뜸으로 손꼽히는 가문임이 틀림없으며 예문종가(禮文宗家)로 그 이름이 널리 퍼져있다. 먼저 광산김씨(光山金氏)의 족보 유래를 살펴본다면 朝鮮조 中期에 김지남(金止男:龍溪)이 수집 발간한 용계보(龍溪譜)가 있는데 전해지지 않고, 그 후 肅宗朝에 김만기(金萬基:瑞石)가 발간한 서석보(瑞石譜)와 아드님인 김진규(金鎭圭:竹泉)가 발행한 죽천보(竹泉譜)가 있었으나 전해지지 않고, 그 후에 김진동(金鎭東)이 肅宗13년(1687)에 발간한 지추보(知樞譜=일명 丁卯大譜)로 전17권이 발간되었고, 그 후 高宗13년(1876)에 발간된 것이 丙子大譜로 전29권이요, 1939년 己卯에 발간된 長城大譜 전48권은 1910년에 충정공(忠貞公:金義元)의 묘지명(墓誌銘)이 발굴된 후에 발간되었다.

광복 후, 1957년 丁酉에 발간된 한성대보(漢城大譜)가 전35권이니, 대동보(大同譜)는 丁卯, 丙子, 己卯, 丁酉 네 차례에 걸쳐 발행된 光山金氏의 大同譜이다.

광산김씨 족보에는 고려조에 시작되어 始祖 김흥광(金興光:王子公)과 김식(金軾:角干公)은 新羅때 기원(起源)하여 3世 佶이 고려 태조가 삼한을 통합할 때에 기위(奇偉)한 계책으로 창업을 도왔고, 5世 김책(金策:文貞公)이 우리나라에서 과거제도가 생기자 초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내었고, 7世 김양감(金良鑑:文安公)이 사은사로 宋나라에 가서 태묘(太廟)와 태학(太學)의 도본(圖本)을 그려가지고 와서 이학(理學)의 종사(宗師)가 되어 더욱 문호를 빛냈으며, 아드님은 김약온(金若溫:思靖公)이요, 차자(次子)인 김의원(金義元:忠貞公)은 女眞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웠으니, 그 후 정중부(鄭仲夫)의 난에 무신들의 반란으로 文臣들의 참화가 가혹하여 중간 년대의 기록이 멸몰된 것이 많았다.

족보에 의하면 11世에 位와 珠永 두 계보로 분계되니, 11世 位, 12世 光世, 13世 鏡亮, 14世 김수(金須:監察御史公)의 아들 김태현(金台鉉:文正公)과 그의 삼촌 김주정(金周鼎:文肅公)으로 분파된다.

또 일파(一派)는 11世 김주영(金珠永)을 중시조(中始祖)로 하여 12世 光存, 13世 大鱗, 14世 김연(金璉:良簡公)과 김규(金珪:郎將公)으로 분파되고 있다.

이에 각파별로 개요를 말한다면 문정공(文正公)파의 파조 김태현(金台鉉)은 삼별초난을 평정하다가 제주에서 순직한 감찰어사공 김 수(金 須)와 102세의 수복을 누린 변한국대부인(卞韓國大夫人)고씨의 아들로 고려 충렬왕조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문필을 요하는 직책으로 등용되어 최고벼슬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으며, 그의 아들 4형제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는데, 김광식(金光軾)은 총부의랑(摠部議郞)으로 후손들이 寶城, 羅州, 高興등 주로 全羅南道권에 세거하고 김광철(金光轍:문민공)은 화평군(化平君)에 봉군되고 후손들이 靈光, 松炭, 咸平, 全州, 光州등지와 堤川, 瑞山, 康津, 淳昌, 海南등지에 정착하고 김광재(金光載:문간공)는 전리판서와 예문관대제학을 겸임하였고 후손들은 濟州島에 정착하여 세거하였고, 김광로(金光輅)는 가안부녹사(嘉安府錄事)로 후손들은 潭陽, 光山, 和順, 羅州등 光州권역에 주로 세거, 문호를 열었고, 문정공의 후손으로 봉군(封君)된 해양군 김회조(金懷祖)와 추성익대공신(推誠翊戴功臣)으로 추대된 김도탁(金都卓)이 있는가하면 신돈(辛旽)의 난정에 항거하다가 죽은 김흥조(金興祖)와 그 사건에 연루된 김윤조(金胤祖)는 제주도의 입도조가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고려 말에 문과에 급제하여 경사에 밝아 제자백가(諸子百家)로 통한 김 첨(金 瞻)은 조선이 건국되자 처음에는 밀려났으나, 태종 때에 다시 출사하여 아악(雅樂)을 정비하였으며, 태종이 왕위를 잇는데 공을 세우고, 판서를 지낸 김계지(金繼志)등이 조선조에서도 인맥을 이어간다. 벼슬길보다 학문을 익히고, 효도를 으뜸으로 실천한 김처겸(金處謙:육행당), 후학지도에 힘을 기울인 김언우(金彦瑀)와 김언거(金彦거)형제, 그리고 불모지이던 제주에 성리학의 기반을 닦은 김진용(金晉鎔), 호란 후에 벼슬길에서 물러나 후학지도를 한 김동준(金東準 :鳳谷)은 유학자로 맥을 이어 호산서원(湖山書院)에 배향되었다.

문숙공파의 파조인 김주정(金周鼎)은 元宗5년(1264)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대장군(大將軍)등 여러 관직을 거쳐 마지막으로 보문각태학사(寶文閣太學士)에 이르렀다. 그의 아들은 충숙왕조(忠肅王朝)에 협보공신(協輔功臣)으로 군(君)의 봉작을 받은 김심(金深:忠肅公)과 수문전 태학사(修文殿 太學士)를 지낸 김유(金流:侍中公)를 비롯하여 그의 후손으로 국가에 혁혁한 공적을 남겨 군(君)에 봉작된 김석견(金石堅)의 후손은 寶城, 順天, 羅州, 扶安등 全羅道권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 세거하였고, 삼사좌사(三司左使)를 지낸 김승사(金承嗣)의 후손은 羅州, 長城, 黃龍등 光州근역을 중심으로 분포되어있고, 상호군을 지낸 김승진(金承晉)의 후손 역시 光州근역을 중심으로 세거하였다. 판서벼슬을 지낸 김승노(金承魯)의 후손은 全南 光州를 중심으로 筏橋, 羅州, 順天, 潭陽등지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세거하였고, 상호군(上護軍)을 지낸 김중간(金仲幹)의 후손은 羅州, 海南, 長城, 光州 등지로 맥을 이어갔고, 김윤장(金允臧)은 판도판서를 지냈으며, 후손은 保寧, 大川을 중심으로 忠淸권과 黃海권에 정착되었다.

돌산 만호로 왜구를 격퇴한 김문발(金文發)과 요승 신 돈(辛 旽)의 난정에 항거하다가 죽은 상호군 김 정(金 精)과 고려(高麗)의 멸망과 운명을 같이한 도만호 김성우(金成雨)와 상장군 김종연(金宗衍)이 굳건하게 절의를 지켰고, 조선조에 들어와서도 태종(太宗)의 명을 받고, 전라도 절제사로 김제(金堤)에 관개용 저수지인 벽골제를 만든 김 방(金 倣), 정국공신으로 우의정에 오른 김극성(金克成:靑蘿)과 평장동에 유허서를 써서 후세에 전한 사헌부 감찰 김현뢰(金賢賚)등 모두가 문숙공의 후예로 정충고절(精忠高節)과 추원보본(追遠報本)의 정성으로 찬란한 맥을 이어가고 있다. 그리고 양간공파의 파조인 김 연(金 璉:良簡公)은 고려 중ㆍ후기의 문신으로 고려 高宗때 시어사(侍御史), 병부시랑 추밀원부사, 형부상서를 거쳐 충렬왕 25년(1299)에 경상도 도지휘사가 되어 일본 정벌을 위한 전함 900척을 만드는 총지휘관이 되었다.

공이 어느 날 허리에 찬 금어대가 떨어지는 꿈을 꾸고 스스로 해몽하되, 신장이 내 몸에서 떠났으니, 머물 수 없다하여 사직하고, 첨의시랑찬성사(僉議侍郞贊成事)로 치사하였다. 시호는 良簡이다.

양간공의 아들은 김사원(金士元:貞景公)이니, 권간세신(權奸世臣)들의 농권(弄權)을 물리쳤고, 김 진(金稹:章榮公)은 정당문학(政堂文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에 지춘추관사 상호군(知春秋館事上護軍)이 되고, 충혜왕(忠惠王)때 지공거(知貢擧=試官)가 되어 많은 인재를 뽑아 치적이 많았다. 시호는 章榮이다.

김광리(金光利)는 전리판서(典理判書)를 지내고, 김인우(金仁雨)도 전리판서로 공의 후예는 坡州, 開城을 비롯하여 京畿근역에 터전을 열어 세거하였고 김갑우(金甲雨)는 麗末의 공마(貢馬)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고, 이로 인해 형제와 자질들이 모두가 비운을 맞았다. 김인우의 후손 중 일파는 김승길(金承吉:沙隱)이니, 여말의 절신으로 김오행(金五行:梅隱)과 함께 한 많은 여생을 보냈는데, 공의 후손들은 高敞, 全州등의 全北권과 慶南권을 중심으로 문호를 열었다. 김기서(金麒瑞:敦睦齋)와 김경희(金景熹:蘆溪) 부자는 문행으로 명망이 높았고, 후학장려에 힘썼다. 노계공의 아들 김홍우(金弘宇:白谷)와 여러 형제가 임진란에 창의하여 무훈(武勳)을 세우니 공의 후손 중 대표적인 인물이다.

또 한파인 김삼우(金三雨:尙書公)와 김남우(金南雨:典書公)의 후예는 慶南山淸, 陜川, 忠南扶餘 등에 정착 세거하였다. 김 유(金 維:中郞將)와 端宗의 절신(節臣)인 김효종(金孝宗)과 壬亂에 倡義한 義兵大將 김만수(金萬壽) 4형제가 무훈을 세웠고 후손들은 京畿와 仁川권역에서 크게 문호를 열어 忠義로 빛냈고, 김백겸(金伯謙:光原君)이 李施愛亂 평정에 공으로 적개공신이 되니, 시호는 양호(襄胡)로 공의 후예는 京畿 楊平, 黃海 延白에 세거하였다.

김영리(金英利)는 판군기감사(判軍器監事) 벼슬을 지내고, 문정공 신현(申賢)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연구하였으며, 화해사전(華海師全) 편찬에 참여하였다. 김정(金鼎)은 重大匡을 지내 光城君에 봉군되고, 아들 3형제 김약채(金若采), 김약항(金若恒), 김약시(金若時)가 모두 문과에 급제하여 어머니 연안이씨는 숙신택주(肅愼宅主)로 봉해지는 은전을 받았다.

김약채(金若采)는 충청도 도관찰출척사(都觀察黜陟使)를 지내고, 조선조 초기에 사병양성의 병폐를 근절시키는데 양촌(陽村:權近)과 함께 기강을 세우는데 유공하였고, 忠南 論山市 連山面 高井里에 터전을 열어 크게 문호를 빛내니, 世祖 成宗朝의 相臣으로 李施愛亂 平定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 2등이 된 김국광(金國光:議政公)은 成宗朝에 左議政을 지내고 經國大典 편찬에 유공하여 광산부원군에 봉해지다.

김국광(金國光)의 아들이 모두 현달하였는데, 맏아들은 大司諫을 지낸 김극뉴(金克忸)이요, 다음이 漢城左尹을 지낸 김극니(金克怩)이고, 그 다음이 忠勳府經歷을 지낸 김극수(金克羞)요, 水軍節度使를 지낸 김극괴(金克愧)와 김극침(金克忱)은 江華經歷을 지냈다. 맏아들 大司諫 김극뉴(金克忸)의 후손이 번성하고 많은 인물을 배출하니, 김계휘(金繼輝:黃岡)는 大司憲이요, 김 개(金 鎧:獨松亭)는 판서로서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김계휘의 아들 김장생(金長生:沙溪)은 禮學의 종장(宗匠)으로 아들 김집(金集:愼獨齋)과 함께 부자분이 높은 학문으로 文廟에 配享되는 은전을 받았으며, 예학을 정립시켜서 光金이 예문종가로서 추앙을 받았다.

사계선생(沙溪)의 아들 김 반(金 槃:虛舟公)은 참판을 지냈고, 아들 6형제가 모두 현달하니, 맏아들 김익열(金益烈)은 남원부사를 지냈으며, 김익희(金益熙:滄洲)는 양관대제학에 文貞公의 시호를 받았고, 김익겸(金益兼)은 江華에서 殉節하여 忠正公의 시호를 받았다. 충정공의 아들 김만기(金萬基:瑞石)는 영돈영부사(領敦寧府事) 광성부원군(光城府院君)이니, 肅宗의 장인으로 양관대제학에 현종묘정에 종향되고, 아우 김만중(金萬重:西浦)은 예조판서에 양관대제학이요, 숙종묘정에 종향된 형제 대제학이요, 국문학적 문헌으로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와 구운몽(九雲夢)의 작가로서 높이 평가 되고,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정려와 문효공(文孝公)이란 시호를 받았다.

김만기(金萬基)의 맏아들 김진구(金鎭龜)는 어영대장과 호조판서 光恩君에 景憲公의 시호를 받았고, 둘째 아들 김진규(金鎭圭:竹泉)는 예조판서 양관대제학에 文淸公의 시호를 받았고, 공의 아들 김양택(金陽澤:文簡公)은 양관대제학에 영의정을 지냈고, 瑞石ㆍ西浦가 형제대제학이요, 또한 瑞石ㆍ竹泉ㆍ健菴은 3대 대제학이며, 김상현(金尙鉉:經臺)과 김영수(金永壽:荷亭)가 모두 대제학으로 光金에 大提學 일곱 분이 사계 김장생(金長生)의 후손에서 나왔다.

김진구(金鎭龜:晩求窩)의 아들 8형제가 모두 뛰어난 재주로 영달하니 김춘택(金春澤), 김보택(金普澤), 김운택(金雲澤), 김민택(金民澤), 김조택(金祖澤), 김정택(金廷澤), 김연택(金延澤)으로 光金의 8택(八澤)이라 이르며 모두가 영달하였다.

어영대장을 지낸 光南君 김익훈(金益勳)은 보사(保社)공신에 충헌공(忠獻公)의 시호를 받았다. 공의 손자 김진상(金鎭商:退漁子)과 김상악(金相岳)은 문간공(文簡公)의 시호를 받았고, 김상현(金尙鉉)은 문헌공(文獻公)의 시호를 받았으며, 조카 김영목(金永穆)은 문헌공(文憲公)의 시호를 각각 받았다. 김기성(金箕性:이吉軒)은 英祖의 부마요, 김재창(金在昌:孝憲公)은 貞簡公의 시호를 받았다.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김익경(金益炅)의 손자 김진동(金鎭東)은 돈영부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고, 丁卯大譜 知樞譜를 발간한 주인공이다. 김낙현(金洛鉉:文敬公)과 김상휴(金相休:文簡公), 김기은(金箕殷:淸獻公), 孝文公 김재현(金在顯:孝文公), 김보현(金輔鉉:文忠公)은 모두 都憲公 김익경(金益炅)의 후손이다. 김익희(金益熙)의 후손에 강원감사를 지낸 김진옥(金鎭玉)과 영의정을 지낸 김상복(金相福:文憲公), 우의정을 지낸 김 희(金熹:芹窩)이다. 그 외에도 많은 대관(大官)과 유현(儒賢)이 배출되었는데, 김정묵(金正북:過齋), 김상정(金相定)등 명현 달사(名賢達士)가 모두 사계 김장생의 후손에서 나왔으며, 김 규(金 규:豆溪) 여러 형제도 사계의 아들로 명망이 높았다.

김겸광(金謙光:恭安公)은 청백리에 녹선되어 좌리공신 광성군에 봉군되었다. 아들 김극핍(金克핍:平靖公)은 좌찬성으로 光嶽君에 봉군되고, 아들 김명윤(金明胤)은 左贊成, 김홍윤(金弘胤)은 大司憲을, 김의윤(金懿胤:市隱公)은 道學이 높아 花潭 서경덕(徐敬德)과 道義交를 맺었으며, 조정에서 여러 번 불렀으나 不就한 청렴한 도학자이다. 예조참판을 지낸 김극개(金克愷)와 光川尉 김인경(金仁慶)은 中宗의 駙馬로 부조의 은전을 받았고, 한말의 김기석(金箕錫:貞武公)은 어영대장으로서 훈업을 남겼고, 학행으로 김중정(金重鼎:肯構堂)과 김상연(金尙埏:棄棄齋)을 비롯해 후손에 많은 유현(儒賢)을 배출하였다. 공의 후손이 論山 連山과 扶餘, 燕岐, 抱川, 楊平, 水原, 沃川, 鎭安 등 忠淸道일대와 京畿 서울권에서 세거하였다. 교서관(校書館) 판교를 지낸 김경광(金景光)의 후손은 경기도와 서울 근역권에서 세거하였다.

관찰사 김약채의 맏아들 김 문(金 問:檢閱公)이 요졸하자 정경부인 陽川許氏가 청상(靑孀)으로 정절을 지켜 그 후덕한 음덕이 자손에 드리워져 光山金氏가 해동 명문이요, 삼한갑족, 예문종가의 명망을 얻게 되었다.

관찰사의 셋째 아들 김 한(金 閑)은 中軍도총부 부총제를 지냈고, 임진란 원종훈 김면(金沔:莊悼公)은 적개2등 공신으로 光川君에 봉군되었고, 자손이 利川, 陰城, 安城, 燕岐, 龍仁등 京畿圈과 豊德 등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관찰사의 막내아들 김열(金閱:退村)은 문장이 명세(鳴世)하였고, 증손 김여석(金礪石:忠穆公)은 판서와 각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子孫이 春川, 抱川, 茂朱, 尙州, 論山등지에 세거하였고, 김용석(金用石:潭庵公)은 장안(長安)의 명사로 연산혼정(燕山昏政)을 예지하고, 安東으로 낙향하였다. 김득렴(金得磏:道峰公)은 九潭에서, 김언구(金彦球:雙碧堂)는 奉化에서 문호를 열어 후손에 많은 유현을 배출하였고, 김언기(金彦璣:惟一齋)는 학문이 크게 성취하여 문하에 많은 유현(儒賢)과 명사(名士)를 배출하여 안동문학(安東文學)의 창도자(唱導者)로 추앙되어 향중(鄕中)에서는 退溪 先生과 惟一齋 先生 두 분이 우뚝 솟아 추앙된다고 하였다. 아들 김득연(金得硏:葛峰)은 학문이 높고 壬辰亂때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安東守城에 유공하니, 유성룡(柳成龍:西厓)이 말하되,“安東이 유독 完全함은 葛峰 때문”이라 하였고, 葛峰公은 止水亭歌와 最長文의 한글가사와 한글 시조를 창작하여 한글문화 연구자료를 남겼고, 김광원(金光源:石塘)은 南州의 高士로 안동 영호루기(映湖樓記)를 써서 文名을 떨쳤다.

유일재의 후손은 安東 臥龍, 醴泉, 英陽, 奉化 등 慶北일원에 분포되어 있다.

사헌부 執義를 지낸 김달전(金達全)과 장악원정을 지낸 김지(金漬:道南公)와 김호문(金好文:愚齋)이 명망이 있었고, 후손은 陜川, 宜寧, 居昌, 咸陽 등 慶南一帶에 널리 분포되었다. 막내아들 김달도(金달道)는 영흥판관을 지내고, 아들 관찰사를 지낸 김호(金浩)와 아들 김우서(金禹瑞:舍人公)를 비롯해 儒賢을 배출하였는데, 金浦와 仁川일원에 세거하여 문호를 열었다.

김약항(金若恒:惕若齋)은 청백리에 녹선되고, 표문관계로 明나라 天子의 노여움을 사 중국 雲南省에 유배되어 돌아오지 못하는 恨을 남기니, 아들 사재감정을 지낸 김허(金虛)와 서령을 지낸 김처(金處)는 부친이 억울하게 謫所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恨으로 눈물어린 한 세상을 마쳤다. 후손은 서울 근역과 배천, 강진, 개풍등지와 경기일대에 세거하고 있다.

김약시(金若時)는 고려조에 직제학 벼슬을 지내고, 역성혁명으로 이성계가 등극하자 고려조의 유신임을 자처하고, 杜門洞 72현 가운데 한분으로서 경기 廣州 금광리 산중에 은거 청맹이라 이르고, 절의를 지켰다. 조선조 숙종 때 높은 관작을 추증하고, 忠定公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아들 김췌(金萃)는 성주목사로 관의 기강을 확립에 기여하였고, 아들 김순성(金順誠)은 평양서윤을 지냈고, 손자 김신동(金神童)과 경상감사를 지낸 김지남(金止男:龍溪)과 평양감사와 부윤을 지낸 김영남(金潁男:掃雪翁)과 홍문관 전적을 지낸 김규(金규 )와 김위남(金偉男:藥山), 김우형(金宇亨:貞惠公)과 丙子胡亂때 김득남(金得男:忠懿公) 등, 이 외에도 많은 儒賢과 재사가 배출되었고, 김순성(金順誠)의 막내아들 김굉(金굉)은 경상감사에 이조참판을 지냈다. 후손들은 城南, 廣州, 牙山, 瑞川, 洪城, 高興, 禮山, 淸州, 槐山, 鎭川 등 京畿, 忠北일대에 분포되어 세거하였다.

김성리(金成利)는 사온승(司醞丞)벼슬을 지내고, 손자 김성옥(金成玉)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으며, 후손은 羅州, 光州, 咸平, 務安, 長城등지에 세거하였다.

김안리(金安利)는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냈고, 후손에 김자민(金自敏)은 동래부사를 지냈으며 후손이 潭陽, 淳昌, 長城, 光州 등지에서 문호를 열었다.

김천리(金天利)는 밀직부사(密直副使) 벼슬을 지냈고, 아드님 김 무(金務)는 제용소감(濟用少監)이니, 두 아들을 두어 김탄지(金坦之)는 평시서령(平市署令)을 지내고, 김숭지(金崇之)는 목청전전직(穆淸殿典籍)을 지냈고, 평시서령후로 김수항(金秀沆)은 담양부사를 김수변(金秀汴)은 첨사(僉使) 벼슬을 지내니, 자손들이 富川, 瑞川, 始興, 保寧, 洪城, 安東, 醴泉, 扶餘 등지에 산재해 살고 있으니, 또 일파는 김숭지(金崇之)후로 김효로(金孝盧:聾叟)는 安東禮安의 입향조이니, 이후로 크게 문호가 열려 일명 예안파(禮安派)라 부른다. 아드님 김연(金緣:雲巖)은 강원감사를 지내 문명을 떨쳤고, 아우 김 유(金 綏:濯淸亭)는 문행이 있고, 탁청정은 문화재로 유명하며, 4대 명필 한호(韓濩:石峰)가 쓴 현판이 전해진다.

운암의 아들에 김부필(金富弼:後彫堂)은 退溪의 명망 높은 제자로 퇴계와 같은 문순(文純)의 시호를 받았고 김부의(金富儀:挹淸亭)도 退溪의 문도로 璇璣玉衡을 만들었으며 탁청정의 아들에 김부인(金富仁:山南)은 兵使로 김부신(金富信:養正堂)과 김부륜(金富倫:雪月堂)등 5종반 모두 李退溪선생의 고제자이다. 정한강(鄭寒岡)이 <烏川一里無非君子>라고 하여 君子里라는 지명이 유래되었다.

후손에 김해(金垓:近始齋)는 임진란에 창의하여 慶尙左道義兵大將으로 추대되어 전과를 올렸고 김영(金영:溪巖)은 光海君이 폐위되자 不事二君의 節義를 지켜 文貞의 시호를 받았다. 良簡公 이후 3대에 걸친 高麗시대의 호적과, 그후로 한 대도 빠지지않고 교지, 첩지등의 고문서를 잘 보관하고 있어 보물로 지정되어 있으며 문화재단지로 조성되어있다. 후손들은 禮安을 비롯하여 安東, 醴泉, 英陽, 義城등지로 세거하고있다.

김 규(金 珪:郎將公)의 후예에 김지보(金之寶)는 대사성을 지냈고, 손자인 김한로(金漢老)는 예문관대제학으로 광산군에 봉군되었다. 양년대군의 장인이다. 김덕령(金德齡:忠壯公)은 임진왜란 평정에 큰 전공을 세우고, 익호장군(翼虎將軍)이란 호칭으로 용맹을 떨쳤다.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누명으로 29세의 젊은 나이로 웅지도 펴지 못하고, 옥사하였다. 형 김덕보(金德普)와 사촌 김덕휴(金德休)도 임진란에 순절하였다. 후손은 光州, 潭陽, 高興, 長城, 和順, 寶城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김 영(金 英)의 벼슬은 사온서직장(司醞署直長)으로 김소(金遡)는 이조참판이요, 김청(金廳)은 지중추부사로 희정공(僖靖公)의 시호를 받았고, 五蒙의 5형제가 모두 문명을 떨치니, 그 가운데 김예몽(金禮蒙:文敬公)은 예조판서를 지냈으며, 조선조의 명신으로 추앙받았다. 예문관 제학 김성원(金性源)의 아들 八文이 모두 재주와 문명을 떨쳤는데, 김철문(金綴文), 김말문(金末文), 김내문(金乃文)이 특히 학문이 뛰어나 크게 현달하였다. 중종조에 김구(金絿:自菴,文懿公)는 己卯名賢, 삼암(三菴~趙光祖, 金淨, 金絿)中의 한분으로 조선조 4대 명필(仁壽體)로 높이 평가 된다. 김종제(金宗悌)는 한성부윤이요, 김대덕(金大德:蘇峰)은 참판으로 국난평정에 유공하였고, 김강(金綱:宜菴)은 홍문관제학, 김신(金紳)은 황해감사 등 그 외에도 많은 유현을 배출하여 5蒙8文家의 명성을 높였다. 후손은 華城, 忠州, 禮山, 洪城, 驪州, 槐山등지에 세거하고 있다.

이상과 같이 일일이 열거는 못하더라도 光山金氏의 인맥을 약술하였는데, 다시 요약하여 보면 김알지(金閼智:大輔公)를 연원으로 하고, 신라왕자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우리 민족사의 성씨로서는 가장 오래 된 2천년을 연면(連綿)하게 계통을 이어왔고 3世 佶이 고려조 건국공신으로 등장한 이래 전후기를 통하여 많은 명신들이 민족 통일의 촉진, 문화발전, 외침의 격퇴 등에 많은 역할을 담당하여 왔으며, 朝鮮朝에서도 도덕과 학행이 뛰어난 분들이 많이 나와서 유학의 대통을 계승하고 나아가서는 예학(禮學)의 태두로서 조선사회의 생활순화에 공헌하는 동시에 많은 유현들이 나와 이 나라 학문발전에 전력을 다해 왔다는 점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에도 나라를 지키다가 순절분사한 선비와 왕의 난정에 간하면서 낙향까지 하면서도 지조를 지킨 선비가 많았고, 국치를 당하여 자결로써 지조를 지키는가 하면, 한편으로 효도와 열행이 뛰어난 분이 많았으니, 아래에 시대별, 역할별로 그 인명을 상세히 밝히고자 한다.


*항렬표(行列表)*



30세  31세 32세 33세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42세 43세

 萬○  鎭○ ○澤 相○  箕○ 在○  ○鉉 永○ ○洙  容○ ○中  善○  ○淳 東○

 

44세 45세 46세 47세 48세 49세 50세 51세 52세 53세 54세 55세 56세 57세

○煥  奎○ ○鏞 淵○  ○植  炯○ ○坤 銖○ ○洪  種○ ○憲  重○ ○欽  泰○


*역대 주요 인물*

 ▲고려조

- 功臣

金 佶: 高麗 王建 太祖가 後三國을 統一할때의 功臣으로 三重大匡司空에 이르렀다

金 深: 三重大匡 都僉議中贊 判典理司事 化平府院君으로 協輔功臣이 되었고, 征東省事도 攝行하였으며, 諡號는 忠肅이다.

金都卓: 千牛衛 海領別將으로 推誠翊戴功臣이다.

金興祖: 軍器監으로 紅巾賊란 때 왕을 扈從 한 功臣

金元命: 輸誠奮義功臣으로 三司左使上護軍이다.


- 門下侍中

金良鑑: 文宗朝에 太僕卿으로 宋나라에 謝恩使로 다녀올 때 性理學을 傳授하고, 太廟와 太學의 制度를 模寫하여 가져와

            東方理學의 宗師가 되었고, 벼슬은 守太保와 門下侍中監修國史에 이르렀으며, 諡號는 文安이다.

金若溫: 守太傅 門下侍中 判戶部事이고, 諡號는 思靖

金台鉉: 三重大匡 門下侍中 修文館 大提學겸 典理司事를 지냈으며, 諡號는 文正이다.

金 流: 門下侍中과 修文殿太學士를 지냈다.

金石堅: 三司右使 上護軍과 判司宰寺事 都僉議右政丞이다.

金之淑: 都僉議中贊 上護軍이고, 諡號는 匡節이다.

金 粹: 評議右政丞이고, 海陽君에 封해졌다.


- 平章事

金 策: 左僕射,翰林學士,平章事였고, 시호는 文貞

金廷俊: 守司徒 門下侍郞 平章事이다

金良鑑: 門下侍中편 참조

金元義: 門下平章事 上護軍이며, 諡號는 景簡이다.

金 祉: 門下侍郞 平章事 上將軍이다.

金若溫: 門下侍中편 참조


- 左僕射

金 峻: 三重大匡 左僕射이다.


- 判三司使, 三司使

金義元: 戶部尙書로 三司使를 겸하였고, 檢校太子太師를 더하였으며 諡號는 忠貞이다.

金周鼎: 都僉議司事 寶文閣太學士 同修國史 判三司事와 大將軍으로 麗元聯合軍副元帥를 지냈고, 諡號는 文肅이다.

金 璉: 僉議侍郞 贊成事와 判 版圖司事를 歷任하였고 慶尙道 都指揮使로 東征할 戰艦製造의 監督官을 지냈으며, 諡號는

         良簡이다.

金 鍊: 守太尉 參知政事 吏部尙書 判三司事이다.

金承嗣: 三司左使 兵馬都元帥이다.

金續命: 三司右使 僉議評理이고, 諡號는 忠簡이다.


- 大提學

金 稹: 政堂文學 藝文館 大提學과 知春秋館事上護軍을 겸하였고, 知貢擧로 많은 人才를 登用하였으며, 諡號는 章榮이다.

金光載: 忠穆王의 師傅로 藝文館 大提學과 三司右使 겸 典理判書이며, 諡號는 文簡이다.


- 封君

金 深: 化平府院君에 封해졌다

金 ?: 密直副使로 光山君에 封해졌다

金光轍: 三重大匡 密直司事로 化平君에 封해졌으며, 諡號는 文敏이다.

金石堅: 化平府院君에 封해졌다.

金仁沇: 尙書로 光山君에 封해졌다.

金仁衍: 三重大匡 都僉議 贊成事로 光山君에 封해졌으며, 諡號는 敬烈이다.

金懷祖: 版圖判書이고, 海陽君에 封해졌다.

金 粹: 海陽君에 封해졌다.

金瑞南: 參知政事이고, 光山君에 封해졌다.

金 鼎: 重大匡이고, 光城君에 封해졌다.


- 典書와 判書

金承魯: 禮曹判書

金允臧: 版圖判書 密直副使

金光利: 典理判書

金安利: 版圖判書

金仁雨: 典理判書

金南雨: 工曹典書

金祖衎: 版圖判書


- 武將(上護軍, 上將軍, 大將軍)

金承晋:高麗後期의 上護軍

金士元: 三重大匡 僉議侍郞 贊成事 上護軍이고, 諡號는 貞景이다.

金宗衍: 同知密直司事겸 神虎衛上將軍이다.

金 精: 密直副使 上護軍이다.

金天利: 密直副使 上護軍이다.

金甲雨: 千牛衛 大將軍으로 明나라 皇太子의 千秋節에 使節로 다녀왔다.


- 從夫職

卞韓國大夫人高氏: 金須의 夫人으로 102歲의 享壽를 누린 節婦慈母로 아들은 門下侍中으로 榮達하였다

開城郡夫人王氏: 金台鉉의 夫人으로 夫君과 아들4兄弟가 모두 出仕하여 平生토록 國祿으로 福을 누렸다.

肅愼宅主延安李氏: 光城君(鼎)의 夫人이다. 아들3兄弟가 모두 文科에 급제함으로써 肅愼宅主로 封해지다.


- 儒賢

金光中: 秘書監이다.

金大鱗: 禮賓卿과 門下侍郞 平章事에 증직

金 須: 靈光副使로 三別抄亂에 討伐軍을 指揮하다가 濟州에서 殉節하니 門下侍中 參知政事로 追贈 金 珥: 黃臺典誥이다.

金仲幹: 同知密直司事이다.

金英利: 判軍器監事, 文貞公 申賢의 門人이다.

金德鳳: 左使郞中 寶文署司議이다.

金群濟: 寶文閣提學이다.

金胤祖: 濟州入島祖이다.

金 遡: 成均館司成 겸 宗學博士이다.


- 科宦

金光世: 神虎衛 中郞將이다.

金光存: 興威衛 別將同正이다

金 珪: 郞將同正이다.

金光軾: 摠部議郞이다.

金光輅: 嘉安府錄事이다.


- 節臣 및 遺臣

金宗衍: 李成桂를 살해하려다 모사가 누설되어 고문 끝 에 조리돌림의 刑을 받다.

金子進: 禁衛司正으로 高麗가 망하자 隱居하다

金成雨: 都萬戶겸 全羅,忠淸 兩湖招討使, 高麗가 망하자 殉國하다.

金承吉: 咸從縣令으로 高麗가 망하자 殉節하다.

金 維: 中領郞將, 高麗가 망하자 隱居不仕하다

金五行: 號 梅隱, 不事二君의 節義로 隱居不仕하다

金若時: 直提學이며, 杜門洞 72賢 中 1人이다


- 蒙諡

金 策: 文貞公

金良鑑: 文安公

金若溫: 思靖公

金義元: 忠貞公

金元義: 景簡公

金 璉: 良簡公

金周鼎: 文肅公

金之淑: 匡節公

金士元: 貞景公

金台鉉: 文正公

金仁沇: 敬烈公

金 深: 忠肅公

金光轍: 文敏公

金 稹: 章榮公

金光載: 文簡公

金續命; 忠簡公


▲조선조

- 文廟配享

金長生 (1548~1631): 號 沙溪, 諡 文元, 儒學과 禮學의宗匠이며, 東國18賢中 한분으로 疑禮喪禮備要등 많은 著書와 門下에

                               많은 名賢을 배출하여 畿湖學派의 領首가 되었다.

金 集 (1574~1656) 號 愼獨齋, 諡 文敬, 道學과 禮學의 宗師로 東國18賢中 한분으로서 成德君子로 높이 稱頌 받았다.


- 宗廟配享

金 集 文廟配享, 經筵, 蒙諡편 참조, 孝宗廟庭

金萬基 (1633~1687) 號 瑞石 諡 文忠, 領敦寧府事이고, 光城府院君이다. 顯宗廟庭

金萬重 (1637~1692) 號 西浦 諡 文孝, ‘九雲夢’ ,謝氏南征記’ 등 한글소설 작가로 명망이 높다. 肅宗廟庭, 不祧位편 참조


- 王妃

仁敬王后(肅宗元妃) 光城府院君, 金萬基의 따님이다. 陵寢은 西五陵(高陽市) 翼陵이다.


- 兩館大提學

金益熙 (1610~1656) 號 滄洲 , 諡 文貞, 吏.刑曹判書와 大司憲

金萬基 宗廟配享, 登壇편 참조

金萬重 宗廟配享편 참조, 孝子 旌閭

金鎭圭 (1658~1716) 號 竹泉, 諡 文淸, 肅宗朝에禮曹判書 金陽澤 相臣편 참조

金尙鉉 (1811~1890) 號 經臺, 諡 文獻, 高宗朝에 判義禁府事

金永壽 (1829~1899) 號 荷亭, 諡 文獻, 高宗朝에 侍講院貳師를 지내고, 輔國에 陞資됨


- 淸白吏

金若恒 號 惕若齋, 判典校寺事로 明나라에 보내는 賀正表 관계로 天子의 노여움을 사서 中國雲南省에 유배되었다. 封君편 참조

金謙光 (1419~1490) 號 西亭, 諡 恭安, 上試官으로 많은 人才를 등용, 封君, 功臣, 蒙諡, 左參贊편 참조

金 鎧 (1504~1569) 號 獨松亭, 明宗朝에 戶,刑曹判書, 知敦寧府事

金長生 文廟配享,不祧位,蒙諡,經筵편 참조


- 湖堂

金 絿 (1488~1534) 號 自庵, 諡 文懿, 己卯名賢중 1人이며, 4大 名筆中의 한 분, 經筵, 蒙諡편 참조 金質忠 明宗朝에 佐郞을 지내고, 知製敎

金繼輝 (1526~1582) 號 黃岡, 宣祖朝의 大司憲과 大司諫등 淸宦 歷任


- 不遷位

金伯謙 (1428~1506) 功臣,封君,蒙諡편 참조

金克成 相臣,功臣,府院君,蒙諡편 참조

金國光 相臣,功臣,府院君편 참조

金謙光 淸白吏,功臣,封君,左參贊,蒙諡편 참조

金仁慶 尉, 副尉편 참조

金長生 文廟, 宗廟, 淸白吏, 蒙諡, 經筵편 참조

金 集 文廟, 宗廟, 蒙諡, 經筵편 참조

金益兼 (1615~1637) 諡 忠正, 丙子胡亂 때 江華島에서 殉節, 蒙諡편 참조

金萬基 宗廟, 大提學, 登壇, 府院君, 蒙諡편 참조

金萬重 宗廟, 大提學, 蒙諡편 참조

金鎭商 左參贊편 참조

金春澤 (1670~1717) 號 北軒, 封君, 蒙諡편 참조

金雲澤 (1673~1722) 號 白雲軒, 蒙諡, 參判편 참조


- 府院君, 封君

金國光 光山府院君, 相臣, 功臣편 참조

金克成 光城府院君, 相臣, 功臣, 蒙諡편 참조

金萬基 光城府院君, 宗廟, 大提學, 不祧位, 登壇蒙諡편 참조

金若恒 光山君, 淸白吏편 참조

金漢老 光山君, 判書편 참조

金繼志 光城君, 判書편 참조

金伯謙 光原君, 功臣편 참조

金謙光 光城君, 淸白吏, 不祧位, 功臣, 蒙諡편 참조

金克忸 光原君, 大司憲, 大司諫 蒙諡, 經筵편 참조

金克핍 光嶽君, 左贊成편 참조

金益勳 光南君, 登壇, 功臣, 蒙諡편 참조

金鎭龜 光恩君, 登壇, 判書편 참조

金春澤 光寧君, 不祧位편 참조

金斗秋 (1724~1769) 光安君, 號 復齋, 永川郡守로 善政을 폄


- 蒙諡

金若時 忠定, 高麗朝 節臣편 참조

金 廳 僖靖, 功臣편 참조

金禮蒙 文敬, 判書, 大司憲, 經筵, 功臣편 참조

金伯謙 襄胡, 功臣, 封君, 不位편 참조

金克成 忠貞, 相臣, 功臣, 府院君, 不位편 참조

金謙光 恭安, 淸白吏, 功臣, 左參贊, 不位, 封君편 참조

金 沔 莊悼, 功臣편 참조

金礪石 忠穆, 判書, 經筵편 참조

金克핍 平靖, 左贊成, 經筵, 封君편 참조

金富弼 文純, 儒賢편 참조

金 絿 文懿, 湖堂, 經筵, 書畵편 참조

金 령 文貞, 儒賢편 참조

金萬壽 莊襄, 義兵大將편 참조

金長生 文元, 文廟, 淸白吏, 位, 經筵편 참조

金得男 忠毅, 倡義편 참조

金 集 文敬, 文廟, 宗廟, 不位, 經筵편 참조

金宇亨 貞惠, 判書, 經筵편 참조

金益熙 文貞, 判書, 文衡편 참조

金益兼 忠正, 不祧位편 참조

金益勳 忠獻, 登壇, 封君, 功臣편 참조

金萬基 文忠, 宗廟, 大提學, 功臣, 登壇, 不位, 封君편참조

金萬重 文孝, 宗廟, 大提學, 不位편 참조

金德齡 忠壯, 義兵大將편 참조

金鎭龜 景獻, 登壇, 判書, 封君편 참조

金鎭圭 文淸, 大提學편 참조

金春澤 忠文, 不位, 封君편 참조

金普澤 翼獻, 觀察使편 참조

金雲澤 忠貞, 不位, 參判편 참조

金元澤 孝靖, 漢城判尹편 참조

金陽澤 文簡, 相臣, 大提學편 참조

金相福 文憲, 相臣편 참조

金相岳 文簡, 儒賢편 참조

金相休 文簡, 參贊편 참조

金 憙 孝簡, 相臣편 참조

金箕性 孝憲, 尉, 副尉편 참조

金箕殷 淸獻, 判書편 참조

金箕錫 貞武, 登壇편 참조

金在昌 貞簡, 判書편 참조

金在顯 孝文, 判書편 참조

金尙鉉 文獻, 大提學편 참조

金洛鉉 文敬, 經筵편 참조

金輔鉉 文忠, 判書편 참조

金永壽 文獻, 大提學편 참조

金永穆 文憲, 判書편 참조


- 登壇(어영대장, 훈련대장)

金益勳 (1619~1689) 諡 忠獻, 肅宗朝의 御營大將, 封君, 功臣,蒙諡편 참조

金萬基 宗廟配享, 大提學, 不祧位,功臣편 참조, 肅宗朝의 訓練大將

金鎭龜 (1651~1704) 號 晩求窩, 諡 景獻, 肅宗朝의 訓練大將, 封君편 참조

金箕錫 (1828~1890) 號 藕汀, 諡 貞武, 高宗朝의 御營大將, 蒙諡편 참조


- 經筵官

金禮蒙 世祖朝의 集賢殿 副提學

金礪石 世祖朝의 藝文館 檢閱

金克핍 中宗朝의 左贊成

金綴文 中宗朝의 弘文館 副應敎

金乃文 中宗朝의 司憲府 掌令

金 絿 中宗朝의 弘文館 直提學

金 鎧 明宗朝의 敦寧府事

金長生 仁祖朝의 司憲府 執義

金宇亨 孝宗朝의 弘文館 校理

金 集 仁祖朝의 司憲府 大司憲

金正묵 (1739~1799) 號 過齋, 경학으로 천망, 正祖朝의 司憲府 持平

金洛鉉 (1817~1892) 號 溪雲, 諡 文敬, 高宗朝의 司憲府大司憲


- 功臣

金 遡 世祖朝 原從功臣 3등

金 廳 世祖朝 原從功臣 2등

金禮蒙 世祖朝 原從功臣 2등

金德源 世祖朝 原從功臣 2등

金 沔 世祖朝 敵愾功臣 2등

金伯謙 世祖朝 敵愾功臣 2등

金國光 世祖朝 敵愾功臣 2등, 成宗朝 佐理功臣1등

金性源 成宗朝 佐翼原從 2등

金謙光 成宗朝 佐理功臣 3등

金克成 中宗朝 靖國功臣 4등

金益勳 肅宗朝 保社功臣 3등

金萬基 肅宗朝 保社功臣 1등


- 科宦


相臣(正一品)(상신:정1품)

金國光 (1415~1480) 號 瑞石, 經國大典 집대성, 成宗朝의 左議政, 府院君, 不祧位, 功臣편 참조

金克成 (1474~1540) 號 靑蘿, 諡 忠貞, 中宗朝의 右議政, 府院君,不祧位,蒙諡편 참조

金陽澤 (1712~1776) 號 健菴, 諡 文簡, 英祖朝의 領議政大提學편 참조

金相福 (1714~1782) 號 稷下, 諡 文獻, 英祖朝의 領議政

金 憙 (1729~1800) 號 芹窩, 諡 孝簡, 正祖朝의 右議政


議政府 左贊成 (의정부좌찬성:종1품)

金克핍 中宗朝, 經筵,封君편 참조

金明胤 中宗朝

金 감 中宗朝


議政府 左參贊 (의정부좌참찬:정2품)

金謙光 成宗朝,淸白吏,不祧位,蒙諡,封君편 참조

金一鏡 (1662~1924) 號 丫溪, 景宗朝 辛壬士禍에 連累되어 被禍

金鎭商 (1684~1755) 號 退漁子, 英祖朝

金相休 (1757~1827) 號 蕉泉, 諡 文簡, 純祖朝


六曺判書(육조판서:정2품)

金繼志 號 松谷, 太宗朝의 兵曹,回天大業의 功을 세웠다. 封君편 참조

金若采 太宗朝의 刑曹, 權門勢家의 私兵養成의 弊端을 禁하게 하는데 有功하였음. 大司憲편 참조

金 滓 太宗朝의 吏曹

金邁卿 朝鮮前期에 禮曹

金禮蒙 (1406~1469) 號 晩沙, 諡 文敬, 世祖朝에 工.禮曹判書로 八駿圖락을 著述함

金衷孫 朝鮮朝 前期에 禮曹

金漢老 太宗朝의 兵曹判書, 大提學, 讓寧大君의 장인, 封君편 참조

金漢龍 朝鮮前期의 兵曹

金礪石 (1445~1493) 號 心齋, 諡 忠穆, 成宗朝의 刑曹, 經筵官편 참조

金 鎧 (1504~1569) 號 獨松亭, 明宗朝의 戶.刑曹, 淸白吏經筵편 참조

金益熙 (1610~1656) 號 凔洲, 諡 文貞, 孝宗朝의 吏曹, 大提學편 참조

金宇亨 (1616~1694) 號 寄傲堂, 諡 貞惠, 肅宗朝의 工曹, 蒙諡, 經筵官편 참조

金鎭龜 (1651~1704) 號 晩求窩, 諡 景獻, 肅宗朝에 5曹判書를 역임, 登壇,封君편 참조

金堯鏡 (1673~1724) 朝鮮朝中期의 刑曹

金孝建 (1752~1815) 正祖朝의 刑曹

金箕殷 (1766~1843) 正祖朝의刑.吏曹,

金在昌 (1770~1849) 號 香圃, 諡 貞簡, 正祖朝의 吏曹

金在顯 (1808~1889) 號 薇西, 諡 孝文, 高宗朝의 吏曹

金壽鉉 (1825~1895) 高宗朝의 吏曹

金輔鉉 (1826~1882) 諡 文忠, 高宗朝에 判書로 在任중 壬午軍亂에 被禍

金九鉉 (1830~1901) 號 小溪, 高宗朝의 工曹

金永穆 (1835~1903) 諡 文憲, 高宗朝 蒙諡편 참조

金永哲 (1841~1923) 高宗朝에 刑.禮.吏曹

金文鉉 (1846~1899) 高宗朝의 禮曹


參判(참판:종2품)

金致恭 (1453~1534) 號 晩達亭, 中宗朝의 吏曹

金 瑚 世宗朝의 吏曹

金克愷 (1474~1544) 中宗朝의 禮曹

金弘胤 (1499~1569) 明宗朝의 戶曹,大司憲편 참조

金繼輝 (1526~1582) 號 黃岡, 宣祖朝의 刑.禮曹, 大司憲, 大司諫편 참조

金泰廷 (1541~1588) 宣祖朝의 刑曹

金止男 (1559~1631) 號 龍溪, 光海朝의 兵曹, 龍溪譜를 編著

金質幹 (1564~1621) 號 雙梧, 宣祖實錄 記注官. 光海朝의 吏曹

金大德 (1577~1639) 號 蘇峰, 仁祖朝의 刑曹參判이며, 國朝筆苑에 올랐다. 大司諫편 참조

金 槃 (1580~1640) 號 虛舟, 仁祖朝에 兵.吏曹, 大司憲, 大司諫편 참조

金萬埰 (1644~1715) 肅宗朝의 兵曹

金光胤 英祖朝의 兵曹

金啓煥 (1669~1738) 號 素巖, 純祖朝의 吏曹

金雲澤 (1673~1722) 肅宗朝의 戶曹, 不祧位, 蒙諡편 金元達 朝鮮中期의 刑曹

金相翊 (1721~1781) 號 弦菴, 英祖朝의吏曹

金箕象 (1744~1808) 일명은 斗象, 正祖朝의 戶曹

金夏材 (1745~1784) 正祖朝의 吏曹

金樂壽 (1779~1863) 哲宗朝의 吏曹

金台鉉 (1784~1860) 哲宗朝에 吏曹

金在田 (1785~1862) 憲宗朝의 吏曹

金在成 (1791~1870) 純祖朝의 戶曹

金曾鉉 (1796~1879) 高宗朝

金在容 高宗朝

金在殷 高宗朝의 兵曹

金在獻 (1799~1882) 高宗朝의 工曹

金公鉉 (1794~1849) 純祖朝

金在三 純祖朝의 刑曹

金佑鉉 (1800~1881) 哲宗朝의 戶曹

金琦鉉 (1808~1873) 高宗朝의 戶曹

金在珣 (1842~1906) 號 春山, 高宗朝의 內藏院卿

金疇鉉 (1844~1904) 韓末의 內部大臣

金永悳 (1859~1910) 韓末의 參이며 韓日合倂으로 自決

金珏鉉 (1866~1921) 韓末의 宮內府特進官

金翼鉉 高宗朝에 暗行御使를 거쳐 參判


參議(참의:정3품)

金仲勻 朝鮮朝 初期의 工曹

金義蒙 號 栗理齋, 世祖朝의 吏曹

金成輝 (1535~1629) 號 梧岡, 宣祖朝의 刑曹, 倡義, 儒賢편 참조

金運海 (1577~1647) 號 碧流, 李适亂때 扈從功臣, 仁祖朝의 宣傳官

金南傑 (1589~1656) 仁祖朝의 工曹

金翼八 顯宗朝의 兵曹

金 甄 (1627~1698) 號 孝友堂, 肅宗朝 大司憲편

金益炅 (1629~1675) 顯宗朝 吏,戶,禮,兵曹

金俊求 (1654~1746) 肅宗朝의 吏曹

金相勉 (1773~1859) 號 平菴, 哲宗朝의 刑曹

金箕晳 (1784~1859) 號 石河, 憲宗朝의 刑曹


大司憲(대사헌:종2품)

金若采 太宗朝, 判書편 참조

金禮蒙 世祖朝, 判書, 經筵,功臣편 참조

金克핍 (1472~1531) 中宗朝, 左贊成, 經筵, 封君편

金克愷 (1474~1544) 中宗朝, 經筵, 參判편 참조

金弘胤 (1499~1569) 中宗朝, 參判편 참조

金 鎧 (1504~1569) 明宗朝, 淸白吏,經筵, 判書편

金繼輝 (1526~1582) 宣祖朝, 大司憲, 大司諫편 참조

金 槃 (1580~1640) 號 虛舟, 仁祖朝, 參判, 大司諫, 參判편 참조

金汝鈺 (1596~1662) 號 薇山, 仁祖朝, 觀察使편 참조

金益熙 (1610~1656) 號 滄洲, 孝宗朝, 大提學, 判書편 참조

金益炅 (1629~1675) 顯宗朝, 參議편 참조

金洛鉉 (1817~1892) 號 溪雲, 高宗朝 經筵편 참조


大司諫(대사간:정3품)

金崇祖 號 西淸子, 中宗朝

金克忸 (1436~1496) 光原君, 成宗朝

金繼輝 明宗朝에 네 번 歷任, 參判, 大司憲편 참조

金 鑄 朝鮮朝中期

金質幹 光海朝

金大德 (1577~1639) 號 蘇蜂, 仁祖朝

金 槃 仁祖朝, 大司憲,參判편 참조

金相定 (1722~1788) 號 石堂, 英祖朝

金洛龍 (1777~1853)號 晩翠堂, 英祖朝

金和中 英祖朝

金基周 (1787~1859)-憲宗朝


大司成(대사성:정3품)

金成玉 太祖朝

金兪甫 太宗朝

金禮蒙 世祖朝, 經筵, 判書편 참조

金 감 中宗朝

金繼輝 明宗朝, 參判,大司憲,大司諫편 참조

金益熙 孝宗朝, 大提學, 判書편 참조


承政院 承旨(승정원 승지:정3품)

金性源 成宗朝에 右承旨를 거쳐 春秋館 編修官으로 東國輿地勝覽 편찬. 功臣편 참조

金綴文 中宗朝, 甲子士禍에 被禍, 經筵, 功臣편

金末文 (1469~1525) 中宗朝, 左承旨

金乃文 中宗朝, 司諫을 지냄. 經筵편 참조

金憲胤 (1497~1555) 號 思永堂, 中宗朝의 同副承旨

金世鼎 (1620~1676) 孝宗朝의 左承旨

金起八 朝鮮朝中期의 左承旨

金萬均 (1631~1675) 號 梨湖, 顯宗朝의 左副承旨

金應福 英祖朝의 承旨

金翊相 朝鮮中期의 承旨

金必大 朝鮮中期의 承旨

金弘錫 朝鮮中期의 承旨

金相戊 (1708~1786) 號 困菴, 正祖朝의 右副承旨

金孝秀 (1742~1808) 正祖朝의 承旨

金箕絢 (1799~1866) 高宗朝의 右副承旨

金在敬 (1791~1864) 號 拙齋, 哲宗朝의 右副承旨

金敬鉉 (1806~1854) 憲宗朝의 承旨

金儀表 (1809~1860) 號 正岩, 哲宗朝의 同副承旨

金永秀 (1818~1881) 號 警菴, 憲宗朝의 右承旨

金翼洙 (1830~1921) 韓末의 承旨

金永稷 (1831~1898) 高宗朝의 承旨

金永奭 (1837~1902) 高宗朝의 承旨

金永典 (1837~1910) 高宗朝의 左承旨

金亮鉉 (1838~1886) 高宗朝의 同副承旨

金永儀 (1854~1907) 號 春觀, 高宗朝承旨

金容元 (1854~1920) 韓末의 左副承旨

金弼洙 (1856~1890) 高宗朝의 承旨

金德洙 (1857~1916) 韓末의 左副承旨

金龜洙 (1859~1935) 號 西雲, 高宗朝의 同副承旨

金天洙 (1860~1911) 韓末의 承旨

金喜洙 (1861~1919) 韓末의 承旨


尉(위:종2품), 副尉(부위:정3품)

金仁慶 (1515~1583) 號 松月軒, 中宗 부마 光川尉,경빈박씨 작서의 변으로 流配되었다가 伸寃, 不祧位편 참조

金箕性 (1752~1811) 號 이吉軒, 諡 孝憲, 英祖의 駙馬光恩副尉


敦寧府 同知事(돈영부 동지사:종2품)

金叔老 朝鮮前期의 知中樞府事

金 廳 諡 僖靖, 世宗朝의 知中樞府事 功臣편 참조

金元祿 (1546~1627) 仁祖朝의 同知敦寧府事

金 悅 (1592~1663) 號 隱軒, 朝鮮朝 中期의 知中樞府事

金萬增 (1635~1720) 號 遯村, 顯宗朝의 知中樞府事

金尙鉉 (1643~1730) 肅宗朝의 知中樞府事

金自重 (1656~1686) 號 石潭, 張旅軒 문인, 肅宗朝의 判中樞府事

金天相 英祖朝의 知中樞府事

金益彩 朝鮮朝後期의 知中樞府事

金鎭東 (1683~1765) 英祖朝의知中樞府事

金得鉉 (1806~1885) 高宗朝의同知敦寧府事

金觀鉉 (1821~1890) 號 仁洞, 高宗朝 同知敦寧府事

金德鉉 (1826~1895) 高宗朝의 同知敦寧府事

金學洙 (1847~1907) 號 菊史, 高宗朝에 翰林知敦寧院使


敦寧府 都正(돈영부 도정:정3품)

金尙復 (1576~1661) 孝宗朝

金 弼 (1650~1721) 肅宗朝

金天澤 (1687~1758) 號 夢賢齋, 英祖朝, 正祖朝

金箕善 金箕燾 (1780~1863) 顯宗朝

金樂仁 (1786~1869) 朝鮮朝 後期

金在廷 朝鮮朝 後期

金在晋 (1790~1869) 純祖朝

金錫玄 (1799~1871) 朝鮮朝 後期

金在鶴 (1806~1900) 韓末에 蔭府使

金永宗 (1811~1884) 高宗朝

金致鉉 (1817~1895) 高宗朝

金浩鉉 (1819~1886) 高宗朝

金廷鉉 (1820~1890) 高宗朝

金五鉉 (1822~1903) 高宗朝

金肅鉉 (1826~1896) 高宗朝

金永祚 (1832~1894) 高宗朝


漢城判尹(한성판윤:정2품), 左右尹(좌우윤:종2품)

金乙珍 朝鮮朝 初期의 漢城右尹

金克怩 端宗朝의 漢城左尹

金宗悌 (1516~1584) 明宗朝의 漢城府尹

金元澤 (1683~1766) 號 四九齋, 諡 孝靖, 英祖朝의 漢城判尹

金相宇 (1780~1804) 純祖朝의 漢城判尹

金喆鉉 (1855~1931) 高宗朝의 漢城府判事

金永準 高宗朝의 漢城判尹


提學(제학:종2품)

金忠信 朝鮮朝 前期의 提學

金德源 號 慄齋, 文宗朝에 藝文館直提學. 功臣편 참조

金和澤 (1728~1776) 英祖朝의 副提學

金斗鉉 (1858~1924) 韓末에 奎章閣 副提學


掌隸院 判決事(장예원판결사:정3품)

金克謙 朝鮮朝 前期

金克恢 中宗朝

金景祺 朝鮮朝 中期


觀察使(관찰사:종2품)

金希善 朝鮮朝 初期, 江原

金 굉 (1470~1526) 中宗朝, 慶尙. 忠淸

金文發 朝鮮 初期, 黃海

金 緣 (1487~1544) 號 雲巖, 中宗朝, 江原

金自南 朝鮮朝, 前期, 黃海

金 浩 朝鮮朝, 中宗朝, 忠淸

金自知 朝鮮朝, 前期

金孝貞 太宗朝, 慶尙

金末文 (1469~1525)中宗朝, 黃海

金 紳 中宗朝, 黃海

金潁男 (1555~1617) 號 掃雪翁, 宣祖朝, 黃海

金存敬 (1569~1631) 號 竹溪, 宣祖朝, 江原

金汝鈺 (1596~1662) 號 薇山,孝宗朝,平安, 大司憲편 참조

金益炅 (1629~1675) 顯宗朝, 江原, 大司憲, 參議편 참조

金萬吉 (1645~1697) 肅宗朝, 江原, 全羅

金鎭玉 (1659~1736) 號 韞齋, 肅宗朝, 江原

金普澤 (1672~1717) 號 惕齋, 諡 翼獻,肅宗朝,蒙諡편참조

金祖澤 (1680~1730) 號 平齋, 肅宗朝, 全羅

金在淸 (1807~1855) 憲宗朝, 黃海

金稷鉉 (1840~1908) 高宗朝, 慶尙左道

金命洙 (1845~1916) 韓末, 全羅

金在豊 (1862~1907) 號 誠齋, 高宗朝, 江原


府尹(부윤:종2품)

金有章 朝鮮朝 前期, 廣州

金 純 號 抱月堂, 朝鮮 中期, 廣州

金在元 (1768~1833) 純祖朝, 義州


牧使(목사:정3품)

金信蒙 成宗朝 淮陽

金玉淵 朝鮮朝 前期, 晋州

金玉河 朝鮮朝 前期

金永寶 朝鮮朝 前期, 尙州

金漢相 朝鮮朝 前期, 尙州

金 거 朝鮮朝 前期, 安東都護府事

金錫瓚 朝鮮朝 前期, 慶州

金舜輔 朝鮮朝 前期

金 祚 朝鮮朝 中期, 定州

金允悌 (1501~1572) 號 沙村, 中宗朝, 羅州

金富仁 (1512~1584) 號 山南, 宣祖朝, 吉州, 定州, 晋州 金進山 朝鮮朝 中期, 濟州

金友誡 朝鮮朝 中期

金禹瑞 朝鮮朝 中期, 濟州

金德壽 朝鮮朝 中期

金 시 朝鮮朝 中期, 星州

金殷輝 (1517~1611) 宣祖朝, 光州

金公輝 (1550~1615) 宣祖朝, 坡州

金孝誠 (1585~1651) 號 靑坡, 仁祖朝, 淸州

金尙夏 (1625~1689) 號 海翁, 顯宗朝, 濟州

金 搢 光海朝, 定州

金鎭華 (1655~1714) 肅宗朝, 忠州

金相良 (1696~1776) 英祖朝, 黃州

金相說 (1707~1772) 英祖朝, 綾州

金箕憲 (1749~1816) 號 靜安齋, 純祖朝, 尙州

金胤鉉 (1825~1902) 號 謂維, 憲宗朝, 洪州

金永悳 (1859~1910) 韓末, 驪州


都摠府 都摠管(도총부 도총관:정2품), 副摠管(부총관:종2품)

金 閑 (1377~1448) 世宗朝, 中軍都摠府 副總管

金伯謙 (1428~1506) 成宗朝, 都摠府 摠管

金孝信 (1574~1627) 號 歸來亭, 仁祖朝 水軍節度使

金汝欽 (1632~1689) 肅宗朝의 五衛都摠府 副摠官

金相順 (1775~1840) 憲宗朝의 五衛都摠府 副摠管

金性洙 (1846~1897) 高宗朝의 五衛都摠管


內禁衛將(내금위장:종2품)

金希直 朝鮮朝 前期의 內禁衛將

金守禮 (1541~1607) 世祖朝의 內禁衛將

金石鈞 朝鮮中期의 內禁衛將

金 觀 (1594~1664) 孝宗朝의 五衛將

金宗挺 朝鮮朝 中期의 五衛將

金遂龍 朝鮮朝中期의 五衛將

金鎭衡 (1679~1735) 英祖朝의 五衛將

金聖澤 朝鮮朝 中期의 五衛將

金寶基 (1800~1865) 朝鮮朝後期의 五衛將

金相義 朝鮮朝後期의 五衛將

金相健 朝鮮朝後期의 五衛將

金在坤 朝鮮朝後期의 五衛將

金柱彩 韓末의 同知中樞府事겸 五衛將

金箕冕 (1816~1886) 號 湖史, 高宗朝의 副護軍 겸五衛將 金碩載 朝鮮朝中期의 五衛將

金永學 高宗朝의 五衛將

金永喆 (1836~1901) 號 心柁, 哲宗朝에 五衛將을 거쳐 內禁衛將

金命鉉 (1842~1894) 高宗朝의 內禁衛將

金永昌 (1851~1929) 高宗朝의 五衛將

金永斗 (1854~1914) 韓末의 五衛將

金容觀 (1856~1934) 號 石川, 韓末의 內禁衛將

金永田 (1864~1911) 韓末의 五衛將

金永河 韓末의 五衛將


義兵大將(의병대장=의병의 총수)

金萬壽 (1553~1607) 諡 莊襄, 黃海道에서 倡義하여 敵軍을 潰滅함

金 垓 (1555~1593) 號 近始齋, 壬辰亂에 慶尙左道에서 倡義하여 鄕兵日記를 남김

金德齡 (1568~1596) 諡 忠壯, 壬辰亂때 全羅道에서 倡義하여, 일명 翼虎將軍


兩大亂 倡義(양대란 창의)

① 壬辰倭亂(임진왜란)

金大民 號 묵菴, 晋州城싸움에서 殉節

金信民 再從兄 金大民과 함께 晋州城에서 殉節

金 繼 兄弟가 함께 倡義하여 海南에서 戰功

金麒壽 號 晩翁, 長城에서 倡義 有功

金德宇 號 良村, 長城에서 倡義 有功

金輔元 號 直方齋,晋州城에서 投身自決

金聲振 號 菊齋, 長城에서 戰死

金壽淵 號 錦隱, 아들 夢龍, 夢弼, 夢齡, 夢業 五父子가 殉節

金 緯 號 集義齋, 6兄弟가 같이 倡義

金弘宇 號 白谷, 長城에서 倡義하여 殉節

金光運 金千鎰 軍幕에서 戰功

金得宗 高敬命과 같이 錦山戰鬪에서 殉節

金敏善 倭敵격멸하다가 殉節

金時惕 壬辰에 倡義

金潤國 號 道川, 永川郡守로 軍糧米 보급

金 蘭 號 烟坡釣叟, 高敞에서 倡義

金千壽 百壽와 함께 兄 萬壽를 도와 할약

金復輝 漢城庶尹으로 御駕 扈從

金成輝 號 梧岡, 趙憲과 權慄陣中에軍糧米조달

金敬祖 (1558~1636) 號 退裕軒,翊衛司洗馬로 壬辰亂倡義

金 淳 奉事벼슬로 軍功

金 韞 元帥幕府의 輔佐官으로 有功

金義吉 奉事벼슬로 參戰하였다가 戰死

金殷輝 義兵을 募集하고 體察使로 有功

金 質 號 節齋, 鶴峰 金誠一과 紅衣將軍 郭再祐 휘하에서 軍功

金春男 倡義하여 殉節

金澤南 號 養亨齋, 忠武公 휘하에서 有功

金 珏 金山전투에서 高敬命 막하에서 활약

金 憲 錦山에서 趙憲과 함께 戰死

金 潔 號 任閒堂, 趙憲 막하에서 戰功

金膺生 號 묵隱, 錦山에서 趙憲과 함께戰死

金 鎰 申砬장군과 함께 忠州戰鬪에서 戰死

金伯熊 義兵整齊將으로 활약

金 溥 號 竹軒, 南原전투에서 戰死

金 溟 號 一心齋, 金溥의 弟로 외적에게 피살되자 妻도 자결하여 三綱旌閭를 받음

金夢成 李忠武公 군막에서 활약하다 전사

金彦勖 號 瑞石, 御駕扈從

金彦希 號 蒼淡, 長城에서 倡義

金基明 郡守로 幸州大捷과 晋州戰鬪에 有功

金得孝 號 慕齋, 注簿로 軍功을 세우고戰死

金 壽 미곶진 권관으로 활약

金忠國 號 靑岳, 趙憲막하에서 활약, 戰死

金致謜 錦山에서 殉節

金成遠 號 棲霞堂, 忠壯公 金德齡에게 武器공급

金德宥 號 湖菴, 閑山島戰鬪에서 殉節

金德弘 錦山전투에서 抗戰, 戰死

金德休 晋州전투에서 殉節

② 丙子胡亂(병자호란)

金得善 高敞에서 倡義

金汝瑚 高敞에서 倡義

金光繼 號 梅園, 安東에서 義兵將으로推戴

金光岳 號 野逸齋, 梅園公과 함께 擧義

金東立 潯河전투에서 戰死

金夢瑞 御駕를 扈從하고 斥和주장함

金 渫 號 棲竹軒, 注簿로 御駕扈從

金承善 義州전투에서 戰死

金汝聲 號 松窩, 沙溪의 명을 받아 義兵을 募軍

金汝重 號 晩悟, 御駕扈從

金汝振 號 竹沙, 沙溪의 명으로 軍糧米 調達

金元福 忠武公 金應河와 함께 戰死

金就砥 號 慕軒, 高敞에서 倡義

金南式 號 義村, 高敞에서 倡義

金南哲 高敞에서 倡義

金德鸞 廣州에서 殉節

金聲夏 號 守愚堂, 號召使인 沙溪幕下에서 활약

金 礎 梅園公과 함께 擧義

金 愼 判官으로 御駕扈從

金興胤 武官으로 黃海道에서 戰死

金光익 宣傳官으로 出戰하였다가 戰死信 號 海隱, 丁卯亂 때 江華로 御駕扈從

金自鑌 廣州에서 사로잡혀 慘禍

金漢一 號 琴亭, 鳳林大君이 審陽갈 때 翊衛司 洗馬로 陪行

金 현 號 華陽堂, 沙溪의 명을 받고 擧兵

金得男 號 梅竹軒, 철곶 僉使로서 王子를 江華로 陪行

金 墺 長興에서 赴義

金廷立 號 藍谷, 金化전투에서 戰功

金 築 許沙僉使로 軍糧米 調達에 有功

金成一 號 歲寒齋, 潭陽에서 軍功

金德普 號 楓巖, 高敞에서 倡義


儒賢(科宦에 屬한 儒賢은 謄載치 않음)

金 瞻 (1354~1418) 號 蓮溪, 雅樂을 교정하고 儀禮에 정통

金賢賚 司憲府 監察, 文章學行 卓異

金孟權 號 晩翠堂, 이지함과 이몽규 등 많은 명인문도 배출

金 閱 號 退村, 문장이 성취하여 氷玉亂稿 저술

金錫元 저작박사

金信蒙 희양부사, 五蒙中 한 분임

金順誠 (1429~1481) 文科, 서장관으로 중국을 다녀오고, 경국대전 개편에 참여

金景光 (1428~1490) 學行卓異 判校

金克羞 (1449~1481) 유일로 薦擧되어 經歷

金用石 (1453~1523) 號 潭庵, 佔畢齋의 門人, 小學童子로 칭송

金孝盧 (1454~1534) 號 聾叟, 操行이 卓異하여 鄕薦을 받음

金叔文 (1459~1508) 寬厚沈重

金 軾 己卯士禍시 금강11賢 중 한 분

金麒瑞 號 敦睦齋, 趙靜菴 門人,己卯士禍연루, 후학육성

金 禎 (1473~1515) 號 養正軒, 學行純篤

金克通 (1484~1553) 號 友齋, 성리학에 정통, 三通三秀士의 칭호

金世愚 (1486~1522)-적성현감, 전적을 지내고, 선정을 폄

金神童 (1486~1546) 己卯名賢 三菴과 함께 正論을 주장

金 綱 (1489~1555) 號 宜庵, 中宗朝의 經筵參贊官

金 綏 (1491~1555) 號 濯淸亭, 需雲雜方 저술

金克己 學問이 深奧

金廷彦 (1493~1555) 號 小岩, 河西 金麟厚와 도의교

金 紀 (1500~1533) 號 玉谷, 의정부 사인

金胤文 修撰校理 등 요직을 거친 才士

金彦거 (1503~1584) 號 漆溪, 玉堂에 뽑히고, 風詠亭을 지어 後進養成

金 胤 (1506~1571) 號 南溪, 문학과 행의로 추중

金彦球 (1507~ ? ) 號 雙碧堂, 학행돈독

金松命 學問高邁, 經世講論

金景熹 (1515~1575) 號 蘆溪, 醉石亭을 지어 후학 양성

金懿胤 (1515~1581) 號 市隱, 지평으로 徐敬德과 道義의 交

金富弼 (1516~1577) 號 後彫堂, 諡 文純, 李退溪 高弟로 道德과 學問高邁. 蒙諡편 참조

金彦璣 (1520~1587) 號 惟一齋, 門人이 數百이며, 安東儒學의 創導者로 칭송

金 ? (1522~1565) 號 灘叟, 仁宗實錄編纂

金富信 (1523~1566) 號 養正堂, 退溪門人

金富儀 (1525~1582) 號 挹淸亭, 易東書院 創建, 學問高邁

金成遠 (1525~1597) 號 棲霞, 孝行으로 陵參奉

金富倫 (1531~1598) 號 雪月堂, 退溪門人

金 淳 號 南溪, 亭子를 지어 經史를 講論하고 後學장勵

金麗源 成均進士, 조정암등 청진사류의 피화로 山林에 묻혀 學問硏磨

金仲文 號 誠心齋, 學問高邁

金處謙 號 六行堂, 學問이 성취, 鄕約을 지어 실천

金 脩 (1533~1601) 成均博士

金益淸 (1534~1585) 연천군수로 學行純篤

金山斗 (1537~1598) 號 盤石 栗谷門人

金 전 (1538~1575) 號 九峰, 退溪門人漢城別試學問高邁

金鳳瑞 (1539~1594) 號 退翁, 學行으로 薦擧

金公喜 (1540~1610) 號 芷川, 學問純篤

金得 (1545~1601) 號 道峰, 惟一齋의 門人, 壬辰亂倡義

金鯤變 (1541~1592) 號 瓏齋, 退溪 門人

金 圻 (1547~1603) 號 北厓, 退溪門人으로 退溪文集刊行에 有功, 壬辰亂에 倡義

金友仁 (1551~1591) 號 梅谷, 松江 鄭澈門人, 學行으로 士友推重

金得硏 (1555~1637) 號 葛峰,西厓 柳成龍의 門人, 壬辰亂에 倡義하여 義倉設置

金泰國 (1556~1624) 號 松고, 음직으로 군수, 청명강직

金德章 (1556~1605) 유학에 깊이 잠심함

金大器 (1557~1631) 號 晩德, 學問 순심

金 俔 (1557~1636) 號 梧月堂, 문학행의로 추앙

金 堈 (1558~1595) 號 雪厓, 學德高邁

金得石肅 (1561~1589) 號 晩翠軒,백담 구봉령 門人, 문장 학행이 순심

金期遠 (1561~ ? ) 學問高邁

金光道 (1563~1622) 號 東籬, 柳西厓 門人

金 坪 (1563~1617) 號 克齋, 명성이 높고, 五賢종사를 주청, 仁宗實錄 著述에 참여

金存畏 號 德岩, 經史講究, 學問高邁

金偉男 (1563~1618) 號 藥山, 牛溪 成渾문하에 수학

金東瞻 (1569~1633) 號 冠谷 學行卓異

金得礒 (1570~1625) 號 晴翠軒, 惟一齋의 門人

金光溥 (1591~1669) 號 五梅堂, 學問探究專念

金永承 (1579~1647) 號 鶴村, 潛心講究

金友伋 (1574~1643) 號 秋潭, 學問이 高邁

金大成 (1574~1656) 學問이 출중하여 成均館 典籍

金 현 (1574~1661) 號 華陽堂, 유학진작

金東準 (1575~1661) 號 鳳谷, 丙子亂에 御駕를 扈從하였고, 學問高邁

金振遠 (1575~1659) 經學과 孝行이 卓異하여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孝子의 旌閭를 받다.

金 령 (1577~1641) 號 溪巖, 諡 文貞, 光海朝 承政院記注官, 蒙諡편 참조

金震海 (1578~1635) 號 訥菴, 承政院 주서로 도학으로 推重

金義生 (1578~1654) 號 漁隱堂, 경전과 예학에 해박. 일명 漁隱處士

金 勛 (1580~1650) 號 龍湖, 性理學에 潛心

金 確 (1583~1665) 號 定止齋, 學問 潛心

金尙濂 (1584~1654) 號 梅窩, 적성현감, 학행으로 명성이 높음

金光實 (1585~1711) 號 溪厓, 鄭寒岡,張旅軒 門人

金光輔 (1587~1694) 號 龍門, 性理學에 潛心

金成一 (1593~1658) 號 歲寒齋, 丙子亂에 군공,學問高邁

金廷立 (1594~1638) 號 藍谷, 智, 仁, 勇을 겸비, 御營亞官으로 유공

金廷望 (1594~1656) 號 三六齋, 효우돈목, 효자정려, 學問高邁

金 檠 (1594~1632) 號 松隱, 喪禮備要圖 畵帖을 남김

金錫重 (1595~1636) 號 潛谷, 學問高邁

金坤寶 (1596~1646) 號 虎峰堂, 經學이 심오하여 도천되고 서예에도 능함

金廷憲 (1597~1637) 號 野狂 士林推重

金永聲 (1597~1676) 號 栢園 서예에 능하고, 송우암과 종유

金千老 號 拙菴, 性理學과 道學에 潛心

金榮後 (1601~1671) 號 圃翁 學行純篤

金重鼎 (1602~1689) 號 肯構堂, 제자백가서를 연마

金華俊 (1602~1644) 號 棠溪, 學問高邁, 世子 侍講院說書 겸 知製敎, 寶硯 下賜

金益烈 (1602~1665) 號 鶴洲, 學問高邁丙子亂때 군병모집

金耀亨 (1604~1644) 號 杜門子, 학행순독

金以良 號 斗菴 士林矜式

金晉鎔 (1605~1663) 학행순독, 제주유학, 진흥 공헌

金 규 (1606~1697) 號 豆溪, 經學으로 士林이 추중

金光源 (1607~1677) 號 石塘, 문하에 金世臣, 張遇一, 李惟樟 등 名士배출

金宇仁 (1608~1659) 號 濯溪, 문도100여인 배출, 濯溪同門錄이 있음

金東達 號 薇谷 學問高邁

金 鉋 號 靜肅齋, 文學行誼로 추중되어 後進장勵, 侍講院諮議로 王의 諮問에 응함

金耀立 (1611~1643) 號 堂西. 行誼篤實

金 石廉 (1612~1659) 號 墨齋, 學問 潛心

金坤瑞 (1613~1685) 號 桐谷, 경전에 該博 士林추중, 서예에 능함

金廷冕 (1614~1661) 號 花川 德行夙就

金輝斗 (1614~1674) 號 南澗, 志節淸高

金益兼 (1615~1637)-諡 忠正, 學問高邁, 不祧位, 蒙諡편 참조

金 愈 (1617~1688) 號 鹿溪, 經史博通

金 오 (1617~1676) 號 七梅堂, 成牛溪 李栗谷 문묘배향 주청

金輝世 (1618~1690) 號 松坡, 학행이 높아 士林추중

金彦瑀 號 淸遠亭, 學問 深奧

金 瑾 (1620~1701) 號 蔭梧堂, 尤巖 門人, 學問이 深奧

金 聲 (1620~1680) 號 川觀齋, 學問이 深奧하여, 일명 ‘皇明處士’로 推仰

金益廉 (1622~1694) 號 赤谷, 學問이 高邁하였고, 鍾城 부사를 지냄

金重亨 (1626~1679) 號 八詠堂, 愼獨齋의 門人, 學問高邁

金萬翼 (1629~1686) 號 逋齋, 同春堂 門人, 斯門卞破錄著述

金久榮 (1630~1704) 號 近古 宋尤菴 門人

金運商 (1630~1703) 號 南歸亭, 學行이 높아 積城현감으로 外補

金萬成 (1631~1680) 儒林의 추중한바 되어 강서현령으로 공적이 있음

金 총 (1633~1678) 號 迕軒, 司諫院掌令으로 試官을 지냄

金 鎰 (1637~1696) 號 退湖, 閔鼎重門人으로 道學君子

金萬埈 (1639~1700) 學問高邁, 순창군수 역임

金益華 (1640~1683) 학덕이 높고, 선정을 펴, 송덕비

金世煥 (1640~1703) 號 肯構堂, 경사박통

金在精 (1641~1699) 號 雲城 宋尤菴 門人

金 화 (1644~1718) 號 東里,性理學에潛心

金純義 (1645~1714) 號 果軒, 博學하고 事理에 正大

金萬年 (1650~1693) 남행주서로 명성이 높음

金 鏞 (1657~1732) 號 草堂, 학행으로 중망

金光洙 (1661~1728) 號 拙齋 文學과 행의로 推重

金知光 (1663~1725) 號 東磯 學行純篤

金 岱 (1665~1687) 號 士宗, 經書.禮記博通

金九齡 (1669~1729) 치적이 현저, 암행어사 尹鳳朝가 추천 포상

金天煥 (1970~1742) 號 德軒, 道德과 行誼로 士林推重

金萬墩 (1672~1735) 號 聾瞽堂, 奉先하는 정성이 지극, 永慕錄 저술

金致章 (1673~1751) 號 拙窩, 道德學行 純篤

金鎭岳 (1673~1750) 號 蘭谷, 蘭谷詩稿가 있음

金廷鳳 (1678~1749) 平安道 掌試都事 춘추관 記注官

金會豊 (1678~1737) 學問高邁

金泰運 (1679~1754) 號 雲亭, 문장과 조행으로 명망이 높아 후학을 장려하다

金彦輔 (1680~1752) 號 松皐 호남 장시관

金光國 (1682~1755) 號 六忍齋, 학식이 해박

金延年 (1683~1776) 號 華山, 예학 고명, 도백 추천

金光鉉 (1685~1772) 號 三思窩, 學問深奧

金東俊 (1685~1732) 號 適菴, 문필 여류

金萬瑩 (1687~1772) 號 四八齋, 서예, 시문推重

金漢壁 (1636~1688) 李南嶽 門人,山陰縣監

金智元 (1688~1767) 號 水雲齋, 學問高邁

金遇喆 (1689~1774) 號 立志堂, 承政院 注書

金尙埏 (1689~1774) 號 棄棄齋, 學問이 高明

金 脩 (1690~1749) 天稟 淸秀하고, 學問高邁하여 황해도사를 지냄

金致河 (1691~1743) 英祖朝, 都摠部都事

金斗龍 (1692~1742) 號 樂善堂, 學行著名

金得瑞 (1694~1763) 號 聲湖, 學問高邁

金光虎 (1695~1765) 학행으로 推重되었고, 선전관

金簡材 (1695~1760) 號 牛灣 학행으로 推重

金命元 (1696~1754) 號 蒙菴, 學問과 行誼 敦篤

金 璿 (1696~ ? ) 學問이 高邁하여 承文院 正字

金世柱 (1698~1755) 號 梅溪, 학행 탁월

金復壽 (1700~1798) 號 石浦, 聰明穎悟, 石浦亭을 지어, 학문에 심취

金偉材 (1700~1776) 號 迷菴, 도학으로 推重. 우로은전으로 첨지중추부사

金宗台 (1701~1750) 학문이 고매하여 서장관으로 중국을 다녀옴.

金善材 (1702~1768) 號 西澗, 도학이 높아 각급수령역임 金天祿 (1706~1765) 號 觀瀾齋, 학행순심

金元鐸 (1709~1763) 號 洛西, 學問高邁

金命吉 (1709~1756) 號 松澗散人, 문장과 덕행으로 명성이 높았다

金致龍 (1709~1779) 號 晩村, 經史耽讀

金 鈗 (1710~1771) 號 三友齋, 문장학행으로 推重

金敏材 (1710~1772) 號 寶稼齋, 학행으로 임실현감

金景洙 (1712~1750) 號 鳳岡, 학문이 대성하여 명성높음

金命獻 (1714~1795) 好學能文하여 81세에 文科에 應試하여 濟州 大靜縣監을 지냄

金尙賓 학문이 심오하여 成均司藝로 사신 수행

金 翌 유일재 金彦璣의 門人,문장과 학행 추중

金得麟 (1715~1768) 號 栢林菴, 여러 고을 수령을 역임하여 치적이 많음

金相直 (1716~1773) 號 치齋, 진사시를 거쳐 밀양부사를 지냄

金相肅 (1717~1792) 號 坏窩, 경학필법으로 추중

金弘輔 (1720~1791) 號 杏陰, 杏陰遺稿 저술

金相定 (1722~1788) 號 石堂, 石堂遺稿 6권 저술

金鴻九 (1722~1782) 號 龍峯, 학행이 높아 후학장려

金顯和 (1724~1794) 號 松樓, 蔭德으로 同知中樞府事

金相岳 (1724~1815) 號 韋菴, 學問高邁 蒙諡편 참조

金斗秋 (1724~1769) 號 復齋, 經史博洽

金範九 (1725~1813) 號 晩林, 大司諫 柳正源 門人

金景游 (1726~1790) 號 後村, 禮書와 經學을 강구하여 사례정변 저술

金說澤 (1727~1799) 號 浪翁, 學行醇心

金正協 (1728~1792) 號 花灘, 卓有學行

金糸夾 (1728~1801) 號 芝厓, 경전에 해박

金 寧 (1728~1788) 號 實菴, 經學經世

金光濟 (1728~1815) 號 眉山, 學問敦篤

金必宜 (1729~1789) 號 尊道窩, 學問純篤

金象九 (1731~1802) 號 醉石堂, 學問高邁

金 逈 學問高邁, 세칭 鳴岩處士라 칭함

金聖翼 (1733~1769) 號 洛窩, 文學成就.端雅溫恭

金斗烈 (1735~1781) 號 藝園, 篆書.籒書에 능함

金聲應 (1737~1787) 號 槃窩, 學問高邁 都事역임

金八煥 (1738~1788) 號 晩悟, 心性四端七情論저술

金長源 (1738~1820) 號 雲棲, 性理說 3권 저술

金壽洛 (1742~1815) 號 洛庵, 文詞儒雅

金禹澤 (1743~1820) 號 九峯, 효우와 예학으로, 四禮義 32편 저술

金相謙 (1744~1794) 號 後窩, 學問德行으로 벼슬

金弘奎 (1751~1832) 號 金華, 性度溫雅

金履九 (1753~1809) 號 山西, 學行醇心

金是瓚 (1754~1831) 號 一一齋, 문학으로 명망이 높아 烏川世蹟을 저술

金在範 (1757~1824) 號 梅山, 學問高邁, 韓山郡守

金星說 (1760~1833) 號 晩悟軒, 제자백가서와 經史에 밝아 사림추앙

金性溵 (1765~1830) 號 引逸亭, 學問이 高邁하여 士林이 推仰

金錫臣 (1765~1842) 號 樂樂齋,문학행의로 명망 높음

金洪運 문장과 학행으로 추중

金箕書 (1766~1822) 號 竹下, 학업문장이 뛰어나 조야가 추중

金道宗 (1767~1837) 號 中洛堂, 學問醇篤

金尙欽 (1770~1846) 號 蘿翁, 학문이 고매하여 문하에 영의정 趙斗淳을 배출

金 涑 (1771~1837) 號 道峰, 宋煥箕 門人

金基周 (1772~1836) 號 晦軒, 性潭 宋煥箕문인, 경사박통

金性儒 (1773~1847) 號 潭西, 學契創設, 經國濟世

金在兢 (1773~1852) 號 石樵, 石樵遺稿 8권 저술

金星觀 (1776~1854) 號 龜山, 경사에 해박

金道孫 (1775~1837) 號 素山, 學德行誼로 士林推仰

金莘望 우암 송시열 門人, 학행이 현저, 사림 추중

金道直 (1781~1850) 號 野溪, 博通經學

金元鎭 (1782~1830) 중광생원과에 합격, 學問高邁

金在赫 (1793~1875) 號 忍庵, 학문이 해박, 行誼篤實

金道赫 (1794~1839) 號 巖塘, 璿璣玉衡을 만들고, 五行心性圖 저술

金箕烈 (1801~1860) 號 龍湖, 梅山 洪直弼 門人

金澐敎 (1803~1885) 號 碧棲, 六經通達,百家沈潛

金道明 (1803~1872) 號 畏菴, 呂氏향약을 만들다.

金震休 (1807~1883) 號 鈍菴, 찰방 저서로 鈍人隨錄

金應奎 (1807~1867) 號 霞棲, 學問과 行誼 敦篤

金在燦 (1811~1888) 號 西溪, 學問이 정수하여 士林이 推重, 著書가 많음.

金鳳鉉 (1817~1881) 號 憂軒, 禮疑類選저술

金箕鳳 (1818~1901) 號 東嶠, 禮學및 經史博通

金秉權 (1818~1865) 學問高邁, 많은 後學들이 推仰

金濟永 (1820~1896) 號 山泉齋, 학문이 높아 저서로 七百類集 30권 著述

金在浩 (1822~1876) 號 雲軒, 謙約有修

金斗鉉 (1822~1900) 號 溪軒, 博洽經史.見推士類

金在一 (1826~1898) 號 一夫, 易理에 정통, 經史에 밝아 많은 저서

金容愚 (1830~1900) 學問이 高邁하고, 經史에 밝음

金正欽 (1833~1919) 號 經齋, 文學醇深

金龍鉉 (1833~1896) 號 左庵, 학행으로 사우 推重

金箕倫 (1835~1901) 號 乙峰, 世稱 漢南甲士

金洛九 (1836~1897) 號 文溪, 經史博通

金 勳 (1836~1910) 號 東海, 學問高邁

金永廈 (1843~1893) 號 三樂堂, 學問高邁

金鳳相 (1844~1907) 號 晴梧, 退溪와 後彫堂의 文純謚號 是非를 변판

金箕燮 (1848~1901) 號 梅窩, 士林推重

金永植 (1849~1924) 號 重齋, 學行으로 명망이 높아 면암 최익현과 교류

金永相 (1854~1895) 號 栗山, 經學, 文藝로 사우추중

金稷洙 (1855~1907) 韓末의 秘書監丞

金大洙 (1856~1921) 號 石川,學行純篤

金奭相 (1857~1899) 號 小棠, 학구에 전심

金永圭 (1858~1927) 號 淵心堂, 동몽교관

金永冀 (1859~1907) 高宗朝의 秘書丞

金永胤 (1859~1937) 號 剡溪, 禮學에 밝음, 도산, 병산서원 원장을 지냄

金永翼 (1863~1918) 號 洛窩, 經史에 박통

金容悳 (1864~1940) 韓末의 秘書郞

金永運 (1867~1932) 號 瑞雲, 學行高邁

金永龜 (1870~1931) 號 淵西, 江皐 柳尋春 학풍을 이어 學問이 深奧, 救恤民生

金永燾 (1871~1938) 號 梅汀, 天性剛毅

金容弼 (1876~1943) 號 尤堂, 志操가 高潔하여 日帝의 18賢 사당치제를 배척하다.

金義鉉 (1876~1953) 號 愼菴, 學問高邁.士林推重

金永奎 (1879~1943) 號 益窩, 經書와 사기를 通讀, 風土地理史 발간

金鍾九 (1892~1973) 號 檀汕, 文詞瞻麗.士林推重

金容珏 號 惜陰, 學行이 높았고, 일제 때 創氏改名에 불복함


節義(절의)

陽川許氏 (1377~1455) 貞敬夫人 檢閱公 金問의 夫人, 節行旌閭

興陽李氏 (1568~1597) 忠壯公 金德齡將軍의 夫人, 殉節旌閭

順天金氏 (1572~1633) 貞夫人, 沙溪先生의 再娶夫人, 孝烈旌閭

連山徐氏 (1590~1637) 江都殉節, 虛舟公 金槃의 夫人 殉節旌閭

靑松沈氏 (1623~1650) 贈 貞夫人, 參判公 金益煦의 夫人, 殉節旌閭


書畵家(서화가)

金 絿 (1488~1534) 號 自庵, 朝鮮朝四大 名筆

金景熹 (1515~1575) 號 蘆溪, 東國筆苑의 한 분

金大德 (1577~1639) 號 蘇峰, 國朝筆苑의 한 분

金太極 (1608~1668) 號 三松, 書藝에 능함

金宇亨 (1616~1694) 號 寄傲堂, 글씨로 飛筆注書

金 棐 (1623~1639) 號 묵翁, 楷書로 筆苑에 등재

金鎭圭 (1658~1716) 號 竹泉, 篆書 隸書 및 山水人物畵에 能함

金相肅 (1717~1792) 號 坏窩,經學과 筆法 絶妙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