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조 (仁祖) |
자 화백(和伯). 호 송창(松窓). 휘 종(倧). 선조의 손자이고 아버지는 정원군(定遠君:元宗으로 追尊), 어머니는 어머니는 좌찬성 구사맹(具思孟)의 딸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비는 한준겸(韓浚謙)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 계비(繼妃)는 조창원(趙昌元)의 딸 장렬왕후(莊烈王后)이다. 1607년(선조40) 능양도정(綾陽都正)에 봉해졌다가 후에 능양군(綾陽君)으로 진봉되었다. 1623년(인조1) 김류(金찐) ·김자점(金自點) ·이귀(李貴) ·이괄(李适) 등 서인(西人)의 반정(反正)으로 서궁(西宮)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의 윤허를 받아 왕위에 추대되어 경운궁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후 광해군 때 희생된 영창대군·임해군 진(臨海君#진17),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 등의 관직을 복관시켰다. 또한, 반정공신들에 대한 논공행상에 있어서는 도감대장(都監大將) 이수일(李守一)을 내응(內應)의 공이 있다 하여 공조판서로 임명한 데 비하여 , 이괄은 2등에 녹공하여 한성판윤, 이어 도원수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임명하자 이괄은 이에 불만을 품고 1624년(인조 2) 난을 일으켰다. 1624년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일시 공주(公州)로 피난하였다가 도원수 장만(張晩)이 이를 격파한 뒤 환도하였다. 광해군 때의 중립정책을 지양하고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썼으므로, 1627년 후금군사 3만여명으로 침략하여 의주를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평산(平山)까지 쳐들어오자 조정은 강화도로 천도하였으며, 최명길(崔鳴吉)의 강화주장을 받아들여 형제의 의(義)를 맺었는데, 이것을 정묘호란이라 한다.정묘호란 이후에도 조정이 은연중 친명적(親明的) 태도를 취하게 되자, 1636년 국호(國號)를 청(淸)으로 고친 태종이 이를 이유로 10만 대군으로 침입하자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항전하다가 패하여 청군(淸軍)에 항복, 군신(君臣)의 의를 맺고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볼모로 잡혀가는 치욕을 당하였는데, 이것을 병자호란이라고 한다. 즉, 1636년 12월 형제의 관계를 군신의 관계로 바꾸자는 청나라의 제의를 거부하자, 10만여군으로 다시 침입하였다. 혹한 속에 질풍같이 쳐들어온 청군을 막지 못하고, 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과 비빈(妃嬪)을 강도(江都)로 보낸 뒤 길이 막혀 남한산성으로 물러가 항거하였다. 그때 척화파·주화파간의 치열한 논쟁이 전개되었으나, 주화파의 뜻에 따라 성을 나와 삼전도(三田渡-지금의 松坡)에서 군신의 예를 맺고,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을 볼모로 하자는 청나라측의 요구를 수락하고 말았다. 이에 따라 청나라 태종은 두 왕자와 척화론자인 삼학사(三學士), 즉 홍익한(洪翼漢)·윤집(尹集)·오달제(吳達濟)를 데리고 철병하고 조정은 환도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여러 차례의 내란 ·외침으로 국가의 기강과 경제상태가 악화되었는데도 집권당인 서인은 공서(功西) ·청서(淸西)로 분열되어 싸웠고, 김자점이 척신으로 집권하여 횡포를 일삼았다. 1645년 오랜 볼모의 생활에서 벗어난 소현세자가 북경에서 돌아와 얼마 안되어 의문의 변사를 당한 뒤, 소현세자의 아들을 후계자로 하지 않고 2남인 봉림대군을 세자로 세움으로써 현종·숙종 때 예론(禮論)의 불씨가 되기도 하였다. 이이(李珥) ·이원익(李元翼)이 주장한 대동법을 실시했으며, 여진족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국경지대인 중강(中江) ·회령(會寧) ·경흥(慶興) 등지에 개시(開市)하여 그들과의 민간무역을 공인하였다. 1628년 벨트브레(Weltevree:朴淵) 등의 표착(漂着)으로 서양 사정을 알게 되었고, 또 정두원(鄭斗源)과 소현세자를 통하여 서양의 문물에 접하게 되었다. 즉, 정두원(鄭斗源)과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올 때 화포·천리경(千里鏡)·과학서적·천주교서적 등을 가지고 왔으며, 특히 소현세자는 샬(Shall,A., 湯若望)과 사귀기도 하였다. 서양의 역법(曆法)인 시헌력(時憲曆)을 송인룡(宋仁龍)·김상범(金尙範) 등이 청나라에서 수입하여, 그뒤 1653년(효종 4) 시행하기에 이르렀다. 1634년 양전(量田:토지조사)을 실시하여 토지제도를 시정하였으며, 연등9분(年等九分)의 법을 정비하여 세제(稅制)를 합리화하였다. 또한, 1641년에는 군량조달을 위하여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발표하고, 납속자에 대한 서얼허통(庶#얼02許通) 및 속죄(贖罪)를 실시하였다. 1645년 볼모생활에서 들아온 소현세자가 죽자 조정은 세자 책봉 문제로 시끄러웠으며,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소현세자빈 강씨(姜氏)를 사사(賜死)하는 비극이 일어났다. 그러나 이와 같은 난국 속에서도 군제(軍制)를 정비하여 총융청(摠戎廳) ·수어청(守禦廳) 등을 신설하였으며, 북변(北邊) 방위와 연해 방위를 위하여 여러 곳에 진(鎭)을 신설하였다. 한편 《황극경세서(皇極經世書)》 《동사보편(東史補編)》 《서연비람(書筵備覽)》 등의 서적도 간행되었고,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김육(金堉) ·김집(金集) 등의 대학자 ·대정치가가 배출되기도 하였다. 능은 교하(交河)의 장릉(長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