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선(鐥)은 신라 대보공 김알지(新羅大輔公金閼智)의 28세손인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일곱째 아들이시고 고려 태조 왕건(高麗太祖王建)의 외손(外孫)이시다. 시조 鐥께서 언양군(彦陽君)으로 봉군(封君) 되시어 후손(後孫)들이 언양을 관향(貫鄕)으로 하였다. 그런데 시조로부터 교위공(校尉公) 휘 수(壽) 까지 소목(昭穆)이 명확(明確)하지 않아 시보(始譜)인 정해보(丁亥譜 1767년) 범례(凡例)에 의하면 1716년(丙申年)에 참봉공(參奉公) 휘 광석(光錫)께서 보초수취(譜草收聚)하였으나 간행치 못 하였던 바 정해년(丁亥年)에 익번공(益繁公)께서 보초첨보적성(譜草添補績成) 하였다고 하였으며 시조(始祖) 선(鐥)과 교위공수(校尉公壽)까지의 대수(代數)가 현원 난징(玄遠難徵)하여 각파보단(各派譜單)이 공히 명확(明確)한 교위공(校尉公) 수(壽)를 일 세조(一世祖)로 기세(起世)하니 후손(後孫)들이 밝히라고 하였다 그 후 임인(壬寅 1806년) 병인(丙寅1842년) 계유(癸酉1873년) 정사보(丁巳譜1917년)까지 선(鐥) 진(進) 정보(精寶)까지는 밝혀졌으나 년대수(年代數)가 맞지 않아 선원보(璿源譜)에 계대(系代) 하여 던 바 신유보 (辛酉譜 1981년)에 제종(諸宗)의 열망(熱望)에 따라 국립도서관 역사편찬위원회(國立圖書館 歷史編纂委員會) 및 범신라김씨종무원(凡新羅金氏 宗務院)의 사료(史料)와 동원방계(同源傍系의 경주(慶州)익화( 益和) 충주(忠州)등의 보첩(譜諜)에 의거하여 년대 수(年代數)로도 합당(合當)하여 선(鐥) 진(進) 정보(精寶) 경숙(鏡淑) 수(壽)로 선계소목(先系昭穆)을 요연(暸然)히 밝혔다.
본 관향의 연혁(本貫鄕 沿革)
언양(彦陽)은 본래 신라(新羅)의 거지화현(居智火縣)인데 개칭(改稱) 헌양현(獻陽縣)으로 양주(良州)의 령현(領縣)이 되었고, 고려(高麗)때 울주(蔚州)에 예속(隸屬)하여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그 후 언양(彦陽)으로 개칭(改稱)하였고 조선(朝鮮)에 와서 그대로 따랐다. 1895년 군(郡)으로 승격(昇格)되었다가 1914년에 울산(蔚山)에 합병하여 속면(屬面)이 되었다.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蔚山廣域市 蔚州郡 彦陽邑)으로 개칭되었다.4 . 거세지(居世地) 의 변천(變遷)
언양(彦陽) 김씨는 신라 김씨 왕족(新羅 金氏王族)의 후예(後裔)로서 신라 56대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일곱째 휘 선(鐥) 언양군(彦陽君)을 관조(貫祖)로 면면(綿綿)히 이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조상 님들은 외침(外侵)으로 국난(國難)을 당할 때마다 생명(生命)과 가족의 안위(安危)는 뒤에 두고 온 몸으로 막아 많은 애국충신(愛國忠臣)과 열사(烈士)를 배출한 자타(自他)가 공인(公認)하는 삼한(三韓)의 갑족(甲族)이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열전원문(高麗烈傳原文)과 묘지명(墓地銘) 지석(誌石)등에도 조상 님들의 사기(史記)가 소상히 수록되어 있고, 최근 발행된 고려 시대사(高麗時代史)에는 고려조(高麗朝)에 七世 휘(諱) 부(富)로 부터(약150여 년 간) 五代에거쳐 수상(首相)과 재상(宰相)이 사위(婿) 3명을 포함 12여명이나 배출된 화려한 명문(名門)의 권문세가(權門勢家)로 꽃을 피웠다.
七世孫 휘 부(富) ( ? ~1271 원종2년) 고려 무신정권기(武臣政權期)인 1173년(명종3년) 동북면병마사(東北面兵馬使)문신(文臣)김보당(金甫當)이 무신 집권자인 정중부(鄭仲夫)등 일당을 제거하려다가 실패해 살해된 뒤 이에 연루된 많은 문신들이 매일같이 살육되자, 무신(武臣)인 낭장(郎將)으로 있으면서 정중부에게 문신들과 무신들의 자제를 결혼시켜 후환이 없도록 하자고 건의하여 살육의 화를 가시게 했다. 1186년(명종 16) 금오위 대장군(金吾衛大將軍)으로서 예부시랑(禮部侍郞)을 겸했으며 무신 란 이후 무신으로서 문한(文翰)을 관장하는 문신(文臣)으로 유관직(儒官職)까지 겸한 최초의 인물이며 예부상서(禮部尙書)에까지 이르렀다. .
八世孫 위열공(威烈公) 휘 취려장군(就礪 將軍)은 예부시랑 휘 부(富)의 아들로 고려 고종조(高麗 高宗朝)에 태자태부 문하시중(太子太傳門下侍中)으로 북방의 거란병(契丹乓)들의 수차(數次)에 걸친 침입으로 공격해 올 때면 기발(奇拔)한 지략(智略)과 전술로 대승을 거두고 격퇴한 명장(名將)일뿐 아니라 명재상(名宰相)이였으며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태자태사(太子太師)로 언양군(彦陽君)에 봉군(封君)되시고 시호(諡號)는 위열(威烈)이시며, 고종묘(高宗廟)와 숭의전(崇義殿)에 배향 되어있다.〔맏아들 丹兵이 개평 전투에서 전사(戰死)〕
九世 휘 전(佺)은 위열공의 두 아들 중(丹兵.戰死) 외아들로 1258년 좌복야(左僕射) 1260년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두루 거쳐 1268년 참지정사(參知政事)로 판추밀원사(判樞密院使) 최영(崔瑩)과 함께 단련조병도감판사(團練造兵圖鑑判事)에 제수 되었으며 1271년 금자광록대부 수 태부문하시랑 평장사(金紫光祿大夫 守太傳門下侍郞平章事)로 시호(諡號)는 익대(翼戴)이시다. 참고문헌: 고려사절요. 고려사
十世 휘 변(賆)은 위렬공의 손자며 휘(佺) 익대공의 둘째 아들로 1268년 봄 21세에 文科 급제(及第)하고 국자박사(國子博士) 예부랑중(禮部郞中)으로 1274년(충렬왕 원년) 이등공신(二等功臣)에 녹훈(錄勳)되고 왕으로부터 서권(誓券 10번 죄를 져도 아홉 번은 용서할 것이며 자손에게도 같이한다는 증명서)을 하사 받고 이조판서(吏曹判書)등을 거쳐 1300년 광정대부 판삼사사 참리집현전 태학사 동 수국사(匡靖大夫判三司事 參理集賢殿 太學士 同修國史)로 시호는 문신(文愼)이다. 공은 성정(性情)이 순수(純粹)하고 돈후(敦厚)하여 간사함이 없었고 재상(宰相)에 이르렀으나 작은 허물하나 없었으니 참으로 근후(謹厚)한 군자(君子)라고 고려사절요와 묘지명(墓地銘)에 적고 있다.
十一世 휘 윤(倫)은 위열공의 증손로 문신공 휘 변(賆)의 큰 아들이며 음직(蔭職)으로 정도감부사(正都監副使)를 거처 감찰시승(監察侍丞)으로 큰 업적(業績)을 쌓았고 첨의평리(僉議評理) 삼사우사(三司右使) 좌정승(左政丞)으로 벽상삼한 삼중대광 수 사도 한성수의협찬보리일등공신(壁上三韓三重大匡 守 司徒 翰誠 守 義拹贊 補理一等功臣)으로 시호(諡號)는 정열(貞列) 언양부원군(彦陽 府院君)에 봉군(封君) 되시고, 그 부모와 처자에게도 관작과 토지. 노비가 하사되었으며 정렬공전(貞烈公傳)과 고려사 열전에도 친척(親戚)에게 인자(仁慈)하고 친구에게 진실하며 귀천(貴賤)간에 차별이 없었으며, 임금과 백성을 위해 혼신(渾身)을 다한 재상(宰相)이라 기록 되였다.
十二世 충경공(忠敬公) 휘 경직(敬直)은 정렬공(貞列公) 휘 윤(倫)의 둘째 아들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랑(正朗) 밀직(密直) 밀직부사(密直副使) 첨의평리(僉議評理) 삼사좌우사(三司左右使) 첨의(僉議) 찬성사(贊成事) 전라도순문사(全羅道巡問使) 검교시중(檢校侍中) 수(守) 사도(司徒) 원수(元帥)로 압록강(鴨綠江)에서 元나라의 침입을 막았고, 시호는 충경(忠敬)이요 양성군(陽城君)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 상주국 언양백 (上柱國 彦陽伯)에 두루 봉군(封君)된 재상(宰相)이다.
十二世 김희조(金希祖)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 윤(倫)의 아들로 문과에 급제하여.1344년 도관정랑(都官正郎)에 임명되어 서연(書筵)에서 시독(侍讀)하였고.1353년 군부판서(軍簿判書)로.1357년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33인의 급제자를 선발하고 1359년 서해도도지휘사(西海道都指揮使)에 임명되어 홍건적을 방어하였다.1361년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하자 적을 피하여 복주(福州: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남행 할 때 왕을 호종 하였고, 이듬해 3월에 경성을 지킨 큰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이 되었으나, 1363년에는 순천부에 유배되었다.
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朝鮮時代)에 와서
十四世 휘 상(賞)은 (?~1389.) 예의판서(禮意判書) 휘 용휘의 아들로 고려 후기의 문신으로 1388년 위화도 회군(回軍)의 공훈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태조이성계)으로 밀직(密直)과 강원도 도원수를 역임 진주목사(晉州牧師)와 1398년에 조전도원수(助戰都元帥)로 왜구를 토벌하시다 함양에서 전사하셔 순성익대 공신(純誠翼戴功臣)과 좌찬성(左贊成)에 서훈되시고 언양군에 추봉되셨다
十四世 휘 자(赭) 참판 공은 조선 개국에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서훈(敍勳)된 휘 수익(受益)의 아들로 고려 동지 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로 1407년 이조 태종(李朝太宗) 八年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이조정랑(吏曹正朗)이 되었고 1416년 중시(重試一等)에서 장원을 했다. 1426년 우대언(右代言) 검토관(檢討官)으로 좌대언(左代言)으로 경연(經筵)에 나아가 대학연의(大學衍議)를 진강(進講) 명성(名聲)을 누렸으며.
十四世서 헌공(西軒公) 휘 문(汶)은 충경공(敬直)의 손자며 공조전서(工曹典書)인 휘 복생(復生)의 넷째 아들로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1420년(世宗 2년) 중시(重試) 을과에 (乙科 一等) 장원(壯元)하고 누진(累進}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로서 사정전훈의(思政殿訓議)와 자치통감강목((自治通鑑綱目)을 편수(編修)했고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교정하고 발문(跋文)을 썼다. 직제학(直提學)과 대제학(大提學)로 승차(陞差) 급사(急死중풍)하자 1455년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추록(追錄)되었고, 학통(學統)은 정몽주(鄭夢周)에서 권근(權近)을 거쳐 그에게 이어졌다고 국사대사전과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에 실려있다.
十六世 유은공(遊隱公) 휘 계보(季甫)는 참판공(參判公) 휘 약(躍)의 셋째 아들로 세종(世宗)때 무과에 급제하여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朗)에 이르렀으나 단종(端宗)의 양위(讓位)을보고 울분(鬱憤)에 사직하고 남원(南原)에 오대정(鰲戴亭)을 짓고 은거(隱居) 스스로 유은옹(遊隱翁)이라 자칭하며 순창(淳昌)의 귀래정(歸來亭)에 은거(隱居)한 신말주(申末舟)와 교유(交遊)하며 여생을 보냈다.
十七世 공양공(恭襄公) 휘 관(瓘)은 지의주도사(知宜州都事) 휘 숙보(叔甫)의 아들로 1451년 문종조(文宗朝)에 문과에 급제하여 부교리 사도시 정필선 동부승지 오위장(副校理 司導寺 正弼善 同副丞旨 五衛將)에 이르렀다 이시애 난(李施愛亂)에 이조참의(吏曹參議)에 임명 되여 조석문(曹錫文)등과 토평(討平)하는 대 功을세워 정충출기적개공신이등(精忠出氣敵愾功臣二等)에 서훈(敍勳)되시고 오도관찰사(五道觀察使)를 지냈으며 병조판서 좌찬성 (兵曹判書 左贊成)에 이르렸고 언양군(彦陽君)에 봉군(封君)되시고 시호(諡號)는 공양(恭襄)으로 김제 육송사에 배향되었다.
十七世 휘 섬(銛)은 계조(繼祖)의 아들로 생원시(生員試)를 거쳐 151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지평(持平) 수찬(修撰) 부응교(副應敎) 사간(司諫) 직제학(直提學)등을 지냈으며 1531년 김안로(金安老)를 탄핵하다, 풍덕으로 유배되었으나 김안로 사사(賜死)후 누진(累進)하여 함경도 관찰사(觀察使) 호조참판(戶曹參判)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등을 역임했다. 〉
十八世 휘 사지(四知)는 직장공(直長公) 속(涑)의 아들로 1492년(壬子成宗)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佐郞) 정언(正言)으로 성품(性品)이 강직(剛直)하였고 玷瞱齋 金宗直의 문인으로 연산군(燕山君) 무오사화(戊午士禍)때 교리(敎理) 姜輯등과 함경도(咸鏡道) 홍원(洪原)으로 귀양가 죽으니 후손들의 입북조(入北祖)가 되었다. (金四知(좌랑공) * 북한에서는 淸州金氏始祖로도 지칭 )
二十世 휘 정목(庭睦)은 덕원부사(德原府使 三淸逸老公派 派祖) 휘 건(鍵문과에 급제)의 아들로 1583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1592년 호조정랑 헌납 등을 역임하면서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와의 교섭에 많은 일을 담당했다 .1595년 이후 祥原成川 宣川 등지의 수령직을 맡았을 때 군사훈련을 잘 시켜 조정에서 상을 받았고 1600년 비변사에 의하여 유장(儒將)으로 천거 다음 해에 사예 내자시정을 역임 1612년 장흥부사(長興府使)로 재직(在職) 시 호서시(湖西試)의 참시관(參試官)이 되어 제출한 논제가 임해군(臨海君)의 옥사(獄事)를 빗댄 것이라 하여 김시양 윤효선과 함께 대북 정권(大北政權)에 의하여 유배되어 유배지 회령에서 죽었다.
二十四世 휘 치룡(致龍)은 문경현감 남갑(南甲)의 아들로 생원 진사시에 모두 급제하고 1691년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소론(小論)에 속해 남인 집권시(執權時) 뚜렷한 벼슬을 못하다가 1694년 이후 전적 예조정랑. 병조정랑. 1677년 지평 장령 군자시정 봉상시정 사서 등을 거쳐 1703년 필선(弼善) 사간(司諫) 동부승지(同副承旨) 병조참의(兵曹參議) 병조참판(兵曹參判)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 공조참판(工曹參判) 겸 부총관(副總管)과 외직(外職)으로 의주. 광주 부윤(府尹)등 1711년 강원도 관찰사(觀察使)와 승지(承旨)등을 역임했으며 성품은 단아(端雅)하고 서(書) 사(史)에 몰두 일 처리가 민첩하고 많은 업적을 남기고 선정을 베풀어 주민과 조정으로부터 칭송을 받았다고 숙종실록과 경종실록에 실려있다.
김동연(金東淵) 1724년 ~?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언양(彦陽).자는 백우(伯雨).아버지는 여석(汝錫)이며, 양묵(陽黙)에게 입양되었고 1768년(영조44) 문과(文科) 정시병과(庭試兵科)에 급제하여 사관(史官)을 역임하였다. 1772년에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으로 벽파(僻派)를 공격하다가 죄를 얻어 관작(官爵)을 삭탈(削奪)당하고 충군(充軍)되었으며 1774년에 다시 장령(掌令)으로 기용되어 사간(司諫) 집의(執義)를 지냈고, 1775년에는 헌납(獻納)으로 화폐주조의 폐단을 논했으며 1776년 정조가 즉위하자 시파(時派)의 선봉장이 되어 벽파(辟派)의 탄핵에 앞장섰다.
그 후 여러 선조께서 출장입상(出將入相) 한 분들이 많이 있지만 무인(武人)으로 역사에 길이 빛내신 위열공 이후 특히
二十一世 휘 김천일장군(金千鎰將軍)은 진사(進士) 휘 언침(彦琛)이 부친이며 연산조(燕山朝)때 목사직(牧使職)을 버리고 낙향 후 끝내 부름에 응하지 않은 휘 순형(順炯)의 曾孫이다. 선조(宣祖) 6년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로 특제(特除)된 후 용안현감(龍安縣監)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과 경연(經筵)에 나아갔고 순창군수(淳昌郡守) 담양부사(潭陽府使)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 수원부사(水原府使)를 역임했다.
宣祖25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의병장(義兵將)으로 창의사(倡義使)를 제수(除授)받아 도처에서 왜적을 격퇴 혁혁한 공훈을 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진주성 싸움에서 아들 휘 상건(象乾)과 더불어 장열(壯熱)히 순절(殉節) 하였으며 부인(婦人)도 그 비보(悲報)를 듣고 자결(自決)하였으니 삼강(三綱)의 문벌(門閥)로 존숭(尊崇)되었으며 임난 일등공신(壬亂一等功臣)으로 대광보국 숭정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세자사(大匡輔國 崇政大夫 議政府 領議政 兼 世子師)로 추증(追贈)되었고 문열(文烈)이라 시호를 내렸다
長子 상건(象乾)에겐 좌승지(左承旨)로 추증(追贈) 진주 창열사(彰烈祠)와 나주(羅州) 정열사(旌烈祠)에 봉향(奉享)되시다.
二十二世 휘 김준(金浚)은 충경공(忠敬公)휘 경직(敬直)의 十一世孫며 증(贈) 병조참판(贈兵曹參判) 휘 광필(匡弼)의 아들로 1905년 무과(武科)에 급제 선전관(宣傳官) 교동현감(喬桐縣監) 인조반정(仁祖反正)에 동참(同參) 도총부 도사(都總府都事)를 거쳐 죽산부사(竹山府使)로 이괄(李适) 난 때 공을 세워 의주부윤(義州府尹)에 추천되었다.
정묘호란(丁卯胡亂(後金:淸))때 안주목사 겸 방어사(安州牧使兼防禦使)로 평안도 안주산성(安州山城)에서 후금(後金)(뒤淸) 3만 대군과 맞서 최후까지 싸우시다 1627년1월21일 장렬(壯烈)히 순절(殉節)하시고, 아들 유성(有聲)마저 전사(戰死)하고 부인과 딸 노복까지 현지에서 자결(自決)하니 삼강(三綱)의 애국충절(愛國忠節)을 동방(東邦)에 찬연히 길이 길리 빛냈다.
승전대부 좌찬성(崇政大夫 左贊成)에 추증(追贈) 되고 시호(諡號) 장무(壯武)에 추서(追敍) 삼강정려(三綱旌)가 표창 하사(下賜)되었으며 안주 충민사(安州忠愍祠)와 정읍정충사에(井邑 旌忠祠 奉享) 향사(享祀)하고 있다.
휘 응상(應祥)은 현감(縣監) 덕윤(德潤)의 아들로 1578년(宣祖11년) 임금으로부터 인재 천거령(人才薦擧令)이 내렸을 때 천거 되여 그 후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에 올라 함경도지방을 노략질하던 여진족(女眞族)을 소탕(掃蕩)하다 순직(殉職) 좌부승지(佐部承旨)로 추증 되었고
휘 중만(重萬) 언성군(彦城君)은 무과에 급제하고도 출사를 안 하고 있던 중 이린좌(李麟佐) 일당이 역모을 강권하였으나 국가안위를 위해 불응하고 고변하여 큰 공을 세워 안흥첨사(安興 僉使)에 제수되었고 충청수사(忠淸水使)를 지냈으며 분무공신(奮武功臣)으로 록훈(錄勳)되고 언성군(彦城君)에 봉군(封君)되었다.
휘 김덕명(金德明)장군은 동학혁명군의 총참모장((東學革命軍 總參謀將)으로 활약하다가 전봉준 장군(全琫準將軍)과 같이 사형(死刑)을 당한 장군(將軍)으로 부폐한 탐관오리들을 쓸어내고 어려운 민초(民草)들을 대신하여 싸우신 애국애족(愛國愛族)의 정신은 우리의 귀감이며 김제 원평(院坪)에 추모비(追慕碑)가 건립되어있다.
관조(貫祖) 이래(以來) 三十八世에 이르러 타문(他門)의 번연(繁衍)한 족세(族勢)와 비교 해보면 적어도 20만 ~ 30만의 족세(族勢)는 되어야 할 텐데 2000년10월1일 통계청조사(統計廳調査)에 의하면 우리 종문(宗門)은 겨우 3만8천여 명으로 열세(劣勢)를 면치 못했다. 신유보(辛酉譜)때 족보상(族譜上)의 통계(統計)를 작성 분석(分析)해보니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인 70년간의 기간(期間)에 우리 씨족이 무단(無單)으로 약 필할(約八割)이 소멸(消滅)되었으니 통탄(痛嘆)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씨족(氏族)의 성정(性情)은 그 어진 선조님 들이 한 결같이 영달(榮達)을 탐하지 않고 국가(國家)가 위급할 때면 분연히 일어나 선봉(先鋒)에 서서 싸우시다가 장열한 최후(最後)를 마치신 그 고결(高潔)한 애국충절(愛國忠節)과 희생정신(犧牲精神)이 강직(剛直)하고 정의감(正義感)에 불의(不義)를 보면 타협(妥協)에 굴하지 않고 참지 못하는 기질(氣質)을 이어온 결과인지 모를 일이다.
그 외에도 일일이 열거하수 없이 많으나 열녀(烈女) 효행(孝行)으로 종문(宗門)을 빛낸 분들과 신라시대(新羅時代)에는 왕족(王族)으로 고려(高麗) 조선시대(朝鮮時代) 충효(忠孝) 절의(節義) 장상(將相) 석학(碩學)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현대인물(現代人物)에도 학(學) 정(政) 재관계(財官界)인물이 허다(許多)하나 생략한다.
그 숭고(崇高)한 피를 이어받은 우리 후손들은 긍지(矜持)와 자긍심(自矜心)으로 중앙대종친회를 구심점(求心點)으로 헌신적(獻身的)인 노력과 애종심(愛宗心)은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創造)하여 장학사업을 전개하고 장학재단(獎學財團)을 설립(設立)하여 국가 사회의 동량(棟樑)으로 밑거름이 될 인재육성(人材育成)에 진력(盡力)하고 있으며, 중앙대종친회회관(中央大宗親會會館)을 마련하여 운영(運營)함이 타 문중(他門中)의 귀감(龜鑑)이 되고 있다.
신라 김씨 시조(新羅 金氏 始祖)
시조의 성(姓)은 김씨(金氏)요 휘는 알지(閼智)니, 석탈해왕(昔脫解王) 9년 후한 명제 영평 8년 춘정(春庭) 달밤에 왕이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 속에서, 닭 우는 소리를 듣고 새벽에 호공(瓠公)을 보내어 살펴보도록 하니,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었다. 호공이 돌아가 아뢰니 왕이 사람을 보내 함을 가져다가 열어보게 했다.
그 안에는 용모가 뛰어난 사내아이가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측근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하늘의 뜻이로다. 내게 훌륭한 후계자로써 복(福)을 내림이 아니겠는가? 하고 그 아이에게 알지(閼智)(알지는 지금의 아기라는 뜻)라는 이름을 지어 주는 한편 그 아이가 금빛의 함에서 나왔다 하여 성(姓)을 김씨(金氏)로 정해 주고, 시림(始林)을 계림(鷄林)이라 고쳐 정하고 국호(國號)로 사용했다가 그 뒤 신라로 고쳤다.
7세손 미추가 조분왕의 딸을 맞아 들였는데 왕이 자손이 없자 대신 미추가 신라 13대 왕(262-284)이 되었다.
박(朴)씨는 10王 이고, 석(昔)씨는 8王, 김씨는 38왕중 (여왕 셋이 있다) 합해보면 신라는 992년 중 왕이 56왕명이 된다.
2000년10월1일 현재 통계청 자료 1985년 현재 인구분포
성 씨 가 구 인 구 1 부안(부령)김씨 17.391 56.318명 2 나주(羅州)김씨 14.387 46.420명 3 경주(慶州)김씨 542.018 1.736.793명 4 경주(金寧)김씨 162.204 513.015명 5 의성(義城)김씨 79.368 253.309명 6 강릉(江陵)김씨 52.050 165.963명 7 언양(彦陽)김씨 11.818 38.383명 8 삼척(三陟)김씨 25.442 79.985명 9 울산(蔚山)김씨 11.270 36.225명 서울 10.015 부산 1.977 대구 661 인천 1.062 경기 4.763 강원 472 충북 324 충남 2.888 전북 4.698 전남 4.537 경북 472 경남 1.516 제주 88 전체계 33.473
경순왕 (敬順王) ( 897 ~ 978. 4 ) 신라(新羅) 56대왕으로 휘(諱)는 부(傅)이시고 897년에 탄생 927년부터 935년까지 왕위에 재임하셨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따르면 김씨 시조(金氏始祖)인, 추존 시조 대왕 휘 알지(追尊始祖大王 諱 閼智)의 29세손이다. 경애왕(景哀王)의 이종 동생이시고, 헌강공(憲康王)의 외손자(外孫子)로서 경애왕 박씨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셨다. 신라 말기(新羅末期)의 국력은 쇠약하여 도적은 사방에서 일어나고, 후백제 견훤(甄萱)과 고려 왕건(王建)이 각각 북쪽과 서쪽에서 신라를 침범 하니 백성은 기아(飢餓)와 불안에 시달리며 도탄(塗炭)에 빠졌었다. 이때 경애왕은 포석정(飽石亭)에서 놀이를 하고 있을 때 (일부학자는 구국 기도중이 었다고 주장) 궁중(宮中)에 쳐들어간 백제 견훤은 경애 왕을 죽이고 경순왕(敬順王)을 왕위에 오르시게 하였다. 천성(天性)이 어지신 왕께서는 재위(在位) 9년 만에 더 이상 백성으로 하여금 무고(無辜)한 희생(犧牲)을 강요 할 수 없다. 하시며 신하(臣下)들의 완강한 반대에도 불고하고, 고려 왕건 태조에게 나라를 양여(讓與)하시었다. 이는 세계사적(世界史的)으로도 그 유례(類例)를 찾기 어려운 큰 용단(勇斷) 이었다 . 고려 왕건의 맏딸인 낙랑공주(樂浪公主)와 재혼(再婚)하시고, 정승상부(政丞尙父)의 칭호(稱號)를 받으시더니, 원주의 용화산(龍華山)의 이궁(離宮)에 살으시다 고려 경종왕(景宗王) 3년(978년)4월에 돌아가셨다. 경순왕 왕 능은 경기도 연천군 백학면 고랑포리(京畿道 漣川郡 百鶴面 高浪浦里)에 있는데 그곳은 현재 군 작전 지역으로 일반인의 출입이 제한되어 있고, 1976년 정부에서 보수하여 성역화(聖域化)되어 있다. 현존(現存)하는 비(碑)는 1747년에 세웠는데 전면(前面)에는 신라 경순왕 능(新羅敬順王陵)이라 쓰여 있고,
후면에는 왕【 王 新羅56代王後唐天成2年戊子代景哀王而立淸泰乙未遜國于高麗宋平興國戊寅麗景宗2年4月4日薨諱敬順王禮葬于長湍古府南八里癸坐之原 至純德英謨縠烈聖上 23年 23日丁卯月立改立】이라 쓰여 있다.
시조 휘 선(鐥) 단비( 始祖 諱 鐥 壇碑 )
시조(始祖) 언양군의 휘는 선(鐥)이시니, 대보공 휘 김알지의 29세 손인 신라 56대 경순왕의 일곱째 아드님이시며, 모친(母親)은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 낙랑공주 이시다. 언양군을 수봉(受封)되신 후에 자손들이 언양(彦陽)을 관향(貫鄕)으로 삼았다. 아들은 예부시랑(禮部侍郞) 휘는 진(進)이요. 손자(孫子)는 호부상서(戶部尙書) 휘 정보(精寶)요 ,증손자(曾孫子)는 대장군(大將軍) 휘 경숙(鏡淑)이요. 현손(玄孫)은 신호위 별장동정 행교위(神護衛 別將同正 行校尉) 휘 수(壽)요 . 6세손은 신호위 중랑장동정 행섭랑장(神護衛中郞將同正 行攝郞將) 휘 언연(彦連)이요. 7세손은 조정대부 금오위 대장군 예부상서(朝靖大夫金吾衛 大將軍 禮部尙書) 휘 부(富)요 . 8세손은 고려 고종조(高宗朝)의 현상(賢相)이시며 명장(名將)이신 금자광록대부 수태자태사 특진 개부의동삼사 문하시중평장사 상주국 상장군 판이부사(金紫光祿大夫 守太子太師 特進 開府儀同三司 門下侍中平章事 上柱國上將軍 判吏部事) 시호(諡號) 위렬공(威列公이신 취려(就礪)시니. 고려 고종묘(高宗廟))와 숭의전(崇義殿)에 배향(配享)되셨다.
9대손은 금자광록대부 수태부 문하시중 평장사 상장군 판이부사(金紫光祿大夫 守太傅 門下侍中平章事 上將軍 判吏部事)요 시호(諡號)는 익대공(翼戴公) 휘 전(佺))이시다. 그 후대에도 많은 도학(道學) 충효(忠孝) 절의(節義) 장상(將相)이 계속 이어 내려 왔으나 다 기록(記錄) 하지 못함이 아쉽다.
시조(始祖)의 묘소를 실전(失傳)하여 享祀를 구궐(久闕)하여 오다가 신유 대동보 수보시(辛酉大同譜 修補時)에 제족이 개연흥감(慨然興感)하여 설단봉향(設壇奉享)하기로 결의하고 보사와 아울러 기금을 마련하여 1982년에 관향(貫鄕)인 彦陽 송대리에 단소(壇所)를 모시게 되었다. 종족(宗族)이 모두 이곳에 모여 향사 할 수 있게 된 것은 실로 추원 보본지도(追遠報本之道)요 존조 돈종지의(尊祖敦宗之誼)라 천년내 (千年來)의 미황(未遑)의 한(恨)을 풀었으니 來來 향화(香火)가 면면불절(綿綿不絶)하리로다.
시조(始祖) 휘(諱) 선(鐥)언양군 단소(壇所)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송내리 능골
7 世 예부상서 휘 부(禮部尙書 諱 富)
공의 휘는 부(富)이고 언양군 시조 휘 선(鐥)의 7세손 이 시다. 공의 중장년기(中壯年期)의 관료(官僚)생활 때 고려 사회는 숭문천무(崇文賤武)의 기풍으로 무반(武班)에 대한 홀대에 반발하여 일어난 무신(武臣)들의 난(亂)으로 많은 문신(文臣)들을 학살하면서 의종(毅宗)을 폐하고 고려 19대 명종왕(1170-1197)을 옹립(擁立)하여 무신정부(武臣政府)를 수립하였다.
무신(武臣) 난 이 후 조정의 권력은 당연히 일부 무장(武將)들이 장악하여 중방(重房)을 설치 조정을 독점하며, 권력을 논단(壟斷)하게 되었고 제 각각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이들은 조정(朝廷)의 문관대신(文官大臣)들 뿐 아니라 무신 반란(武臣叛亂)에 가담하지 않은 무장 세력들조차 탄핵(彈劾)을 빌미로 무참하게 살해하였다.
이처럼 극도의 혼란한 정치 상황 속에서 서기 1173년(명종3년) 8월에 동북면 병마사 연의대부 김보당이 정중부와 이의방을 타도하고 거제도에 유배 중인 의종(毅宗)을 복위(復位)하고자 거병 반란(擧兵反亂)을 일으켰다. 처음에는 많은 호응을 얻어 동북면 지병마사 한언국이 반란에 가담하고 김보당은 녹사 장순석 에게 의종(毅宗)을 복위코자 경주로 인도하게 하는 등 호조를 보였으나, 정권을 장악하고 있던 이의방은 대대적인 진압 작전을 펼쳐 반란군은 열세를 면치 못했으며 관(官)은 이의문을 경주에 파견하여 오히려 의종(毅宗)을 살해하게 하였다.
9월에는 한언국이 체포 처형되고 얼마 뒤 김보당도 체포되어 참형이 되었다. 반란 2개월만에 끝난 이 사건은 무신(武臣) 정변 이후 문신(文臣)들에 의해 일어난 대표적인 사건이며 유배중인 의종(毅宗)을 죽음으로 몰고 간 비참한 일이기도 하다. 김보당이 체포되었을 때 문신(文臣)중에 이 모의에 가담하지 않은 자가 없다고 과장 된 진술을 함으로써 무신란(武臣亂) 이후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던 많은 문신(文臣)들이 또다시 매일 살육되었다. 이에 공(公)께서는 1173년9월에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정권을 마음대로 전횡하는 정중부와 이의방을 상대로 직접 문신살해(文臣殺害) 방침을 만류하면서 “하늘의 뜻은 알 수 없는 것이며 사람의 마음은 예측 할 수 없는 것이다. 힘만 믿고 의(義)를 헤아리지 아니하여 의관(衣冠)을 갖춘 선비들을 풀 베듯이 모조리 죽인다면 세상에 어찌 김보당 같은 사람이 적게 있겠는가?. 우리들 중에 아들딸이 있는 자는 모두 문관들과 혼인하여 그 들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이 오래 갈 수 있는 길이다” 라고 하시면서 오히려 문신들과 혼인 관계를 통한 화해(和解)를 설득시키니 여러 무신(武臣)들이 그 말에 감동하여 살육(殺戮)을 중지함으로써 문신들은 화(禍)를 모면하게 되었다.
공께서는 살기(殺氣)등등한 집권자들에게 목숨을 걸고 의연하게 문신(文臣)들을 보호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탁월(卓越)한 식견(識見)과 영명(英明)한 결단력과 불의(不義)를 용납지 못하는 공이 아니고서는 취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이후에도 공께서는 불편부당(不偏不黨)과 공명정대한 처신으로 오로지 구국(救國)의 일념으로 봉사하시어 1186년 12월(명종16년)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시니 무관이 문관을 겸직(兼職)한 것이 이 때가 처음 이었으며 계속 승차(陞差)하시면서 조정대부 금오위 대장군 예부상서(朝靖大夫 金吾衛大將軍 禮部尙書)에 이르시고 부인은 청리 주(朱)씨로 랑장(郞將) 주세명의 따님이시다. 공께서는 자손(子孫)들 교육과 훈육에도 남달리 특별하시어 아들 손자들을 대성(大成)하게 하시었는데 아드님은 문하시중 평장사 시호 위렬공 취려장군으로 재상을 겸직했으며 손자는 문하시중 평장사 시호 익대공 휘 전(佺)이며, 첫 증손은 조정대부 판밀직사 군부판서 상장군 언양군 휘 양감(良鑑)이고. 둘째 증손은 휘 군(頵)으로 광정대부 도첨의참리 이며 셋째 증손은 휘 중보. 넷째 휘 탄여로 승려가 되시고 다섯째 증손은 광정대부 첨의참리 집현전 태학사 시호 문신공 휘 변(賆)이다.
현손인 시호 정렬공 언양부원군 휘 윤(倫)이요. 6세 손은 삼중대광 문하시중 첨의참사 홍문관 대제학 시호 충경공 언양부원군(백) 휘 경직(敬直)으로 5대에 걸쳐(약150년 간) 재상과 수상이 사위 2명을 합하여 12명이나 배출되어 고려의 명문 세가를 이루 었섰다. 이 모두가 공의 자품(資稟)과 기백(氣魄)을 이어 받고 훌륭한 교훈을 잊지 않고 실천하였음이리라.
풍우의 전란과 800여년의 세월에 묻혀 공에 대한 기록이 민몰(泯沒)되고 유택(幽宅)도 실전(失傳), 언양선산에 7위 선조단(先祖壇)을 모시고 매년 음력 10월10일 시제(時祭)를 드린다.
강직․청렴한 武人의 용맹 돋-보여 8世 위열공 김취려(威烈公 金就礪) 將軍 ( 1172 ~ 1234 ) 자료6호 어려서부터 학문과 무예(武藝)를 익혀 강직하고 청렴한 인품과 자질(資質)을 겸비한 위열공(威烈公) 김취려(金就礪)는 엄격하고 공정한 군사 통제를 발휘하여 장졸(將卒)들의 존경을 받았던 고려 후기의 무신(武臣)이다.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역임한 부친 부(富)와 모친 청리주씨(靑里朱氏) 사이에서 태어났고, 본관(本貫)은 언양(彦陽)인이다.
어려서 음직(蔭職)으로 기용되어 동궁위(東宮衛)에 배속되었고. 이후 장군 대장군 상장군에 이르는 동안 명장으로 수많은 전투에서 연전 연승하여, 고종때 나라를 구하고 전란(戰亂)을 극복한 영웅(英雄)이었다.
1216년(고종3년)에는 거란적(契丹賊) 이 가족들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의주(義州) 영주(永住) 석주(朔州)로 대거 침입했을 때 그는 섭상장군(攝上將軍)으로 후군병마사(後軍兵馬使)로 출정한 전사(戰史)의 일부이다.
거란 군이 진을 치고 있는 개평역(開平驛)에 도착했으나, 거란군의 수효가 너무 많아 우군(右軍)은 서산(西山)의 기슭에서 중군(中軍)은 들에서 조금 물러나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이때 위열공이 검을 뽑아 들고 기마(騎馬)를 채찍질하여 질풍같이 돌진하니 이를 본 수하 장졸들이 용기를 얻어 결사(決死)적으로 돌격 전세(戰勢)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후퇴하는 거란 군을 계속 추격하자 그때 상장군 노원순(盧元純)이 이렇게 말했다.
『군량이 처음 3일치만 가지고 왔는데 지금 다 떨어졌소 . 그러니 연주성(延州城)에 물러가 뒷날의 기회를 도모하는 것이 좋겠소.』이 제안에 위열공은『아군이 여러 번 승전하여 투지(鬪志)와 사기(士氣)가 왕성(旺盛)하오. 이 기세를 타서 한번 싸워 본 뒤에 논의합시다』제의했고, 위열공이 앞장서서 적군의 포위를 돌파한 전투에서 세 번이나 승리하고 2400명이나 사살 생포하는 전과를 올렸으나 이 전투에서 김취려장군의 맏아들 단병(丹兵)이 전사(戰死)하였다.
전투의 승리에서 오는 기쁨과 아들을 잃은 바통(悲痛)함을 감내(堪耐)하며 장군은 치중(輜重)부대를 보위(保衛)하면서 천천히 행군하여 사현포(沙現浦)에 이르렀을 때에 강력한 적군이 매복 기습해 왔다.
김취려장군은 급보로 원군(援軍)을 요청하였으나 자기들의 안전만을 생각하고 구원하지 않았다. 홀로 위열공은 고군 분투(孤軍奮鬪)하다 절묘한 지략(智略)과 전술(戰術)로 아군의 피해 없이 적을 격파(擊破)하고, 끝내 치중(수송)부대를 보호하여 박주에 도착하니 노원순이 서문 밖까지 영접 나와서 치사하기를 ꡒ갑자기 강적을 만났는데 적의 기세를 꺾었으므로 3군의 짐을 운반하는 부대의 병사들로 하여금 자그만 손실도 없게 하였으니 이는 당신의 힘이오ꡓ라고 하고 마상에서 술을 부어 축배를 들었다. 양군 장병들과 여러 고을의 부노(父老)들이 모두 절하며 말하기를 ꡒ이 전 적의 강점 지에서 강적과 맞아 싸우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개평, 묵장, 향산, 원림의 여러 전투에서 후군(後軍)이 매 번 선봉으로 싸웠으며 소수의 병력으로 매 번 대군을 격파하여 우리 같은 노약(老弱)의 생명을 보존하게 하여주니 그 은덕을 생각하면 보답할 길은 없으나 오직 원수 님에게 축수祝壽)를 드릴뿐입니다ꡓ라고 하였다.
1216년 2월 쫓겨간 거란군은 군사를 재정비 연합하여 강력한기세로 진격해왔다 , 위열공은 선봉에서 돌진 적장(敵將)의 수급을 수없이 베고 창과 화살이 온몸에 가득 꽂혀 상처가 깊었으나 충성스런 의분의 기세는 변함이 없었으며 같은 해 5월에 대장군이 된 그는 가발병(加發兵)이라 일컫는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채 상처가 아물지 않은 몸으로 황려현(여주 )으로 향했다.
여주의 법천사 남강(南江)에 도착했는데 강은 홍수로 범람 충주성(忠州城)도 큰 홍수에 파괴 유실되고 도강(渡江)이 위태로 왔다. 이에 위열공은 먼저 군사들을 승선케 했고, 공은 마지막 배에 승선 배가 큰돌에 부딪쳐 갑판이 뚫려 물이 차 오르자 군사들은 공포에 사색(死色)이 되었다. 그러나 위열공만은 앉은 자세로 미동(微動)도 하지 않았으며, 이 일을 본 장졸들은 더 신뢰하고 충성심을 발휘하여 정예군(精銳軍)으로 거듭 태어났다.
법천사 근처의 전투에서는 그의 계책인「군대를 나눈 협공책」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잇따라 아홉 차례나 계속되는 전투 끝에 군수품 부족과 장졸들의 누적된 과로(過勞)로 패했다. 동년 7월 거란장수 질명(質明)이 인솔하는 10만 대군으로 충주를 거쳐 제천(堤川)의 박달산(朴達山)을 침공하여 왔다.
이때 김취려 장군이 박달재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전술전략(戰術戰略)의 일부 내용이다. 장군은 영상(嶺山)을 선점(先占)하고《용병술(用兵術)은 사람끼리 화목이 우선이나 지리(地理)는 더욱 경시 할 수 없다. 적이 만일 먼저 고개를 점령하고 아군이 그 아래에 있게 되면 날쌘 원숭이도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장군 신덕위(申德威)와 이극인(李克仁)이 왼쪽을 막게 하고 최준문(崔俊文)과 주공예(周公裔)로 하여금 오른쪽을 지키게 한 다음, 위열공은 가발병(加發兵)과 함께 고개위로 올라갔다.
위열공이 예측(豫測) 했던 대로 거란 군은 요새(要塞)를 쟁취(爭取)하려고 좌우봉(左右峰)으로 돌진했고, 이에 고개 마루에 미리 포진했던 위열공의 군사가 좌우(左右)에서 일시에 지리(地理)를 이용한 절묘한 전략(戰略)으로 협공하여 공격하니, 골짝이마다 수천씩의 시체(屍體)가 혈하(血河)를 덮어, 대승(大勝)을 거둔 혁혁(赫赫)한 전승지이다.
충북 제천시 박달령에는 취려장군이 대승한 김취려장군의 전적비가 있어 지나가는 길손은 영상(嶺上)에 앉아 대첩고사(大捷古事)를 되새기며 숙연해진다.
제천 쪽으로 패주(敗走)하는 거란 군을 추격하면서 벌어진 6번의 전투에서 모두 연전연승(連戰連勝)하니 거란 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함경도 여진 땅으로 패주 하였다. 박달령에서 일어난 이 전투에서의 승리로 경상도 지방은 전란(戰亂)의 화(禍)를 모두 피하게 되었으나, 김취려장군은 오랜 전투에서 오는 누적된 과로(過勞)로 마침내 병상에 눕게 되었다.
귀환하여 병을 치료하기를 권하는 여러 수장(首將)들의 말에 위열공은『차라리 변방의 귀신이 될지언정 어찌 집안에서 편안하기를 바라겠는가』하며 듣지 않았다고 하니, 그의 충성심과 애국심이 어느 정도였는지 가히 짐작할 만하다.
이 소식을 들은 왕은 귀환 치료를 명(命)하고 공이 요양 차 있는 사이 위열공에게 패해 쫓겨간 거란 군이 재정비하여 막강한 병력으로 수십 성을 공격하여 빼앗고 또 위협해왔다.
왕은 위열공에게 친히 지휘하는 기(旗)와 도끼(살생 권을 상징함)를 주고, 조충(趙沖)을 원수로 위열공을 병마사(兵馬使)로 명하여 1218년(고종5년) 9월6일 출전케 했다.
장단(長湍)을 지나 동주(洞州)로 가다가 동곡(東谷)에서 적을 만나 여러 차례의 전투에서 위열공은 뛰어난 전략전술(戰略戰術)로 수천의 적을 사살 생포 적장(賊將) 모극(毛克). 고연(高蓮). 천호(千戶). 아로(阿老)를 사로잡았고 많은 전리품을 노획하는 큰 전과를 거두자 전의를 상실한 거란 군은 강동성(평남 강동)으로 패주(敗走)하고 말았다.
이즈음 강동(江東)에 도착한 몽고의 원수(元帥) 합진(哈眞)과 찰자(札刺) 동진국(東眞國)의 장수 완안자연(完顔子淵)등이 아군에게 강동성에 웅거하고있는 거란족을 함께 토벌하자고 통첩 제의해왔다.
1219년 몽고 군은 흉폭 했기 때문에 아군을 도와준다는 명분을 내세웠으나, 모든 장수들이 꺼려 기피했다. 이런 상황에서 위열공은 조충(趙沖) 장군에게 『나라의 이해가 바로 오늘에 있고 만일 그들의 뜻을 어긴다면 후회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길 것이오. 내 비록 재주가 모자라나 한번 가 만나보겠소』말하고 십장군병을 거느리고 나서니, 그의 늠름한 모습을 실제로 보는 듯 하였다.
장군을 대한 자리에서 합진은 『나와 우호를 맺으려면 먼저 몽고 황제에게 배례한 다음 만노 황제(萬奴皇帝)에게도 배례 하라』요구했으며, 이 요구에 위열공은 『하늘엔 해가 둘이 없고 백성에게는 두 임금이 없는 법인데 어찌 두 황제가 있으리요』대답하고는 몽고 황제에게만 배례 하니, 그의 장수다운 품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그의 풍모는 6척(尺)5촌(寸)의 키에 흰 수염이 배꼽 밑까지 내려오는 풍채와 언동에 압도된 합진은 위열공의 손을 이끌어 앉히며 나이가 어떻게 되느냐고 물었다. 이어 합진은『영웅은 영웅을 알아보는 법 그대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 그대가 형이요 이후로는 나는 아우입니다.』말 했다.
이 자리에서 합진은『내 일찍이 6개국(個國)을 정벌하며 귀인을 많이 만났으나, 형과 같은 귀인을 보지 못했다』고 했으니… 과연 영웅호걸(英雄豪傑)임을 알아 본 것이다. 위열공은 합진과 형제 의를 맺었고 따라서 모든 일들은 그야말로 순조롭게 해결되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의 강동성을 공격 할 때는 성(城) 아래 해 자를 파서 적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만전의 준비를 해놓고 몽고군 합진과 연합하여 공격을 하니, 거란족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군졸과 부녀자 5만 여명이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했다.
적장 1백여명을 참수한 후 합진은『두 나라가 만세(萬世) 토록 형제(兄弟)가 되어 오늘을 잊지 말자』청했다 합진은 위열공을 존경하고 많이 흠모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몽고의 도움으로 고려는 거란을 평정했고, 국교를 열어 사신(使臣)의 왕래가 빈번했으나 1225년(고종12년)에 몽고의 사자(使者) 저고여(著古與)가 후금(後金)사람에게 피살(被殺)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몽고의 태종은 1231년(고종18년)에 살례탑(殺禮塔)을 총수로 삼아 침략했고, 이에 맞서 박서(朴犀)와 김경손(金敬孫)이 용전(勇戰) 했으나, 결국 강화(講和)를 맺게 되었으며 서경(양) 주현에 달로화적(達魯花赤) 72 인을 머물게 했다. 같은 해 6월20일에 왕도를 강화(江華)로 천도하여 강도(江都)라 일컬었고, 이때부터 고려는 39년 간 강화도에서 비운을 겪었다. 위열공은 전란(戰亂)에서 큰 공(功)을 많이 세웠을 뿐만 아니라 1221년(고종8년)에는 추밀원사(樞密院使)병부상서(兵部尙書)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참지정사(參知政事) 판호부사(判戶部事)가 되었다.
1228년(고종15년)에는 수태부 중서시랑평장사 판병부사( 守太傅 中書侍郞平章事 判兵部事)가 되었고 그 뒤에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제수 되셨다 . 위열공은 1234년(고종20년) 향년 63세로 운명하여 시호(諡號)를 위열(威 强毅信正猛以剛果 烈 有功安民秉德遵業)이다. 고종묘(高宗廟)와 숭의전(崇義殿)에 배향 되었다. 묘비명은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인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가 썼다.
많은 공(功)을 세웠으나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 존경과 칭찬의 소리가 드높았던 위열공은 재상(宰相)이 되어서는 늘 안색(顔色)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자애롭게 통솔하고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던 모양이다.
동궁위에 배속(配屬)됨을 출발점으로 해서 장군(將軍) 대장군(大將軍) 상장군(上將軍)이 되었던 위열공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적 배경은 그야말로 전란(戰亂)의 시기였다. 동아시아의 정세를 보면 몽고가 일어나 중국 화북지방을 차지하고 있던 금 나라를 정벌했고 금의 지배 하에 복속(服屬)하고있던 거란이 반기(反旗)를 들어 대요수국(大遼收國)을 세웠다.
그러나 거란 또한 몽고의 공격을 받아 형세(形勢)가 불리해지자 압록강을 건너 고려의 북방지역으로 밀려 침법(侵犯)한 상황이었다. 결국 이와 같은 전란기(戰亂期)에 강직(剛直)하고 충성(忠誠) 서러우며 청념(淸廉)한 영웅호걸(英雄豪傑)인 위열장군을 태어나게 했다.
숭의전 배향록(崇義殿 配享錄)
1. 태사 개국 무공공 복지겸 (太師開國 武恭公 卜智謙) 2. 태사 개국 장절공 신승겸 (太師開國 壯節公 申崇謙) 3. 태사 개국 충렬공 홍 유 (太師開國 忠烈公 洪 儒) 4. 태사 시중 인헌공 강감찬 (太師侍中 仁憲公 姜邯贊) 5. 태사 개국 무열공 배현경 (太師開國 武烈公 裵玄慶) 6. 태사 내사 장위공 서 희 (太師內史 章威公 徐 熙) 7. 태사 개국 충절공 유금필 (太師開國 忠節公 庾금弼) 8. 태보 시중 문숙공 윤 관 (太保侍中 文肅公 尹 瓘) 9. 문하 시중 문열공 김부식 (門下侍中 文烈公 金富軾) 10. 문하 시중 위열공 김취려 (門下侍中 威烈公 金就礪) 11. 문하 평장 문정공 조 충 (門下平章 文正公 趙 冲) 12. 첨의령 충열공 김방경 (僉議令 忠烈公 金方慶) 13. 정 당 문 학 김득배 (政堂 文 學 金得培) 14. 추밀원 부 사 이방실 (樞密院 副 使 李芳實) 15. 중 서 평장사 안 유 (中書 平章事 安 裕) 16. 문하 시중 문충공 정몽주 (門下侍中 文忠公 鄭夢周)
조선 세종(世宗) 7년에 건립하고 처음엔 고려 태조(太祖) 현종(顯宗) 문종(文宗) 원종 (元宗)을 제향(祭享)하다가, 조선 문종(文宗) 원년 신미(辛未)에 현판과, 논밭을 하사했다. 고려의 명신(名臣)으로 공덕(功德)이 있는 분들을 배향(配享)하였다
고려 태조 및 4왕과 16공신 배향중 위열공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장소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嵋山面) 아미리
12 世 추밀원사(樞密院使) 희조(希祖)
공은 정열공(貞烈公) 휘(諱) 윤(倫)의 六子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충목왕(忠穆王) 6월에 도관 정랑(都官正朗)을 거쳐 서연(書筵)에서 시독(侍讀)하고 1353년 (공민왕2년)10월 군부판서(軍簿判書)에 올라 元나라에 사절로 파견 태자(太子) 책봉을 축하(祝賀) 귀국하였다.
1356년 7월 추밀원사(樞密院使)로 元나라에 천추절(千秋節)을 하례(賀禮)하고 1357년 지공거(知貢擧) 이인복(李仁復)과 함께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진사와 엄흥방(廉興邦)등 33인의 급제자(及第者)을 선발(選拔)하였다.
1359년 8월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이해 12월에 서해도 도휘사(西海道 都揮使)로서 홍건적(紅巾賊)을 방어하였다.
1361년 홍건적이 개경을 함락하자 그들에 밀려 적을 피하여 복주(福州:지금의 경상북도 안동)로 남행(南行)한 임금을 호종(護從)하였으며 이듬해 3월 여진적(女眞敵)을 이공수(李公遂).황상(黃裳)과 함께 물리치고 수복(收復) 후에는 수도(首都)인 개경(開京)을 지킨 공으로 일등공신(一等功臣)에 봉록(俸祿) 되었다.
이듬해 9월에 첨서(僉書)로 1362년 3월 추밀원사(樞密院使)로 1363년 12년 5월 밀직상의(密直商議)에 봉직(奉職)중 모략중상(謀略中傷)으로 순천(順天)으로 유배(流配) 당했다
그 후 재신(宰臣)들의 간원(懇願)로 유배에서 풀려 전이판서 예문제학(典理判書藝文提學)에 승차하고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이르렀다.
부인은 경주이씨(慶州李氏) 우정승(右政丞)인 문충공(文忠公)이며 당대 최고의 석학(碩學) 이재현(李齋賢)의 여식으로 2남을 두고 장자(長子)는 세규(世珪) 차자(次子)는 효예(孝禮) 묘소는 경남 울주군 언양 주파고 헌산 간 좌에 있다
참고문헌 : ◉ 高麗史 ◉ 高麗史節要 ◉ 與地勝覽 彦陽縣 人物編
족보에서 볼 수 없는 김흥경(金興慶) ? ~ 1374 1 11세 김흥경(金興慶))은. 고려 말기 공민왕의 총신(寵臣). 본관은 언양. 증조부는 문하시중 취려(就礪)이며, 어머니는 적선옹주(積善翁主) 유씨(柳氏)이다. 총명하고 민첩하여 공민왕이 우달치(于達赤)․ 내속고치(內速古赤)로 삼아 매우 총애하였다. 삼사좌윤(三司左尹)을 거쳐 좌우위상호군(左右衛上護軍)에 승진하고 좌승선(左承宣)․밀직대언(密直代言) 등 요직을 지냈다.
1371년(공민왕 20) 왕명으로 전쟁에 군공(軍功)이 있는 자에게 지급할 재물이 없으므로, 문관 3품과 무관 5품 이하의 관직을 설치하여 유공자를 포상하였으며, 1372년 자제위(子弟衛)가 설치되자 이를 총관하여 홍륜(洪倫)․ 한안(韓安)․ 권진(權瑨)․ 홍관(洪寬)․ 노선(盧瑄) 등과 더불어 항상 좌우에서 왕을 보필하고, 1374년 명나라 사신 채빈(蔡斌)의 접반사 일원으로 활약하였다.
어머니를 교주 강릉 양광삼도 기은사(交州江陵楊廣三道祈恩使)로 삼고 곧이어 진 한국 대부인(辰韓國大夫人)으로 봉하게 하였다.
개인감정으로 전법총랑(典法摠郎) 양윤발(楊允發)을 투옥시켰으며, 재상 이성림(李成林)이 자기가 좋아하는 기녀 소근장(小斤莊)과 놀아나는 것을 보고 격분하여 양광도도순문사(楊廣道都巡問使)로 좌천시켰다.
또한, 자기 어머니에게 지급되는 쌀과 베가 품질이 나쁘다 하여 광흥창 관리를 처벌하였으며, 찬성사 안사기(安師琦)와 더불어 궁중에서 사사로이 잔치를 베풀어 주위의 빈축을 샀다.
1374년 공민왕 시해사건이 일어나 우왕이 즉위하자, 우사의(右司議) 안종원(安宗源), 문하사인(門下舍人) 김도(金濤), 정언 노숭(盧嵩) 등의 탄핵을 받아 언양으로 유배되었다가 1374(우왕 즉위년) 주살(誅殺) 되었다.
이조에 와서도 존비귀천(尊卑貴賤)과 양반계급에 아첨하는 무리 등 그 후손들이 남아있을 터인데 김흥경은 우리 언양김씨 문중에 불명예(不名譽)스럽고 치욕(恥辱)스런 패륜아(悖倫兒)로 대종중 보사위원회(大宗中譜事委員會)에서 결의하여 족보에 기록하지 않아 비참히 절손(絶孫) 되고 말았다. (본 자료는 우리후세들도 타산지석
(他山之石)의 교훈으로 삼기위해 게재합니다)
참고문헌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史綱目. 〈李用柱〉
14世 대제학(大提學) 서헌공(西軒公) (1395~1435.11.11) 壽40세
공의 휘(諱) 문(汶)이며 자(字)는 윤보(潤甫) 호(號)는 서헌(西軒)이다. 조(祖)는 충경공(忠敬公) 언양백(彦陽伯) 휘 경직(敬直)이요. 부는 공조전서(工曹典書) 휘 복생(復生) 이다.
모친 광주김씨(光州金氏)와 사이에서 4 형제 중 막내로 1395년(태조4년)에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총명(聰明)하여 문일지십(聞一知十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재능)을 가진 신동(神童)으로 일찍부터 면학(勉學)에 힘쓰는 한편 선비로서 품성과 자질을 익혀 벗들에게는 금란지교(金蘭之交)로 실천하고 정몽주(鄭夢周) 문인(門人)이양명(李陽溟) 선생의 문하에 입문하여 학문을 닦아, 과거에 응시 1420년(세종2년)년 식년에 문과 병과(式年文科丙科)에 급제하고 성균관유생(成均館儒生)에 보직되었다
중시을과(重試乙科一等)장원하여 성균관 주부(成均館主簿종6품)를 거쳐 1430년(세종17년) 문명(文名)으로 집현전수찬(集賢殿修撰정6품)으로 발탁(拔擢)되여 공이 저술(著述)하고 집필(執筆)했던 유적(遺跡)을 모아보면 의방유취청(醫方類聚廳)청에 종사(從事)하여 집현전(集賢殿) 김예몽(金禮蒙)등과 함께 3년 동안 365권을 저술(著述) 완성했고, 왕명(王命)을 받아 사정전훈의(思政殿訓議)를 편찬(編纂)했으며 1436년(세종28년)에는 또 사서(四書)를 번역(飜譯)하는 사업을 주관하는 공으로 승자(陞資) 원종공신(原從功臣世祖1년)으로 추록(追錄)되었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찬수(撰修)했고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을 교정(矯正)하고 발문(跋文)을 지었다하니 당시 훌륭한 학자들이 구름같이 몰려 있는 가운데 공의 실력이 얼마나 뛰어 났는가 짐작할만하다.
경사자집(經史子集)의 모든 분야에 능통하여 궁중에 기거하면서 세종 때 문운(文運)에 이바지하고 정음청(正音廳)의 국문자(國文字) 보급방침(普及方針)을 최만리(崔萬理)등과 반대하였으며 특히 사학(史學)에 정통(精通)했고, 세종(世宗)의 후의(厚誼)와 신뢰가 두터웠고 기자(嘉資)를 높여 중히 아끼었으며, 공 또한 견마지성(犬馬之誠)으로 임금을 섬기고 학문에 대하여는 당대 대학자(大學者)들과 모든 사람들의 존경과 숭상(崇尙)을 받았다하니 대단한 학자였다. 찬란(燦爛)한 학문의 꽃을 피웠던 시기에 공의 벼슬은 누진(累進)하여 직제학(直提學)에 이어 대제학(大提學정2품)에 이르렀다. 공은 학자다운 기풍으로 삼성오신(三省五身날마다 세 번씩 자신을 반성)을 다짐하고 수불석권(手不釋卷 항시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하고 학문은 성현(聖賢)을 본받아 집안에서는 효제(孝悌)로서 가르침을 삼고 국가와 민족에는 충의(忠義)와 겸양지덕(謙讓之德)으로 바른길을 삼았다.
공의 학통(學統)은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에서 기원(起源)하여 양촌(陽村) 권근(權近)등 학자들을 거쳐 공에 이르렀다는 기록이 동국문헌록(東國文獻錄이태조부터 순조까지의 여러명신의 약전을 적은책)에 실려 있기도 하다
또한 차치통감목(自治痛鑑綱目)에는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내용이 실려 있어 공이 옛 치란(治亂)과 흥망(興亡)의 일에 밝은 까닭으로 저술(著述)한 것이며, 소학(小學)과 근사록(近思錄에)에는 충신(忠信)과 인의(仁義)의 행실이 기술(記述)되어 훈의(訓議)를 찬수(撰修)한 것이며 아악(雅樂)에도 남다른 재능이 있었으니 문(文)예(藝)를 고루 겸비한 다재다능(多才多能)한 공의 학문의 깊이를 알고도 남음이 있다.
유학(儒學)을 승상하고 유교문화(儒敎文化)에도 공헌한바 크다. 1435년11월11일에 중풍으로 급작히 별세하니, 향년 40세로 한참 일할 나이였다. 세종대왕께서는 비보(悲報)를 접하고 훌륭한 한 인재(人材)를 잃었다 애도(哀悼)하였고 국가적으로도 큰 손실이 아닐 수 없다고 통탄하셨다.
묘소는 경기도 파주군 서쪽 기슭에 있으며 정경부인(貞敬夫人) 순흥 안씨(安氏)이다. 후사로는 외아들도 휘(諱) 자건(子騫)으로 황해병사(黃海兵使) 贈 병조판서(兵曹判書)가있다. 묘소도 이북에 있고 직계 후손들도 북에 있다
공은 1412년( 壬辰 태종12년)에 출생하였으며 휘는 약흠(若欽)이시다. 증조부(曾祖父)는 휘 경직(敬直) 검교 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 충경공(忠敬公) 언약백(彦陽伯)이요. 조부는 현감(縣監) 휘 조령(兆齡)이며 부친은 휘 윤(潤) 판전 농시사(判典農寺事正三品)이다. 공은 어려서부터 총명(聰明)하고 뛰어난 재능(才能)을 겸비(兼備) 한데다, 명문가(名文家)인 충절(忠節)의 피를 이어 받고 자랐다. 일찍부터 종조부(從祖父) 서헌공(西軒公) 문(汶)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사(私師)를 받으며 학문에만 정진(精進)하였다.
서헌공은 文科에 급제하고 대제학(大提學)을 지낸 당대 명망이 높은 대학자(大學者)였다. 훌륭한 스승의 가르침에 학문은 날로 깊었고, 덕행(德行)과 언행(言行)이 일치하니, 존경과 함께 그 덕망(德望)이 원근(遠近)의 고을까지 파다했다. 가정교육 또한 엄하고 부친 윤(潤) 전농공(典農公)께서 모친(母親) 송씨를 모시고 계풍군 풍덕의 옛집에서 정읍 이평면 연화동으로 이사하였다. 송부인은 단종의 장인인 현수의 근친(近親)이다.
공은 주변의 권유 와 부모님의 뜻에 따라 1427년(丁未년 세종9년) 16세에 어린 나이에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다. 여러 번 관직(官職)에 천거(薦擧)되었으나 효심이 지극한 공은 늙으신 부모님을 봉양(奉養)하기 위해서 사양(辭讓)하고 정자(亭子)를 지어 아들 셋과 딸 다섯 사위를 상징하는 이름으로 팔낭정(八郞亭)이라 하고 그곳에서 학문과 후학(後學)교육에 힘썼다.
1452년(단종2년) 보성군수(寶城郡守)에 제수 되였다. 공은 정사(政事)를 효제(孝悌)의 사상(思想)을 근본을 삼아 백성을 다스리며 실천(實踐)하니 백성들은 흠모(欽慕)하고 어버이 같이 따랐다.
공께서는 1455년(을해년) 단종(端宗)이 세조에게 양위(讓位세조원년)를 하자, 비분(悲憤)하여 관직을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그곳 백성들은 공이 떠난 후 선정비(善政碑)를 세워 길이 송덕(頌德)하여 지금도 남아있다
단종이 강원도 영월에 유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ꡒ세상사가 뜬구름 같다 ꡓ 크게 탄식(歎息)하며 두문불출(杜門不出) 스스로 콩잎 국을 달게 먹으며, 갈대 띠를 두루고 인간사(人間事)와 인연을 끊고 세조(世祖)를 옹립한 권람 한명회등의 간신배들을 증오하시었다.
1457년(丁亥년) 단종(端宗)의 부음(訃音)을 듣고 북향복배(北向伏拜) 대성통곡(大聲痛哭)하는데 삶을 포기(抛棄)하는 듯 슬퍼하고 그 충절(忠節)은 우국충신(憂國忠臣)이요 생육신(生六臣)같았다.
공께서는 팔낭정(八郞亭)에 깊이 은거(隱居)하며 단종을 생각하고 방잎을 쓰고 해를 보지 않은 채 수십여 년을 지내다가 1483년(계묘년 성종14년)에 별세(別世)하니 향년 72세였다. 묘소는 정읍 소성면 주동에 경좌 갑향(庚坐甲向)으로 모친(母親)의 산소 아래에 부인과 합장하였다. 정읍시 이평면 연화마을에 오랜 세월 팔랑정이 유실 되여 애석히 여기던 차 공의 유지를 받들어 후손들이 뜻을 모아 팔랑정 유허비(八郞亭 遺墟碑)를 세워 보존하고 있다.
부인은 성주 이씨 참판(參判)(종1품)인 사돈의 따님이다. 자녀로는 3남6녀를 두었다. 장남은 극연(克鍊)으로 장흥 부사(長興府使)요 차남은 극장(克鏘)으로 숙천 부사(肅川府使)요 삼남은 극섬(克銛)으로 사포서별제(司圃署別提)다. 극연의 아들 천추(千秋)는 종사랑(從仕郞)이요 극장의 아들은 유(洧) 부사맹(副司猛) 이요 탁(濯) 안변교수(安邊敎授) 극섬의 아들은 비(泌)진사(進士)이다.
뿌리가 튼튼하면 가지가 무성하고 형상이 장대하면 소리가 웅장하나니 공께서 끼친 음덕(蔭德)을 이은 후손들은 장흥공(長興公)의 5대손 욱(彧)이 직장(直長종7품)으로 있을 때 광해군이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幽閉)하는 흉변(凶變)이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남원(南原)으로 귀향하였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가 강화(講和)가 이뤄졌다는 말을 듣고 포기하였지만 울분(鬱憤)을 참지 못하고 그 생을 마쳤으니 그 공적은 창의록(倡義錄)에 기록으로 남겨있다.
6대 孫인 준(浚)은 안주 목사 겸 방어사(安州牧使兼防禦使)로 정묘호란(丁卯胡亂)때 순절하여 증시로 숭정대부 좌찬성(종1품) 및 장무(壯武)라는 시호를 받았고 삼강정려(三綱旌閭)를 짓게 하사(下賜)하고 사액(賜額)으로 평안도 안주 충민사(忠愍祠) 와 정읍정충사(旌忠祠)에 사당(祠堂)을 짓고 배향(配享) 하였다 (정충사 전라북도 문화재 74호로 지정)
별장공의 5대손인 태운(泰運)이 경학이 밝고 ,언행이 준수하였으며 병자호란에는 의병을 일으켰다가 강화(講和)가 이루어지자 고향에 돌아왔다. 청나라 정삭(正朔)과 연호(年號)를 분하게 여겨 관직을 제수해도 받지 안이하고 자손에게는 벼슬을 하지 말도록 유언으로 훈계하였고, 공을 처사(處士)라 일컬었다. 이이야기는 호남 창의 록에도 실려있다. 공의 시문(詩文)과 유고(遺稿) 유품이 병화로 남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참고문헌 : 辛酉譜
16世(세) 송.죽 같은 충절의 유은공(遊隱公)
공의 휘는 계보(季甫)요, 호(號)는 유은(遊隱)이다. 증조는 예조판서(禮曹判書정2품) 언양군(彦陽君) 휘 용휘(湧輝). 조부 원종공신(原從功臣) 진주목사(晋州牧使정3품) 휘 상(賞) 부 현령(縣令종5품)으로 남부지방에 출몰한 왜구를 토벌하다 전사(戰死) 증(贈) 병조참판(贈兵曹判書) 휘 약(躍)이며 공은 모 경주 이씨(慶州李氏)사이에서 3남중 셋째로 태어났다.
유은공(遊隱公)은 어려서부터 부모의 뜻에 따라 스승을 정하여 학문과 무예(武藝)를 배우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러왔고 학문과 무예는 고을에서는 당할자가 없었으며 강직하고 곧은 선비의 자질을 부모로부터 익혀왔다.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여 벼슬이 형조도관정랑(刑曹都官正郞정5품)에 이른 1455년(端宗3년.世祖元年)에 숙부(叔父)인 세조(世祖)가 조카인 단종(端宗)의 왕위(王位)를 탈취(奪取)하자 유은공은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품이라 부개(憤慨)하여 단종의 복위를 위해 뜻을 같이한 관원들과 노력했으나 허사가 되자 세상을 한탄하며 대사간(大司諫)인 신말주(申末舟)와 함께 벼슬을 미련(未練)없이 던지고 신말주는 순창(淳昌)에 귀향하여 귀래정(歸來亭 號를 따서)이라는 정자를 짓고 기거(寄居)하고 있었으며, 유은공은 남원(南原)의 둔산(屯山) 밑으로 귀향(歸鄕)하였다.
순자강가(鶉子江邊남원동쪽)에 작은 정자를 짓고 오대정(鰲戴亭)이라 현판(懸板)을 직접 써서 걸었다. 이 글자의 뜻은 큰 거북이가 삼신선(三神仙)을 등에 멘 것을 비유하여 공이 삼조(三朝 世宗.文宗.端宗)를 섬긴 의리로 은거하여 강호에서 망한(亡恨)을 달래며 여생을 보내려는 뜻이었다 한다 . 신말주와는 사돈 간이며 친구로서 수시로 만나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울분(鬱憤)을 시(詩)로 써 술잔에 담아 밤을 지새우기도 했고 달 밝은 밤에 정자에 올라 강원도 영월을 바라보며 깊이 탄식하고 개탄하는 것이 버릇이 되었으며, 어느 날 갑자기 정자 앞에 시(詩) 한 수를 남기니 『 외로운 따오기 서성이는 안개 낀 물가에 해 맑고 큰 거북머리 위에 맑게 갠 봉우리는 푸르 도다.原文省略』
이 글을 본 사람들은 믿기 어려웠던 달필(達筆)로 공의 곧은 절개와 충의(忠義)를 비유한 것이었다.
단종(端宗)이 사약(死藥)을 받고 승하했다는 부음(訃音)을 듣고는 두문불출(杜門不出) 의관(衣冠)도 벗어버리고 음식마저 끊었다. 그로 인해 운명하니 불의(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고 약자들의 편에서 의연하게 출세의 온갖 유혹(誘惑)에도 꺾이지 않고 충직한 신하로서 충의(忠義)와 충절(忠節)을 지킨 공이 김시습과 같은 생육신(生六臣)들과 무엇이 다르랴 ..........
부인은 능성 구씨(綾城具氏)로 1남3녀를 두었고 장남은 종(淙) 통예문 좌통찬(通禮門左通贊)이요 , 손자 소석(召奭)은 생원이다. 參考文獻 ; 辛酉譜
17世 우의정(右議政) 의 공양공(恭襄公) (1424년~1484. 6. 21) 壽61세 자료 -10호
공의 휘는 관(瓘)이요 초명은 종동(終同) 자는 영중(塋仲) 호는 묵제(黙齊)이다. . 증조 상(賞)은 찬성사(贊成使) 언양군(彦陽君) 순성 익대공신(翊戴功臣)의 서훈을 받았고 조는 병조참판(兵曹參判) 약(躍)이요. 친은 병조판서(兵曹判書) 언양군(彦陽君) 숙보(叔甫)이다. 공은 이천 서씨(利川徐氏) 사이에서 2 남 3 여중 1424년(세종6년) 차남으로 출생했다.
판서댁(判書宅) 명문의 가정에서 성장하며 두놔(頭腦)가 명석(明晳)하고 총명(聰明)하였으며 천품(天稟) 또한 준수(俊秀)하여 지행(志行)이 바르고 반포지효(反哺之孝 부모가 길러준 은혜에 보답하는 것)효심이 극진했다 한다. 공이 열살 어린 나이에 부친을 사별한 슬픔을 안고 형 철동을 따라 시묘(侍墓부모의 무덤 밑에 막을 치고 3년 동안 지내는 일)살 이를 하는데 1년도 안되어 어머니 마저 별세하니, 효심(孝心)이 지극한 공은 단장(斷腸)을 에이는 비통(悲痛)한 마음에 병까지 들어 사경(死境)에 이르렀다. 친척들과 주변에서 걱정되어 보신(補身)할 것을 권했으나, 슬픔을 가누지 못하고 듣지 않았다 한다.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이라 효자인 공의 병도 차차 회복되어 탈상을 마치니 모두들 그 효성에 크게 감복하였으며. 공은 고아(孤兒)로 외롭게 성장하였으나 친척들과 우애하고 화목하였다
고진감래(苦盡甘來)라 어려운 역경과 시련을 견디며 학문(學門)은 일취월장(日就月將) 사서(四書)마저 통달하여 시문(詩文)에도 능통하여 높은 스승과 이름난 큰선비들과 견주어 상대되는 이가 없었다 한다.
1447년(세종29년)에 사마시(司馬試초시 즉 생원시)에 급제하고 뒤이어 1451년(문종원년) 문과 증광시(文科增廣試)마저 합격 입신양명(立身揚名) 공신(功臣)에 록훈(錄勳)되고 병조판서(兵曹判書)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대(代)를 이어 가문(家門)을 빛냈다.
공의 관직은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정9품)에 초임(初任)되고 박사(博士)를 거쳐 이조좌랑(吏曹佐郞종6품) 1456년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정5품) 성균관부교리(成均館副校理정5품) 사도시정(司導侍正정3품)에 1454년에 세자시강원 필선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정3품) 동부승지(同副承旨정3품)와 오위장(五衛將종2품) 병조참의(兵曹參議정3품)를 역임하셨으며 신병(身病)으로 경기도 장단으로 낙향하여 투병(鬪病)중 벗들과 시연(詩宴)으로 지냈다.
임금은 공을 병조판서(兵曹判書)로 기용하고 범사(凡事)에 하문(下問)할 일에는 공을 불러 자문(諮問)했다 하니 공의 지략과 책모(策謀)는 무소부지(無所不知.博學多識)로 높이 신뢰했으며 1467년(세조13년) 이시애(李施愛)의 반란(反亂 함경도 북방을 경계하던 장군) 양민을 학살하고 조정을 위협할 때 세조(이성계)임금은 어명으로. 도총부사(都摠副使) 조석문(曺錫文)과
함께 문무(文武)를(兼備)겸비한 공에게 정벌토록 출정을 명했다. 반란군(叛亂軍)은 규모가 크고 전력이 강하고 저항마저 완강하여 어려운 토벌 작전 이였다. 그러나 공은 위열공의 후예(後裔)답게 지략이 뛰어난 공 앞에는 속수무책이었다 반란을 펑정(平靜)하고 이해 9 월 논공행상(論功行賞)에서, 정충출기적기이등 공신(精忠出氣敵愾二等功臣)에 책훈 되고 특지로 가선대부(嘉善大夫종2품)에 언양군(彦陽君)에 수봉 되었다.
또한 명나라에 천추사(千秋使)와 사은사(謝恩使)로 다녀오기도 했으며 4도의 관찰사(강원 황해 평안 전라도)를 두루 역임하고 예조(禮曹)와 병조판서(兵曹判書정2품)에 이어 전주 부윤(全州府尹종3품)을 역임하고 가는 임지(任地)마다 본영지성(本然之性사리사욕이없는 천부 자연의 심성)으로 선정을 펴니 백성들이 공덕을 칭송하였다.
공은 좌찬성(左贊成)에 이르러 신병으로 직을 사임하고 고향 부근(경기도 장단)의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절승지(絶勝地 사패지賜牌地공신에게주는토지)에 집과 수정(水亭)을 짓고 이름을 육선정(六仙亭)이라 부르고. 소인묵객(騷人墨客시문이나그림을 일삼음 특히 산수화를 잘 그렸다)으로 조석문(같은 공신 領相)등과 관포지교(管鮑之交우정이 깊은 사귐)로 시연(詩宴)으로 동락 하면서 광풍제월(光風霽月맑고 고결한 인품)에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훈계 7조를 써서 효제(孝悌) 충신(忠信)과 목연(睦婣) 인척과는 화목하며 절검(節儉)을 실천하였다.
1484년6월21일(甲辰성종15년)에 질환으로 별세하니 향년 61세이었다 . 부음(訃音)이 전해지자 성종 임금은 몹시 슬퍼하며 2일간 조회를 패하고 부의와 장례 감독을 예에 맞게 하였다. 또한 숭정대부(崇政大夫종1품) 의정부 동지의금부사 우의정(議政府 知義禁府使 右議政)으로 추증(追贈)하고 시호(諡號)를 공양(恭襄)이라 내리고, 8월14일 장단 용산리 유릉 뒤에 임좌(壬坐)에 예장했다.
二十一世창의사 문열공 약전(倡義使文烈公略傳) (1537.1.10~1593.6.29 ) 彦陽金氏 全州 宗親會 김천일장군은 1537년1월10일 나주시 흥룡동(興龍洞)에서 아버지 김언침(金彦琛)과 어머니 이씨(李氏)사이에서 독자로 태어났다. 본관은 언양김씨(彦陽金氏) 위렬공(취려) 14세손인 諱 천일(千鎰) 字는 사중(士重) 호(號)는 건재(健齋)이다. 공은 출생 다음날 모친상을 6개월 후 다시 부친상까지 당하여 외할머니 서씨(徐氏) 밑에서 고아로 성장(成長)하였다.
1554년 18세 되던 해 평북 위원군수 김효량의 딸과 혼인하였으며, 1555년 일재(一齋) 이항(李恒)선생 밑에서 인격을 형성하고 수학(修學)하며 학문을 깊게 터득했다.
1573년 초야의 인재로 발탁되어 군기사주부(軍器寺主簿종6품)가 되었으며, 이어서 전북 용안 현감(龍安縣監) 3년후 강원 경상 도사(都事從五品)를 지내고 1582년 모범관리에 발탁되어 전북 임실 순창 군수(從四品)를 역임했으며 2연후에 다시 담양부사(從三品)로 승진하였다가 사임하였다.
1589년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종四품)에 재임명되고 군자감정(軍資監正三品)거쳐 수원부사(水原府使從三品)에 부임하여 민익(民益)을 위하여 특권층의 탈세 문제점을 바로잡고 부세균일(賦稅均一)의 원칙을 시행함으로써 권력층의 모략과 대간(臺諫)들 탄핵(彈劾)으로 파직 귀향(罷職歸鄕)하였음은 공의 높은 덕과 강직한 성품을 더욱 빛나게 한 것이다.
1592년(선조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한성(漢城)이 적의 수중에 유린 된 것에 강개비분(慷慨悲憤) 고경명(高敬命) 최경회(崔慶會) 박광옥(朴光玉) 정심(鄭諶)등에게 글을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