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3주일 / 주일예배 설교문
2024년 03월 03일(주일)
전도서 9:13-18
“불확실성 속에서 지혜를 찾자!”
온고지신(溫故知新)이란 말이 있습니다.
옛것을 익히고 새것을 안다는 뜻이지요. 옛것을 익힌다는 건 과거의 경험을 통해 배운다는 거예요. 과거를 통해서 미래를 대비하는 거지요.
풍성한 추수의 계절 가을이 지나면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추운 겨울이 온다는 걸 우리는 과거 경험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러기에 지금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미래를 대비하는 거지요. 이게 잠언이 말하는 전통적 지혜입니다.
하여 잠언의 지혜는 과거 지향적이고 동시에 미래 지향적입니다.
예를 들면 잠언의 이런 말씀이 있지요.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이 삶을 계획한다는 건 자기가 살아 온 경험을 통해서 계획을 세우는 거예요. 그러나 미래를 열어주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러니 사람은 먼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게 지혜라고 잠언은 말합니다.
사실 우리는 과거 훌륭한 선생의 경험이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선생의 경험이나 가르침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혜가 되거든요.
이때 잠언의 저자는 하나님이 정하신 일을 인간이 알 수 있다고 전제해요. 이 전제의 근거는 과거를 통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게 잠언이 말하는 지혜의 기준입니다.
반면 코헬렛, 곧 전도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이해할 수 없다고 봐요. 그러니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거지요. 미래를 알 수 없다고 말하는 전도서의 지혜는 현재 지향적입니다.
전도서 3장 12장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고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는 것을 내가 알았다.”(직역 성경)
여기서 중요한 방점은 “사는 동안”에 찍혀 있습니다. 살아있는 순간, 곧 지금 여기 현실에 집중하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전도서의 시각에서 보면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대비한다는 건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일이 되는 겁니다.-(『지혜란 무엇인가』, 송민원 지음, 감은사, P.223)
그렇다고 전도자는 미래를 대비하지 말라는 건 아닙니다. 사실, 예측한 대로 인생이 흘러가지 않으니 전도자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하라고 조언해요.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했습니다(전 4:9).
두 사람이 길을 가다가 한 사람이 넘어지면 일으켜 줄 친구가 있어서 좋다는 거예요. 하나보다는 둘이 나은 이유는 언제든 넘어질 가능성이 있으니 대비하라는 거지요. 혼자 애쓰는 것보다 둘이 함께 하는 게 낫다는 겁니다. 둘보다는 셋이 낫습니다.
전도자의 지혜는 잠언의 지혜를 비틀어서 뒤집는 거예요.
잠언에서는 넘어진다는 건 지혜가 없다고 봅니다.
그렇다면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지혜를 배워야겠지요. 이게 전도자의 시각입니다. 넘어지는 일은 누구에게나 있을 수 있으니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낫다고 보는 거예요.
흔히들 사람은 착하고 정직하게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좋은 일이 생기고 행복이 따라온다고 하지요. 이게 잠언의 규범적 지혜(전통적 지혜)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그리 녹록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이 살기 힘든 세상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거짓말하고 남을 속이며 상처 주고 살 수 없잖아요. 정직하게 사는 건 사람이 마땅히 행해야 할 바른길입니다. 사람이 정직하게 살아야만 세상이 밝아지고 환해지는 거지요. 정직하게 사는 걸 하나님은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이 녹록하지 않으나 사람의 도리를 다하며 살자는 게 전도자의 역설적 지혜인 거예요. 전도자는 고단하고 불의한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겁니다. “사는 동안”, 곧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밑바탕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지혜가 깔려 있어요.
잠언의 지혜가 전통적(규범적) 지혜라면 전도자의 지혜는 “삐딱한 지혜”, 곧 역설적 지혜입니다.
과거 우리는 군사독재 시절을 경험했습니다.
독재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을 휘두르며 시민을 억압했습니다. 국가보안법이니, 간첩단 사건이니, 빨갱이니 하는 명분을 걸어 정권을 유지해 나갔지요.
그러나 독재자의 말로는 이슬과 같았고 들의 꽃과 같았습니다. 독재자는 어떤 권력을 휘둘러도 백성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 그럴까요?
그 이유는 간단합니다. 백성은 수천 년 동안 쌓아 온 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혜는 백성의 힘이요 무기인 셈이지요.
한 시대를 호령하던 독재자는 그의 권력이 영원할 것 같았어요. 하지만 그의 운명은 죽음을 피해 가지 못했습니다.
이제 꽃피는 춘삼월(春三月)입니다.
3월 하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 3.1운동입니다. 우리 교인들은 아직 역사의식이 살아 있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3.1운동은 불가능 속에서 가능성을 창조한 혁명이라고 했습니다.
“조선은 독립국이며 조선인은 주인이다.”
이 선언은 당시 조선인이 지닌 지혜의 총체입니다.
보잘것없어 보이는 가난한 민중의 지혜가 쌓이면 어떤 무력으로도 막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 지혜를 보여준 게 바로 3.1운동입니다. 그러니까 3.1운동을 일으킨 우리 선조들은 빼앗긴 나라와 조국을 역설적으로 본 거예요. 힘이 없어 나라를 도둑맞은 게 아니라 지혜가 없어서, 곧 어리석어서 나라를 도둑맞았다는 거지요. 당시 권력을 쥔 지도자들이 어리석고 사리 분별이 없었던 거지요.
그러니 식민지 백성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힘이 없다기보다 지혜가 없었다고 깨달은 거지요. 일본제국주의에 나라를 도둑 받았지만 우리는 독립국이요 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외친 거예요. 이게 바로 역설적인 지혜인 겁니다.
그러면 왜 전도서 저자는 인간의 삶을 역설적으로 삐딱하게 보았을까요?
이 물음을 풀어야만 전도서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서가 품고 있는 사회정치 역사적 배경을 알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는 서기전 3세기경 페르시아에 이어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인 그리스 제국의 식민지로 있었습니다. 당시 유다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와 유다 권력자들에게 안팎으로 착취를 받고 있었지요. 유다 백성에게는 더 이상 희망이 없었지요. 이때 쓴 책이 바로 전도서입니다.
전도자는 앞이 캄캄한 현실 속에서 실망하는 대신 두 가지 앞날의 상황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이 순간순간마다 그리고 끊임없이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생명을 선물로 주신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지금 현실이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리라는 거예요. 그러니 지금 “사는 동안” 영원을 체험한다고 전도자는 본 거예요.-(『해설판공동번역 성서』, 국제가톨릭성서공회 편찬, 일과 놀이, 1088)
그렇습니다. 인간의 삶이 항상 순리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니 예기치 않는 일이 발생했을 때마다 당황하지 말고 늘 하나님을 기억하며 살아야 하겠지요. 역발상적 시각으로 현실을 들여다보는 거예요. “오늘 비가 오면 내일은 해가 뜨겠지!” 생각하는 겁니다.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는 거지요.
한때 미신이 유행하던 시기에 어느 수험생이 시험을 보다가 연필을 떨어뜨렸어요. 주변 학생들이 “헉! 연필이 떨어지다니 이건 불길한 징조야!”라고 생각하고 있었지요.
그런데 정작 연필을 떨어뜨린 학생은 웃는 얼굴로 연필을 집어 올리면서 말하기를, “연필이 땅에 붙었네!” 했다는 겁니다. 이게 불온한 현실을 긍정적으로 보는 역발상적 시각입니다.
그러고 보면 세상은 예기치 못한 사건들이 충격을 주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불확실한 세상에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순리대로 사는데도 예상치 못한 사건들이 일어나 사람들에게 큰 상처와 충격을 안겨주니까요. 이렇듯 삶은 가끔 충격을 줍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 말씀을 들여다보겠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가난한 지혜자의 지혜로운 행동이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경우를 보여줍니다. 지혜가 인정받지 못하면 그 사회는 불온하고 불의한 상황에 빠지고 맙니다.
대개 사람들은 지혜가 힘을 발휘하고 유익을 가져올 것으로 예측해요.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고 코헬렛(קֹהֶ֣לֶת), 곧 전도자는 말합니다. 말하자면 그는 어리석음이 지혜의 힘을 파괴하는 것을 지켜봤기 때문이에요. 전도자는 해 아래서 관찰한 짧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줍니다.
인구가 얼마 되지 않는 작은 성이 있었다.
그런데 한 강한 왕이 그 작은 성으로 쳐들어와서 포위하고 그 작은 성을 공격하기 위해 커다란 공격용 망대를 세웠다. 그리고 그 작은 성에는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그 지혜로 그 성을 구하였다. 그러나 그 누구도 그 가난한 사람을 기억하지 않았다(전 9:14~15).
이 짧은 이야기는 가난하지만 지혜로운 사람이 작은 성을 구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한 사람도 그 지혜로운 사람을 기억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그는 가난하나 그의 지혜로 온갖 무기로 공격을 퍼붓는 강한 왕에게서 도시를 구해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어떤 사람에게도 인정받거나 보상받지 못했어요.-(『일상의 신학, 전도서』, 김순영 지음, 새물결플러스, P.264-265)
사실, 가난하나 지혜로운 사람의 이야기는 전통적인 지혜 사상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곧 지혜가 힘과 무기보다 낫다는 얘기입니다. 전통적 지혜에 비춰볼 때 가난한 사람은 지혜가 없다고 봅니다. 보통 세상은 부자의 말을 듣지 가난한 사람의 말을 듣지 않아요.
그러기에 가난하나 지혜로운 사람이 작은 성을 구했어도 그의 지혜를 인정받거나 보상받지 못한 거예요. 그러니까 전도자가 보기에 지혜는 힘보다 강하지만 항상 그렇지만 않다는 겁니다.
이에 전도자는 그 짧은 일화에 이런 결론을 내립니다.
16절입니다. “∙∙∙ 지혜가 힘보다 좋으나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받고 그의 말들을 사람들이 듣지 않는다”
사실 보통 전통적인 지혜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전도자의 결론이 실망스러웠을 거예요. 그럴 만도 해요. 작은 성을 구한 가난한 지혜자가 사람들에게 인정받아야 마땅하잖아요. 그런데 기대했던 것과는 달라요. 사람들은 지혜자가 가난하다는 편견을 벗어나지 못한 겁니다.
그러니까 지혜가 힘보다는 나으나 경험으로 볼 때 여러 가지 통념이나 편견이 지혜의 진가를 드러나지 못하게 한 겁니다. 이것을 전도자는 말하고 싶은 거예요.
사실, 인생은 기대한 것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물론 때로는 계획하는 일이 뜻대로 되는 경우가 없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대했던 만큼 삶이 반응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알렉산드로 푸시킨은 이렇게 노래했는지 모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그렇습니다. 삶이 우리를 배신하는 경우가 많아요.
가난한 지혜자는 사람들에게서 기억되지 않습니다. 기대했던 좋은 결과는 찾아오지 않아요. 심는 대로 거둔다는 보편적 진리가 깨지고 맙니다.
전통적인 지혜인 잠언은 지혜 있는 자가 강하다고 말합니다(잠 24:5). 하지만 코헬렛 전도자는 전통적인 지혜에서 벗어나는 현상들을 관찰했습니다. 짧은 일화에서 그랬듯이 전통 지혜의 관점을 뒤집는 상황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아요. 그는 자신의 경험상 지혜가 가져올 유익과 기대를 꺾는 반전의 순간이 있음을 압니다.
그렇습니다. 전도자가 말하는 역설의 지혜는 이런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둔다는 보편적 진리를 깨는 삶의 순간이 언제든지 닥칠 수 있으니 항상 그 순간을 마음에 새기라는 거예요.
인생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은 변화가 많아 예측하기 어렵다는 새옹지마(塞翁之馬)란 고사성어가 있지요. 전도자의 경험으로 보면 인생의 삶이 예측하기 어려우니 항상 대비하는 게 낫다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자는 지혜의 유익과 기대를 말하면서도 그 한계 또한 여전하다고 말합니다(17~18절). 지혜자의 말이 통치자의 말보다 낫기는 하지만, 조용하게 들리는 지혜자의 말이 사람들에게 들려야 하겠지요. 귀에 들리지 않는 말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러니 전도자는 지혜자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말합니다(17절).
하여 전도자는 전통적인 가치를 뒤집는 가르침을 계속해서 이어갑니다. 18절입니다. “지혜는 전쟁 무기보다 좋다. 그러나 죄인 한 사람이 많은 선을 무너지게 한다.”
죄인 한 사람이 지금까지 쌓은 선한 가치를 한순간에 무너뜨린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죄인 한 사람의 파괴적인 힘이 지혜를 무력하게 한 거예요.
고대의 전통적 지혜인 잠언은 죄와 어리석음, 지혜와 의로움을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서 사망과 생명의 길로 제시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선택할지 교훈하지요. 그러나 전도자는 지혜가 유익하지만 한 죄인 앞에서 맥없이 무너지는 선한 가치의 무력함을 강조해요.
그렇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어리석은 일로 인해 얼마나 많은 선한 가치가 무너졌는지를 경험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지혜롭고 착하고 의롭게 살면 살맛 나는 세상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기대를 번번이 저버리는 경우가 많지요.-(앞의 책, P.265-266)
지나간 역사와 지금 우리 현실을 들여다보면 지도자의 어리석은 행위가 얼마나 큰 불행을 가져다주는지 우리는 경험하기도 했고 지금 경험하고 있습니다.
저는 성서를 해석하다가 지금 우리가 처한 불안한 상황과 현실을 대할 때마다 항상 가슴 아픕니다. 우리 정부는 해 년마다 한미연합전쟁연습을 하는 겁니다. 내일 3월 4일부터 14일까지 11일간 한미연합전쟁연습을 합니다. 북한이 언제 어느 때 무력 도발해 올지 모른다는 전제하에서요. 아마도 북한이 전쟁하려고 했다면 진즉 했을 거예요. 언제쯤 이 어리석은 전쟁놀이를 중단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지난 1월 19일 자 서울경제신문 기사에 한국의 군사력(군사력/경제력/외교력 합산)이 세계 5위라고 발표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나라를 지키고 보호할 수 있는 자주국방(自主國防)의 능력을 보유한 셈입니다. 그런데도 미군의 도움 없이는 나라를 지킬 수 없는 것처럼 우리 정부는 해 년마다 한미연합전쟁연습을 하고 있으니 정말 한심하고 안타까운 일입니다. 이제는 민족과 통일이란 가치조차 무너지고 있습니다.
왜 우리는 주체적으로 나라와 민족을 이끌어 가지 못하는 걸까요? 105년 전 우리 선조들은 비록 나라를 빼앗겼으나 “우리 조선은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 사람이 자주적인 민족임을 선언한다.”고 외쳤습니다.
왜 우리는 3.1운동의 지혜와 가치를 기억하지 않는 걸까요?
지도자의 어리석은 작은 행위가 엄청난 후폭풍을 가져올 수 있다는 걸 왜 우리는 모르는 걸까요?
시절이 불안하고 어수선하니 오늘 우리는 전도자가 말하는 어리석음이 얼마나 큰 파괴력을 가졌는지에 주목해야 할 것입니다. 한 사람의 어리석은 작은 실수와 잘못이 지금까지 쌓아 온 선한 가치와 지혜를 송두리째 파괴해 버린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전통적인 지혜로만 살 수 있는 세상이 아닙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예기치 않는 사건과 일들이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고 여기고 항상 현실을 긍정하며 앞날을 대비하면 좋겠습니다. 오늘 전도자가 우리에게 던져 준 역설적인 지혜를 통해 지금 사는 동안 영원을 체험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잠언과 전도서를 관통하는 지혜의 핵심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잠 1:7). 하나님을 기억하는 것입니다(전 12:1). 행복이란 현재의 삶을 누리는 데 있어요. 진지하게 살아가는 현재의 삶은 영원 자체입니다. 오늘을 의식하며 살면 됩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맡아서 할 것이다.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에 겪는 것으로 족하다.”(마 6:34)
그렇습니다. 오늘을 의식하되 나머지 모든 것은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께 맡길 수 있기를 빕니다.
기도 / 지금도 우리에게 생명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
삶의 현실은 번번이 우리를 배신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 사는 동안 하나님이 이끄심대로 오늘 현실을 긍정하며 살게 하옵소서. 예기치 않는 일들이 우리를 가로막아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과 잇대어 살게 하옵소서. 지금 사는 동안이 영원임을 깨닫게 하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