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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9장 武林盟의 붕괴
밀실.
전각의 지하 십 장 깊이에 비밀통로로 연결된 이 아담한 밀실은
혈필 형익손이 즐겨 사용하는 그만의 장소였다.
위진표국의 중요한 서류나 천마교와의 연락을 취할 일이 있으면
그는 홀로 이 밀실에 들어와 서찰을 쓰거나 업무를 보았다.
일단 지하로 깊숙이 숨어 있는 이 밀실은 고요해서 좋았다.
밖이 아무리 소란스러워도 이곳은 별세계인 양 고요함을 언제나 제공했다.
이 밤,
형익손은 머리위에서 벌어지는 참극도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서탁에 앉아 신중한 모습으로 서찰을 쓰고 있었다.
지금 쓰는 서찰은 형익손의 인생에 있어서 조용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천하의 운명에 있어서 실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었다.
한참 서찰을 쓰는데 몰두해 있던 형익손은 난데없이 밀실의 문이 부서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그는 벌떡 일어섰고, 손에 들고 있는 붓을 뚝 떨어뜨려야 했다.
피를 뒤집어 쓴 냉검상이 형문곡의 시체를 낀 채 서 있었다.
돌연한 냉검상의 등장에 형익손은 간이 떨어질 만큼 놀래고 있었다.
그리고 냉검상의 옆구리에 끼어져 있는 걸레쪽 같은 시체가 아들 형문곡임을 알고는 더욱 기겁했다.
"무...... 문곡!"
형익손은 냉검상이 묻기도 전에 창백해지고 말았다.
냉검상은 쇳조각을 씹어뱉듯이 차디찬 음성으로 물었다.
"네가 형익손이냐?"
"?"
흠칫 냉검상을바라본 형익손은 수염을 부들부들 떨면서 창노한 음성으로 외쳤다.
"너, 너는 누구냐?"
"냉검상."
이 세 마디를 듣는 순간 형익손은 아들 문곡의 죽음을 확인할 때보다 더욱 경악했다.
냉검상이라니...
죽음의 상징인 흑의사신(黑衣死神)이란 말인가?
형익손은 창백한 공포로 물든 표정으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냉검상의 이름이 주는 두려움의 의미는 너무도 컸기 때문이었다.
냉검상은 한 걸음 앞으로 나오면서 나직이 말했다.
"너는 죽어야 한다."
"!"
"네가 죽어야 할 이유는 두 가지.
첫째, 천마교의 개라는 것이고 둘째, 음탕하고 더러운 아들 놈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제서야 형익손의 아들이 냉검상에게 죽었다는 사실을 새롭게 깨달았다.
"이- 놈!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죽은 시체를 그렇게 욕보일 수 있단 말이냐?"
"후후.... 개밥에 던져 주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알아야 한다!"
푸들푸들!
형익손의 안면이 무섭게 떨렸다.
그러다 그는 거의 발작적으로 소매 속에서 혈필을 꺼내 냉검상을 공격해 갔다.
"으아아아아!"
혈필이 무서운잔영(殘影)을 일으키며 냉검상을 노려왔다.
그러나 그 공격은 너무도 무모했다.
"후후후!"
냉검상의 싸늘한 웃음을 따라 미인혈이 요요한 광채를 발했고,
칼면에 새겨진 요사한 미녀의 웃음이 불빛에 반사되는 순간 한 줄기 극렬한 광채가 쏘아졌다.
그리고 달려오던 형익손은 냉검상의 두어 걸음 앞에서 주춤 멈추었다.
그는 두 눈을 흡부릅뜬 채 환상처럼 아름다운 미녀의 웃음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떠올릴 수 있는 마지막 생각이었다.
"큭!"
하는 괴상한 신음성과 함께 형익손의 동체는 그대로 허물어져 버렸다.
그제서야 목이 데구르르 구르면서 핏둥지를 힘차게 뿜어냈다.
냉검상은 형문곡의 시체를 형익손의 시체 위로 던졌다.
"......"
살기가 일렁이는 시선으로 두 시체를 보던 냉검상은 밖으로 나가려고 몸을 돌렸다.
순간 냉검상의시선을 끄는 것이 있었다.
서탁 위에 놓여 있는 서찰과 쓰다만 서찰이었다.
"?"
냉검상은 멈칫하면서 서탁 앞으로 다가가 형익손이 쓰다만 서찰을 읽어보았다.
〈천마교주(天魔敎主)의 무공일맥은 삼천(三天)의 하나인 천인혼(千人魂) 무불사의
진전을 잇고 있음이 확실해졌습니다.〉
이렇게 시작된서찰은 냉검상의 발길을 묶어두기에는 충분할 정도로 엄청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그러나 교주의 무공은 불완전한 게 틀림없습니다. 그 이유는 천인혼이 남긴
사마혼경(四魔魂經)의 네 권 중에 마지막 한 권을 얻지 못한 것이고...
그래서 교주는육백 년 전의 전설적인 인물인 마후 단옥청의 마공으로
그 공백을 메우려 시도했고, 그것이 거의 성공단계까지 이르렀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말씀하신 천수(千手), 천목(千目), 천인(千人)에 대해서는..〉
서찰은 여기서멈춰져 있었다.
쓰는 도중에 냉검상의 침입으로 더 진행시키지 못한 것이었다.
서찰을 읽은 냉검상의 눈은 경이의 빛을 담고 있었다.
(천마교의 강서지단 단주인 형익손은 다른 인물의 첩자?)
그렇다면 누구의 첩자란 말인가?
(또한 천마교주가 천인혼의 후예라는 것도 실로 뜻밖의 일이로군.)
조용히 생각을정리해 보던 냉검상은 쓰다만 서찰 옆에 곱게 접혀 있는 서찰을 펼쳐보았다.
〈천마교주의 무공일맥을 파악해라.
그리고 강남 전초기지로 만든 환도장의 세력과 구조를 정확히 파악, 보고할 것이며,
그곳에서 만들고 있다는 천수(千手), 천목(千目),천인(千人)에 대해서 철저히 조사해라.
환도장에 잠입한 목인청과 서로 연락을 취하며 공동으로 조사한다면 의외로 쉽게 알아낼 수도 있을것이다.
남궁.〉
서찰의 맨 끝에 표기되어 있는 성(姓)을 보면서 냉검상은 가슴이 은근히 진탕됨을 느꼈다.
(남궁.. 남궁이라니?)
순간적으로 냉검상의 두 눈이 괴이롭게 빛났다.
(이 서찰을 받고 남궁이란 인물에게 형익손은 답장을 쓰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남궁이란 뜻은 혹시 남궁세가의 백의성자 남궁백?)
냉검상의 뇌리에는 악승의 모습이 떠올랐다.
-남궁백이 십이비천신마를 가둔 무공은 바로 흑룡겁이네!
악승이 했던 말을 떠올리자 냉검상은 형익손을 움직인 인물이 남궁백이란 심중이 더욱 굳어졌다.
(그렇다면 천마교에서 만들고 있다는 천수(千手), 천목(千目), 천인(千人)이란 무엇인가?)
알 수 없었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냉검상은 잠시 서찰을 보다가 더 이상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일단의 수확만도 냉검상에게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었다.
냉검상은 두 장의 서찰을 손에 쥐고는 삼매진화로 태워 소각하고 밀실에 불을 놓았다.
밀실에는 대부분 서류와 책들이 쌓여 있어 금방 불길이 살아나면서 타올랐다.
불(火).
어둠을 뚫고 타오르는 불길은 파괴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냉검상은 불타는 위진표국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그러나 아무도몰랐다.
위진표국의 참극이 뒷날 얼마나 커다란 비극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무서운 음모의씨앗을 잉태하고 있다는 것을 지금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 * *
산(山)의 모습은 날개를 편 학(鶴)을 닮았고
, 항상 산허리에는 요대처럼 띠구름을 두르고 있는 운학산(雲鶴山)에 수백 년의 연륜을 가지고
고고하게 서 있는 장원이 있다.
장원의 정문 앞에는 열 두 계단의 돌 계단 앞에 두 마리의 석사자(石獅子)가 하늘을 향해 포효하듯 서 있고
, 언제나 열 두 명의 무사들이 형형한 정광을 뿜으며 지키고 있는 곳이다.
〈威震南宮世家.〉
바로 강남의 명문 남궁세가였다.
무림의 지자천(智者天)으로 불릴 만큼 지혜와 학문,
그리고 금상첨화격으로 무공까지 겸비한 남궁세가는 언제나 무림의 빛나는 별과 같았다.
더욱이 근자에와서는 백의성자 남궁백과 그의 손자인 삼뇌천기 남궁천자로 인해
남궁세가의 명성은 더욱 중원을 울리고 있는 상태였다.
무림맹이 천마교의 등장으로 결성되고, 백의성자 남궁백이 무림맹의 맹주로 추대된 이후
, 남궁세가의 정예고수들의 대부분은 남궁백과 함께 화산에 머무르고 있어 조금은 한산한 느낌을 풍기기도 했지만
남궁세가의 고고한 모습은 언제나 변함이 없었다.
하늘에는 기우뚱 한 조각 편월이 걸려 있는 어두운 밤.
하나의 그림자가 남궁세가의 높은 담을 넘고 있었다.
그림자의 경신술은 너무도 민첩하고 유연하여 남궁세가의 누구도 그의 침입을 눈치채지 못했다.
그 그림자는 남궁세가의 지형에 익숙한 듯 어둠 속을 움직이며 곧장 하나의 전각으로 들어갔다.
전각의 이층으로 올라간 그는 망설일 것도 없이 오른쪽 회랑을 따라 걷다가 좌측으로 꺾어지면서
곧바로 마주보이는 방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갔다.
빈 방이었다. 그러나 방은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어 정갈한 느낌을 주었다.
또한 비어 있는 방이었지만 불이 밝혀져 있었다.
방 안으로 잠입한 인물은 바로 냉검상이었다.
운학산 근처의객점에다 설청하를 쉬게 하고 밤을 이용해 냉검상은 남궁세가로 잠입한 것이었다.
이미 남궁세가에 대한 모든 조사를 했기 때문에 그는 곧장 남궁백의 거처인 이 방으로 잠입한 것이다.
"......"
냉검상은 방 안을 두리번거리다가 이내 서랍들을 뒤지며 무엇인가를 찾기 시작했다.
한동안 방 안의 이곳저곳을 뒤지던 냉검상은 불현듯 인기척을 느끼고 몸을 훌쩍 뛰어 올렸다.
스읏!
마치 가벼운 구름처럼 천정으로 치솟은 냉검상은 편복괘천의 수법으로 박쥐처럼 천정에 매달렸다.
그러자 방문이빠끔히 열리면서 예쁘장한 녹의소녀가 팔랑거리는 걸음으로 걸어들어왔다.
대략의 나이는열 여섯쯤 됐을까?
양볼에 옴폭 패인 보조개가 꽤나 발랄하고 명랑함을 느끼게 하는 인상이었다.
녹의소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서가의 책을 정리하고는 의자에 앉아 발을 까닥거렸다.
"아이참...... 할아버지가 안 계시니 너무 심심한 걸? 언제쯤이나 화산에서 돌아오실까?"
양손으로 턱을괸 채 큰 눈을 깜박거리는 모습은 꼭 귀여운 사슴을 보는 것 같았다.
소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다가 고개를 까닥하더니 중얼거렸다.
"참! 이번에 할아버지가 돌아오시면 꼭 대라수(大羅手)의 마지막 구결을 가르쳐 달라고 해야지."
소녀는 발딱 일어섰다.
한데 그때였다.
스슷!
극히 미세한 음향과 함께 천정에 붙어 있던 냉검상이 그녀의 등 뒤로 떨어져 내렸다.
"!"
기척을 느끼고흠칫 돌아서던 녹의소녀는 냉검상의 억센 손아귀에 덥석 완맥을 잡히고 말았다.
녹의소녀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냉검상이 스산한 음성으로 물었다.
"너는... 남궁백의 손녀인가?"
"아..."
녹의소녀는 손목이 아픈 듯 아미를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름은?"
"다... 당신은 누구예요?"
"이름이 뭐냐고 물었다."
"고, 고함을 지르겠어요. 손을 놔줘요."
냉검상은 차갑게 웃었다.
"후후후..고함을 지르기 전에 그 예쁜 목이 먼저 꺾일 것이다."
냉검상의 음성은 차분했다.
너무도 차분했기 때문에 오히려 소녀에게는 무한정의 공포를 느끼게 했다.
더욱이 소녀는 대뜸 목을 꺾어 버리겠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사람을 이제껏 경험해 본 적이 없어
극도의 공포에 젖어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다시 한 번 묻겠다. 네 이름은?"
녹의소녀는 질린 표정으로 더듬거리듯 말했다.
"나, 남궁능미..."
"예쁜 이름이야, 귀여운 아가씨. 그럼 다시 묻겠다
. 이 방에 남궁백의 서고(書庫)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디 있지?"
녹의소녀 남궁능미는 도리질을 했다.
"모, 몰라요."
순간 냉검상의두 눈 깊숙한 곳에서 섬뜩한 광채가 쏘아져 나왔다.
그 눈빛을 보는 순간 남궁능미는 전신이 오그라드는 기분이었다.
"말을 해 주지 않는다면 나는 귀여운 아가씨의 얼굴을 거미줄처럼 칼로 그어놓을 수밖에 없는데..?"
남궁능미는 바르르 떨었다.
이 사람이라면 정말 자신의 얼굴에 칼을 대고 상처를 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 안돼요. 내 얼굴에...그건 안돼요."
냉검상은 웃었다.
"그럼 어서 말해. 남궁백의 서고가 어디 있지?"
"저, 저는..."
남궁능미는 눈물을 글썽이며 얼른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표정으로 보아 알고는 있지만 말하기는 쉽지 않은 그런 것이었다.
"빨리 말해!"
냉검상이 무섭게 눈을 뜨고 다그치자 그녀는 움찔하더니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저, 저쪽...족자 뒤에 기관을..."
냉검상은 남궁능미를 데리고 족자쪽으로 다가가 족자를 걷어치웠다.
과연 남궁능미의 말대로 하나의 손잡이가 나타났다. 냉검상은 주저없이 손잡이를 잡고 비틀었다.
구그그그긍!
둔중한 음향이울리면서 한쪽 벽면이 옆으로 밀려나면서 벽 속에 숨어 있던 서고가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
냉검상은 남궁능미를 끌고 서고 안으로 들어갔다.
남궁능미는 고통스러운 듯 말했다.
"제발 손좀 놔주세요. 아파요.."
"죽고 싶으면 입을 나불거려도 좋다."
남궁능미는 뭔가 말을 하려다가 꿀꺽 삼키고는 낮은 소리로 흐느낀 채 냉검상에 이끌려 서고로 딸려왔다.
냉검상은 남궁능미를 서고의 의자에 앉게 하고는 빠른 동작으로 서고를 뒤지기 시작했다.
불안한 시선으로 냉검상의 행동을 지켜보던 남궁능미가 초조한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뭘 훔치려는 거예요?"
"......"
냉검상은 서가의 책을 뒤적거리다가 뒤를 돌아보았다.
남궁능미는 움찔 목을 움츠렸다.
그리고는 냉검상의 눈치를 살피면서 조심스럽게 말했다.
"돈을 달라면.. 돈을 드릴 테니까 제발 할아버지 물건은 건드리지 말아요.
할아버지가 돌아오시면 전 혼이 나요."
냉검상은 그녀의 순진함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이내 차가운 표정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한 번만 더 입을 나불거리면 옷을 몽땅 벗겨 버리겠다!"
"옷을..."
남궁능미는 실색한 표정이 되어 자신의 옷매무새를 단단히 오므렸다.
냉검상은 더 이상 그녀를 거들떠 보지도 않고 서가를 다시 뒤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동안 서가를 뒤졌지만 원하는 것을 찾지는 못한 눈치였다.
냉검상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서탁 위에 몇 권의 책이 올려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가갔다.
그리고 쌓여 있는 서책들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냉검상이 만상신서란 책을 뒤적거리다가 한 장의 양피지를 발견한 것은 금방이었다.
양피지에는 붉은 선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힌 채 팔괘를 나타내는 글씨와
칠성(七星)의 변화를 알리는 듯한 그림이 엉켜 있었다. 그리고 양피지의 위쪽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구절연환진(九絶連環陣).〉
냉검상의 눈이빛났다.
그는 진법에 대해서는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기초 지식은 있었고, 구절연환진의 도해를 보는 순간 예감처럼 느낄 수 있었다.
(이것은 진법을 파해시키는 파해도가 틀림없다
. 칠성의 방위를 따라 아홉 개의 생문(生門)이 표시되어 있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말한다.)
냉검상의 표정이 심상하게 변했다.
(십이비천신마를 탈출시킨 것은 바로 남궁백이 확실해지는 것인가?)
냉검상은 구절연환진의 파해도를 가슴에 갈무리하고 다시 서책을 뒤적거리다가
낙서인 듯 무엇인가를 끄적거려 놓은 종이를 발견하였다.
"!"
종이를 보는 순간 냉검상의 표정이 굳어 버렸다.
〈흑룡겁의 무공은 삼천(三天) 중에서도 으뜸이다.
정파의 무공이되 겁(劫)이라는 말이 있듯이 너무도강함이 지나쳐극랄하고 잔인함이 하늘을 닿았고,
이것을 극성으로 익히기 위해서는 백인(百人)의희생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방법이 너무 잔인하고섬뜩해..〉
글은 거기서부터 끊겨져 있었다.
아마도 적어 내려가다가 그만 둔 것 같았다.
그러나 이 한 장의 낙서가 지니고 있는 의미는 너무도 큰 것이었다.
냉검상의 표정이 가라앉았다.
"결국은... 불행하게도 악승의 추리가 맞았구나."
남궁능미는 냉검상이 중얼거리는 의미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물건을 마음대로 품에 넣는 냉검상의 행동이 불안하기만 할 뿐이었다.
냉검상은 다시서탁을 뒤적거려 몇 장의 서류를 찾아내고 한꺼번에 품 속으로 집어넣었다.
남궁능미는 더이상 참을 수 없는지 애절한 음성으로 외쳤다.
"아... 안돼요. 그것을 훔쳐가면 제가 큰일나요. 할아버지 물건이 없어지면 제가 야단을 맞아요."
냉검상은 남궁능미를 돌아보며 어이없는 듯 싱긋 웃었다.
그 웃음에 남궁능미는 이제까지의 두려움도 잊은 듯 잠시 망연한 표정이 되었다.
입꼬리를 살짝말아올리는 듯한 냉검상의 미소는 미묘하게도 남궁능미의 가슴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게 한 것이었다.
(자세히... 보니 미남이야.)
냉검상이 물었다.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아... 아니...."
남궁능미는 얼굴이 발갛게 변하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냉검상은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남궁능미의 곁을 지나치며 말했다.
"너의 할아버지에게 절대로 야단맞지 않을 것이다."
"예?"
남궁능미가 고개를 발딱 들었을 때 냉검상은 한 줄기 바람인 듯 방으로 나가 창문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 이봐요?"
남궁능미가 다급히 불렀지만 이미 냉검상은 창문을 넘어 어둠 속으로 묻혀 버렸다.
남궁능미는 그만 망연자실해지고 말았다.
(누굴까?)
마치 한 바탕 꿈을 꾸고 난 기분이었다.
그러나 남궁백의 서류가 몇 가지 없어진 것을 눈 앞에서 본 남궁능미의 얼굴은 이내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정말 큰일났네. 할아버지 물건을 도둑 맞았으니 어쩌면 좋지?"
그때였다.
남궁능미 앞으로 등을 보인 채 백의의 한 사람이 나타나며 말했다.
"능미, 너무 걱정하지 말아라."
백의인을 본 남궁능미는 어두운 기색을 털어 버리며 활짝 웃었다.
"정말 잘와 주었..."
말을 하던 남궁능미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경직됐다.
서서히 확대되는 두 눈은 극도의 불신과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고, 얼굴빛은 창백하게 변하고 있었다.
칼!
잘 갈린 한 자루의 칼이 백의인의 손에 쥐어진 채 그녀의 희고 고운 목을 깊숙이 파고들고 있었다.
주르르!
장미빛처럼 붉은 선혈이 흘러나와 칼을 잡고 있는 백의인의 손을 금방 흥건하게 적셨다.
남궁능미는 고통도 이 순간 못 느끼는 듯 회의에 찬 시선으로 백의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다.
어린 시절 자신을 업고 같이 놀아 주던 사람인데...
자신의 가장 절친한 사람인데...
남궁능미의 입술은 무엇인가를 말하려고 푸들거렸으나, 아무런 말도 못한 채 인형처럼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백의인은 칼날에 묻어 있는 한 여린 생명의 피를 손가락으로 훑어내며 나직이 웃었다.
"후후후!"
이미 생명의 온기를 잃고 맥없이 쓰러져 있는 남궁능미의 시체 위를 웃음만이 맴돌았다.
"드디어 한 달 남았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내가 예언한 천하운명의 파멸시간이 이제 한 달 남았을 뿐이다.
한 달 후면 이 대륙의 주인이 바뀐다. 바로 나로!"
백의인은 어깨를 흔들었다.
아니 흔들었다고 느끼는 순간 그의 신형은 바람에 휘말린 연기처럼 어디론가로 꺼지고 있었다.
* * *
눈(雪).
눈이 내린다.
인간 세상의 모든 허욕과 애증과 위선을 덮어 버리려는 듯 하얗고 순백의 눈이 내린다.
서설(序雪)이었다.
마지막 한 잎 남은 나뭇잎의 메마른 부대낌에서 조락의 계절 가을이 깊어간다고 느낀 때가 엊그제 같은데,
하늘은 어느 새 잔뜩 찌푸린 채 함박눈을 쏟아내고 있었다.
첫눈은 희망을준다.
첫눈이 오는 날 결혼을 하면 신부는 행복하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나 대중원의 무서운 혈겁(血劫)은 이 서설과 함께 시작되고 있었다.
천마교의 일천혼이 천둔강의 십리파에서 냉검상에 의해 전멸하자
일취월장의 기세로 뻗어가는 세력의 확장이 결정적으로 주춤거렸다.
그 틈을 어찌 남궁백이 놓치겠는가?
절호기회라! 남궁백은 무림맹의 정예고수 수천을 동원하여 천마교 주변의 여섯 개 지단을 공격하여 초토화시켰다.
또한 천마교의 길목을 완전히 차단하여 천마교를 외부의 지단과 고립화시키는 데 성공을 했다.
결국 홍택호에서 남방으로 백 리쯤 떨어진 낙산(落山)에서 두 세력은 대혈전을 벌이고,
이 한 판의 혈전은 상호간에 막대한 피해만을 입힌 채 무림맹의 인물들이
천마교의 주변에서 철수하는 사태까지 이르게 되었다.
철수했다고 하나 무림맹이 패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천마교가 더욱 많은 피해를 입어 당장 원기를 회복하기 힘들다는 남궁백의 판단과, 무림맹 역시 여세를 몰아 천마교를 본격적으로 정벌하기에는 약간의 시간과 정비가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천마교는 곧바로 남궁백의 판단을 뒤엎으며 무림맹의 임시총단이 있는 화산파로 대공세를 펼쳤다.
느닷없는 천마교의 공격으로 무림맹측은 급히 방어선을 구축하고 대응했고, 보름 간의 대전투가 벌어졌다.
양측은 서로 막대한 피해를 입었는데,
전투의 양상은 오히려 천마교쪽으로 약간 우세하게 이끌어지고 있었다.
그 이유가 있었다.
천마교에는 천탁의 마왕 사루후와 비천마방을 설립한 만독사후 태우진이 합세했기 때문이었다.
해서 싸움의 양상은 이제 천마교와 무림맹이 아닌 정사(正邪)의 혈전, 즉 신마(神魔)의 대혈전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런데, 혈전이 시작된 지 이십 일.
그 날의 어둠과 함께 취선개 악승이 무림맹에 도착하면서 국면은 묘하게 뒤엉키기 시작했다.
그것은 무림맹에는 치명적인 것이었고, 또한 그 사실은 천마교에서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이었다.
* * *
화산파의 중심부에 위치한 영빈청.
지금은 무림맹의 회의청으로 사용하는 장소에 무림맹의 수뇌급이라 할 수 있는
수십 명의 명숙들이 모여 있었다.
당연히 부드럽고, 신중한 기색이 보여야 할 회의청의 분위기는 일촉즉발의 긴장감마저 감돌고 있는 가운데
살벌함이 번져 있었다.
모두들 한결같이 무섭게 굳어 있는 표정이었고,
더욱이 제일 상좌에 앉아 있는 무림맹주 남궁백의 두 눈은 부릅떠진 채 무서운 분노로 수염이 떨리고 있었다.
일신에 화려한곤룡포를 걸치고, 갈대꽃 같은 수염이 배꼽어림까지 늘어진 무림의 신화 남궁백.
그 어떤 일에도 담담한 표정을 잃지 않고 매사를 냉정하게 이끌어 가던 이 노인은
지금 우뚝 서 있는 악승을 보며 마음을 안정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이었다.
백의성자 남궁백의 좌우에는 천불암의 해연을 비롯한 구파일방의 장문인들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남궁백의 전면에는 악승의 모습과 축융방의 단리극이 서 있었다.
남궁백은 태사의의 손잡이를 잡은 채 무섭게 악승을 노려보다가 창노한 음성으로 말했다.
"악노협, 지금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이오?"
악승은 관자놀이를 움찔거렸다.
"남궁백! 이 가증스러운 인간. 양의 탈을 뒤집어 쓴 늑대이고,
너 같은 인면수심의 인간이 무림맹의 맹주 직위에 버젓이 앉아 있다는 사실이 너무도 어불성설이다!"
중인들은 너나할 것 없이 경악한 표정이었다.
자신들이 존경하고, 흠모하며 무림맹의 주인으로 인정하고 있는 남궁백에 대한
엄청난 모욕의 말을 악승은 너무도 태연하게 내뱉고 있기 때문이었다.
남궁백은 너무도 분노하여 수염이 덜덜 떨렸다.
다짜고짜 나타난 악승은 무림맹의 구수회의를 열 것을 주장했고,
회의가 시작되기가 무섭게 남궁백을 매도하는 것이었다.
이유도 알 수 없이 처참한 모욕을 받으니 아무리 백의성자란 별호를 얻고 있는 남궁백이라 할지라도
분노가 머리 끝까지 치솟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때 남궁백의옆자리에 있던 해연이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악노시주, 말씀이 과하십니다."
악승은 해연을부릅뜬 눈으로 보았다.
"해연, 자네는 입다물고 있게. 나 악승의 성격을 모르는가? 내가 아무런 증거도 없이 사람을 매도하겠나?
더욱이 남궁백은 지금 무림맹의 맹주로 있는 인간인데?"
해연은 무거운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그 누구보다 악승의 강직하고 외골수적인 성격을 잘 아는 해연이었다.
그렇다고 악승이 너무 매사를 서둘러 실수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항상 괴상한 행색을 하고 기행을 하는 악승이지만, 누구보다 현명하고 치밀하며...
모든 것을 철저하게 처리하는 악승이었다.
개방의 존재가요즘와서 더욱 더 부각을 나타내는 것도 바로 악승이라는 기인이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음..."
해연이 묘한 침음성을 흘리자 남궁백이 억지로 분노를 가라앉히며 입을 열었다.
"악노협, 만약 증거를 대지 못하면 내 명예를 위해서라도 마땅한 조치가 취해져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오."
악승은 코웃음쳤다.
"명예? 얼어죽을 명예는 좋아하는군."
남궁백의 성성한 눈썹이 무섭게 진저리쳤다.
"말씀이 지나치오! 내 평생을 살아오면서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다고 자부하는데..
대체 악노협은 무슨 이유로 날 처절하게 매도할 수 있단 말이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악승은 차갑게 남궁백을 노려보다가 품 속에서 한 장의 양피지를 꺼내 군웅들 앞에 흔들었다.
"이건 구절연환진의 파해진도다! 여가에 쓰여진 필체가 남궁백 당신의 것이 틀림없지!"
악승이 양피지를 던지자 해연이 놀란 듯 받아쥐고는 살펴보았다.
남궁백의 필체가 틀림없었다.
이어 구파일방의 장문인을 비롯한 여러사람들이 양피지를 보았고,
남궁백의 안면은 하얗게 질린 채 푸들거렸다.
악승은 오연하게 말을 이었다.
"신강의 흑곡에 당신이 십이비천신마를 가둔 것이 바로 이 구절연환진이다
. 그런데 당신의 서고에서 이 파해진도가 발견되었고
, 갑작스럽게 갇혀 있던 십이비천신마가 무림에 등장하여 파란을 일으키고 있는 점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
백의성자 남궁백은 두 눈이 찢어질 듯 뜨여진 채 전신을 가늘게 떨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악승은 남궁백을 차갑게 쏘아보며 말했다.
"나는 신강의 흑곡에 파괴된 구절연환진이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행해졌다는 것을 이미 조사했고,
추측하건대 바로 남궁백 네가 그들을 탈출하게 했던 것이라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
모든 군웅들이경악한 표정이었다.
"그, 그럴 수가!"
"하긴 십이비천신마가 어떻게 수십 년을 갇힌 그곳에서..."
남궁백은 수염을 덜덜 떨면서 주위를 바라보며 비교적 차분함을 보이려는 듯 조용하게 입을 열었다.
"믿지 않겠지만..그것은 완벽한 구절연화진을 파해해 보기 위한 연구로 진행되어 왔던 흔적일 뿐이오.
나는 결코 십이비천신마를 흑곡에서 탈출시킨 적이 없소이다."
악승이 냉소했다.
"그럼 누가 구절연환진을 깰 수 있단 말인가?"
"!"
남궁백은 말문이 막혔다.
구절연환진은 아홉 개의 진세가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에
파해 역시 아홉 개의 진을 동시에 해야 한다는 이론이 있는데
그것은 이론으로만 가능할 뿐이지 현실로는 불가능하게 알려진 진세였다.
그런 진세를 파해할 수 있는 파해진도가 남궁백의 서고에서 나타났고,
십이비천신마는 신강의 흑곡에서 나와 무림에 버젓이 활동하니
아무리 남궁백이라도 궁색한 변명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남궁백은 창백하게 질린 모습으로 악승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악승은 군웅을둘러보며 차갑게 외쳤다.
"백의성자라고? 웃기는 소리야. 그래..그래.. 겉은 백로처럼 흴지 모르겠지만 속은 까마귀보다 검고,
먹물처럼 음침한 위인 바로 남궁백 당신이다!"
군웅들은 모두긴장한 시선으로 남궁백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시선은한결같이 남궁백에게 확실한 해명을 요구하고 있었다.
비록 남궁백을존경하고 흠모하는 그들이지만, 악승의 존재 역시 남궁백 못지 않은 무림의 명숙
. 더욱이 악승이 노발대발하면서 남궁백을 몰아붙이는 것이 이유가 없지는 않다고 느끼고 있는 것이었다.
한동안 악승을바라보던 남궁백은 신음처럼 외쳤다.
"나는... 모르는 일이다."
"끝까지 발뺌을 할 셈인가?"
"발뺌이 아니라, 나는 절대로 십이비천신마를 탈출시키지 않았네."
"가소로운 수작이군. 그렇다면 나 악승이 다시 한 가지 증거를 제시해야겠군."
새로운 증거란말에 군웅들은 술렁거렸고, 남궁백의 눈썹은 꿈틀 경련을 일으켰다.
악승은 미묘한웃음마저 머금은 채 입을 열었다.
"삼천(三天)의 하나인 흑룡겁을 아는가?"
"!"
남궁백의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악승은 그 표정을 하나도 놓치지 않은 채 계속 물었다.
"남궁백! 과거 네가 십이비천신마를 제압한 무공이 바로 흑룡겁의 무공임을 인정하는가?"
"!"
남궁백의 표정이 이젠 돌처럼 굳어 버렸다.
웅성거리던 군웅들은 경악한 표정으로 모두 남궁백을 바라보았다.
악승이 괴상하게 웃었다.
"부정하겠다면... 여기 다시 증거를 보여 주겠다."
악승은 다시 품 속에서 한 장의 종이를 꺼내 해연에게 던졌다.
해연은 흠칫 종이를 받아쥐고는 떨리는 손 끝으로 종이를 폈다.
바로 냉검상이 남궁백의 서탁에서 발견 한 낙서였다.
〈흑룡겁의 무공은 삼천 중에..〉
해연은 믿어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서찰을 옆사람에게 넘기며 남궁백을 바라보았다.
남궁백은 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는데, 격렬하게 안면근육을 떨고 있었다.
악승은 대다수의 군웅들이 남궁백이 써놓은 낙서를 읽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가증스럽게도 네놈은 무림맹주의 위치를 악용하여 천마교를 징벌한다는 목적으로 군웅들을 출동시켰고,
몇 차례의 혈전 끝에 남은 것이 무엇이 있는가?
철저하게 천마교와 무림맹을 양패구상시킨 후에 너의 세력을 동원하여 천하패권을 한 손아귀에 움켜쥐려는
더러운 욕망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어디 내 말이 틀리면 틀린다고 반박이라도 해 봐라!"
남궁백은 극도로 창백해진 채 눈을 감고 있었고, 눈꼬리에는 눈물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자신의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물고만 있을 뿐이었다.
(기어코... 기어코...너는...나를 철저하게 배신하는구나.)
누구를 향한 말인지는 모르나 남궁백의 가슴 속에는 처절한 회한이 떠오르고 있었다.
군웅들의 웅성거림은 더해갔고, 사태는 심각하게 변했다.
악승의 조리있는 말과 철저한 증거, 남궁백의 침묵,
이런 것들은 군웅들로 하여금 이제까지 불변의 신뢰와 믿음의 상징이었던
남궁백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었다.
해연은 주변의공기를 감지하고 조용히 남궁백에게 말했다.
"남궁맹주.. 악노시주께서 한 말씀이 사실이외까?"
"......"
남궁백은 대답하지 않았다.
"진정으로 흑룡겁의 무공을 익히셨소이까?"
"......"
남궁백은 역시대답하지 않았다.
"십이비천신마를 풀어준 것이 사실이오?"
"......"
역시 묵묵부답. 그러나 대답하지 않는 남궁백 이상으로 해연은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는 기분이었고,
술렁대는 군웅들은 그 침묵을 시인으로 받아들인 듯 분노하기 시작했다.
"남궁맹주! 해명을 해주시오!"
"진실을 밝히시오, 진실을!
지금 천마교의 악노들이 이 산 아래 진을 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 아니오!"
"거짓은 순간이지만.. 진리는 속이지 못하는 법이오!"
웅성대는 군웅들의 음성이 커지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돌연히 남궁백은 벌떡 일어나 눈을 뜨고 앙천광소를 터뜨렸다.
"으핫핫핫핫핫!"
한동안 굉량한웃음을 터뜨리던 남궁백은 돌연히 웃음을 그치면서 무섭게 두 눈을 부라렸다.
"노부가..."
남궁백의 음성이 떨어지자 회의청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 정적을 깨뜨리며 남궁백의 음성은 이어졌다.
"그 옛날 흑룡겁의 무공을 익힌 것은 사실이오
. 그러나 수단방법이 너무 잔인하고 섬뜩하여 중도에서 중단했소이다."
"저, 저럴 수가..."
"흑룡겁의 무공을 익혔었다니.."
군웅들은 무섭게 술렁댔다.
악승은 미묘한 표정으로 남궁백을 응시하고 있었다.
남궁백은 다시 말을 이었다.
"그렇소. 그대들이 의심하는 것도 부정하지는 않겠소
. 천하의 백의성자 남궁백이 흑룡겁을 익힌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는 것만도 여러분들은
크나큰 배신감을 맛보았을 것이오. 그러나.. 그 이유는 혼란을 막기 위해서였소.
만약 내가 흑룡겁의 무공을 익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무림에 파급될 혼란을 어찌 감당하겠소."
"......"
"그러나 분명한 것은! 노부가 십이비천신마를 흑곡에서 풀어준 적이 없으며,
또한 천하패권을 장악할 의도 역시 조금도 없었다는 것을 밝히겠소!"
악승의 눈썹이꿈틀했다.
"그럼, 네 서고에서 나온 이 서류를 어떻게 해명할 것이냐?"
남궁백은 말했다.
"해명할 길이 없소. 하지만 내 평생을 살아오면서 쌓아온 인격으로 밖에는 증명할 수 없소."
악승은 콧김을싱 뿜어냈다.
"웃기는 수작 말아라! 네가 살아온 것이 모두 위선의 덩어리인데 그걸 어떻게 믿으란 말인가?"
남궁백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악승을 응시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내 말을 믿을 수 있는가, 악승?"
"......"
순간적으로 악승은 답변을 하지 못한 채 허연 눈썹만 꿈틀거렸다.
악승은 잠시 남궁백을 보다가 군웅들을 한 차례 훑어보았다.
그리고 다시 남궁백을 보면서 말했다.
"노부가 남궁백 너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항상 존경해 왔었다.
그러나 이 모든 행동이 위선이었음을 알았을 때 노부가 느낀 배신감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노부 뿐만 아니라 여기 모인 모든 사람들이 처절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
"배신의 상처가 너무 크고 깊은데 너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남궁백이 말했다.
"다시 한 번 묻겠소. 어떻게 하면 믿을 수 있겠소."
악승이 대답했다.
"남궁백! 너의 진실을 믿으려면 네가 죽는 수밖에 없다!"
"!"
남궁백의 표정이 흔들렸다.
죽음(死). 말로는 간단하다.
하지만 죽음이란 살아 있는 인간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야망도 욕망도...
모든 행복과 슬픔..
기쁨을 잃어 버리는 것이 아닌가?
또한 모든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 믿는 것처럼 남궁백의 위선도 죽음을 맞이한다면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닌가?
남궁백은 빈 공간을 허허로운 눈길로 응시하면서 중얼거렸다.
"허허... 이것이 평생을 의(義)를 추구하며 살아온 내게 마지막으로 선택하게 하는 것인가?"
남궁백의 음성은 너무도 허무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아무도 남궁백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지는 않았다.
남궁백은 옆의해연을 바라보았다.
"해연, 말해 보게. 과연 내가 죽어야만 나를 믿을 수 있겠는가? 그대도 나를 못 믿는가?"
해연선사는 침통한 표정으로 말했다.
"증거에 대한 명확한 반박을 해 주신다면 소승은 죽는 한이 있어도 맹주를 변호할 것이오."
결국은 해연도적절한 해명을 원하는 것이었다.
"크핫핫핫핫핫--"
남궁백은 앙천대소를 터뜨렸다.
미친 듯이 웃어제치는 그 소리에는 자욱한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이번 일을 꾸민 자를 나는 알고 있다. 그러나 그 자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것이 내 마음..
내 마음이 나는 너무도 아프고 참담하다.
그러나 더 나를 아프게 하는 것은 한 인간을 믿어 주지 못하는 이 세태다.
내가 지난 날 추구해 오며 걸어 왔던 길이 이처럼 허무할 줄은 정말이지 몰랐다."
남궁백은 돌연히 무서운 정공이 뻗치는 시선으로 악승을 무섭게 쏘아보았다.
"악승, 정말 내가 죽어야 믿겠는가?"
"그렇소."
순간 남궁백은비장한 표정으로 허리에 차고 있던 패검을 뽑았다.
챙!
맑은 쇳소리와함께 투명한 칼날이 요요한 빛을 뿌리며 드러났다.
"악승! 당신은 분명히 강직한 노영웅이나 너무 단순하오."
악승의 안면이꿈틀했다.
남궁백은 옆의해연을 보며 말을 이었다.
"해연...그대는 명석하나 너무 융통성이 없다.
더욱이 구파일방을 털어보아도 인재가 없으니, 이제 천하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남궁백은 말과함께 검을 들어 그대로 자신의 심장에 쑤셔박았다.
푸욱!
한 자가 조금 안될 것 같은 칼은 마치 부드러운 여인의 혀처럼 남궁백의 심장을 애무하듯 깊숙이 파고들었다.
"!"
"!"
비록 죽으라고강요했지만 군웅들은 남궁백이 진실로 죽음을 택하고 자결을 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않았다.
모두 놀람의 충격으로 눈을 부릅뜰 때, 남궁백은 전신을 격렬하게 떨면서 비틀린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것이.. 나의 결백한.. 증거다.."
그리고는 남궁백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쿵!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화적인 영웅은 그렇게 쓰러졌고, 그의 죽음은 흥건한 핏물과 정적만을 남겨놓았다.
악승은 얼어붙은 듯 쓰러진 남궁백을 바라보았고, 해연은 급히 몸을 날려 남궁백의 맥을 짚어보았다.
해연은 비통한얼굴로 고개를 들더니 군웅들을 향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숨이.. 끊어졌소."
군웅들은 차마사태가 이럴 줄 몰랐다는 듯 웅성거렸다.
해연은 허공을우러러보며 한스러운 개탄을 터뜨렸다.
"이제야 알았소. 맹주는.. 결백했소. 우리가 어리석었소. 너무도 성급했소.
우리의 순간적인 오해가 진정한 시대의 영웅이며 의인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것이오.
우리는 역사의 죄인이 된 것이오."
상황이 이렇게되자 제일 경악한 사람은 아무래도 취선개 악승이었다.
"이, 이럴 수가...이럴 수가..."
악승은 설마 이런 결과가 오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남궁백이 어쩔 수 없이 본직을 드러내리라 믿었는데, 이처럼 쉽게 죽음을 택할 줄은 상상도 못한 일이었다.
인간의 속성 중에 야비함은...
무엇인가 불행이 덮쳐왔을 때 그 불행의 원인을 한 사람에게 몰아 버리기를 좋아한다.
당연히 이 상황에서 그 화살은 모두 악승에게 쏟아지게 되어 있었다.
군웅 중에 곤륜파의 후기지수 한 사람이 벌떡 일어나 외쳤다.
"악노선배! 당시의 외골수적인 성격으로 말미암아 진정한 의인을 죽게 한 것이오!"
그러자 이곳저곳에서 이구동성으로 동조하는 외침이 터져나왔다.
"맞아! 저 늙은이가 원흉이야!"
"저 늙은이가 남궁맹주를 죽게 했다!"
악승은 수염을덜덜 떨면서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지 몰라 당황했다.
많은 군웅들은 자리를 분분히 차고 일어나면서 악승을 금방이라도 요절낼 기세였다.
그때였다.
무림맹주의 내총관 직하의 부장 한 사람이 안으로 뛰어들어 오면서 사색이 된 채 외쳤다.
"처, 천마교의 전면 공격이 시작됐습니다..여. 여덟 개의 방위로 나누어서
새.. 새까맣게 전면 공격을 해 오고 있습니다."
해연이 벌떡 일어났다.
"전면 공격을.."
그러자 군웅들은 악승을 향해 손가락질을 하면서 외쳤다.
"남궁맹주가 죽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공격해 오는 것은 아무래도 수상하다!"
"저 악늙은이가 뭔가 수상하다!"
"천마교와 내통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잡아서 족쳐봐야 한다!"
악승을 향해 입에 담지도 못할 말들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순간 악승의 안면이 무섭게 일그러지면서 한 소리의 대갈성이 터져나왔다.
"갈!"
악승의 발악적인 외침은 어느 정도 소란을 멈추게 했다.
악승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이백 세가 넘는 노부다! 네놈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이 천하무림을 위해 노력해 온 나다!"
"......"
"내 비록 남궁백을 공박하여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그것은 엄연한 증거가 있기 때문이다!
나 역시 그를 좋아 했기 때문에 느꼈던 배신의 분노가 더욱 컸던 것이다!"
"......"
"......"
"그러나 네놈들은 무엇이냐?
기껏해서 군중심리에 이끌려 마지막 순간까지 남궁백을 믿지 않았던 것이 아니냐!
그러나... 부정하지 않겠다. 남궁백의 죽음이 노부의 탓이라는 것을.."
악승은 자신을도와 남궁백을 조사하는데 큰 힘이 되었던 축융방주 단리극을 돌아보았다.
단리극은 비통한 표정으로 악승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은 악승에 대한 신뢰와 믿음으로 더욱 아프게 빛나고 있었다.
악승은 군웅들을 둘러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 원한다면 죽어 주마! 그러나 천마교와 합작했다는 그런 억울함은 벗어야겠다.
노부가 평생 추구해 왔던 것이 무엇인가 네놈들에게 똑똑히 보여 주겠다
. 밀려오는 천마교 안으로 뛰어들어 숨결이 끊어지는 그 순간까지 한 놈이라도 죽여 버리고 나도 죽겠다.
내 죽음의 동반자로 천마교를 택하겠다!"
비장한 어조로외친 악승은 단리극에게 말했다.
"단리극, 네가 아끼는 벽력탄 몇 개만 주었으면 좋겠네."
"노, 노선배.."
"남궁백이 그랬듯이...나도 이게 최후야.
죽을 때를 알고 죽는 것도 어쩌면 여한이 없지 않겠나? 살 만큼 살았고..."
"노선배!"
단리극은 처절한 눈물을 흘렸다.
"어서 주게!"
악승의 외침에단리극은 품 속에서 검은 가죽주머니 속에 들어 있는 벽력탄을 악승에게 넘겨 주었다.
악승은 벽력탄을 받아쥐고는 쓰러져 있는 남궁백의 시체를 보았다.
(미안하다, 남궁백!)
그리고는 이내몸을 돌려 누가 말릴 사이도 없이 그대로 회의청을 빠져나갔다.
그가 사라지는모습은 이 세상의 영웅 한 사람이 죽어 가는 최후의 모습이었다.
군웅들은 이 돌연한 변화에 웅성거리기만 할 뿐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이때 무당의 장문인 태허가 외쳤다.
"무량수불.. 여러분 지금 천마교가 공격해 오고 있는 상황이오. 이럴 시간이 있소이까?
어서 맡은 위치로 돌아가 적을 막아야 합니다."
그러자 군웅들은 정신이 번쩍 든 듯 서둘러 회의청을 빠져나갔다.
......
모든 사람이 회의청을 빠져나갔지만 해연은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남궁백의 시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뭔가?)
해연선사의 두눈은 공허가 가득했다.
(이게 소위 정파의 단결력인가? 설혹 실수가 있다 해도 서로 믿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
해연선사는 암울한 시선으로 고개를 저었다.
(지주를 잃었어. 우리는 졌다. 우리의 정점이던 두 영웅을 잃었는데..)
해연의 귓속으로 천마교가 밀려오는 함성 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 * *
정사대혈전의 결과는 이미 남궁백의 죽음으로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구심점이던 맹주를 잃은 무림맹의 인물들은 그야말로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취선개악승의 죽음으로 막은 북쪽에서만 조금 버틸 수 있었을 뿐,
무림맹은 둑 터진 물길처럼 순식간에 천마교의 검과 도 아래 짓밟혀야 했다.
너무도 처참한 결과였다.
구파일방의 인물들은 겨우 몇몇 살아남은 사람들을 이끌고 도주했고
수백 년 전통을 이어온 명문 화산파는 천마교의 말발굽 아래 폐허로 변해 버린 것이었다.
더욱이 비천마방과 천탁의 마왕 사루후의 세력들은 천마 교도들보다 더욱 잔인하게 화산파를 짓밟았다.
죽음과 파괴만이 남고...
화산파는 그렇게 붕괴되었다.
일천 명 무림맹의 고수들이 제대로 손 한 번 쓰지 못하고 지리멸렬 허물어진 것이었다.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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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잘봅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 드립니다
선두자가 없으면 아무리 잘~싸워도 이기지 못하는법??
즐감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