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설명 |
내포의 사도가 살던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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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36°45′23″동경 126°49′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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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 1구 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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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32-89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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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1)335-06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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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yeosaul.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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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master@yeosaul.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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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례원 성당 (041)334-7860 |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루도비코, 1752-1801년)의 생가 터가 있는 여사울은 현재 신례원 본당의 공소가 있으며, 주민의 80퍼센트 이상이 천주교 신자로 구성돼 있는 선교의 요람이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김진후(金震厚), 성 김대건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의 출생지인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있다.
농민 출신으로 충남 예산군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의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 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하여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히게 된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한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커져 갔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 바위에서 50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출처 :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여사울 - 신앙의 못자리(이존창의 생가)
천안에서 예산 쪽으로 한참을 가다 보면 신례원 삼거리가 나타난다. 이 곳에서 우회전하여 서해안의 합덕 쪽으로 향하다가 십 리쯤 되는 곳 오른편에서 여사울 마을을 만날 수 있다. 바로 그 곳에는 현재 이존창 생가 터가 조성되어 있다. 그리고 생가 터에서 다시 서쪽으로 가다 보면 두 개의 첨탑으로 유명한 합덕 성당이 나오며, 성당을 조금 지나 왼편으로 십리쯤 가다 보면 신리 교우촌이 나온다. 이처럼 이 지역에서는 한국 천주교회에서도 유명한 사적지들을 자주 만날 수 있으니, 바로 이곳이 내포(內浦)라 불리던 충청도 교회의 요람지였다.
충청도의 복음 전파는 '여사울'(餘村,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서 시작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의 고향이다. 경주 이씨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25세 되던 1776년에 양근 지역의 유명한 남인 학자 권철신(암브로시오)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그러다가 권철신의 아우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과 중인 김범우(토마스)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뒤, 다음과 같이 여사울로 내려와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다.
이존창은 '루도비코 곤자가'라는 세례명으로 영세를 하고, 자기 스승(권일신)에게 고향에 돌아가 이번에는 자기 스스로 전교하라는 사명을 받았다. 그는 고향에 돌아가 잠깐 동안에 자기 가족과 친천과 친구, 그리고 그의 지식과 덕행의 평판에 끌려오는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켰다.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회의 기초는 이렇게 다져졌다. 그때부터 내포 지방은 늘 열심한 천주교인들과 훌륭한 순교자들의 못자리가 되어 왔다(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상, 312면).
고향으로 돌아간 이존창의 활동은 참으로 눈부셨고, 그 결과는 곧 내포 공동체의 설립으로, 차령 산맥 동쪽으로 복음이 확대되어 나갔다. 또 이존창은 한국 천주교회의 지도층에 끼여 1786년 이래 약 2년 동안 지속된 가성직제(假聖職制) 아래 신부로 임명되어 성사를 집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여사울 이존창의 집은 자연스럽게 교우들의 집회소이자 숙소가 되었다.
그러나 박해가 시작되면서 이존창은 자주 시련과 좌절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1791년의 신해박해와 1801년의 신유박해로 연이어 고통을 받게 된 그는 배교와 회두를 거듭하였다. 특히 처음 박해 때 형벌과 회유가 번갈아 계속되면서 그의 마음은 점차 흔들리게 되었고, 마침내 천주교를 요술이라고 비판하고 말았다. 교회 기록에서는 이 사실을 두고 "내포 교우들에게 가장 슬프고도 가장 창피스런 배교였다." 하고 설명하였다.
우리는 이존창의 배교를 여러 가지로 해석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마음에 진정한 회두(回頭)가 있었음을 기쁘게 생각한다. 신유박해로 서울로 압송되어 판결을 받고 공주로 이송된 그는 4월 10일(음력 2월 28일)에 희광이의 칼을 받게 되었다. 이 때 그의 목은 여섯 번째 칼날을 받고서야 떨어졌는데, 친척들이 그의 시체를 거둘 때는 머리가 목에 단단히 붙어 있었고, 단지 실날같은 훙터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1984년 가을에 신례원 본당에서는 구전을 토대로 하여 여사울의 생가 터를 찾게 되었다. 그런 다음 서울 정릉 본당의 협조를 얻어 생가 터를 발굴한 결과 중국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이는 고상, 성모상, 성의패들이 나옴으로써 생가 터가 분명함을 입증할 수 있었다. 이 때 발굴된 유물들은 절두산 순교 기념관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오고 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248호(1999년 9월호), pp.115-116]
[사진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내포지방이란?
조선 후기 18세기 후반은, 유교적 신분질서가 서서히 붕괴되어가고, 경제적 능력만 있으면 양반 신분을 살수도 있고 과거에 합격하기만 하면 상민도 얼마든지 양반이 될 수 있을 정도로 신분변동이 심했던 사회였다. 그러나 정치의 부패와 착취는 더욱 더 심해져서 백성들은 압제(壓制)에 시달리며 새로운 세상을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1770년대, 사회 개혁을 꿈꾸던 일부 남인 계통 실학자들은 중국에서 들어온 천주교 서적을 연구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닫고 신앙으로 받아들였다. 아직 선교사가 들어오지도 않은 상태에서 천주교 신앙은 순전히 조선 사람들의 자각에 의해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 이어 충청도 내포 지역으로 전파되어 나갔고, 그 중심에 내포 출신 이존창이 있었다.
1. 내포지역의 경제적 특성
‘내포(內浦)’란 삽교천과 무한천을 중심으로 펼쳐진 서산, 당진, 홍성, 예산, 아산, 청양 지역을 말한다. 1861년에 김정호가 완성한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를 보면 조선후기 내포 지역은 지금과 많이 달랐다. 바닷물이 삽교천과 무한천을 따라 상당히 위까지 올라옴으로써 너른 평야와 함께 신례원과 합덕 아래쪽으로는 아주 너른 갯벌이 형성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로 밀물 때를 맞춰 적어도 합덕과 신례원까지는 꽤 큰배도 올라왔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포 지역은 금강 하구의 강경보다는 못했겠지만, 육지와 바다의 물산이 거래되면서 충청 북부의 수운(水運)과 교통의 중심지로서 많은 포구가 발달하여 경제적으로 상당히 번영했던 곳이었다. 또한 구릉지가 개발되고 간척 사업이 진행되어 경작지가 늘어나면서 전통적 양반인 사족(士族)에 맞먹는 신흥 향반(鄕班) 세력이 성장했던 지역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지역은 타 지역에 비해 경제적으로 발전되어 있었으며, 한양과 가까운 지리상의 이점으로 인하여 교류가 활발하다보니, 새로운 사조(思潮)를 빨리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하고 있었다.
2. 내포지역의 사상적 특성
내포 지역은 고려말 성리학 수용에 앞장섰고, 다른 지역에 비해 조선시대 성리학적 분위기가 상대적으로 경직되지 않았으며, 조선후기에는 실학자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근대화 과정에서도 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16세기 기호(畿湖-경기도와 충청도) 유학은 서경덕(徐敬德) 계열이었는데, 서경덕과 그의 제자인 이지함(李之函), 서기(徐起), 홍가신(洪可臣) 등은 신분을 초월하고 상공업을 중시하는 학풍을 전개하였다. 김육이 주장한 대동법 실시에 크게 기여한 포저(浦渚) 조익(趙翼)은 신양 사람이었고, 남인의 영수로서 사도세자를 변호하고 탕평책을 추진하였으며 정조 대에는 영의정까지 지내면서 신해통공(서울의 시전 상인들이 갖고 있던 상업 독점권을 폐지하여 상업의 발달을 촉진시킨 조치)을 주도하고 천주교인을 두둔하였던 채제공(蔡濟恭)은 청양 화성 사람이었다. 또한 성호 이익 계통의 실학자들도 많았으니, 이병휴, 이용휴, 이철한, 이가환, 이재위 등이 그들이다. 그 중 고덕 사람 이용휴의 아들 이가환(李家煥)은 뛰어난 국학자로서 채제공의 후계자로 지목되었으나 1801년 신유박해 때 벽파(辟派)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19세기에 활약한 추사 김정희도 내포와 연관이 깊은 인물임은 잘 알려져 있다. 이로 볼 때, 내포에서는 타 지역에 비해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시대의 변화를 주도했던 학문적 전통이 형성되어 내려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전통은 천주교의 수용 뿐 아니라, 동학농민운동이 이 지역에서 활발하게 일어난 점과 구한말과 일제통치 하에서의 구국투쟁에서도 드러난다.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이 양인 신분으로서 성호의 제자이자 양명학자였던 이기양(李基讓)에게서 수학하다가 경기도로 가서 역시 같은 학통인 권철신 문하에 들어가 결국 천주교 신자가 되는 것도 다 이러한 내포의 사상적 특성이 바탕이 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존창은 명문가 양반들과 교류하면서도 자기 재산을 나누어 천민들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며 새로운 세상을 추구했던 ‘진취적이며 개혁적인 지식인’이었다.
3. 천주교와 내포
충청도에는 순교지와 교우(敎友)촌 등 천주교 성지(聖地)가 많은데, 특히 내포 지역에 합덕 솔뫼, 신암 여사울, 합덕 신리 공소(公所)와 구합덕 성당, 해미 순교지, 홍주 감영터, 당진 신평 성당, 아산 공세리 성당 등 관련 유적지가 집중되어 있는 연유는 이곳이 ‘한국 천주교회의 못자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천주교는 처음에 서울과 경기도를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이존창에 의해 현재의 충남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이후 이 지역은 초기 천주교 신앙의 중심지면서 동시에 가장 가혹한 박해의 피해지가 되기도 하였다.
이곳은 1839년 기해박해에서 1866년 최대최후의 병인박해까지 베르뇌, 페레올, 다블뤼, 오메트르, 위앵 등 파리외방전교회 계통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장기간 거처하면서 선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으로 나중에 조선 교구 제 5대 교구장이 된 다블뤼 주교는 1845년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하여 1866년 순교하기까지 가장 오랫동안 조선에서 활동한 선교사였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한국 천주교회사와 조선 순교사의 편찬이다. 그는 1857년부터 자료를 발굴해 그것을 프랑스어로 옮겼으며 목격 증인을 찾아 증언을 수집하는 데 힘썼다. 특히 1859년을 전후해 그는 윤지충 등 주요 순교자들의 전기를 파리 본부로 보내는 한편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을 위해 ‘조선사에 관한 비망기(備忘記)’와 ‘조선 순교사에 관한 비망기’를 저술해 1862년 모두 파리로 보냄으로써 후세의 귀중한 사료를 탄생시켰다. 1874년 샤를르 달레 신부가 편찬한 《한국 천주교회사》는 이 자료들을 정리한 것이다. [출처 : 여사울 홈페이지]
내포의 사도 이존창(李存昌) 루도비코
충청도 아산지방으로부터 태안반도에 이르는 일대의 평야를 내포평야라고 한다. 이 내포평야의 접경에 천안군 '여사울'이란 곳이 있다. 지금의 행정구역상으로는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에 해당하는 곳으로, 이곳 여사울에서 이존창 루도비코(1752-1801년)는 농가의 양민으로 태어났다. 그는 비록 양민 신세이나 가세가 넉넉하여 집안에서 글공부를 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타고난 재주가 비상하였고 성장하면서 변혁의 열의가 깊어져. 마침내 학문에 대한 불타는 열망으로 스승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삼남지방에 그 이름이 자자하던 권일신의 형제들을 알게 되어 그의 문하에 들어가 제자가 되었다.
권일신은 젊고 총명한 농민 출신의 학자인 이존창의 자질과 품성에 이끌려 그에게 마음을 쓰고 있던 중 천주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스승은 이 신앙의 은혜로움을 제자인 이존창에게 전하였다. 스승은 제자에게 특히 천주교에서 믿어야 할 중요한 신조뿐 아니라 천주교인의 본질과 그 실천방법까지 철저히 전수하였다. 이렇게 하여 이존창이 루도비코라는 세례명으로 천주교 신자가 되었을 때, 스승 권일신은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그에게 일깨워주었다.
이존창은 그가 얻은 신앙을 혈족과 고향 사람들과 함께 나누어야겠다는 열의에 찬 마음으로 여사울로 돌아왔다. 그는 사도적 열의에 불타 가족과 친척, 그리고 벗과 이웃들에게 천주교를 전하였고, 얼마 뒤에 그의 지식과 덕행을 보고 그를 따르는 신자수가 삼백 명에 이르렀다. 이로써 저 유명한 내포 천주교외의 기초가 이루어진 것이다. 이존창에 의해 이루어진 내포 천주교회는 한국 복음선교의 효시가 되는 명례방 집회 다음의 시자 공동체로서, 그뒤에 생긴 다른 어느 공동체보다 열심했다. 그리고 이후 백년 동안의 박해 속에서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여 한국교회의 굳건한 토대가 있었다. 이렇게 내포지방에 널리 복음을 전한 그를 우리는 '내포의 사도'라고 부르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은 더욱 열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단 한 명의 선교사도 없이 창설된 한국 초대교회의 평신도의 임시 성사 집행기에 이승훈, 권일신, 유향검과 함께 평신도 임시 성직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어 내포교회를 이끌었다. 그후 북경 주교로부터 성품성사를 받지 않은 채 성사와 전례를 집행하는 것은 잘못이라는 연락을 받고 곧 중단하였다. 그리고 비로소 사제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그는 평신도 지도자로 여전치 열성적으로 전교활동을 하면서 윤유일, 지황, 최인길 등을 도와 사제 영입운동을 전개하며 주문모 신부를 맞아들이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의 놀라운 전교활동에 대해 달레 신부는 "한국천주교회사"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그는 위대한 재능에다 사람의 마음을 잡는 특별한 재주까지 겸하고 있어서 날마다 새로운 사람들이 그에게 이끌려왔다. 그의 전교에 저항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러므로 이 지방의 천주교 신자수는 현저하게 증가하였다. 신앙을 받아들이는 집안이 이제는 선비들의 집안뿐만 아니라 농부, 노동자, 서민, 빈민들까지 확대되었고 모두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기쁜 소식을 듣기 위해 멀리서 무리를 지어왔고, 종종 다른 신자들의 집에서 여러 날을 머물기도 하였다." 이러한 이존창의 헌신적인 전교활동으로 예산, 아산, 면천, 당진, 해산, 서산, 덕산, 태안 등 내포지방 전역에 복음이 전파되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놀라운 활동은 결국 조정의 주목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791년 제사문제로 '잔산사건'이 일어나 윤지충, 권상연이 순교하게 되고, 이로 인해 전국각지에서 천주교에 대한 박해가 일어나자 이존창도 체포되어 충청감영에서 배교를 강요당하게 되었다. 이때가 그에게는 최대의 시련이었다. 극심한 고문과 교활한 꼬임에 빠져 마음이 흔들리고 생각은 착잡하게 엇갈렸다. 그러다 쇠약해진 몸과 가물거리는 정신으로 비록 한때나마 일선에서 물러날 것을 약속하여 석방되었다.
이 한때의 나약함은 그에게 크나큰 아픔이었다. 이존창은 베드로 사도처럼 뉘우치며 배교에 대한 가책과 고통속에서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는 자신에 대한 기대와 실망이 교차한 이곳에서 다시 전교활동을 펴고자 했으나 이번에는 그의 형이 나서서 그를 방해했다. 어쩔 수 없이 이존창은 자신의 땀이 어린 내포교회를 떠나 새로운 땅으로 사시로 결심하고 홍산을 거쳐 금산에 이르러 회개의 새 삶을 시작했다. 그는 지난날의 배교를 깊이 뉘우치며 더욱 열심히 계명을 지켰고 전교에 힘을 쏟았다. 그래서 그의 눈물과 땀으로 전교한 홍산과 금산지방에서도 박해중에 불굴의 증거자들이 잇달아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나라 최초의 사제인 성 김대건 신부님의 집안도 이존창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는데 김대선 신부님의 할머니가 그의 조카딸이 된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나라 두 번째 사제이며, 12년 동안의 사목활동을 통해 한국교회의 오늘이 있기까지 큰 기여를 한 최양업 신부님은 그의 생질의 손자가 된다. 이처럼 그가 전교한 친인척 가운데에서 사제가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전교로 입교한 한국 초대교회의 신자들에 의해 교회가 유지되었다고 할만큼 그의 활동은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오늘날 한국 교우의 상당수가 이존창의 전교로 입교한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그의 공헌이 지대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1785년, 한 배교자의 밀고로 포졸들이 최인길 회장의 집을 급습하여 주문모 신부를 체포하려고 했던 사건이 일어나 천주교 신자 색출소동이 벌어졌다. 주문모 신부에게 충직하게 협력했던 이존창은 다시 체포되어 충청감영으로 연행되었고, 신문을 받고 천안으로 이송되어 이번에는 연금생활을 겪게 되었다. 6년동안의 연금 생활은 큰 시련이었지만 그는 감사라는 마음으로 기도와 명상을 통해 주님께 향한 신심을 더욱 깊게 하였다.
그러던 중 정조가 제위 24년만에 승하하고 순조가 열한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정순왕후 김계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고 벽파가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는 정치권력의 변동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는 최초의 전국적인 박해인 신유박해를 맞게 되었다. 이때 이존창은 다시 체포되어 공주로 압송되었고 서울에서 체포된 한국교회의 지도자들과 대질하기 위해 서울로 끌려가 국청에서 거듭 신문을 당하였다. 이미 한차례 뼈아픈 실수를 경험했던 이존창은 이제 순교의 열의에 불타올랐다. 스스로 충청도 지방 천주교 신자들의 지도자임을 시인하고 모진 곤장에도 의연한 모습으로 굴하지 않았다.
그는 1801년 4월 8일 명도회 초대회장 정약종과 초대교회 지도자 최창현 등이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한 이틀 뒤인 4월 10일에 여섯 번이나 내리친 칼날 아래 치명하였다. 며칠 뒤 친지와 동료들이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장사를 지냈는데 이존창의 목에는 칼자국만이 흉터로 남았을 뿐 잘리 목이 단단히 붙어 있어서 보는 이들을 놀라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내포의 사도 이존창, 그의 일생은 사도적 열성으로 불탔고, 전교업적은 교회사의 뚜렷한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그도 우리와 똑같은 인간적 약점을 멍에처럼 지니고 있어 한차례 배교의 아픔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약점 때문에 더욱 그를 가까이 하고 싶어진다. 그의 삶은 잘못을 참회하는 깊이만큼 짙고 치열하였다. 이 뉘우침과 회개의 새 삶이 그를 영원한 '내포의 사도'가 되게 하고 있다. 역사는 내포를 열심한 순교자들의 못자리로 기억하게 될 것이며, 그때마다 이존창은 그곳의 사도로 함께 기억될 것이다. [출처 : 경향잡지, 1999년 11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대전교구, 성지사목에 발벗고 나섰다
대전교구가 교구의 뿌리인 내포천주교회 연구와 개발에 부쩍 열을 올리고 있다.
내포천주교회는 한국 초기교회에서 가장 활발했던 전교 지역. 서울에 이어 천주교를 받아들인 내포지역은 거듭되는 박해 속에서도 곳곳에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전국 각 지역으로 천주교를 전파하는 데 기여했다.
교구는 지난 7일 솔뫼성지에서 내포천주교회와 내포의 사도 이존창에 대한 세미나를 마련한 데 이어, 교구 평신도사도직협의회도 내포천주교회에 신앙을 뿌린 이존창의 삶과 선교적 열정을 배우고 본받기 위해 ‘내포의 사도 이존창 루도비코제’를 10월 26일부터 한달간 개최한다.
또한 내포의 사도 이존창의 생가터가 있는 여사울 성지와 인근 손자선 토마스 성인이 살던 곳이자 다블뤼 안 주교가 사목하던 신리 성지의 개발 사업이 추진 중에 있다.
특히 이존창 생가터를 관할하고 있는 신례원본당은 그동안 방치돼온 이곳의 중요성을 새롭게 인식하고 올 2월 최교성 신부가 부임하면서 성역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본당은 먼저 성지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곳을 찾는 순례객의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최근 주차장 부지 등 400여 평을 구입하고 국도에서 성지로 들어가는 입구를 버스가 들어갈 수 있도록 넓히는 한편 지방 정부의 지원으로 길이 200여m 도로를 새로 포장했다. 마을 안에 자리잡고 있는 이곳에는 현재 290여평 공간에 이존창 생가터 안내문과 유적비, 십자가, 제대가 설치되어 있을 뿐이다.
본당은 앞으로 이곳에 이존창 생가 복원, 십자가의 길 조성, 강당 건립 등을 계획하고 있으며 이를 위해 2000여 평의 부지를 매입하기로 하고 우선 1차로 400여평을 농촌본당의 어려운 실정에서 힘겹게 마련했다.
최교성 신부는 “작은 일부터 차근차근 해나가고 있지만 가난한 농촌 신자들의 힘만으론 부족하다”며 성지 성역화에 뜻 있는 전국 신자들의 참여를 호소했다.
여사울에서 10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신리 성지는 지난 2월 샬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수녀들이 파견되면서 성지 개발에 적극 관심을 쏟고 있다. 성인 손자선이 살던 곳이며 제5대 조선교구장 다블뤼 주교가 초기 교회 공동체를 사목하던 이곳에는 한때 공소로 사용했던 낡고 쓰러져 가는 건물이 역사의 흐름을 말해 주고 있다.
1964년 초가집 지붕을 양철지붕으로 바꾼 이 낡은 건물은 지난 8월 태풍과 집중호우로 마루바닥까지 물이 들어차 바닥이 썩어가는 등 붕괴 위험에 처해 있다.
성지 담당 권영옥(마리엣다) 수녀는 “초기 교회부터 마무리 박해 때까지 신앙의 요람지로 많은 신자와 순교자를 끊임없이 배출해낸 이곳의 중요성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며 관심을 요청했다.
권 수녀는 또 인근 손자선 성인의 선산으로 전해지는 야산이 1972년과 1985년 개발되면서 머리 없는 32기의 시신과 묵주, 구전으로 내려오던 손선지 순교자 가족 14기의 시신이 발견돼 인근 공동 묘지에 안장돼 있다면서 이들 시신도 이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한편 대전교구는 3년 전부터 교구내 성지에 전담 신부를 파견하기 시작, 현재 솔뫼 갈매못 다락골 해미 성지에 전담 신부를 두고 있으며 지난 3월에는 교구 성지위원회에서 성지사목 규정도 만드는 등 성지 사목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교구 사무처장 윤인규 신부는 “대전교구 내에는 교회사적으로 중요하면서도 아직 알려지지 않아 개발이 필요한 곳들이 있다”며 그러나 “성지나 사적지는 개발, 연구, 사목의 3박자가 함께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도움 주실 분:우체국 310714-01-001089(예금주 여사울성지), 농협 481098-51-011189(예금주 신리성지사회복지법인)
<평화신문, 제693호(2002-09-29), 이연숙 기자>
출처--가톨릭정보 http://www.catholic.or.kr/
여사울 성지
여사울은 내포의 사도라 불리는 이존창 루도비코가 태어난 곳이고, 그가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교 활동을 펼친 곳이다. 당시 여사울은 아래 지방(청양, 홍주, 홍산, 대홍, 보령 등)에서 서울로 가려면 이곳에서 배를 타고 아산만을 건너야 하는 통행로였다. 이 마을은 옛부터 부자들이 많이 살아 온통 집들이 기와집 뿐이어서 마치 서울과 비슷하다 하여 ‘如서울” 이라 불렸던 것이 여사울이 되었다고 한다. '내포(內浦)'라 함은 충남 아산(牙山)에서 태안(泰安)까지의 평야 지대를 일컫는 지명으로, 삽교천(揷橋川)과 무한천(無限川)의 두 물줄기가 흐르는 충남 중서부 지역의 총칭으로 사용된다. 이 지역은 이존창을 비롯해 김진후(金震厚), 성 김대건 신부 등 많은 순교자를 배출해 낸 곳이다. 김대건의 출생지인 합덕, 이존창의 출생지인 여사울 등 유서 깊은 교우촌과 본당들 그리고 해미, 덕산 등의 순교자들이 이 지역에 산재해 있다. (글 출처- http://www.paxkorea.co.kr )
여사울 이존창 루도비코 생가터
농민 출신으로 충남 예산군 여사울에서 태어난 이존창은 이단원(李端源)이라고도 하는데 진리의 빛을따라 멀리 경기도 양근까지 찾아가 초기 교회 창설자의 한 사람인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열렬한 신앙심과 학구심으로 초기 교회의 가성직단(假聖職團)의 일원이 되어 고향인 충청도 지방 복음 선교의 사명을 받았다. 1786년 가성직자 시절 이승훈이 주교되고 10인의 신부 중 이단원도 신부가 되어 2년간 성무를 집행하였다. 그는 고향으로 내려와 가족은 물론 내포 지방 일대에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훗날 '내포의 사도'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그는 가성직 제도가 교리에 어긋남을 깨닫고 신부 영입을 위해 윤유일(尹有一), 지황(池璜)등에게 여비를 주어 중국 북경을 찾게하여 마침내 주문모 신부를 맞이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한다. 1791년 신해박해 때 그는 다른 수많은 천주교인들과 함께 관헌에게 붙잡히게 된다. 혹독한 고문과 가혹한 매질은 그로 하여금 배교의 쓴맛을 보게 한다. 그 뒤 양심의 가책으로 내포 지방을 떠나 홍산(鴻山)으로 이사하여 전날의 잘못을 뉘우치고 전보다 더욱 열심히 신앙을 지키며 전교에 힘썼다. 그 결과 내포 지방은 다른 어느 지방보다도 교세가 커져 갔고 이에 따라 박해 때마다 수많은 순교자를 배출하게 됐다.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집안도 그의 전교로 입교했는데, 김 신부의 할머니는 그의 조카딸이 되며, 최양업 신부도 그의 생질(甥姪)의 손자이다. 더욱이 오늘날 조선 교우의 거의가 그가 개종시킨 교우들의 자손이라 할 수 있을 만큼 그가 전교 활동에 끼친 공헌은 지대하다. 1795년 말에 이르러 그는 다시금 지방 관리들에게 체포되고 고향인 천안으로 옮겨져 6년 동안 연금 생활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1801년 다시 체포돼 서울로 압송된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정약종과 함께 사형 선고를 받고 충청도의 감사가 있는 공주(公州)로 호송되어 황새 바위에서 50세를 일기로 참수된다.
순교자
◆ 순교자 이존창 루도비코(1752-1801)
이존창(李存昌)은 이단원(李端源)이라고도 하는데 진리의 빛을따라 멀리 경기도 양근까지 찾아가 권일신으로부터 교리를 배우고 세례를 받았다.1786년 가성직자 시절 이승훈이 주교되고 10인의 신부 중 이단원도 신부가 되어 2년간 성무를 집행하였다. 진산 사람 윤지충과 권상연의 신주 소각 사건으로 일어난 신해박해(1791년)때 공주 감영에 잡혀가 고문을 받으면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다. 취조관으로부터 경기도, 충청도 지방에서 가장 개심시키기 어려운 자라는 말을 들을 정도였다. 그러나 계속된 모진 고문에 잠시 마음이 약해져 천주교를 멀리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풀려났으나 곧 후회하고 고향에 내려와 다시 열심히 전교하였다.가족에게 환난이 올 것을 염려한 나머지 홍산으로 이주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주 신부를 보좌하여 사목을 돕다가 다시 잡혀 결국1801년에 공주 감영에서 순교했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 순교자 김광옥 안드레아 ( ? -1801년)
충청도 예산 여사울의 중인 집안에서 태어난 김광옥(金廣玉) 안드레아는 오랫동안 그 지방의 면장(面長)을 역임하였다. 본래 그는 훌륭한 자질을 갖고 있었지만, 지나치게 사나운 성질로 인하여 모두가 무서워하였다. 1816년 대구에서 순교한 김희성(프란치스코)은 그의 아들이다. 안드레아는 50세쯤 되었을 때, 같은 여사울에 살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그의 성격을 잘 알고 있던 이웃들은 이때 그 사실을 알고 몹시 놀라워하였다. 이후 안드레아는 드러나게 교리의 본분을 실천하면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다. 매일 교우들과 한 자리에 모여 아침저녁으로 기도를 드렸고, 사순절마다 금식재를 지키고 갖가지로 극기 행위를 실천하였다. 그러면서 마침내 이전의 성격을 극복하고 어린 양과 같이 되었다.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안드레아는 자신이 입교시킨 친척 김정득(베드로)과 함께 성물과 서적만을 지닌 채 공주 무성산으로 들어가 숨어살면서 오로지 교리를 실천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이름이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포졸들은 그들의 종적을 쉽게 찾아냈다. 이후 안드레아는 예산으로, 베드로는 홍주로 압송되었다. 예산 현감은 김광옥 안드레아가 체포되어 오자 즉시 공범자들을 대고 천주교 서적을 내놓으라고 명하였으나, 그는 이를 거부하였다. 두 번째 신문에서도 그는 한결같이 신앙을 증거하면서 다음과 같이 용맹함을 드러냈다.
“모든 언약이나 위협이 소용없습니다. 다시는 제게 물어보지 마십시오.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고, 열녀는 두 지아비를 따르지 않습니다. 사또께서는 임금님의 명령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저도 천주의 명령을 거역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저는 제 대군대부(大君大父)를 배반할 수 없습니다. 만 번 부당합니다. 우리 천주께서 저의 비밀한 생각과 감정과 의향을 보고 계시므로 마음속으로라도 죄를 지을 수는 없습니다.” 현감은 안드레아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매질을 시켰으나 헛일이었다. 세 번째, 네 번째 신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후 안드레아는 감사의 명에 따라 김정득 베드로와 함께 청주로 이송되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서로를 권면하면서 형벌과 옥중의 고통을 견디어냈으며,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어 8월 21일(음력 7월 13일)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여기에는 ‘그들의 고향인 예산과 대흥으로 압송하여 참수하라’는 명령이 덧붙여졌다. 당시 안드레아에게 내려진 선고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천주교에 깊이 빠져 생업을 버리고 고향을 떠나 숨어 살면서 제멋대로 (교리를) 외우고 익혔으며, 천주교와 관련된 물건들을 감추어 두었다.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십계를 버리기 어렵다고 하면서 ‘한 번 죽는 것이니 달게 받겠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그 죄상을 생각해 보니 만 번 죽여도 오히려 가볍다.”예산까지 내려오는 동안 안드레아와 베드로는 그 동안의 형벌로 인해 걸음을 뗄 수조차 없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하느님이 주신 용기와 힘으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헤어질 시간이 되자,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이 손을 마주잡으며 “내일 정오, 천국에서 다시 만나세.”라고 작별 인사를 하였다. 이튿날 안드레아는 들것에 실려 예산 형장으로 가면서도 큰 소리로 묵주신공을 바쳤다. 또 지정된 장소에 이르자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부탁한 뒤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기도를 마친 다음, 목침을 가져다 스스로 그 위에 자신의 머리를 뉘였다. 그리고 두 번째 칼날에 목숨을 바쳤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5일(음력 7월 1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60세 가량이었다.
◆ 순교자 김희성 프란치스코 (1765-1816년)
교우들 사이에는 ‘경서’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진 김희성(金稀成) 프란치스코는, 1765년 예산 여사울(현 충남 예산군 신암면 신종리)의 부유한 중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801년 예산에서 순교한 김광옥(안드레아)은 바로 그의 부친이다. 프란치스코는 어려서부터 전통 학문을 배워왔으나, 아버지가 신앙을 받아들인 이후에는 이를 버리고 천주교 교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되어 기도와 애긍 생활을 실천해 나갔으며, 언제나 영혼을 구하는 일에 힘쓰게 되었다. 1801년 아버지가 순교하자, 프란치스코의 열성은 날로 높아져 갔다. 그리고 아버지의 모범을 따르겠다는 그의 의지는 더욱 굳어져만 갔다. 이후 프란치스코는 모든 재물을 버리고 경상도 일월산에 있는 영양의 곧은장으로 들어가 가족과 함께 생활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금욕 생활을 하면서 여러 가지로 고신극기를 실천하였다. 또 급한 성격을 극복하는 데 노력한 결과, 오래지 아니하여 양순함과 인내의 모범이 되기에 이르렀다. 1815년 3월, 을해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되어 밀고자가 포졸들을 이끌고 곧은장으로 쳐들어왔다. 그때 프란치스코는 산에 올라가 있었는데, 포졸들이 내려오라고 소리치는 것을 듣고는 아들 문악이에게 이렇게 당부하였다. “나는 천주의 명을 따라 가야 한다마는, 너는 나를 따라오지 말고 온 집안을 보살피되, 특히 할머니를 극진히 모시거라.” 그런 다음 프란치스코는 아주 기쁜 낯으로 하산하여 포졸들은 물론 밀고자까지도 관대하게 대접하였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하직 인사를 올리면서 상냥한 말로 위로하였으며, 아내에게는 어머니를 잘 봉양하고 자식들을 잘 가르친 뒤에 자신의 뒤를 따르도록 부탁하였다. 김희성 프란치스코는 웃는 낯으로 포졸들을 따라 나섰다. 이내 안동 관아로 끌려간 그는 그곳에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결코 여기에 굴하지 않았다. 그러자 안동 관장은 그를 김종한(안드레아)과 함께 대구로 이송하였고, 그들은 이곳에서 다시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때 프란치스코는 관원들이 당황할 정도로 항구한 신앙심을 보여 주었다. 대구 감사는 프란치스코의 심지가 너무 굳은 탓에 결코 배교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그의 최후 진술을 받아 조정에 보고한 뒤, 다른 신자들과 함께 옥에 가두어 두도록 하였다. 당시 대구 감사가 조정에 올린 사형 선고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었다. “김희성은 집안에 천주교 서적을 숨겨왔으며, 평소에 십계명과 같은 요사한 글들을 이웃과 함께 외우곤 하였습니다.”이후에도 프란치스코는 동료들과 함께 오랫동안 옥중 생활을 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사형 집행에 대한 임금의 윤허가 내려와 1816년 12월 19일(음력 11월 1일) 대구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52세였다. 순교 후 그의 시신은 형장 인근에 매장되었다가 이듬해 3월 2일 친척과 교우들에 의해 그 유해가 거두어져 적당한 곳에 안장되었다.
출처--성화사랑http://blog.daum.net/sunghwa/11778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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