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공파 / 대교공파종중 / 용인파문중 죽산안씨 18세 안정구(安珽求, 1828~1881)
[출처] 죽산안씨 대교공파 삭주부사 우경 안정구 선생 묘지에 설치된 묘소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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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경 안정구 선생 묘(禹卿 安珽求 先生 墓)
소재지 :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용천리 산55번지7
이곳은 통정대부 충주영장 삭주부사를 지낸 우경 안정구(1828~1881) 선생의 묘이다.
본관은 죽산(竹山), 자(字)는 우경(禹卿)이며, 죽성군 원형(元衡)의 17세손이고, 대교공파종중 중시조 신손(信孫)의 13세손이다. 증조는 사열(思烈)로 통정대부 대흥부사 경기중군을 지냈고, 조부는 승길(承吉)이고, 부친 종벽(鐘璧)은 성균진사를 지냈다. 선생은 1828년(순조28) 9월 15일 이곳 용천리에서 태어나 1852년(철종3) 약관 25세로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였다.
이후 인차외만호 훈련원주부 분도총도사 무신겸선전관이 되어 1875년 고종에게 상현궁을 하사받았다. 1877년 훈련원첨정 사천현감을 지낸 후, 통정대부(정3품 당상관)에 오르고, 부호군에 단부되었다. 1879년(고종16) 6월 25일 충주영장으로 김옥균과 함께 관직을 제수받았는데, 고종 비망기에는 충주영장 부임시 장궁1장 장전1부 편전1부 동아1개를 하사받은 기록이 있다.
선생은 1880년 오위장(종2품)이 되고, 다음해 4월 7일 평안북도 삭주부사로 부임했으나 조선말 혼란기인 와중에 1881년(고종18) 윤7월 15일 향년 54세로 서거하였다.
인간사 앞일을 어찌 알리오. 천리길 타관에서 큰물이 들고 바람이 제멋대로 불 때, 오로지 백성들과 고난을 함께하다 돌아가신 선생의 애민정신은 사대부들의 귀감이었다. 나라에서는 선생을 이곳으로 운구하여 관헌들이 깃발을 꽂고 예장으로 치제하며 선생의 충절을 기리고 애도했다.
선생이 충주영장 재임 중에 받은 간찰(서한)에는 고종의 형인 흥친왕 이재면, 충정공 민영환, 영의정 김병국, 대제학 민태호, 한일합방에 항의 자결한 이범진 열사의 부친 무위대장 이경하, 공조판서 김병주, 예조참판 김경균, 병조판서 김기석, 대사성 조신희, 한성좌윤 박장하, 도승지 이태용, 기사장 정약풍, 이조참판 서화가 민영익 등 조선왕조 중추인물 28명이 쓴 35통의 친필이 있다. 이를 보면 선생께서 역사적으로 얼마나 큰 인물임을 알 수가 있다.
선생의 유품인 간찰은 장남 동찬(東璨), 장손 필형(珌炯)이 이어받아 손부 전주이씨 기만(奇滿)에게 물려주었고, 6•25전쟁 피난시절 등 극심한 격동기에도 귀히 간직하여 증손 재식(在植)에게 전승하였다. 작금에 조선말 시대상황이나 서체연구를 위해 고전번역연구소 박상수 교수가 탈초 번역하고, 원숙희 편집위원의 교열로 『우경 안정구 선생 간찰집』을 편찬하게 되었다.
묘는 선생의 고향인 용천리 선산내 백동전산 간좌 3위합폄이다. 후손들의 불효로 봉분은 평장의 형태가 되었다. 늦었지만 이제라도 유덕을 기리고자 큰집에서 유택을 정비했다. 묘소에는 유사비, 사각묘테석, 상석이 있고, 조부 승길(承吉), 장남 동찬(東璨)의 설단(設壇)이 있다.
서기2021년(단기4354년) 3월 26일 불초증손 재식
죽산안씨대교공파 종회장 재연(在淵) 후손 일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