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적이 동료들 설득하는 글>
초등 4 박경진(女)
여보게들, 계속 이렇게 짐승 같은 삶을 살아야 하겠나? 밤낮으로 일을 해도 제대로 대우조차 받지 못하고, 인정해 주는 이 하나 없네.
우리가 주인들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똑같은 사람으로 태어났는데 누구는 사람답게 살고, 누구는 짐승 같이 산다는 게 말이 되는가? 우리의 삶도 충분히 바뀔 수 있네.
예전에는 문신 나으리들 앞에서 쩔쩔매던 무신 나으리들도 문신 나으리들을 밀어내더니 더 높은 자리에서 큰 소리 치는 걸 자네들도 보지 않았나. 그리고 그 중 이의민은 우리와 같은 노비 출신이었다네.
얼마 전엔 이의민을 죽이고 최고 자리에 오른 우리 주인만 제거한다면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한 번 살아볼 수 있다네. 이렇게 짐승 같이 살다 죽느니 나와 함께 우리들의 세상을 한 번 만들어 보세.
<공민왕의 자서전>
노국공주를 잃은 슬픔 속에서 도저히 헤어나올 수 없던 나는 여러 날들을 술로 보냈다. 그러나 지금 이 부끄러운 시간들을 돌이키려고 하니 벌써 죽음의 그림자가 내 곁에 와 있는 듯하다. 그래서 부끄럽고도 처절했던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려 한다.
나는 1330년 충숙왕과 명덕태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내가 12살이 되자 전례에 따라 볼모로 원의 연경에 갔다. 그 곳에서의 생활은 비굴하기 그지 없었다. 나는 목숨을 유지하기 위해 원의 황실과 관리들의 비위를 맞추어야 했다. 그래야 훗날 고려의 왕이 되어 이 굴욕을 씻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드디어 21살 되던 해 원 위왕의 딸 노국대장공주와 혼인하여 왕위 계승의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비록 정략결혼이었지만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였고, 그녀 역시 나의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어 주었다.
1351년 원이 충정왕을 폐위시켜 나는 노국공주와 함께 귀국해 왕위에 올랐다. 원에서 10여년을 보낸 나는 이미 원의 내정을 환히 꿰뚫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륙 각지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원의 멸망이 멀지 않았음을 간파하고 있었다. 나는 즉위하자마자 변발을 풀어헤치고 과감하게 원나라 옷을 벗었다.
또한 100년간이나 존속해 온 쌍성총관부를 폐지하여 원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였다. 그리고 그동안 폐단이 많았던 정방을 폐지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해 귀족들이 겸병한 토지를 원래의 소유자에게 환원시키는 한편, 불법으로 노비가 된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이처럼 고려를 위해 힘쓰던 내게 크나큰 비극이 찾아왔다. 나의 사랑 노국공주가 아이를 낳다 세상을 떠나버린 것이다. 실의의 빠진 나는 모든 국사를 나의 믿음직한 신하이자 벗인 신돈에게 맡기고, 노국공주의 초상화를 밤낮으로 보며 그녀를 위해 불공을 드렸다.
그러나 신돈을 너무 믿은 탓일까? 실정을 거듭한 신돈은 나까지 해치려 하였고 결국 그를 귀양보내 사사하였다. 사랑하는 노국공주와 벗과 같았던 신돈을 일은 나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졌다.
이글을 읽고 있는 후손들은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말고 부강한 고려를 만들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시조-피로가>
감기에 시달리고 학생에 시달리고
많은 책 읽어봐도 머리엔 있고 없고
대표님 질문에도 묵묵부답 어찌 하리.
<임진왜란 기사문>
한산도 대첩, 큰 승리 거두어
1592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우리 수군이 왜 수군을 크게 무찔렀다.
왜 수군들의 동향을 탐지한 이순신은 7월 5일 이억기와 함께 전라좌우도의 전선 48척을 본영(여수) 앞바다에 집결시켜 합동훈련을 실시하였다.
왜 수군의 세력은 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 등 모두 73척으로서 지휘관은 수군장수 와키사카였다.
이순신은 견내량 주변이 좁고 암초가 많아서 판옥전선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확인하고, 한산섬 앞바다로 유인해 격멸할 계획을 세웠다. 먼저 판옥전선 5, 6척이 왜 수군을 공격하여 반격해 오면 한산섬으로 물러나면서 유인하였다. 왜 수군들은 그 때까지 패전한 것에 대해 보복하려는 듯 의기양양하게 공격해 왔다.
싸울 기회를 포착한 이순신은 모든 전선이 학익진을 짜서 공격하게 하였다. 싸움의 결과 층각대선 1척을 나포하는 것을 비롯해 47척을 분파하고 12척을 나포하였다.
왜 수군장 와키사카는 뒤에서 독전하다가 전세가 불리해지자, 패잔선 14척을 이끌고 김해 쪽으로 도주해 이 해전은 우리 수군의 큰 승리로 막을 내렸다. 격전 중 조선수군의 사상자는 있었으나 전선의 손실은 전혀 없었다.
이번 대첩은 왜 수군의 주력을 거의 격파해 그들의 수륙병진계획을 좌절시켰다. 그리고 육지에서 잇단 패전으로 사기가 떨어진 조선군에게 승리의 용기를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