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회대회 - 근대올림픽의 부활
제1회올림픽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됐다. 아테네는 고대 올림픽의 전통과 향수가 살아있는 도시로써 근대 올림픽의 출발이 고대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역사적 의미에서 파리를 제치고 첫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국제올림픽위원회의 자료에 따르면 제1회 아테네 올림픽은 1896년 4월 6일부터 15일까지 10일간 개최됐고, 이 대회에는 13개국에서 311명(선수:280명)선수단이 참가했다. 이들은 국가별로 보면 오스트레일리아 1명, 오스트리아 1명, 불가리아 1명, 칠레 1명, 덴마크 4명, 독일 19명, 프랑스 19명, 그리스 230명, 영국 8명, 스웨덴 1명, 스위스 1명, 헝가리 8명, 미국 14명으로 참가국 대부분이 유럽국가이며, 아시아나 아프리카 국가는 제외돼 있어 오늘날과 같은 지구촌의 축제로 보기는 어려웠다. 또한 전체 311명의 선수 절대 다수인 230명이 개최지인 그리스선수이고 보면 제1회 올림픽은 한 지역권의 체육대회에 불과했다. 쿠베르탕을 불신한 네덜란드와 올림픽 부활 자체를 비난하는 벨기에는 대회에 참가치 않았다. 제1회 대회가 1896년 4월초에 열리기로 미리 확정돼 있었음에도 1895년 말까지도 초청장이 발송되지 않아 선수들이 출전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치 못한 것도 대회규모가 소규모에 머물게된 한 원인이 되었다. 참가국들은 대회에 관한 정보나 지식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의 NOC같은 올림픽 관련업무를 전담할 조직체계도 존재치 않았으며 사전에 결성된 국가대표팀도 없는 개인적인 참가였다. 대회종목으로는 육상, 수영, 테니스, 체조(역도종목은 체조의 1종목에 포함시킴), 레슬링, '사이클, 펜싱 8개 종목 41개 세부종목으로 실시됐다. 이 대회에서 유의해 볼만한 것은 트랙경기가 현재와 같은 좌회전이 아니고 시계방향과 같은 우회전으로 실시되었다. 트랙종목이 현재와 같이 좌회전으로 변경된 것은 아테네대회가 끝나고 세계육상관계자들이 모여 회의 끝에 제2회 파리 올림픽부터 이루어졌다. 또한 수영경기가 바다에서 실시된 것도 지금에와서는 생각하기 힘든 경기방식이었고, 수영선수들은 작은 증기선을 타고 바다로 나가 4월의 차가운 지중해를 헤엄쳐나가야 했다
제2회대회 - 만국박람회 부속 국제대회로 전락 제2회 올림픽대회는 1900년 5월 20일부터 10월 28일까지 쿠베르탕의 활동무대인 파리에서 개최됐다. 정식명칭은 "만국박람회 부속 국제경기대회"로 만국박람회의 한 행사로 열려 올림픽 개최 본래의 의도는 퇴색됐으며 육상을 제외한 다른 경기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었다. 올림픽경기가 만국박람회의 부속대회로 전락한 것은 쿠베르탕이 당초 기획했던 파리 올림픽을 스포츠박람회로 치르려던 구상이 무산되면서 예견됐다. 쿠베르탕은 고대의 이집트-인도(1부) 스포츠, 중세의 기사도(2부), 현대의 스포츠(3부)의 행사를 계획했으나, 올림픽 토대가 허약했던 당시로서는 실현키 어려웠었다. 결국 쿠베르탕의 계획은 무산됐고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직위원회의 내분이 겹쳐 파리 올림픽은 암초에 부디 쳤다. 결국 대회를 무사히 개최하기 위해 쿠베르탕 IOC위원장 겸 파리 올림픽조직위원장은 프랑스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것이 만국박람회의 부속 국제경기가된 주원인 이였다. 프랑스가 만국박람회를 개최할 때 그들은 세계의 어느 박람회보다도 웅장하고 성대한 박람회를 계획했다. 때문에 박람회 측은 올림픽경기뿐만아니라 장기자랑, 오락 같은 게임과 낚시대회 등을 개최 일반 시민들도 참가를 개방했다. 21개국에서 1,077명이 출전한 파리 올림픽은 5월 20일 세느강변에서 열린 요트경기부터 시작되었으며 21일 펜싱 29일 승마경기가 있었고 가장 주목을 받은 육상경기는 7월 14일 개막되었다. 대회 마지막날인 10월 28일에는 럭비풋볼이 시범종목으로 거행되었으며 아테네 올림픽서 체조의 한 종목으로 열린바 있는 역도는 제외됐다. 파리대회에서는 사상 처음으로 여자선수가 출전할 수 있게 되었으며, 여자테니스 단식에서 영국의 샤르토 쿠퍼가 우승, 올림픽 첫 여성 금메달리스트가 됐다. 프랑스 임원들은 경기일정때문에 참가 선수들과 논쟁을 벌여야 했다. 미국선수들중 일부는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일요일날 경기에 출전할 수 없다고 주장, 결승경기를 하루 앞당겨 토요일날 열 것을 제의 했으나 주최측에 의해 거절당했다. 결국 넓이뛰기의 마이어 프린스타인선수 등 몇몇 선수는 결승경기에 불참했다
제3회대회 - 올림픽 신대륙으로 무대 옮겨 근대올림픽의 출발, 즉 아테네대회이후 8년만인 1904년대회는 유럽이 아닌 신대륙 아메리카 대륙에서 개최됐다. 1894년 초 이미 무언중 제3회대회는 아메리카에서 개최키로 합의가 이루어졌으며 다만 어느 도시가 선정되느냐가 문제였다. 1900년 11월 13일 뉴욕선(NEWYORK SUN)지는 제3회 올림픽이 시카고에서 열리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나 미국육상연맹 사무총장인 제임스 슈리반(James Sulivan)의 주도로 센인트루이스가 시카고의 올림픽유치의 경쟁도시로 나섰다. 대회개최지가 최종적으로 결정되기전까지 IOC는 시카고에 훨씬 호의적인 면을 보였다. IOC는 시카고에 훨씬 호의적인 면을 보였다. IOC는 제3회 올림픽이 1904년 9월 10일부터 25일 사이에 최소한 12일간 개최돼야할 것을 결정했다. 시카고는 1905년까지 대회를 연기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제안했으며 쿠베르탕은 이를 거절했다. 결국 미국의 신임대통령 루즈벨트(Theordore Roosevelt)가 호의를 보인 세인트루이스가 시카고를 제치고 제3회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그러나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은 쿠베르탕을 실망시켰다. 세인트루이스 올림픽 역시 파리대회와 마찬가지로 루이지아나해방 100년 기념 만국박람회의 부속대회로 격이 떨어졌다. 때문에 쿠베르탕은 주최측의 대표인 IOC위원장이면서도 이 대회에 참석하지 않았다. 제3회 세인트루이스 올림픽은 7월 1일부터 11월 23일까지 약 5개월에 걸쳐 12개국 554명의 선수가 출전한 가운데 진행되었다. 참가인원이 전 대회인 파리 올림픽의 절반 정도밖에 안된 것은 개최지인 세인트루이스가 유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경기종목수는 18경기에 95세부종목으로, 16경기 94세부종목으로 열린 파리대회보다 오히려 많은 종목수였다. 프로그램에는 전에 시행되던 몇 종목이 제외 대고 대신 처음으로 복싱경기가 열렸다. 라크로스경기와 크로켓의 변형인 로우크경기가 실시된 반면에 파리대회와 달리 테니스경기에는 여자선수들이 출전치 않았다. 세인트루이스 올림픽대회는 전체적으로 볼 때 아테네대회나 파리대회보다 일부 발전된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대회기록도 전 대회보다 훨씬 향상되었고 참가선수들도 국가대표에 가까운 신분이었다
4회대회 - NOC로 신청통로 단일화, 국가대항전 계기 제4회 런던 올림픽은 올림픽의 발전의 중요한 전환점이 됐다. 아테네에서 1회 올림픽이 개최된 이후 연이은 두 대회(파리대회, 세인트루이스대회)가 만국박람회의 한 행사로써 변칙적으로 치러졌기에 IOC는 올림픽 개최에 대해 보다 입장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었다. 따라서 런던대회에 앞서 IOC 대회조직위원회는 헌장에 기초해 처음으로 대회규정을 제정했다. 종전 대회까지는 개인 혹은 클럽이 신청하면 참가할 수 있었으나, 런던대회부터는 국가올림픽위원회(NOC)를 통하여 신청토록 신청통로를 단일화했으며 올림픽 참가다도 아마추어에 한한다고 명문화했다. 스포츠에 참여함으로써 생활비나 자금을 취득치 않으며 경제적 이익을 얻는 것을 금하는 이른바 아마추어리즘개념이 올림픽에 도입 된 것도 런던대회 부터이다. 출전신청이 국가올림픽위원회(NOCs)로 단일화되자 올림픽은 국가대항전의 성격을 나타내게 되었다. 올림픽이 국가대항전의 성격을 갖게된 것은 올림픽대회의 급속한 양적성장을 이루는 원동력이 됐다. 영국은 이 대회를 위해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 이 대회를 위해 8만6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5개의 경기장이 건설됐고, 경기장 내부에 수영장도 있어 바다에서 수영경기를 실시한 아테네와 비교해서 발전적인 측면을 보였다. 육상경기는 이 대회 창설후 처음으로 진정한 국제대회답게 체계적으로 운영됐으나 불순한 기후와 지나친 경쟁의식으로 혼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특히 육상 400m와 마라톤에서 각국의 갈등은 심각하였다. 이로인해 다음 대회부터 주최국 사람이 심판을 담당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1908년 4월 27일부터 10월 31일까지 열린 런던 올림픽에는 22개국 2035명(선수 1999명)이 참가했으며 하키, 복싱, 사격, 요트(남)등 22경기 109개 세부종목이 실시됐다. 마라톤코스가 42.195km로 정해진 것도 런던올림픽대회에서였다. 이는 전대회보다 약 2km가 연장된 것으로 이로 인해 마라톤 종목의 우승의 행방이 좌우되는 변수가 되었다. 1900년 대회와 1904년 대회에서 부진했던 소련은 이 대회에서 처음으로 올림픽메달을 획득했다.
5회대회 -IOC의 권위강화, 대회운영도 본 궤도에
제5회 올림픽은 1912년 5월 5일부터 7월 22일까지 스웨덴의 스톡홀름에서 개최됐다. 참가국가는 전 대회인 런던 올림픽보다 6개국이 증가한 28개여 국가가 출전했으며 참가인원도 2,347명(선수:2490명)으로 런던 올림픽의 참가자 수보다 훨씬 많았다. 이 대회에 와서야 비로소 IOC의 권위가 강화되고 대회운영도 본 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쿠베르탕이 그토록 열망하던 예술경기와 마술이 경기종목에 포함됐으며 육상 5종경기와 10종경기가 추가됐고, 근대 5종 경기가 새로 창안되었다. 이 대회이후 대회경비는 정부, 개최도시, 기부금 등으로 충당됐다. 이 대회에서 올림픽의 기초가 굳게 다져졌다. 육상경기에서는 에드스트룀의 전기시계와 사진판정기가 사용되었다. 대회폐막식에서는 스웨덴 경찰들이 대회기간동안 질서를 유지시켜준 공로로 월계관을 받아 머리에 씌워주었다. 15경기 107종목으로 열린 제5회 스톡홀름대회에서는 아테네올림픽 이후 처음으로 아마추어 자격시비가 일어났다. "짐 소프 사건"이라 불리는 아마추어 규정위반 사건으로 육상의 5종과 10종 경기에서 우승한 미국의 짐 소프는 스톡홀름대회가 끝난 후 반년이 지난 후 자신이 획득한 금메달 2개를 IOC에 반납해야 했다. 짐 소프(제임스 프란시스 소프)는 인디언 삭 폭스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미국인이었다. 스톡홀름대회에서 짐 소프가 세운 10종경기 기록은 합계 8,412점으로 2위와 700점 가까운 차이가 나는 당시로서는 경이적인 기록으로 20년이 지난 32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에 와서야 기록이 경신됐다. 스톡홀름대회 이후 무명이던 짐 소프는 미국사회의 찬사를 한몸에 받는 유명인사가 되었고 각 언론들은 짐 소프의 기사를 연일 내보냈다. 이와중에 짐 소프가 스톡홀름대회 3년전 보수를 받고 야구경기에 나간 것이 밝혀져 선수자격이 말소되고 미국 올림픽위원회(IOC)는 짐 수프가 획득한 2개의 금메달을 회수했다. 이후 70년간 지난 1982년 10월에와서야 IOC집행위원회는 USOC의 청원에 따라 짐 소프의 가족에게 2개의 금메달을 반환했으며 소프는 복권됐다.
제6회대회(1차 세계 대전으로 취소)
제7회대회 -올림픽기. 'Citus. Altius. Fortius'표어 등장 세계 제1차대전으로 1916년 베를린에서 열리기로 돼있던 제6회 올림픽은 무산됐다. 전쟁의 참혹함과 올림픽의 무산은 쿠베르탕과 IOC인사들에 큰 충격을 주었다. 베를린대회의 무산은 정치와 인종, 종교의 벽을 초월하려는 올림픽의 근본 이념 추구에 한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러나 쿠베르탕과 그의 동료들은 전쟁의 참상을 딛고 올림픽 재건에 박차를 가했다. 스톡홀름 이후 8년만에 다시 열리는 올림픽은 전쟁의 피폐에서 재건하려는 유럽사회와 발걸음을 같이하고 있다. 쿠베르탕은 제7회 올림픽을 중립국인 벨기에 앤트워프에서 열기로 결정했다. 대회조직위원장은 후일 쿠베르탕에이어 제3대 IOC위원장이 된 앙리 드 바이에라이트르 백작이 맡았다. 대회는 1920년 5월 5일부터 7월 27일까지 진행됐다. 29개국에서 2,668명의 선수들이 출전 과거 어느 대회보다 규모가 컸으며 이는 평화를 염원하는 유럽인의 심정을 반영한 것이다. 앤트워프대회에서는 아이스하키가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었고 제5회 대회서 제외됐던 복싱, 양궁, 하키, 역도, 피겨스케이팅이 추가되는 등 19개경기 133종목이 열렸다. 과거 벨기에의 적대 국가였던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터키가 초청되지 않은 반면에 세계1차대전 종전후 독립한 신생국인 에스토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유고슬라바키아 등이 참가했다. 앤트워프 올림픽 당시 선수단의 숙박은 앤트워프시내 학교를 이용했으며 맛 좋은 음식이 선수단에 제공되었다.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어려움에도 무릅쓰고 벨기에 올림픽조직위원회는 육상과 축구 수영경기를 위한 화려한 경기장을 건축했다. 대회개막식에는 많은 관중들이 스타디움으로 몰려들어온 가운데 벨기에의 왕 알베르트에 의해 행사가 연출됐다. 대회장에는 쿠베르탕이 고안한 다섯 개의 오륜이 얽혀있는 올림픽기가 처음으로 게양되었으며 시내 거리에는 프랑스의 디동 신부가 지은 올림픽 표어 "보다 빠르게(CITIUS) 보다 높게(ALTIUS) 보다 강하게(FORTIUS)"가 올림픽기와 더불어 거리를 장식했다. 이 표어는 다음 대회인 파리올림픽에서 올림픽표어로 채택된다. 올림픽선서가 처음 시작된 것도 제7회 앤트워프올림픽대회 부터였다.
제8회대회 -올림픽 선수촌 등장 제8회 올림픽은 1900년 제2회 올림픽이후 24년만에 다시 파리에서 됐다. 본래 1924년 하계올림픽대회는 암스텔담에서 개최키로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쿠베르탕 IOC위원장의 임기가 1924년으로 끝나게되자 IOC위원회는 IOC를 떠나는 쿠베르탕에 대한 경의와 존중의 표시로 제8회 하계대회를 암스텔담에서 파리로 변경키로 결정했다. 대신 24년 하계대회를 개최키로 되어 있던 암스테르담은 다음 대회인 28년 제9회 하계올림픽대회 개최권이 주어졌다. 파리올림픽은 5월 5일부터 7월 27일까지 44개국 3070명의 선수가 참여 명실공히 인류의 스포츠제전으로 자리를 잡았다. 경기종목은 19경기 133세부종목으로 양궁과 하키가 제외되고 대신 펠로타가 처음으로 올림픽무대에 선을 보였으며 카누가 시범종목으로 실시됐다. 카누는 이후 베를린올림픽에 와서 올림픽정식종목으로 자리를 굳힌다. 파리올림픽에서는 올림픽사에 길이 남을 불세출의 선수가 탄생했다. 하늘을 나는 핀란드인 이라는 누르미는 육상 1500m, 5000m, 개인 및 단체크로스컨츄리, 3000m단체레이스 등에 출전 모두 우승을 차지했다. 전 대회인 앤트워프 올림픽에서 3종목 우승과 제9회 암스텔담 올림픽에서 1종목 우승을 비롯 올림픽에서 총 9개의 금메달을 획득했는데 이는 여자체조의 라리사 리치니나(소련), 수영의 마크 스핏치(미국)와 더불어 올림픽 역사상 가장 많은 금메달을 획득한 선수가 됐다. 누르미는 암스텔담 참가이후 24년이 지난 52년 헬싱키대회에서는 최종 성화주자로 선발되는 영광을 얻었다. 수영경기에서는 죠니 와이스뮬러가 혜성과 같이 등장했다. 와스뮬러는 자유형 100m에서 쿠하나모쿠공작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금메달을 획득했으며 자유형 400m와 800m 계영에서도 우승, 3관왕이 됐다. 훗날 그는 타잔영화에 출연 더욱 유명한 인사가 되었다. 파리올림픽에서는 올림픽 사상 처음으로 선수들을 한 장소에 모아 숙박시켰는데 이는 현재의 선수촌의 시작이라 할 수 있다. 펜싱경기에 여성이 처음 출전하였고, 잔디코트에서 테니스가 실시됐다. 육상경기는 3,000명이 넘는 시민들이 연일 관람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제9회대회 -올림픽 성화의 등장 제9회 올림픽은 1928년 5월 17일부터 8월 12일까지 네덜란드 암스텔담에서 개최됐다. 46개국에서 3014명(선수:2,694명)의 선수단이 참가했는데 이는 20년전인 런던대회에 비해 참가국수에 있어 2배이상 증가한 것이며 참가선수단도 1천명 가까이 늘어난 규모로 올림픽이 세계스포츠의 주도권을 더욱 확고히 다져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 대회에서는 스타디움 상단에 설치한 마라톤 중계탑위에 대형접시를 놓고 기름을 부어 불을 키는 성화가 등장했는데, 이는 오늘날 올림픽 성화의 효시다. 암스텔담대회까지는 아직 중국, 러시아 등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제1회 아테네 올림픽에 참가했던 원년 참가국인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벨기에 등이 16년만에 다시 올림픽무대에 복귀하였다. 1912년 스톡홀름대회에 모습을 나타낸 일본도 암스텔담 올림픽대회에서는 육상 세단뛰기에 출전한 오다가 15m21을 뛰어 올림픽에서 최초의 금메달을 획득한 일본인이 되었다. 육상경기가 여자에게 처음으로 문호를 개방한 것은 암스텔담 올림픽에 와서이다. 이미 제2회 파리 올림픽에서 골프와 테니스에서 여자선수의 참가가 가능해졌으며 제3회 세인트루이스에서 양궁경기에 여자가 출전한 적이 있었지만 육상은 암스텔담이전까지 금녀의 영역이었다. 국제여자스포츠연맹이 집요하게 참가신청을 요청해옴에 따라 IOC와 국제육상연맹도 여자종목을 인정하게 되었다. 여성이 육상경기에 참가함으로써 육상경기에 활력을 불어넣어 조화롭고 신선한 인상을 주었다. 5개의 종목으로 열린 여자육상경기에는 5개의 세계신기록이 수립됐다. 캐나다는 여성의 육상경기에 출전을 반대한 국가중 하나였지만, 높이뛰기와 400m계주에서 우승을 차지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 대회는 올림픽 육상경기에 여성이 참가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여론을 조성했지만 800m종목은 여성에게는 너무 무리한 종목이라는 인상을 갖게 했다. 실제로 경기에 출전한 몇 명의 선수가 실신하는 불상사가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여자육상 800m 종목은 1966년까지 올림픽무대에 서지 못했다.
제10회대회 -선수촌, 프레스센타 가설 제10회 로스앤젤레스대회는 유럽을 떠나 두 번째로 신대륙 미국에서 1932년 7월 30일부터 8월 14일까지 열렸다. 당시 세계는 경제대공황의 여파로 시달리고 있었으나, 미국은 사상 최대의 10만명을 수용하는 스타디움 '메모리얼 콜리시엄'을 건설하고 참가국 선수들의 경비를 절반 이상 부담해 주는 등 대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본격적인 선수촌과 텔레타이프가 가설된 프레스센터가 생긴 것도 이 대회부터였다. 각국 선수단은 37개국 1,328명, 관중은 무려 150만명을 이룬 대성황으로, 국내대회를 방불케 했던 제3회 세인트루이스대회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이미 5회째 참가하는 일본선수단은 임원 61명과 선수 131명으로 구성되어 기선으로 태평양을 건넜다. 이 가운데 바로 조선출신의 마라톤선수 김은배 권태하와 복싱의 황을수가 끼여 있었다. 이때의 일본선수단 본부임원으로 이상백도 들어있었다. 김은배는 양정보고를 갓 졸업한 21세. 권태하는 일본 메이지대에 재학중인 23세의 청년이었다. 같은 일장기를 달았지만 일본인들은 우리 선수들에게 괄시가 심했다. 대회개막(7월30일) 20일 전 즈음 현지에 도착한 뒤부터 일본인 마라톤코치 고야마는 일본선수(津田)에게만 마라톤코스를 현지답사케 하였다. 일본의 津田선수는 콘크리트 코스에 알맞은 신발을 마련했으나, 이 사정을 모르는 우리 선수는 서울의 흙바닥을 뛸 때 신었던 신발을 그대로 신고 훈련을 계속하다가 무릎과 허리에 이상이 생겼다. 반환점을 지나 권태하를 만났으나 피로에 지친 그는 먼저 가라는 신호를 보낼 뿐이었다. 골인지점 2km를 남기고 만난 언덕에서 김은배는 20여명을 물리치고 질주한 결과 6위(2시간 37분28초)로 골인했으며, 권태하는 뒤이어 9위로 들어왔고, 일본의 津田은 5위를 차지했다. 김은배는 일본인의 농간탓으로 실패했다는 생각에 분통함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복싱라이트급에 출전했던 황을수는 1회전에서 독일의 프란츠 칼츠와 열전을 벌였으나 아깝게 판정패했다. 우리 선수들이 첫 올림픽출전은 이처럼 울분속에 끝났지만 대신 선수들은 태극기를 든 로스앤젤레스 교민들로부터 뜨거운 환영을 받았었다.
제11회대회 -올림픽제단에서 채화된 성화 봉송 히틀러의 나치즘이 기승을 부리던 1936년 8월 1일 베를린 올림픽은 나치의 깃발 속에 개막 되었다. 아테네의 올림픽제단으로부터 채화된 성화가 봉송된 것도 이 대회가 처음이었다. 이 모든 각본이 게르만민족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나치즘을 선전하기 위한 히틀러의 구상에서 나온 것이었다. 참가선수는 49개국에서 4,300여명, 중국침략을 시작한 일본은 217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보냈다. 일본선수단에 마라톤2명(손기정 남승용), 농구 3명(이성구 장이진 염은현), 축구1명(김용식), 복싱 1명(이규환) 등 7명의 한국 선수들이 끼어 있었다. 일본인들은 선발전에서 압도적으로 우수한 우리의 청년들을 대표로 뽑는데 무척 인색했다. 최종선발전에서 우승한 농구의 연희전문에선 3명, 축구의 경성축구단에선 단 1명이 뽑혔고, 마라톤에서도 우여곡절 끝에 남승용이 포함 될 수 있었다. 손기정은 1935년 11월 일본에서 벌어진 대회에서 2시간 26분 41초로 비공인 세계최고기록을 세웠지만 세계무대에는 알려지지 않은 신인이었다. 손기정은 2시간 29분 19초로 세계최고기록으로 우승했다. 2위 하퍼는 2시간 31분 23초로 들어왔고 또 다른 우리 선수 남승용은 하퍼보다 9초뒤진 기록으로 3위로 골인했다. 그러나 이 통쾌한 승리는 곧 비극으로 이어졌다. 시상식 게양대에 일장기가 오르고 일본국가가 연주되자 우승자의 모습엔 치욕의 그림자가 서렸다. 손기정의 우승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삼천리 방방곡곡은 환호성으로 메아리쳤다. 일장기 말살사건이 일어난 때도 이때 일이다. 축구의 김용식은 갖은 차별대우를 극복하고 주전으로 활약했으며 복싱의 이규환은 첫 경기에서 불행하게도 금메달리스트 스텐 스피오(핀란드)와 대결했는데 1회에 다운을 빼앗기고 판정패했다. 이와 같이 우리 선수들은 비록 남의 나라 깃발 아래서 일망정 개인적으로는 열과 성을 다해 싸워 우리 겨레에게 큰 희망을 주었다. 갖은 차별을 이겨내고서 뿌듯한 결과를 얻어냈을 때 그것은 민족 모두를 단결시키는 대중적인 상징이 되었고 또 독립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부추겼다.
제12회대회(2차 세계 대전으로 취소) 제13회대회(2차 세계 대전으로 취소)
제14회대회 -정부수립전 태극기 앞세우고 올림픽 참가 2차대전이 끝나고 59개국 4,064명의 올림픽 가족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정부 수립전, 태극기를 앞세우고 첫 출전한 14회 런던올림픽(1948.7.29~8.14)은 한국스포츠사에 신기원이었고 올림픽역사에서도 감회가 새로운 대회였다. 당초 12회 대회(1940년)는 일본 도쿄에서, 13회 대회(1944년)는 영국 런던에서 열리기로 결정됐으나 1939년 9월 1일 발발된 제2차세계대전으로 말미암아 물거품이 된 바 있다. 따라서 런던 올림픽은 꺼졌던 성화가 12년만에 다시 피어 올라 인류의 제전이 부활되는 감격적인 무대였다. 총 67명으로 구성된 한국선수단은 서윤복 등 3명이 출전한 마라톤에 큰 기대를 걸었고, 다른 종목은 참가에만 의미를 부여한다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섰다. 마라톤에는 보스턴대회(1947년)를 제패(2시간 25분39초)한 서윤복을 비롯하여 최윤칠, 홍종오 등 패기만만한 3명이 출전했다. 우리선수단은 마라톤에서 기필코 좋은 성적을 거둬 베를린 올림픽을 제패한 손기정의 명예를 되찾고 그동안 패전을 설욕해 주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최윤칠은 다리에 경련을 일으켜 기권을하고 말았다. 또 홍종오는 25위, 서윤복은 27위에 각각 그침으로써 마라톤에 크게 기대를 걸었던 우리선수단을 실망시켜 버렸다. 역도에서 첫날엔 밴텀급의 이규혁과 페더급의 남수일이 분전하여 각각 4위에 입선했으며, 다음날은 김성집이 미들급에서 동메달을 따냈고 라이트급의 김창희, 나시윤이 모두 공동6이에 입선함으로써 대회시작후 우리선수단에게 최대의 수확을 안겨주었다. 특히 김성집의 동메달획득은 우리의 태극기가 최초로 올림픽 무대에서 휘날리게 한 하나의 사건으로서 기록되었으며, 올림픽사상 처음으로 태극기아래서 시상대에 오르는 기쁨을 안았다. 3명이 출전한 복싱에서 플라이급의 한수안이 승승장구, 준준결승에서 네덜란드의 코만을 2회 2분만에 KO로 뉘였다. 하지만, 준결승에서 반디넬리에 판정패 한 후 다음날 패자전에 나가 다행히 승리를 거둬 동메달을 차지함으로써 두 번째로 시상대에 태극기를 게양케 했다. 8월 14일 승마경기를 끝으로 런던 올림픽은 막을 내렸다. 한국은 13.75점으로 참가 59개국 가운데 24위였으나 동양권에서 인도(금메달1) 다음의 좋은 성적이었다. 첫 출전으로 큰 성과를 거둔셈이다. 메달이 문제가 아니라 보고 듣고 느끼며 세계의 스포츠를 경험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일제 식민통치아래서도 한국민의 기개는 면면히 이어져 이제 독립된 대한민국이 세계를 향해 발돋움하게 됐다는 사실을 만방에 알리는 계기로 삼았던 것이다.
제15회대회 -미•소의 경쟁, 올림픽 정치색 오염 총부리를 겨누고 싸우는 전란의 비극이 이땅을 뒤덮고 있는 속에서도 어김없이 15회 헬싱키올림픽 대회(1952.7.19~8.31)는 다가왔다. 1951년 임시수도 부산에서는 올림픽 출전여부를 놓고 의견이 갈라져 있었다. 불참을 지지하는 측은 자유우방의 용사들이 한국전선에서 나와 피를 흘리고 있고 한국의 젊은이들도 일선에 나가 목숨을 버리고 있는 이 마당에 올림픽에 나가는 것은 국제적 신의로나 도의적 입장이 마땅치 않다고 주장했다. 반면 우리 국민이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세계에 알리고 또 체육을 통한 국제친선외교에도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올림픽출전을 지지했다. 이러한 와중에서 헬싱키 올림픽조직위원회는 정식으로 참가초청장을 보내왔고, 52년 1월엔 브런디지 IOC위원장이 한국의 참가를 권유하는 서한을 보내옴에 따라 마침내 국회는 같은 달 만장일치로 올림픽 파견 건의를 가결했고 대한체육회 총재인 이승만대통령도 최후로 참가결정을 내렸다. 총 43명으로 확정된 대표선수단은 육상, 역도, 복싱, 사이클, 레슬링, 승마 등 6개종목에 출전했다. 우선 선수단은 초반 육상, 레슬링, 사이클 등에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특히 온 국민의 기대를 모았던 마라톤의 실패는 큰 충격이었다. 80여 명의 건각들이 출전한 마라톤은 초반부터 체코의 인간기관차 자토펙과 영국의 희망 J.피터즈의 대결이었다. 마라톤은 베를린올림픽, 51회 보스턴마라톤(1947년)을 제패한데 이어 1950년 4월엔 54회 보스턴마라톤에서 성기용, 송길윤, 최윤칠이 1,2,3위를 휩쓰는 등 화려한 전통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최윤칠은 골인지점 1백미터를 남기고 앞선 주자를 따라잡아 4위로 골인했다. 기록은 2시간 26분 36초였으며 6위까지의 기록이 모두 올림픽신기록이었다. 역도 미들급에 출전한 김성집이 동메달을 획득하고, 복싱에서도 강윤호가 동메달을 추가했다. 한국선수단은 동메달 2개로 참가국 69개국 가운데 37위를 마크 했다. 전쟁의 와중에서 참가다, 불참이다 해서 많은 시간을 허송했고 또 선수단의 구성에서도 불미스러운 점이 일어나 그 구성이 촉박하게 이루어짐으로써 제대로 충분한 훈련이나 연습을 할 겨를이 없었던 점에 비추어 볼 때 이러한 성적은 어쩌면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15회 헬싱키올림픽은 또 소련이 40년만에 처음으로 381명의 대규모 선수단을 참가시킨 대회로 기록되고 있다. 이로써 미국의 독무대였던 올림픽은 미-소의 첨예한 경쟁으로 양상이 바뀌게 되었다. 이와함께 선수촌 숙소는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과 자유진영으로 양분됐다. 인종과 이념, 종교를 뛰어넘는 올림픽정신이 정치색으로 오염되는 징후였다.
제16회대회 -폐막식 거행 새로운 올림픽 전통시작 멜버른올림픽(1956.11.22~12.8)에 한국선수단은 임원 14명, 선수35명 등 49명으로 구성되었다. 메달 유망종목인 역도는 대회 이틀째부터 벌어져 우리 선수단의 기대를 부풀게 했다. 첫날 밴텀급의 유인호 선수와 김해남 선수는 각각 4,5위를 차지해 순조로운 스타트를 보였으나, 유선수는 용상에서 135kg을 들어 세계기록을 돌파했으나 경기후 계체량에서 아슬아슬하게 1파운드를 초과하는 바람에 세계신기록을 애석하게도 공인받지 못했다. 대회 사흘째인 역도라이트급의 김창희 선수가 당당히 동메달을 따내 멜버른 하늘에 첫 태극기를 올렸다. 김선수는 세 번째 올림픽 도전에서 메달의 꿈을 이룬 것이다. 김성집 선수는 세 번째의 올림픽도전과 선수로서는 마지막 경기에서 총계 380kg을 들어 올려 아쉽게 5위에 머무르고 말았다. 런던올림픽때부터 줄곧 올림픽무대에 도전한 레슬링은 비로소 밴텀급의 이상균 선수가 금메달보다 값진 4위 입선으로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다. 복싱은 신예선수 5명이 출전해, 송순천을 제외하고는 모두 2~3회전에서 어이없게 탈락하고 말았다. 1회전부터 격전을 치른 송선수는 파죽지세로 결승까지 진출하여 서독의 베렌트와 금메달을 놓고 맞붙었다. 송선수는 시종 우세한 경기로 승리를 굳히는 듯 했으나, 결과는 베렌토의 승리로 끝나고 말았다. 송선수는 묵묵히 시상대에 올라 태극기가 게양대에 오르는 순간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올림픽은 공식적으로 국가별 성적을 따지지 않지만 미-소의 대결이 첨예화되면서 종합순위는 매스컴의 표적이 되었다. 멜버른 올림픽에선 소련이 금 37, 은 29, 동 32개로 종합 우승, 올림픽 참가 두 번째만에 미국(금 32, 은 25, 동 17개)을 앞질렀다. 한국은 참가 69개국 가운데 아르헨티나와 함께 공동 29위(은1, 동1)에 올랐으며, 특히 이번 대회에서는 한국문제에 관해 특기할 만한 결정을 내렸다. 대회기간에 열린 IOC총회는 북한의 IOC 동시가입 요청을 놓고 표결에 붙인 결과 25대 15, 기권 4표로 결정을 무기한 연기하기로 의결했다. 이번 멜버른 올림픽은 우리 선수단이 전세기 편으로 해외원정길에 오른 첫 대회로 태극기를 앞세우고 태극마크가 선명한 우리 전세비행기를 타고 장도에 오른 것이다. 또한 이번 대회는 참가선수 모두가 메인스타디움에서 다시 모여 승패를 초월한 석별의 정을 나누는 폐회식을 거행함으로써 새로운 전통을 세웠던 올림픽이기도 하다.
제17회대회 -약물복용 선수 사망 큰 오점 로마올림픽(1960.8.25~9.11)은 사상 처음으로 개회식을 비롯한 주요 경기모습이 인공위성을 통해 전 세계의 TV시청자들에게 중계되었다. 아울러 전광판이 등장하여 경기의 진행과정이 기록되었고 모든 경기결과는 전자장치에 수록되었다. 우리 선수단은 임원 20명과 선수 36명 등 56명과 심판, 회의대표, 연구원 11명을 포함한 67명으로 구성되었다. 종목은 육상, 역도, 복싱, 레슬링, 사이클, 사격, 체조, 다이빙, 승마 등 9개 종목으로, 체조와 다이빙은 올림픽 첫 출전이었다. 우리선수단은 출발때부터 상위입상에 대한 기대를 갖기 어려웠다. 4.19혁명으로 인해 체육행정에 오랜 공백기간이 있었는데다 선수 선발도 늦게 이루어졌고 정국의 혼란탓으로 제대로 훈련조차 못해 경기력에서 문제가 있었다.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이러한 불안감은 현실로 나타났다. 한국 선수단은 출전종목마다 참담한 패배의 연속이었다. 특히 한가닥 기대를 걸었던 마라톤과 역도의 침몰은 이들 종목이 국제무대의 경쟁에서 우리가 한수 아래임을 확인해 줬다. 마라톤에서 우리선수단은 이창훈, 이상철, 김연범 선수가 출전, 김연범 선수가 20위에 그치고 말았다. 우승자는 '맨발의 사나이'로 유명한 이디오피아의 비킬라 아베베였고 기록은 2시간 15분 16초로 세계신기록이었다. 7명이 출전한 역도에서는 페더급의 김해남 선수가 4위 입선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그동안 세차례의 올림픽대회에서 거르지 않고 메달을 따냈던 역도가 이제 세계의 무대에서 밀려난 것이다. 다른 종목에 출전한 우리 선수들의 기량도 국제적인 수준에서 봤을 때는 실력차가 너무나 뚜렷했다.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했던 용구나 시설들에 압도되어 제 실력을 발휘하기도 어려울 정도였다. 체조에 처음으로 출전한 우리 선수들은 경기용구가 국내에서 연습하던 것과 그 성능이나 탄력이 크게 달라 적응하느라 애를 먹었다. 이번대회에서 한국선수단은 올림픽 출전사상 처음으로 노메달이라는 부끄러운 기록을 남겼다. 로마올림픽은 정치색으로 오염됐던 멜버른대회와 달리 정치문제가 휴전상태였다는 점과, 동 서독은 양쪽 국기의 공통색인 검은색 붉은색 노란색의 3색바탕에 오륜마크를 그려넣은 국기를 들고 단일팀으로 참가했으며, 국가는 베토벤의 교향곡 9번을 채택했다. 로마올림픽은 길이 기억에 남을 스포츠영웅 2명을 탄생시켰다. 맨발의 마라토너 바킬라 아베베와 캐시어스 클레어가 그들이다. 아베베는 그후 동경올림픽에서도 2시간 12분 11초로 우승을 했으며, 동경대회에선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맨발이 아니고 육상화를 신고 달렸다. 그러나 멕시코 올림픽(68년)에서는 3연패하려던 그의 꿈은 출발후 10마일 지점에서 다리를 다치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아베베는 69년 자동차사고로 하반신불구가 돼 마라토너로서의 생명을 잃었다. 그러나 그는 좌절하지 않고 휠체어를 타고 다니며 궁도을 연마하여 세계장애자올림픽에 출전하는 등 활발히 체육활동을 계속했다. 73년 10월 25일 맨발의 사나이는 41세의 짧은 인생을 마감했다. 훗날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프로복싱계에 많은 신화를 남긴 캐시어스 클레이가 로마에 출현한 것은 18세의 어린 나이였지만 이미 아마전적 1백8승을 기록했던 그는 손쉽게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는 대회가 끝난후 프로로 전향하여 곧바로 헤비급 왕좌에 올랐으며 그후 많은 부와 명성을 누렸다. 로마올림픽이 남긴 가장 큰 오점인 약물복용에 의한 사이클선수의 사망 사고였다. 무더위 속에서 사이클 100km단체 경기 레이스 도중 덴마크대표 3명이 졸도했고 그중 쿠르트 옌센이 목숨을 잃은 일이 일어났다. 이 사고는 선수들이 혈액순환촉진을 위해 복용한 흥분제가 원인이 됐던 것으로 밝혀져 충격을 주었다.
제18회대회 -아시아지역 최초의 올림픽 개최 1964년 3월 이상백 위원장과 장기영 부위원장 그리고 48명의 위원으로 재조직된 KOC가 정식으로 출범을 하게됐다. 이 새체제 밑에서 구성된 도쿄올림픽선수단은 사상 최대 규모인 224명(선수 165명 임원 59명)으로 16개 출전 종목을 따라 5개 등급으로 나누었는데 입상 가능한 종목은 복싱 레슬링 유도 역도 마라톤 5개종목에 불과했다. 나머지 참가종목 중 예선통과 종목과 (축구, 배구, 승마, 수영, 농구), 우수종목(사격, 사이클), 정책종목(체조, 육상, 펜싱, 조정, 근대5종)으로 구분됐다. 우리 올림픽선수단은 '올림픽 관광단'이란 비난이 나올 정도로 참가종목이나 규모면에서 파격적이었다. 그러나 이같은 대규모선수단을 구성하게된 배경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다. 첫째 북한이 처음으로 대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함에 따라 스포츠외교나 경기면에서 이들과 경쟁해야 되며, 둘째 개최지가 가까운 곳이어서 적은 돈을 들이고도 세계수준의 선수들과 겨뤄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됨으로써 국내스포츠 경기력 향상에 도움이 되고, 셋째 1백만명에 가까운 재일동포의 사기를 고려해야 했기 때문이다. 도쿄올림픽은 유럽과 미국이 독점해온 올림픽무대를 사상 처음으로 아시아로 옮긴 뜻깊은 대회였다. 유색인 국가가 올림픽 주최국이 된 것도 처음이다. 남북한문제는 헬싱키올림픽이후 두 개의 중국, 두 개의 독일과 함께 IOC 두통거리였다. IOC는 1957년 소피아 총회에서 북한의 NOC를 승인했으나, 올림픽출전은 KOC의 동의하에 단일팀으로 하도록 단서를 붙였다. 그후 단일팀 구성을 위한 토의가 진행되지 못한채 로마올림픽엔 한국이 단독으로 출전했으나 63년 1월 스위스 로잔에서 IOC중재에 의해 분단후 처음으로 단일팀 구성을 놓고 남북한이 직접 대화에 나섰지만, 두차례 계속된 회의에서 합의점을 찾지 못해 결렬되고 말았다. 이에따라 IOC는 1963년 8월 남북한이 별개의 팀으로 도쿄올림픽에 참가하도록 결정함으로써 결국 북한이 올림픽무대에 첫 모습을 나타내게 된 것이다. 배구, 농구의 연패와 함께 한국선수단은 대회초반부터 고전의 연속이었다. 다만 복싱 레슬링 유도 등 투기종목에서만 승전보가 날라왔다.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에 출전한 장창선 선수는 승승장구 은메달을 확보하고 결승에서 일본의 요시다와 맞붙었다. 계속적으로 공격일변도로 공세를 펴던 장 선수는 불의의 반격을 당해 한점차로 판정패, 은메달에 머물렀다. 복싱의 정신조 선수는 승승장구, 결승까지 올라 일본의 사꾸라이 다까오와 맞붙게 되었으나 아깝게도 2라운드 1분 19초만에 RSC로 패함으로써 금메달 문턱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또 유도 중량급에 출전한 재일동포선수 김의태는 준준결승까지 세경기를 내리 한판승으로 장식한 후 준결승에 올라 일본의 숙적 오까노와 맞붙었으나 판정패, 동메달에 머물렀다. 이로써 우리 선수단은 이번 대회에서 모두 은2, 동1개의 성적을 거두었다. 한국은 일본 미국 소련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서 5번째로 많은 선수단을 출전시켰지만 종합성적에선 겨우 27위에 그쳤다. 올림픽기간중에 열린 제62차 IOC총회는 브런디지 위원장의 3선을 의결했고 아울러 이 총회에서 KOC위원장 이상백 박사가 IOC위원으로 선임됨으로써 한국은 사상 두 번째의 IOC위원을 갖게 됐다.
제19회대회 2,240m 고지대, 고지 적응이 관건 멕시코시티에서 올림픽대회를 개최하기로 정식으로 결정이 난 것은 1964년 1월의 제61차 IOC총회에서였다. 그러나 이 제19회대회(1968.10.12~27)는 개최에 이를 때까지 수많은 지리적, 인종적, 정치적인 문제들이 발생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우선 과거의 어느 개최지보다도 고지대라는 점이였다. 그때까지 가장 저지대는 도쿄대회의 해발 6m였고 고지대였던 세인트루이스대회가 해발 175m였는데 비해 멕시코시티는 해발 2,240m나 되는 고산지대였기 때문이다. 또 기후면에서 볼 때 평지와 비교하여 두드러지게 기압이 낮고 온도도 낮기 때문에, 특히 생체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여러 나라로 부터의 강한 비판을 받았다. 그 때문에 IOC는 종래의 4주간의 합숙인가 기간을 이번 대회에 한해 6주간으로 연장하고 참가국들에 고도적응을 위한 준비기간을 평등하게 주었다. 국명호칭문제로써 동독, 자유중국, 북한으로부터 IOC에 이의신청이 접수됨에 따라 신청대로 도이취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자유중국,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으로 각각 고쳐 부를 것을 10월에 열린 IOC총회에서 결정했는데, 동독 및 자유중국은 1968년 11월 1일부터 이미 실행에 옮겼다. 북한은 다음의 뮌헨대회때부터 그렇게 실행하기로 하고 이번대회에 한해서는 북조선이라는 호칭으로 참가하도록 조치가 내려졌다. 그러나 이 조치에 불복한 북한은 이미 선수촌에 들어가 있던 선수단을 철수시켜 참가를 포기하고 귀국해 버렸다. 한국은 멕시코올림픽에 76명(임원 21 선수 55)의 소규모 선수단을 참가시켰다. 참가종목은 복싱 레슬링 사격 사이클 역도 등 입상가능종목과 지역예선을 통과한 남자농구 및 여자배구, 육상 체조 수영 등 정책종목을 포함해 모두 10개종목이었다. 한국선수단이 가장 강력한 금메달 후보로 기대한 선수는 레슬링 자유형의 오정룡과 복싱 페더급의 김성은이었다. 그러나 레슬링의 김익종선수와 복싱의 이창길, 역도의 원신희 선수에게도 동메달의 기대를 걸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기대했던 성적을 올리지 못했고 대신 기대하지 않았던 선수들이 잘 싸웠다. 그렇게 기대를 걸지 않았던 복싱의 지용주(라이트플라이급)와 장순길(밴텀급) 선수가 승승장구하여 동메달을, 또 지용주선수는 준결승에서 폴란드 휴버트 스크리프자크 마저 꺾음으로써 은메달을 확보, 결승전에 진출 베네주엘라의 로드리스케스와 대등한 경기를 펼쳤으나, 결과는 3-2 판정패로 은메달에 만족해야만 했다. 멕시코올림픽에서 한국선수단은 은1, 동1개로 108개국 가운데 36위를 차지하는 성과를 올렸다. 멕시코 올림픽에서 우리선수단은 기대이하의 성적에 그쳤으나, 반면 예술문화행사단은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KOC는 멕시코올림픽이 생소한 땅 중남미대륙에 한국을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판단, 선수단외에 82명의 예술문화행사단을 파견했다. 행사단은 올림픽기간 중 벌어진 청소년 올림픽캠프 민속예술제 어린이벽화전 예술작품전 등을 통해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 예술제에 참가하여 절찬을 받았던 선화무용단은 10월 14일 올림픽선수촌에서 2천여명의 각국선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1시간가량 특별공연을 가졌다. 저개발국에서 최초로 개최된 멕시코올림픽은 개최지가 고지대에 위치해 있다는 점 때문에 제기된 우려와 남아공화국의 인종차별에 대한 잡음 및 학생데모 등의 와중에서도 경기진행에서만은 그런대로 무리없이 치러진 대회였다고 평가되었다.
제20회대회 -피의 참사...이스라엘선수 11명 사망 뮌헨올림픽대회(1972.8.26~9.11) 개최가 정식으로 결정된 것은 1966년 4월 26일 로마에서 열린 제64차 IOC총회에서 였다. 뮌헨시에서 대회를 유치하게된 최초의 계기가 된 것은 이 시출신으로서 과거의 유명한 육상경기선수였던 '한스 브라운'(1886~1918)이었다고 한다. '브라운'은 초기의 독일육상경기발전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의미에서 그 공적이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그 이상으로 그가 스스로의 성공을 항상 자신의 고향 뮌헨을 위해 추구해 왔다는, 말하자면 그의 향토애가 뮌헨시로 하여금 대회유치를 하도록 하는 계기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외에도 그와 마찬가지로 뮌헨시가 낳은 유명한 스포츠선수는 많은데 그 중에서도 훗날 뮌헨올림픽 당시의 IOC위원장인 '브런디지'의 친구로서 육상경기선수인 '릿터 포 할트' (1881~1964)등도 개최지 결정에 이를 때까지 음성적으로 많은 힘이 되었다고 한다. 한국 선수단은 당초 과거 도쿄와 멕시코 두 대회성적을 기준으로 6위이내 입상이 가능할 것으로 확정되는 종목 및 선수를 엄선키로 되어 있었다. 이렇게 해서 확정된 선수단규모는 여자배구 복싱 역도 레슬링 유도 등 5개종목에 걸쳐 39명(임원 13, 선수 26)이었는데 이는 52년 헬싱키대회(43명)때 보다도 4명이나 적은 역대대회 가운데서 최소규모였다. 그러나 7월말 프랑스 생디에에서 벌어진 올림픽 배구경기에서 북한을 격파하고 출전권을 따낸 남자배구팀, 현지에서 훈련중이던 육상의 박상수(높이뛰기) 백옥자(포환던지기), 수영의 조오련과 사격선수단(임원1 선수5)이 현지에서 합류함으로써 선수단의 총규모는 62명(임원 6 선수 46)으로 늘어났다. 뮌헨올림픽이 종반을 향해 치닫던 9월 5일은 평화의 축제인 올림픽대회사상 최대의 비극이 벌어지고 말았다. 팔레스타인 게릴라 단체인 검은 9월단 8명이 선수촌을 침입, 이스라엘 선수단 숙소를 습격했던 것이다. 그들은 선수2명을 현장에서 사살한뒤 9명을 인질로 잡아놓고 이스라엘에 억류중인 팔레스타인 정치범 2백여명의 석방을 요구하고 나섰다. 이렇게 되자 브런디지 IOC위원장은 다우메조직위원장과 협의하고 우선 이날의 모든 경기를 중지한다고 발표했으며 브란트 서독총이가 직접 협상에 나섰다. 서독정부 당국은 이들에게 이스라엘측과 협상중이니 일단 장소를 옮길 것을 요청하여 이들이 물러나는 사이 뮌헨공항에서 총격전 끝에 일망타진했다. 이 사건으로 이스라엘선수 9명이 전원 살해됐고 게릴라는 5명이 사망했으며 3명이 체포됐다. 사건 다음날인 6일 메인스타디움에서는 뮌헨오페라하우스의 교향악단이 베토벤의 에그몬트서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하이네만 서독대통령, 브런디지 IOC위원장이 장례식을 집행했다. 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로 초청받은 손기정을 비록하여 한국선수단에서도 여러명이 참석했다. 뮌헨올림픽은 또 북한이 처음으로 참가한 대회로 기록되고 있다. 북한은 10개종목에 걸쳐 82명(임원 12 선수 64)의 선수단을 파견했는데 호칭은 DPRK였다. 이 호칭은 69년 6월 7일 제68차 IOC총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된 것이다. 북한은 첫 출전한 이번대회에서 뛰어난 성적을 올렸다. 사격 소구경복사에서 이호준이 금메달, 복싱 라이프 플라이급에서 김우길이 은메달, 레슬링 자유형 플라이급에서 김광형, 유도 라이트급에서 김용익 그리고 여자배구에서 각각 동메달을 따냈다. 특히 여자배구의 동메달은 3,4위전에서 한국을 꺾고 따낸 것이다. 종합순위에서 북한은 22위, 한국은 33위에 그쳤다. 우리 선수단은 유도 미들급에서 오승립이 따낸 은메달이 전부였다.
제21회대회 -한국 광복후 첫 금메달 획득 1970년에 제21회 올림픽이 몬트리올 개최로 결정되자 캐나다는 곧 3억 2000만달러의 예산으로 준비에 착수했다. 그후 석유파동 등에 의해 일어난 인플레이션으로 해서 13억달러로 액수가 늘어나게 되고 정치적 문제까지 겹쳐 몇 번인가 중단위기를 맞기는 했지만 준비는 원만히 이루어 졌다. 몬트리올 올림픽(1976.7.17~8.1)에 한국은 72명의 선수단(임원 22 선수 50)을 참가시켰다. 레슬링 유도 여자배구 복싱 사격 등 5개 종목이 모두 입상 가능한 종목이었으나 사격은 다음해 서울에서 벌어질 세계선수권대회의 주최국으로서 최면을 고려하여 뮌헨때와 마찬가지로 정책적으로 파견됐다. 한국선수단은 올림픽이 개막된지 열흘이 지나도록 단 한 개의 메달도 따내지 못해 노메달로 끝나는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마저 감돌 때 비로소 메달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28일 유도 미들급의 박영철이 동메달을 따낸 것을 시발로 30일에는 라이트급의 장은경이 은메달을 따냈고 여자배구가 동메달을 획득했다. 여자배구의 동메달은 우리의 올림픽 구기사상 첫 메달로 기록되고 있다. 몬트리올 올림픽 여자배구에는 일본 페루 캐나다 헝가리(이상 A조), 한국 소련 동독 쿠바(이상 B조) 등 세계 강호들 8개팀 모두 출전했다. 첫상대인 소련에게는 3-1로 졌으나 동독과 쿠바에 각각 3-2로 역전승하여 조2위로 준결승에 올랐다. 결승토너먼트에서 일본에 3-0으로 패해 3-4위전으로 밀려나 헝가리를 3-1로 꺾음으로써 동메달을 따낸 것이다. 31일에는 레슬링에서 자유형 플라이급의 전해섭이 동메달을 따냈고 이어 자유형 페더급에서 양정모가 대망의 금메달을 따냈다. 양정모 선수는 몽고의 오이도프와 맞붙게 되었다. 양 선수는 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세계챔피언인 오이도프를 꺾고 우승했었으나 다음해인 75년 9월 소련 민스크 세계선수권대회에선 패배하여 동메달에 그침으로써 1승 1패의 호각세를 이루고 있었다. 몬트리올 올림픽을 앞두고 양정모의 금메달 획득여부는 오이도프를 꺾을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는 전망이 지배적이었다. 그 오이도프가 1차전에서 미국의 데이비스에게 판정패함으로써 벌점 3점을 안고 불리한 조건으로 결승전에 올랐다. 결승에서 양 선수는 10-8로 판정패했으나 그때까지 무벌점이었던 양 선수가 판정패로 3벌점을 안은 반면 오이도프는 근소한 차로 이겼기 때문에 벌점 1점이 추가되어 4벌점으로 은메달에 그쳤다. 이렇게 해서 양정모 선수는 온겨레의 염원이던 올림픽 금메달을 따낸 것이다. 실로 한국스포츠가 올림픽에 참가하기 시작한지 28년만에 맞은 경사였다. 손기정 선수의 눈물어린 금메달 이후 꼭 40년만에 이루어낸 쾌거였다. 조재기 선수는 유도 라이트헤비급에 출전했으나 메달권에서 탈락해 버리자 비장한 각오로 머리를 빡빡 깎은채 무제한급에 출전해 패자결승에서 아르헨티나의 포르텔리에게 판정승하여 기어이 메달의 꿈을 이루고 말았다. 모두 5개의 메달(금 1 은 1 동 4)을 따낸 한국선수단은 메달집계에서 19위를 차지하여 금, 은 1개의 북한(메달집계 21위)을 앞서 뮌헨대회에서의 열세를 만회한 것이다. 몬트리올 올림픽은 동독이 세계스포츠의 양대산맥인 미국과 소련의 아성에 도전할 수 있는 새로운 스포츠 강국으로 데뷔한 무대였다. 소련이 금메달 47개로 1위였으며 금 40개의 동독은 금 34개의 미국을 제치고 사상 최초로 2위로 뛰어 올랐다.
제22회대회 -미국 보이콧 선언 서방진영 동조 몇차례 위기를 맞으면서도 잘 이어져 온 올림픽운동은 몬트리올대회이후 동서 양진영의 정치적 대립으로 인해 반쪽으로 갈라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90년 모스크바와 84년 로스앤젤레스대회는 양진영이 번갈아가며 집단 보이콧트를 했다. 그것은 근대 올림픽이 부활된 이후 맞는 최대의 위기가 아닐 수 없었다. 반쪽 올림픽이 될 수 밖에 없었던 계기는 미국의 카터 대통령의 보이콧트 선언에서 비롯된 것이다. 1979년 12월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무력으로 침공하여 친소정권을 세우자 카터 대통령은 소련군의 즉각 철수를 촉구하면서 다각도의 보복대응책을 마련했다. 신성한 올림픽정신을 훼손시키는 처사라는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올림픽 보이콧트를 정치적 요구관철의 카드로 내세운 것은 가장 위험부담이 적으면서도 가장 효과가 큰 압력수단으로 믿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1980년 2월 미국정부는 올림픽 불참을 공식선언했으며, 서방국가들이 속속 동조하기 시작했다. KOC도 정부의 뜻을 받아들여 4월 23일, 미국의 결정을 따르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모스크바 올림픽은 한국, 미국을 비롯, 서독, 일본, 캐나다 등 67개국이 불참한 가운데 80년 7월 19일부터 8월 3일까지 거행됐다. 보이콧문제로 개막직전까지 참가 여부가 확정되지 않은 나라들이 있어 대회참가국 수조차 파악되지 않았으나 결국 대회조직위원회 발표에 의하면 참가국은 81개국, 참가인원은 6,948명이었다. 미국 서독 등 최근의 올림픽에서 메달을 획득해 온 나라들이 모스크바 올림픽을 보이콧했기 때문에 대회의 내용과 성적이 두드러지게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다. 그러나 이 대회에서 세계신기록(타이기록포함) 39, 올림픽신기록 95개가 쏟아져 나옴으로써 이전의 몬트리올 올림픽에서 나온 세계신기록 40, 올림픽신기록 49개와 비교해 볼 때 내용이 크게 뒤떨어진 대회였다고 볼 수는 없는 것이었다. KOC는 선수단은 파견하지 않는 대신 국제경기연맹이 올림픽 기간중에 정기적으로 소집하는 국제회의에는 대표를 파견하고 또 경기연맹이 개인 자격으로 지명하는 국제심판 및 주리(배심원)회의에도 참가시켰다.
제23회대회 -소련의 보복성 보이콧, 재현된 반쪽대회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은 소련과 동유럽국가들이 신변상의 위협 등을 이유로 불참한 가운데 1984년 7월 28일부터 8월 12일까지 열렸다. 4년전의 모스크바대회에 불참한 서방국가들에 대해 이 대회에서는 똑같은 방법으로 동유럽권 국가들이 보복을 한 것이다. 이런 가운데 한국선수단은 불굴의 정신으로 사력을 다하여 온 국민의 여망과 기대에 보답하겠다는 굳은 결의로 LA대회에 참가했다. 전 세계 140개국에서 7800여명 선수가 참여한 이 대회에서 한국은 21개종목에 걸쳐 284명이란 올림픽 참가 사상 가장 큰 규모의 선수단을 파견하여 금메달 6 은메달 7개를 따냄으로써 참가국 중 종합성적 10위를 기록했다. 한국이 1948년 런던올림픽에 처음 출전한 이후 76년 몬트리올 올림픽대회까지 8차례의 올림픽에서 거둔 한국팀의 성적은 금메달 1 은메달 6 동메달 11개 등 모두 18개에 불과했다. 따라서 LA대회에서 한국선수단이 거둔 성적은 과거 28년간 한국팀이 획득한 메달수보다도 많게 나타남으로써 세계만방에 우리 국민의 우수성과 무한한 한민족의 잠재력을 유감없이 떨쳤다. 당초 메달획득 가능종목이었던 투지종목의 유도 레슬링 복싱에서 5개, 양궁에서 1개의 금메달을 딴 것은 메달 박스로서의 앞날에 가능성을 내다보게 했다. 8명의 선수가 참가한 유도는 금2, 은2, 동1로 5명의 선수가 입상함으로써 체급종목 가운데 가장 훌륭한 성적을 올렸다. 특히 라이트급의 안병근과 하프헤비급의 하형주는 유도종주국인 일본세를 물리치고 우승을 했다. 과거 일본의 독무대였던 이 종목에서 일본 4체급, 한국 2체급, 서독과 오스트리아가 각각 1체급으로 금메달이 분산됨으로써 일본에 대한 패배의식을 벗어날 수 있게 됐다. 19세의 나이에 국제대회경험도 적은 선수인 김재엽선수는 은메달을 따냄으로써 다음 서울대회에 밝은 전망을 갖게 해 주었다. 레슬링은 14명이 출전하여 금2 은1 동4 등 모두 7개의 메달을 획득하였으므로 대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레코만형 62kg급 김원기의 금메달은 이 대회의 첫 번째 쾌거로서 선수단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어 줌은 물론 메달획득에 대한 가능성과 자신감을 심어주어 여타 경기에 임하는 선수들에게 정신적으로 큰 힘이 되었다. 자유형 68kg급에 출전한 유인정은 기술이나 체력면에서 월등한 수준이었으나 우리의 장단점을 잘 알고 있는 일본선수가 우려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가미무라와의 4차전 경기는 11대 4의 일방적인 점수차로 판정승을 거둠으로써 우승이 확실시되었으나 미국선수와의 결승전은 조결승전에서 입은 허리부상 때문에 부담이 컸다. 이러한 악조건하에서 결승전에 나간 유 선수는 부상을 숨기고 강인한 정신력으로 사투, 5대 5 우세 판정승으로 금메달을 따냈다. 9명의 선수가 출전한 복싱에서는 미들급의 신준섭이 금, 웰터급의 안영수가 은, 라이트급의 전칠성이 동메달을 따내어 한국복싱에 희망을 안겨 주었다. 복싱선수 중 훈련태도가 성실했고 또 훈련가운데서도 체력훈련을 집중적으로 했던 신준섭선수의 금메달 획득은 당연한 결과로 받아들여졌으며 특히 미들급에서 그러한 성적을 올렸다는 점에서 우리 복싱의 중량급도 열심히 노력하면 세계정산에 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케 해 주었다. 양궁가운데 여자부는 금 1개, 동 1개를 목표로 했던 유망종목이었다. 예상대로 여자경기에서 메달 2개가 나와 시상식때 1위와 3위의 자리에 우리 선수가 서게 되었고 2개의 태극기가 동시에 게양되는 감격을 누렸다. 2,636점의 세계최고기록을 가지고 출전한 김진호에 대하여는 국내외에서 확실한 금메달리스트라고 보았었다. 그러나 천부적 재질을 인정받고 있던 세계정상 김진호는 심리적 압박감을 이겨내지 못하고 두 번이나 영점 실사하는 등 고전 끝에 2,555점으로 3위에 그치고 동메달을 목표했던 서향순이 대신 2,568점으로 1위가 되었다. 동유럽권의 불참으로 이 대회자농구종목에서는 은메달을 따냈는데 이같은 성적은 개인종목의 금메달에 못지 않은 값진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여자농구는 74년 아시안게임부터 나타난 중국에게 80년대에 들어서서 밀리기 시작하여 번번히 괴로움을 당해 왔었다. 그러나 쿠바 프레올림픽경기(올림픽예선전)에서 6위로 본선티켓을 놓쳤을 때는 중국 37대 72, 35포인트의 차이로 대패했었지만 이 대회에서는 69대 56, 13포인트차로 중국을 제압했다. 또 프레올림픽대회때 캐나다에는 68대 79로, 55대 52로 각각 이들을 격파했다. 동메달이 당초 목표였던 여자핸드볼은 비인기종목의 설움을 딛고 기적같은 은메달을 따내는데 성공했다. 최상의 경우 은까지도 기대했던 종목으로 목표달성을 훌륭히 해낸 것이다.
제24회대회 -"12년만에 동서진영 한자리, 기록도 역대 최고 수준" 서울이 유치하여 개최한 제24회 대회는 160개국이라는 최대참가국수와 13,600명이라는 최대참가인원수를 기록한 가운데, 9월 17일부터 17일 동안에 걸쳐 23개 정식종목과 3개 시범종목 및 2개 전시종목이 거행되었다. 올림픽대회사에 12년만에 동-서 진영이 자리를 함께 한 대회이자 1948년부터 참가하기 시작한 뒤 40년만에 이땅에 유치한 대회이며 아시아에서는 두 번째 개최가 된다는 의의를 찾을 수 있었다. KOC는 이 대회에 28개 전 종목에 걸쳐 대규모 선수단을 참가케하여, 비공식메달집계에 의한 종합순위 4위를 차지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실로 놀라운 성적으로, 대회개최의 성공과 아울러 민족사에 금자탑을 이룬 성과라 하겠다.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라는 슬로건과 같이 50억 전 세계인을 흥분케 하며 '서울 코리아'의 이미지를 새롭게 해준 역사적인 대회였으며, 경기는 유례없는 높은 수준을 이루며 경쟁 또한 치열했다. 23개 경기에서 237개 세부종목에서 예상대로 소련이 금메달 55개로 종합 1위를 차지했고, 2,3위는 금메달 1개 차를 두고 동독 및 미국의 순서가 되었다. 한국은 9월 28일가지만 해도 중국에 뒤진 12위였으나, 9월 29일 중국 프랑스를 제치고 10위, 9월 30일 이탈리아 영국을 제치고 8위, 10월 1일 루마니아를 제치고 7위, 마지막날인 10월 2일 불가리아 헝가리 및 서독까지 추월하여 4위에 올라섰다. 중국은 11위, 일본은 14위에 머물렀다. 한국의 종합순위 4위는 자유진영국가 중에서는 미국 다음가는 2위에 해당하며, 아시아국가 중에서는 선두를 지켰다. 160개국 중에서 금메달 1개 이상을 획득한 나라는 31개국, 동메달 이상은 52개국이 되어, 전 참가국의 19.4% 및 32.5%에 불과한 나라들이 메달획득의 영광을 차지한 것이다. 이 대회가 과거의 어느 대회보다도 수준높은 대회였다는 것은 신기록 수립 실적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이 대회의 세계신기록은 수영 역도 육상 사격 양궁 사이클의 6개 종목에서 33개가 수립되었고, 올림픽신기록은 227개가 작성되었다. 한국선수단의 올림픽신기록 19개는 양궁(16) 역도(2) 사격(1)에서, 올림픽 타이기록 1개는 사격에서, 아시아신기록 2개는 역도와 사이클에서 수립되었으며, 세계수준과 너무 현격한 차이가 나긴해도 한국신 19개가 육상(8)과 수영(11)에서 나왔다. 기록경기인 양궁에서 김수녕이 세계신기록을 세우면서 2관왕이 됐고 여자선수들이 모든 세부종목을 완전 석권한 데다가 남자양궁마저 세계정상이 되었다. 단체 구기종목인 핸드볼 여자팀의 우승과 남자팀의 2위, 그리고 여자하키팀의 2위도 세계를 놀라게 하였다. 사격의 최초 은메달도 세계적으로 만점대 선수가 20여명이나 있는 가운데 얻은 값진 성과였으며, 역도의 52kg급, 은메달 82.5kg, 동메달은 올림픽 32년만의 최초의 값진 메달이었다. 탁구는 세계정상인 중국과 같이 금메달 2개를 확보하고, 남자단식에서 세계정상에 올랐으며, 우리 선수끼리 결승전을 갖고 1,2위가 되었다. 유도는 일본을 제압하고 종합1위가 되었으며, 레슬링은 금 은 동 9개의 최다메달을 획득하였다. 무릇 서울 올림픽대회는 운영도 성공적이어서 세계인들의 격찬을 받았고 국익에 크게 도움이 되었다. 선수단의 훌륭한 경기성적은 성공적 올림픽 개최의 핵을 이루었으며, 또 나아가 세계속의 한국의 위상을 높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제25회대회 -구소련 동독 해체, 새 판도 예고 스페인의 항구도시 바르셀로나에서 개최된 제25회 올림픽(1992.7.25-8.9)은 실로 오랜만에 전 세계의 올림픽국가가 모두 참여한 화합의 올림픽이 되었다. 반쪽 올림픽으로 전락한 모스크바 올림픽과 로스앤젤레스올림픽, 북한, 쿠바 등의 참가거부로 정치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서울올림픽과 달리 바로셀로나에서 개최된 올림픽은 실로 16년만에 탈정치를 구현한 올림픽이 되었다. 인종차별문제로 68년 올림픽에서 추방되었던 남아공의 참가도 이 대회가 인종, 종교, 정치적 갈등을 초월한 대회로 역사에 기록되는데 한몫을 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은 올림픽대회의 새로운 실험장이었다. 정치적 갈등을 극복, 보다 올림픽이념에 충실한 반면에 과거 참가가 거부돼오던 프로에도 문호를 더욱 확대하였다. 올림픽을 주관하는 IOC는 올림픽무대가 최고의 실력을 갖춘 강자들의 결전장이 되기를 원해 서울올림픽에서 참가가 제한적으로 테니스와 축구 이외에 농구에서까지 프로선수의 참가가 이루어졌다. 최고의 기량을 가진 일명 '드림팀'이라 불리는 NBA스타로 구성된 미국팀은 바로셀로나올림픽에서 가장 주목을 받는 팀이 되었다. 프로의 올림픽무대 진출의 확대와 더불어 상업주의도 올림픽의 성역을 넘었다. 이제 IOC는 올림픽에서 종래 고수하던 아마추어리즘 고수대신 투자한 만큼 성과를 거두려는 경제제일주의를 도입, 21세기의 파고를 헤쳐나가려 하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이번 대회에서 소련, 독일을 누르고 종합우승을 누렸지만 통일독일에 금 1ROCK로 간신히 2위를 차지했다. 반면 중국은 이번 올림픽 수영종목에서 황색돌풍을 일으키며 금메달 16개로 동독에 이어 4위를 차지, 향후 공산권 스포츠 대국의 토대를 구축했다. 바르셀로나올림픽은 한국선수단에게는 서울올림픽에서의 성적을 객관적으로 증명하는 대회가 되었다. 서울올림픽에서 금 12개, 은 10개, 동 11개로 소련 미국 동독에 이어 4위를 차지했으나, 이는 개최지의 이점을 안고 얻은 성과여서 그 가치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했다. 때문에 바르셀로나대회를 맞으면서 344명의 한국선수단이 느끼는 부담감은 어느 올림픽보다 무거웠으며, 매 경기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야 했다. 한국선수의 승전보는 의외로 일찍 찾아왔다. 한국선수단의 첫 번째 금메달인 여갑순 선수의 금메달은 대회 첫 번째 금메달이라는 색다른 의미를 갖게 되었다. 역도에서는 작은거인 전병관이 한국역도 사상 처음으로 올림픽무대에서 정상에 올랐다. 여자유도 72kg급에 출전한 김미정 선수도 금메달을 추가시켜 한국의 메달레이스에 힘을 더했다. 이민철의 승리소식도 한국 선수단에 큰 용기를 주었다. 남자사격 소구경 복사경기 본선경기에서 부진 겨우 8강에 합류했으나 결선에서 막판 대역전극을 연출하며 금메달을 획득했다. 전통적인 강세종목인 레슬링에서도 한국은 금2, 은1, 동1개를 획득했다. 그레꼬로만형 57kg에 출전한 안한봉은 90, 91 세계선수권대회 우승자 독일의 리파트일디츠를 치열한 접전 끝에 6-5로 역전승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노장 박장순이 74kg급 결승에서 미국의 먼데이를 꺾고 우승한 것도 한국 선수단에 큰 힘이 되었다. 한국양궁은 전체 4개 금메달 중 여자 개인전과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획득 양궁 강국의 위치를 지켰다. 이 대회에서 기록한 11개의 세계신기록 중 10개를 한국선수가 세웠다. 여자개인전에서 조윤정이 양궁여왕 김수녕을 꺾고 무명시절의 설움을 말끔히 씻어냈다. 여자단체전의 우승도 대회 3연패라는 한결 값진 의미를 담고 있다. 처음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배드민턴에서 한국선수들은 자신의 기량을 마음껏 뽐내며 금2, 은1, 동1개를 획득 당초의 목표를 달성했다. 세계최강 박주봉-김문수조와 황혜영-정소영조가 남녀복식 동반우승을 차지했다. 여자핸드볼은 결승에서 노르웨이를 꺾고 우승 대회 2연패를 차지했다. 올림픽 2연패는 한국 구기종목 사상 최초의 경사였다. 대회 마지막종목으로 열린 마라톤에서 황영조의 우승은 새로운 신화 창조였다. 마타르드-몬주익 주경기장의 42.195km구간에서 황영조는 숙적 일본의 모리시타를 따돌리고 월계관을 머리에 썼다. 올림픽의 꽃이라 불리우는 마라톤에서 한국인의 우승은 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선수가 우승한 이후 56년만의 쾌거였다. 황영조의 우승으로 한국은 서울올림픽과 똑같은 12개의 금메달을 획득하게 되었고 메달순위 세계7위를 차지, LA올림픽, 서울올림픽에 이어 3연속 세계10위권 내에 들게되었다.
제26회대회 -폭탄테러와 교통대란...'상업주의' 문제 근대 올림픽 부활 100주년을 맞아 미국의 남부 조지아 주 애틀랜타시에서 7월 20일부터 8월 5일 까지 열린 이번 올림픽은 197개국 IOC전 회원국이 참여하고 각종 종목에서 풍성한 기록이 갱신되는 등 많은 성과를 거두었으나 또 다른 한편으로는 올림픽공원 폭탄테러와 교통 대란 등으로 최악의 올림픽이라는 오명을 면치 못한 대회였다. 권총을 소지한 사람이 아무 어려움 없이 개막식 주경기장에 입장했다가 검거되더니 급기야 2명이 사망하고 1백여명이 부상한 올림픽공원 폭탄테러사건까지 발생하여 72년 뭔헨대회 이후 최악의 안전문제가 제기됐다. IBM의 최첨단 컴퓨터시스템은 고장으로 대회진행은 엉망에 가깝게 되었고, 지하철은 잦은 고장과 테러협박으로 '지옥철'로 돌변했다. 영국 조정 선수단은 셔틀버스가 제시간에 도착하지 않자 지나가는 버스를 탈취하여 경찰과 대치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84년 자원봉사자들의 기여로 올림픽 역사의 새장을 열었던 것과는 딴판으로 10만 자원봉사자에 대한 교육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문제점도 노출되었다. 이번 대회는 9백만장의 티켓을 팔아 관중동원에 성공한데다 미국 NBC가 2008년까지 올림픽 방영권을 20억 3천만달러에 계약하여 안전하게 미래의 올림픽사업의 기틀을 마련했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인류화합과 평화를 기원하는 지구촌 축제'가 아닌 '단순한 후원업체들의 축제'였고 올림픽을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인식한 애틀랜타 올림픽조직위원회(ACOG)의 운영미숙으로 상업주의적인 바가지 올림픽이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이는 IOC가 순수한 스포츠 운동을 주장하지 못하고 상업주의를 내세운 대회 조직위에 이끌려 다닌 때문으로 앞으로 올림픽의 발전 방향을 재정립해야 하는 과제를 남겼다. 미국의 독주로 막을 내린 이번 대회에서 러시아와 독일이 하향세를 보이고 올림픽에서 3-10위권을 지키던 쿠바, 스페인, 헝가리 등이 부진한 반면 중국, 프랑스, 이탈리아, 호주 등의 대약진이 두드러졌다. 특히 중국은 엄청난 잠재력을 과시하며 미국과 러시아, 독일 등 스포츠 강국을 위협했다. 유럽국가중 프랑스는 지난 대회에서는 단 1개의 금메달도 따지 못했던 사이클에서 5개의 무더기 금메달을 획득, 전체적으로는 15개의 금메달로 5위에 랭크되는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이탈리아도 사이클과 사격에서 호조를 보여 지난 대회 종합 11위(금메달 6개)에서 6위(금메달 13개)로 수직상승했다. 이번 대회의 가장 큰 특징이라면 스포츠의 경기력 수준이 점차 평준화되어 미국-러시아-독일 등 수위 빅 3가 지배하던 시대가 저물어가는 반면 제 3세계 국가 등 그 동안 올림픽에서 소외당하던 국가들이 금메달국으로 급부상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여자 양궁이 84년 LA대회 이후 개인전에서 4연패, 단체전에서 3연패를 달성하는 역사를 이루었다. 그러나 전체적인 성적으로 보면 기대치 보다 못미치는 금7, 은15, 동 5으로 종합순위 10위를 차지하는데 그쳤다. 북한은 금 2, 은1, 동2개 종합 33위를 차지하는데 그쳤지만, 레승링에서 김일이 바르셀로나 대회에 이어 2연패를 달성했으며 유도의 계순희는 여자 유도계의 신화적인 존재인 일본의 다무라 료코를 힘으로 재압하고 유도계의 '잔다르크'로 부상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기대주들의 부진과 엘리트 체육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우리나라는 장기적인 체육발전 대책을 수립해야 한다는 반성을 남긴 아쉬운 대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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