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1주년 釜臨節 부림축제 한마당
기원절 D-1年, 내 생애 최고의 해를 만들자!
천기3년 천력 1월 28일 (양 2.19) 부산교회에서 부림절 61주년 기념식이 '기원절 D-1 년 내생애 최고의 해를 만들자!' 라는 모토아래 부림축제와 더불어 성대히 열렸다.
식구 및 평화대사 4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진행된 이번 행사에서 석준호 협회장은 "지금은 새로운 시대이며 모든 면에서 새로워져야 하는 때"라고 말씀하며 "인류의 메시아 구세주 재림주 참부모님을 살아 생전에 만나 축복을 받은 우리들임을 잊지말고 부림절을 맞이하여 하늘앞에 충과 효와 열을 다하여 실체적 천일국을 완성하는 자랑스런 부산 울산 교구 식구들이 되어달라."는 격려의 말씀하였다.
이번 행사는 1부 기념식, 2부 페스티벌의 순서로 진행되었는데 1부 기념식은 박종욱 교회장의 사회로 화합의 노래, 개회선언, 개회찬송, 임종보 교회장의 개회보고, 내빈소개, 시상, 석준호 협회장의 격려사, 정영석 부산동구청장의 축사, 최형욱 위원장의 축사, 김홍주 교구장의 기념사, 이광희 범일동장의 축사 순으로 진행되었다.
정영석 부산동구청장은 축사의 말씀에서 " 오늘 제61주년 부림절을 축하하고 문선명 총재님께서 제가 시무하고 있는 동구에서 통일교회를 출발하게 되었음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특히 세계적인 통일교 성지가 동구지역에 있어 자랑스럽습니다. 앞으로 이곳 부산 앞바다에 크루즈선이 오게 되면 전 세계사람들이 찾는 관광지로 부상하게 될 텐데 이때 통일교 부산 성지도 아주 뜻깊은 장소가 되도록 하는 성지성역화에 행정적으로 도울일이 있을대 최선을 다해 돕겠습니다."고 약속하며 축하의 말씀을 하였다.
부산동구청장은 벌써 3~4회 범냇골 성지를 둘러보고 외국인들이 동구청을 찾아올 때 통일교성지까지 안내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김홍주 교구장이 전해왔다.
최형욱 부산시의회 기획재경위원회 위원장은 축사의 말씀에서 "오늘 이렇게 제가 존경하는 문선명 선생님의 부산오심을 축하하는 자리에 축사를 하게 됨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하며 앞으로도 통일교가 발전하고 성장하여 이곳 부산에 더 큰 기반을 이루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축사의 말씀을 하였다.
김홍주 교구장은 기념사에서 " 통일교 세계성지인 범냇골이 있는 이곳 부산에서 맞이하는 제61주년 부림절에 존경하는 귀한 분들을 모시고 오늘 이 한 시간을 가지게 됨을 참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부디 부림절을 맞아 하늘앞에 진정한 충신이 되는 우리들이 되어 기원절 남은 1년동안 진심을 다해서 충효의 도리를 다 할 것을 결의하는 이시간이 되어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라고 말씀하였다.
이광희 범일동 동장은 "통일교 부산성지가 있는 범일동장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이곳 범일동 성지가 세계적인 성지로 조성되어 부산시민들도 모두 한번씩은 올 수 있는 관광명소로 개발해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라고 말씀하였다.
한편 기념일을 맞아 공로패 시상 및 장학 격려금 시상이 있었다. 시상은 협회장상, 교구장상, 장학격려금 수여로 진행되었는데 시상자는 아래와 같다.
* 협회장상 (3명)
- 박남욱 교구 사무국장, 허일구 장로회 회장, 미우라게이꼬 일본선교사회장
* 교구장 상 (9명)
- 이구치 가정순회사(동울산교회), 안정숙 권사(부산교회), 김수야 부인회장(동부산교회), 최잠수 부인회장(울산교회), 김영화 권사(북부산교회), 나가누마 유꼬 집사(남부산교회), 니시다 아께미 부인회장(서부산교회), 야마모또 지에미 집사(울주교회), 쯔루미 미나꼬 교회간사(부산교회)
* 장학격려금(4명)
- 고마쯔 가요꼬(부산교회), 후루하따 아유미 (울주교회), 세끼구치 히사미 (울산교회), 오기무라 하루꼬 (동울산교회)
2부 Festival 은 이경옥 식구의 사회로 성화 어린이 합창단의 합창, 북한예술단의 아코디온 연주, 가수 나현재의 노래, 한-일-필-몽-아프리카 다문화패션쇼, 이용우 전 KBS 악단장의 색소폰 연주, 성화학생의 DANCE, 울산다문화 합창단의 합창, 필리핀 민속춤, 일본 민속춤 등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다.
행사는 '우리의 소원' 전체합창 후 허일구 장로회장의 억만세 삼창으로 마무리 되었다.
부림절에 대하여
* 의의 : 참아버님의 부산 수난노정에 대한 깊은 뜻을 되새기며, 그 척박한 환경속에서도 하나님해방, 인류구원의 근원적 꿈을 이루어 나가셨던 위대한 절대신앙, 절대사랑의 전형노정을 체휼하며 말씀의 근원지요 하나님의 꿈의 출발지인 성도 부산에 오심을 전인류와 함께 경축하기 위한 기념절임
‘부림절(釜臨節)’은 참아버님께서 1950년 10월 14일 UN군의 도움으로 흥남감옥에서 풀려난 후 남하하여 1951년 1월 27일 부산초량역(현 부산역)에 도착한 날을 기념하는 날이다.(천기3년인 올해는 제61회 기념일임) 참아버님과 제자 김원필 선생은 이곳 부산에서 재출발을 위한 준비를 하셨다. 이곳 부산은 참부모님께서 섭리를 다시출발하신 출발지이며 통일교가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받아들이지 못함으로 2000년간 하늘이 준비한 모든 기반을 잃어버린 최악의 자리에서 출발하셨던 통일가 섭리는 형언할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끝없는 사탄의 방해와 모진 핍박속에서 또 수많은 배신과 갈등의 아픔을 품고 걸어가신 참부모님의 숭고한 섭리적 노정의 승리로 마침내 하나님을 해방하고 축복을 통해 모든 인류를 구원하시는 구세주, 재림주, 메시아, 참부모의 사명을 승리하시고 만왕의 왕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실체가 되었다. 이러한 승리의 첫 출발점이 바로 이곳 부산이다.
이처럼 참부모님의 부산에서의 고난노정의 깊은 의미를 되새기며 말씀의 뿌리요, 하나님 꿈의 출발지인 범냇골 성지를 품고 있는 성도 부산에 오심을 전 인류를 대신하여 기념하기 위해 제정되었다. 부림절 행사의 시작은 알 수가 없으나 교회초창기 당시 부산교구의 공직자와 식구들이 이날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기도회 모임 등을 진행해오다, 1980년대 이후 ‘부림제(釜臨祭)’라는 이름으로 이날을 경축하는 축제형식을 갖춰 진행해 오고 있다.
참부모님 부산노정
1. 부산도착(1951.1.27.)
1951년 1월 27일 우여곡절 끝에 하늘의 중심섭리는 피난 수도 부산(초량)에 닻을 내린 후 1월 31일 오후 3시경 40계단 부근에서 일본유학시절 지하 항일독립운동을 함께 했던 엄덕문씨와 감격적인 해후를 하고 그해 3월 6일까지 부면동 엄씨의 셋방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말씀과 몽시로 엄씨 부부가 자연굴복하면서 스승으로 극진히 모시게 되었고 엄씨의 누나인 엄순태씨까지 제자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2. 원리원본 집필 개시(1951년 5월 11일)
동년 4월 하순까지 약 보름동안 부산 제3부두노동을 하시는 동안 초량의 최하급 노동자 숙소에서 10일간 지내시기도 하셨고, 이후 서구 동대신동 왼편 구덕산 너머의 옥중제자 김원덕씨 집에서 보름가량 머무시면서 5월 11일을 시작날짜로 원리원본의 집필을 본격적으로 시작하셨다. 동년 8월까지 범냇골 어귀의 나가야(해방 전 전기회사의 직원 사택)에서 수제자인 김원필씨와 4개월간 하숙하시며 원리원본의 집필을 속행하시는 동안 이기완 할머니를 비롯한 평앙시절의 식구와 해방 전후 서울시절에 친숙했던 이들이 방문하기도 하였다.
3. 범냇골 토담집 시대(1951. 8. ~ 1953. 1.)
1951년 8월 부산시 동구 범일6동 1513번지에 세워진 사상 최초의 통일교회 “범냇골 토담집”, 범냇골 토담집은 아버님께서 김원필, 옥세현, 엄덕문씨등의 보조와 송문규 소년 형제들 잔심부름으로 손수 지으신 움막집으로서 두 평도 채 안되는 단칸방에다 허리 펴고 설 수도 없는 낮은 지붕, 맨 흙바닥에 유지를 깐 방바닥, 그 아래 도랑물 흐르는 소리, 궂은 날이면 비새는 지붕... 원시인의 손자국을 상상케하는 척박한 땅 위 움막집이었다. 이러한 토담집에서 김원필씨를 자녀 대표로 삼고 부모로서의 정성과 수고와 애정을 기울시시며 원리원본의 집필을 속행하셨고, 밤이면 부산도성을 보시고 명상에 잠기시며 새벽이면 산에 올라 서러운 하나님의 심정을 해방시켜드리기 위하여 눈물로 기도하셨다. (눈물의 바위).
4. 원리원본 집필 완료 (1952. 5.10)
이듬해 1952년 5월 10일 1년만에 원리원본의 집필을 완료하셨고, 그날 오후 범천장로교회 강현실 전도사가 아버님을 만나 서너 차례 말씀 듣고 기도하는 중 감화를 받아 입교하였으며, 그 뒤 김재산 권사가, 동년 12월 1일에는 이요한 목사가 옥세현씨를 통해 아버님을 대면하고 곧 바로 입교하였다. 그 당시 아버님의 겉모습은 비록 중노동하는 노동자 타입에다 퇴색한 국방색 한복 바지, 고동색 낡은 잠바, 미군이 신다 남은 눅눅한 양말, 대님도 매지 않은 채 걷어 올린 바지였으나. 뜻을 따르던 이남의 동지들과 이북 식구들을 찾기 전까지 가족에게 연락하지 않으실 정도로 식구 대한 사랑이 지극하셨으며, 돈을 있는 대로 다 털어서 엄청나게 많은 쇠고기를 사다가 식구들에게 나눠 먹이시고 자신은 단벌이면서 누가 오면 옷을 사 주시곤 하실 정도로 철저하게 이타적인 삶을 사시며 하늘의 소명을 다하셨다.
[작성 : 비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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