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바람이 칼날을 갈아
허공을 하얗게 깎는다
떨어지는 허공에서
칼 냄새로 번지는 꽃잎
베인 자국마다
몸살 난 사랑이,
환절기 기침 소리로
봄날을 건너간다.
그믐
상한 검지를 절단하고 돌아와
내내 서럽게 우시는 어머니
기죽은 저녁도 따라와 울었다
일찍감치 밥상을 물린 아버지는
마당가에서 담배연기를 내뱉으며
가죽나무에게 하소연을 해댔다
눈치가 빠른 형이 사과바구니를 챙겨
내 손을 잡아 삽짝으로 끌었다
골목길이 어둑어둑 개펄같이 어두워
세상을 향해나가는 발걸음이
무섭기 시작했다
인기척을 가로막은 호창의 불빛들이
어서 돌아오라는 어머니의 손짓처럼
하늘거렸다
온 동네 개 짖는 소리가 당나무를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그믐 밤
사과는 하나도 팔리지 않았다
형과 나는 그믐 속에서
서로에게 눈물을 들키지 않은 채 울었다
울기 좋은 그믐이었다.
단디해라
가장 간절한 말이어서
짧다
가장 염려하는 말이기도 하여서
또 짧다
식전 첫차를 타고 객지로 떠나는
아들의 어깨 너머로
태초의 말씀처럼 건네는 한 마디
처음 나를 독립된 개체로 치켜세우면서
세상 속으로 밀어 넣던 어머니의 목소리
병상에서 흐린 눈빛으로 나누던
한 박자 끄는 울림이
두레박 닿는 메아리로 되돌아오고
솔갈잎을 긁는 듯한 유언은
애틋하고 간절한 말씀이 되어
짧게도,
니, 단디해라.
낮달
대학병원 앞 약국에서
약을 수령하다 그를 만났다
다리를 절며 유리창에
파리하게 비친 그
하루의 반이 아직도 채무처럼
손톱에 낀 기름으로
검게 남아 있었다
어색한 웃음 속으로
낮달이 박하사탕처럼
한 입에 다 들어갔다
버스 정거장으로 향하는
그의 뒷모습이 휘청,
휘청거렸다.
주저주저
공단식당 현관 앞
아무렇게나 벗어 던져진 신발 무더기 틈에서
내 발걸음이 주저주저한다
한 나절의 질긴 노동이
구겨지고 헤진 안전화 위에 내려앉아
숨 고르는 것을 방해하는 게 아닌지,
그 속속들의 야무진 시간이
버티고 있는 작업화 사이사이로
깨끗한 내 구두를 밀어 넣는 것이
그들에게는 오염이 되는 게 아닌지
잠깐잠깐 사이에 주저한다
밥을 먹는 내내
양복 입은 나 혼자 깍두기인 것 같아
뜨는 밥조차 눈치가 보여
체기로 올라온다
기름과 노동에 절은 작업복들은
서로의 젓가락이 되어
맛있는 만찬을 하는데
양복을 입은 나는 번듯한 자본처럼
그들의 경계인이 된다
그들도 주저주저하고 나도 주저주저하는
씁쓸한 공단식당.
목계木鶏
단 한 번의 울음으로
당신 심장을 멎게 할 것 같아
횃대에 오르지 않는 닭
바람이 든 나무의 기억 때문에
펴지지 않는 날개가
자꾸만 푸드득 거린다
독수리처럼 홰를 치고 싶은 본능이
하늘을 향할 때마다
울 수 없는 언어들이 목젖에 잠긴다
죽도록 날아가는 빈 날갯짓
당신에게 가는 길이 있다면
부리에 피가 나도록 싸우는
눈이 먼 투계가 되어도 좋아
몸속 가득 당신이라는 호칭을
결결이 쌓아 놓은 채
울지 않고도 부르는 닭
바람에 흔들린 나무의 문장이
영겁으로 대답하는 사랑인 듯
붉은 동공을 빠져나간다.
안경을 흘리다
밤새 사색이 되어 떠난
컨테이너박스 숙소에
티앤이 흘리고 간 보랏빛 안경
햇빛이 와 닿을 때마다
간밤에 경황없이 떠나간
티앤의 두려운 얼굴빛으로 바뀐다
밤마다 문을 두드리는 손짓과
몸을 더듬은 손짓을
CCTV같이 녹화했을 티앤의 안경
주위를 서성거리던 바람소리에도
숙소 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아
문에 기댄 채 잠을 붙인 티앤
소의 타액 같은 밤이 지나가고
공장식당으로 아침을 먹으러가다
다시 마주치는 손짓과 손짓들
엉덩이를 더듬은 손짓이
뱀으로 기어올라
터져 나오는 비명을 막는다
밤마다 기어드는 뱀을 피해
미처 챙기지 못하고
티앤이 흘리고 간 보랏빛 안경
마르지 않은 눈물을 흘린다.
밀정密偵
마을의 순결한 처녀애들이
진달래가 핀 곶자왈로 달아나고
미처 피하지 못한 처녀애들은
솜이불을 뒤집어쓴 채
개짐혈이 발효되는 골방에 갇혀
달항아리에다 오줌을 지렸다.
섬의 섬
바람이 바다를 흔들어 놓아도
섬의 섬이 보이냐고
때를 놓친 사람들이 말했다
섬은 환절통이 오는 4월마다
바닥에 떨어진 붉은 꽃을 보듯
마음으로 보아야 보인다고 했다
섬의 계절은 봄날 바람에
날카롭게 꺾인 동백 가지 같아서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언제나 고샅 언저리에서 서성거렸다
섬에서 섬을 보지 못하고
돌담에 늘어선 사람들
활주로를 달리는 비행기소리에
오랜 지병이 도지는 듯
먼 산에 얹힌 섬을 쳐다보았다
섬의 섬, 그 지독한 인연은
얼굴을 떳떳하게 들어
마음으로 보는 거라고
섬이 섬에게 말했다.
그늘
누군가의 그늘이 된다는 것은
나의 색깔을 지우는 것이다
한 번도 내 빛깔을 갖지 못하고
누군가의 바탕 색깔만 되어
침묵으로 누르고 있다
길고 짧은 흔들림에
높고 낮은 출렁거림에,
한 빛으로 물들어가며
누군가의 배경이 되는 색
평생 지워야 할 망각의 그림자도
시간을 탈색하며 변해간다
삶과 죽음의 온기가
동시에 빠져 내려가는
그늘의 짙은 고요
누군가의 그늘이 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을 잘 섞어주는 일이다.
<삶의 진경을 그대로 옮기는 고유한 시법>
1. 내 시의 기원
내 시의 기원은 가족사에 기인하고 있다. 그래서 기억을 더듬어 시를 쓰듯이 가족사를 엮어내고자 한다. 내 시에 대한 조금의 이해를 돕는 차원이라 생각하고 지루하더라도 끝까지 읽어 주기를 바란다. 1960년대 초 아산만 간척사업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당시 주소지인 평택군 팽성면 신대2리 211번지로 모여 들었다. 주로 경북 지역과 전북 지역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한 마을을 구성할 정도로 많았다. 그래서 마을 이름도 “새터”를 의미하는 “신대리”로 부르게 되었다. 당시 가구 수가 100여 가구를 넘어 제법 큰 마을을 이루었다. 아버지는 장남임에도 불구하고 차남인 작은 아버지와 불화를 자처하지 않으려고 먼저 타관인 평택행을 결정했다고 한다. 평택의 생활은 녹록치 않아 움막이나 포로수용소가 있던 산자락에 무허가 건물을 지어 생활의 기반을 마련했다. 얼마 되지 않아 할아버지가 계약한 논이 명의 등기가 되지 않은 땅으로 밝혀져 부모님이 낙담하고 있을 때 내가 태어났다. 비극 중에 태어난 아이라서 사랑은커녕 버려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당시 장자 호적법에 의해 아버지의 본적인 경북 영천군 화산면 유성동 608번지에 나도 호적에 등재가 되어 있어 사실상 나의 본적도 경북 영천이나 다름없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내가 느낀 정서나 주의의 환경적인 요소들이 모두 평택이어서 나는 약력에 꼭 경기도 평택으로 기입한다.
부모님은 새벽 일찍 나갔다 저녁 늦게 집으로 돌아왔다. 당시는 사는 자체가 기적이었다. 위로 형 둘과 아래 여동생은 방치 아닌 방치 속에서 그야말로 각자도생이었다. 아버지는 간척사업을 하기 위해 부역을 나갔고, 어머니는 근처 미군부대 공사장에서 잡일을 하였다. 사리 때 막은 논둑이 터져 쓸려 가고, 물에 휩쓸린 어른은 죽기도 하였다. 마을 중앙에 있던 망루에서 사이렌이 울리면 오늘도 사고가 터졌구나 하는 짐작을 하였다. 죽은 어른은 마을 뒷산 개망초가 무성한 돌산에 묻혔다. 개망초밭에 묻히면서 개망초 같은 신산한 삶을 신대마을 사람들은 견디어 왔다. 밤이면 미군 부대 활주로의 유도등에서 켜진 불빛이 하늘을 가로지르며 넘어갔고, 부대를 제외한 마을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1970년대 중반에 전국의 대대적인 경지정리사업이 이루어져 소작을 붙이던 논도 경지정리를 하였다. 문제는 경지정리사업이 끝난 논을 사람이 일일이 다니면서 작답을 하거나 논바닥에 떨어트린 자갈을 골라내는 일이었다. 고되고 거듭된 일에 아버지는 늑막염을 얻었고, 어머니는 손가락 중지를 잘라냈다. 당시 내 기억으로는 집안이 하루라도 편할 날이 없었다. 아버지는 늑막염 약을 한 주먹씩 먹었고, 어머니는 없는 중지를 남에게 보이지 않으려고 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다녔다. 어린 나이에도 눈치 빠른 둘째 형하고 나는 학교를 파하고 집에 돌아오면 물독에 물을 가득 채워 놓거나 땔감이나 닭이나 돼지에게 먹일 풀을 베다 놓았다.
수전 손택에 의하면 “질병이 문학 속에서 자연현상으로서의 질병이 아니고 하나의 은유, 메타포로서 존재한다”고 한 의미를 나는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간에 그러한 측면에서 내 유년의 신산한 기억을 작품으로 동일화시키거나 자아화로 유도해냈다. 시는 과거의 아득한 상처 난 기억을 들춰내, 트라우마로 각인된 상처를 게워내고 육화해내는 것이기 때문에 결코 만만치가 않았다. 이러한 개인의 아픔을 다 걸러내야 비로소 진정한 시작품이 나온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그 과정이나 창작을 하는 데 무척 애를 먹었다.
시를 본격적으로 쓰면서 시가 더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시를 쓰는 게 아름답거나 고고하다고 생각해본 적도 더더욱 없다. 오히려 멋모르고 시를 써댔던 문청시절이 훨씬 더 마음 편했다. 글을 쓰는 나부랭이가 되면 돈은커녕 밥 굶어 죽는다는 부모님의 말씀도 있었지만 나는 아직도 살아 있고 세끼 밥도 꼬박 챙겨 먹는다. 내가 이 말을 듣기 몇 해 전에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어머니가 다니던 공사판에서 찔린 못에 독이 올라 중지를 절단하였다. 젊은 나이에 손가락을 절단한 어머니의 삶은 어딜 가나 절단된 손가락처럼 곤궁하고 녹록치 못했다. 그러나 어릴 적 나의 어머니는 지금도 그 강단과 악착을 갖고 있다.
토지분쟁소송에서 패소를 한 날 어머니는 잠든 나를 안고 짐승의 울음처럼 울었는데, 당신의 손과 무릎에 감싸진 나는 잠결에 울음소리를 들으며 겁이나 숨도 쉬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꿈결에 들은 울음소리이기를 바랬지만 현실은 어린 나를 잠들은 척하며 어머니의 곡성만 높게 하였다. 이때부터인지 모른다. 가난과 고향과 노동자와 개인의 무력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내 시의 원천은 늘 “상처 난 기억에 대한 정직한 고백”을 시도하고 있다. 어디 상처 없는 사람이 없겠습니까마는 내 상처는 손가락을 절단한 어머니의 발밑에 있었다.
내 시의 근원적인 의식은 고향에 있다. 고향은 사람을 일차적으로 제자리로 돌려놓는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내면화된 외부를 삼투압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고향이라는 공간은 그래서 우리 인간을 어쩌지 못하게 고향의 동구 쪽으로 발길을 향하게 하는 것 같다. 그러나 고향의 중앙이나 주변에는 언제나 유빙처럼 떠도는 주변부의 사람들이 꽉 차 있다. 자의든 타의든 중앙인들이 주변부로 밀어낸 것이다. 중앙인과 주변인을 경계 짓는 사람들이 요즘 많이 생겨난다. 이것은 인간의 욕망이 없어지지 않는 한 끝없이 존재할 것이다. 내 시는 항상 가난한 사람의 가슴과 또는 그들의 머리나 손에 있다.
2. 시 쓰기의 의미를 일깨워준 체슬라브 밀로즈
옥타비오 파스가 활과 리라에서 밝힌 “시는 민중의 목소리이자 선민의 언어이고 고독한 자의 말이다”는 구절을 되새길 때마다 시는 명확한 메시지나 분명한 주제를 내포해야 함을 시에 대한 나름대로의 정의를 다시금 해 보게 된다. 어쩌면 그것은 옥타비오 파스의 말대로 시가 갖게 되는 “다수의 목소리 속에서 소수의 목소리를,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기도” 한 시의 독특한 특성도 일부분 차지하는 게 사실이지만 무엇보다도 이 세계를 통해 다른 한 세계를 또 창조해내는 것에 더 비중을 두고자 하는 나의 내심인지도 모른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발신자에서 수신자에게 이르기까지 원활한 소통의 대화와 이해가 함께 유지되는 매체를 가지고 있는 시의 시원하고 가슴 애틋한 본모습을 기대하는 바람 또한 솔직한 심정이다. 다시 말해 발신자의 온전한 질문에 수신자도 온전하게 대답할 수 있어야 하고, 정확한 질문에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그런 시가 그리울 때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시를 되도록 쉽고 잘 읽어지게 쓸려고 한다. 시를 쓴 지 오랜 세월이 지나도 시에 대한 정의나 시 창작 기법에 대한 결말을 내리기가 어렵다. 그만큼 시는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또 시인들에 따라 개성이나 문체가 달라지기 때문에 그 한계나 범위는 무궁무진하다 하겠다. 시는 읽어서 감동이 있으면 좋은 시라고 말하고 싶다. 심리적으로 내면 의식을 쓰거나 현실과의 불편한 관계를 지적하는 시를 쓰든 간에 시는 궁극적으로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1979년 10.26사태로 박정희가 죽자, 이를 기회로 12.12군사반란으로 정권을 찬탈한 전두환 군사정권 못지않게 1980년 겨울은 유난히 추웠다. 눈이 많이 내렸고, 체감온도는 빙하기의 동토와 다름없었다. 막내 고모가 시집을 가면서 혼자 쓰게 된 골방은 더 넓어졌으나 그만큼 또 추위에 노출이 되었다. 그 골방에서 나는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하면서 나름대로 글쓰기에 몰두하였는데, 그 계기는 황순원의 「소나기」에서 비롯되었다. 교과서에서 읽은 「소나기」는 나는 최소한 그것이 끝이 아니라 작품 속 어느 한 부분을 보기로 옮겨 놓았을 거라는 추측을 했다. 내 딴에는 「소나기」에서 윤초시네의 증손녀가 죽은 것이 안타까웠는지 그 뒷이야기가 궁금했다.
그리하여 읍내 서점을 찾아가 서점 아저씨에게 황순원의 「소나기」를 거론하며 뒷부분이 나오는 책을 달라고 했더니 아저씨가 나를 의아하게 빤히 쳐다보았다. 나와 아저씨의 눈이 마주치자 아저씨가 책을 펼치더니 “학생, 황순원의 「소나기」는 책에 나오는 대로 윤초시네 증손녀가 죽는 것으로 끝나는 거야”라고 하였다. 겸연쩍다 못해 무안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그 뒷부분 이야기를 내가 써보리라고 다짐했다. 그 당시 둘째 형이 쓰다만 꽃이 예쁘게 그려진 일기장을 얻어 낙서하듯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결말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분명 유치한 글임에는 틀림없다.
습작이 늘어나 두툼해진 일기장을 나무서랍에 넣었다가 꺼내어 읽고 수정하여 다시 넣기도 하였다. 글이 거의 완성되어 갈 무렵, 당시 신문배달을 했던 옆집 형이 건네준 한 권의 책은 시골 촌뜨기 문학에 빠져있던 나를 개안시키는 혁명적 전기를 가져다주었다. 그 책은 다름 아닌 1980년 문예중앙 별책부록으로 나온 노벨문학상 수상시인인 체슬라브 밀로즈의 시선집인 겨울 종소리였다. 당시까지도 이렇다 할 문학이론서나 시집을 접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그야말로 개벽의 사건이었다. 문학의 역사가 짧아 뚜렷한 사조나 계보가 없던 상황이었지만 정형화된 당대의 문학교육을 감안하면 “금서”에 버금갔다.
당시 군사독재정권을 고려하여 읽어보면 상당히 충격적인 시다. 체슬라브 밀로즈의 시는 정치적인 것, 이념적인 것에 대한 극적 경험을 겪지 않고는 공감할 수 없는 작품이었다. 이런 여러 정황적인 것을 극복하고 시에 사회적 기능을 연결한 밀로즈의 시작법에 감탄하였다. 물론 이러한 점을 스웨덴 한림원 심사위원들이 높이 평가하였음은 두 말할 나위도 없다. 그에게 시는 보다 현실적이며 인간적인 양상을 드러내면서 시대의 불합리에 대해 보다 비극적인 포커스를 맞추려는 시도를 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이미지가 불명확하거나 추상적인 면이 없지 않아 있으나 밀로즈가 「헌시」에서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과거와 현실, 그리고 미래 사이에 있는 실존론적 서정에 입각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나는 그의 시가 생경하게 다가왔다. ‘국가와 국민을 구하지 못하는 시’가 근본적으로 일깨워주는 시의 사회적 기능은 차치하더라도 그러한 시를 ‘공개된 거짓말과의 야합, 참수당할 주정뱅이의 노래, 대학 이학년 학생의 독서물’로 자연스럽게 변주시키는 데서 크게 공감하였다. 그것이 나는 시의 위대한 힘이라고 생각했다. 신이 뱉은 말씀을 밀로즈가 언어로 바꾸어 놓은 것이라고 여겼다. 밀로즈에게 시는 사회적 기능을 통해 현실을 더 현실적으로 드러내는 시금석 같은 것이었다. 그에게 문학은 현실과 항상 맞닥트리고 있는 정치와 불가분의 관계라는 것을 잘 나타낸다는 점에서 시사성이 강했다. 이와 비슷한 예는 ‘우리는 가스실 문을 잠그고, 빵을 훔쳤다./ 다음 날이 전날보다 더 참기 힘든 것을 알면서’와 같이 인간존재의 냉정한 사실을 묘사한 「구라파의 아이」에서도 잘 드러내고 있다.
체슬라브 밀로즈는 폴란드에서 태어났지만 당시 미.소간의 냉전체제에 휩싸인 여건에서는 시인의 사회적.정치적 활동에 한계상황을 고려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캘리포니아대학교에서 슬라브 문학을 지도하게 된다. 그의 문학세계는 망명과 더불어 후기로 넘어가면서 이전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기울어져 아쉬움이 많이 남지만 어쨌든 시집 겨울 종소리에서 보여준 일련의 시사적인 작품은 파격적이고 도저한 것임에는 분명하다.
시를 쓰다가 시가 잘 안될 때는 그의 오래된 시집을 꺼내 다시 읽는다. 너무 많이 읽어서 그의 시가 내 시세계에도 무의식으로 내재되어 있다. 이렇게 잠재적으로 쌓인 그의 시가 나를 시인이 되게 하였다. 그의 시를 닮아서일까. 나의 시도 불편하고, 어둡고, 끈끈하고, 슬프다. 중심보다는 변두리를 좋아했고, 계파에 몸을 담기보다는 혼자 떠돌기를 좋아했다. 그래서인지 나와 나의 시는 계보가 없다. 추운 겨울밤을 울리며 떠도는 밀로즈의 ‘겨울 종소리’ 같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평택 들판과 서해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시 한 편 날려 보내는 아웃사이더 같기도 하였다. 여전히 불편함이 편하고, 어둠이 좋고, 슬픔이 더 반가운 것은 겨울 종소리에 내가 입은 내상이 더 단단하게 아물었기 때문이리라.
황순원의 「소나기」와 밀로즈의 겨울 종소리가 가져다 준 겨울방학의 설렘 끝에, 고등학교 신학기가 시작되고 열린 교내백일장에서 나는 쟁쟁한 문학 선배들을 제치고 장원을 하였다. 그것이 나에게 있어 문학을 시작하게 되는 하나의 큰 사건이자 계기가 되었다. 지금도 눈발이 내리는 그 해 겨울을 잊을 수 없다.
3. 죽음을 대하는 두 가지 관점
1980년대 초 내가 재수를 하고 있을 무렵 둘째 형이 군복무를 하다가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때 다가온 둘째 형의 갑작스런 죽음은 낯선 이방인의 흔적처럼 좀체 마음을 열 수 없을 정도로 혼란스럽고 고통스러웠다. 특히 남들이 당한 일을 내가 직접 겪고 나니 실감이 나지 않을뿐더러 세상이 곧게 보이지 않았다. 그 후로부터 죽음은 나에게 늘 부정적이고 폐쇄적인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시를 써도 시에 드러내는 것들이 “까마귀, 검은 산, 죽은 시” 등 어두운 색채로 나타났다. 그래서인지 나의 시에서는 밝은 시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대체로 어둡고 칙칙하다. 즐겨 읽은 시집 또한 “이상, 박인환, 세르게이 에세닌” 같은 요절한 작가들의 시집이었다.
죽음을 대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타자의 폭력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 재해나 질병에 의한 것이다. 전자의 폭력에 의한 죽음은 강자와 약자, 권력과 비권력, 아웃사이더와 인사이더 등이 내재하는 불평등, 부정의, 불공정에서 기인한 사건 또는 사태에 의해 주로 발생하였다. 역사적으로 돌이켜보면 수많은 양민들이 폭력에 의해 죽었다. 4.19혁명이 그랬고, 제주 4.3사건이 그랬고, 5.18광주항쟁이 그랬다. 시는 상처 난 기억을 들추어내 정직한 고백을 함으로써 독자에게 진정성이 있는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시는 진실할수록 독자와의 간극이 좁아진다.
나는 이제까지 중심부에서 겉돌면서 주변부의 시를 써왔다. 그래서 나의 시에 나타나는 소재나 대상은 늘 주위에서 맞닥뜨린 일상의 인물이자 사건, 사태에 휘말린 힘없는 군상들이다. 여기에는 이주노동자나 평범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지만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는 거친 목소리가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침묵을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자연재해나 질병에서 나타나는 죽음은 자연사, 고독사 등 죽음 본연의 공포나 고독감에서 오는 메타포들이다. 2020년부터 창궐한 코로나19가 삼 년째 여전히 한창이다. 코로나19로 인해 사람, 사회, 문화 간의 격리가 시작되고 인간의 기본적인 활동도 강제받기도 하였다. 갈수록 늘어나는 확진자와 그에 따른 수많은 격리자도 함께 발생하였다. 스스로의 거리두기는 인간의 정서와 관계를 고립시켰고, 단절시켰다. 그런 와중에 계절은 격리 없이 단풍 들며 왔다 갔고, 기일에도 비로 내렸다.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질병이나 죽음은 과거의 경험을 상상력으로 재현해내는 일종의 이미지에 가깝다 하겠다. 그래서 시의 분위기가 이미지에 따라 산뜻하거나 담백하게 느껴지는 것이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그만큼 시가 사람의 운명을 아름답게 할 수도 있다는 뜻인지도 모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어떤 죽음에 봉착하든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죽지 않거나 질병 때문에도 고통 받지 않을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떳떳한 죽음이 그릇되게 해석되어 온 세상에서 폭력을 행사한 당사자들이 올바르게 참회하는 법을, 그리고 그런 부류의 사람들에게 부끄러워하는 법을,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사랑하는 법을 깨우쳐 주고 싶다.
죽음은 역사의 저변에 존재하는 물리적인 현상이다. 항상 변화하고, 시간과 공간에 의한 가역성을 동반하기도 한다. 죽음은 역사를 이끌어가는 희생이나 어떤 대가라면 인식이나 실존의 한 부분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이 역사와 상관관계가 있고 역사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점차 사라져간다면 그 죽음에 대한 역사는 왜곡될 것이다. 내가 분노하고 시를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바로 이런 까닭에서다. 나는 리얼리스트나 실존주의자가 아니다. 다만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시를 쓰는 시인일 뿐이다.
4. 나의 독자들에게
어릴 때부터 바닷가에서 자라난 탓인지 바다가 좋았다. 힘들고 지친 몸을 이끌고 바닷가에 서면 바다는 언제나 내 편이 되어서 용기를 주었다. 그래서인지 내 시의 근원적인 출발은 바다도 그 대상이 된다. 바다는 무엇이든지 용서할 수 있고, 무엇이든지 포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또 바다는 생명을 태동하는 커다란 자궁이자 죽음을 받아주는 거대한 무덤이기도 하다. 논둑이 터져 다 자란 벼가 바닷물에 떠내려가거나 홍수 때면 죽은 가축들이 둥둥 떠다녔던, 바다에서 목격한 삶과 죽음의 이미지는 아주 강렬하여서 지금도 그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이외에도 바다는 사랑을 일깨워주기도 하였고, 이별에 대한 슬픔을 함께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내 시는 용서와 포용, 사랑과 이별, 삶과 죽음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김병호 시인에 의하면 나의 시는 “시어로 시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진득하게 삶의 진경을 찾아 그대로 옮겨내는 것이 그의 고유한 시법”이라고 지적한 사실이 있다. 나도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는 억지로 시를 꾸미지 않는다. 사람이 살아가는 과정이나 애환을 서사와 서정을 적절히 섞어낸다. 나는 사람 냄새를 좋아한다. 내 시에서 우러나는 사람 냄새가 독자들에게도 느끼게 해주고 싶다. 나도 안주하지 않고 시인답게 시를 쓰는 시인으로 남고 싶다.
계간 한국미소문학 2023. 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