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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주간 금요일(3월29일)
'가상칠언',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말씀', '장사되심'
요한복음 19:16~37절
요 19:16 이에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그들에게 넘겨 주니라 17 그들이 예수를 맡으매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해골(히브리 말로 골고다)이라 하는 곳에 나가시니 18 그들이 거기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을새 다른 두 사람도 그와 함께 좌우편에 못 박으니 예수는 가운데 있더라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23 군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의 옷을 취하여 네 깃에 나눠 각각 한 깃씩 얻고 속옷도 취하니 이 속옷은 호지 아니하고 위에서부터 통으로 짠 것이라 24 군인들이 서로 말하되 이것을 찢지 말고 누가 얻나 제비 뽑자 하니 이는 성경에 그들이 내 옷을 나누고 내 옷을 제비 뽑나이다 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군인들은 이런 일을 하고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29 거기 신 포도주가 가득히 담긴 그릇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우슬초에 매어 예수의 입에 대니 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31 이 날은 준비일이라 유대인들은 그 안식일이 큰 날이므로 그 안식일에 시체들을 십자가에 두지 아니하려 하여 빌라도에게 그들의 다리를 꺾어 시체를 치워 달라 하니 32 군인들이 가서 예수와 함께 못 박힌 첫째 사람과 또 그 다른 사람의 다리를 꺾고 33 예수께 이르러서는 이미 죽으신 것을 보고 다리를 꺾지 아니하고 34 그 중 한 군인이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니 곧 피와 물이 나오더라 35 이를 본 자가 증언하였으니 그 증언이 참이라 그가 자기의 말하는 것이 참인 줄 알고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36 이 일이 일어난 것은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함이라 37 또 다른 성경에 그들이 그 찌른 자를 보리라 하였느니라
19절에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유대인의 왕', 빌라도의 말은 또다시 빌라도 자신이나 유대인들이 인식한 것보다 훨씬 더 심오한 측면에서 사실이었고 이는 요한이 자주 사용한 중의법과 반어법에 또 다른 예입니다.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히브리어 말(아람어)은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주민들이 가장 널리 이해한 언어였습니다. '로마' 말(라틴어)은 로마 점령군의 공식적인 언어였고 '헬라 말'(그리스)은 유대인과 이방인이 모두 이해하는 제국의 "국제적 언어"였습니다. 따라서 이'패'의 삼중 언어적 성격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공식적인 이유에 대한 가능한 가장 광범위한 인식을 확보했습니다.
군인들의 행동은 십자가 형과 관련된 이후의 몇 몇 사건들과 비슷하게 성경의 말씀을 성취했습니다. 요한은 시 22 편, 신약에서 가장 자주 인용된 시편을 인용하는데 거기서 시편 기자 다윗은 거의 천년 뒤에 있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성취 되는 처형장면에 대한 많은 예언적인 세부 묘사를 제공합니다. 이는 시편 기자의 경험과 일치하는 고난 받는 의인으로서의 예수님에 대한 몇 가지 언급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로마군인들은 자기들끼리 예수님의 옷을 나누어 갖고 예수님의 겉옷을 가지고 제비를 뽑음으로써 자기도 모르게 성경을 성취하며 예수님의 원수들이 부지불식간에 하나님의 구속 계획에 참여한다는 요한복음의 주제를 이어갑니다. 이 군인들의 속셈은 하나의 천 조각으로 만들어진 예수님의 겉옷을 찢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요한의 기록은 고난 받는 자의 갈증(시 22:15), 찔린 "수족"(16절), 뼈들(17절)을 언급하는 시 22:15~18의 몇 가지 내용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언급들은 예언의 성취에 대한 강한 인상을 줍니다.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예수님의 '어머니', 그리고 '이모'는 세베대의 아들들, 요한과 야고보의 어머니인 살로메입니다. 육신적으로는 예수님과 야고보.요한은 친척지간으로 사촌이됩니다.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눅 24:18에 기록된 글로바와 그의 아내는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 엠마오로 가는 길에 예수님과 동행한 부부 제자가 맞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따라 과부가 된 것이 거의 확실하고 개인적인 수입이 거의 또는 전혀 없으며 아마도 40대 후반 내지 50대 초반이 되었을 자신의 어머니를 위한 생계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28~29절에서 성경 말씀의 성취에 대한 언급은 시 69:21("목마를 때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에 대한 암시로 24절의 패턴을 따릅니다. 여기서 예수님께 제공된 '신 포도주'는 군인들이 갈증을 해소하는 데 사용되었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에 제공받으신 진정제인 "몰약을 탄 포도주"(막 15:23)와는 다릅니다. '우슬초'는 왕상(4:33)에서 담장의 갈라진 틈에서도 자랄수있는 단순한 관목으로 분류된 식물로 첫 유월절 때 문설주에 피를 뿌리는 데 사용되었습니다(출 12:22).
예수님이 '신 포도주를 받으신' 것은 아마도 고난이 끝나는 순간에 큰 목소리로 승리를 선포하실 수 있도록 바짝 마른 목을 축이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성부께서 자신을 보내셔서 성취하게 하신 모든 일 특히 죄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는 일이 이제 완료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는 죄에 대해 치뤄야 할 형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고난은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30절에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의 자기희생의 자발적 성격을 강조하는 이 말씀은 사 53:12의 고난 받는 종의 죽음에 대한 묘사를 상기시킵니다. '영혼'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인간 영혼을 의미하며 예수님의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도록 자발적으로 그 몸에서 영혼을 놓아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영혼은 "안식 후 첫날"(요 20:1) 부활하실 때 그 몸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하늘에서 성부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31절에 '그 안식일의 큰 날',(즉, 특별한 안식일)이므로 이는 그날이 유월절 주간의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요청은 신 21:22~23을 기초로 하고 있었고 이에 따르면 교수형에 처해진 범죄자의 시신을 밤새 나무에 달아 두어 땅을 더럽혀선 안 되었습니다. '다리를 꺾어', 로마인들은 대개는 죽은지 오래된 뒤에도 시신을 십자가 위해서 썩어가도록 내버려두었습니다. 그러나 특정한 의식을 거행되는 상황에서는 시신을 일찍 끌어내릴 수도 있었고 다리를 부러뜨리면 죄수가 죄수가 숨을 쉬기 위해 다리로 몸을 밀어 올려 생명을 연장한 일을 방지함으로써 죽음을 앞당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34절에 '피와 물'이 흘러나온 것은 예수님이 참으로 진짜 인간의 몸을 지닌 완전한 인간으로 죽으셨음을 보여줍니다. 창은 길이가 약 1.8 미터였고 서양물푸레나무 같은 가벼운 나무로 된 자루 끝에 철을 달아 만들었습니다. '그 뼈가 하나도 꺾이지 아니하리라', 이후에 예수님의 죽음이 성경을 성취했음을 보여 주기 위해 인용한 세 번째 성경적 증거입니다(시 34:20 및 민 9:12). 예수님은 다리가 부러지는 일을 피하셨고 예수님의 몸을 관통한 창도 마찬가지로 어떤 뼈도 부러뜨리지 못했습니다.
34절에서 로마 군인들의 행동으로 성취된 두 본문 중에 두 번째는 슥 12:10입니다. "그들이 그 찌른자를 보리라"(계 1:7에도 인용됨).
예수님의 십자가 위에서 일곱 말씀(가상칠언)
1.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그들이 그의 옷을 나눠 제비 뽑을새', 이는 시 22:18에 대한 분명한 언급입니다. 제비뽑기는 구약에서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기 위해 때때로 사용되었지만 여기서는 로마 경비병들에 의한 일종의 노름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함에 대한 자신의 가르침을 실천하시며 자신의 죽음이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이 용서받을 수 있는 기초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자신의 따를 모든 신자들에게 하나의 본보기를 제공하십니다.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말씀은 유대인들이나 로마인들에게 예수님의 죽음에 있어서 그들의 책임을 면제 시켜주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이 참된 메시아인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거룩하고 의로운 이"(행 3:14)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저지른 끔찍한 악행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줍니다.
2.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십자가 위에서 회개하고 주님을 영접한 오른편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을 베푸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주님께서는 영혼을 사랑하시고 마지막 구원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낙원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장소이자 의인들의 영원한 본향인 천국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70인역은 "에덴동산"을 지칭하는데 바로 이 헬라어 단어를 사용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은 타락 이전에 에덴동산에 존재했던 하나님과의 친밀하고 개인적인 교제의 회복을 암시할 수도 있습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네 어머니라"
요 19: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성경의 명령에 따라 과부가 된 것이 거의 확실하고 개인적인 수입이 거의 또는 전혀 없으며 아마도 40대 후반 내지 50대 초반이 되었을 자신의 어머니를 위한 생계 대책을 세우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고통 중에서도 메시아로서 십자가 위에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돌아가시는 아들의 고통을 바라보시는 어머니를 생각하시고 위로하시며 효성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요한 사도에게 "네 어머니"라고 말씀 하시며 어머니를 요한 사도에게 모시라고 부탁을 하셨습니다.
4."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막 15:34 제구시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지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를 번역하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예수님은 시 22:1을 인용하십니다. 마지막 두 단어는 아람어(예수님이 사용하신 일상 언어)이며 처음 두 단어는 아람어 이거나 히브리어 입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신비로운 말씀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은 자기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그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를 견디고 있었기 때문에 영혼 전부터 자신의 것이었던 성부의 사랑과 성부와의 교제에서 끊어져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 22:1을 인용하면서 아마도 승리의 외침으로 바뀌는 이 시편의 나머지 내용도 염두에 두셨을 것입니다(시 22:21~31).
또한 예수님은 믿음을 표현하며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십니다. 분명 예수님은 왜 자신이 죽어 가는지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곧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크게 소리 질러 하신 말씀은 분명 자신의 곤경에 대한 당혹감의 표현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어떤 죄 때문이 아니라 타인의 구원을 위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당하는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짓음은 군중들을 향한 증언이며 세상을 향한 증언인 것입니다. 마태는 분명 이 점을 이해하고 예수님의 고통은 겟세마네에서 이미 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 미리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5. "내가 목마르다"
요 19:28 그 후에 예수께서 모든 일이 이미 이루어진 줄 아시고 성경을 응하게 하려 하사 이르시되 내가 목마르다 하시니
성경 말씀의 성취에 대한 언급은 시 69:21("목마를 때에는 초를 마시게 하였사오니")에 대한 암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에 대한 요한의 기록은 고난 받는 자의 갈증(시 22:15), 찔린 "수족"(16절) 뼈들(17절)을 언급하는 시 22:15절~18의 몇 가지 내용을 반영합니다. 이러한 일련의 언급들은 예언의 성취에 대한 강한 인상을 줍니다.
6. "다 이루었다"
요 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이 신 포도주를 받으신 것은 고난이 끝나는 순간에 큰 목소리로 승리를 선포하실 수 있도록 바짝 마른 목을 축이시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다 이루었다" 이 말씀은 성부께서 자신을 보내셔서 성취하게 하신 모든 일, 특히 죄에 대한 형벌을 담당하는 일이 이제 완료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이는 죄에 대해 치뤄야 할 형벌이 더 이상 남아있지 않은 걸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모든 고난은 다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히 9:11~12, 25~28).
'떠나가시니라', 예수님의 자기희생의 자발적 성격을 강조하는 이 말은 이사야 53:12의 고난 받는 종의 죽음에 대한 묘사를 상기시킵니다. '영혼'은 성령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인간 영혼을 의미하며 예수님은 영혼이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돌아가도록 자발적으로 그 몸에서 영혼을 놓아 주셨습니다(눅 23:43, 46). 예수님의 영혼은 "안식 후 첫날"(요 20:1) 부활하실 때 그 몸으로 다시 돌아오기 전까지 하늘에서 성부와 함께 머물러 있을 것입니다.
7.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눅 23: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내....영혼을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의 인성에 속한 영혼은 성부 하나님이 계신 곳으로 되돌아갔습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은 죽으실 때조차도 여전히 모든 상황을 제어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 생명, 영혼 모두를 하나님께 맡기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은 죄의 사함과 구원, 부활과 영생을 얻게 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온전하게 이루어지고 천국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입니다.
<저녁에 장사되심>
마 27:57~61절
마 27:57 저물었을 때에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58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 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61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요셉은 예수님에 대한 조치에 동의하지 않았던 산헤드린의 일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이기도 한 요셉은 유대인 사회 안에서의 높은 지위 덕분에 그는 빌라도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아리마대의 위치는 분명하지 않지만 아마도 예루살렘에서 북서쪽으로 32km 떨어진 에브라임 산지의 라마다임일 것입니다.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유대인의 관습에 따르면 십자가에 달린 시체는 저녁 이전에 특히 금요일 일몰이 시작되는 안식일 이전에 끌어내려야 했습니다.
'새 무덤', 바위 속에 만든 직사각형 묘실로 낮은 입구의 방을 통해 들어가며 주로 시신을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앞뒤로 굴릴 수 있는 돌로 막아놓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이 부자의 무덤에 사용된 것은 사 53:9를 성취한 사건입니다.
61절에 '거기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향하여 앉았더라', '다른 마리아', 아마도 요세의 어머니일 것입니다(막 15:40). 요세는 "요셉"과 동일한 인물일 것입니다(마 27:56).
막 15:42~47; 눅 50~56; 요 19:38~42
막 15:42 이 날은 준비일 곧 안식일 전날이므로 저물었을 때에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44 빌라도는 예수께서 벌써 죽었을까 하고 이상히 여겨 백부장을 불러 죽은 지가 오래냐 묻고 45 백부장에게 알아 본 후에 요셉에게 시체를 내주는지라 46 요셉이 세마포를 사서 예수를 내려다가 그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 47 막달라 마리아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 둔 곳을 보더라
요셉은 예수님의 시신을 니고데모의 몰약과 침향으로 보완된 '세마포'에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신 21:22~23에서 비롯된 유대 관습에 따르면 24시간 이내에 적절한 장례를 치뤄야 했습니다. 유대인식 무덤의 주된 형태는 얕은 도량 모양 무덤, 석관 무덤 등이었습니다. 바위에 판 무덤은 기존의 동굴이나 인조 동굴을 광범위하게 파내야 하기 때문에 도랑 모양 무덤보다 훨씬 많은 비용이 들었고 일반적으로 단일한 확대 가족에 속한 무덤으로 여겨집니다. 따라서 이 무덤은 아라마대 요셉의 기묘였을 것입니다.
<성묘 교회>
예수님이 묻히셨다고 여겨지는 주요 장소 두 곳은 성전 서쪽의 성묘 교회와 옛 예루살렘 성 북쪽에 동산 무덤으로 이 곳은 입구가 굴리는 돌로 된 바위의 판 무덤이었습니다. 둘 다 1세기의 성벽 밖에 있었을 것입니다. 초기 교회 전승은 예수님의 장지로 성묘 교회 부지를 강력히 선호하며 동산 무덤 주변 지역은 대체로 철기시대(구약시대) 무덤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이 또한 성묘 교회 자리가 신약시대에 장지였을 가능성을 뒷받침합니다. 성묘 교회의 현재 건물은 대체로 중세시대 건물이지만 원래 성묘 교회 건물은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에 지어진(주후 335년에 봉헌된) 것으로 추정됩니다. 막달라 마리아와 요새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님이 장사 되시는 것을 본 증인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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