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달리 수국을 생각하는 밤
박숙경
카페인에 덜미를 잡힌 잠이 흔들리자
신이 난 초침들이 저벅거리며 방안을 휘젓는다
엎드렸던 적막이 흩어진다
가랑이 사이에 자리를 잡은 노묘(老猫)
색이 바랜 분홍 코를 앞발로 감싸고
뒷다리를 한 껏 뻗어 깊은 잠이 들었다
나는 누운 채로 몸을 일으켜 앉아
등을 쓰다듬은 후 이마에 뽀뽀를 한다
따뜻해진 손으로 짚은 이마는 싸늘하다
괜히 가려운 손가락은 어디에 둬야 할까
오늘 밤 나를 스쳐 지나간 별의 이름은 무엇일까
허기진 시간을 비켜가는 방법은 있을까
자, 이쯤이면 꼬리가 꼬리의 꼬리를 무는 시간
그래도, 살아 숨 쉬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
나름 긍정적인 밤의 고요와
이미 자정의 모퉁이를 돌아온 쓸쓸한 생각은 반비례
문득 나에게 다가왔던 말과
내게서 멀어져 간 말을 떠올리며
비바람 치던 종달리를 생각한다
-『문예연구』(2022년 봄호)
- 이 계절의 문학 시평
- 없음과 있음이 공존하는 중첩의 세계
여기 "오늘 밤 나를 스쳐 지나간 별의 이름은 무엇일까"로 집약되는 시가 있다. 시의 언어는 놓이는 위치와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다르게 읽히기도 하고, 정반대의 진폭을 형성하기도 한다. 윤동주는「서시 」에서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로 노래했지만, 이 작품에서는 오늘 밤 나를 스쳐 지나간 별의 이름을 다시 묻는다. 바람에 스쳤던 별의 입장에서 나를 스쳐 간 별의 이름으로 전이된 독특한 상상력이 눈에 띈다. 그래서일까. 이 작품은 처음부터 끝까지 화자의 몽상적인 의식에 무게를 두고 읽을 때 시가 더욱 재미있어진다. 우선 화자는 "카페인에 덜미를 잡힌 잠”에서 이 시의 내용을 전개한다. 이 작품에서 카페인은 잠과 상반된 긴장감을 형성한다. 일반적으로도 카페인이 다량 함유된 커피나 차, 코코아 등의 알칼로이드 성분은 각성효과를 일으키는 의약품으로 분류된다. 물론 카페인의 민감도에 따라 다르겠지만, 어쨌든 화자는 지금 그 카페인으로 인해 어떤 불안감을 경험하고 있다. 그 불안한 감정은 2연에서 집약되어 나타난다. "가랑이 사이에 자리를 잡은 노묘
"는 화자의 상태와는 별개로 "뒷다리를 한껏 뻗어 깊은 잠"에 빠져 있다. 그러니까 화자와 노묘는 얼핏 서로 다른 혼몽을 형성하는 것이다.
화자는 노묘가 잠에서 깨지 않게 누운 채로 몸을 일으켜 앉는다. '누운
채로 몸을 일으키는' 행위 자체가 문법상 서로 양립할 수 없는 행위이지만, 어쨌든 화자의 정신과 몸은 그렇게 분리된 상태로 독자에게 인식된다. 그런 이유에서 보면 “따뜻해진 손으로 짚은 이마는 싸늘하다”라는 표현 또한 같은 맥락에서 해석된다. 마치 몸살과도 같이 뜨겁고 추운 모순의 육체를 화자는 지금 경험하는 것이다. 주목할 점은 그 감정의 모순
이 어디에서 발생하는지에 대한 화자의 물음이다. 그 시적 논리를 따라
가다 보면, 어느새 "비바람치던 종달리"가 나온다. 종달리는 제주도 구좌읍에 위치한 마을이다. 예로부터 인재가 많이 출생한다고 하여 마을의 물혈을 의도적으로 끊어 놓았던 곳 중 하나다. 진시황의 수하였던 고종달이 제주에 내려와 자신의 이름과 같은 마을 이름을 전해 듣고는, 몹시 화가 난 상태로 종달리의 물혈부터 끊었다는 이야기가 이곳 마을의 대표적인 전설로 전해지기도 한다. 화자는 그 물혈이 끊긴 종달리에서
'물을 담은 항아리'라는 꽃말을 지닌 수국을 생각한다. 화자는 옛 전설이 스민 종달리에서 "그래도 살아 숨 쉬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야"라고
되묻는다. 이것은 마치 "색이 바랜 분홍 코를 앞발로 감싸고" 깊은 잠에 빠진 노묘의 이미지로 다시 연결되면서, 결국 카페인에 덜미 잡힌 화자와 노모가 사실은 하나의 개체이자 시의 중첩을 이루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이제 화자는 독자들의 걱정과는 달리 "나에게 다가왔던 말과/ 내게서 멀어져 간 말"을 떠올리며, 비바람 치던 종달리를 빠져나온다. 있어야 할 것들은 있는 곳으로, 없어야 할 곳은 없는 곳으로 되돌아가는 중이다.
이렇듯 없음 있음이 공존하는 중첩의 세계는 일상생활 속 자아의 균열과 다양성을 확보해 주는 매개가 되기도 한다. 컴퓨터의 비트나 물리학의 양자 역할 또는 노자의 유무상생의 원리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그렇게 시는 있어야 할 곳에 있고, 없어야 할 곳에서는 없음의 있음 방식으로 존재한다. 그 과정에서 파생되는 중첩과 환승의 방식이 비록 우리에게 고달픈 삶이 될지라도, 어쩔 것인가. 길고 짧은 것은 언제나 대어 보아야 아는 것을. 그런 다음에라야 길고 짧은 것 또한 하나의 삶이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을.
- 김정배
2019년 제18회 시인동네 신인문학상 평론 등단.
제1회 백인청춘예술대상 수상.
현재 인문밴드 '레이'의 멤버이면서, '오른손잡이지만 왼손 그림' 작가로 활동 중.
현재 원광대학교 융합교양대학 조교수.
시평집 『나는 시를 모른다』, 비평집 『라그랑주 포인트에서의 시 읽기 』 , 포토 포엠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는 하루 』 『사진이라는 문장』 사진이라는 문장, 왼손 그림 시화집 『이별 뒤의 외출」 등이 있음.
- 계간 『문예연구 』 (2022,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