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략설명 |
박해를 피해 안식처를 찾은 교우들의 숨결이 서린 곳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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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위 37°23′33″ 동경 127°0′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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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의왕시 청계동 2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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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426-89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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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1)426-8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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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보로 ‘대 데레사’를 모시는 이 본당은 왕림 본당의 공소로부터 분할되어 1900년 현 시흥군 의왕읍 청계리(始興郡 儀旺邑 淸溪里), 속칭 ‘하우고개’에 프랑스인 샤플랭(Chapelain, 蔡) 신부가 초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면서 설정되었다. 이곳의 처음 성당은 1893년에 교우들의 협력으로 초가 10간을 지어 공소강당으로 써온 곳인데,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지은 사제관과 함께 뮈텔(Mutel, 閔德孝) 주교의 집전으로 축성식을 봉헌하였다. 이 때 내빈으로 참석한 주한(駐韓) 초대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 프랑스 공사가 기증한 종은 지금도 잘 보존되어 있다. 본당창설 당시의 신자총수는 1,105명이고 16개 공소를 관할하였다. 이는 광주군(廣州郡)과 용인군(龍仁郡)의 일부지역, 그리고 과천현(果川縣), 금천현(衿川縣, 지금의 安養지구), 안산군(安山郡) 등 넓은 지역을 관할하였기 때문이다.
청계산(淸溪山)과 광교산맥(光敎山脈)을 잇는 골짜기에 자리 잡고 있는 하우현은 서울에서 약 24km, 안양에서 16km 떨어진 곳으로 높은 산과 자연의 계곡, 거기에 울창한 수림은 박해를 피해 안식처를 찾는 교우들에게는 다행한 곳이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험준한 이 산골에는 일찍부터 교우촌이 형성되어 신유년(辛酉年), 병오년(丙午年) 박해 때부터 순교자를 배출하게 되었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의일(義一, 지금의 鶴日里) 마을에 살던 한덕운(韓德運, 토마스)이 광주 포교에 잡혀가 남한산성에서 순교한 일이 있고, 그 뒤 하우현 마을에 살던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이 1845년 9월 역시 광주 포교에게 잡혀가 그해 12월 남한산성에서 치명되었다. 그리고 1866년 병인박해 때에는 볼리외(Beaulieu, 徐沒禮) 신부가 묘론리(卯論里)에서 조선말을 배우다가 장제철(張濟哲)의 밀고로 서울 포교에게 체포되어 3월 7일 새남터에서 순교한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교우촌의 생업이던 옹기 굽던 도요지(陶窯地)와 얽힌 이야기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하우현에는 개화기인 1884년에 이미 공소가 시작되어 뮈텔 신부가 정기적으로 찾아와서 전교하였고, 1885년부터는 프와넬(Poisnel, 朴道行) 신부가 전교한 기록이 남아 있다. 1888년 왕림 본당이 설정되자, 하우현은 그 관할공소로 편입되었다. 그 뒤 왕림 본당 주임신부 대리인 이종국(李鍾國, 바오로) 신부는 1899년과 1900년에 걸쳐 자주 이곳에 체류하면서 사목활동을 하였다. 하우현이 본당으로 되고 샤플랭 신부가 부임하여 5년간 전교하였는데, 한국 풍습에 동화되지 못했던 탓인지 교우들과 불화가 잦아 1906년 귀국하고 말았다. 2대 본당신부는 르각(Le Gae, 郭元良), 3대는 페랭(Perrin, 白文弼) 신부로, 모두 프랑스인 선교사였고, 1920년에 처음으로 한국인 주임 윤예원(尹禮源, 토마스) 신부가 부임하여 1927년까지 7년간 사목하였다. 그 동안에 ‘애경 강습소’를 개설, 육영사업에도 힘썼다.
1928년 프랑스인 부이수(Bouyssou, 孫以燮) 신부가 5대 본당주임으로 부임하여 신개화사상(新開化思想)과 문맹퇴치에 많은 공을 세웠으나, 애경강습소는 운영이 어려워 끝내 폐쇄되고 말았다. 1930년 부이수 신부가 대신학교 교수로 전임된 뒤, 본당은 문을 닫게 되고, 수원 고등동 본당의 공소로 편입되었다. 1943년 황정수(黃貞秀,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본당이 부활되었는데 얼마 후에 6.25 전쟁을 겪게 되고, 1951년 황 신부가 떠나자, 본당은 다시 문을 닫고 영등포 본당 관할의 공소가 되었다.
1952년 구천우(具天佑, 요셉) 신부가 부임하여 다시 본당이 부활되었다. 구 신부는 안양 일대의 사목에 힘씀 결과 교세가 크게 신장되어 1953년 안양 본당이 설정되면서 하우현 본당은 또 폐쇄되어 공소가 되었다. 그러나 성당과 사제관은 그대로 보존되어 신부들이 휴양처로 활용되었다. 1973년에는 새로 설정된 군포 본당의 공소로 이관되었다. 그러나 구성당 건물이 허술하므로 미군부대의 원조를 얻어, 1,700평의 부지 위에 100평의 현 성당을 신축하였는데 이 사업은 벨기에인 레이몬드(Raymond Spies) 신부의 힘이 컸다. 그는 1980년에 하우현에 부임하여 다시 본당을 부활시키고 사회사업에도 힘쓰고 있다. 이 본당의 신자총수는 174명, 전국의 본당 중에서 가장 적은 곳이지만 신앙의 요람지요, 누대(累代)가 살아온 교우촌이라는 데서 교회사적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출처 : 가톨릭 대사전 - 교회사 연구소]
[사진 출처 : 오영환, 한국의 성지 - http://www.paxkorea.co.kr, 2005]
한덕운(韓德運) 토마스(1752-1802년)
충청도 홍주 출신인 한덕운 토마스는 1790년 10월에 윤지충(바오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바로 그 이듬해 윤지충은 신해박해로 체포되어 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는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하면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해 나갔다.
그 후 토마스는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조선에 입국하였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그는 성사의 은총을 받으려는 생각에서 주 신부를 만나려고 하였지만, 끝내 뜻을 이룰 수 없었다.
1800년 10월, 토마스는 좀 더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위해 고향을 떠나 경기도 광주 땅에 속한 의일리(현 경기도 의왕시 학의동)로 이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성실하게 생활하면서 기도와 독서를 부지런히 하였으며, 오로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데만 열중하였다. 그는 신자들을 모아 놓고 가르치고 권면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럴 때면 그의 말은 언제나 그의 마음과 마찬가지로 굳건하고 날카로웠다고 한다.
다음해 초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한덕운 토마스는 옹기 장사꾼으로 변장을 한 뒤 한양으로 올라가 보기로 작정하였다. 교회와 교우들의 소식이 궁금하여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양으로 올라가는 도중 청파동에 이르렀을 때, 토마스는 거적으로 덮여 있는 홍낙민(바오로)의 시신을 보게 되었다. 이때 그는 놀라고 비통한 마음으로 그 시신에 애도를 표하였다. 그런 다음 그의 아들 홍재영(프로타시오)을 보고는 부친을 따라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엄하게 질책하였다. 홍재영은 그 후 다시 신앙을 되찾아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다가 1839년에 순교하였다. 또 토마스는 서소문 밖에서 최필제(베드로)의 시신을 찾아 장례를 치러 주기도 하였다.
사실 박해 상황에서 신자들의 시신을 돌보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신자임을 드러내는 위험한 일이었다. 결국 한덕운 토마스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어 포도청으로 끌려갔고, 여러 차례 혹독한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다른 사람을 밀고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형벌에도 굴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다음 동료들과 함께 사형 판결을 받고 경기도 광주에 있는 남한산성으로 옮겨져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2년 1월 30일(음력 1801년 12월 27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50세였다.
토마스가 사형 선고를 받기 전에 한 최후 진술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주교의 교리를 깊이 믿으면서 이를 가장 올바른 도리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이제 비록 사형을 받게 되었지만, 어찌 (신앙의 가르침을 믿는) 마음을 바꿀 생각이 있겠습니까? 오직 빨리 죽기를 바랄 뿐입니다.” [출처 : 이상 한국천주교주교회의 시복시성특별위원회,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김준원(金俊遠) 아니체토(?-1845년)
하우현 마을에 살던 김준원 아니체토는 1845년 9월 광주 포교에게 잡혀가 그해 12월 남한산성에서 치명하였다.
성 루도비코 볼리외 베르나르도 신부(1840-1866년)
성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Bernard Louis Beaulieu) 신부의 세례명은 베르나르두스(Bernardus, 또는 베르나르도)이고, 한국명은 서몰례(徐沒禮)이다. 그는 1840년 10월 8일 프랑스 보르도(Bordeaux) 교구의 랑공(Langon)에서 베르나르와 마리 데지레(Marie Desiree)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부친은 결혼 5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모친은 아들을 낳자 성모님께 봉헌하였다. 그는 여섯 살 되던 해에 공민학교에 들어갔고, 일곱 살부터 복사를 하였으며, 아홉 살이 되던 1849년 10월에 고향의 소신학교에 입학하였다.
그해에 그는 중국 사천(四川)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의 사정을 듣고는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57년에 보르도 대신학교에 입학하였으며, 이듬해에 모친을 여읜 후 전교를 향한 그의 마음은 더욱 열렬해졌다. 그러나 그는 교회법상의 연령 미달로 사제 서품을 받지 못하였으며, 보르도 교구의 교구장인 대주교는 누구든지 교구를 떠나지 않도록 종용하고 있다가 뜻밖으로 그에게 전교를 위한 출국의 허락해 주었다. 그래서 그는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는 1864년 5월 21일에는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15일에 조선의 전교 신부로 임명되었다. 1864년 7월 15일에 프랑스 파리(Paris)를 출발한 볼리외 신부는 도리(Dorie, 金) 신부, 브르트니에르(Bretenieres, 白) 신부, 위앵(Huin, 閔)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 조선의 내포 지방에 도착하였다. 그는 이미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와 조전 교우들의 환영을 받았다.
같은 해 6월 그는 경기도 광주 지방에 있는 뫼논리(현 경기도 성남시 운중동의 山畓里)라는 교우촌에서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그는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조선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토록 잘 전교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된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행복하게 말했으며, 고해성사를 들을 정도로 한국말에도 능숙해졌다. 이때 배교자인 이선이가 뫼논리에 볼리외 신부가 살고 있다고 실토하였기 때문에 그는 장제철의 집을 떠나 광주 산답리 이 요셉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그 후 베르뇌 주교가 볼리외 신부의 조선말 실력과 열심함을 감안하여 충청도 지방으로 그의 임지를 정해 주려고 하던 참에, 그는 임지에 가보기도 전에 처음에 기거했던 집 주인 장제철과 이선이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1866년 2월 27일에 도리 신부와 함께 체포되었다. 그 다음날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바로 연행된 후 곧바로 심문을 받았다. 이리하여 볼리외 신부는 마침내 베르뇌 주교와 도리 신부 그리고 브르트니에르 신부 등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의 형장에서 희광이의 세 번째의 칼을 맞고 순교의 월계관을 썼다. 이때가 1866년 3월 7일이었고, 그의 나이는 27세였다. 그는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출처--가톨릭정보 http://www.catholic.or.kr/
출처--http://blog.daum.net/karma2546/92660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