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산행일자 : 2011. 07.16~17(무박산행)
○ 산행날씨 : 아침엔 박무현상. 오후엔 30도가 넘는 엄청난 더위
찌는듯한 무더위, 살이 다 익는듯 함
○ 참석인원 : 봄.여름.가을.겨울산악회의 37명과 함께
○ 산행거리 : 도상거리: 21.2㎞/ G.P.S 거리 24km/ 9시간 30분소요
○ 산행코스 : 오도재-335.5봉(국사봉)-파청재-방장산-이드리재-배거리재-주월산
-무넘이재-초암산 삼거리-광대코봉-주월봉(삼각점)-고흥지맥 분기점
-모암재(천지고개)-존제산-KT송신소-주릿재-485.5봉-민가-석거리재
○ 소 재 지 : 전남 보성군 겸백면,율어면,조성면,벌교읍/순천시 외서면
2주일 넘게 비가 와도와도 너무나 많이온다. 마치 하늘에 구멍이라도
난것처럼... 우리도 작업현장이 많이 스톱이 된다.
직업상 외부에서 하는 일도 많고 특히 방수공사 같은 것은
올스톱이다. 그래 피곤한 육신 좀 쉬라고 하는 天心인데
그 어이 거역하랴... 지난주에 허리가 삐끗하여 생긴 허리
통증이 지난 일욜(10일) 금북정맥구간에 성거산 공군부대 우회로
내려오는 길에 엄청나게 내린 비로 인해 미끄러운 길에 또다시
한번 더 다친게 참으로 힘이들어 한의원에 가서 침맞고 부항뜨고
死血하고 나니 조금은 나은 것 같다. 조금 한가한 시간에 부가세
신고하고 5년전에 읽었던 소설 “태백산맥” 삼매경에 푹빠진다.
내가 요즘 타고있는 호남정맥 길이 소설의 주무대가 되는 벌교,
율어지역이다보니 더욱 더 이해가 잘되고 산을 조금 더 알고 싶기에...
전라도 말로 비가와도 정말 징하게도 온다. 그러나 그래도 토욜밤이면
또다시 베낭을 메고 집을 나서겠지... 그 넘의 역마살 땜에 ㅋㅋㅋ
지난 목욜 동아일보 인터뷰에 작가 최 인호님의 글이 참으로 가슴에 와닿았다.
꽤 오래된 세월에(정확한 시기는 모름) 청계산 등산로에서 한번 뵌적이 있었는데...
암 투병중에도 요번에 새로운 소설을 발표했던군요, 손톱이 빠지면서도...
에전에 그 분이 쓴 소설 “길 없는 길”의 주인공 경허선사의 禪詩가 가슴에 닿는다.
‘世與靑山何者是(세여청산하자시) 春光無處不開花(춘광무처불개화)’
(세상과 청산은 어느쪽이 옳은가. 봄볕있는 곳에 꽃피지 않는 곳이 없더다)
속세는 청산이다. 친구냐 적이냐, 여당이냐 야당이냐 네가 옳냐 내가 옳냐
시비를 따지고 들지만 봄볕만 잇으면 어다든 다 꽃이 핀다는 뜻이다.
그렇다 세상사 사는것 정말 별것 아닌데 나부터 왜 이리 아둥바둥 사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때가 많다. 토요일 비만 그치면 시작해야 할 현장을 점검하고
부지런을 떨면서 베낭을 챙겨 양재역을 나가는데 시간이 상당히 촉박하다
피곤이 몰려온다. 차에 올라 잠을 청하는데 왠인인지 잠을 청할수가 없다.
눈만 말똥말똥... 다행히 비는 그치고 버스는 새로 생긴 전주~순천간 고속도로
양전 휴게소에서 휴식을 취하고 순천시내를 지나 순천~벌교간 국도를 거친다.
태백산맥에 나오는 순천에서 벌교 넘어가는 진트재를 지나 벌교시내를 거치지
않고 우회하여 중도 방죽길 앞으로 생긴 우회하여 벌교 삼성뱡원 옆과 염 상구가
일본 순사를 살해하고 소록도로 도망가면서 넘었던 뱀골재를 옆으로 조성으로 넘어간다.
조그만 면소재지 조성은 아직도 깊은 잠에 빠져있다. 잠시후 예당 저수지를 지나
2번 국도와 이별하고 겸백으로 들어가는 2차선 도로를 접어들어 오도재에 도착한다.
오늘 산행구간 지도와 고도표
오도재(04:10)
845번 지방도가 지나가는 전남 보성군 득량면과 겸백면의 경계에
있는 고개이다. 새벽 4시에 도착하여 산행 준비를 하는데 이른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습도로 인하여 상당히 몸은 무겁고 거기다가 한숨도 잠을
자지 못한 탓인지 몸은 엄청나게 무겁다. 오늘 산행이 힘듬을 예고한다
새로온 버스가 들머리에서 100m 지나서 내려주는 통에 다시 빽하여 산행을
시작한다.
오도재 이정목
국사봉(355.5m:04:35)
언제나 처음이 다 그렇듯이 25분간 빡세게 치고 오르다가 부드러운 산길로
접어드니 오르니 지도상에는 355.5봉 이라고 표시되어 있는 곳에 국사봉이란
이정목이 세워져 있고 언제나 반갑게 산에서 맞이하는 준.희님 아크릴판이 나타난다.
습도가 얼마나 높고 더운지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잠깐사이에 상의는 벌써 땀에
흠뻑 다 젖어 버린다.
파청재(坡靑峙 270m:05:05)
산행 1시간여 만에 파정재에 도착하여 간식으로 원기를 보충하며 10여분간의
휴식을 취한다. 음력 유월 열이렛날의 새벽달은 아직도 하늘에 걸쳐있고 이젠
날이 밝아져 헤드렌턴을 꺼서 베낭속에 집어 넣는다.
보성군 겸백면과 득량면을 잇는 고개로서 파청(坡靑)마을에서 이름을 따온 듯
하며 파청마을은 뒷산에 보살들이 사찰을 건립하였는데 절에 빈대가 하도 많아
타 지역으로 옮기면서 마을이 페할것이라 하여 파청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정맥길에도 아침은 밝아오고...
음력 유월 열이렛날의 새벽달
파청재에서 방장산 정상까지는 방장산 정상에 KBS 순천 방송국 송신소가 있어서
정상까지 콘크리트 포장을 해놨는데 경사도가 만만찮아 오르는데 장난이 아니다.
차리리 흙이면 좋으련만... 무릎에 상당한 충격이 전달되는 느낌이다.
호동재(약수터 사거리:05:30)
물을 얻어야 한다는 소원으로 마을명을 호동(湖洞)으로
개칭하여 현재까지 불러오고 있단다.
방장산(方丈山:535.9m:05:35)
보성군 겸백면과 조성면 그리고 득량면 등 3개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이다. 정상에는 KBS 순천방송국 송신탑과 삼각점. 옆에 넓은 공터 있다.
이 산이 방장산이라 부른 연유를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어 안타깝다.
방장(方丈)이란 불교에서 주지 또는 스승의 존칭으로 쓰이는 용어로 원래는
사방이 1장(약 3m)이 되는 넓이 또는 그 넓이의 방을 뜻하는 말이었으나,
유마(維摩)거사가 거처하는 방이 일장사방(一丈四方)이었다는 중국의
《유마경》의 고사에서 사방으로 1장이 되는 승려의 방을 의미하게 되었다.
또한 방장은 법력이나 도력이 뛰어난 승려를 가리키기도 하였으며 지금은
주지나 스승의 뜻으로 널리 쓰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방장이 있는 사찰로는
영축총림의 양산 통도사. 해인총림의 합천 해인사,조계총림의 순천 송광사,
덕숭총림의 예산 수덕사, 그리고 고불총림의 장성 백양사가 있다.
* 총림(叢林)이란 승려들의 참선 수행도량인 선원(禪院)과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그리고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律員)을 다 갖춘 사찰을
총림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에는 5대총림이 있다.(빨간색은 삼보 사찰임)
파청재에서 방장산까지 30분간을 빡세게 오르니 정 KBS 순천 방송국 송신소가 덩그러니
정상을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박무로 인하여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후미 그룹들이 무신 일이 있는지 자꾸만 뒤처지는 모양이다. 후미를 기다리며
약간의 휴식을 취한다.
정말 오랫만에 그것도 아주 오랫만에 아침 해를 맞이한다
이드리재 (410m:06:20)
보성군 겸백면 수남리와 조성면 덕산리를 잇는 고개로서 옛날 어느 무당이 이 고개가
내(川)가 되어 흐를 것이다고 예언을 하여 '이냇고개'라 불렀는데 한자로 음차하여
이천치(?川峙)가 되었고 다시 세월이 흘러 '이드리재'로 부르게 되었다 한다.
다소곳이 피어 산꾼을 반기는 들꽃
이드리재를 조금 지나니 밀양 박씨 묘역이 나타나고 전망이 끝내 주는 곳이 나타난다.
박무로 인하여 잘 보이지는 않지만 득량만이 한 눈에 들어온다. 안개가 원망스럽기만 하다.
아련히 보이는 득량만과 그 넘어 고흥반도
저 넓은 들은 그 예전에는 전부 바다였는데 둑을 막아서 간척지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이곳을 지나가는 지명이 전부 물과 관련되어 있다. 이드리재, 배거리재,
주월산, 무넘이재 등등... 암 에전에는 이곳이 강이 아니면 바다였을까?
하긴 백두대간길에 구례의 고리봉은 배를 묶어논 곳이라 했고 낙남정맥길의 함안 여항산도
그와 같았으니... 고흥은 이 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사할 당시 노량대전에서 투입된 병사들이
고흥출신들이 가장 많았다고 한다. 해전 당시에도 고흥반도는 전략적 요충지였다고 한다
고흥은 옛 지명이 흥양으로 사면이 거의 바다를 끼고 있어, 전라도좌수영 5관 5포 중에
1관(고흥) 4포(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를 차지하고 있는 군사요충지였다.
▲ 고흥군에 있었던 1관 4포 옛 지형도
이순신 장군은 임진전란이 일어나기 1년(1591) 전에 전라좌수사로 부임하여 주로 고흥지역에 있는
1관 4포를 순회하며, 군비확충 및 판옥선을 개조해서 거북선을 만들기도 했다.
당시 1관 4포의 전력은 판옥선 11척과 발포진에 거북선 1척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수군 병력은
1100∼1400여 명으로 임진전란이 발발하자 옥포해전, 사천포해전, 한산도대첩, 부산포해전 등에
참전하여 왜선 330여 척을 격파햐였는데 그때에 아군 사상자 211명 중 131명이 고흥출신
수군들로 알려지고 있다.
이드리재에서 배거리재 지나가는 정맥길에는 나무에 온통 거미줄 투성이다.
이 포식자들이 거미줄을 쳐놓고 느긋하게 먹이를 기다리고 있다.
배거리재(06:30)
배거리재는 배가 걸렸다는 뜻인 듯 한데 자료를 찾아보니 옛 전설에 이 고개
밑까지 바닷물이 밀려와 이 곳에 배를 대어서 그런 이름을 얻었다 한다.
이곳 등로에는 군데군데 체육시설을 설치해놨다.
이곳 지자체에는 주민들을 상당히 배려를 한 느낌이 든다.
주월산 정상의 모습
이곳은 온 천지가 사방으로 트여있어 전망이 정말 멋진 곳인데 아마도
범여의 德이 모자란 탓인지 오늘도 안개의 비협조로 인해 아무것도 볼 수 없는게
그져 안타까울 뿐이다.
주월산 정상 활공장에서 휴식을 취한다. 잠을 못잔 관계로 자꾸만 몸이 무겁고
힘이든다. 그리고 일행들에게 계속 추월을 당한다. 이러다가 오늘 완주를 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다. 동료산꾼 김 준길님이 커다란 토마토 하나씩을 나눠준다.
저 무거운 것을 그리도 많이 가져와서... 저 분은 참으로버리는 즐거움을 아시는 분 같다.
그리고 낙안읍성에서 동동주, 파전,꼬막, 두부무침을 몽땅 스폰서를 하시고...
암튼 잘 먹었습니다... 山友님들을 즐겁게 한 보시공덕
먹었으면 쓰레기는 되가져가야지
주월산 쉼터옆에 먹고나서 버린 쓰레기가 상당히 눈에 거슬린다.
주월산(舟越山:558m:06:40)
보성군 겸백면과 조성면의 경계 능선에 있는 산으로서 배 舟, 넘을 越자를 써는데 옛날
큰 물이 들어 이 산으로 배가 넘었다는 전설이 있다.
그렇지만 아무래도 산의 형상이 배의 밑바닥처럼 둥글넙적해서 얻은 이름인 듯 하다.
국립지리원의 지도에는 배 舟 자를 착각해서 붉을 丹 자로 적어 단월산이라 적어 두었다.
한자를 잘못 해석한 것 같다. 주월산 바로 아래에는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 요시이라는
자가 1927년부터 10년간 1700ha의 개펄을 막아 간척지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주월산에서 무남이재 가는 길은 참으로 편하다. 보성군에서 등로관리도
잘되어 있고 거의 내리막 수준의 길이라 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범여의 다리는 자꾸만 무거워져만 가고 동료 산꾼들은 자꾸만
야속하리만큼 자꾸만 멀어져만 간다. 하긴 정맥 산꾼들이야 자기가 걷고
자기가 쉬고 하는 철저한 개인주의 성향이라... 약간의 오르내림을 거듭한 끝에
50여분만에 무남이재에 도착한다. 재에서 약간 아래에 떨어진 사유림 입구에서
아침밥상을 펼치는데 아무것도 먹고 싶은 생각이 없다. 일단 옆에 있는 게울물에서
세수를 하고 나니 조금은 나은 느낌이다. 버너에다 라면 하나를 끊여서 밥을 말아먹고
막걸리 서너잔을 하고나니 조금은 정신이 온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햇볕은 따갑기만 하다.
비 온뒤라 그런지 아기 영지들이 꽤나 많이 보이기 시작한다.
지나온 주월산의 모습
무남이재(340m:07:30)
보성군 겸백면과 조성면 경계에 있는 고개로옛날 득량바다에 해일이 일어 이 고개까지 바닷물이 넘쳐 '물넘은재'라 불렀다 세월이
흘러 부르기 쉽게 물애미재 또는 무남이재로 불리우게 되었다 한다.
주월산은 전후로 모두 물과 배와 관련된 전설과 이름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부터 보성군 겸백면과 작별을 하고 우측에 조성면과 좌측에 율어면을
경계에 두고 계속하여 정맥길을 걷는다.
무남이재 아래에 있는 사유림
무남이재에 도착하여 좌측으로 약간 내려오니 윤제림이란 사유림입구에
아침밥상을 펼친다. 너무도 힘이들어 아침밥 생각도 없지만 그래도
밥을 먹지 않으면 안되기에 일단 베낭을 벗고 옆에있는 게울물에
상의를 빨아 나무에 걸어놓고 세수를 한 다음에 아침상을 펼친다.
버너를 피워 라면하나를 끓여서 밥을 말아 먹는다. 잠을 못잔 탓인지
오늘은 초반부터 피로가 몰려온다. 이제 겨우 3분의 1밖에 오지 않았는데...
자꾸만 머릿속에 중간 탈출을 꿈꾼다. 아침식사후 평소보다 조금 더
휴식을 취하고 다시 베낭을 맨다. 이 길은 누가 대신 걸어줄 수 없는 길이기에...
동료산꾼 원일님의 밥상
무남이재에서 조금 늦게 도착한 원일님이 밥상을 펼치는데 우리는 기가 죽는다.
커다란 알미늄 밥상에다 의정부 부대찌게는 찌게도 아니다라고 외치면서
문산에서 공수해 왔다는 부대찌게에다 막걸이에 각종 안주 등등... 좀 특이한
산꾼이시다. 그리고 대단한 분 같다. 거기다가 어린아이 머리만한 DSLR 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동료 산꾼을 다 찍어주시고 정말 남을 위해 봉사하는 재미로
사시는 분 같다. 일반 산꾼들은 베낭 무게를 줄이기 위해 밥대신 조그만 떡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하신 분들도 많으신데... 대단해요. 그리고 커다란 보시공덕
복 받으실 겁니다. 길고 찌게에다 막걸리 잘 먹었습니다.
정맥 능선에서 바라본 율어면
무남이재에서 휴식을 겸한 아침식사를 평소보다 조금길게 30분정도에 마치고
광대코재 오름길은 조금전에 먹은 밥알이 입에서 나올정도로 힘이든다.
길이 그리 힘들지 않고 등로 관리도 참으로 잘되어 있으나 아무래도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아직까지 정상능선은 보이지도 않고... 몇번이고 주저 앉고 싶은 생각이다.
천신만고 끝에 능선에 오르니 옷이 벌써 땀범벅이고 체내에 염분이 부족한지 현기증이 난다.
35분에 도착한 초암산 갈림길. 거기서 우측으로 기수를 돌린다.
여기서 부터는 보성군답지 않게 등로관리가 되어 있지 않다. 마치 데리고 온 후처의 자식처럼.
광대코봉(613m:08:35)
35분 동안의 사투(?)끝에 지도상에 광대코재로 표시된 613봉에 오른다.
좌측에 있는 초암산의 영향인지 철쭉나무들이 즐비하다.
정상에는 삼각점이 있고 박 건석이 광대코봉이라고 붙여논 정상 표지판이 있다.
여기가 광대코재가 아닌 광대코봉이 맞은 것 같다. 재가 아닌 봉이니까
이곳을 왜 광대코라고 불리우는 이유를 알것 같다. 주월산에서 천당에서 지옥까지
뚝 떨어지는 느낌으로 무나미재까지 내려왔다가 다시 이곳까지 오르는데 너무나
힘들게 고도를 높이니까. 광대의 코가 튀어 나올 정도로 힘이들기 때문일까.
(범여의 생각中에서)
정맥 능선에서 바라본 보성군 조성면
광대코재에서 잡목을 헤치면서 능선길을 걷는다. 우측에 조성면 대곡리쪽이 보이고
보성C.C와 대곡제가 보이는데 저수지 모양이 마치 야구장의 그라운드처럼 보이는게
이색적이다. 전망은 끝내주는 곳이지만 저너머 고흥 앞바다는 끝내 박무의 방해로
인해 볼 수 없는게 안타깝기만 하다. 조금가니 앞서가던 산꾼들이 휴식을 취한다.
나도 베낭을 벋는다. 안부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그지없이 좋다. 여성 산꾼만
없다면 바지를 내리고 거풍을 즐기기엔 더 없이 좋으련만. 눈치없는(?) 총무님은
갈 생각도 안하고 계속 같이 있는 바람에 다시 베낭을 메고 길을 걷는다.
빨치산 활동이 심했던 안개에 휩싸인 존제산과 율어면의 연봉들
「보성의 모스크바」로 불렸던 율어는 당시 보성군 내에서 좌익세가 강했던 지역으로 꼽힌다.
그것은 빨치산들의 주둔지가 되었던 존제산을 끼고 있고 조계산에 잇닿아 있는 지형 탓으로
반란사건 이전에도 빨치산들의 활동이 활발했었던 때문이다.
율어는 소작인이 많아 계급적 갈등이 심했을 뿐 아니라 6·25때 전남의용군 부사령관을 지낸 김○○과
같은 열성적인 좌익들의 고향이었던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했기에 1946년 8월 15일 광복 1주년 기념식
때에도 2천에 가까운 농민들이 경찰관 1명과 우익인사 1명을 살해한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율어를 비롯한 산간지역은 당시 기관의 추적을 피해 숨어 들어온 사람들의 은신처가 되었고,
산으로 둘러싸인 율어의 상도지역은 자연히 많은 좌익들의 활동지가 되었다.
그들은 반란사건 전부터 칼과 같은 무기로 무장하였으며 면소재지를 제외한 마을단위를 모두 장악하고
있는 상태여서 경찰관들도 자기 보신 이외에 아무런 치안활동도 펼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율어는 이처럼 좌익세가 강했던 만큼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40여 일 간이나 그들의 지배하에 있을
수밖에 없었고, 12월이 되어서야 경찰 38명과 군병력 50여명으로 토벌작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밤에는 소위 밤손님으로 불리는 좌익들이 밥과 가축, 젊은 청년들을 잡아가고 낮에는
토벌대가 좌익에 협조한 자를 통비분자로 잡아가 이 지역의 희생은 컸다.
사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생존을 위해 죽이고 죽는 살상극이 연속되었던 것이다.
고흥지맥 분기점(09:15)
고흥지맥 (高興枝脈)
고흥지맥은 호남정맥의 존재산(x712m) 남쪽 2km에 있는 적지봉(赤地峰. 571m)에서 분기하여
남동진하며, 태봉(△325.2m), 가마봉(x258m), 장군봉(△412.7m), 삼봉(△107.3m),
혼백산(x183m), 천봉산(x193.1m), 소대방산(165m), 운암산(△484.2m),반월산(△291.0m),
수덕산(x301m), 오무산(△356.3m), 벼락산(x431m), 천등산(△553.5m), 우마장산(x342.8m),
유주산(△416.6m) 등을 일구고,지죽대교 앞 고흥반도 남단 남해바다에서 맥을 다하는 도상거리
약90.9km 되는 산줄기로 말한다.고흥반도를 남북으로 온전하게 종단하는 특수성을 고려하여
산이름이 아닌 지역이름을 따 고흥지맥이라 칭한다.