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계천의 지천(성북천)을 따라서
◇ 돈암장(敦岩莊) 터: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번지(국가등록문화재 제91호)
- 초대 이승만대통령이 환국하여 처음 기거했던 사저(私邸)
돈암장은 1945년에 우남 이승만(李承晩)이 환국하여 조선호텔에서 며칠 묵다가 이곳으로 이주하여 2년간(1945. 10~1947.8) 기거했던 사저(私邸)이다. 이 저택은 당시 돈암동 인근에 있다 하여 ‘돈암장(敦岩莊)’이라 하였다.
이 집은 광산업으로 부를 쌓은 ㈜조선타이어 사장 장진영(張震英)의 소유였다. 이승만 부부는 거처할 곳이 없어서 임시로 장진영의 저택을 빌렸다. 집주인 장진영은 한식과 양식의 연건평 약 150평의 3채 중 1채만을 쓰고, 안채인 54평과 또 다른 1채를 빌려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이곳에 빈민들을 위한 의료기관인 동활인서(東活人署)가 있었고, 일제 때는 평산목장(平山牧場)이 들어서서 젖소 등을 길렀던 곳이었다.
1938~1939년에 지은 것으로 알려진 이 저택의 한옥은 당대 최고의 대목장(大木匠)이던 배희한(裵喜漢·1907~1997)이 지었다. 무형문화재 제74호였던 배희한은 “돈암장을 지을 때 쇠못은 전혀 사용하지 않았고 나무를 짜서 지었으며, 서까래와 내실 기둥 등은 모두 백양목을 사용했다”고 증언했다는데 당초 이 건물을 지은 집주인은 내시였다고 한다.
약 700평의 정원이 있는 이 저택은 뛰어난 미관(美觀)을 지녔다. 집주인 장진영은 6·25전쟁 때 납치되어 죽었고, 현재 성북구 동소문동 4가 103번지의 1호 및 2호로 분할되어 3명의 소유자에게 나뉘어 있다.
우남 이승만은 환국 후 조선호텔에서 며칠을 묵다가, 경비 과중으로 이 집에 거처를 잡았다. 이곳에는 윤치영(尹致暎)·이기붕(李起鵬)·윤석오(尹錫五)·송필만(宋必滿) 등이 보필하였고, 와병 중에는 임영신(任永信)이 간병하였다.
우남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미군정청으로부터 추대되었던 민주의원 의장직을 버리고, 공산계열의 민주주의 민족전선과 대결을 하면서 신탁통치반대운동에 열중하였다.
극도의 혼란이 거듭되는 시국을 이곳에서 보내던 2년 만에 우남 이승만은 장진영으로부터 집을 비워달라는 통고를 받았다. 이 소식을 들은 미국 조선주둔군사령관인 하지(Hodge, j. R.)중장은 1947년 8월에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다나카(田中)가 쓰던 마포장(麻浦莊 : 현 벽산빌라)을 주선하자 우남 이승만은 이곳에 잠시 이사하였다.
우남 이승만은 후원자들의 모금으로 2개월 후에 이화장에 입주한 후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1948년 8월에 경무대(청와대)로 들어갔다.
◇ 탑골 승방(塔洞僧房, 일명:彌陀寺) : 성북구 보문동 3가 51번지
- 조선시대 도성 밖의 네 승방 중의 하나로 꼽힌 비구니 사찰
탑골 승방(僧房)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비구니들이 수행하는 도량〔道場〕답게 단아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는 조계종 소속 사찰이다. 전일의 탑골 승방은 옥수동의 두뭇개 승방, 석관동의 돌곶이 승방, 숭인동의 새절 승방(청룡사)과 함께 여승들이 거처하는 성 밖의 네 곳 니사(尼舍) 중의 하나로 꼽았다.
이 절 안내판에는 950년(고려 광종 원년)에 혜거국사(惠居國師)가 현재 경동고등학교 자리에 절을 창건하여 미타사(彌陀寺)라고 지었다고 하였다. 그 후 1047년(문종 원년)에 석탑을 건립하자 이 근처를 탑골(塔洞)이라고 부르면서 미타사를 「탑골승방」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 이 절은 1314년(충숙왕 원년)에 혜감국사(慧鑑國師)에 의하여 중건되었다고 하는데 고려 때 고승(高僧)인 혜거국사와 혜감국사의 비문(碑文)에는 이 절을 개창, 중창한 사실은 나타나지 않아 고려시대에 관한 부분은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
이어서 조선 초 1457년(세조 3)에 단종비 정순왕후 송씨에 의하여 중수(重修)되었다고 한다. 이는 부근의 정업원·동망봉·자지동천 등에 정순왕후 송씨와 관련된 사실이 있음으로 보아 이 절과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조선 말의 순조와 헌종 때 각각 이 절을 중수한 데에 이어 1969년 송계주(宋季珠) 주지스님이 중수하였다.
참고로 혜거국사와 혜감국사를 소개하면, 혜거국사는 신라 말부터 명성이 높았으므로 경애왕이 분황사 주지를 맡아 달라고 요청하였고, 고려 초 정종 때는 왕사(王師), 광종 19년에는 국사(國師) 자리에 올랐던 고승이다. 그리고 혜감국사 만항은 송광사 제10세 국사로 고려 후기 충선왕 때 궁중에서 강론을 하는 등 많은 제자를 길러낸 후 71세에 입적(入寂)하자 국왕이 혜감국사라는 시호를 내렸던 고승이었다.
이 절 대웅전 뒤의 단하각(丹霞閣) 왼쪽 언덕 위에는 오래된 석탑 하나가 서 있는데 위쪽의 1층과 아래쪽 6층과 상륜부는 석재와 조각이 다르다. 아래쪽의 6층은 그 조성시대가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이 절의 대웅전은 지하와 지상 1·2층의 목조 기와로 지어져 2층을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며, 법당 내부에는 아미타 삼존불상과 5종의 탱화〔禎畵〕가 봉안되어 있다. 그 중에는 1863년에 제작된 신중 탱화도 있다.
◇ 보문사(普門寺) : 성북구 보문동 3가 168번지
- 세계 유일의 비구니 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普門宗)의 사찰
현재 보문동의 동명이 유래된 보문사(普門寺)는 미타사와 담장을 맞대고 있다. 원래 ‘보문(普門)’이란 뜻은 불교의 교리에 의하면 몸 전체의 온갖 덕(德)을 보(普)라 하고, 쓰임을 나타내는 곳을 문(門)이라고 하므로, 보문은 보살이 일체 성덕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기회와 시기를 따라 그 효용을 보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관세음보살을 보문시현이라고 한다.
보문사도 일명 「탑골승방」이라고 잘 알려진 절로서 만여 평의 대지 위에 대가람의 규모를 갖추고 있다. 150여명의 비구니들이 수행하고 있는 관계로 청정(淸淨)한 도량〔道場〕의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 절은 전에 조계종 소속이었으나 1972년 세계 유일의 비구니종단인 대한불교 보문종(普門宗)을 창시하여 그 본산이 되었다.
보문사는 고려초 1115년(예종 10) 담진스님, 즉 혜조국사(慧照國師)에 의하여 창건된 것으로 전승된다. 그 후 조선 후기 1692년(숙종 18)에 비구니 묘첨스님이 대웅전을 중수하는 등 헌종, 고종 때 여러차례 중수된 것으로 이 절은 소개하고 있다. 일제 때는 거의 황폐화 되었던 것을 광복 후 송은영(宋恩榮)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30여년 동안 교세를 확장하고 건물을 중건하여 대사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혜조국사는 고려 1107년(예종 2)에 왕사, 1114년(예종 9)에 국사로 책정되었던 당대의 고승으로 선종을 중흥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며, 말년에는 순천 정혜사(定慧寺)로 내려와 제자를 양성하였다. 그의 대표적인 제자로 우리나라 3대 명필인 탄연(坦然)스님이 있다.
이 절은 1972년 대한불교 보문종으로 등록한 후 이 해 6월 16일에 경주의 신라 석굴암(石窟庵)을 본 따서 사찰 뒤쪽의 보문산 돌산에 석굴암을 조성하였다. 석굴암은 이 절의 대표적인 불사(佛事)로 1970년 8월부터 23개월간 진행되었다. 이 불사에는 약 4,500여명에 이르는 조각가·석공이 종사하였고, 2,400톤의 화강석이 사용되었다.
대웅전 앞의 묘승당에는 1867년에 조성된 지장탱화가 있으며, 석굴암 앞의 8각 9층석탑은 1978년에 오대산 월정사의 탑을 본 따서 조성하고, 스리랑카에서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眞身舍利) 3과를 내부에 봉안하였다.
◇ 안암교 : 동대문구 신설동 92번지~용두동 236번지
- 왕산로에 놓인 성북천의 가장 큰 교량
안암교는 신설동과 용두동을 잇는 ‘왕산로’에 놓인 성북천의 교량 중의 하나이다.
옛날 안암동 3가의 마을에 20여명이 편안하게 쉴만한 큰 바위가 있어서 한자명으로 안암동(安岩洞)이라고 하였으므로, 다리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성북천에 놓인 교량 중에서 가장 규모가 컸던 이 교량은 ‘안암대교’라고 칭하였는데, 1997년 서울시지명위원회에서 한강에 있는 교량만 대교를 붙이도록 함에 따라 안암교로 다시 바뀌었다. 이 교량은 폭 21m, 길이 27m로 1965년에 준공되었는데 산책로와 쉼터가 잘 조성되어 있어서 찾는 시민들이 많다.
◇ 성북천교 : 동대문구 용두 제2동
- 동대문 풍물시장 부근의 청계천 교량
성북천교는 용두제2동 청계천변에 놓의 교량으로 청계천 복원공사와 함께 가설되었다. 이 교량은 폭 14.5m, 길이 38.6m로 (주)현대건설 외 1개사가 함께 시공하여 2005년 9월 30일에 준공되었다.
동대문구 풍물시장 인근에 위치한 성북천교는 많은 차량이 통행한다. 주말마다 이곳은 인근의 풍물시장을 찾는 고객들이 차를 주차하는 곳으로 변해 교각 구조에 손상을 일으킬 수 있는 위험이 지적되고 있다.
◇ 오간수교(五間水橋) : 중구 을지로 6가 18-214
- 한양도성이 축성된 동대문 부근의 청계천에 가설된 교량
청계천 물줄기가 한양도성을 빠져 나가는 동대문 옆의 오간수문(五間水門)에 설치한 다리이므로 오간수다리[五間水橋]라고 불렸다. 조선 초에 한양도성을 쌓으면서 청계천 물이 원활하게 흘러갈 수 있도록 세 개의 아치형 문을 만들었다가 후일에 다섯 개의 아치형 문을 만들고, 그 위에 성곽을 쌓아 올렸으므로 오간수문이라고 불렀다.
이 수문은 1908년(광무 11) 당시 한성부의 유맹(劉猛) 토목국장이 청계천 물을 잘 흘러가도록 해야 한다는 이유로 헐어버릴 때 오간수교도 함께 사라졌다. 그 대신 전차와 자동차 통행을 위해 콘크리트로 만든 오간수교와 청계천을 건너는 사람들의 통행을 위해 나무로 만든 오간수교가 놓였다.
◇ 가산(假山) 터 : 중구 방산동 19-1
- 청계천 준설 때 파낸 흙을 쌓아서 생긴 흙더미
가산(假山)은 인위적으로 산의 모습을 만들어 정원의 일부를 구성하게 한 조원술(造園術). 조산(造山)이다. 궁궐이나 도성 안에 큰 연못이나 하천을 조성할 때 파낸 흙을 처리하기 위하여 쌓은 산이지만, 땅의 기운이 허한 곳에 지기(地氣)를 보태려고 쌓은 산을 일컫기도 한다.
조원 수법으로서 가산을 만든 의도는 대자연을 주거환경 안에 편입시켜 소우주(小宇宙)를 만들려는 데에 있었다. 가산을 조원 수법으로 이용한 것은 일찍이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대개는 궁궐 안에 연못을 파고 이때 나온 흙으로 산을 만들어 여기에서 짐승을 기르거나 화초를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풍수지리적 측면에서 가산을 만든 경우로는 조선초의 1398년에 종묘 앞쪽의 지세가 허(虛)하다고 하여서 흙으로 산을 쌓은 예가 있다. 또, 큰 연못이나 하천을 파낼 때 나오는 흙을 처리하기 위해 가산을 만든 경우로는, 청계천을 준설(濬渫)할 때 파낸 흙을 수구문(水口門) 근처 성벽 안쪽에 쌓아 만든 예가 있는데, 그 위치는 당시의 훈련원 북쪽(현재 을지로 5가)이었다.
조선시대에 청계천을 준설할 때에 나오는 토사(土砂)는 몇 개의 산더미를 이루었는데 이것을 가산(假山)이라고 불렀다. 청계천변의 가산은 1760년(영조 36) 경진년 때 57 일간 연 5만 명을 동원하여 조성된 것이 규모도 크고, 그 수효도 여러 개가 되어 주민들이 가산 또는 조산(造山)이라고 불렀다.
영조 36년 4월 청계천 준천공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가 준설로 생긴 토사를 지금과 같이 개천의 양안(兩岸)에 방치해 두었다가 비가 내리게 되면 이것이 무너져 천거(川渠)와 도로에 흘러 들어가게 될 것이니 이렇게 되면 모처럼 실시한 역사(役事)도 헛되이 되어 버리므로 거액을 들여서라도 이 토사를 다른 곳으로 운반해야 된다고 하였다.
이 지적에 대하여 영조는 당시 토사를 처리할 수 없었으므로 이 흙을 오간수문 근처에 두 군데로 집중시키도록 함으로써 가산이 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이 가산은 특별히 축조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자 풍우(風雨)로 토사가 흘러내려 허물어지면서 낮아졌을 것이며, 그 다음 준천 때 다시 그 곳에 토사를 모아 종전보다 더 큰 산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이 조산을 나지(裸地)로 두면 보기가 흉하기 때문에 나무와 화초를 심게 되었다. 1914년 일제가 경성부의 행정구역명을 새로 정할 때 속칭 조산동(造山洞)이라고 불려 오던 이 곳 가산에 심어놓은 꽃향기가 좋아서 이곳을 방산동(芳山洞)이라 이름하였다고 전한다.
현재 동대문종합상가 부근의 북쪽 조산은 광무 2년(1898)에 전차 차고(車庫)를 세우면서 대부분 헐렸으며, 평화시장 뒷골목에서 국립의료원을 거쳐 방산동 일대에 남안(南岸)의 조산은 1918년경에 현 국립의료원 자리에 조선약학교(朝鮮藥學校)를 짓고, 1921년 그 서편에 경성사범학교를 세울 때에 모두 파서 그 흙은 종로의 도로 개수에 썼다고 전한다.
조선 후기에 일거리를 찾지 못하여 걸인으로 연명해야 하는 수백 명의 근거지는 주로 청계천 다리 밑과 청계천 준천 이후에 생긴 가산의 토굴이었다. 포도청에서는 이들을 단속하기 위해 두목인 ‘꼭지딴’[丐帥]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이곳에서는 정월 대보름 때 서울 장안 소년들이 연날리기 대회를 열었다.
◇ 영도교(永渡橋) : 숭인동 234번지~상왕십리 748번지
- 단종이 영월로 귀양갈 때 정순왕후 송씨와 이별하던 다리
영도교는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고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을 갈 때(세조 4년, 1458) 그의 부인 정순왕후 송씨가 이곳까지 나와 서로 영영 이별하였다 하여 ‘영이별다리(永離別橋)’, 영미교(永尾橋) 혹은 ‘영영 건너던 다리’라고 전해지는 이야기에서 유래된 교량명이다. 일제 때 만든 <경성부 지도>를 보면 영미교로 표기되어 있다.
단종과 마지막으로 헤어진 후 정순왕후 송씨는 한양도성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금의 청룡사 새절 승방에 있던 정업원(淨業院 : 숭인동 17번지)에 들어가서 시녀 셋을 데리고 일생을 불도(佛道)에 바쳤다고 전한다.
그런가 하면 이 다리를 영도교(永渡橋)라고도 칭하는데 이는 성종 때 영도사(개운사)의 중을 동원하여 돌다리를 놓았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동묘(숭인동 22번지) 남쪽 청계천 하류에 있던 이 다리는 동대문 방면에서 왕십리 쪽을 가려면 영도교를 건너야만 되었기 때문에 교통량이 매우 많았다. 그리하여 조선 초에 성종은 절의 중들을 동원해서 살곶이다리(전곶교, 箭串橋)와 함께 이곳의 돌다리를 중수(重修)하고 어필(御筆)로 ‘영도교’라 하였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그 규모가 크고 특징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영도교의 돌다리는 고종 초에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수할 때 석재로 쓰기 위해 헐어갔다고 전한다. 그 뒤 나무다리를 대신 놓았으나 가끔 떠내려갔으므로 개천 바닥에 돌을 띄엄띄엄 놓은 ‘띄엄 돌’을 놓아서 사람들이 이 돌을 밟고 건너다니던 때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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